그리고 나의 마음 한켠에 남은 그날 오후
나는 여덟 살,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해였다.
가을의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운동회'라는 낯선 행사를 경험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운동회는 단지 학생들만의 이벤트가 아니었다.
학부모와 친지들까지 모두 초대되어 학교가 떠들썩할 정도였고, 마치 마을의 축제처럼 느껴졌다.
우리 가족을 포함해 정말 많은 어른들이 관람석에 앉아 계셨던 걸로 기억한다.
운동회를 한 달쯤 앞두고, 학교는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각 학년별로 연습이 이어졌고, 방과 후에도 운동장에서 줄지어 뭔가를 외우고, 춤추고, 달리곤 했다.
고학년은 마스게임과 율동을, 우리 같은 저학년은 색동옷을 입고 연지곤지를 찍은 채 '각시춤'을 연습했다.
그날의 프로그램 중 특히 잊을 수 없는 건, [엄마와 함께하는'포크댄스'시간]이었다.
운동회 당일 오전에는 반 친구들과 짝을 지어 각시춤을 추고,
오후에는 엄마 혹은 가족과 함께 파트너를 이뤄 추는 포크댄스가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일찌감치 엄마에게 이야기해 두었고, 엄마도 흔쾌히 약속해 주셨다.
"그럼, 오전에 잠깐 볼일 보러 집에 들렀다가, 포크댄스 시간엔 다시 갈게."
그 약속 하나만으로 나는 든든했고, 운동회를 누구보다 기다렸다.
엄마가 나와 함께 춤을 추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정해진 시간, 학교 정문 앞.
나는 운동화를 발끝으로 차며 엄마를 기다렸다.
한 사람, 또 한 사람씩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오는 부모님들 틈에서 나의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고, 운동장에서는 포크댄스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각자의 가족과 함께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무너졌다.
나는 제자리를 맴돌며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서러움이 아닌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약속을 믿었던 마음, 누군가 곁에 있어주리라는 믿음이 깨졌을 때의 공허함.
8살의 나는 그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울고 있던 내 앞에, 갑자기 운전기사가 운전하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어린 눈에도 그 시절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반짝이는 차였었다.
그리고 그 차 뒷문에서, 짙은 선글라스를 낀 세련된 한 여자가 내렸다.
그 시절의 엄마 또래쯤 되어 보였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얘야, 왜 여기서 울고 있니? 혹시 엄마를 잃어버렸니?"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여기서... 우리 엄마 만나기로 했어요..."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일단 차에 타자. 아줌마가 데려다줄게."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겁에 질린 나는 더 크게 울며 손을 뿌리쳤다.
"안 돼요! 여기서 우리엄마 만나기로 했단 말이에요!"
주변을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당황한 그녀는 말없이 내 손을 놓고 급히 차에 올라탔고 속도를 내며 사라졌다.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울다가 선생님이 나를 발견해 교실로 데려가셨다.
포크댄스타임은 그렇게 지나가버렸고 나는 오후 일정이었던 달리기, 줄다리기, 이어달리기에도
참가하지 않은 채 교실 한구석에서 놀라고 서러운마음을 가라앉히며 앉아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마주한 엄마는 내 울먹이는 얼굴을 보며 한참을 아무 말도 못 하셨다.
그제야 엄마는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셨다.
"미안하다, 아이고. 엄마가... 깜빡했네. 정말 미안해..."
그날의 엄마는, 나를 안고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날의 기억은 마치 오래된 낡은 흑백사진처럼 내 마음 한켠에 남아 있다.
가끔 가족들과 그때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가 일부러 복수한 거잖아. 다섯 살 때 내가 말도 없이 사라졌던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냐?"
하고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곤 한다. "내가 그때 그렇게 실종되었음 어쩔뻔했어?" 아니면 혹시
"그때 그 여자를 따라갔으면 나 지금쯤 부잣집 도련님이 되어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누나들이 어김없이 끼어든다. "야, 따라갔으면 외딴섬에 팔려갔을걸? 염전노예 몰라?"
우리는 그렇게 함께 웃으며 추억한다.
내 어린시절의 에피소드이지만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그리고 많은 부모들은 "설마 우리 아이가..."라는 생각으로 소중한 시간을 놓친다.
사회의 관심과, 부모의 세심한 교육 및 관찰과 책임감이 절실한 이유다.
지금도 많은 학교들이 이 맑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운동회를 준비한다.
나는 바라본다. 그 아이들에게 이 계절이 그 어떤이유의 서러움이 아닌 웃음으로, 눈물 대신 아름다운 기억으로 소중하게 남기를.
그 누구도 기다림 끝에 운동장 한켠에서 울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