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빠삐코, 그리고 라면 세 봉지
누가 알아봐 주는 눈동자 하나에,
무너졌던 마음이 천천히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그날, 빠삐코는 달았고,
노란 불빛은 따뜻했다.
벽걸이 선풍기는 목을 꺾을 때마다 삐걱거렸다.
정호는 바람에 펄럭이는 빈 용지를 눌렀다.
조용히 틀어둔 파출소의 라디오에서는,
88 올림픽 성화봉송 일정이 흘러나왔다.
“이름, 나이, 그리고 소속에는 학교랑 몇 학년 몇 반인지 적어.”
경찰이 펜을 건네며 말했다.
‘김정호, 13살, 진남국민학교 6학년 5반’
“오늘 날짜 적고, 은철이네 집에서 뭐 했는지 다 적으면 돼. 뭐 하면서 놀았는지, 뭘 봤는지.”
‘1988년 8월 6일. 저는 오늘 은철이 집에 놀러 갔습니다….’
정호는 펜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말로 할 수 없는 억울함이 손끝으로 모였다.
정호는 며칠 째 밥을 먹지 못했다.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팔을 펼친 채 누워 있었다.
쑥 들어간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천장을 바라보았고,
입은 벌어진 채 거칠게 숨을 쉬었다.
입을 다물 힘도 없어서, 마른 뺨이 턱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
그의 몸은 이미 영양실조 상태에 가까웠다.
그렇게 말라가던 어느 순간, 이상한 감각이 몰려왔다.
피부 안으로 끈끈한 점액이 천천히 찼다.
몸이 부풀며 바닥에서 점점 떠올랐다.
정호는 자신이 커다란 물풍선이 된 것 같았다.
감각은 무뎠고, 피부는 꺼끌꺼끌했다.
천정이 멀어졌고, 방바닥은 꺼졌다.
눈을 감자, 그 아래로 끝없이 가라앉는 어둠이 느껴졌다.
짙은 황색의 어둠이었다.
정호는 무언가에 끌려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는 두려움이 일어 눈을 떴다.
문득 떠오른 건, 집 아래 밭고랑에 버려진 애호박이었다.
일어나려 오른손을 짚었지만, 바닥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바닥은 허공에 한 뼘만큼 떠 있었다.
일어서니 발밑은 두꺼운 깔창을 붙인 듯 둔탁했다.
눈앞의 것들은 자꾸 멀어졌다.
그 애호박들은 수확시기를 놓쳐 밭 가장자리에 뿌리째 뽑혀 있었다.
8월 초의 뜨거운 햇빛에 녹아내리며, 고랑 속으로 푹 가라앉아 있었다.
껍질이 갈라진 틈으로는 점액이 흘러나왔고,
정호가 고랑으로 몸을 기울이자 파리 떼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는 덩굴을 헤치며 고랑을 뒤졌다.
누렇게 바랬지만 형태를 유지한 애호박 몇 개를 골라냈다.
숨은 가빴지만, 이상하게 덥지도, 땀이 나지도 않았다.
“정호야, 그 호박은 뭐 하게?”
마당 아상에 앉아 있던 집주인아주머니가 물었다.
“네? 그냥...”
정호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리 와 수박 좀 먹어라.”
쟁반에는 수박 몇 조각이 남아 있었다.
빨간 수박을 보자, 정호의 입안에 단맛이 떠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한 입 베어 물자, 차가운 물기만 혀를 스쳤다.
달지 않았다. 질감은 이상했다.
마치 젖은 종이를 씹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달콤함을 반길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정호는 애호박을 일정한 두께로 동그랗게 썰었다.
누렇게 상한 부분은 도려냈다.
그는 빈 내솥을 전기밥솥에 넣고, 취사버튼을 눌렀다.
버튼 위엔 종이를 끼워 눌러두었다.
비어 있는 내솥은 가벼워서, 버튼이 저절로 튀어 오르기 때문이다.
밥솥 바닥은 코팅이 벗겨져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그는 그 바닥에 콩기름을 부었다.
이 밥솥은 3년 전, 할머니가 떠나기 직전 마련해 준 것이었다.
두고 가는 손자의 끼니가 걱정돼,
가족에겐 사치나 다름없는 밥솥을 선물로 남기고 가셨다.
하지만 쌀은 비쌌고, 밥은 번거로웠다.
대신 라면은 쌌고, 더 빨랐다.
곤로에 석유를 채우지 못한 날이 많아,
밥솥은 주로 라면을 끓이는 데 쓰였다.
어찌 되었든, 밥솥은 손자의 끼니를 지켜주었고,
할머니의 염려도 조금은 덜어주었다.
다행히 전기는 끊기지 않았다.
사글세 단칸방이라 계량기는 따로 없었고,
전기세는 주인집과 머릿수대로 나누어 냈다.
정호와 아버지가 쓰는 전기라야
전등과 라디오, 그리고 이 밥솥뿐이었다.
주인집은 그 사정을 알았고,
전기세를 청구하지 않았다.
내솥의 기름이 달아오르자,
정호는 썰어둔 애호박 하나를 올렸다.
아무것도 입히지 않은 호박 조각이 기름에 닿자,
사납게 끓는 소리를 내며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수분이 증발하며 구수한 냄새가 퍼졌다.
정호는 나머지 조각들도 넣었다.
내솥 안은 순식간에 수증기로 가득 찼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익은 호박을 급하게 집어 먹기 시작했다.
고소한 기름맛 뒤에 은근한 단맛이 따라 올랐다.
그러다, 문득 씹던 입을 멈췄다.
그는 입을 벌린 채, 손을 바닥에 짚고 눈물을 떨궜다.
할머니가 떠올랐다.
계란을 푼 밀가루 반죽을 입히고
노릇하게 부쳐낸 애호박 전.
막 구워낸 첫 전을 후후 불어
정호의 입에 넣어주던 할머니.
푸짐하게 만들어 나무소쿠리에 담아
부엌 천장에 걸어두던 여름날.
다음 날이면,
노랗게 구운 전이 형의 도시락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배고픔이 사라지자, 그리움이 밀려왔다.
배를 채운 정호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애호박의 여운이 입안에 맴돌았고,
허기는 잦아들었지만 마음은 허전했다.
그때, 문득 바깥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호야! 우리 형이 수도터로 오래.”
은철이가 허겁지겁 나타났다.
정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철이를 따라 아래동네 공동수도가 있는 공터로 향했다.
성철은 중학생이었다. 얼굴이 벌게진 채 서 있었다.
그 옆엔 은철의 사촌 민식이도 나란히 서 있었다.
“너, 500원 가져갔지?”
성철은 말과 동시에 정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정호는 무릎을 움켜쥐다 그대로 쓰러졌다.
쓰러진 채, 다이얼 전화기 옆에 놓여 있던 500원이 떠올랐다.
그것을 보며 라면 다섯 개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함께 떠올랐다.
“은철이랑 민식이는 모른다는데, 너지?”
성철이는 주먹을 쥐고 다가왔다.
정호는 일어나지 못했다.
통증도 있었지만, 그보단 어지러웠다.
“너 우리 아빠가 경찰인 거 알지? 네가 가져간 거 맞지?”
“저… 안 가져갔어요.”
정호는 공허한 눈으로, 힘없이 겨우 말했다.
마치 말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거실 한가운데 은철, 민식 그리고 정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너희 셋이 오늘 집에서 놀고 나서, 여기 있던 오백 원이 없어졌어.”
은철이 아버지는 거실의 전화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도둑질은 나쁜 거야. 지금 말하면 용서해 줄 테니까, 누가 가져갔는지 솔직히 말해.”
말을 마치자, 그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세 아이는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담배 연기가 천장으로 뿌옇게 퍼져 나갔다.
커다란 괘종시계의 초침소리가 점점 커졌다.
정호는 심장이 쿵쿵 뛰었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아까 맞은 정강이의 통증이 무디게 다시 올라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은철이 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안 되겠다. 일어나. 파출소 가자.”
“정호야, 어디 가니? 은철 아빠, 정호 데리고 어디 가요?”
현주 엄마가 놀란 눈으로 정호를 바라보며 외쳤다.
정호는 고개를 숙이고 일행을 따르고 있었다.
앞에는 은철 아빠가, 뒤로는 은철, 민식, 정호가 차례로 따랐고,
맨 뒤에는 성철이 조용히 따라가고 있었다.
“애들이 집에 왔다 간 뒤에 돈이 없어져서,
버릇 좀 고쳐주려고 파출소 데려가고 있어요.”
은철아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네? 정호는 그런 애 아니에요. 정호 할머니 뻔히 알면서,
할머니 계셨어도 이렇게 하셨을 거예요?
정호한테 이러면 안 돼요.”
현주 엄마는 손의 장바구니를 바닥에 놓고 정호를 감싸 안았다.
정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들키지 않으려 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정호 왜 울어? 누가 때렸어?”
현주엄마는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현주엄마, 안 때렸어요. 잘못을 해도 남의 자식을 때리면 안 되죠.”
은철아빠가 현주엄마의 언성이 높아질까 염려하며 조심히 대답했다.
“매로 때리는 것만 때리는 게 아니에요.
도둑으로 몰려 생길 상처는 어떡할 거예요?
몸의 멍은 사라져도, 마음의 멍은 평생 가요.”
“애들 교육 차원에서 잠깐 데려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정호. 집에 가라.”
조서를 들고나갔던 경찰이 돌아와 말했다.
출구 쪽 대기 벤치에는 아까 함께 왔던 일행들이 앉아 있었다.
“삼촌, 잘못했어요. 허엉…”
민식이가 은철 아빠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며 빌었다.
“아까 솔직히 말했으면 용서해 준다고 했잖아.
이제는 경찰아저씨들이 알아서 하겠지, 삼촌도 몰라.”
은철 아빠는 민식의 머리를 톡 치며 말했다.
“너 인마, 감옥 보내려다가, 네 작은아버지 때문에 봐준 거야.
다음부터 거짓말하면 안 돼. 알았지?”
정호에게 진술서를 쓰게 했던 경찰이 민식에게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성철아, 애들 데리고 얼른 가. 더우니까 가면서 애들 아이스크림 사줘라.”
은철 아빠가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성철에게 건넸다.
정호는 일행과 함께 파출소를 나섰다.
길 건너 장군산 너머로 해가 걸려 있었다.
주변은 점점 누런 어둠에 잠기고
사물들이 눈에서 흐릿하게 멀어졌다.
발바닥 아래로 물풍선 같은 것이 불어 오르며 몸이 붕 떴다.
그는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손을 짚고 엎드리더니, 이내 구역질을 했다.
소화되지 않은 애호박이 바닥에 쏟아졌고,
그 위로 눈물이 누렇게 물들었다.
“먹고 싶은 거 하나씩 골라.”
성철이 말했다.
은철과 민식은 냉동고 문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뒤적였다.
“정호 너도 골라.”
성철이 맥없이 서 있는 정호에게 말했다.
“음… 형, 나 아이스크림 말고 라면 하나 살게요.”
정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뭐? 라면?”
성철이 되묻더니 이내 말했다.
“라면은 우리 집에 있는 거 줄게. 아이스크림 하나 골라.”
정호의 정강이를 걷어찬 일이 마음에 걸렸다.
정호는 초코맛 쭈쭈바, ‘빠삐코’를 집었다.
손바닥에 무디게 차가움이 번졌다.
그는 꼭지를 입에 물고 몇 번 돌리더니 툭 하고 따냈다.
달콤한 초콜릿 맛이 입 안에 퍼졌다.
그는 천천히 오물거리며 꼭지 안의 내용물을 모두 빨아먹었다.
갑자기 갈증이 일었다.
정호는 쭈쭈바를 앞니로 깊이 물고 길게 당겼다.
얼음덩이가 입 안에 가득 찼다.
혀를 굴리며 단맛을 한 번 더 음미하고는 꿀꺽 삼켰다.
차가운 얼음이 식도를 타고 꾸불꾸불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혈관을 따라 시원한 단맛이 발끝까지 퍼지는 듯했다.
“정호야, 아까 때려서 미안해.”
성철이 정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형.”
정호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정호는 성철이가 챙겨준 라면 세 개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라면 하나쯤 줄 거라 생각했는데, 세 개나 주어서 고마웠다.
아버지가 돌아와 계셔도 둘이서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일주일 전, ‘두 밤 뒤에 온다’며 외지로 목수연장을 챙겨 떠났다.
정호는 오늘은 아버지가 돌아와 있기를 바랐다.
골목길을 돌아 집을 올려다보니, 작은 창이 노랗게 켜져 있었다.
정호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그는 켜진 창을 보며 그 안에 있을 아버지의 그림자를 상상했다.
라면 봉지를 꼭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호는 시원한 저녁바람을 가르며, 집으로 가볍게 뛰어올라갔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가족 #기억 #아버지 #국민학교 #빠삐코 #쇠고기라면 #따뜻한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