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나날들 - 우리 집 이야기

달콤 짭조름한 오뎅볶음

by 따뜻한시선

두 벌의 수저와 오뎅볶음 한 접시.

정호는 할머니의 빈자리를 지키듯

조용히 식탁을 차렸다.




하늘만 보아도 행복한, 푸른 5월의 아침이었다.

햇볕은 비스듬하게 비치며 교실을 반으로 부드럽게 갈랐다.

교실 뒤편에선 학부모들이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삐걱대며 의자를 고쳐 앉는 소리가 하나둘 줄어들고,

곧 교실은 조용해졌다.

숨죽인 공기 속에서 조심스러운 헛기침이 한두 번 들려왔다.


정호는 햇볕이 닿지 않는 쪽, 복도 쪽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의 부산함이 일으킨 먼지가 볕 속을 천천히 떠다녔다.

그는 반짝이는 먼지를 조용히 눈으로 좇았다.


“6학년 5반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도덕시간은 부모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수업입니다.

‘우리 집 이야기’라는 주제로,

가족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나눠보겠습니다.”






‘우리 집 이야기’

정호는 발표 숙제 제목을 공책에 적었다.

손으로 턱을 괴고, 연필 끝을 다음 줄로 가져다 댔다.

무엇을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자, 연필을 고쳐 잡고는

공책 위를 가볍게 콕콕 찍기 시작했다.

심이 닿은 자리에 까만 점이 하나둘 생겨났다.

그는 지우개를 들어 그 점들을 문질렀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가족 이야기를 쓰면 돼.

아빠부터 가족 소개하고, 27쪽 예문 참고 해서 숙제해 와.’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도덕책을 펼쳤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생일을 축하하는 삽화가 있었다.

생일인 남자아이는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아빠와 엄마는 미소 띤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어린 여동생은 식탁 위 선물상자를 만지고 있었다.


정호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3년 전, 고모가 모셔갔다.

그리고 이어 두호형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부산의 신발공장으로 떠났다.


정호는 문득, 할머니와 함께 살던 때가 떠올랐다.






‘슥슥’

정호는 나무주걱으로 양은냄비를 젓는 소리에 눈을 떴다.

달콤한 오뎅볶음 냄새가 집안에 잔잔히 퍼졌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달달한 맛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정호야, 일어나 아침 먹자.”

두호가 정호의 머리칼을 넘기며, 귀를 살짝 당겼다.

정호는 부스스 일어나 이부자리를 구석으로 밀었다.

두호는 밥상다리를 펼쳐 방 한가운데 놓았다.


할머니가 부엌에서 창호 문턱 너머로 밥과 반찬을 하나씩 건넸다.

두호는 그것들을 조심스레 밥상 위로 옮겼고,

정호는 밥그릇 옆에 수저를 가지런히 두었다.


“애비야. 아침 묵자.”

할머니가 작은 방에 있는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미역국그릇을 담은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할머니는 오뎅볶음을 담은 접시를 밥상 가운데에 올렸다.


“오늘 두호 생일이야.”

할머니는 두호 앞에 홍합을 가득 담은 미역국을 내려놓았다.


“형, 생일 축하해요.”

정호는 두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할머니는 오뎅 조각이 몇 개 남은 양은냄비에 밥을 퍼 넣었다.

남은 양념에 밥을 비벼 정호에게 내밀었다.

오뎅볶음을 한 날이면 늘 그랬다.

그 밥은, 정호에게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맛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할머니, 아버지, 두호 그리고 정호.

네모난 밥상의 면을 하나씩 채운 네 식구의 행복한 아침 식사였다.






“저는… 어머니가 안 계셔서, 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정호는 말을 멈췄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꾹 쥐고, 고개를 숙였다.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시선들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도무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까 이를 꽉 물었지만,
턱이 가늘게 떨렸다.


“정호는 지금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죠.

하지만 예의 바르고, 공부도 잘하는 친구예요, 그렇죠?

용기 내어 발표한 정호에게 따듯한 박수 쳐줍시다.

정호, 자리에 앉아요.”


망설이는 박수 소리 사이로

교실 뒤편에서 어머님들의 짧은 탄식이 흘렀다.


자리에 앉은 정호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손가락이 부서질 듯 힘을 줬다.

울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정호에게 서글픔, 외로움, 억울함은

이미 오래전에 무뎌진 감정들이었다.

수없이 견디며 생긴 감정의 항체는,

그가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그러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만은

끝내 면역되지 않았다.

할머니의 웃음소리, 손등에 퍼진 검버섯,

방안에 잔잔히 퍼지던 달달한 오뎅볶음 냄새.


정호는 서러워서 우는 게 아니었다.

그저, 할머니가 그리워서 울었다.

그리고 그리움은,

어쩐지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 이렇게 저희 가족은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여동생 잘 돌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장인 준철의 발표가 끝나자,

밝은 박수소리가 교실을 가득 매웠다.


“자, 오늘 수업 마지막으로 정호와 준철의 ‘우리 집 이야기’를 잘 들어보았습니다.

부모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여러분도 없었겠죠?

항상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효도해야 합니다. 알겠죠?

이제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부모님들이 준비해 주신 다과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반장!”


교실 뒤편에서 어머님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접시에 빵과 과자, 음료가 하나둘 담겼고,

곧 학생들 자리마다 다과가 나뉘었다.

정호의 앞엔 짝꿍인 우현의 어머니가 접시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정호야, 맛있게 먹어.

괜찮으면 학교 끝나고 우현이랑 오늘도 집에 놀러 와. 알았지?”


“네,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정호는 마른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얌전히 숙였다.


우현의 어머니는 정호의 어깨에 손을 부드럽게 얹고, 한참을 곁에 있었다.

그녀는 이미 우현에게서 정호의 집안 사정을 들은 뒤였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예의 바르고 명석한 정호가 대견했고,

특히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않던 아들이

처음으로 친구를 집에 데려와 함께 웃고 노는 모습을 본 뒤로

그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정호가 발표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아이가 상처 입진 않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그런데 그가 입을 떼자마자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참는 뒷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정호야, 이거 슈크림빵 먹어봐.

아침에 엄마가 오늘 수업에 가져온다고 미리 사 왔는데,

이게 제일 맛있어.”

우현은 자기 접시에서 슈크림빵을 집어 반으로 갈라 건넸다.

그는 항상 자신의 것을 정호에게 아무렇지 않게 나누었다.

자신의 행복을 나누려는 그 순수한 마음은

한 번도 정호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다.


“이건 야채빵인가 보다.”

정호도 자기 접시의 빵을 반으로 갈라 우현에게 내밀었다.


“단팥빵이랑 소보루는 집에 또 있어, 이따 먹자.”

우현이는 눈썹을 살짝 올려 다른 아이들의 빵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마치 우리 둘만 특별한 빵을 먹고 있다는

비밀스러운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약간은 걱정스럽게 정호를 향해 웃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에 따뜻함이 묻어났다.


정호는 그 웃음을 보면 괜히 마음이 놓였다.

약간 매 부러진 콧대 위, 금테 안경 너머의

얇은 쌍꺼풀 눈동자는 조용하고 깊었다.

건강한 피부에 반곱슬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우현은,

정호 눈엔 꼭 동화책 속 아랍 왕자 같았다.


“가끔 너 보면 아랍왕자 같아.”


“뭐? 머리에 수건 두르고 뾰족한 신발 신는 거? 너나 해라. 하하하.”


“그건 나도 싫어. 크크크.”


“이따 집 가서 수건 한 번 둘러보자. 누가 더 아랍사람처럼 생겼나 보게. 크크크.”


두 사람은 눈을 마주 보다 웃음이 터질까

애써 참으며 킥킥거렸다.


둘은 5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지만,

그땐 특별히 친하게 지내진 않았다.

어울리는 무리가 달랐고,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었다.

하지만 6학년이 되어 짝이 된 뒤부터,

둘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금세 가까워졌다.



“우현아, 정호야. 학교 끝나고 맛있는 거 사 먹고 집에 와.”

참관수업이 끝난 후,

우현이 어머니가 500원짜리 동전을 하나씩 손에 쥐여줬다.


“우와, 엄마 웬일이야?”

우현이가 손바닥의 500원 동전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맙습니다.”

정호도 놀란 듯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정호와 우현은 학교를 마친 후,

진남마크사에 들려 장난감 구경을 한참 동안 하였다.

우현은 로봇장난감 하나를 샀다.

정호는 아카데미 타이거 탱크 프로모델을 한참 만지작 거리다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엄마가 준 돈으로 하나 사도 되잖아.”


“아니, 나중에 돈 모아서 더 큰 거 사려고.”


“아 그래? 그럼 오늘은 나랑 이거 같이 조립하자.”


둘은 가게를 나와 핫도그를 먹으며 연등천을 따라 걸었다.

천 건너 장군산에 해가 걸려 부드럽게 퍼지고 있었다.

정호는 핫도그를 사고 남은 동전 450원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천변길은 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높게 쌓인 둑 위에 시멘트로 잘 포장되어 있었고,

가장자리로 통나무 모양의 낮은 시멘트 울타리가 길을 따라 길게 설치되어 있었다.

자동차 두 대는 엇갈릴만한 넓은 길을 따라,

2층 양옥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우현의 집은 그중에 하나였다.

옥상에 올라가면 연등천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연등천 건너 왼편을 올려다보면,

장군산 중턱 산동네 정호집이 보였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우현이 2층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응 어서 와라. 손 씻고 조금 뒤에 저녁 먹자.”

우현이 어머니가 거실 건너 부엌에서 현관을 바라보며 웃었다.

정호도 웃으며 그녀를 향해 꾸벅 인사를 드렸다.


“빨리 조립해 보자!”

우현은 신발을 벗고 가방을 급하게 벗어 거실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로봇장난감 상자를 열었다.


부엌에서 여러 음식 냄새가 흘러나왔다.

구수한 된장국, 짭짤한 고등어김치찜, 고소한 잡채 사이로

달콤한 오뎅볶음 냄새가 어렴풋이 섞여 있었다.

신발을 벗으려던 정호는,

그 냄새에 이끌리듯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우현아, 오늘은 집에 갈게. 빨리 가서 해야 할 게 있어.”

정호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주머니! 저 오늘은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려 왔어요.

오늘은 집에 일찍 가고 내일 놀러 올게요!”

정호의 손엔 여전히 450원이 꼭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 돈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꼭 해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정호야 저녁만 먹고 가. 이제 금방 차려!”


우현이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급하게 현관으로 왔다.


“오늘은 가야 해서요. 감사합니다!”


정호가 활기차게 인사하자, 그녀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릿했다.

밝은 얼굴이었지만, 한 끼라도 먹이지 못하고 보내는 아쉬움이 남았다.






해는 어느새 장군산 뒤로 넘어갔다.

까만 장군산의 윤곽을 따라 짙은 빨강이 노랑으로 아득하게 옅어지고 있었다.

어둠을 품은 장군산의 허리춤에 작은 빛들이 하나둘씩 켜졌다.


정호는 시민회관 광장에서 집을 멀리 올려다보았다.

작은 창문은 눈을 감은 듯, 불이 꺼져 있었다.

골목 가로등만이 가만히 그 집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그는 집으로 오르지 않고 서정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장 골목은 저녁찬을 준비하려는 주부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바다에 맞닿는 연등천 하류를 따라 양쪽으로 좁은 골목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정호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이곳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익숙한 골목을 지나, 할머니와 늘 오뎅을 사던 가게 앞에 멈춰 섰다.


“할머니, 사각오뎅 두 개 주세요.”


“어이구, 정호니? 아이고 많이 컸네.

할매 안 계셔서 니가 반찬 해 먹고 그러는 거야?”


“네, 여기 이백 원이요.”


“에휴, 살 좀 쩌야겄다. 삐쩍 말라갔고. 할매 소식은 듣냐?”


정호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이 줘봐, 야채오뎅 하나 줄 테니, 같이 해묵어.”


가게 할머니는 정호의 검은 비닐봉지에

야채오뎅을 하나 접어 넣었다.


“고맙습니다.”


“오뎅 묵고 싶으면 그냥 와도 돼. 알았지?

느그 할매가 옛날에 쌀집 헐 때,

우리 식구가 신세를 많이 졌다.

참 사는 게 알 수가 없어…”


가게 할머니는 말끝을 흐리며 정호를 끌어안고

그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그 품에서는 옅은 생선 비린내가 났다.


정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저녁마다 쥐포공장의 비린내를 묻혀 돌아오던

할머니의 품이 그리웠다.






정호는 넓적한 사각오뎅 세 개를 포개어 반으로 잘랐다.

다시 그걸 포갠 채, 엄지손가락 너비로 툭툭 썰어냈다.


그는 곤로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려 심지를 올렸다.

연소통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성냥불을 옮겼다.

불꽃이 심지를 따라 양갈래로 번졌다.

그을음이 잠시 피어오르며, 부엌에 등유 냄새가 퍼졌다.


곤로 위에 양은 프라이팬을 올리고 콩기름을 부었다.

프라이팬을 이리저리 기울여,

기름이 바닥에 고르게 퍼지도록 했다.

정갈하게 썰은 오뎅을 달군 프라이팬에 올리자,

촤아- 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그는 심지를 내려 불 세기를 줄이고,

서둘러 간장을 부었다.

치이이이- 간장이 끓으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숟가락 가득 설탕을 담아 조심스레 손을 흔들며,

설탕이 뭉치지 않게 넓게 뿌렸다.


슥슥 - 주걱으로 저으며 양념이 오뎅에 잘 배게 했다.

오뎅은 점점 짙은 갈색으로 변했고,

달콤 짭짤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메웠다.


해는 이미 장군산 너머 멀리 달아나 버렸고,

골목등의 불빛이 작은 창을 통해

방바닥에 사각형의 빛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정호는 밥상을 펴고, 마주 보는 자리에 수저를 가지런히 놓았다.

가운데에는 오뎅볶음을 담은 접시를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그는 일어나 천장의 전등 끈을 당겨 불을 켰다.

노란 불빛이 방 안을 환하게 채웠다.

정호는 밥상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곧이어 부엌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저 아래 어두운 시내를 바라보며,

어디선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에 고요한 미소가 번졌다.


따뜻한 5월의 저녁이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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