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은 닿지 않았고, 발톱만 자랐다
부끄러움은 얼굴이 아니라 발끝에서 시작됐다.
양말 너머 구멍 난 엄지발가락을 감추며,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억울함은 숨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입을 닫고 발끝을 모으며, 그는 그렇게 자란다.
부서진 날들이 조용히 쌓여간다.
6월은 예년보다 더웠다.
“날이 너무 더우니까 당분간 체육은 실내에서 대체수업 하자.
지난번에 오륜기 그렸고, 오늘은 호돌이야. 준비물 모두 가져왔지?”
선생님은 말씀을 마친 뒤 천천히 교실을 돌았다.
학생들은 검은 실선 밑그림이 인쇄된 도화지에 호돌이 색칠을 시작했다.
정호는 칠판 오른쪽에 걸린 호돌이 액자를 바라보았다.
그 아래에는 '88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액자를 힐끔거리며 무지 공책에 연필로 호돌이 외곽선을 그려나갔다.
선생님은 1-2 분단 사이를 지나 뒤를 돌아 3-4 분단 사이로 걸어왔다.
실내화 끄는 소리가 마룻바닥을 긁으며 가까워졌고, 정호의 뒤에서 잠시 멈췄다.
정호의 어깨가 움추러들었다. 활짝 웃는 호돌이의 입을 그리던 손이 머뭇거렸다.
선생님은 다시 걸음을 옮겼고, 뒷짐을 진 채 양 옆의 책상을 번갈아 보며 정호를 지나갔다.
정호는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의 뒤꿈치를 바라보다가 옅게 숨을 내쉬었다.
“자, 오늘은 수업 여기까지, 다음 주 수학여행 준비 잘하고,
수학여행비 이번 주까지 모두 내라. 마치자. 반장!”
종례를 하고 선생님은 교실을 나갔다.
교실 안에는 곧 쾌활한 소음이 퍼졌다.
정호는 주위를 잠시 살핀 뒤 뒷문으로 나갔다.
멀어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서둘러 뒤따랐다.
선생님은 교무실로 들어갔다.
정호는 문 앞에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잠시 후, 선생님이 서둘러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며 나왔다.
“정호. 뭐 해? 할 이야기 있어?”
“선생님… 수학여행 안 가면 결석인가요?”
“응. 수학여행도 수업이니까. 왜?”
“사정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요.”
“수학여행비가 없어서?”
정호는 말없이 발끝을 바라보았다.
조회 시간, 선생님은 잠시 정호를 바라보다가 반 아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6학년 5반 친구들. 정호가 사정이 어려워서 수학여행비를 못 냈다.”
일순간 모든 시선이 정호에게 향했다.
귓불이 빨개진 정호는 책상 위에 깍지 낀 손에 둔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갑자기 오른쪽 양말 엄지발가락의 구멍을 친구들에게 들킬까,
왼쪽 엄지발가락을 그 위에 조심히 포개었다.
“모두 가는 수학여행인데, 정호도 갈 수 있게, 너희가 조금씩 돕자.
300원씩 걷고 모자란 돈은 학급비에서 보태자.
알았지? 반장 이번 주까지 걷어.”
“아부지, 다음 주 학교에서 수학여행 간대요.”
정호는 책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 간다고 선생님에게 말했어요. 수학여행비가… 너무 비싸.”
옆으로 누워 있던 아버지는 손을 짚고 일어났다.
“하아… 으응?”
아무렇게나 자란 긴 머리는 기름에 덩어리 져,
찰흙으로 빚은 레고장난감의 머리뚜껑 같아 보였다.
“아니, 아무 말 안 했어요.”
정호는 비어 있는 파란 플라스틱 소쿠리를 바라보았다.
“또 이시키 아부지 무시하는 거야?”
“아부지 아직도 화났어요? 아부지가 잘못 들었다니까,
진짜로 그렇게 말 안 했어요. '내가 안 먹었어요'라고 했어요."
“거짓말 말어. ‘해준 게 뭐가 있어요.’라고 한 거 내가 똑똑히 들었어.”
“아부지. 그게 아니… 음…”
정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옅게 신음했다.
“내가 못해줘서… 흐으…”
아버지는 말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말없이 담배를 말았다.
며칠 전, 주인집 아주머니가 마른 누룽지를 가져다주었다.
아버지와 정호는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남은 누룽지는 소쿠리에 담아 부엌에 두었고, 정호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저녁 무렵, 아버지는 누룽지를 찾았지만 소쿠리는 비어 있었다.
“남은 누룽지 네가 먹었냐?”
신발을 벗으려던 정호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네? 안 먹었는데. 왜요? 없어졌어요?”
정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럼 귀신이 먹었냐?”
아버지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소쿠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정호는 말문이 막혔다. 설움이 복받쳤다.
그는 신발을 고쳐 신고 집을 뛰쳐나갔다.
골목 끝에서 멈춰 돌아보며 소리쳤다.
“내가 안 먹었어요!”
정호는, 이유도 없이 먼저 의심받던 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아버지는 정호의 말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들었지만,
그것을 탓으로 되받으며 마음 깊이 쌓인 미안함을 덮으려 했다.
점심시간 후 5교시가 시작되자, 선생님은 칠판 옆 대나무 회초리를 들고 교탁에 섰다.
“수진이 필통에서 100원이 없어졌다. 누가 가져갔어?”
“모두 눈 감아.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 주겠다. 가져가 간 사람 조용히 손들어.”
탁탁탁- 선생님은 교실을 바라보며 회초리로 교탁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정적 속에서 울리는 둔탁한 소리는,
나쁜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카운트다운 같았다.
정호는 눈을 더 꼭 감았다.
"없어? 그럼 쪽지로 써. 가져간 사람, 봤던 사람, 의심되는 사람.
다 썼으면 제일 뒤 사람이 걷어와."
회초리를 지팡이처럼 쥔 선생님은 교탁을 두 번 두드렸다.
마치 용서 없는 판결을 내리는 소리 같았다.
선생님은 쪽지를 하나씩 펴서 읽기 시작했다.
“정호. 4교시 운동회 연습시간에 왜 안 나왔지? 친구가 봤다는데.”
모든 시선이 정호에게 쏠렸다.
“그게…”
정호는 입술을 안쪽으로 오므리며 말을 잊지 못했다.
“혼자 교실에 왜 있었어?”
학생들 사이 수군거림이 일었다.
‘탕탕탕’
교탁 옆구리를 회초리로 내리치자, 교실 안이 잠잠해졌다.
“모두 조용히 해! 왜 교실에 있었지?”
선생님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음… 운동회 체육복이 없어서요….”
그 순간, 누명을 쓰는 쪽이 덜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정호는 4교시에 교실에 있었다.
창밖으로 운동회 예행연습을 바라보았다.
전교생이 두 편으로 나뉘어 청색과 백색의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모두 하얀색 단화를 신었다.
그는 그 어떤 편에도 속하지 않았다.
“교실에서 뭐 했어? 그냥 앉아 있었어?”
학생들의 표정은 범인이 잡힌 수사물의 마지막을 보는 듯했다.
이제 그저 범행의 이유가 궁금하다는 얼굴들이었다.
“선생님, 100원은 2교시 끝나고 매점 가려고 보니 없었어요.”
수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말했다.
“그래? 흐음… 일단 나머지 쪽지들 보자.”
선생님은 멋쩍게 대답하며 나머지 쪽지들을 펼쳤다.
“문식이.”
학생들은 이번에 문식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수진이 필통 만지는 거 봤다는데?”
선생님은 수진이 뒤에 앉은 문식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랬어?”
문식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잘못했습니다… 허엉…”
문식이가 흐느끼며 말했다.
학생들은 이제 정호에게 붙였던 딱지를 떼어 문식이에게 붙였다.
정호만은 문식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문식이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고, 수업 시작하자.”
‘탕’
선생님은 교탁 상판을 짧고 강하게 한번 두드렸다.
학생들은 모두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정호와 문식이만이 서로 다른 이유로 고개를 숙인 채였다.
정호는 왜인지 문식이가 안쓰러웠다.
그는 삼혜고아원의 학생이었다.
정호는 자신이 받아야 할 비난을 문식이가 치르는 것 같았다.
눈물이 책상 위로 툭 떨어졌다.
긁힌 상판, 톱밥이 드러난 자리에 고였다.
갈라진 상처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정호는 빠삐용의 허름한 회색 죄수복이 떠올랐다.
알록달록하게 선명한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과 문식이만이 바랜 색처럼 느껴졌다.
벗겨지지 않는 제복은 어디를 가든,
어떤 이유든 낙인이 되었다.
정호는 구멍 난 엄지발가락을 꼭 오므렸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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