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늑대에 물려죽을 가능성은?
이주일째 새벽 2~3시쯤 시작되는 윤이의 기묘한 잠꼬대로 밤마다 죽을 맛이다.
“하지마!!! 엄마!!! 아빠!!!”
숨 넘어가는 비명 소리에 윤이 방으로 뛰어들어가보면, 윤이는 마치 진공 용기 속인 양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소리지르고, 난동을 부리다 간신히 다시 잠들었다. 뭐에 씌인 것같은 이 이상 행동에는 ‘야경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나잇대에는 발달 과정상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긴다고 한다. 윤이의 상상력은 풍부해지는데,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는 경계는 아직 흐리다. 악몽과 현실이 뒤섞여 극도의 공포 반응을 보이는 증상이라고 하니 안쓰럽지만, 두려움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감정이다. 저 작은 아이는 뭐가 그리 무서울까?
“윤이는 뭐가 제일 무서워?”
“늑대! 늑대가 나올 것 같아!!”
우리가 숲 속 오두막에 사는 것도 아닌데 무서운 존재가 늑대라니. 조금 웃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나도 늑대에 물릴까봐(두치와 뿌꾸를 기억하시는지?!) 아파트 화단 앞을 뛰어서 지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대도시 서울에서 늑대에 물려 죽을 일은 없다는 걸 알게 된 어른들은 더 이상 화단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다른 두려움이 잠식한다.
아이의 두려움이 늑대처럼 지금 눈앞의 대상이라면, 어른의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한다. 실직, 가난, 질병, 소중한 사람과의 헤어짐처럼, 우리의 미래를 휘청이게 하는 것들.
두려움은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를 어슴푸레 알 때 시작된다. 아예 모른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반대로 다 알면 무섭지 않다. 문제는 그 중간 어딘가의 어설픈 앎이다. 재미로 했던 유전자 검사에서 ‘파킨슨병 유전적 소인 있음’이라는 한 줄을 발견했다. 유전자가 곧 발병을 뜻하는 건 아니라지만, 그 문장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면 속편하게 살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완전히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와 미래의 공백을 자꾸 ‘만약에’로 메우며 불안을 증식시킨다.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극복할 수도 없다. 애초에 두려움은 인류를 살게 한 본능이다. 그러니 두려움을 없애려는 시도는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두는 용기다. 인간은 모름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무지를 무지로 둘 때, 두려움은 제자리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