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을 봤다.
웰메이드 작품은 많이 봤지만
작품 중간중간마다 그리고 작품이 끝나고도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작품은 오랜만이었다.
1. 인물
생각이 많아지게 한 하나는 단연, 은중과 상연 캐릭터 그 자체였다. 이게 어떻게 한 명의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놀라울 정도로 양 극단의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을, 그 복잡미묘한 심리를 작가는 아주 잘 묘사해낸다.
나는 두 인물이 다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지만 또 어느 깊이부터는 이해가 잘 가지 않기도 했다. 완벽히 이해하기엔 그들의 심리가 일반적인 듯 일반적이지만은 않아서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
먼저 은중부터 이야기해보자면
은중은 어린 나이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랑 동생이랑 가난 속에서 자란다. 비록 유년기를 내내 가난한 환경에서 보내며 그 부분으로 인한 열등감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사실 은중은 삶의 처음부터 가난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꽤 무던히 살아간다. 무던한 성격을 타고난 것도 있다 싶다. 오히려 은중은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다보니 좋은 것도 힘든 것도 함께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무의식중에 체화한 듯 어린 나이부터 엄마의 일도 기꺼이 돕고 친구들과도 무엇이든 나누는 게 익숙하다. 이 과정에서 내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관계가 끈끈해진다면, 혹은 전체에 기여를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줄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 자체가 넉넉하고 너그럽다. 함께 버티고 살아야 하는 환경 속에서 은중은 관계의 가치를 먼저 배운 것이다. 또한 엄마가 항상 은중을 정서적으로 지지해주고 품어주며 마음껏 어리광을 부릴 수 있도록 포근한 스폰지 같은 역할을 해주었기에, 은중은 배울 수 있었다. 엄마처럼 타인을 한껏 포용할 줄 아는 법과 또 때론 자신이 받기도 하는 법에 대해.
은중과 상연이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반장이었던 상연이 은중의 손바닥을 나무 막대기로 때렸던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애초에 어그러진 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은중은 상연을 줄곧 싫어했는데 상연은 영문을 몰랐고, 어느 날 비로소 영문을 알게 된 상연이 그럼 자신도 한 대 때리라고 은중에게 리코더를 내밀자 은중은 씩씩대기만 할 뿐 때리지 못한다. 이걸로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아냐고, 이건 나무 막대기보다 더 아플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때 상연은 예감했다고 한다. 영원히 이 아이는 이길 수 없겠구나 라는 것을. 은중이 얼마나 고운 심성을 가진 아이인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은중은 그런 아이인 것이다. 자기가 억울하게 맞았고 그래서 상대방을 몹시 싫어하면서도, 상대방을 똑같이 때릴 수는 없는 아이. 맞으면 아픈 걸 잘 알기에 오히려 더 똑같이 굴 수 없는 아이.
이번엔 상연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보겠다.
상연은 장관까지 지낸 할아버지를 둔, 꽤 부유한 환경 속에서 엄마아빠오빠와 살아간다. 그런데 이때도 엄마가 오빠를 편애한다는 인식, 자신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진 채 유년기를 보낸다. 왜냐,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은 오빠였기 때문에(상연은 몰랐지만) 엄마는 상연보다 오빠를 더 배려한 측면이 있었고, 자식을 엄하게 키우는 엄마의 양육 방식으로 인해 아직 어렸던 상연에게는 엄마의 사랑이 잘 와닿지 않았던 탓이다. 아마도 이 정도 문제가 다였다면 상연은 커가며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이때부터 상연의 가정에는 온갖 불행이 덮친다. 남들은 살면서 하나만 겪어도 힘들 일을 한 번에 다 겪는데… 오빠의 자살, 아빠의 사업 실패, 부모님의 이혼. 그야말로 단란하고 부유했던 가정이 한 순간에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상연은 오빠의 자살에 대한 죄책감까지 가진 채 그때부터 자신을 혐오하며 살아간다.
어린 시절 부유한 집 딸로 주목받던 상연은 이 같은 집안의 불운으로 -심지어 자신의 탓이 일부 가미됐다고 믿는 불운으로- 모든 지위를 한순간에 잃으면서, 이때부터 ‘나는 이제 사랑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부모님의 이혼과, 오빠의 죽음 이후 남은 자식인 자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영혼이 죽어버린 것 같은 엄마를 보며 자신은 결국 끝내 지켜지지 못하는 존재고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신념으로까지 굳어진 듯싶다. 그래서 상연은 자신이 아깝지 않아진다. 자존심은 드럽게 세지만, 깊은 속내로는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이.
상연은 얼굴도 예쁘고 재능도 타고났지만, 은중에게 줄곧 열등감이 있었다. 애쓰지 않아도 사랑받고, 자연스럽게 존재해도 충분해보이는 안정된 태도. 상연이 가장 갖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이 부분에서 사실 잘 이해가 안 갔다. 상연은 이미 가진 게 많은데 왜 열등감을 굳이 가질까. 마음껏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주고 사랑을 퍼부어주는 은중에게 그냥 좀 기대면 안 되나? 상연의 사랑받지 못한 그 결핍을, 상실의 상처를, 외로움을 은중과의 우정으로 채울 수는 없는 건가? 상연에게 꼭 필요한 그것을 은중이 가진 데다가 기꺼이 주려고 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은중에게 날을 세우고 미워하기까지 하는 상연이 이해가 갈 듯하면서도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면 어떨까, 어땠나 생각해봤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던 저 심리가 순간 이해가 안 갈 것도 없겠다 싶어졌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갈망함에도 갖지 못한 걸 가진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질투를 느낀다. 게다가 질투보다 더 싫은 감정은 이건데, 자꾸 나 자신이 못나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왜 저러지 못할까. 그 생각이 자꾸 잔상으로 남아 나를 쪼그라들게 만들 때, 그 사람을 옆에 두는 게 나에게 긍정적 자극보다 오히려 부정적 영향이 크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사람은 그게 누구든 그냥 옆에 두지 말자고 다짐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은 그렇게나 나약하고, 감정이 늘 논리적이지도 않은 법이니까. 꼭 저 사람이 싫고 나에게 못되게 굴지 않아도, 사람이 사람을 옆에 두지 못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상연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은중이 너그럽고 착하고 자기를 진심으로 아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은중의 너그러움이, 마음의 여유가, 안정된 태도가 자기를 자꾸 쪼그라들게 만드니까 그 불편함이 싫어 은중을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건 마치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자기를 진심으로 아끼는 유일한 사람을 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평안이, 그렇게 도망간 곳이 더 나은 곳일 수는 없으리라는 걸 본인은 알았을 거다. 알면서도 상연은 고립을 택하고, 그럼으로써 최후의 자기를 지켜낸다. 그게 상연의 존재 방식이고 상연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게 은중과 상연의 가장 큰 차이다.
2. 나는 어느 쪽에 더 공감이 가는가
일단 두 인물이 다 너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은중을 보면서는 끝내 선한 사람이 가장 강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고, 동시에 나는 저렇게까지는 될 수 없기에 정말 부럽고 멋있었다. 하지만 남편과 은중을 보며 대가리 꽃밭이라며… 비난을 하며 보던 순간이 많았는데, 상연이 겪은 아픔을 두고 은중이 자신의 상식 수준에서 판단하는 말을 할 때 주로 그랬다. 은중에게는 세상이 그저 아름답구나, 참 꽃밭이네…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은중의 캐릭터가 너무 매력 있지만 현실이라면 마냥 친해질 수는 없을 것 같은 그런 인물이었다. 만약 내가 힘든 일이나 안 좋은 감정에 대해 얘기하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라고 착하고 정의롭게만 도덕책처럼 대답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너무 착한 건 알겠는데 답답해. 그런 생각이 들 것 같다.
그런데 웃긴 건 또 내 아이는 은중처럼 키우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인물이었다.
상연을 보면서는, 저런 존재 방식과 자기가치감이 너무 안타까운데 사실은 훨씬 더 공감이 간 인물이다. 있는 그대로 충분하고 애쓰지 않아도 나는 사랑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게 은중이라면, 상연은 끊임없이 외부적 가치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고 한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조건부 사랑인 것이자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나도 내가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내 역할을 그 속에서 충실히 다 해내지 못한다면 살아갈 가치도, 사랑받을 가치도 없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상연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이 상연처럼 생각하지 않으려나? 은중처럼 생각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내 상식으로는 오히려 그게 신기했다.
3. 존엄사
이 작품에서는 존엄사도 다루고 있다.
상연은 말기 암 환자로서 존엄사를 택하는데, 존엄사에 대한 설명 중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존엄사를 진행하는 과정은 얼마든지 도중에 중단할 수 있다고 한다. 하여 결심을 하고 왔어도 그 순간에 단박에 밸브를 여는 사람은 소수이고, 도중에 이 과정을 멈춘 뒤 몇 주, 몇 달, 심지어는 몇 년까지도 죽음을 유예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바뀐다는 것이었다. 얼마든지 이걸 내 손으로 끝낼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인상 깊었다. 보통 암에 걸리면 고통의 끝의 끝까지 경험하다, 후반에 가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섬망까지 오가며 자기가 자기가 아닌 채로 극한의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 죽음을 맞이하는데, 고통을 거절할 권리 정도는 줄 수 있는 게 아닌가. 나도 이 부분에 깊이 동의했다. 그것이 신체의 병이든, 우울증이든, 삶을 고통스럽지 않게 스스로 끝낼 수 있는 권리 정도는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열어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큰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상연도 그렇게 말했다. 자기에게는 두 가지 죽음이 있는 줄 알았다고, 엄마처럼 죽거나 오빠처럼 죽거나. 그런데 이때 스위스를 알아서 얼마나 위로 받았는지 모른다고. 나에게 놓인 선택지가 죽음밖에 없을 때는 그 방식이 편안할 수 있도록 배려해줄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도 순간 여러 사람들이 머리에 스쳐갔다. 고통의 끝의 끝까지 경험하다 돌아가신 가족들, 최근에 자살 시도를 했다가 죽지는 못하고 하반신 마비만 온 채 형벌같은 여생을 살아가야 할 누군가. 그리고 누구든, 어쩌면 자신의 미래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존엄사가 도입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4. 끝내 남을 이름
마지막 화에 나온 상연의 일기 중,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에게 삶이란 열어보기 힘든 상자다.
돌아보니 몇 개의 이름만 남았다.
이 문장.
짧은 두 문장인데 다 설명되는 감정들.
진짜 진짜 잘 썼다.
나는 살다가 진짜 힘들 때는 나는 우주 먼지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그래봤자 우주 먼지다. 호화롭고 찬란하게 사나, 안 그렇게 사나 그래봤자 얼마 살지도 못하고 가는 우주 먼지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힘듦이 좀 작아질까 싶어서. 그런데 그건 찰나의 위로일 뿐, 그렇다고 힘든 게 딱히 덜어지지도 않았던 건 내 삶이 힘든 건 오롯이 지금의 내가 겪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작 드라마일 뿐인데 작중 인물인 상연의 생이 내내 너무 외롭고 쓸쓸한 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많이 울었는데, 현실 속 누군가는 정말 그렇게나 살기가 힘들고 벅찰 수도 있는 게 인생일 거라는 사실이 슬펐다. 우주 먼지라고 아무리 스스로를 위안해봤자 당사자는 죽을 만큼 힘들 거라는 그 사실이 슬프다.
오랜만에 여러 가지로 정말 깊은 작품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