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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대 이력서#20] 이력서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계속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by 다소

처음 이력서를 쓰던 날을 기억합니다.


고작 몇 줄 채우기도 버거웠던 텅 빈 페이지 앞에서, 저는 한없이 작아졌습니다. '지방대 졸업생'이라는 다섯 글자는, 제가 정말 보여주고 싶은 저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평생 저를 따라다닐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지방대 졸업생의 이력서로 수십 번의 고배를 마셨고, 세상의 높은 벽을 실감했습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 경험들은 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하고, 새로운 도전에 부딪힐 수 있도록 만들어준 중요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페이지: ‘버티는 힘’에 대하여

제 이력서의 첫 페이지들은 온통 ‘생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수적인 첫 직장에서 계약직 사원으로 버티며, 조직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살아남는 법을 익혔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제 실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은 막내인 제게 돌아왔고, 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수십 번 “죄송합니다”를 외쳐야 했습니다. 그날 밤 퇴근길 버스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은, 좌절감으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원망을 애써 삼키며, 저는 그저 ‘오늘 하루만 버티자.’라고 되뇌었습니다.

돌아보면 아쉽고 안쓰러운 시절이었지만, 저는 이제 압니다. 그 미련해 보였던 시간들이 제게 ‘버티는 힘’을 가르쳐주었다는 것을요.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결국 봄은 온다는 믿음으로 묵묵히 뿌리를 내리는 힘. 부당함 속에서도 나를 지키고, 언젠가 올 ‘다음’을 위해 웅크릴 줄 아는 지혜. 그 힘이 있었기에, 저는 썩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페이지: ‘새롭게 정의하는 힘’에 대하여

이력서의 두 번째 장은 ‘성장’의 기록입니다. 새로운 회사로 옮긴 저는 완전히 다른 세상과 마주했고, 그곳에서 수많은 스승을 만났습니다.

일의 본질인 ‘왜(Why)’를 묻게 한 팀장님, 데이터로 세상을 보는 객관적인 눈을 뜨게 해 준 팀 동료들. 저는 그들의 가르침 속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을 넘어 저의 일을, 관계를, 그리고 저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는 힘’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한동안 ‘운 좋게 이직한 지방대 출신’이라는 제 모습이 언젠가 들통날까 두려워하는 ‘가면 증후군’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땀 흘리며 큰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을 때, 저는 비로소 그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경험은, 제 안의 오랜 열등감을 씻어내는 최고의 약이었습니다.


세 번째 페이지: ‘나를 지키는 힘’에 대하여

가장 최근에 쓰인 페이지들은 ‘균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월급+알파’를 꿈꾸며 N잡과 자기 계발에 몰두하던 저는, 어느새 ‘갓생’이라는 이름의 덫에 걸려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삶의 유일한 운전수여야 했는데, 어느새 ‘성공’이라는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달리기만 하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되어 있었습니다.

열정으로 시작했던 부업이 본업의 즐거움마저 집어삼키려 할 때, 저는 비로소 멈춰 서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더 빨리 달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치지 않는 것이며, 더하기(+)만 잘하는 인생이 아니라, 때로는 비워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 과정에서 저는 일과 삶의 건강한 경계를 설정하고, 휴식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력서 마지막 한 줄

버티는 힘으로 기회를 얻었고, 새롭게 정의하는 힘으로 성장했으며, 나를 지키는 힘으로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이제 저는 앞으로도 채워나갈 저의 이력서에 적어 넣을 한 줄의 문장을 찾았습니다.


“주어진 세상의 규칙을 익히되 그 안에 갇히지 않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딪히고 성장했으며,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행복을 만든 사람.”


이것이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자, 앞으로 계속 써 내려갈 제 인생의 방향입니다.


‘지방대 졸업생 이력서’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저의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멈춥니다. 처음에는 콤플렉스였던 이 제목은, 이제 저에게 가장 큰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 시작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일 테니까요.


저의 이력서는,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신 당신의 이력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멋진 이력서를 써 내려가는 위대한 작가들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에 함께 웃고, 공감하고, 응원해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의 다음 페이지를, 저 역시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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