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나의 삶을 위해
퇴근 후, 또 다른 출근을 하는 삶.
언젠가부터 N잡은 더 이상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시대 직장인의 평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그 흐름에 올라탔습니다. 회사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직원으로, 퇴근 후에는 브런치 작가로. 주말에는 체험 프로그램과 청년 진로 강사로. 여러 개의 명함을 가진 제 자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제가 쓴 글에 올라가는 조회수를 보며 짜릿한 보람을 느꼈고, 월급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종류의 만족감을 얻었습니다. 회사 일과 별개로 ‘나의 일’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 이 두 개의 바퀴가 저를 더 멋진 미래로 데려다줄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성취감은 중독성이 강했습니다. 저는 더 잘하고 싶어 졌습니다. 자연스럽게 회사 밖의 삶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일’이 ‘남의 일’을 밀어낼 때
제 마음속 우선순위는 어느샌가 본업과 부업이 뒤바뀌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성장시켰던 본업에서의 일들이 어느새 저의 부업을 방해하는 귀찮은 허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직원들을 위한 행사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하면 최고의 행사를 기획할 수 있을까?’를 설레는 마음으로 고민했던 저였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저는 달랐습니다.
‘이거 빨리 끝내고 글 써야 하는데.’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직장인이라는 저의 본업에 지장이 없는 부업을 하겠다는 처음의 다짐이 어느새 사라져 있던 것이었죠. 부업이 제 삶의 기반인 본업을 서서히 집어삼키고 있었던 겁니다.
해결방법 1. 나만의 '신호등' 만들기 (자기 진단 시스템 구축)
자동차가 스스로의 상태를 알려주듯, 저에게도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할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신호등'을 만들었습니다. 초록불은 모든 것이 순조롭고 즐거운 상태입니다. 본업과 부업이 시너지를 내며 즐겁게 일할 때죠. 노란불은 약간의 피로감과 의무감이 느껴지는 상태입니다. '이거 빨리 끝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노란불이 켜진 것입니다. 이때는 의도적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일의 양을 조절해야 합니다. 빨간불은 모든 것이 버겁고, 본업마저 방해물처럼 느껴지는 번아웃 직전의 상태입니다. 이때는 모든 것을 '일시 정지'하고, 제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신호등 시스템은 제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더 큰 문제로 번지기 전에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안전장치가 되었습니다.
해결방법 2. '자신을 잠식하지 말 것' (경계 설정)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 자신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무엇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시작했지?" 답은 명확했습니다. '더 행복하고 충만한 내가 되기 위해서.' 하지만 저는 어느새 수단이었던 'N잡'과 '결과'에 매몰되어 목표였던 '나'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헌법 제1조처럼, 제 삶의 제1원칙을 세웠습니다. '어떤 활동도 나 자신을 잠식하게 두지 않는다.' 글을 쓰는 것이 행복하지 않고 의무감만 남는다면, 잠시 멈춥니다. 강의 준비가 본업에 지장을 줄 만큼 부담스럽다면, 정중히 거절합니다. 이 원칙은 저에게 중요한 필터가 되어주었습니다. 수많은 '할 수 있는 일(Can-do)'들 속에서, 정말로 '해야만 하는 일(Must-do)'과 '하고 싶은 일(Want-to-do)'을 가려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해결방법 3. 본업-부업, 사실 둘은 '연결'되는 것 (개념의 전환)
우리는 흔히 '워라밸', 즉 일과 삶의 '균형'을 이야기합니다. 저 역시 본업과 부업이라는 두 개의 바퀴가 아름다운 균형을 이룰 것이라 믿었죠. 하지만 균형은 위태롭습니다. 시소처럼 한쪽이 무거워지면 다른 한쪽은 허공에 뜰 수밖에 없습니다. 제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제가 발견한 새로운 개념은 '균형'이 아닌 '연결'. 시너지 효과였습니다. 본업에서 얻은 경험과 통찰이 글의 소재가 되고, 글을 쓰며 단련된 논리적 사고가 본업의 기획력을 높여주는 선순환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행사를 빨리 끝내고 글을 써야지'가 아니라, '이 행사를 준비하며 느낀 감정과 배움을 글로 남겨야지'라고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 두 개의 일은 더 이상 서로의 시간을 뺏는 경쟁자가 아니라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두 개의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의 경험이 작가로서의 저를 깊게 만들고, 작가로서의 사유가 직장인으로서의 저를 성장시킵니다.
N잡과 자기 계발은 분명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주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도구가 주인을 집어삼키는 순간, 모든 것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며, 더하기가 아니라 균형이라는 것을 저는 너무 늦기 전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이력서 19번째 줄에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성공 신화가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나’라는 시스템이 과열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현명하게 조율하는 법을 터득한 한 뼘의 성숙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어떤 성과보다 값진 것이었습니다.
[마지막화, 20화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