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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대 이력서#06] 계약직 신입사원 적응기

계약직 신입사원으로 살아남기

by 다소

‘그래도 다행이다. 어디든 시작은 해야 하니까.’


계약직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저는 담담했습니다. 기쁘다고 말하기엔 마음이 어딘가 조심스러웠고, 누구에게 알릴 정도로 당당하지도 않았습니다.


1년짜리 계약직. 그 자리는 사회 초년생이 세상을 배우기엔 결코 만만하지 않은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작아지기도 하고, 억울해하기도 했지만 아주 조금씩 성장했습니다.



제가 계약직으로 근무를 시작한 기관의 팀장님은 우연히도 실습생 시절 만났던 팀장님이었습니다. “요즘 친구들은 참 아이디어가 참 좋아요”라며 사소한 제안 하나에도 반응해 주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하지만 계약직으로서 다시 마주한 팀장님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회의 도중에는 농담도, 미소도 없었습니다. 업무 지시는 정확하고 단호하게 내려졌고, 피드백은 말없이 문서에 형광펜으로 표시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다시 정리해서 오후까지 제출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제 심장은 괜히 덜컥 내려앉곤 했습니다.


감정 기복이 유난히 큰 분이셨습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유쾌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개인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은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야”라며 목소리를 높이셨고, 또 다른 날은 같은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지~” 정도로 넘어가셨습니다. 처음엔 상황의 차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 판단 기준은 ‘기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행사 일정 조율을 위해 외부 기관과 협의한 내용을 정리하여 팀장님께 메일로 보고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보고 양식은 팀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던 양식을 활용했죠.

그러나 잠시 뒤, 팀장님 자리에서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걸 지금 보고라고 보낸 거예요?”


순간 사무실 전체가 조용해졌습니다.

제가 다가가자 팀장님은 모니터를 신경질적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핵심이 안 보이잖아요. 내가 이걸 일일이 읽어야 합니까?”

당황스러웠습니다. 보고 양식은 모든 팀원이 수십 번도 더 사용하던 형식과 내용 그대로였고 다른 선배들도 보기에 문제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해명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팀장님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아침부터 팀원들도 조용히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정해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잠시 뒤 팀장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선배 한 분이 조용히 말해주셨습니다. “팀장님이 오늘 개인적으로 좀 예민하신 것 같아요. 오늘은 그냥 운이 없었던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억울함보다 씁쓸함이 먼저 밀려왔습니다. 누군가의 기분에 따라 오늘의 내 하루가 결정된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팠습니다.



계약직 사원 시절, 제 주요 업무는 시민을 대상으로 체험 활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이었습니다. 참가자 모집부터 강사 섭외, 현장 진행, 설문 회수와 보고서 작성까지 전 과정을 경험하며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열심히 배우고 익히려 노력했습니다. SNS 홍보 문구 하나에도 반응을 분석하며 스스로 피드백을 쌓아갔고, 참가자 수가 목표보다 적게 나왔을 땐 자책감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그러던 중, 사건 하나가 발생했습니다. 청소년 대상 1박 2일 프로그램에서 외부 강사가 참여 학생을 강하게 질책하는 일이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학부모가 기관에 직접 항의하러 찾아온 것입니다.

저는 현장에서 중재를 시도했고, 이후 보호자에게 수차례 사과를 드리며 상황을 정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받아본 강한 민원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저의 당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날 보호자에게 받았던 민원보다 그보다 더 큰 충격은 그 모든 책임이 ‘저의 관리 부실’로 정리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강사의 섭외를 담당했던 것은 상사였지만, 그 상사는 제가 보호자의 민원을 받는 사이 이번 문제는 저의 잘못이라고 팀장에게 조용히 보고했던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 사실을 듣고 나서도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그건 저의 실수가 아니라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했을 테지만, 그 시절의 저는 그저 조용히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끔은 안내데스크에 앉아 시설 이용자들의 응대를 담당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였지만, 그 이틀이 유독 길게 느껴졌습니다.

사무실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느꼈던 보람은 잠시 잊혔고, 말끝마다 날이 선 민원 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어떤 날은 “너 같은 애가 무슨 직원이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처음엔 손이 떨리고 눈물이 맺혔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네,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라는 말이 자동 응답처럼 나왔습니다. 스스로가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정규직 전환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 노력했습니다. 지역 축제 행사를 맡았던 일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예산이 부족하여 많은 과정을 직접 챙겨야 했습니다. 포스터 디자인, 행사장 동선 계획, 자원봉사자 스케줄 관리까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습니다.

행사 전날에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사무실 밖 현장에서 무대 세팅을 했습니다. 선배 직원들과 함께 수십 개의 의자를 하나하나 옮기고, 음향을 직접 조율하며 일했습니다. 모두들 지쳐 있었지만, 그 속엔 이상하게도 웃음이 있었습니다.


“야, 이건 거의 행사 업체 아니냐?” “내가 무대 위에서 마이크 잡아보는 날이 오네.”

장비를 나르며 주고받은 농담, 힘들지만 서로 등을 토닥이며 “조금만 더 버텨요”라고 웃던 그 밤은 그 어떤 순간보다 사람 냄새가 짙게 배어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다 같이 만든 행사였습니다. 시민들의 참여도도 높았고, 지역 언론에도 긍정적인 기사로 소개되었습니다.

동료 직원들과 함께 고생하며 준비했던 행사무대

행사 이후, 결과 보고를 위해 팀장님 책상 앞에 잠시 서 있게 되었습니다. 문서를 넘기시던 팀장님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잘했네."


그 말은 아주 짧았지만, 처음으로 팀장님의 입에서 나온 긍정적인 평가였습니다. 크게 표현하지 않으셨지만, 저에겐 그 말 한마디가 오래 남았습니다.



월급날은 또 다른 감정이었습니다.

제 통장에 찍힌 금액은 180만 원대.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래, 처음은 원래 이런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허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죠.

사실 저는 처음에 이 기관에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다니는 것을 목표로 입사했습니다. 계약직이지만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기회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면서, 제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억울함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했던 그날, 민원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저녁, 자정 넘은 밤에 의자를 옮기며 땀범벅이 되었던 순간들을 지나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곳이 제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것을요.


이곳에서 정규직 사원증을 언젠가 받는다면 그것이 저에게 안정감은 줄 수 있겠지만, 저는 그보다는 더 새로운 세상을 겪어보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더 넓은 세상에서 저의 가치를 올리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어떤 자리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나를 만드는 것이 진짜 목표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계약직으로 시작한 저의 첫 직장은, 그렇게 제 인생의 방향을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습니다.


[7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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