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정규직 채용 공고가 떴던데, 지원 안 해요?”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계약직 1년 차였던 저는, 제가 근무 중인 공공기관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규직 채용 안내’ 공고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면접만 본다면 정규직 전환 가능성도 아주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하면서 팀장님과 선배들에게 업무 태도나 성과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거든요. 또 저처럼 계약직으로 근무하다가 정규직으로 전환된 선배 사원들도 많았기 때문이었죠.
되돌아보면 분명 저는 이 기관에 정규직 자리를 얻기 위해 계약직으로 취업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정규직 공고를 보는 순간, 마음 한편에선 또 다른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 내가 정말 이곳에서 정규직으로 계속 일하고 싶은 걸까?’
공공기관은 겉으로 보기엔 안정적이고 편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한 현실은 달랐습니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일상처럼 매일 야근은 반복됐습니다. 주말에는 당직 근무 때문에 출근을 해야 했죠. 연차를 쓰는 데에도 눈치를 봐야 했고, 복지라고 불리는 제도들은 형식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워라밸'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환경이었죠.
가장 기억나는 날이 있어요. 그날도 다음날 아침까지 제출해야 하는 프로그램 계획서를 완성하기 위해 밤 11시가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죠. ‘이게 정말 내가 다 할 수 있는 일인가?’라는 생각에 울컥했지만, 꾹 눌렀습니다. 문제는 퇴근 이후였습니다. 마지막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쳐나왔는데, 간발의 차이로 막차는 눈앞에서 지나갔죠. 추운 겨울, 허탈하게 홀로 버스정류장에서 서성이다가 갑자기 벅차오른 감정에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거야…”
그럼에도 저는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문서 더미 사이에서 익숙한 선배 직원들의 이름들을 계속 마주할수록 점점 답답한 마음이 커져갔습니다. 전임자들이 작성한 자료를 참고하며 그대로 복사하듯 이어가는 업무들. 크게 바뀌지 않는 서식과 내용. 담당자 이름만 바뀔 뿐, 기획의 방향도, 실행 방식도, 심지어 문장 표현까지 똑같은 프로그램 계획서를 계속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제게 큰 한계를 느끼게 했습니다.
공공기관이라는 시스템 안에서는 나만의 아이디어나 시도보다, 정해진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나는 이 안에서 더 이상 배우고 자랄 수 없겠구나. 이곳에 오래 있을수록 나도 언젠가 이런 일에 아무런 의문조차 품지 않게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이 일을 10년, 20년 뒤에도 하고 있을 나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
제가 공공기관 정규직 면접을 고민했던 또 다른 이유로는 제가 납득할 수 없었던 보수적인 공공기관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한여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더운 날이었죠. 사무실 내에서는 대부분이 편하게 슬리퍼를 신었고, 저 역시 책상 밑에서 갈아 신으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옆 팀 팀장이 회의 중 저를 힐끔 보더니 말했습니다.
“신입사원이 사무실에서 슬리퍼 신는 건 보기 안 좋아요.”
정작 그 옆에 앉아 있던 선배 직원은 슬리퍼를 신은 채 아무런 지적도 받지 않았는데 말이죠.
저에겐 단순한 규칙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기관 특유의 보수적인 분위기와 형식 중심의 문화를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조직의 규율이라기엔 애매하고, 개인의 시선이라기엔 권위적이었던 그 태도. 공공기관이라는 공간이 지닌 형식과 틀, 변화 없는 관행. 저는 그런 틀 안에 갇혀 살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저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속 결심을 하게 됩니다.
“진짜로 면접도 안 볼 거예요? 이렇게까지 해놓고? 너무 아깝잖아.”
팀장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습니다. “정말 이유가 뭡니까? 혹시 다른 데 붙었어요?”
납득할 수 없다는 당혹감이 담겨 있었습니다. 정규직 전환을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던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죠.
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습니다.
“이 일이 싫은 게 아니라… 제 방향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다른 공공기관에 정규직으로 취업을 하게 되더라도, 본질은 바뀌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공공기관이라는 집단 자체가 가진 한계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폐쇄적인 조직문화, 의사결정 방식, 일의 효율성 등 여러 면에서 변화와 성장이 정체된 구조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배우고 자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 문화에 점점 적응해가고 있었습니다.
‘정규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그리고 내가 성장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 이후로 저는 '내가 이 경험을 가지고 사기업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1년간 공공기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며 쌓은 실무 경험은 분명 저만의 강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강점을 사기업의 어떤 분야와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막막했지만, 제 경험을 하나하나 다시 돌아보며 정리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프로그램 기획, 대민 서비스, 보고서 작성, 현장 조율 능력까지—이런 것들이 민간 기업에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자, 저만의 언어로 그 경험들을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사기업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는 사실은, 마치 대학생 시절—나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다시 꿈꿀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 안의 열정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8화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