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를 할까. 말까.

여전히 고민하지만

by 진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다.

큰 회사였는데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겨우 1년 채우고 도망치듯 나왔다.

전공 공부는 할만했는데, 일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편입을 선택했다. 그해 늦여름이었다.


3개월간 공부하고 몇 군데 대학교에 시험을 봤다.

1차에서 모두 합격했다.

기쁨을 뒤로한 채, 입학금과 등록금을 예상해 보았다.


부모님께 말씀드렸지만 단칼에 거절하셨다.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서 군말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경제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2차 합격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상관없다고 금방 단념했다.

어차피 못 간다는 결론을 먼저 내렸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줄여가며 공부했는데 단념이 의외로 쉬웠다. 내 인생이 쉽게 흘러갈 리 없다. 그게 내 인생이지ㅡ 라며.


‘일단 돈을 벌자.

첫 학기 등록금 정도는 내가 마련해야겠다.’


욕심에 페이도 괜찮아야 했고, 공부할 시간도 필요했다.


잡코리아를 기웃거리며

가벼운 마음으로 피부과 데스크 일자리를 구했다.

출퇴근 시간이 명확했고 급여도 나쁘지 않았다.


젊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잠깐 하기 괜찮겠다고 짐작했다.

신중하지 못했다.

정말, 가벼운 마음이었다.



정 붙일 곳 없이 표류하던 내가

사람들과 마음 맞춰 일하는 게 좋았다.

퇴근하고 마주하던 술잔에 위로받았다.


그러던 중에 의외로 비전을 보았다.

급여로 괜찮은 미래였다.


묵묵히 조용히 일하고,

때가 되면 나가야지 생각했는데—

그 모습이 괜찮아 보였는지

한 달에 한 번씩 급여를 올려주셨다.


그 달고 쓴 ‘돈맛’을 알았다.

나가려 해도 붙잡혔다.


굳이 다시 편입해서

돈 쓰고 시간 쓰지 않아도 되겠다, 계산했다.

시험까지 몇 개월. 졸업까지 2년. 최소 3년.

3년 동안 다달이 얼마씩 저금하면 그게 더 남는 장사 아닌가.


꿈꾸던 것은 실패라도 보고 끝내야 후회가 없다. 나란 사람은 그렇다. 여태껏 후회하고 있으니.


당시 피부과보다 성형외과가 페이가 더 좋았다.

그래서 성형외과로 옮겼다.



성형외과에서 8년을 근무했다.

여러 부서 중 상담 파트를 맡았고,

소위 말하는 ‘상담실장’으로 일했다.


그 일을 하며 나는 수많은 얼굴과 마주했다.

상대의 눈, 코, 입, 체형까지 자세히 보고, 분석하고, 계획했다.

수술의 경과도 함께 지켜봤다.


그림 공부라고 하면 잠깐 다닌 미술학원이 전부인 내가,

일을 하다 보니 사람 얼굴은 꽤 괜찮게 그리게 됐다.


습관처럼 연예인도 세밀하게 보았다.

드라마 한 편이 끝나면,

감쪽같이 수술하고 나온 배우도 알아봤다.


눈이 정말 예민해졌다.



심한 난시에도,

멀리 있는 사람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보였다.


이게 오히려 나를 곤란하게 했다.

멀리서 내가 먼저 알아보는 상황— 늘 고민이었다.


**인사를 할까, 말까.**


당연히 친한 사람이라면

멀리서도 웃으며 걸어가 큰소리로 인사했다.


그런데 애매하게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인사해도 상대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히 나 혼자 눈치 보다 말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제발 날 못 알아봤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직장에서는 이런 고민쯤은 넘길 수 있었다.

진짜 곤란해진 건, 엄마가 된 이후였다.



아이가 다니는 곳이 어디든,

주변 아이들 얼굴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엄마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등하원길이나

놀이터에서 마주친다고 해서

인사하는 사이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사람에게 질릴 대로 질려버렸고,

내가 먼저 아는 척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먼저 인사를 하고 스몰토크를 시작하는 일은

정말 괜찮아 보이는 엄마이거나,

아이의 절친 엄마이거나,

혹은 사교성 좋은 엄마가 다가와줄 때뿐이었다.


그 외의 경우엔

대부분 나만 아는 얼굴이었다.

(추측이지만, 꽤 정확할 수 있다.)



지금 사는 이 도시는

결혼하면서 처음 살아보는 곳이다.


아는 사람은 정말 소수였다.

남편, 아이, 아이의 선생님, 몇 명의 엄마들— 전부였다.

굳이 아는 사람을 늘려갈 생각도 없었다.


외로움이나 고립감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무관심을 가장한 벽을 쌓아갔다. 점점 더 높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게 먼저 인사해 주는 엄마와 아이가 하나둘 생겼다.


인사를 하고 나니까

**꽝꽝 얼어있던 마음이 살짝 녹아서 반짝거렸다.**


다음 날, 또 인사할 상황이 다가오자

인사하기 전부터 웃음이 났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좋았다.



먼저 인사를 걸어보기도 했다.

이야기도 조금씩 나누기 시작했다.

듣기만 하던 내가

말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남편에게도

“누가 이렇다네, 저렇다네” 이야기하며 웃는 날이 많아졌다.


예전엔 ‘특이한 사람 =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이젠 ‘재밌는 사람’이 되었다.


웃으면서 구린내를 풍기던 내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엄마들과의 관계가

늘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엄마로 마주하는 관계는 한계가 있었다.

기관이 달라지거나

아이들끼리 맞지 않거나

엄마들끼리 조금만 불편해져도

쉽게 끝나버렸다.


그 점이 마음 아팠다.

**어렵게 준 마음이었는데,

상대는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요즘도 동네에 사람이 많은 거리를 지날 때면 고민한다.

**인사를 할까, 말까.**


인사를 하기 어색한 관계면

그냥 못 본 척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면 엄마로서 약간의 죄책감이 든다.


아직도 실망한다.

‘인사할 법한 사이인데 왜 그냥 지나갔지?’

‘시력이 안 좋은 걸 수도 있겠지?’

‘내가 싫은 건 아니겠지?’

‘내가 실수했던 건 아닐까?’



떠나버린 몇몇 사람을 생각하며,

인사를 못 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아픈 마음을 스스로 달래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라?

나, 사람 좋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