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호는 매주 두 번, 해 질 무렵이면 흰 도복을 입고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그 시간엔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친구들과 마주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날도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하루카와 마주쳤다. 도복을 입고 나가는 아호가 신기했는지, 하루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동아리 재미있어?"
"응, 운동도 하고 친구들도 사귀고. 넌 안 해?"
"나도 뭔가 해보고 싶긴 한데..."
"하루카, 화요일, 금요일 저녁에 뭐 해?"
"응? 별로 하는 거 없는데... 왜?"
"가라테 같이 안 할래?"
가라테 동아리에는 여학생도 많았다. 하루카도 금방 어울릴 것 같아서 제안했다. 일본 무술 동아리다 보니 일본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하루카를 환영해 줄 것 같았다.
"나도 할 수 있을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당연하지! 초보자도 완전 환영이야."
"음... 좋아! 한번 해볼게!"
하루카는 학창 시절 내내 배구부 활동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운동에 익숙했고, 새로운 운동을 배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이 날을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엔 가라테 동아리라는 교차점이 하나 생겼다.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 기숙사 앞에서 만나 같이 걸어서 체육관까지 향했다.
"One, two, three!"
"Oss! (오쓰!)"
외국어 구령에 맞춰 함께 움직였다. 기본기를 반복하고, 자세를 익히고, 스파링을 했다. 운동 후엔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함께 하는 시간이 흐르면서 하루카와 보내는 이 시간이 말레이시아 생활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같이 할래?"
아호가 일본 무술 '가라테'를 시작한 계기도 특별하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같이 가라테나 배워볼까?" 친구가 던진 한 마디가 전부였다.
지나고 보니 이건 마법의 주문이었다.
처음 친구가 아호를 가라테에 빠뜨렸던 것처럼,
아호는 똑같이 그녀에게 주문을 걸었다.
'같이'라는 인연의 마법을.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품에 안겨 숨을 쉬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알아간다. 삶은 처음부터 '같이'로 시작되었다. 그 힘이 얼마나 큰지, 그땐 몰랐다.
이렇게 아호와 하루카는 '같이'라는 마법에 걸려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3... 2... 1..."
"성공! 축하합니다!"
말레이시아의 한 쇼핑몰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친구와 함께 도전한 '5분 안에 뜨거운 우동 1kg 먹기' 챌린지. 젊은 패기와 호기심으로 시작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우동 먹기 성공과 함께 5만 원 상당의 외식상품권이 손에 쥐어졌다. 하지만 달콤한 승리의 여운도 잠시, 친구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고 신음했고, 아호 역시 뱃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면발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기분은 최고였다. 하루카와 데이트 자금이 생겼으니까.
하루카와 아호는 가라테 동아리를 같이 하며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루카! 오늘 학식 말고 밖에서 먹자! 내가 쏠게!"
"어? 진짜? 야호!"
소화기관을 혹사해서 얻은 전리품으로 남자의 자존심을 세웠다.
말레이시아의 뜨거운 햇살이 시내로 향하는 길 위 아스팔트를 달구고 있었다.
"진짜 버스 탈 거야? 택시 타면 천 원이면 되는데."
아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싼 택시 요금이었다. 하지만 하루카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 버스는 300원이야."
"택시비 내가 낼게."
"아니야."
성격이 급한 아호는 말레이시아에서 늘 택시만 탔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말레이시아 버스 시간표는 장식일 뿐이었다. 5분 후에 올 수도, 한 시간 후에 올 수도 있었다.
하루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호는 더 묻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가치관과 연결된 것이었다.
그날, 300원 버스비는 하루카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녀도 얼마든지 편하게 택시를 탈 수 있었지만, 필요 없는 지출을 하지 않았다. 아호와 다른 차이 속에 그녀의 삶의 방식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사소한 행동에서 자기 방식대로 사는 사람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자신과 다른 그녀의 모습은 아호의 마음을 건드리고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거창한 순간이 아니라 이런 작은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하루카와 아호,
둘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