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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는 날

by 아호파파B

어느덧 첫 학기가 끝나고 3개월간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하루카는 동남아 6개국 여행을 떠났고, 아호는 현지 친구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호와 하루카는 친구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환학생으로 온 둘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각자 나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말레이시아에 오기 전, 교환학생을 다녀온 선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중 단골 소재는 당연히 '국제 연애'였다.

'국제연애',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현실은 달랐다. 영화 같은 해피엔딩보다는 결국 이별하게 된다는 뻔한 결말이 대부분이었다. 수많은 사연을 들어온 터라, 아호는 불 보듯 뻔한 사랑놀이나 하며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그런 마음으로 첫 학기를 보냈다. 많은 친구를 사귀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성공적으로 한 학기를 마쳤다. 다음 학기 역시 의미 있게 보내리라 기대했다. 이때만 해도 모든 일이 뜻대로만 흘러갈 줄 알았던 아호였다.




개강 일주일 전, 오랜만에 하루카에게 연락이 왔다.


"아호! 어떻게 지냈어?"


"하루카! 오랜만이다. 여행 잘 다녀왔어?"


"힘들었는데 너무 좋았어! 어제 돌아왔어."


"잘 다녀와서 다행이다. 이제 곧 새 학기네."


"진짜 빨라. 다른 친구들은 다 돌아갔는데, 너는 한 학기 더 있는다고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나야말로. 아, 그런데 모레 시간 괜찮아? 말레이시아 친구가 이드 알 피트르(*) 축제에 초대했는데, 같이 갈래?"


"응, 좋아!"


(*이드알피르트 : 금식 기간인 라마단(رمضان)이 끝났음을 축하하는 무슬림 축제)





이슬람 축제 날 하루카와 다시 만났다. 3개월 만이었다.

동남아 햇빛에 그을린 그녀의 얼굴에서 긴 여행의 흔적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제 본 것처럼 편안했다.

그녀와 축제를 즐기고, 홈스테이 가족에게 줄 선물을 사러 쇼핑몰에 갔다. 함께 선물을 고르고 저녁까지 먹은 후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녹초가 된 몸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라? 이상하다. 그녀가 떠올랐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루 종일 함께 있었던 탓이었을까. 그녀를 생각하며 미소 짓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아니겠지, 오늘 너무 오래 봐서 그런 거겠지.'

생각을 떨쳐내려 애써 무시하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직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날 이후,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아호를 찾아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교환학생 오리엔테이션이 열렸다. 하루카와 아호에게는 두 번째 오리엔테이션이었다. 제일 뒷자리 구석에 나란히 앉았다. 한 학기를 보낸 경험자의 여유였다.

이번 학기에는 하루카와 수업도 몇 개 맞췄다. 말레이어 수업, 수영 수업, 그리고 가라테 동아리까지. 주 4일은 만나는 셈이었다.

수업을 마치면 함께 저녁을 먹고, 소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캠퍼스를 한 바퀴씩 걸었다. 큰 캠퍼스라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Jalan Jalan? (잘란 잘란?)


하루카와 아호가 주고받던 암호였다. 말레이어로 '산책하다'라는 뜻이다. 누군가 '잘란잘란?' 문자를 보내면 기숙사 앞에서 만나 함께 걸었다. 이런 시간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에게 고백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밤마다 찾아오는 그녀의 미소 때문일까. 애쓰지 않아도 같은 리듬으로 걷는 편안함 때문일까.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계속 울려왔다.


'아호야, 네 인생에서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머물고, 급류를 만나면 빨라지듯 흘러가는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존재는 아호에게 점점 스며들어 있었다.


너무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놓친 것을 후회할까? 잡은 것을 후회할까? 수많은 고민들을 하나씩 꺼내어 스스로에게 물었다. 질문을 거듭할수록 강한 확신이 밀려왔다.


이젠 아호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장거리 연애든 국제연애든 힘든 건 알겠어.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건 아호답지 않잖아?'


무작정 로맨스 영화를 틀었다.

하루카에게 영어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호는 결심했다. 그녀에게 마음을 전하기로.



...다음 이야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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