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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인연은 지나가고...

by 아호파파B

가슴의 동요도, 기대감도, 반가움도 없다. 그저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 울리는 전화일 뿐이었다.


"여보세요?"


"나야... 잘 지내지?"


"응... 뭐, 똑같지"


무미건조한 인사를 나눈다. 일주일에 한 번, 통화하자던 약속이 지켜진 지 벌써 몇 개월... 하지만 그 어떤 다짐도 벌어진 마음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저 가느다란 실 한 올로만 아슬하게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뭐 하고 있었어?"


"내일 수업 발표 준비하느라... 누나는?"


"바빠. 새 프로젝트 들어와서 야근도 많고..."


침묵이 흘렀다. 익숙하지만 어색한 침묵. 둘 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어떻게든 침묵의 벽을 허물어보려 아호는 지난주 있었던 해외 수업과 친구들과 놀았던 이야기를 꺼낸다. 누나는 직장 스트레스와 까다로운 상사, 끝없는 업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들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는 두 기차 같았다. 결코 교차하지 않는 이야기들로 시간이 채워지고 맴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무언가 빗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말레이시아로 떠나기 전, 아호는 같은 학과 선배와 사귀고 있었다. 연상인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포근함과 안정감, 편안함이 끌렸던 이유였다.

아호가 교환학생을 준비할 때, 그녀는 취업 준비에 한창이었다. 처음엔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처음 몇 번 떨어졌을 땐 "괜찮아, 다음엔 되겠지"라며 웃어 넘겼다. 하지만 불합격이 거듭되면서 그녀의 미소는 사라지고, 만날 때마다 한숨만 내쉬었다. 바닥까지 떨어진 그녀의 자존감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아호에게도 괴로움 이었다. 처음엔 기꺼이 그 무게를 함께 나누려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느새 아호는 그녀의 슬픔과 지친 마음을 온전히 다 받아줘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호의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피로가 쌓여갔다.


교환학생 합격 통지를 받았다. 마침 같은 시기, 그녀도 취업에 성공해 첫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둘 다 새로운 시작을 맞게 된 것이다.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기쁨 뒤에는 알 수 없는 불안함도 함께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것.


그 무거운 현실은 말레이시아로 떠나기 전 그녀가 아호에게 건넨 마지막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호야... 너 말레이시아 안 가면 안 돼?"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바뀌지 않는 사실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이 말은 밖으로 새어 나왔고, 둘 사이를 둘러싼 정적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한 동안 흐느끼며 울던 그녀의 울음소리만이 그 사이 빈 시간들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수화기 너머 흐르던 정적 끝에 아호가 말을 꺼냈다.


"누나..."


"응?"


"우리... 이제 그만하자..."


다시 몇 초의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가 대답했다.


"..... 알겠어."


놀람도 슬픔도 없었다. 서로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미뤄져 왔던 그날이 도달했을 뿐이었다.


"... 행복해."


"누나도..."


"안녕... 아호야"


"안녕... 누나"


그녀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사랑하고 헤어지며, 과정에서 아호는 관계를 배워가고 있었다.

하나의 인연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쉼표였다.


전화를 끊은 자리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는 여운만이 희미하게 맴돌았다.



... 다음 이야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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