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문을 빠져나오는 순간,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호야~"
중국에서 온 교환학생 웨이였다. 같은 수업을 듣는 사이였지만, 인사만 몇 번 나눠본 사이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달라 보였다.
"웨이! 무슨 일이야?"
"그게..."
웨이가 머뭇거렸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번지더니 손으로 머리카락을 슬쩍 옆으로 쓸어 넘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은데,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음식점 알고 있으면 같이 가줄 수 있어?"
아호는 '아, 한국 음식에 관심이 있구나. 한국인의 입맛이 궁금한가 보다.' 그저 단순한 부탁으로 들렸다.
"물론이지! 괜찮은 한국 식당 많이 알고 있어."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시간 어때?"
"좋아!"
별생각 없이 그렇게 가볍게 대답했다. 그저 맛있는 음식이나 같이 먹으러 가는 줄 알았다. 이것이 단순한 '한국 음식 탐방'이 아니라는 것을, 숨겨진 진짜 의도를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약속 당일. 특별할 것 없는 금요일 저녁이었다.
기숙사 앞에서 웨이를 기다리며 아호는 평소처럼 편한 청바지에 흰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호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카였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지난주 클럽에서 있었던 '맨발 사건' 이후, 둘 사이는 묘하게 가까워져 있었다.
"하루카, Hi~"
"여기서 뭐 해?"
"아, 친구랑 같이 한국 음식 먹으러 가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어."
그 순간이었다. 기숙사 저편에서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웨이가 나타났다. 아니, '등장'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한 것 같다.
헐.
순간 뇌가 멈춰버렸다. 눈앞의 광경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어깨가 살짝 드러난 원피스. 정성스럽게, 아니 완벽하게 그려진 메이크업. 그리고... 높은 하이힐.
아호의 눈은 동그래졌고, 입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이건... 이건 그냥 '밥 먹으러' 가는 차림이 절대, 절대 아니었다. 웨이의 시선은 아호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옆에 있던 하루카의 눈빛이 변했다. 밝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당황, 혼란, 그리고... 무언가 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 그래, 좋은 시간 보내..."
하루카의 목소리에는 묘하고 쌀쌀한 느낌이 묻어 있었다. 어색한 미소 뒤에 감춰진 진짜 감정은 읽을 수 없었다. 아마, '참나. 남자들이란...' 이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어... 어... 어... 응..."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루카는 돌아서서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은 분명 아호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함께 식당으로 가는 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웨이는 계속 말을 걸었지만 아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식당에 도착해서 몇 가지 유명한 한국 음식들을 주문하고 나름 열심히 설명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대화의 방향은 이상한 곳으로 향했다. 한국 음식에 대한 질문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는 데이트할 때 뭐 해?"
"한국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이 있어?"
"아호는, 한국 여자가 좋아? 아니면 외국 여자는 어때?"
그녀가 큰 키나 잘생긴 얼굴, 재력이나 능력도 없는 아호에게 끌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한낱 호기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이 분명했다.
2013년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과 일본에서 대 히트를 쳤다. 김수현과 전지현이 펼치는 한국 로맨스 드라마의 여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단지 '한국 남자'라는 이유만으로도 많은 외국 여학생들의 시선을 주목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살면서 처음 받아본 질문 공세에 아호는 어쩔 줄 몰랐다. 웃어야 하나, 아니면 진지하게 답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어쨋든 웨이는 아호에게 친구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아직 한국엔 끝내지 못한 그녀가 있었다. 미련인지 집착인지 사랑인지 모르는 감정만 남긴 채 떠나온 그녀.
그 존재는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었다.
수요일 저녁,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시계는 정확히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처럼, 약속된 그 시간이었다.
아호는 울리는 전화를 바라봤다.
벌써 몇 개월째 아호는 그녀와 미묘한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불안정한 균형을 끊어내리라 아호는 다짐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