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떨어지고 달이 드러났다. 낮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저녁 시간. 학생들의 웅성거림 속에 푸른색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녀 왼 손에는 기타가 들려 있다. 단정하게 올림머리를 한 그녀는 로비 한 중앙 작은 무대 위에 올라섰다. 웅성거리던 소리는 점차 줄어들었고 모든 시선은 한 곳을 향했다. 기모노 입은 소녀는 한 손을 가슴 위에 얹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박수소리가 고요한 밤공기와 섞여 퍼졌다. 왼손에 들고 있던 기타를 바로 고쳐 잡고 나머지 오른손을 기타 현 위에 올렸다. 멀리서도 기타 위 손 떨림이 전해졌다. 한 줄 한 줄 현을 튕겼다. 기타 선율은 퍼지며 로비 안을 채웠다. 이어서 일본 여학생의 목소리가 기타 소리와 섞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음색은 관중들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바로 이 장면이 아호가 처음 '하루카'를 봤던 기억이다.
정말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저 일본 여대생이 아호의 아내가 될 거라곤...
국제 연애 5년, 결혼 7년. 어느덧 시간의 물결은 12년이라는 먼 해안선까지 데려다 놓았다.
현실 속 역경이라는 거친 파도를 넘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수많은 풍랑을 견뎌냈다.
이 과정을 거쳐오면서 이제는 조금 노련한 항해사가 된 것일까?
결혼의 항해를 막 시작하려는 친구가 청첩장을 들고 찾아왔다.
아호는 지나온 시간을 통해 깨달은 지혜를 사랑의 여정을 출발하는 이 초보 선원에게 꼭 알려주어야 했다.
"친구야, 젊은 시절 뜨거움, 애틋함, 설렘, 그리움이 사랑의 모습이었다면, 7년 차 부부는 자비와 인내, 용서, 오래 참음으로 사랑이 이루어져 있더라. 진정한 사랑의 모습으로 점점 완전해지는 거지."
이 깊은 깨달음이 전해 졌는지 상관없이 두 남녀는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호는 곧 부부가 될 친구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부부에게도 있었던 사랑의 첫 모습이었다.
이젠 희미해진 기억 한 편으로만 남은 저 모습.
사랑의 항해를 출항하던 12년 전 그 시절 그때 그 이야기를 꺼내어본다.
저녁 9시. 전화벨이 울렸다. 약속된 시간이었다. 예상했지만 역시나 그녀였다.
"여보세요?"
"나야... 잘 도착했지?"
한국을 떠나 온 다음날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동시에 낯설었다.
"응... 이제 기숙사에 들어와서 짐 정리도 다 했어"
아무 일 없었던 척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떠나기 전 그녀가 했던 마지막 말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무언가 이미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이미 끝났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만 그 끝을 인정하기가 두려웠을 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통화하자는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은 마치 부러진 다리를 붕대로 감은 응급처치와도 같았다. 아무리 단단히 감아도 뼈는 이미 부러져 있었다. 붕대는 상처를 가리기만 할 뿐,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서로 외면하고 싶었다.
"시간이 늦었네."
"그래, 잘 지내고..."
"응, 누나도..."
"잘 자..."
"안녕..."
전과 다름없는 작별 인사로 전화를 끊었다. 아호는 기숙사 베란다로 나왔다. 동남아 밤하늘을 멍하니 보았다. 말레이시아의 밤공기는 묘한 온도를 품고 있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러나 높은 습도가 만들어낸 찝찝한 온도. 그 온도는 아호와 그녀의 관계와 닮아 있었다.
아호는 교환학생으로 말레이시아에 오게 되었다. 해외 대학 캠퍼스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동아리를 찾는 일이었다. 동아리 목록이 적힌 안내문을 훑어보다 눈동자는 한 곳에 멈췄다.
"아! 있다! 가라테!"
마치 보물을 찾은 듯 연락처를 옮겨 적었다. 아호는 한국에서도 가라테를 몇 년째 꾸준히 해왔다. 지역 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낯선 땅에서도 좋아하는 취미를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새로운 환경에서 친구를 사귀는 방법은 단순했다. 같은 취미를 함께하는 거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함께 땀 흘리고 부딪치다 보면 어느새 우정이 생겼다.
아호는 이곳에서 가능한 많은 것을 체험하며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그가 말레이시아에 온 목적이었다.
교환 학생 환영회가 열렸다.
학교 로비가 웅성거렸다. 금발머리, 검은 머리, 히잡을 쓴 무슬림까지 학교 로비에서 벌어진 광경은 마치 지구 전체가 축소된 거 같았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은 새로운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낯선 나라, 새 환경에서 공부한다는 기대와 설렘은 국가와 인종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서 느껴졌다. 대부분 교환학생들은 학교 기숙사에 지내었기에 기숙사 앞 학생 로비는 자주 글로벌 문화 행사 공간으로 쓰였다. 행사시간이 되었다. 벌써 어둑한 저녁이었다. 학생들은 둥근 로비의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150명쯤 되었다. 한국에서 온 학생은 20명 내외였다. 오늘 있을 교환학생 환영회도 각 국가별로 자기소개도 하고, 장기자랑도 하는 시간이었다. 신청한 학생들이 순서에 맞춰 나오기 시작했다. 신청자 명단을 보니 한국에서 신청한 사람은 없었다. 나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호와 모두 비슷한 마음이었나 보다.
국가와 함께 신청한 학생들이 한 명씩 호명되었다. 다음 국가가 호명되었다. 일본이었다. 푸른색 기모노를 입은 여학생이 로비 한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일본 전통 복장을 입은 등장만으로도 많은 학생들이 환호를 보내었다. 그녀의 손에는 기타가 들려 있었다. 단정하게 올림머리를 한 일본 여학생은 옅은 미소를 띠며 수줍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기타 현을 하나씩 울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죽이며 그녀의 기타 연주와 노랫소리에 귀 기울였다. 청아한 목소리가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아호도 넋을 잃고 그녀의 음색에 빠져들었다. 노래를 마친 일본 여대생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수줍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많은 학생들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박수 소리는 로비를 가득 채웠다. 아호의 손뼉 소리도 그 안에 섞여 있었다.
바로 이 순간이 아호의 인생을 바꾸게 한 운명적 만남의 시작이었음을 결코 알 수 없었다.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어떻게, 어떤 순간이 삶을 완전히 바꾸게 할지. 인생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 순간을 시작으로 아호와 하루카의 긴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다.
... 다음 이야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