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교환학생'이라는 공통점만으로도 누구와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대부분 기숙사에 머물렀기에 생활 패턴도 비슷했다. 기숙사 로비에서 마주치면 "Hi~" 하고 인사를 나누고, 카페테리아에서 누군가 밥을 먹고 있으면 옆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Hi~, 하루카라고 했지? 저번에 기타 연주 잘 봤어. 나는 아호라고 해!"
"Nice to meet you, 아호!"
며칠 전, 환영회 무대에서 기타 연주를 하던 일본 여학생이 혼자 카페테리아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호는 여느 친구들처럼 인사를 건네고 옆에 앉았다. 당시 영어에 한창 자신감이 넘쳐 있던 아호는 이때다 싶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번 학기에 핸드볼 강의 듣고 있는데, 이 더운 날씨에 밖에서 핸드볼을 한 시간 반 하다가 진짜 죽는 줄 알았어. 핸드볼이라서 당연히 실내에서 할 줄 알았는데, 이번 수업 정말 실패했어. 하루카 너는 수업 어때?"
아호는 경제학과를 다녔고, 하루카는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다. 같은 수업은 없었고, 기숙사 앞 로비에서 가끔 스쳐 지나갈 때 "Hi~" 인사를 나누거나, 이렇게 교내 카페테리아에서 밥 먹을 때 만나는 것 아니면 딱히 둘 사이에 아무런 접점은 없었다.
"나는 이슬람법 수업을 듣고 있는데 정말 재미있어. 무슬림 친구들이 모르는 부분도 잘 가르쳐주고..."
해외 대학 수업 경험담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 옆자리에 앉아 합류했다.
"Hey~ 제임스 왓쳐업!"
"아티프~ How do you do?"
친구들이 하나둘 추가될수록 수다는 더 풍성해졌다. 깔깔대며 서로 수다를 즐기다가 수업 시간이 되면 "Bye~"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고, 남은 친구들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사귀고 얘기하는 해외 캠퍼스 분위기였다.
학기 초, 하루카와 아호는 여느 다른 친구들과 같은 평범한 친구 사이에 불과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앞서 걷고 있는 하루카가 눈에 들어왔다. 아호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루카! 하이~"
"하이~ 아호!"
"수업 끝났어? 어디 가?"
"응, 일본 친구들이랑 카페테리아에서 밥 먹기로 했어."
"나도 밥 먹으러 가는 중인데, 같이 가도 돼?"
"그럼, 같이 가자!"
카페테리아에 도착하니 이미 다른 친구들도 모여 있었다. 히로미, 유카, 하루카, 아카리, 그리고 아호. 어쩌다 보니 남자는 아호 혼자였다. '일본 여대생들에게 둘러싸인 점심이라니...' 아호는 광대가 올라가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그중에는 같은 수업을 듣는 히로미도 있었다.
"히로미! 너도 있었네."
"어, 아호! 하루카랑 같이 왔어? 둘이 친해?"
"저번에 인사했었어. 마침 오는 길에 만났어. 밥 먹으러 간다길래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봤지."
"그렇구나. 여기 앉아."
식사를 하며 말레이시아 캠퍼스 생활에서 있었던 일화들을 서로 나누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히로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히로미는 잠시 머뭇거렸다. 목소리에 약간의 고민이 섞여 있었다.
"아호야, 같이 수업 듣는 캐티 알지?"
"응, 나랑 조별 과제 같은 팀이야."
"이번 주 금요일에 클럽 가자고 연락 왔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 나도 연락받았는데..."
순간 테이블의 모든 시선이 흥미로운 듯 우리의 이야기로 향했다. 캐티는 브루나이에서 온 교환학생이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들에게 클럽 가자는 연락을 여러 명에게 보낸 모양이었다.
대화를 듣던 유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클럽 가본 적 없는데... 한 번 가보고 싶긴 해."
하루카가 수줍게 웃으며 덧붙였다.
"나도 가본 적 없어. 근데 젊을 때 한 번은 가봐야 하지 않을까?"
테이블 분위기가 묘하게 달아올랐다. 모두의 눈빛에 호기심과 설렘이 번졌다. '다 같이 가보자'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우리 이번에 캐티랑 같이 가볼까?"
점심 식사에서 시작된 대화는 금요일 밤 일탈 계획으로 발전했다. 소문이 퍼졌는지, 실제 금요일이 되자 더 많은 친구들이 합류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밤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하루카와 아호, 이 두 남녀 사연의 첫 번째 장소는 바로 '클럽'이었다.
쿵쿵. 쿵쾅쿵쾅. 둥둥. 빰빠빰빠.
귀가 찢어질 듯한 베이스 사운드가 공간을 지배했다. 어둠 속에서 색색의 조명이 무작위로 번쩍이며 춤추는 사람들의 실루엣을 순간순간 드러냈다 감췄다. 금요일 밤, 클럽은 예상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호는 벽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쾌활하고 사교성이 좋은 아호는 이런 곳에서 잘 놀 것 같지만, 사실 이런 곳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시끄럽고, 답답하고, 사람들 땀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인 공기는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함께 온 친구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는 듯했다.
아호는 이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잠시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조용한 구석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출구 근처 기둥 옆에 혼자 서 있는 하루카의 모습이었다. 그녀도 아호처럼 주변의 소음과 혼잡함에 압도된 듯 보였다. 아호는 하루카에게 다가가 말했다.
"왜 안에서 안 놀고 이렇게 구석에 서 있어?"
하루카는 아호를 보자 반가운 듯 미소 지었다.
"아니, 너무 시끄럽고 어둡고 사람이 많아서 대피해 있는 거야."
아호는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하루카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와 귀에 대고 말했다.
"우리 먼저 나갈래? 밖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자."
이곳은 우리에게 맞지 않았다. 낯선 환경에 벌써 지친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클럽의 소음과 혼잡함을 뒤로하고 밤공기가 가득한 바깥으로 나왔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벤치에 앉자마자 하루카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하이힐을 벗었다. 그녀의 발은 이미 빨갛게 부어 있었다.
"클럽에 뭘 입고 가야 될지 몰라서 하이힐을 신고 왔는데, 발이 너무 아파."
"택시 타는 곳까지는 좀 걸어가야 되는데... 어떡하지?"
하루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신발 벗고 맨발로 걸어가려고..."
그녀는 체념한 듯 하이힐을 다시 신기를 포기했다. 말레이시아 밤거리를 맨발로 걷겠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니 딱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순간적인 결정이었다. 아호는 신발을 벗고 손에 들었다.
"나도 맨발로 말레이시아 거리를 한번 걸어봐야겠어."
하루카가 놀란 눈으로 아호를 바라봤다.
"나 때문이라면 안 그래도 돼."
"아니야, 나도 말레이시아의 콘크리트를 맨발로 느껴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한국 길거리랑 느낌이 다를 것 같아."
맨발이 된 두 사람은 양손에 신발을 쥔 채 밤거리를 걸었다. 콘크리트 바닥의 거친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졌지만, 마음이 따뜻해서일까 그 감촉마저 부드럽게 느껴졌다.
맨발이 된 하루카와 아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각자의 대학 생활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소리로 밤거리를 물들였다. 클럽의 시끄러운 음악과 복잡한 인파 속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이 이 순간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 다음 이야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