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전체’ 안에 있는 동안, ‘전체’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것 또한 동등하게 진실이다. 이 진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위대한 지식이 온 것이다.” —키발리온.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신성(많은 이름으로 불리는)이 “만물 안의 만물(All in All)”이라는 진술이 반복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들어왔으며, 그들이 이 부주의하게 내뱉어진 말들에 의해 감추어진 내적인 오컬트 진리를 얼마나 조금밖에 짐작하지 못했는가? 흔히 사용되는 이 표현은 위에 인용된 고대의 헤르메스 격언이 살아남은 것이다. 『키발리온』이 말하듯이, “이 진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위대한 지식이 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하므로, 그 이해가 그토록 많은 것을 의미하는 이 진리를 탐구하자. 이 진리의 진술, 이 헤르메스 격언 안에는, 가장 위대한 철학적, 과학적, 그리고 종교적 진리들 중 하나가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우주의 정신적 본성에 관한 헤르메스 가르침, 즉 “우주는 정신적이며, ‘전체’의 마음 안에 간직되어 있다”는 진리를 당신에게 제시했다. 『키발리온』이 위 인용문에서 말하듯이, “모든 것은 ‘전체’ 안에 있다.” 그러나 또한, “ ‘전체’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것 또한 동등하게 진실이다”라는 상호 관련된 진술에도 주목하라. 이 명백히 모순되는 진술은 역설의 법칙 아래에서 조화될 수 있다. 그것은 더욱이, ‘전체’와 그 정신적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한 정확한 헤르메스적 진술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전체’ 안에 있”음을 보았다. 이제 그 주제의 다른 측면을 검토해 보자.
헤르메스 가르침은 ‘전체’가 그 우주 안에, 그리고 우주 안의 모든 부분, 입자, 단위, 또는 조합 안에 내재한다(“안에 머무르며, 내재하고, 안에 거주한다”)는 취지이다. 이 진술은 보통 교사들에 의해 상응의 원리를 참조하여 설명된다. 교사는 학생에게 어떤 것, 사람, 아이디어, 정신적 형태를 가진 어떤 것의 정신적 이미지를 형성하도록 지시하며, 가장 선호되는 예시는 자신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아이디어를 형성하는 작가나 극작가, 혹은 자신의 예술로 표현하고자 하는 이상(理想)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화가나 조각가의 예이다. 각 경우에, 학생은 그 이미지가 오직 자신의 마음 안에서만 그 존재와 실재를 가지는 동안에도, 그 자신, 즉 학생, 작가, 극작가, 화가, 또는 조각가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정신적 이미지 안에 내재하고, 안에 머무르며, 안에 거주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정신적 이미지 안의 현실성의 전체 덕성, 생명, 영은 사상가의 “내재하는 마음”으로부터 파생된다는 것이다. 그 개념이 파악될 때까지, 잠시 이것을 고찰하라.
현대의 예를 들자면, 오셀로, 이아고, 햄릿, 리어왕, 리처드 3세는 그들의 구상 또는 창조 당시에 셰익스피어의 마음속에만 존재했다고 말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 또한 이 각각의 등장인물들 안에 존재하며, 그들에게 그들의 활력, 영, 그리고 행동을 부여했다. 우리가 미코버, 올리버 트위스트, 유라이어 히프로 아는 등장인물들의 “영”은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디킨스의 것인가, 아니면 이 각 등장인물들이 그들의 창조주와는 독립적인 개인적인 영을 가지고 있는가? 메디치가의 비너스, 시스티나의 마돈나, 벨베데레의 아폴론은 그들 자신의 영과 실재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창조자들의 영적, 정신적 권능을 대표하는가? 역설의 법칙은 두 명제 모두, 적절한 관점에서 볼 때, 진실이라고 설명한다. 미코버는 미코버이면서, 동시에 디킨스이다. 그리고 다시, 미코버가 디킨스라고 말해질 수 있는 동안에도, 디킨스는 미코버와 동일하지 않다. 인간은, 미코버처럼, “내 창조주의 영이 내 안에 내재해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아니다!”라고 외칠 수 있다. 이것은 “나는 신이다!”라는 귀에 거슬리는 외침으로 공기를 가득 채우는, 특정 반쯤 현명한 자들에 의해 그토록 시끄럽게 발표된 충격적인 반쪽 진리와 얼마나 다른가! 불쌍한 미코버, 혹은 교활한 유라이어 히프가 “나는 디킨스다”라고 외치거나,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미천한 흙덩이 중 일부가 “나는 셰익스피어다!”라고 유창하게 선언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전체’는 지렁이 안에 있으며, 그럼에도 지렁이는 ‘전체’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여전히 경이는 남으니, 비록 지렁이가 창조되어 오직 ‘전체’의 마음 안에서만 그 존재를 가지는 미천한 존재로 존재할지라도, ‘전체’는 지렁이 안에, 그리고 지렁이를 구성하는 입자들 안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전체’ 안에 있고, ‘전체’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이것보다 더 큰 신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학생은, 물론, 위에 주어진 예시들이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고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니, 그것들은 유한한 마음 안에서의 정신적 이미지들의 창조를 나타내는 반면, 우주는 무한한 마음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극의 차이가 그들을 분리시킨다. 그럼에도 그것은 단지 등급의 문제일 뿐이다. 동일한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상응의 원리는 각각에서 현현한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아래에서와 같이, 위에서도.”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존재 안에 내재하는 내주(內住)하는 영의 존재를 깨닫는 정도에 따라, 그는 생명의 영적 척도에서 상승할 것이다. 이것이 영적 발전이 의미하는 것이다. 즉, 우리 안의 영을 인식하고, 깨달으며, 현현시키는 것이다. 이 마지막 정의, 즉 영적 발전의 정의를 기억하고자 노력하라. 그것은 참된 종교의 진리를 담고 있다.
우주에는 많은 존재의 차원들, 많은 생명의 하위-차원들, 많은 존재의 등급들이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존재들의 척도에서의 발전에 의존하며, 그 척도의 가장 낮은 지점은 가장 거친 물질이고, 가장 높은 지점은 ‘전체’의 영과 가장 얇은 구분에 의해서만 분리된다. 그리고, 이 생명의 척도를 따라 위로 그리고 앞으로,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다. 모두는 그 끝이 ‘전체’인 ‘길’ 위에 있다. 모든 진보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명백히 모순되는 모든 외관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위로 그리고 앞으로 향한다. 그러한 것이 깨달은 자들의 메시지이다.
우주의 정신적 창조 과정에 관한 헤르메스 가르침은, 창조 주기의 시작에, ‘전체’가 그 존재의 측면에서, 자신의 “생성”의 측면을 향해 자신의 의지를 투사하고, 창조의 과정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진동 에너지가 매우 낮은 등급에 도달할 때까지 진동을 낮추는 것으로 구성되며, 그 지점에서 물질의 가장 거친 가능한 형태가 현현한다고 가르쳐진다. 이 과정은 퇴화(Involution)의 단계라 불리며, 그 안에서 ‘전체’는 그 창조물 안에 “포함되거나”, “싸여지게” 된다. 이 과정은 헤르메스주의자들에 의해, 자신의 정신적 창조물에 너무나 몰두하여 거의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잠시 동안 거의 “자신의 창조물 속에서 사는” 예술가, 작가, 또는 발명가의 정신 과정과 상응 관계를 가진다고 믿어진다. 만일 “싸여진” 대신에 우리가 “황홀경에 빠진(rapt)”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의도된 바에 대한 더 나은 개념을 제공할 것이다.
이 비자발적인 창조의 단계는 때때로, 진화적 상태가 “끌어들임(Indrawing)”이라 불리는 것과 같이, 신성한 에너지의 “쏟아냄(Outpouring)”이라 불린다. 창조 과정의 극단적인 극은 ‘전체’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진화적 또는 “끌어들임” 단계의 시작은 리듬의 추의 귀환 흔들림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즉, “집으로 돌아온다”는 개념이 모든 헤르메스 가르침에 담겨 있다.
가르침은, “쏟아냄” 동안, 진동은 마침내 그 충동이 멈출 때까지 점점 더 낮아지고, 귀환 흔들림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이 있으니, “쏟아냄”에서는 창조적인 힘들이 빽빽하게 그리고 전체로서 현현하는 반면, 진화적 또는 “끌어들임” 단계의 시작부터는, 개별화의 법칙, 즉 힘의 단위들로 분리되려는 경향이 현현하여, 마침내 ‘전체’를 비개별화된 에너지로 떠났던 그것이, 물리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진화를 통해 척도에서 점점 더 높이 상승한, 수많은 고도로 발전된 생명의 단위들로서 그 근원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고대의 헤르메스주의자들은 ‘전체’의 마음 안에서 우주의 정신적 창조 과정을 묘사할 때 “명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관조”라는 단어 또한 빈번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의도된 개념은 신성한 주의(Divine Attention)의 사용인 듯하다. “주의(Attention)”는 “뻗다, 펼치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이므로, 주의의 행위는 실로 정신적 에너지의 정신적 “뻗음, 확장”이며, 따라서 우리가 “주의”의 실제 의미를 검토할 때 기저의 개념은 쉽게 이해된다.
진화 과정에 관한 헤르메스 가르침은, ‘전체’가 창조의 시작을 명상하고, 그리하여 우주의 물질적 기초를 확립하고, 그것을 존재 속으로 생각한 후에, 점차 자신의 명상에서 깨어나거나 일어나서, 그렇게 함으로써 물질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차원들 위에서, 순차적으로 그리고 질서 있게, 진화의 과정을 현현 속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승 운동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질은 덜 거칠어지고, 단위들이 생겨나며, 조합들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생명이 나타나 점점 더 높은 형태로 현현하며, 마음은 점점 더 명백해진다. 즉, 진동이 끊임없이 더 높아진다. 요컨대, 모든 국면에서의 전체 진화 과정이 시작되고, 확립된 “끌어들임” 과정의 법칙들에 따라 진행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시간으로 영겁에 영겁을 차지하며, 각 영겁은 수없이 많은 수백만 년을 포함하지만, 그럼에도 깨달은 자들은 우리에게, 퇴화와 진화를 포함한 우주의 전체 창조가, ‘전체’에게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하다고 알려준다. 수없이 많은 영겁의 시간 주기들의 끝에서, ‘전체’는 그 주의, 즉 그 관조와 명상을 우주로부터 거두어들이니, 위대한 작업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것이 나왔던 ‘전체’ 속으로 거두어진다. 그러나 신비 중의 신비여, 각 영혼의 영은 소멸되지 않고, 무한히 확장된다. 창조된 자와 창조주는 합병된다. 그러한 것이 깨달은 자들의 보고이다!
위의, ‘전체’의 “명상”과 그 후의 “명상으로부터의 깨어남”의 예시는, 물론, 유한한 예시로 무한한 과정을 묘사하려는 교사들의 시도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래에서와 같이, 위에서도.” 그 차이는 단지 등급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전체’가 우주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일으키듯이, 인간 또한 (시간이 지나면) 물질적 차원 위에서 현현하기를 멈추고, 자신을 점점 더 내주하는 영, 즉 실로 “신성한 에고”인 그것 속으로 거두어들인다.
이 과에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한 가지 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형이상학적 사변의 분야를 침범하는 것에 매우 가깝지만, 우리의 목적은 단지 그러한 사변의 헛됨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진리를 찾으려 모험했던 모든 사상가들의 마음에 불가피하게 떠오르는 그 질문을 언급한다. 그 질문은, “왜 ‘전체’는 우주들을 창조하는가?”이다. 그 질문은 다른 형태로 물어질 수 있지만, 위가 그 탐구의 요지이다.
사람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그 이름값을 하는 답은 없다. 어떤 이들은 ‘전체’가 그것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상상했지만, 이것은 부조리하다. ‘전체’가 이미 소유하지 않은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다른 이들은 ‘전체’가 “사랑할 무언가를 원했다”는 생각에서 답을 찾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이 쾌락이나 오락을 위해, 혹은 그것이 “외로웠기” 때문에, 또는 그 힘을 현현하기 위해 창조했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유치한 설명과 생각들이며, 사유의 유년기 시절에 속한다.
다른 이들은 ‘전체’가 자신의 “내적 본성”, 즉 “창조적 본능” 때문에 창조하도록 “강요받았다”고 가정함으로써 그 신비를 설명하려 시도했다. 이 생각은 다른 것들보다 진보했지만, 그 약점은 ‘전체’가 내적이든 외적이든 어떤 것에 의해 “강요받는다”는 생각에 있다. 만일 그 “내적 본성” 또는 “창조적 본능”이 그것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요했다면, 그때 그 “내적 본성” 또는 “창조적 본능”이 ‘전체’ 대신에 절대자가 될 것이므로, 그 명제의 그 부분은 무너진다. 그럼에도, ‘전체’는 창조하고 현현하며, 그렇게 함에 있어 어떤 종류의 만족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떤 무한한 등급에서는 그것이 인간 안의 “내적 본성” 또는 “창조적 본능”에 상응하는 것을, 상응하게 무한한 욕망과 의지와 함께, 가져야만 한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그것이 행동하기를 의욕하지 않는 한 행동할 수 없으며, 행동하기를 욕망하지 않는 한 행동하기를 의욕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으로 어떤 만족을 얻지 않는 한 행동하기를 욕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내적 본성”에 속할 것이며, 상응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전체’가 내적뿐만 아니라 외적인 어떤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생각하기를 선호한다. 그것이 어려움의 근원에 있는 문제이며, 문제의 근원에 있는 어려움이다.
엄밀히 말해서, ‘전체’가 행동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도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유”는 “원인”을 암시하며, ‘전체’는 원인이 되기를 의욕할 때를 제외하고는 원인과 결과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원리는 작동하게 된다. 그러니, 당신이 보듯이, 그 문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전체’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전체’가 단지 “존재한다”고 말하듯이, 우리는 “ ‘전체’는 그것이 행동하기 때문에 행동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전체’는 그 자체로 모든 이유이며, 그 자체로 모든 법칙이며, 그 자체로 모든 행동이다. 그리고 진실되게, ‘전체’는 그 자신의 이유, 그 자신의 법칙, 그 자신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더 나아가, ‘전체’, 그 이유, 그 행위는, 법칙이며, 하나이며, 모두 같은 것을 위한 이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현재의 과들을 당신에게 제공하고 있는 이들의 의견으로는, 그 답은 그 존재의 비밀과 함께, ‘전체’의 내적 자아 안에 잠겨 있다. 상응의 법칙은, 우리의 의견으로는, “생성의 측면”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전체’의 그 측면에만 도달한다. 그 측면의 이면에는, 모든 법칙이 법칙 속에서 사라지고, 모든 원리가 원리 속으로 합병되며, ‘전체’, 원리, 그리고 존재가 동일하고, 하나이며, 같은 것인 “존재의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이 점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은 헛되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그 질문을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형이상학과 신학의 평범한 대답들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서 그 문제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우리 학생들에게, 일부 고대의, 그리고 현대의 헤르메스 교사들이, “내적 본성”이라는 결론의 결과와 함께, 그 질문에 상응의 원리를 적용하는 방향으로 다소 기울었던 반면, 그럼에도 전설에 따르면, 위대한 헤르메스는, 그의 진보한 학생들이 이 질문을 했을 때, 그의 입술을 꽉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음으로써, 답이 없음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그는 “지혜의 입술은, 이해의 귀에게를 제외하고는 닫혀 있다”는 그의 철학의 격언을 적용하려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심지어 그의 진보한 학생들조차도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자격을 주는 이해를 소유하지 못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만일 헤르메스가 그 비밀을 소유했다면, 그는 그것을 전수하지 못했으며, 세상에 관한 한, 헤르메스의 입술은 그것에 관해 닫혀 있다. 그리고 위대한 헤르메스가 말하기를 주저했던 곳에서, 어떤 필멸자가 감히 가르치겠는가?
그러나, 기억하라,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무엇이든, 만일 참으로 답이 있다면, “모든 것이 ‘전체’ 안에 있는 동안, ‘전체’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것 또한 동등하게 진실이다”라는 진리는 남는다. 이 점에 대한 가르침은 단호하다. 그리고, 우리는 인용문의 마지막 말을 덧붙일 수 있다. “이 진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위대한 지식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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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7-1. 지혜의 계보와 비교 철학
『키발리온』의 제7장은 우리를 헤르메스주의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이자, 모든 비의적 실천의 근간을 이루는 하나의 장엄한 역설 앞으로 다시 한번 데려다 놓습니다. “모든 것이 ‘전체’ 안에 있는 동안, ‘전체’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것 또한 동등하게 진실이다.” 이 ‘전체 안의 모든 것(All in THE ALL)’과 ‘모든 것 안의 전체(THE ALL in All)’라는 두 개의 진술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서양 신학의 가장 오래된 난제를 헤르메스주의적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헤르메스 철학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변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실천적인 기술, 즉 ‘아르스(Ars)’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실천적 기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단 하나의 마스터키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키발리온』의 두 번째 원리이자, 『에메랄드 타블렛』의 심장인 ‘상응의 원리(The Principle of Correspondence)’입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아래에서와 같이, 위에서도.” 이 원리는 단순히 두 개의 다른 영역이 ‘비슷하다’는 것을 넘어, 하늘과 땅, 정신과 물질, 대우주와 소우주가 보이지 않는 힘의 끈으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선언합니다.
이 상응의 원리야말로, 헤르메스주의의 세 가지 위대한 실천적 기술—점성술, 연금술, 그리고 신성 마법—이 세워진 공통의 철학적 토대입니다. 이 세 가지 기술은 모두, ‘아래’의 세계에서 행하는 구체적인 조작을 통해 ‘위’의 세계의 힘을 불러내리거나, 혹은 ‘위’의 세계의 패턴을 읽어 ‘아래’의 세계에서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기술이 어떻게 상응의 원리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마법 철학자 중 한 명인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Heinrich Cornelius Agrippa)의 기념비적 저작인 『오컬트 철학 삼서(De Occulta Philosophia libri tres)』, 즉 우리가 가진 자료인 『자연 마법 철학(Philosophy of Natural Magic)』을 통해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합니다.
점성술: 천상의 서명을 읽는 기술
상응의 원리가 적용되는 첫 번째 영역은 ‘점성술(Astrology)’입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점성술은 종종 비과학적인 미신으로 치부되지만, 고대의 현자들에게 그것은 우주의 거대한 질서와 인간의 운명 사이의 깊은 관계를 탐구하는 신성한 과학이었습니다. 그 근본적인 전제는, ‘위’의 세계, 즉 행성들과 별들의 운행이 ‘아래’의 세계, 즉 지상의 모든 존재와 사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아그리파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하위의 것들은 그들의 “별들과 운명, 그리고 그들의 상위자들”로부터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며, 천상의 힘이 어떻게 지상의 모든 것에 그 고유한 특성을 부여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태양(위)은 지상의 황금(아래)과 상응하며, 따라서 황금은 태양의 속성인 고귀함, 빛, 그리고 생명력을 지닙니다. 달(위)은 은(아래)과 상응하며, 은은 달의 속성인 수용성, 변화, 그리고 정화의 힘을 지닙니다. 화성(위)은 철(아래)과 상응하고, 목성(위)은 주석(아래)과 상응합니다.
진정한 점성가는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그는 이 우주적 상응의 언어를 읽을 줄 아는 해석가입니다. 그는 한 개인이 태어나는 순간의 천궁도(horoscope)를 분석함으로써, 그 사람의 영혼에 어떤 천상의 힘들이 ‘서명’처럼 각인되었는지를 읽어냅니다. 그의 성격적 강점(행성들의 길한 배치)과 약점(행성들의 흉한 배치), 그리고 그가 평생에 걸쳐 마주하게 될 운명의 패턴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현명한 점성가는 이 지식을 통해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을 넘어, 운명을 자신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합니다. 그는 『키발리온』이 가르치듯이, “더 높은 것을 더 낮은 것에 대항하여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람의 천궁도에 사투르누스(토성)의 영향이 너무 강하여, 그가 우울과 제약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다면, 그는 사투르누스의 영향이 약해지고 목성(유피테르)이나 태양의 영향이 강해지는 ‘때(kairos)’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는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운명의 흐름을 읽고 그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의 세계에 대한 앎을 통해 ‘아래’의 세계에서의 삶을 조화롭게 만드는, 점성술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연금술: 소우주 안에서 대우주를 재현하는 기술
상응의 원리가 가장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은 바로 ‘연금술(Alchemy)’입니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용광로와 유리 그릇이라는 ‘소우주(아래)’ 안에서, 신이 대우주(위)를 창조했던 바로 그 과정을 경건하게 재현합니다.
아그리파는 모든 창조가 “혼돈(chaos)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연금술 작업의 첫 단계가 어떻게 창세기의 분리 과정과 상응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제1질료(Prima Materia)라는 혼돈 속에서, “미묘한 것을 거친 것에서, 순수한 것을 불순한 것에서” 분리해냅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대우주를 구성하는 네 가지 원소(불, 공기, 물, 흙)를 자신의 작은 세계 안에서 정화하고 분리시킵니다.
그 다음, 그는 이 정화된 원소들을 다시 결합시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 즉 현자의 돌을 탄생시킵니다. 이 결합의 과정은 하늘의 힘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과정입니다. 그는 ‘위’의 세계인 천상의 힘(영)을, ‘아래’의 세계인 자신의 물질 속에 ‘고정(fixation)’시킵니다. 이처럼, 연금술사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원리를 실천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자신의 용광로 안에서 하늘과 땅의 신성한 결혼을 주관하는 사제가 됩니다. 그 결과물인 현자의 돌은, 하늘의 힘과 땅의 힘을 모두 자신 안에 온전히 통합한, 완벽한 소우주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신성 마법(테우르기아): 신을 향한 상승의 기술
상응의 원리가 도달하는 가장 숭고하고도 비밀스러운 영역은 바로 ‘신성 마법(Theurgy, 테우르기아)’입니다. 점성술이 ‘위’를 읽어 ‘아래’를 이해하는 기술이고, 연금술이 ‘아래’에서 ‘위’를 재현하는 기술이라면, 신성 마법은 ‘아래’에 있는 인간이 ‘위’의 세계로 직접 올라가 신적인 존재들과 교감하고 궁극적으로 신과 합일하는 기술입니다.
아그리파는 이 세계가 세 가지 층위—원소의 세계(지상), 천상의 세계(행성), 그리고 지성의 세계(신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세 세계는 상응의 원리에 따라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 연결의 사다리를 타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신성 마법사는 이 상응의 사슬을 의식적으로 활용합니다. 그는 먼저, 특정 신성한 힘(예: 목성의 자비로운 힘)과 상응하는 지상의 물질들(예: 목성의 금속인 주석, 목성의 식물인 참나무, 목성의 동물인 독수리)을 사용하여 제단을 꾸밉니다. 그 다음, 그는 그 힘과 상응하는 천상의 시간(목성이 길한 위치에 있는 시간)을 선택하여 의식을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그 신성한 힘의 이름을 부르며, 그 힘의 본질을 명상함으로써, 자신의 의식(소우주)을 그 신성한 힘(대우주)의 진동수와 일치시킵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마법사는 자신의 영혼을 육체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더 높은 차원의 세계로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천상의 존재들과 직접 대화하고, 그들로부터 지혜를 얻으며, 마침내 모든 분리된 존재의 근원인 ‘전체’, 즉 ‘하나’와의 합일(henosis)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헤르메스주의적 구원의 최종적인 목표이며, ‘상응의 원리’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가장 위대한 가능성입니다.
『키발리온』의 제2원리 ‘상응의 원리’는 헤르메스주의의 모든 실천적 기술들이 세워진 단 하나의 주춧돌입니다. 그것은 우주를 분리된 조각들의 집합이 아닌, 모든 부분이 서로 교감하고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바라보게 하는 세계관입니다. 이 원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는, 더 이상 고립되고 무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우주 전체와 공명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는 별들의 움직임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고, 용광로의 불꽃 속에서 창조의 신비를 재현하며, 마침내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여 신들의 합창에 참여하는, 하늘과 땅을 잇는 위대한 중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해설 7-2.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이 고대의 헤르메스 격언은, 우리를 둘러싼 외부 세계가 사실은 우리 내면세계의 거대한 거울이라는, 현대인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진실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보통 ‘나’와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며, 나의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대부분 외부의 부당한 환경이나 타인의 잘못 때문이라고 믿곤 합니다. 그러나 상응의 원리는 우리에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외부 현실—우리의 인간관계, 직업적 성취, 심지어는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국가의 모습까지도—이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내면 상태, 즉 우리의 신념과 감정, 그리고 무의식적 패턴(소우주)이 외부로 투사되고 물질화된 결과(대우주)임을 가르쳐줍니다. 이 원리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우리를 삶의 수동적인 희생자에서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능동적인 연금술사로 변모시키는 가장 위대한 인식의 전환입니다.
관계라는 이름의 거울: 투사와 그림자
상응의 원리가 가장 명백하고도 고통스럽게 드러나는 영역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우리는 왜 유독 특정 유형의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끌리거나, 혹은 그들과 갈등을 겪는 것일까요? 왜 어떤 이는 평생에 걸쳐 자신을 통제하려는 연인을 만나고, 다른 이는 언제나 자신을 돌봐줘야 하는 무력한 파트너와 관계를 맺게 될까요? 헤르메스 철학의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상응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통합하지 못한 내면의 반쪽, 즉 아니마(Anima)나 아니무스(Animus)를 외부의 실제 인물에게 투사(projection)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내면 드라마를 재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자신의 주체성을 억압당한 한 여성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녀의 무의식 속에는 강력하고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부정적인 아니무스’의 원형이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는 자신을 지배하려는 남성을 경멸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바로 그 익숙한 패턴에 끌리게 됩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을 통제하고 무시하는 남성들과 연애 관계를 맺으며, “왜 나에게는 이런 남자들만 나타날까?”라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상응의 원리는 우리에게, 그녀가 만나는 외부의 남성(아래)은, 그녀 내면의 미해결된 아버지 콤플렉스와 부정적 아니무스(위)의 정확한 반영임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외부의 남자를 바꾸려는 헛된 노력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 상처 입은 아니무스를 치유하고, 그를 긍정적이고 지혜로운 내면의 파트너로 변성시키는 것입니다. 이 내면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녀는 더 이상 외부에서 폭군을 찾지 않게 될 것이며, 비로소 자신을 존중하고 지지해주는 건강한 파트너를 만날 준비가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직장 내의 갈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특정 상사나 동료에게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혐오감을 느낀다면, 잠시 멈추어 그가 나의 어떤 ‘그림자(Shadow)’를 건드리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에게서 보는 교활함이나 나태함이, 사실은 내가 내 안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바로 그 모습은 아닌지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인간관계는, 우리 내면의 어두운 구석을 비추어 정화하고 통합하도록 이끄는, 가장 자비로운 연금술의 ‘용매(solvent)’가 될 수 있습니다.
조직과 사회: 집단적 내면의 반영
상응의 원리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 전체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까지 확장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조직이나 사회 또한, 그 구성원들의 집단적인 의식과 무의식(소우주)이 외부적으로 현현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대우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가 극심한 내부 경쟁과 불신, 그리고 소통의 부재로 고통받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표면적으로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나 리더십의 부재가 문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르메스적 관점에서 보면, 그 조직 문화(아래)는 구성원들의 집단적인 내면 상태(위)를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만일 구성원 대다수가 자신의 가치를 오직 성과로만 증명해야 한다는 깊은 불안감과, 타인을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기는 분리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조직은 필연적으로 서로를 믿지 못하고 정보를 숨기며,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착하는 병든 문화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외부적인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경쟁의 패러다임에서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두려움의 진동에서 신뢰의 진동으로 의식의 전환을 이루는 내면의 작업과 병행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한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현상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의 반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회에 극단적인 이념 대립과 혐오가 만연한다면, 그것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내면의 그림자를 타인과 다른 집단에게 얼마나 격렬하게 투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경 파괴라는 외부의 위기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며 끝없는 성장을 추구해 온 인류의 집단적인 탐욕과 오만이 외부 세계에 물질화된 결과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사회 변혁은, 외부의 적을 찾아 비난하고 제거하려는 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먼저 “세상은 바로 나의 거울이다”라는 상응의 원리를 깊이 받아들이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고 변성시키는, 침묵의 혁명을 시작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실천의 길: 현실을 창조하는 정신적 연금술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상응의 원리’는 우리에게, 자신의 삶과 세상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한 힘을 우리 손에 쥐여주는 가장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 세계의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 상태를 의식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우리가 경험하는 외부 현실의 질(質)을 바꿀 수 있는 능동적인 창조주입니다.
이것은 결코 현실을 무시하는 유아론적(solipsistic) 환상이 아닙니다. 『키발리온』이 경고했듯이, 우리는 이 세상의 법칙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모든 법칙의 기저에 있는 것이 ‘정신’임을 알고, 더 높은 정신적 법칙을 사용하여 더 낮은 물리적 법칙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인간관계가 고통스럽다면, 상대방을 바꾸려 애쓰는 대신, 그를 통해 드러난 당신 자신의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집중하십시오. 만일 당신의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직업을 바꾸기 전에, 먼저 당신의 일에 대한 ‘의미 부여’라는 정신적 태도를 바꾸는 것에서 시작하십시오. 이처럼, 우리의 시선을 외부에서 내부로 돌리고, 내면의 소우주를 정화하고 조화롭게 만들 때, 외부의 대우주는 마치 거울처럼, 그 변화된 내면의 모습을 우리에게 충실하게 반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헤르메스주의자들이 수천 년간 비밀리에 전수해 온, 삶을 황금으로 바꾸는 가장 위대한 연금술의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