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현명한 자는, 우주의 비교적 비실재성을 인식하고, 자신이 그 법칙들을 거역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한 자들은 헛되고 주제넘은 어리석은 자들이며, 그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바위에 부서지고 원소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다. 진실로 현명한 자는, 우주의 본성을 알고, 법칙에 대항하여 법칙을 사용하며, 더 높은 것을 더 낮은 것에 대항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연금술의 기술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변성시켜, 그리하여 승리한다. 숙달은 비정상적인 꿈, 환영, 그리고 환상적인 상상이나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힘들-을 더 낮은 힘들-에 대항하여 사용하는 데 있다. 즉, 더 높은 차원에서 진동함으로써 더 낮은 차원의 고통들을 피하는 것이다. 주제넘은 부정이 아니라, 변성술이 스승의 무기이다.” —키발리온.
이것이 우주의 역설이니, ‘전체’가 창조를 시작할 때 현현하는 극성의 원리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은 반쪽 지혜와 완전한 지혜의 차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무한한 ‘전체’에게, 우주, 그 법칙들, 그 권능들, 그 생명, 그 현상들은 명상이나 꿈의 상태에서 목격되는 것들과 같지만, 유한한 모든 것에게, 우주는 실재하는 것으로 다루어져야만 하며, 삶과 행동과 사유는 그에 따라, 비록 더 높은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이해를 가지고서라도, 그 위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 각각은 자신의 차원과 법칙에 따른다. 만일 ‘전체’가 우주가 참으로 실재라고 상상한다면, 우주에게는 화가 있을지니, 그때는 더 낮은 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신성을 향한 탈출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주는 고정된 것이 될 것이고, 진보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인간이, 반쪽 지혜 때문에, 우주를 단지 (자신의 유한한 꿈과 유사한) 꿈으로 여기고 행동하고, 살며,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그에게 그렇게 되며, 몽유병자처럼 그는 원 안을 계속해서 빙빙 돌며 비틀거리고, 아무런 진보도 이루지 못하며, 마침내 그가 무시했던 자연법칙들 위로 멍들고 피 흘리며 넘어짐으로써 강제로 깨어나게 된다. 당신의 마음을 언제나 별에 두되, 당신의 눈은 당신의 발걸음을 지켜보게 하라. 당신이 위를 쳐다보는 이유로 진흙탕에 빠지지 않도록. 신성한 역설, 즉 우주는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언제나 진리의 두 극, 즉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기억하라. 반쪽 진리들을 경계하라.
헤르메스주의자들이 “역설의 법칙”으로 아는 것은 극성의 원리의 한 측면이다. 헤르메스 저술들은 삶과 존재의 문제들을 고찰함에 있어 역설의 출현에 대한 언급들로 가득 차 있다. 교사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학생들에게 어떤 질문의 “다른 쪽 면”을 생략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들의 경고는 특히 모든 철학 학생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일반적으로 “상식”으로 알려진 것과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의 문제들을 향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학생들이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의 신성한 역설을 확실히 파악하도록 주의를 주니, 그들이 반쪽 진리의 진흙탕에 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특별한 과가 쓰였다. 그것을 주의 깊게 읽으라!
생각하는 사람이 우주가 ‘전체’의 정신적 창조물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후 갖게 되는 첫 번째 생각은, 우주와 그것이 포함하는 모든 것이 한낱 환영, 즉 비실재라는 것이다. 이 생각에 그의 본능은 반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모든 위대한 진리들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관점과 상대적인 관점 모두에서 고찰되어야만 한다. 절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물론, 우주는 그 자체로서의 ‘전체’와 비교될 때, 환영, 꿈, 환상극의 본질을 띤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평범한 관점에서도 이것을 인식하니, 우리는 세상을 “왔다가는, 태어났다가 죽는, 덧없는 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창조된 우주라는 개념이 ‘전체’라는 개념과 대조될 때, 그것이 어떤 본질을 가졌는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무엇이든 간에, 비영속성과 변화, 유한성과 비실체성의 요소는 언제나 그 개념과 연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형이상학자, 과학자, 그리고 신학자 모두가 이 생각에 동의하며, 그 생각은 각 학파의 형이상학 및 신학 이론들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개념들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헤르메스 가르침은 당신에게 더 친숙한 것들보다 더 강한 용어로 우주의 비실체성을 설교하지 않는다. 비록 그 주제에 대한 그들의 제시가 다소 더 놀랍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시작과 끝을 가진 어떤 것이든, 어떤 의미에서는, 비실재이고 비진실이어야만 하며, 우주는 모든 사상 학파에서 그 규칙 아래에 들어온다. 절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그 주제를 생각하거나 토론할 때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전체’ 외에는 어떤 실재적인 것도 없다. 우주가 물질로 창조되었든, 혹은 ‘전체’의 마음 안의 정신적 창조물이든, 그것은 비실체적이고, 비영속적이며, 시간과 공간과 변화의 것이다. 우리는 당신이 우주의 정신적 본성에 대한 헤르메스적 개념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 사실을 철저히 깨닫기를 원한다. 다른 모든 개념들을 숙고해보고, 이것이 그것들에도 해당되는 진실인지 보라.
그러나 절대적인 관점은 그림의 한쪽 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다른 쪽 면은 상대적인 것이다. 절대적 진리는 “신의 마음이 아는 대로의 사물들”로 정의되어 온 반면, 상대적 진리는 “인간의 가장 높은 이성이 이해하는 대로의 사물들”이다. 그러므로 ‘전체’에게 우주는 비실재이고 환영이며, 한낱 꿈이거나 명상의 결과여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우주의 일부를 형성하고 필멸의 기능들을 통해 그것을 보는 유한한 마음들에게, 우주는 매우 실재하며, 그렇게 간주되어야만 한다. 절대적인 관점을 인식함에 있어, 우리는 우리의 필멸의 기능들에게 제시되는 대로의 우주의 사실들과 현상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우리는 ‘전체’가 아니다.
익숙한 예시를 들자면, 우리 모두는 물질이 우리의 감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우리의 유한한 마음조차도,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물질과 같은 것은 없다는 과학적 언명을 이해한다.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원자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그 원자들 자체는 단지 전자 또는 “이온”이라 불리는 힘의 단위들의 그룹일 뿐이고, 진동하며 끊임없는 원형 운동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돌을 차고 그 충격을 느낀다. 우리가 그것이 위에서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억하라, 우리의 뇌를 통해 그 충격을 느끼는 우리의 발 또한, 전자로 구성된 물질이며, 그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의 뇌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기껏해야, 만일 우리의 마음 때문이 아니라면, 우리는 발이나 돌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예술가나 조각가가 돌이나 캔버스에 재현하고자 애쓰는 그 이상은 그에게 매우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나 극작가의 마음속에 있는, 그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자 하는 등장인물들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우리의 유한한 마음들의 경우에 사실이라면, 무한한 마음 안에서 창조된 정신적 이미지들의 실재성의 등급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오, 친구들이여, 필멸자들에게 이 정신성의 우주는 매우 실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비록 우리가 그 안에서 차원에서 차원으로, 더 높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지라도 그러하다. 그것을 실제 경험 외에 달리 알려면, 우리는 ‘전체’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척도에서 더 높이 올라갈수록, 즉 “아버지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유한한 것들의 환영적 본성이 더 명백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가 마침내 우리를 자신 속으로 거두어들일 때까지는 그 환영은 실제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영이라는 특징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주의 실재적 본성을 인식하며, 우리가 생명을 통해, 존재의 차원에서 차원으로 여행함에 따라, 우리의 상승 과정에서 최선의 효과를 내기 위해 그 정신적 법칙들을 이해하고 사용하고자 노력하자. 우주의 법칙들은, 그 정신적 본성 때문에, 결코 “철의 법칙”보다 덜하지 않다. ‘전체’를 제외한 모든 것은 그것들에 묶여 있다. ‘전체’의 무한한 마음 안에 있는 것은, ‘전체’의 본성에 부여된 그 실재성 자체에 버금가는 등급으로 실재한다.
그러니,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전체’의 무한한 마음 안에 굳건히 붙들려 있으며, 우리를 해칠 어떤 것도, 우리가 두려워할 어떤 것도 없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전체’ 바깥의 어떤 권능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고요하고 안전하게 쉴 수 있다. 일단 성취되면, 이 깨달음 안에는 위안과 안전의 세계가 있다. 그러면 “고요하고 평화롭게 우리는 잠드나니, 깊음의 요람에서 흔들리며”—‘전체’인 무한한 마음의 대양의 가슴 위에서 안전하게 쉬면서. 실로, ‘전체’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
물질은, 우리가 물질의 차원에 거주하는 동안, 우리에게 결코 물질보다 덜하지 않다. 비록 우리가 그것이 단지 원자들의 형성 속에서 서로 주위를 빠르게 진동하고 회전하는 “전자들”, 즉 힘의 입자들의 집합체일 뿐임을 알지라도 말이다. 원자들은 차례로 진동하고 회전하며 분자들을 형성하고, 후자는 차례로 더 큰 물질 덩어리들을 형성한다. 또한 물질은, 우리가 탐구를 더 나아가, 헤르메스 가르침으로부터, 전자들이 단지 그 단위일 뿐인 “힘”이 단지 ‘전체’의 마음의 현현이며, 우주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본성이 순수하게 정신적이라는 것을 배울 때, 결코 물질보다 덜해지지 않는다. 물질의 차원 위에 있는 동안, 우리는 그 현상들을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물질을 통제할 수 있지만(더 높거나 낮은 등급의 모든 스승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더 높은 힘들-을 적용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우리가 상대적인 측면에서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려 시도할 때 우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을 부정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그 차원 위에 거주하는 한, 그 상대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무시하려 시도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연의 법칙들은, 우리가 그것들 역시 단지 정신적 창조물일 뿐임을 알게 될 때, 결코 덜 일정하거나 덜 효과적이게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양한 차원들 위에서 완전한 효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더 높은 것들을 적용함으로써 더 낮은 법칙들을 극복하며, 오직 이 방법으로만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법칙을 피하거나 그것을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다. ‘전체’ 외에는 어떤 것도 법칙을 피할 수 없다. 이는 ‘전체’가 법칙 그 자체이며, 모든 법칙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가장 진보한 스승들은 보통 인간들의 신들에게 귀속되는 권능들을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명의 위대한 위계 속에는, 필멸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인간들 중 가장 높은 스승들의 그것조차도 초월하는 존재와 권능을 가진 존재들의 무수한 계급들이 있다. 그러나 심지어 가장 높은 스승과, 가장 높은 존재조차도, 법칙에 고개를 숙여야 하며, ‘전체’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귀속시킨 것조차도 초월하는 권능들을 가진 이 가장 높은 존재들조차도, 만일 이들조차도 법칙에 묶여 있고 종속되어 있다면, 그때 우리 인종과 등급의 필멸의 인간이, 그가 법칙들이 본성에 있어 정신적이며, 단지 ‘전체’의 정신적 창조물이라는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감히 자연의 법칙들을 “비실재적!” 공상적이고 환영적이라고 생각할 때의 그 주제넘음을 상상해보라. ‘전체’가 지배하는 법칙들이 되기를 의도한 그 법칙들은, 거역되거나 논파될 수 없다. 우주가 존속하는 한, 그것들도 존속할 것이니, 우주는 그 뼈대를 형성하고 그것을 함께 붙드는 이 법칙들 덕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헤르메스의 정신의 원리는, 모든 것이 정신적이라는 원리 위에서 우주의 참된 본성을 설명하면서도, 우주, 생명, 또는 진화에 대한 과학적 개념들을 바꾸지 않는다. 사실, 과학은 단지 헤르메스 가르침을 확증할 뿐이다. 후자는 단지 우주의 본성이 “정신적”이라고 가르치는 반면, 현대 과학은 그것이 “물질적”이라고 가르쳐왔다. 혹은 (최근에는) 그것이 마지막 분석에서는 “에너지”라고 가르쳤다. 헤르메스 가르침은 허버트 스펜서의, “모든 것이 비롯되는 무한하고 영원한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기본 원리에 대해 아무런 흠도 찾지 않는다. 사실, 헤르메스주의자들은 스펜서의 철학 안에서, 이제껏 공표된 자연 법칙들의 작용에 대한 최고의 외부적 진술을 인식하며, 그들은 스펜서가 수천 년 전 고대 이집트에 거주했던 고대의 한 철학자의 재탄생이었으며, 그는 나중에 기원전 500년에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로 화신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무한하고 영원한 에너지”에 대한 진술이, 항상 그들의 교리, 즉 그의 “에너지”가 ‘전체’의 마음의 에너지라는 것을 덧붙여서, 헤르메스 가르침의 선상에 직접적으로 있다고 여긴다. 헤르메스 철학의 마스터키를 가지고, 스펜서의 학생은 그 위대한 영국 철학자의 내적 철학적 개념들의 수많은 문들을 열 수 있을 것이며, 그의 작업은 그의 이전 화신들의 준비의 결과들을 보여준다. 진화와 리듬에 관한 그의 가르침들은 리듬의 원리에 관한 헤르메스 가르침들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러므로, 헤르메스의 학생은 우주에 관한 그의 소중한 과학적 견해들을 어떤 것도 제쳐둘 필요가 없다. 그에게 요청되는 모든 것은, “‘전체’는 마음이며, 우주는 정신적이다. 즉, ‘전체’의 마음 안에 간직되어 있다”는 기저의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일곱 가지 원리 중 다른 여섯 가지가 그의 과학적 지식에 “잘 들어맞을” 것이며, 모호한 점들을 밝혀내고 어두운 구석에 빛을 던지는 데 기여할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니, 우리가 그리스 초기 철학자들의 헤르메스 사상의 영향을 깨달을 때 그러하다. 현대 과학의 이론들은 그들의 사상의 기초 위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헤르메스 원리(정신의 원리)의 수용은, 현대 과학과 헤르메스 학생들 사이의 유일한 큰 차이점이며, 과학은 실재를 찾기 위한 탐구 속에서 방황해 온 미궁에서 벗어날 길을 어둠 속에서 더듬으며, 점차 헤르메스적 입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과의 목적은 우리 학생들의 마음에, 모든 의도와 목적에 있어, 우주와 그 법칙들, 그리고 그 현상들이, 인간에 관한 한, 물질주의나 에너지주의의 가설 아래에서와 똑같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어떤 가설 아래에서도, 우주는 그 외적 측면에서 변화하고, 영원히 흐르며, 덧없다. 그러므로 실체성과 실재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진리의 다른 극을 주목하라) 동일한 가설 아래에서, 우리는 마치 그 덧없는 것들이 실재하고 실체적인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야만 한다. 항상 다양한 가설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을 가지고서 말이다. 즉, 오래된 견해들 아래에서는 정신적 권능이 자연적 힘으로서 무시되었지만, 정신주의 아래에서는 그것이 가장 위대한 자연적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차이가, 그 원리와 그 결과적인 법칙들 및 실천을 이해하는 자들에게, 삶을 혁명적으로 바꾼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모든 학생들이여, 정신주의의 이점을 파악하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법칙들을 알고, 사용하고, 적용하는 법을 배우라. 그러나 『키발리온』이 말하듯이, 반쯤 현명한 자들을 극복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물의 명백한 비실재성에 최면이 걸리게 하여, 그 결과 그들이 꿈의 세계에 사는 꿈속의 사람들처럼 방황하며, 인간의 실질적인 작업과 삶을 무시하고, 그 끝은 “그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바위에 부서지고 원소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는” 유혹에 굴복하지 말라. 오히려 같은 권위자가 말하듯이, 현명한 자들의 본보기를 따르라. “법칙에 대항하여 법칙을 사용하고, 더 높은 것을 더 낮은 것에 대항하여 사용하며, 연금술의 기술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변성시켜, 그리하여 승리하라.” 권위자를 따라, 우리는 “숙달은 비정상적인 꿈, 환영, 그리고 환상적인 상상이나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힘들-을 더 낮은 힘들-에 대항하여 사용하는 데 있다. 즉, 더 높은 차원에서 진동함으로써 더 낮은 차원의 고통들을 피하는 것이다”라는 진리를 무시하는 반쪽 지혜(이는 어리석음이다)를 피하자. 학생이여, 항상 기억하라. “주제넘은 부정이 아니라, 변성술이 스승의 무기이다.” 위의 인용문들은 『키발리온』에서 온 것이며, 학생이 기억에 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꿈의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면서도, 우리의 삶과 행동에 관한 한 실재하는 우주에 산다. 우주에서의 우리의 일은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들을 사용하여 더 낮은 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하며 사는 것이다. 즉, 계속 살아가며, 매일 발생하는 상황들 아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가능한 한 우리의 가장 큰 이상과 이상향에 부응하며 사는 것이다. 삶의 참된 의미는 이 차원의 인간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만일 누구에게라도 알려져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최고의 권위자들과 우리 자신의 직관은, 우리가 가능한 한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에 부응하며 살고, 명백히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같은 방향으로의 보편적 경향을 깨닫는 데 있어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은 빈번한 휴식처와 함께, 언제나 위로 향한다.
『키발리온』의 메시지를 읽고, “현명한 자들”의 본보기를 따르라. 그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멸망하는 “반쯤 현명한 자들”의 실수를 피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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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6-1. 지혜의 계보와 비교 철학
『키발리온』의 제6장은 우리를 헤르메스 철학의 가장 미묘하고도 중요한 길, 즉 ‘역설(paradox)’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 길은 ‘반쯤 현명한 자들(half-wise)’이 쉽게 빠지는 두 가지 치명적인 함정, 즉 극단적인 유물론과 극단적인 관념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외줄과도 같습니다. 이 장의 핵심은 바로 ‘신성한 역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가 한편으로는 ‘전체(THE ALL)’의 마음속에 있는 정신적 창조물이기에 ‘실재하지 않으면서도(IS NOT)’,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유한한 우리에게는 너무나 실재하기에 그 법칙을 따라야만 하는, ‘여전히 존재하는(still IT IS)’ 실체라는 역설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신이 세계를 초월해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 안에 내재한다는 ‘범재신론(panentheism)’의 고전적인 형태입니다. 이 심오한 역설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서양 근대 철학의 역사에서 이와 가장 유사한 사유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세계로 잠시 여행을 떠나고자 합니다. 17세기의 합리주의 철학자인 스피노자는, 그의 주저 『에티카(Ethica)』에서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헤르메스주의의 ‘신성한 역설’과 놀라울 정도로 깊이 공명하는 철학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절대적 관점과 상대적 관점: 두 개의 진리
『키발리온』은 진리에 두 가지 다른 차원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는 “신의 마음이 아는 대로의 사물들”인 ‘절대적 진리(Absolute Truth)’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가장 높은 이성이 이해하는 대로의 사물들”인 ‘상대적 진리(Relative Truth)’입니다.
‘절대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경험하는 이 우주는 ‘전체’와 비교하면 한낱 “환영, 꿈, 환상극”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작과 끝을 가진 모든 것은 그 본질상 비실재적이며, 오직 영원하고 불변하는 ‘전체’만이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만 머무르는 ‘반쯤 현명한 자들’은, 우주의 모든 법칙과 현상을 무시하고 거역해도 된다는 치명적인 오만에 빠집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전체’와 동일하다는 환상 속에서, 현실의 삶과 법칙을 무시하다가, 결국 “바위에 부서지고 원소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는” 파멸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영적 체험에 취해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 미성숙한 영성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상대적 관점’에만 머무르는 이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물질세계와 그 법칙들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전체’라는 절대적 실재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오직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만을 진리라고 여깁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유물론은, 그들을 운명과 인과의 법칙에 묶인 채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는, 또 다른 종류의 어리석음입니다.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 하나의 실체, 두 개의 속성
이 신성한 역설은 스피노자의 철학 속에서 가장 정교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스피노자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실체(Substance)’, 즉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신은 인격적인 창조주가 아니라,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자기 원인적인(causa sui) 실재 그 자체입니다. 이 점에서, 그의 ‘신’은 『키발리온』의 ‘전체’와 거의 동일한 개념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하나의 실체는 무한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유한한 지성은 그중 단 두 가지 속성, 즉 ‘사유(thought)’와 ‘연장(extension)’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사유’는 정신적인 모든 현상의 근원이며, ‘연장’은 물질적인 모든 현상의 근원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유와 연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실체(신)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두 가지 표현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키발리온』의 역설과 만나는 지점입니다. 『키발리온』이 “우주는 정신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사유’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모든 물질과 법칙은 궁극적으로 ‘전체’라는 거대한 마음의 정신적 창조물입니다. 반면, 우리가 “우주는 실재하며 그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연장’이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물질세계는 그 자체의 견고한 법칙을 가진,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객관적인 실재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물질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두 개의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측면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팔을 들어 올려야겠다는 ‘생각(사유)’이 일어나는 것과, 실제로 내 팔이 올라가는 ‘움직임(연장)’은, 인과적으로 연결된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실체의 변화가 정신적 속성과 물질적 속성으로 동시에 표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키발리온』의 ‘신성한 역설’은, 우주가 정신이면서 동시에 물질이며, 환영이면서 동시에 실재라는, 두 개의 모순되는 진술이 사실은 하나의 동일한 실재에 대한 두 개의 다른 관점임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현명한 자의 길: 법칙을 사용하여 법칙을 넘어서기
그렇다면 진실로 현명한 자는 이 역설을 어떻게 살아냅니까? 『키발리온』은 그들이 “법칙에 대항하여 법칙을 사용하며, 더 높은 것을 더 낮은 것에 대항하여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헤르메스주의적 자유의 핵심입니다.
현명한 자는 우주의 법칙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토아 철학자처럼, 이 세계가 ‘철의 법칙’에 의해 지배됨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 모든 법칙들이 궁극적으로 ‘정신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압니다. 따라서 그는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법칙을 사용하여, 더 낮은 차원의 물질적 법칙의 ‘결과’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력의 법칙(낮은 법칙)은 우리가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게 될 것임을 규정합니다. ‘반쯤 현명한 자’는 “물질은 환영이야”라고 외치며 절벽에서 뛰어내리지만, 그는 중력의 법칙에 의해 바위에 부딪혀 부서질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현명한 자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공기역학이라는 더 높은 법칙을 이해하고, 그 법칙을 사용하여 비행기라는 도구를 만듭니다. 그는 이 더 높은 법칙(비행)을 사용하여, 더 낮은 법칙(중력)의 지배를 ‘극복’하고 하늘을 날게 됩니다. 그는 법칙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법칙을 다른 법칙에 대항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원인과 결과의 원리’는 우리의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운명의 법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정신의 원리’라는 더 높은 법칙을 사용하여, 자신의 정신 상태를 변화시킴으로써 과거라는 원인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에 대한 ‘해석’을 바꿈으로써, 과거가 더 이상 자신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되도록 ‘변성’시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키발리온』의 ‘신성한 역설’은 우리에게, 영성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잡는 섬세한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 세상이 더 높은 실재의 그림자임을 아는 ‘절대적 관점’을 통해, 세상의 고통과 집착으로부터 초연해지는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그림자 속에서의 삶 또한 소중하고 실재적인 것임을 아는 ‘상대적 관점’을 통해, 우리의 발걸음을 신중하게 살피고, 이 세계의 법칙을 존중하며,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언제나 별에 두되, 당신의 눈은 당신의 발걸음을 지켜보게 하라.” 이 두 시선을 동시에 유지하는 자만이, 반쪽 진리의 진흙탕에 빠지지 않고, 마침내 하늘과 땅을 통합하는 진정한 의미의 스승이 될 것입니다.
해설 6-2.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
우리 현대인의 정신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이분법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성공이 아니면 실패, 선이 아니면 악, 이상이 아니면 현실, 영적인 것이 아니면 물질적인 것. 우리는 세상을 이처럼 서로 배타적인 두 개의 범주로 나누고,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강요받습니다. 이러한 ‘A이거나 B(either/or)’라는 흑백논리의 폭정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풍요로운 회색지대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 내면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억압하며, 끝없는 갈등과 불안의 원인이 됩니다. 『키발리온』의 제6장이 제시하는 ‘신성한 역설’은, 바로 이 이분법적 사고라는 감옥의 문을 여는 가장 강력한 마스터키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모든 심오한 진리가 ‘A이면서 동시에 B(both/and)’라는 역설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가르치며, 모순처럼 보이는 두 개의 극단을 하나의 더 높은 진실 안에서 통합하는 지혜로 우리를 이끕니다.
반쪽 지혜의 함정: 절대주의와 허무주의
『키발리온』은 ‘반쪽 지혜(half-wisdom)’의 위험성을 거듭 경고합니다. 반쪽 지혜란, 역설의 한쪽 극단만을 붙들고 그것이 전체 진리라고 착각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첫 번째 함정은 ‘절대적 관점’에만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이 물질세계가 궁극적으로는 ‘전체’의 마음속에 있는 정신적 창조물이므로, 한낱 “환영”이며 “비실재적”이라는 진리의 한쪽 면에만 집착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사로잡힌 사람은, 현실의 삶과 그 법칙들을 무시하는 영적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는 “나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돈이나 건강, 인간관계 같은 세속적인 문제는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치 몽유병자처럼 현실 위를 위태롭게 걸으며, 자신의 발밑을 살피지 않고 오직 하늘의 별만을 쳐다보다가, 결국 “자신이 무시했던 자연법칙들 위로 멍들고 피 흘리며 넘어짐으로써 강제로 깨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미성숙한 영성이 어떻게 삶의 파멸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통렬한 경고입니다.
두 번째 함정은 ‘상대적 관점’에만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이 물질세계와 그 법칙들이 유일한 실재라고 믿는 극단적인 유물론입니다. 이 관점에 갇힌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차원이나 마음의 힘을 미신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는 “현실이 이런데 어떻게 하겠어”라고 말하며, 주어진 환경과 조건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더 높은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운명의 체스판 위에서 다른 힘들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여지는 ‘졸(pawn)’의 삶에 만족하게 됩니다. 이것은 가능성을 부정하는 메마른 현실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더 높은 차원으로의 진보로부터 단절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지혜: 역설의 양극을 껴안기
그렇다면 진실로 현명한 자는 이 두 가지 함정을 어떻게 피합니까? 그는 역설의 양 극단을 모두 껴안는, 통합적인 길을 걷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우주가 궁극적으로 정신적이고 비실재적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굳게 견지합니다. 이 앎은 그에게, 삶의 모든 고통과 상실,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정과 초연함을 선물합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결국 지나가는 “덧없는 쇼”임을 알기에, 어떤 것에도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다른 한편으로 이 ‘덧없는 쇼’가 유한한 자신에게는 너무나 실재적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 연기해야 한다는 ‘상대적 진리’ 또한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그는 “법칙들을 사용하여 더 낮은 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하며” 살아가고, “매일 발생하는 상황들 아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가장 큰 이상에 부응하며 삽니다. 그는 자신의 발이 현실이라는 단단한 땅을 딛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마음은 영원이라는 하늘의 별을 향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한 명의 위대한 연극배우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역할(예: 햄릿)이 실재가 아니며, 무대 위의 모든 것이 꾸며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절대적 관점).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무대 위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진실하게 햄릿의 고뇌를 연기하고, 그의 모든 대사와 행동에 온전히 몰입합니다(상대적 관점). 만일 그가 자신의 역할이 가짜라고 생각하며 건성으로 연기한다면, 그는 형편없는 배우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그가 자신이 정말로 햄릿이라고 착각한다면, 그는 미쳐버릴 것입니다. 위대한 배우는, 이것이 연극임을 알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연극이 아닌 것처럼 연기하는 역설적인 지혜를 체득한 사람입니다.
삶의 기술: 법칙을 사용하여 법칙을 넘어서기
이 역설적인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창조적인 기술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바로 “법칙에 대항하여 법칙을 사용하며, 더 높은 것을 더 낮은 것에 대항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완벽한 인과의 법칙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절대적 진리).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정신의 원리’라는 더 높은 법칙을 사용하여, 우리의 생각과 신념을 바꿈으로써 과거라는 원인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변성’시킬 수 있습니다(상대적 실천).
우리는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이며 사랑이라는 것을 압니다(절대적 진리).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부당한 관계나 상황에 대해, 명확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며 건강한 경계를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압니다(상대적 실천).
이것이 바로 “주제넘은 부정이 아니라, 변성술이 스승의 무기”라는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현자는 현실의 어려움을 “그것은 환영일 뿐이야”라고 부정하며 눈감아 버리는 대신, 그 현실의 법칙을 인정하고,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영적 법칙을 적용하여 그 현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성’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상주의의 구름 위를 떠다니지도 않고, 현실주의의 진흙탕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늘의 힘을 땅으로 끌어내려, 땅을 하늘처럼 만드는 연금술사입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로, 『키발리온』의 ‘신성한 역설’은 우리를 이분법적 사고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가장 위대한 열쇠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모든 모순과 갈등이 사실은 더 높은 차원의 통일성을 향한 필연적인 과정임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더 이상 ‘A이거나 B’라는 양자택일의 고통 속에서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A이면서 동시에 B’일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일 수 있고, 초연하면서 동시에 열정적일 수 있으며, 신성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불완전한 인간일 수 있습니다. 이 역설의 중심에 고요히 머무르며, 삶의 모든 대극들이 춤추는 것을 허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분열을 넘어, 모든 것을 품에 안는 온전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