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공간, 그리고 변화의 우주 아래에, 그리고 그 이면에, 언제나 실체적 실재—근본적인 진리가 발견된다.” —키발리온.
“실체(Substance)”란 “모든 외적 현현의 기저에 있는 것, 본질, 본질적 실재, 물(物) 자체” 등을 의미한다. “실체적(Substantial)”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본질적 요소인, 실재하는” 등을 의미한다. “실재(Reality)”란 “실재하는 상태, 참되고, 영속하며, 유효하고, 고정되었으며, 영구하고, 실제적인 것” 등을 의미한다.
모든 외적 외관이나 현현의 아래와 이면에는, 항상 하나의 실체적 실재가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법칙이다. 인간은 자신이 그 단위인 우주를 고찰하며, 물질과 힘, 그리고 정신 상태에서의 변화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는 어떤 것도 진정으로 존재하는(IS)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생성되고 변화하고(BECOMING and CHANGING) 있음을 본다. 어떤 것도 가만히 서 있지 않다. 모든 것은 태어나고, 자라나며, 죽어가고 있다. 어떤 것이 그 정점에 도달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리듬의 법칙은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어떤 것에도 실재, 영속하는 특질, 고정성, 혹은 실체성이란 없다. 변화 외에는 어떤 것도 영구하지 않다. 그는 모든 것들이 다른 것들로부터 진화하고, 다시 다른 것들로 해체되는 것을 본다. 끊임없는 작용과 반작용, 유입과 유출, 세움과 허물음, 창조와 파괴, 탄생, 성장 그리고 죽음. 변화 외에는 어떤 것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 모든 변화하는 것들이 어떤 기저에 있는 힘, 즉 어떤 실체적 실재의 외적인 외관이나 현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모든 땅과 모든 시대의 모든 사상가들은, 이 실체적 실재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성을 인정해왔다. 이름값을 하는 모든 철학들은 이 생각 위에 기반을 두어 왔다. 사람들은 이 실체적 실재에 많은 이름을 부여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신성(Deity)이라는 용어로 (많은 명칭 아래) 불렀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무한하고 영원한 에너지”라 불렀고,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을 “물질”이라 부르려 시도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 존재를 인정했다. 그것은 자명하며, 어떤 논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과들에서, 우리는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세계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 중 일부, 즉 헤르메스 스승들의 본보기를 따라, 이 기저에 있는 힘, 이 실체적 실재를, 우리가 인간이 이름과 용어를 초월하는 그것(THAT)에 적용한 수많은 용어들 중 가장 포괄적이라고 여기는 “전체(THE ALL)”라는 헤르메스적 이름으로 불러왔다.
우리는 모든 시대의 위대한 헤르메스 사상가들의 견해뿐만 아니라, 더 높은 존재의 차원에 도달한 깨달은 영혼들의 견해 또한 받아들이고 가르친다. 이들 모두는 ‘전체’의 내적 본성은 알 수 없다(UNKNOWABLE)고 단언한다. 이는 그러해야만 하니, ‘전체’ 그 자신 외에는 어떤 것도 자신의 본성과 존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헤르메스주의자들은 “그 자체로서의” ‘전체’는 알 수 없으며, 영원히 그러해야만 한다고 믿고 가르친다. 그들은 ‘전체’의 내적 본성에 관한 신학자들과 형이상학자들의 모든 이론, 추측, 그리고 사변들을, 무한의 비밀을 파악하려는 필멸의 마음들의 유치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러한 노력들은 그 과업의 바로 그 본성 때문에 항상 실패해왔고, 앞으로도 항상 실패할 것이다. 그러한 탐구를 추구하는 자는, 모든 건전한 추론, 행동 또는 행위로부터 길을 잃고, 삶의 일에 완전히 부적합해질 때까지, 사유라는 미궁 속을 빙빙 돌고 돌 뿐이다. 그는 마치 자신의 횃대 바퀴를 미친 듯이 돌고 도는 다람쥐와 같아서, 영원히 여행하지만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고, 결국에는 여전히 죄수이며, 그가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인격, 특질, 속성, 특징, 그리고 속성들을 ‘전체’에게 돌리려 시도하는 자들은 훨씬 더 주제넘으니, 그들은 ‘전체’에게 인간의 감정, 느낌, 그리고 특징들, 심지어 인류의 가장 사소한 특질들, 예컨대 질투, 아첨과 칭찬에 대한 민감성, 제물과 숭배에 대한 욕망, 그리고 인류의 유년기 시절로부터 온 다른 모든 잔재들을 돌린다. 그러한 생각들은 성장한 남성과 여성에게 합당하지 않으며, 급속히 폐기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내가 종교와 신학, 그리고 철학과 형이상학을 구별한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종교란 ‘전체’의 존재와 그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신학이란 인간들이 그에게 인격, 특질, 그리고 특징들을 돌리려는 시도, 그의 일, 의지, 욕망, 계획, 그리고 설계에 관한 그들의 이론들, 그리고 ‘전체’와 사람들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자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철학이란 알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의 지식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형이상학이란 그 탐구를 경계를 넘어 알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져가려는 시도를 의미하며, 신학과 같은 경향을 띤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종교와 철학은 모두 실재에 뿌리를 둔 것들을 의미하는 반면, 신학과 형이상학은 무지의 유사(流沙)에 뿌리를 둔 부러진 갈대와 같아서,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에 가장 불안정한 지지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 학생들에게 이 정의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그것들을 언급할 뿐이다. 어쨌든, 당신은 이 과들에서 신학과 형이상학에 대해 거의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의 본질적인 본성은 알 수 없지만, 그 존재와 관련된 어떤 진리들은 인간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보고들을 검토하는 것은, 특히 그것들이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깨달은 자들의 보고들과 일치하므로, 적절한 탐구의 주제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당신을 이 탐구에 초대한다.
“근본적인 진리, 즉 실체적 실재인 그것은, 진정한 이름 붙이기를 넘어서 있지만, 현자들은 그것을 전체라 부른다.” —키발리온.
“그 본질에 있어서, 전체는 알 수 없다.” —키발리온.
“그러나, 이성의 보고는 정중히 받아들여지고, 존중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키발리온.
우리가 생각하는 한,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간 이성의 보고들은, 알 수 없는 것의 베일을 걷어내려 시도하지 않으면서, ‘전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알려준다.
(1) ‘전체’는 실재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어야만 한다. ‘전체’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전체’는 ‘전체’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2) ‘전체’는 무한해야만 한다. ‘전체’를 정의하고, 한정하며, 경계를 짓고, 제한하거나, 제약할 다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 무한해야 하니, 즉 영원해야 한다. 그것은 항상 계속해서 존재해왔음에 틀림없다. 그것을 창조했을 다른 어떤 것도 없으며, 무언가는 결코 무에서 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단 한 순간이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계속해서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을 파괴할 어떤 것도 없으며, 그것은 결코 단 한 순간이라도 “존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는 결코 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간 속에서 무한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곳에 있어야만 한다. ‘전체’의 바깥에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끊김, 중단, 분리, 또는 방해 없이 공간 속에서 연속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연속성을 끊거나, 분리하거나, 방해할 어떤 것도 없으며, “틈을 메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힘에 있어서 무한해야 하니, 즉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것을 제한하고, 제약하며, 억제하고, 한정하며, 방해하거나, 조건을 달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힘에도 종속되지 않으니, 다른 어떤 힘도 없기 때문이다.
(3) ‘전체’는 불변해야만 한다. 즉, 그 실재적 본성에 있어 변화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에 변화를 일으킬 어떤 것도 없으며, 그것이 변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그것이 변해왔을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에 더해지거나 빼질 수 없으며,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없으며, 어떤 면에서든 더 커지거나 작아질 수 없다. 그것은 항상 지금의 그것, 즉 ‘전체’였어야만 하며, 항상 그러해야만 한다. 그것이 변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도 결코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전체’가 무한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하고, 불변하므로, 유한하고, 변하기 쉽고, 덧없으며, 조건적인 어떤 것도 ‘전체’일 수 없다는 결론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실재에 있어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러한 모든 유한한 것들은 실재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아야만 한다. 이제 혼란스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헤르메스 철학의 가면 아래 당신을 크리스천 사이언스 분야로 이끌려는 것이 아니다. 이 명백히 모순되는 상태의 일에 대한 화해가 있다. 인내심을 가져라, 우리는 때가 되면 그것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모든 형태의 물리적 기초를 형성하는 “물질”이라 불리는 것을 본다. ‘전체’는 단지 물질인가? 전혀 아니다! 물질은 생명이나 마음을 현현할 수 없으며, 생명과 마음이 우주에 현현하므로, ‘전체’는 물질일 수 없다. 어떤 것도 자신의 근원보다 더 높이 오를 수 없으며, 원인에 없는 것은 결과에 결코 현현하지 않으며, 선행하는 것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결과로서 진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과학은 우리에게 물질과 같은 것은 실재로 없다고 알려준다.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중단된 에너지 또는 힘”, 즉 낮은 진동수의 에너지 또는 힘일 뿐이다. 최근 한 저자가 말했듯이, “물질은 신비 속으로 녹아들었다.” 심지어 물질 과학조차도 물질 이론을 포기했으며, 이제는 “에너지”의 기초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전체’는 단지 에너지 또는 힘인가? 물질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서의 에너지나 힘은 아니다. 그들의 에너지와 힘은 생명이나 마음이 없는,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마음은 잠시 전에 주어진 이유로, 맹목적인 에너지나 힘에서 결코 진화할 수 없다. “어떤 것도 자신의 근원보다 더 높이 오를 수 없다. 포함되지 않은 것은 진화하지 않는다. 원인에 없는 것은 결과에 현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체’는 단지 에너지나 힘일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생명과 마음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그보다 더 잘 안다. 우리는 살아있고, 바로 이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 마음을 사용하고 있으며, 에너지나 힘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자들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주에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물질이나 에너지보다 더 높은 것은 무엇인가? 생명과 마음! 그들의 다양한 전개의 등급들에 있는 생명과 마음! “그러면,” 당신은 묻는다. “‘전체’가 생명과 마음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 가 우리의 대답이다. 만일 당신이 우리 불쌍하고 하찮은 필멸자들이 그 단어들로 아는 생명과 마음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아니라고 말한다! ‘전체’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생명과 마음을 의미합니까?” 당신은 묻는다.
대답은 “살아있는 마음”이니, 필멸자들이 그 단어들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마치 생명과 마음이 기계적인 힘이나 물질보다 더 높은 것과 같다. 즉, 유한한 “생명과 마음”과 비교되는 무한한 살아있는 마음이다. 우리는 깨달은 영혼들이 경건하게 그 단어를 발음할 때 의미하는 그것을 의미한다. “영(SPIRIT)!”
“전체”는 무한한 살아있는 마음이다. 깨달은 자들은 그것을 영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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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4-1. 지혜의 계보와 비교 철학
『키발리온』의 제4장은 우리를 헤르메스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출발점이자 가장 불가해한 종착점, 즉 ‘전체(THE ALL)’라는 개념 앞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저자들은 이 ‘전체’가 “시간, 공간, 그리고 변화의 우주 아래에, 그리고 그 이면에, 언제나 발견되는 실체적 실재이자 근본적인 진리”라고 정의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 세계의 기저에 있는 궁극적인 실체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는 알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UNKNOWABLE and UNDEFINABLE)” 신비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규정되는 역설적인 실체에 대한 탐구는, 인류의 모든 위대한 지혜 전통이 마주했던 가장 심오한 형이상학적 과제였습니다.
『키발리온』의 ‘전체’는 결코 고립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넘어, 동서양의 현자들이 각기 다른 언어와 상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궁극적 실재에 대한 통찰과 깊은 공명을 이룹니다. 우리는 이 ‘전체’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서양 신비주의 철학의 정점인 신플라톤주의의 ‘하나(the One)’, 동양 지혜의 근원인 도가(道家)의 ‘도(道)’, 그리고 인도 철학의 심장인 ‘브라흐만(Brahman)’이라는 세 개의 거대한 거울에 그것을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이 비교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달을 가리키는 수많은 다른 손가락들을 보게 될 것이며, 헤르메스주의가 인류의 보편적 지혜, 즉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의 한 위대한 표현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신플라톤주의의 ‘하나(the One)’: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근원
『키발리온』의 ‘전체’와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3세기경의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에 의해 집대성된 신플라톤주의의 최고 원리, ‘하나(to Hen)’입니다. 플로티노스에게 ‘하나’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지만, 그 자신은 존재(being) 그 자체를 넘어선 실체입니다. 『키발리온』이 ‘전체’는 “알 수 없다”고 단언하듯이, 플로티노스 또한 ‘하나’는 우리의 모든 사유와 언어, 심지어 ‘존재한다’는 규정마저도 넘어서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붙이거나 어떤 속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제한되고 분할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전 『코르푸스 헤르메티쿰』 주해에서 탐구했던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의 길입니다.
『키발리온』이 “신학자들과 형이상학자들의 모든 이론, 추측, 그리고 사변들을… 무한의 비밀을 파악하려는 필멸의 마음들의 유치한 노력”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플로티노스적 통찰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너무나 완전하고 단순하기에, 그것에 인격이나 의지, 계획과 같은 인간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축소 행위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로부터 모든 존재가 흘러나오는 ‘유출(emanation)’의 과정은, 『키발리온』의 우주론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완전한 ‘하나’는 마치 샘물이 저절로 넘쳐흐르듯 자신의 충만함으로부터 첫 번째 유출물인 ‘누스(Nous)’, 즉 신성한 마음/지성을 낳습니다. 이 누스가 바로 『에메랄드 타블렛』에서 말하는 “하나의 명상”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는 원리이며, 『키발리온』이 ‘전체’를 “무한한 살아있는 마음”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하는 지점과 연결됩니다. 이 누스로부터 다시 ‘세계 영혼(World Soul)’이 유출되고, 마지막으로 ‘물질(hyle)’의 세계가 현현합니다. 이처럼, ‘하나’는 모든 것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초월해 있다는 신플라톤주의의 핵심 사상은, ‘전체’가 모든 것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내적 본질은 알 수 없다는 『키발리온』의 가르침에 가장 깊은 철학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도가(道家)의 ‘도(道)’: 이름 붙일 수 없는 만물의 어머니
이제 우리의 시선을 동양으로 돌려, 우리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서 놀랍도록 유사한 통찰을 발견하게 됩니다. 『도덕경』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 부르면, 그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요, 이름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다.”
『키발리온』이 ‘전체’는 “진정한 이름 붙이기를 넘어서 있다”고 말하듯이, 노자는 ‘도’의 본질 또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無名)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도’라고 부르는 순간, 그것은 이미 우리의 개념 안에 갇힌 한정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 ‘이름 없음’의 상태야말로, 하늘과 땅이 비롯된 궁극적인 근원입니다. 이것은 ‘전체’가 그 자체로는 ‘알 수 없다’는 헤르메스주의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도가 묘사하는 ‘도’의 작용 방식은 『키발리온』이 설명하는 ‘전체’의 작용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無爲), 모든 것을 이룹니다(無不爲). 그것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 같지만, 만물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와 같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키발리온』이 신에게 인간적인 감정이나 욕망을 부여하는 것을 ‘주제넘은 짓’이라고 비판했듯이, 노자 또한 ‘도’는 어질지 않으며(不仁),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고 말하며, ‘도’의 초인격적이고 초도덕적인 본질을 강조합니다.
더 나아가, ‘도’는 ‘하나’이며, 이 ‘하나’가 모든 것을 낳는다는 생각은 헤르메스주의의 근본적인 일원론과 통합니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이 유출의 과정은, ‘전체’라는 하나의 정신적 우주로부터 모든 현상 세계가 파생되어 나온다는 『키발리온』의 설명과 그 구조적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속에서도, 현자들은 동일한 실재를 각자의 방식으로 가리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힌두 철학의 ‘브라흐만(Brahman)’: 존재-의식-환희
마지막으로, 우리는 인도의 가장 깊은 지혜인 우파니ша드 철학의 중심 개념, ‘브라흐만’에서 또 다른 위대한 메아리를 발견합니다. 브라흐만은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입니다. 『키발리온』이 ‘전체’는 “실체적 실재”이자 “근본적인 진리”라고 정의하듯이, 힌두 철학에서 브라흐만은 유일하고도 영원한 실재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다채로운 현상 세계는, 궁극적으로 브라흐만 위에 펼쳐진 ‘마야(Maya)’, 즉 신적인 놀이(Lila)이자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키발리온』이 ‘전체’의 내적 본성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힌두 철학 또한 브라흐만은 모든 개념적 규정을 넘어서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파니ша드의 현자들은 브라흐만을 설명할 때 ‘네티 네티(Neti, Neti)’,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의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전체’의 본질에 대한 모든 이론과 추측을 “유치한 노력”으로 보는 『키발리온』의 태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러나 힌두 철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알 수 없는 브라흐만의 본질을 ‘삿-칫-아난다(Sat-Cit-Ānanda)’, 즉 ‘존재(Sat)-의식(Cit)-환희(Ānanda)’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이는 ‘전체’가 단지 텅 빈 공허나 맹목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의식’하고, ‘지복’으로 가득 찬, 살아있는 실재임을 암시합니다. 『키발리온』이 ‘전체’를 “무한한 살아있는 마음(INFINITE LIVING MIND)”이자 “영(SPIRIT)”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삿-칫-아난다’의 서양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네가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라는 우파니ша드의 가장 위대한 선언은, 헤르메스주의의 구원론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영혼인 ‘아트만(Ātman)’이 궁극적으로 우주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동일하다는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은 유한한 개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영원하고 무한한 브라흐만 그 자체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에서 인간이 그노시스를 통해 신과 합일하고, 자신의 의식을 우주의 크기로 확장하여 “영원(Aeon)이 되는” 과정과 그 본질이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키발리온』이 제시하는 ‘전체(THE ALL)’라는 개념은 결코 고립된 사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현자들이 공통적으로 가리켰던 궁극적 실재에 대한 헤르메스주의적 이름입니다. 신플라톤주의의 ‘하나’는 그것의 절대적 초월성과 통일성을, 도가의 ‘도’는 그것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신비와 무위(無爲)의 작용을, 그리고 힌두 철학의 ‘브라흐만’은 그것의 존재-의식-환희라는 내적 본질을 각각의 방식으로 비추어줍니다. 이 모든 거울들을 통해, 우리는 ‘전체’라는 하나의 산을 여러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며, 그 장엄하고도 심오한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해설 4-2.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
현대 문명은 ‘지식’과 ‘정보’를 숭배합니다. 우리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시대를 살아가며,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측정하고, 분석하고, 정의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이성의 힘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진보라는 눈부신 선물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그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어와 개념으로 포획할 수 없는 실재의 더 깊은 차원에 대한 경외감과, 그것을 직접 체험하려는 내면의 능력입니다. 『키발리온』의 제4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인의 오만한 지성에 제동을 걸며, 가장 위대한 진리는 아는 것(knowing about)이 아니라 되는 것(being)이라는, 헤르메스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지성의 미로와 다람쥐의 횃대
『키발리온』은 ‘전체(THE ALL)’의 내적 본질을 규정하려는 모든 신학적, 형이상학적 시도들을, “무한의 비밀을 파악하려는 필멸의 마음들의 유치한 노력”이라고 단호하게 일축합니다. 저자들은 그러한 탐구를 추구하는 자가, 결국 “사유라는 미궁 속을 빙빙 돌고 돌 뿐”이며, “마치 자신의 횃대 바퀴를 미친 듯이 돌고 도는 다람쥐와 같아서, 영원히 여행하지만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이 비유는 현대의 지식인들이나 영적 탐구자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영성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고, 복잡한 철학적 개념들을 비교 분석하며, 깨달음에 대한 정교한 이론 체계를 구축합니다. 우리는 신의 본질이나 우주의 기원에 대해 유창하게 토론할 수 있게 되며,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지적인 만족감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횃대 바퀴 위를 달리는 다람쥐처럼, 실제로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개념’이라는 이름의 좁은 감옥 안을 맴도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메뉴판을 분석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나머지, 정작 음식을 맛보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키발리온』은 우리에게, 이 지성의 미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이성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실체적 실재는… 진정한 이름 붙이기를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유한한 세계의 사물들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졌기에,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무한한 실재를 결코 담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 혹은 ‘전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우리의 개념 안에 갇힌, 진짜 ‘전체’가 아닌 왜소한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직관과 체험: 진리를 향한 다른 문
그렇다면 우리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agnosticism)에 빠져야만 합니까? 『키발리온』의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오’입니다. 저자들은 신학(Theology)과 형이상학(Metaphysics)의 사변적인 시도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종교(Religion)와 철학(Philosophy)”은 “실재에 뿌리를 둔 것들”이라고 긍정합니다. 그들이 정의하는 종교란, “‘전체’의 존재와 그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직관(intuition)’입니다. 직관은 분석하고 추론하는 지성(intellect)과는 다른, 마음의 또 다른 인식 능력입니다. 그것은 대상을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대신, 전체를 전체로서 한 번에 파악하는 직접적인 통찰입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아름다움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직접 창조하고 체험하는 것처럼, 진정한 구도자는 신의 본질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가장 깊은 직관을 통해 그의 현존을 직접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책상 앞에서의 철학이 아니라, 삶 속에서의 실천 철학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개념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고요한 숲속에서 나무와 바람, 그리고 나 자신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생명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습니다. 전자가 다람쥐의 횃대라면, 후자는 비로소 신전의 문 안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입니다.
겸허한 앎의 자세
이 모든 가르침이 현대인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겸허함’이라는 지혜의 자세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현자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성이 밝힐 수 있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도구를 날카롭게 사용하지만(철학), 동시에 이성의 빛이 닿지 않는 거대한 신비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경건하게 침묵합니다(종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때로는 그저 ‘모름’의 상태에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모른다”는 솔직한 고백은, 지성의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지혜가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여는 가장 겸허하고도 강력한 행위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지식이라는 작은 잔을 기꺼이 비울 때, 비로소 ‘전체’라는 무한한 바다가 그 안으로 흘러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제4장은 우리를 지식의 폭군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절대자에 대한 모든 지적 정의의 유혹을 내려놓고, 대신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우리의 가장 깊은 직관과 정직한 체험을 통해 그 실재와 직접 관계를 맺으라고 초대합니다. 진정한 앎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존재의 지혜’를 향한 길이야말로, 『키발리온』이 현대인에게 제시하는 가장 위대하고도 실천적인 구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