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THE ALL)’는 영(SPIRIT)이다! 그러나 영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없으니, 그 정의가 실질적으로 설명되거나 정의될 수 없는 ‘전체’의 정의와 같기 때문이다. 영은 단지 인간들이 무한한 살아있는 마음에 대한 가장 높은 개념에 부여한 이름일 뿐이다. 그것은 “실재적 본질”을 의미하며, 우리가 아는 생명과 마음보다, 후자가 기계적인 에너지나 물질보다 더 우월한 것만큼이나, 훨씬 더 우월한 살아있는 마음을 의미한다. 영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며, 우리는 단지 ‘전체’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할 뿐이다. 사유와 이해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영을 무한한 살아있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며, 동시에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하거나, 아니면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멈추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만 한다.
이제 우주의 본질을 전체로서, 그리고 그 부분들로서 고찰해 보자. 우주란 무엇인가? 우리는 ‘전체’의 바깥에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주가 ‘전체’인가?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우주는 ‘다수(MANY)’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다른 방식들로도, 우리가 지난 과에서 기술했듯이, ‘전체’에 관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관념들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일 우주가 ‘전체’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어야만 한다. 이것이 마음이 처음 생각할 때 내리는 불가피한 결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니, 우리는 우주의 존재를 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일 우주가 ‘전체’도,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는가? 이 질문을 검토해 보자.
만일 우주가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전체’로부터 비롯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전체’의 창조물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무언가는 결코 무에서 올 수 없으므로, ‘전체’는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창조할 수 있었겠는가? 어떤 철학자들은 ‘전체’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즉 ‘전체’의 존재와 실체로부터 우주를 창조했다고 말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보았듯이, ‘전체’는 빼내지거나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우주의 각 입자들이 자신이 ‘전체’임을 인식하지 않겠는가? ‘전체’는 자신에 대한 앎을 잃을 수 없으며, 실제로 원자나 맹목적인 힘, 혹은 미천한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도 없다. 실로, 어떤 사람들은 ‘전체’가 진실로 ‘전체’임을 깨닫고, 또한 자신들, 즉 인간들이 존재함을 인식하며, 자신들과 ‘전체’가 동일하다는 결론으로 뛰어들어, “나는 신이다”라는 외침으로 공기를 가득 채웠으니, 이는 다수에게는 즐거움을, 현자들에게는 슬픔을 주었다. 미립자가 “나는 인간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에 비하면 겸손한 것일 게다.
그러나, 만일 우주가 ‘전체’가 아니며, 또한 ‘전체’가 자신을 조각으로 분리하여 창조한 것도 아니라면, 우주란 진실로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다른 무엇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 이것이 위대한 질문이다. 그것을 신중하게 검토해 보자. 우리는 여기서 “상응의 원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됨을 발견한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오래된 헤르메스 격언은 이 지점에서 사용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차원에서의 작업들을 검토함으로써 더 높은 차원에서의 작업들을 언뜻 엿보도록 노력해 보자. 상응의 원리는 다른 문제들뿐만 아니라 이것에도 적용되어야만 한다.
자, 보자! 자신의 존재 차원에서, 인간은 어떻게 창조하는가? 음, 첫째, 그는 외부의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듦으로써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전체’가 창조할 수 있는 외부의 재료들이 없기 때문이다. 음, 그러면 둘째로, 인간은 자신의 물질의 일부를 자손에게 옮김으로써 이루어지는 자기-증식인, 출산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종류를 번식시킨다. 그러나 이것도 옳지 않다. ‘전체’는 자신의 일부를 옮기거나 뺄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을 복제하거나 증식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빼앗김이 있을 것이고, 두 번째 경우에는 ‘전체’에 대한 증식이나 추가가 있을 것인데, 두 생각 모두 부조리하다. 인간이 창조하는 세 번째 길은 없는가? 있다, 그는 정신적으로 창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 그는 외부의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며, 자신을 복제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영은 그 정신적 창조물에 스며든다.
상응의 원리를 따라, 우리는 ‘전체’가 인간이 정신적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과 유사한 방식으로, 우주를 정신적으로 창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성의 보고가 깨달은 자들의 가르침과 저술들에서 보여지듯이, 그들의 보고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한 것이 현자들의 가르침이다. 그러한 것이 헤르메스의 가르침이었다.
‘전체’는 정신적으로 외에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도 창조할 수 없으니, 재료를 사용하거나(그리고 사용할 것이 없다), 혹은 자신을 복제(이 또한 불가능하다)하지 않고서는 그러하다. 이성의 이러한 결론으로부터는 벗어날 길이 없으며, 우리가 말했듯이, 이는 깨달은 자들의 가장 높은 가르침들과 일치한다. 바로 당신, 학생이, 당신의 정신성 안에서 당신 자신의 우주를 창조할 수 있듯이, ‘전체’ 또한 자신의 정신성 안에서 우주들을 창조한다. 그러나 당신의 우주는 유한한 마음의 정신적 창조물인 반면, ‘전체’의 그것은 무한한 마음의 창조물이다. 둘은 종류에 있어서는 유사하지만, 등급에 있어서는 무한히 다르다. 우리는 진행함에 따라 창조와 현현의 과정을 더 면밀히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당신의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점은 이것이다. 우주와 그것이 포함하는 모든 것은, ‘전체’의 정신적 창조물이다. 진실로, 모든 것은 마음이다!
“전체는 그의 무한한 마음 안에 수많은 우주들을 창조하니, 그것들은 영겁의 시간 동안 존재한다. 그러나 ‘전체’에게, 백만 개의 우주들의 창조, 발전, 쇠퇴, 그리고 죽음은 눈 깜짝할 사이와 같다.” —키발리온.
“‘전체’의 무한한 마음은 우주들의 자궁이다.” —키발리온.
성(性)의 원리는 물질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삶의 모든 차원에서 현현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전에 말했듯이, “성”은 “성별(Sex)”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별은 단지 성의 물질적 현현일 뿐이다. “성”은 “생성 또는 창조에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차원에서든 무엇인가가 생성되거나 창조될 때마다, 성의 원리는 현현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우주들의 창조에서도 그러하다.
이제 우리가 남성과 여성의 신, 즉 창조주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결론으로 뛰어들지 말라. 그 생각은 단지 그 주제에 관한 고대의 가르침들을 왜곡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가르침은, “그 자체로서의” ‘전체’는, 시간과 공간의 법칙들을 포함한 다른 모든 법칙들을 넘어서 있듯이, 성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법칙들이 비롯되는 법칙이며, 그것들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가 생성 또는 창조의 차원에서 현현할 때, 그때 그것은 법칙과 원리에 따라 행동하니, 그것은 더 낮은 존재의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물론 정신적 차원에서,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으로 성의 원리를 현현한다.
이 생각은 그것을 처음 듣는 여러분 중 일부에게는 놀랍게 보일지 모르나, 여러분 모두는 사실 일상의 개념들 속에서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왔다. 당신은 신의 아버지 되심과 자연의 어머니 되심, 즉 신성한 아버지이신 신과, 보편적 어머니이신 자연에 대해 말하며, 그리하여 본능적으로 우주 안의 성의 원리를 인정해왔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헤르메스 가르침은 실재적인 이원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전체’는 하나이며, 두 측면은 단지 현현의 측면들일 뿐이다. 가르침은, ‘전체’에 의해 현현된 남성적 원리가, 어떤 면에서는, 우주의 실제 정신적 창조와는 별개로 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여성적 원리(이는 “자연”이라 불릴 수 있다)를 향해 투사하며, 그 위에 후자는 단순한 “활동의 중심들”에서부터 인간에게로, 그리고 더 나아가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잘 확립되고 굳건히 시행되는 자연의 법칙들에 따라, 우주의 진화라는 실제 작업을 시작한다. 만일 당신이 오래된 사유의 형상들을 선호한다면, 당신은 남성적 원리를 아버지이신 신으로, 그리고 여성적 원리를 만물이 그 자궁에서 태어난 보편적 어머니이신 자연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인 비유 이상이다. 그것은 우주 창조의 실제 과정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나 항상 기억하라, ‘전체’는 단지 하나이며, 그 무한한 마음 안에서 우주가 생성되고, 창조되며, 존재한다는 것을.
만일 당신이 상응의 법칙을 당신 자신과 당신 자신의 마음에 적용한다면, 올바른 개념을 얻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이 “나”라고 부르는 당신의 일부가, 어떤 의미에서는, 별개로 서서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서 정신적 이미지들의 창조를 목격한다는 것을 안다. 정신적 생성이 이루어지는 당신 마음의 일부는, 별개로 서서 “나”의 생각, 개념, 그리고 이미지들을 목격하고 검토하는 “나(I)”와 구별하여 “나(Me)”라고 불릴 수 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를 기억하라. 그리고 한 차원의 현상들은 더 높거나 낮은 차원들의 수수께끼들을 푸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당신, 즉 자녀가,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그 감정, 즉 아버지 마음에 대한 그 존경과 경외심, 즉 ‘전체’에 대한 그 본능적인 경외심을 느끼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는가? 당신이 자연의 작업들과 경이들을 고찰할 때, 당신의 가장 깊은 존재의 저 아래에 뿌리를 둔 거대한 감정에 압도되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는가? 당신이 젖가슴에 아기처럼 바싹 다가서고 있는 것은 바로 어머니 마음이다.
당신이 당신 주위에서 보는 작은 세계, 즉 우주 안의 한낱 먼지 알갱이인 지구가, 우주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 그러한 세계들은 수백만, 수천만 개가 있으며, 더 큰 것들도 있다. 그리고 ‘전체’의 무한한 마음 안에는 수백만, 수천만 개의 그러한 우주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의 작은 태양계 안에도,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은 생명의 영역들과 차원들이 있으며, 그들에 비하면 우리 지상에 묶인 필멸자들은, 인간과 비교될 때 바다 밑바닥에 사는 끈적끈적한 생명체들과 같다. 인간이 신들이 소유했다고 꿈꿔왔던 것보다 더 높은 권능과 속성들을 가진 존재들이 있다. 그럼에도 이 존재들은 한때 당신과 같았고, 훨씬 더 낮은 존재였다. 그리고 당신은 시간이 지나면 그들과 같이 될 것이며,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니, 깨달은 자들에 의해 보고된 인간의 운명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은, 상대적인 의미에서조차도,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일 뿐이다. 그리고 당신은 영겁의 시간 동안 더 높고 더 높은 생명의 차원들로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우주는 당신의 집이며, 당신은 시간의 끝 이전에 그 가장 먼 구석까지 탐험할 것이다. 당신은 ‘전체’의 무한한 마음 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당신의 가능성과 기회는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무한하다. 그리고 영겁의 대순환의 끝에서, ‘전체’가 그 모든 창조물들을 자신 속으로 다시 끌어들일 때, 당신은 기쁘게 갈 것이니, 그때 당신은 ‘전체’와 하나가 되는 존재의 전체 진리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깨달은 자들, 즉 ‘길’을 따라 잘 진보한 자들의 보고이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고요하고 평온하게 쉬어라. 당신은 아버지-어머니 마음의 무한한 권능에 의해 안전하고 보호받고 있다.
“아버지-어머니 마음 안에서, 필멸의 자녀들은 집에 있다.” —키발리온.
“우주에는 아버지 없는 자도, 어머니 없는 자도 하나도 없다.” —키발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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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5-1. 지혜의 계보와 비교 철학
『키발리온』의 일곱 가지 원리 중 첫 번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원리, “전체(THE ALL)는 마음이며, 우주는 정신적이다(The Universe is Mental)”는 헤르메스 철학 전체를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입니다. 이 하나의 선언 안에, 다른 여섯 개의 원리가 파생되고 작동할 수 있는 모든 형이상학적 토대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견고한 물질세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생명 현상, 그리고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마저도, 궁극적으로는 ‘정신’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실체 위에 펼쳐진 그림자이거나 혹은 그 표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통찰은 현대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리는 결코 20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사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지혜의 문헌 중 하나인 『코르푸스 헤르메티쿰』, 특히 그 첫 번째 논고인 「포이만드레스(Poimandres)」에 묘사된 장엄한 창조의 드라마에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주해의 목표는, 『키발리온』의 이 첫 번째 원리가 어떻게 「포이만드레스」의 창조론을 현대적인 언어로 재해석하고 체계화했는지를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것입니다.
포이만드레스의 비전: 빛과 말씀에 의한 창조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의 첫 번째 논고인 「포이만드레스」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가 어떻게 자신의 스승인 ‘인간의 목자’ 포이만드레스, 즉 우주적 마음(Nous)으로부터 우주 창조의 비밀을 직접 계시받았는지를 묘사하는, 한 편의 장엄한 비전 문학입니다. 이 비전 속에서, 창조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전개됩니다.
근원적 빛: 태초에, 모든 것은 무한하고, 규정되지 않은 ‘빛’의 상태였습니다. 이 빛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전체’ 그 자체입니다.
어둠의 출현: 이 빛으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무섭고 끔찍한 어둠”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혼돈스러운 물질의 원초적 본성, 즉 ‘축축한 본성’입니다.
말씀(Logos)의 분리: 이 어둠 속에서, 신성한 ‘말씀(Logos)’이 솟아올라, 순수한 불(영)을 어둠(물질)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마음(Nous)의 창조: 창조주인 마음(Nous)은 이 말씀과 하나 되어, 불과 영으로 이루어진 천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일곱 개의 행성을 운행시켜 운명을 다스리게 합니다.
인간의 창조: 마지막으로, 창조주 마음은 자신과 똑같은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그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권능을 부여합니다.
이 창조의 드라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창조의 모든 과정이 ‘정신적인 힘’에 의해 주도된다는 사실입니다. 창조는 맹목적인 물질의 우연한 결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빛’이라는 근원적 실재가, ‘말씀’이라는 질서 부여의 원리를 통해, 그리고 ‘마음’이라는 창조적 지성을 통해 자신을 단계적으로 현현시키는, 지극히 의식적이고 목적 있는 과정입니다.
키발리온의 재해석: 창조의 세 가지 난제와 그 해답
『키발리온』의 제5장은 바로 이 「포이만드레스」의 신화적 서사를,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 논증의 형태로 재구성합니다. 저자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헤르메스 철학이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질문은, “만일 우주가 ‘전체’ 그 자체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전체’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우주는 유한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다수(多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는 ‘전체’와 동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주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주의 존재를 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만일 우주가 ‘전체’의 창조물이라면, ‘전체’는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창조했는가?”입니다. ‘무(無)’에서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으므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런 재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전체’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우주를 창조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체’는 나뉘거나 빼내질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주가 ‘전체’의 일부라면, 우주의 모든 원자 하나하나가 ‘전체’ 그 자체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며,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닙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창조하는가?”입니다. 여기서 『키발리온』은 ‘상응의 원리’라는 마스터키를 사용하여 이 난제를 해결합니다. 인간의 창조 방식(아래)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전체’의 창조 방식(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외부의 재료를 사용하거나(조각), 자신을 복제하여(출산)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방식 모두 ‘전체’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제3의 창조 방식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정신적으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어떤 외부 재료도 사용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복제하지도 않으면서, 생생한 이미지와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논리적 귀결은 단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전체’가 인간이 정신적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과 유사한 방식으로, 우주를 정신적으로 창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다.” 이것이 바로 『키발리온』의 제1원리, “우주는 정신적이다”라는 선언의 핵심적인 논증입니다.
정신적 우주와 포이만드레스의 연결점
이러한 『키발리온』의 논증은 「포이만드레스」의 창조론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결됩니까?
첫째, 『키발리온』이 ‘전체’를 “무한한 살아있는 마음”이자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포이만드레스」의 창조주인 ‘마음(Nous)’과 근원적인 ‘빛’의 개념을 하나로 통합한 것입니다. ‘전체’는 모든 것의 기저에 있는 알 수 없는 실체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마음’이라는 개념을 빌려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키발리온』의 ‘정신적 창조’ 개념은, 「포이만드레스」에서 ‘말씀(Logos)’이 수행하는 역할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말씀은 혼돈된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을 의미 있는 형태로 빚어내는 힘입니다. 정신적 창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혼란스러운 감각 데이터에 ‘개념’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인식하는 질서정연한 세계를 창조합니다. 이처럼, 우주는 ‘전체’라는 거대한 마음이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를 사유하고, 상상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 과정’인 것입니다.
셋째, 『키발리-온』은 이 정신적 창조가 ‘성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설명하며, 「포이만드레스」의 창조론에 또 다른 깊이를 더합니다. ‘전체’는 자신 안에 있는 ‘남성적 원리(의지)’를 ‘여성적 원리(자연/상상력)’에 투사하여, 후자가 실제적인 창조와 진화의 작업을 시작하게 합니다. 이것은 「포이만드레스」에서 창조주 마음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고, 그 인간이 아래의 자연과 사랑에 빠져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지상의 생명체들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조는 결코 독백이 아니라, 의지와 수용, 방출과 양육이라는 두 극성의 사랑의 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키발리온』의 제5장은 우리에게, 우주가 차갑고 텅 빈 공간에 떠 있는 물질들의 무의미한 집합이 아니라는, 혁명적인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우주는 살아있고, 의식적이며, 의미로 가득 찬, 하나의 거대한 ‘정신’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그 정신의 바깥에 있는 관찰자가 아니라, 그 정신 안에서 함께 생각하고, 느끼며, 창조하는 공동-창조주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를 소외와 무의미의 감옥에서 해방시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주 속의 외로운 먼지가 아니라, “아버지-어머니 마음 안에서, 집에 있는” 안전하고 사랑받는 자녀가 됩니다. 이처럼, “우주는 정신적이다”라는 첫 번째 원리는, 이후에 이어질 모든 정신적 변성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가장 위대한 열쇠이자, 우리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가장 희망적인 선언입니다.
해설 5-2.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
“우주는 정신적이다.”라는 이 고대의 선언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모든 영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실천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이 원리는 더 이상 신비주의자들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신념, 그리고 기대가 우리의 건강, 인간관계, 그리고 성취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수많은 현대 심리학과 의학의 연구 결과들을 통해, 우리 눈앞에 명백한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정된 외부 세계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이라는 이름의 용광로 안에서 끊임없이 빚어지고 변성되는 유동적인 창조물입니다. 이 진리를 깊이 이해하고 그 힘을 의식적으로 다루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의 희생자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창조주가 될 수 있습니다.
플라세보 효과: 믿음이 빚어내는 치유의 기적
정신이 물질에 미치는 영향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현대 과학의 증거는 바로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입니다. 플라세보, 즉 ‘위약(僞藥)’은 아무런 약리적 성분이 없는 가짜 약(예: 설탕 알약)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의사가 환자에게 이 가짜 약을 강력한 신약이라고 확신시키며 처방했을 때, 놀랍게도 수많은 환자들이 실제로 그들의 병세가 호전되는 경험을 합니다. 통증이 완화되고, 혈압이 안정되며, 심지어는 면역 체계가 활성화되는 등, 측정 가능한 물리적,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환자의 ‘치유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정신 상태)’이, 약이라는 외부적인 물질적 원인 없이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육체(물질)를 변화시켰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의 마음이 그의 현실을 창조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주는 정신적이다”라는 헤르메스 원리의 완벽한 임상 실험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정신이 내리는 명령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하인과도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몸에게 ‘너는 병들었다’고 끊임없이 말한다면, 우리의 몸은 그 명령에 따라 쇠약해질 것입니다(이를 ‘노세보 효과(Nocebo Effect)’라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몸에게 ‘너는 건강하고, 스스로 치유할 힘이 있다’고 굳게 믿고 말한다면, 우리의 몸은 그 믿음에 부응하여 자신의 치유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질병에 맞서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현대 의학의 위대한 성취를 존중하면서도,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외부의 약이나 의사의 처방에만 의존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외부의 도움과 더불어, 우리 자신의 내면, 즉 ‘나는 나을 수 있다’는 흔들림 없는 정신적 확신과 긍정적인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창조하고 유지하는 ‘정신적 변성술’을 통해 완성됩니다.
자기실현적 예언: 기대가 현실을 만드는 힘
정신의 힘은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관계와 사회적 현실마저도 빚어냅니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은 이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는 본래 거짓이었던 하나의 정의나 예언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행동이 결국 그 거짓된 예언을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한 교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반의 특정 학생(실제 능력과 상관없이)이 ‘뛰어난 잠재력을 가졌다’는 거짓 정보를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기대’는 교사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녀는 그 학생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더 따뜻한 격려의 눈빛을 보내며, 그의 작은 실수에도 더 너그럽게 반응할 것입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학생은 점차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고, 더 열심히 공부하며, 마침내 실제로 뛰어난 학업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맨 처음의 거짓된 예언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정신적 기대를 통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됩니다. 만일 우리가 “내 파트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라는 부정적인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서 그 신념을 뒷받침하는 증거만을 찾아내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방어적으로 행동하고, 소통을 단절하며, 결국 상대방이 정말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기대를 가지고 관계에 임한다면, 우리는 갈등의 순간에도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상대방의 장점을 보려 노력하며, 결국 관계를 회복시키는 현실을 창조해낼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집니다.
생각의 힘을 다루는 법: 현대의 정신적 연금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강력한 정신의 힘을 의식적으로 다루고, 우리의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변성시킬 수 있습니까? 『키발리온』은 그 열쇠가 일곱 가지 원리, 특히 정신의 원리, 진동의 원리, 그리고 극성의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원하는 현실을 명료하게 상상하라 (정신의 원리): 모든 것은 정신적 창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현실이 있다면, 먼저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서 최대한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창조의 첫 단계인 ‘정신적 청사진’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언어보다 이미지를 더 강력하게 받아들입니다. 성공적인 발표를 마친 자신의 모습, 건강하고 활기찬 자신의 모습, 사랑하는 사람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이미 이루어진 현실처럼 반복해서 상상하십시오.
감정의 진동수를 높여라 (진동의 원리):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에 상응하는 ‘감정’이 더해질 때, 그 정신적 창조물은 비로소 강력한 진동을 발산하기 시작합니다. 감사는 풍요의 진동을, 사랑은 조화의 진동을, 기쁨은 성공의 진동을 우주로 내보냅니다. 만일 우리가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면에서는 결핍과 불안의 감정을 느낀다면, 우주가 공명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즉 ‘결핍’의 진동수입니다. 따라서 매일 감사 일기를 쓰거나, 작은 성공들을 축하하며 기쁨을 느끼는 등, 의식적으로 자신의 감정적 진동수를 원하는 현실의 주파수에 맞추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변성시켜라 (극성의 원리):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극성의 원리’는 우리가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극성’을 의식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두려움이 밀려올 때, 그것을 억누르는 대신, 그 에너지를 ‘신중함’과 ‘준비성’이라는 긍정적인 극으로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수치심이 들 때, 그것을 ‘성장을 위한 귀중한 배움’이라는 반대 극으로 변성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일상 속에서 행하는 가장 위대한 ‘정신적 연금술’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우주는 정신적이다”라는 헤르메스의 선언은, 현대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책임과 무한한 가능성을 동시에 부여하는 가장 위대한 복음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외부의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신 상태, 즉 우리의 신념과 기대, 그리고 감정의 진동에 의해 창조됩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신성한 기술을 꾸준히 연마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운명의 희생자가 아닌, 자신의 현실을 의식적으로 빚어내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창조주로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