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스토아의 정원

by DrLeeHC

제7부: 스토아의 정원 (The Stoic’s Garden)



37장: 갑작스러운 위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금요일 오전, 당신의 작은 카페는 하루 중 가장 분주한 시간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원두 가는 소리와, 우유 거품 내는 소리와, 손님들의 정겨운 대화 소리가 뒤섞여, 기분 좋은 백색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당신은 십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당신의 모든 것을 걸어 이 작은 공간을 열었습니다. 이곳은 당신에게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당신의 꿈이자, 당신의 자부심이며, 당신이 온전히 당신 자신일 수 있는 유일한 왕국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왕국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원두의 품질부터, 배경 음악의 선곡, 그리고 직원의 미소까지.


바로 그 순간, 당신 왕국의 심장이 멈추었습니다.


당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에스프레소 머신이, ‘푸쉭’하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모든 작동을 멈춘 것입니다. 당신은 몇 번이나 전원을 껐다 켜보지만, 기계는 묵묵부답입니다. 주문을 기다리는 손님들의 줄은 길어지고, 직원들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립니다. 당신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립니다. 당신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하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통제 불능의 생각들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오늘 장사는 망했다.’ ‘이번 달 임대료는 어떻게 내지?’ ‘수리비가 엄청날 거야.’ ‘단골손님들을 모두 잃게 될 거야.’ ‘나는 역시 사업에 소질이 없는 건가.’ 이 부정적인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당신을 순식간에 무력감과 절망의 가장 깊은 바닥으로 끌어내립니다. 당신의 왕국은, 이 예기치 않은 기계 고장 하나로,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잠시 뒷정리실로 피신합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홀로 서서, 당신은 이 감정의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폭풍우는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존재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더욱 거세집니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 심리학의 위대한 전환을 이끈 미국의 정신과 의사 에런 벡 (Aaron T. Beck, 1921-2021)이 창시한 ‘인지 행동 치료 (Cognitive Behavioral Therapy)’가 설명하는, 인간 고통의 핵심 메커니즘입니다. 벡에 따르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 (Activating event)’ 그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해 우리가 부여하는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믿음(Belief)’ 혹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우리의 고통스러운 ‘감정과 행동 (Consequence)’을 만들어냅니다.


당신을 지금 패닉 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에스프레소 머신이 고장 났다’는 사건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패닉에 빠뜨린 것은, 그 사건에 대해 당신이 자동적으로 일으킨 믿음, 즉 “오늘 장사는 망했다”거나 “나는 실패자다”와 같은 파국적인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왜곡된 믿음이, 극심한 불안과 무력감이라는 감정적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벡은 우리가 이 자동적 사고의 내용을 자각하고, 그것이 과연 합리적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논박(Dispute)’할 때, 비로소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현대 심리학의 통찰은, 놀랍게도 약 2천 년 전, 고대 로마의 철학자가 이미 발견했던 지혜의 메아리입니다. 당신이 뒷정리실의 차가운 벽에 기대어, 당신의 내면에서 날뛰는 이 폭풍우를 잠재울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을 때, 당신은 아주 오래전 읽었던 한 철학자의 목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는 노예로 태어나, 다리를 절었으며, 로마에서 추방당하는 등 온갖 역경을 겪었지만, 마침내 황제마저도 존경하는 위대한 영혼의 스승이 되었던 사람, 바로 스토아 철학자 (Stoicism) 에픽테토스 (Epictetus, c. 50–c. 135 AD)입니다.

에픽테토스는, 그의 강의록인 『엥케이리디온, Enchiridion, 편람』의 첫 문장을, 인간이 평온한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단 하나의 진리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두 가지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말입니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 (up to us)’은 오직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에 속한 것들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내리는 ‘판단’, 어떤 것을 향한 ‘욕망’과 ‘혐오’, 그리고 어떤 것을 하려는 ‘의지’와 같은 것들입니다. 당신이 지금 이 상황을 ‘재앙’으로 판단할지, 아니면 ‘도전’으로 판단할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 (not up to us)’은, 우리 내면의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입니다. 여기에는 당신의 육체(언젠가 늙고 병들 것입니다), 당신의 재산(언제든 사라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평판(타인의 변덕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동이 포함됩니다. 오늘 고장 나버린 당신의 에스프레소 머신 또한, 명백하게 당신의 통제 밖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은 지극히 단순하고도 실천적입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온 (ataraxia)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하려는 헛된 노력을 멈추고, 오직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할 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고통은, 기계가 고장 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의 통제 밖에 있는 그 기계의 상태에, 당신의 평온과 행복 전체를 저당 잡혔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당신은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에픽테토스의 목소리를 따라, 당신 앞에 놓인 이 상황을 다시 한번 점검합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고장 난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다.’

‘이것 때문에 실망해서 돌아가는 손님들의 마음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다.’

‘이 기계를 수리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이 들지는, 내가 지금 당장 통제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순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재앙’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당신의 의지입니다. 당신은 이 상황 앞에서 절망하고, 직원들에게 화를 내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 상황을 당신의 평정심과 문제 해결 능력을 시험하는 하나의 ‘훈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뒷정리실 문을 열고, 다시 카운터로 나옵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그러나 이상하게도 단단하고 고요한 평온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패닉에 빠져 있던 당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고 놀랍니다.

당신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여러분, 에스프레소 머신이 고장 났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합시다.”

당신은 가장 먼저, 기다리던 손님들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사과하고, 상황을 설명합니다. 몇몇은 불평하며 가게를 떠나지만, 몇몇은 당신의 솔직한 태도에 오히려 격려를 보내며, 드립 커피라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직원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분담시킵니다. 한 명은 드립 커피를 내리고, 다른 한 명은 다른 음료 메뉴를 준비하며, 또 다른 한 명은 수리 업체를 수소문합니다. 당신의 가게는 더 이상 혼돈에 빠진 난파선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라는 고요한 선장의 지휘 아래, 폭풍우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작지만 단단한 배가 되었습니다.

그날의 매출은 평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돈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왕국이, 당신의 카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진짜 왕국은, 외부의 그 어떤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당신 내면의 고요한 평정심, 즉 ‘내면의 성채 (inner citadel)’였습니다.

로마의 황제이자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는, 온갖 전쟁과 배신, 역병의 한가운데에서도, 매일 밤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이 ‘내면의 성채’로 귀환하는 글, 즉 『명상록, Meditations』을 썼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세상의 혼돈에 맞설 수 있는 질서와 평화를 길어 올렸습니다.

당신은 오늘, 당신의 작은 카페가 무너져 내린 바로 그 폐허 위에서, 당신 자신의 ‘내면의 성채’를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소유하고 경영해야 할 것은, 이 가게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갑작스러운 위기는,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당신에게 가장 위대한 지혜를 선물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기꺼이 놓아줄 때, 비로소 당신은 당신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눈부신 역설이었습니다.






38장: 피할 수 없는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평온


당신의 세계는 이 병실 침대를 중심으로, 반지름 몇 미터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창밖으로는 계절이 바뀌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지만, 당신의 시간은 오직, 당신이 사랑하는 이 사람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따라, 아주 느리고도 잔인하게 흘러갈 뿐입니다. 당신은 간병인입니다. 당신의 하루는 소독약 냄새와, 젖은 수건과, 그리고 당신이 결코 대신 져줄 수 없는 타인의 고통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일로 채워져 있습니다.


당신이 돌보는 사람은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한때는 당신에게 온 세상을 주었던, 산처럼 단단하고 바다처럼 넓었던 그 사람은, 이제 낡고 쇠약해진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하루의 대부분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남은 것은 그저,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뿐이라고. 당신은 그 ‘조금이라도’라는 뜬구름 같은 약속을 붙들고,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매일같이 치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합니다. 당신은 몇 시간마다 어머니의 몸을 부드럽게 돌려 눕히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마사지를 합니다. 당신은 메마른 입술을 물수건으로 적셔주고, 그녀가 좋아했던 옛 노래를 나지막이 불러주며, 앙상하게 마른 손을 밤새도록 잡아줍니다. 당신의 모든 행동은 하나의 목표, 즉 어머니의 고통을 1밀리미터라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아주 잠시라도 평온을 가져다주려는 필사적인 시도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모든 노력은, 거대한 파도 앞에 쌓아 올린 모래성처럼, 병마(病魔)라는 무심한 현실 앞에서 번번이 무너져 내립니다. 당신이 잠시 한숨을 돌릴 때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당신의 심장을 찔러옵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에 대한 깊은 죄책감과 분노에 휩싸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좋은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나는 왜 이 사람의 고통을 조금도 덜어줄 수 없는가?’


당신의 사랑은 너무나 거대하지만, 그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이 고통의 실체 앞에서, 마치 허공에 외치는 공허한 메아리와도 같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의 고통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무력감과, 그리고 이 부조리한 상황을 만들어낸 신(神) 혹은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몸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이 서서히 마모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며칠째 잠을 설친 당신은, 꾸벅꾸벅 졸다가 어머니의 희미한 기침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어둠 속에서, 당신은 어머니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리는 것을 봅니다. 당신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그녀의 등을 쓸어주려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당신은 당신의 모든 행동을 멈춥니다.


당신의 내면에서, 당신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포기의 감정이 솟아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절망과는 다른, 더 깊고 고요한 어떤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이 고통과 싸우기를, 이 상황을 바꾸려 애쓰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합니다. 당신은 그저, 의자에 다시 깊숙이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가만히, 있는 그대로 듣기 시작합니다.


들숨, 그리고 힘겨운 날숨. 또다시 들숨, 그리고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뱉어내는 날숨.

당신은 그 숨소리의 리듬에, 당신 자신의 숨을 맞추어 봅니다. 당신은 그녀의 고통을 없애려는 대신, 그녀의 고통이 존재하는 그 공간 안으로, 당신의 모든 의식을 가지고 조용히 걸어 들어갑니다. 당신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그녀와 함께, 이 고통 속에 현존(現存)할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심오한 지혜가 가리키는, 진정한 연민의 시작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의 사랑과 노력이 어머니의 고통을 ‘없애줄’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가 타인의 ‘업(業, Karma)’을 대신 짊어지거나 소멸시켜 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자신이 지은 업의 상속자이며, 자신의 업에 따라 자신만의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당신이 그녀의 고통 앞에서 느꼈던 그 지독한 무력감은, 바로 이 우주적인 진실과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받는 타인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고통을 없애려는 헛된 시도를 멈추고, 대신 고통받는 존재와 함께 머무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베트남 출신의 위대한 선승(禪僧) 틱낫한 (Thich Nhat Hanh, 1926-2022)은, 이러한 자비로운 함께-있음의 기술을 ‘마음챙김 (Mindfulness)’이라는 실천적인 가르침을 통해 전했습니다.


틱낫한에 따르면, 당신이 고통받는 사람 곁에 있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당신 자신의 호흡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당신의 마음속에서 날뛰던 불안과 두려움의 폭풍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고요해질 때, 비로소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것들을 맑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은 이렇게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숨을 들이쉬며, 나는 당신의 고통이 여기에 있음을 압니다.’

‘숨을 내쉬며, 나는 당신을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당신의 현존 자체를, 당신의 고요하고 안정된 에너지 자체를, 고통받는 사람에게 보내는 가장 강력한 치유의 선물입니다. 당신은 그녀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지만, 당신의 평화로운 현존을 통해, 타인이 자신의 고통과 홀로 싸우지 않도록 도울 수는 있습니다. 당신의 고요함은, 타인이 기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 내면의 전환은, 불교에서 수행자가 닦아야 할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즉 사무량심 (四無量心)의 완성을 향한 여정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마음은 자애 (Mettā, 멧타)입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입니다. 당신이 어머니의 병이 낫기를, 그녀가 평안하기를 바랐던 그 모든 마음이 바로 멧타였습니다.

두 번째 마음은 연민 (Karunā, 카루나)입니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무치는 마음입니다. 당신이 어머니의 신음 소리에 가슴 아파하며,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썼던 모든 행위가 바로 카루나였습니다.

세 번째 마음은 함께 기뻐함 (Muditā, 무디타)입니다. 이것은 타인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질투 없는 마음입니다. 당신은 어머니가 잠시라도 고통을 잊고 평화로운 잠에 들었을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아름다운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자애와 연민은 너무나 강렬했기에, 당신을 지치게 하고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네 번째 마음, 즉 사무량심의 왕관이자 그것들을 모두 떠받치는 기반인 평온 (Upekkhā, 우펙카)이 필요합니다.


우펙카 (Upekkhā)는 흔히 ‘평정심’ 혹은 ‘내려놓음’으로 번역됩니다. 이것은 결코 차가운 무관심이나 냉담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장 깊고 넓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우펙카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사랑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지혜입니다.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업(業)과, 나의 통제할 수 있는 나의 마음을 명확히 구분하는 통찰입니다. 진정한 연민(카루나)은, 바로 이 단단한 평온(우펙카)의 토대 위에서만, 지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영원히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로 그 우펙카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의 고통을 없애려는 시도를 멈춤으로써, 그녀를 덜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그녀의 고통을 그녀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존중하고, 당신은 당신의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더 깊고 성숙한 사랑의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 내면의 전환은, 20세기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연구의 선구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Elisabeth Kübler-Ross, 1926-2004)가 밝혀낸, 인간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의 여정과 깊이 공명합니다. 그녀는 수많은 임종 환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할 때, 보통 다섯 가지의 심리적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깨닫습니다. 이 다섯 단계의 여정이, 비단 죽어가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곁을 지키는 당신 또한,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 앞에서, 지난 몇 달간 정확히 동일한 마음의 지도를 따라 걸어왔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부정 (Denial)’이었습니다. 의사가 처음 어머니의 상태가 위중하다고 말했을 때, 당신은 그 사실을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당신은 ‘이것은 실수일 것이다’, ‘어머니는 강한 분이니 곧 이겨내실 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되뇌었습니다. 부정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충격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최초의 방어기제였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분노 (Anger)’였습니다. 부정의 벽이 더 이상 현실을 막아주지 못하게 되자, 당신의 마음은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더 일찍 병을 발견하지 못한 의사들에게 분노했고, 어머니의 고통에 무심해 보이는 세상에 분노했으며, 이 모든 부조리한 상황을 허락한 신 혹은 운명에 분노했습니다. 때로는 병상에 누워있는 어머니 자신에게, 왜 더 강하게 버텨내지 못하는가 하는 끔찍한 원망의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분노는, 당신의 무력감이 방향을 잃고 외부를 향해 터져 나온 비명이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타협 (Bargaining)’이었습니다. 분노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당신은 보이지 않는 힘과 비밀스러운 거래를 시도했습니다. ‘만약 제가 앞으로 더 열심히 어머니를 돌본다면, 기적을 허락해주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헌신과 희생을 제물로 바쳐, 운명의 흐름을 바꾸어보려는 헛된 시도를 했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우울 (Depression)’이었습니다. 그 어떤 타협도 이루어지지 않고, 어머니의 상태가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을 때, 당신은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당신의 모든 노력이 헛되었다는 무력감과, 곧 닥쳐올 이별에 대한 압도적인 슬픔이, 당신의 모든 에너지를 앗아갔습니다. 당신이 어머니의 고통 앞에서 느꼈던 그 끝없는 절망감이 바로 이 단계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새벽, 당신은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인 ‘수용 (Acceptance)’의 문턱에 들어선 것입니다. 퀴블러-로스는 이 수용의 단계가 행복하거나 즐거운 상태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감정이 소진된 뒤에 찾아오는, 지치고도 평화로운 체념의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현실과 싸우기를 멈추고,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조용한 항복입니다. 당신이 모든 노력을 멈추고, 어머니의 고통과 그저 함께 머무르기로 선택했던 그 순간, 당신은 마침내 이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깨닫습니다. 이 ‘수용’의 과정이, 죽어가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곁을 지키는 당신에게도,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신과 운명을 향해 ‘분노’했으며, 당신의 헌신을 통해 기적을 만들어보려 ‘타협’했고, 마침내 깊은 ‘우울’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당신은 마침내, 이 모든 저항을 내려놓고, 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온전히 ‘수용’하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고요히 앉아, 당신의 숨소리와, 어머니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두 개의 다른 리듬, 하나는 평온하고 다른 하나는 고통스럽지만, 그 두 개의 숨은 지금 이 작은 방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침묵 속에서 함께 울리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눈이 희미하게 뜨이고,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의 눈 속에는 더 이상 고통에 대한 저항이나 두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모든 것을 받아들인 자의, 깊고 평온한 체념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당신의 얼굴에서, 당신이 지금 막 도달한 그 새로운 평온함을, 그 흔들리지 않는 현존을, 알아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마른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입니다.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당신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당신의 온몸으로, 당신의 온 영혼으로 알아듣습니다.

‘괜찮다, 아가야. 이제 괜찮아.’


당신은 대답 대신, 어머니의 손을 다시 한번,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잡습니다. 그 손길에는 더 이상 초조함이나 안타까움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저, 이 우주에서 가장 고요하고 따뜻한,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만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피할 수 없는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 속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워졌습니다.







39장: 부당한 비난 앞에서 내면의 성채를 지키는 법


차가운 침묵이 회의실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방금, 당신의 상사로부터 공개적인 질책을 받았습니다. 어제 제출했던 보고서의 작은 실수 하나가, 마치 회사의 존폐를 위협하는 거대한 과오인 것처럼 부풀려졌습니다. 상사는 프로젝트가 겪고 있는 모든 어려움의 책임을, 이제 갓 입사한 지 일 년 남짓 된 당신의 미숙함 탓으로 돌렸습니다. 당신은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 문제의 진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회의실에 앉아 있는 다른 모든 동료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나서서 당신을 변호해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약속이라도 한 듯, 불편한 침묵 속에서 당신을 바라보거나, 혹은 당신의 시선을 피할 뿐입니다.

당신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심장은 가슴을 찢을 듯이 격렬하게 뜁니다. 당신의 머릿속은 수치심과, 억울함과, 그리고 이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신 자신에 대한 무력감으로 뒤엉켜, 하얗게 비어버립니다. 당신은 지금, 모든 사람의 시선이라는 무대 위에서, ‘무능하고 실수투성이인 신입사원’이라는 역할을 강제로 부여받은 채, 발가벗겨져 서 있습니다. 당신이 지난 일 년간, 인정받기 위해, 이 조직의 일원이 되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듯합니다.


회의가 끝나고, 당신은 유령처럼 당신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동료들은 당신에게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당신의 귀에 닿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귓속을, 당신의 온 존재를 가득 채운 상사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당신을 향하던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만을 반복해서 재생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생각합니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 모두가 나를 비웃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 개인을 제물로 삼아 집단의 불안과 실패의 책임을 전가하는 현상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 (René Girard, 1923-2015)는, 사회가 내부적인 갈등과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만만한 희생양을 찾아내어,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집단 밖으로 추방하는 ‘희생양 메커니즘 (Scapegoat Mechanism)’이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부당한 비난은, 단순히 당신 상사의 나쁜 인격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프로젝트의 실패라는 위기 앞에서, 팀 전체가 느끼는 불안과 책임의 무게를, 가장 약한 구성원인 당신에게 떠넘김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잠시나마 연대감과 안정감을 되찾으려는, 잔인하고도 원시적인 집단 심리의 발현일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신의 고통이 이토록 극심한 이유는, 당신의 자존감과 정서적 안정이, 타인의 평가라는 외부적인 요소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줄리언 로터 (Julian B. Rotter, 1916-2014)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힘이 어디에 있다고 믿는지에 따라, ‘통제 소재 (Locus of Control)’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외적 통제 소재 (External Locus of Control)’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운명이나, 행운이나, 혹은 자신보다 강력한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칭찬에 쉽게 우쭐해지지만, 외부의 비난에는 그만큼 쉽게 절망에 빠집니다.

반면, ‘내적 통제 소재 (Internal Locus of Control)’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평가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인 기준과 가치에 따라 행동하려 노력합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행복과 불행의 열쇠를, 당신의 상사라는 변덕스러운 외부 권력의 손에 온전히 맡겨버린, ‘외적 통제 소재’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외부의 폭풍우 속에서, 어떻게 당신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이 부당한 비난의 감옥에서 탈출할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이 절박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2천 년 전,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현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은 전쟁터의 황제이든, 다리 저는 노예이든,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바꿀 수 없는 잔인한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 (Stoicism)입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본질을, 노예 출신의 철학자 에픽테토스 (Epictetus,)는 아주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너를 모욕하는 것은, 너를 비난하는 그 사람의 행위나 말이 아니다. 너를 모욕하는 것은, 그것들이 모욕적이라는 너 자신의 ‘판단’이다.” 당신의 상사는 당신에게 그저 몇 마디의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 말들이 당신의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비난’이 된 것은, 당신이 그 말에 ‘이것은 끔찍하고 부당하며, 나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다’라는 의미를 스스로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의 평온을, 타인의 입술 위에 올려놓는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마의 황제이자 가장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는, 그의 전쟁터 막사에서 쓴 일기, 즉 『명상록, Meditations』에서 그 답을 제시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외부의 혼돈 속에서도 결코 침범당하지 않는, 우리 영혼 안의 피난처, ‘내면의 성채 (Inner Citadel)’를 건설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내면의 성채’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외부 세계와 우리 자신을 명확히 구분하는, 우리의 ‘이성 (Logos)’이라는 단단한 벽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에픽테토스가 가르쳤던 것처럼, 우리는 먼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상사의 부당한 비난은, 명백히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비난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온전히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당신의 영역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책상에 앉아,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에서, 당신만의 ‘내면의 성채’를 쌓기 시작합니다.


먼저, 당신은 ‘사건’과 ‘판단’을 분리합니다. ‘상사가 나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이것은 당신의 판단입니다. 당신은 이 두 번째 판단을, 성벽 밖으로 추방합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상처 입은 당신의 감정이 만들어낸 왜곡된 해석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당신은 당신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가치는, 상사의 변덕스러운 칭찬이나 비난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어제까지 최선을 다해 그 보고서를 작성했던 당신의 ‘성실한 의도’와 ‘노력’ 그 자체에 있는 것입니까.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유일한 ‘선(good)’은, 외부의 결과가 아니라,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덕(virtue)’ 있는 행위 그 자체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덕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당신의 진짜 가치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당신을 비난한 그 상사를, 당신의 이성이라는 성벽 위에서 내려다봅니다. 그는 더 이상 당신을 파괴할 수 있는 거대한 괴물이 아닙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불안과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부당한 방식으로 화를 표출하고 있는, 한 명의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인간일 뿐입니다.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그는 자기 자신의 이성을 거스르는 행동을 통해, 사실은 자기 자신을 가장 크게 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에게 분노를 느끼는 대신, 오히려 연민을 느낍니다.


당신은 눈을 뜹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당신의 온 세상을 뒤덮었던 그 끔찍한 감정의 폭풍우는, 이제 저 멀리 물러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내면 성채 안에서, 안전하고 고요합니다.


오후가 되고, 당신은 그 상사와 복도에서 마주칩니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당신의 눈치를 봅니다. 예전 같았으면 당신은 그를 피하거나, 혹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감정적으로 대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고요하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목례를 합니다. 그 눈빛 속에는, 분노도, 두려움도, 비굴함도 없습니다. 오직, 어떤 외부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단단한 신뢰만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그 평온함이야말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응이자, 가장 품위 있는 복수입니다.


당신은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옵니다. 당신의 마음은 여전히 아프지만, 더 이상 부서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은 오늘, 세상이 당신에게 얼마나 부당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부당함과 잔인함도, 당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존엄성만큼은 결코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배웠습니다.


당신은 압니다. 이 내면의 성채를 짓는 일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평생에 걸쳐, 매일의 작은 전투 속에서,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려야 하는, 고독하고도 위대한 과업입니다. 오늘, 당신은 그 위대한 건축의, 첫 번째 벽돌을, 당신 자신의 상처와 눈물로, 단단하게 쌓아 올렸습니다.







40장: 정해진 일과가 없는 하루, 자유라는 이름의 불안


화요일 아침, 당신은 시계 알람이 아닌, 당신의 등 뒤 창문을 통과한 희미한 햇살에 잠을 깹니다. 당신의 몸은 지난 사십 년간의 기억을 따라,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려 합니다. 서둘러 씻고, 넥타이를 매고, 아침 뉴스 소리를 배경으로 허겁지겁 토스트를 삼켜야만 합니다. 당신의 뇌 속 모든 회로는, 다가오는 하루라는 전쟁을 위해 이미 비상 체제에 돌입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출근해야 할 사무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당신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지 일곱 번째 되는 날입니다. 당신을 짓누르던 그 견고한 의무의 갑옷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당신 앞에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완전히 텅 빈 하루가, 마치 망망대해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당신은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신의 마음은 날아갈 듯한 해방감이 아니라,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불안감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옵니다. 집 안은 당신의 느린 발걸음 소리가 어색하게 울릴 정도로 고요합니다. 아내는 아침 운동을 나갔고, 자식들은 각자의 삶을 살기 위해 떠난 지 오래입니다. 당신은 평생 동안, 이 이른 아침의 고요를 그토록 갈망해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고요의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지자,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삶이라는 기차는, 사십 년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정해진 선로 위를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어제, 그 기차는 ‘은퇴’라는 이름의 종착역에 도착했고, 당신은 이제 선로 없는 낯선 황무지에 홀로 내팽개쳐진 것입니다.


당신은 텔레비전을 켭니다. 경제 뉴스가 나오고, 젊은 전문가들이 당신이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새로운 용어들을 써가며 세상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당신은 저 흐름의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당신은 그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늙은 구경꾼일 뿐입니다. 당신은 신문을 펼칩니다. 빼곡한 활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사고들은, 더 이상 당신의 삶에 어떤 직접적인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당신은 세상으로부터, 당신이 평생을 바쳐왔던 그 치열했던 삶의 무대로부터, 완벽하게 유리(遊離)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근대 사회학의 기틀을 마련한 프랑스의 위대한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 (Émile Durkheim, 1858-1917)이 진단했던, 현대인이 겪는 가장 깊은 병리 현상, 즉 ‘아노미 (Anomie)’의 상태입니다.


뒤르켐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자살론, Le Suicide』에서, 자살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가 사실은 사회적 힘에 의해 깊이 영향받는 사회적 사실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규제와 통합의 정도에 따라, 여러 유형의 자살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그가 주목했던 것이 바로 ‘아노미적 자살’입니다.

아노미는 ‘규범 없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사회의 규범과 가치 체계가 붕괴되거나 급격하게 변동하여, 개인이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는 혼란과 무규범의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르켐에 따르면, 사회는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조절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거대한 ‘도덕적 힘’입니다. 직장, 가족, 종교와 같은 사회 집단은, 우리에게 명확한 규칙과 행동 규범, 그리고 공동의 목표를 제공함으로써, 우리의 무한한 욕망에 둑을 쌓아주고,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알려주는 닻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급격한 경제 변동이나, 전쟁, 그리고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은퇴’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개인이 의지하던 이 사회적 둑과 닻이 갑자기 사라져 버릴 때, 개인은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당신이 평생 동안 당신의 삶을 규정해주었던 ‘회사원’이라는 역할과, ‘출근과 퇴근’이라는 규칙과, ‘승진’이라는 목표가 모두 사라진 지금, 당신은 당신의 욕망을 어디로 향하게 해야 할지, 당신의 하루를 어떤 규칙으로 채워야 할지, 당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이 극심한 불안과 공허함은, 당신의 개인적인 나약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을 지탱해주던 사회적 규범의 둑이 무너져 내린, 지극히 ‘사회적인’ 고통입니다.

당신은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섭니다. 당신이 매일 출근하던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합니다. 당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짜증이 서려 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는 ‘가야 할 곳’이 있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가야 할 곳이 없습니다. 당신은 이 도시의 유일한 유령입니다.


당신은 공원 벤치에 앉아, 당신과 비슷한 연배의 다른 노인들을 봅니다. 그들은 함께 장기를 두거나, 바둑을 두거나, 혹은 그저 말없이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무리에 끼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저항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 나는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왔다.’ 이 생각은 당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자, 동시에 당신을 더욱 깊은 고독 속으로 몰아넣는 교묘한 감옥입니다.


당신의 시선은, 당신의 주름진 손 위로 떨어집니다. 이 손으로 당신은 무엇을 이루었던가. 당신은 가족을 부양했고,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사회의 성실한 구성원으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텅 빈 시간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당신의 삶 전체가,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허무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당신의 실존적 위기는 또 다른 위대한 사상가의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20세기 독일 태생의 미국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 (Erik Erikson, 1902-1994)은, 인간의 삶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덟 단계의 심리사회적 위기를 거치며 발달한다고 보았습니다. 에릭슨에게 인생이란, 각 단계마다 주어진 고유한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거나 혹은 실패하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장엄한 여정입니다. 당신이 지금 마주한 노년의 위기는, 이 모든 여정의 마지막 장이자, 이전의 모든 단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최종적인 결산과도 같습니다.


당신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당신이 걸어온 길고 긴 인생이라는 낡은 두루마리를 천천히 펼쳐봅니다.


첫 번째 단계는, 당신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겪었던 ‘신뢰 대 불신 (Trust vs. Mistrust)’의 위기였습니다. 갓난아기였던 당신에게 세상은 오직 부모님의 품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의 울음에 일관되고 따뜻하게 응답해주었을 때, 당신은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근원적인 신뢰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때 당신이 방치되고 거절당했다면, 당신의 영혼에는 세상에 대한 깊은 불신의 씨앗이 심어졌을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 남아있는 희미한 ‘희망’은, 바로 이 첫 번째 위기에서의 승리를 통해 얻은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당신이 막 걸음마를 떼고 ‘나’라는 말을 배우기 시작했던 유아기의 ‘자율성 대 수치심과 의심 (Autonomy vs. Shame and Doubt)’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내가, 내가’ 하며 스스로 해보려 했습니다. 그때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의 서툰 시도들을 격려하고 기다려주었을 때, 당신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 즉 자율성을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때 당신이 지나친 통제나 비난을 받았다면, 당신은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는 아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의지’는 바로 이 두 번째 갈등 속에서 싹텄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이에 몰두했던 아동 초기의 ‘주도성 대 죄책감 (Initiative vs. Guilt)’이었습니다. 당신은 놀이를 통해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역할을 분담하며, 당신의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주도성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의 그 모든 시도가 이기적이라거나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난받았다면, 당신은 당신의 욕망 자체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느끼는 아이로 성장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목적’을 가지고 무언가를 성취하는 기쁨을 아는 것은, 이 세 번째 위기를 잘 건너왔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읽고 쓰기를 배우며, 세상의 규칙과 지식을 습득해나가던 아동기의 ‘근면성 대 열등감 (Industry vs. Inferiority)’이었습니다. 당신은 과제를 해결하고 친구들과 경쟁하며, ‘나는 무언가를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유능감, 즉 근면성을 발달시켰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과정에서 끊임없는 실패를 경험하거나, 타인과 비교당하며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면, 당신의 마음속에는 지울 수 없는 열등감이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이 네 번째 전쟁터에서 얻은 전리품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격렬한 폭풍우가 몰아쳤던 청소년기의 ‘정체성 대 역할 혼란 (Identity vs. Role Confusion)’이었습니다. 당신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고뇌했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역할과 가능성 속에서 방황한 끝에, 마침내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당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그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당신은 어떤 역할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역할 혼란의 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당신이 믿는 가치에 헌신할 수 있는 ‘성실’의 덕목은, 이 혼돈 속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성인이 되어 타인과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시작했던 청년기의 ‘친밀감 대 고립감 (Intimacy vs. Isolation)’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정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배우자와 혹은 깊은 친구와,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과정에서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마음의 문을 닫았다면, 당신은 그 누구와도 깊이 연결되지 못하는 고립감 속에 빠졌을 것입니다. 당신이 타인을 온전히 끌어안는 ‘사랑’의 능력을 가진 것은, 이 여섯 번째 위기에서의 용기 있는 선택 덕분입니다.


일곱 번째 단계는, 당신이 가장 치열하게 살아왔던 중년기의 ‘생산성 대 침체 (Generativity vs. Stagnation)’였습니다. 당신의 관심은 더 이상 ‘나’ 자신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기여하는 ‘생산성’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당신은 자녀를 낳아 기르고, 직장에서는 후배들을 이끌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신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와 만족에만 몰두했다면, 당신의 삶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썩어가는 물처럼, ‘침체’의 늪에 빠졌을 것입니다. 당신이 다른 존재를 돌보고 책임지는 ‘보살핌’의 덕목을 아는 것은, 이 일곱 번째 위기를 성공적으로 항해해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이 모든 단계를 거쳐, 지금 여기에, 여덟 번째 단계인 ‘자아 통합 대 절망 (Ego Integrity vs. Despair)’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에릭슨에 따르면, 노년기는 단순히 쇠락의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지나온 삶 전체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통합하여,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로 완성해야 하는,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도 장엄한 과업의 시간입니다. 당신은 지금,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의미 있는 삶이었는가?’, ‘나는 나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았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내릴 수 있다면, 즉 당신의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유일무이한 삶의 일부로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당신은 ‘자아 통합’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자아 통합을 이룬 사람은, 자신의 삶이 대체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죽음 앞에서조차 평온함을 잃지 않는 마지막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지나온 삶이 온통 후회와 실패, 그리고 놓쳐버린 기회들로만 가득 차 보인다면, 당신은 ‘절망’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다시 한번 살 수만 있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 속에서 남은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내게 됩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이 극심한 불안은, 바로 이 ‘자아 통합’과 ‘절망’ 사이의 갈림길에 당신이 서 있다는 신호입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당신의 직업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 전체를 ‘직장인으로서의 나’라는 단 하나의 이야기로만 요약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끝나버리자, 당신의 삶 전체가 의미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즉 당신이 통과해 온 이 장엄한 여덟 단계의 여정 전체를 아우르는, 훨씬 더 크고 풍요로운 이야기로 다시 써야만 하는 위대한 도전에 직면한 것입니다.


당신은 벤치에서 일어나, 집으로 천천히 걸어 돌아옵니다. 당신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지만, 그 무거움의 정체가 조금은 명확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태나 외로움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지나온 삶 전체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물어오는, 거룩하고도 두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당신은, 먼지가 쌓인 창고에서 낡은 앨범 한 권을 꺼내 옵니다. 앨범을 펼치자, 흑백 사진 속의 앳된 당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결혼식 날의 긴장된 표정,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어설픈 기쁨, 그리고 수많은 명절과 여행 속에서, 당신의 가족들이 웃고 있는 모습들. 당신은 그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당신이 잊고 있었던 수많은 다른 이야기들을 발견합니다. 당신은 단지 ‘회사원’이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으며, 누군가의 친구이자 아들이었습니다. 당신의 삶에는 실패와 후회뿐만 아니라, 눈부신 사랑과, 작은 기쁨과, 이름 없는 수많은 순간들의 온기가 가득했습니다.


당신은 앨범을 덮습니다. 당신 앞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길고 긴 오후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텅 빈 시간은, 당신에게 더 이상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물이자, 가장 위대한 과업의 시간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이라는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온전한 그림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당신은 오늘, 정해진 일과가 없는 하루의 자유 속에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새로운 일과를 부여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삶의 역사가가 되고, 그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절망이 아닌 지혜와 통합의 언어로 써 내려가는 일이었습니다. 당신의 진짜 인생은, 어쩌면 은퇴와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낯선 불안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41장: 죽음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Memento Mori)

진료실의 공기는, 당신의 숨을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고 고요했습니다. 당신은 방금, 당신의 남은 시간이 유한하다는 선고를 들었습니다. 의사의 입에서 나온 몇 개의 의학 용어들과, 당신의 눈앞에 펼쳐진 흑백의 CT 사진들이, 당신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내일’이라는 이름의 약속을 무효화시켰습니다. 당신은 의사의 마지막 말을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귀는, 당신의 혈관 속에서 흐르는 피의 소리, 그리고 당신의 심장이 공포에 질려 내지르는 쿵쿵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원을 나와, 낯설어진 세상의 거리로 걸어 나왔을 때, 당신은 당신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는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웃고 떠들며 당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영원히 살 것처럼’ 보이는 다른 종족 같았습니다. 그들의 사소한 걱정과, 내일을 기약하는 약속과, 먼 미래를 향한 계획들이, 당신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순진무구한 동화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이미 퇴장을 선고받은 배우였습니다. 남은 것은, 막이 내리기 전까지의 짧고 무의미한 시간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당신은, 며칠 동안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첫 번째 파도는 ‘부정 (Denial)’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진일 것이다. 나는 건강하다.’ 당신은 다른 병원의 예약을 잡고, 인터넷을 뒤지며 당신의 증상이 다른 가벼운 질병의 증상과 일치한다는 증거들을 필사적으로 수집했습니다.

두 번째 파도는 ‘분노 (Anger)’였습니다. ‘왜 하필 나인가?’ 당신은 당신의 몸을 배신자처럼 저주했고, 세상의 모든 건강한 사람들을 향해 이유 없는 증오를 느꼈으며, 이 부조리한 운명을 당신에게 내린 보이지 않는 신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파도는, 깊고 축축한 ‘절망 (Despair)’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이 여기서 끝났다고, 당신이 이루고 싶었던 모든 꿈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미래가 모두 재가 되어버렸다고 느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벽 앞에서, 완전히 무력했습니다.

바로 그 절망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당신은 아주 오래전, 젊은 시절 당신의 마음을 잠시 사로잡았으나,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우울하게 느껴져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고대의 지혜 하나를 떠올립니다. 그것은 라틴어 경구,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고대 로마의 위대한 철학 학파였던 스토아 학파 (Stoicism)의 현자들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매일같이 상기시켰던, 그들 수행의 핵심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 말을, 삶의 기쁨을 앗아가는 염세적이고 병적인 경고라고 오해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죽음의 문턱에 강제로 끌려와 서게 된 당신은, 비로소 이 말의 진짜 의미를, 그 서늘하고도 눈부신 지혜를 온몸으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메멘토 모리’는 결코 죽음에 대한 우울한 집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을 가장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실천적인 도구였습니다. 로마의 황제이자 가장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는, 전쟁터의 막사 안에서 매일 밤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뇌었습니다. “너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를, 너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더 잘 살게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은 당신의 남은 시간을 통해, 그 역설적인 진실의 문을 하나씩 열어가기 시작합니다.

첫째, 죽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당신을 괴롭히던 수많은 사소한 걱정들이 그 무게를 잃고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을 당신은 발견합니다. 어제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친구의 무심한 말 한마디, 몇 년 전에 놓쳐버린 승진의 기회에 대한 씁쓸한 후회, 당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 이 모든 것들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배경 앞에서는 얼마나 하찮고 무의미한 것들입니까. 로마의 또 다른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 (Seneca, c. 4 BC–AD 65)는,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인생이 짧다고 불평한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명료한 필터가 되어줍니다. 당신은 비로소, 당신의 유한한 에너지를 어디에 쏟아야 할지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둘째, 죽음의 자각은,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의 절대적인 가치를 되돌려줍니다. 당신의 삶은 지금까지, 언제나 ‘미래’를 위한 저당물이었습니다. ‘나중에 은퇴하면…’,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당신은 언제나 현재를 미래의 행복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만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에게는, 확실한 ‘나중’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이 순간뿐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당신은, 며칠 동안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당신의 몸은 마음의 절망을 따라 빠르게 쇠약해졌고, 며칠 전 당신은 결국 이 차가운 병실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병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의 따뜻함을, 물 한 모금의 시원함을, 당신의 손을 잡아주는 아내의 손길의 부드러움을, 마치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것처럼, 온 존재를 다해 느낍니다. 이 모든 평범한 감각들이, 이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눈물겹도록 소중한 기적으로 다가옵니다. ‘메멘토 모리’는, 우리를 미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유일하게 실재하는 시간인 ‘현재’로 귀환시키는, 가장 강력한 각성제입니다.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통찰은, 20세기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사유 속에서 더욱 깊고 근원적인 차원으로 발전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방식, 즉 ‘현존재 (Dasein)’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 바로, 자신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죽음을 향한 존재 (Sein-zum-Tode)’라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대부분 ‘비본래적인 (inauthentic)’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게 하니까’라는 익명의 규칙, 즉 ‘그들 (das Man)’의 방식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 기대하는 역할을 연기하며, 죽음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죽음을,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오직 나 자신만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용기 있게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본래적인 (authentic)’ 자기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자각은, 우리를 세상의 모든 하찮은 소음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나의 유한한 삶을,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 앞에 우리를 홀로 세웁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이 지독한 고독은, 저주가 아니라, 당신이 마침내 ‘본래적인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신호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타인의 인정이나 사회적 성공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남은 시간을, 오직 당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심합니다. 당신은 평생 미뤄왔던 낡은 기타를 다시 꺼내어, 서툰 코드를 짚으며 노래를 부릅니다. 당신은 오랫동안 소원했던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먼저 서툴게 당신의 마음을 열어 보입니다. 당신의 행위들은 더 이상 외부의 평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 내면의 진실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 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또 다른 철학자, 에피쿠로스 (Epicuros, BC 341–270)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이 없고, 죽음이 왔을 때에는 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명쾌한 논리는,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공포를 덜어줍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자들과 하이데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의 ‘자각’이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있게 만드는 역설적인 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이 마주한 이 죽음의 자각은, 스토아 철학을 넘어, 히말라야의 설산 깊은 곳에서 수천 년간 이어져 온, 티베트 불교의 심오한 지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어둡고 두려운 종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죽음을, 영혼이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가장 장엄하고도 중요한 기회의 순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위대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평생에 걸쳐 죽음을 ‘준비’하고 ‘연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수행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의 위대한 경전인 『티벳 사자의 서, Bardo Thödol』는, 그 놀라운 지혜의 정수를 담고 있는 영혼의 항해지도입니다. ‘바르도 퇴돌’은 문자 그대로 ‘들음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바르도 (Bardo)’란 ‘사이’ 혹은 ‘중간 상태’를 의미하는 티베트어로, 단순히 죽음 이후의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잠과 꿈 사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 우리 삶의 모든 ‘사이’가 바로 바르도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결정적인 바르도가 바로, 죽음의 순간부터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의 과도기적인 의식 상태입니다.


이 경전은, 바로 그 낯설고 혼란스러운 바르도의 세계를,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여행하게 되는지를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오면, 우리의 육체를 이루던 네 가지 원소(지수화풍)가 차례로 해체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진 그 텅 빈 자리에서, 우리의 의식은 그 본래의 모습, 즉 어떤 개념이나 생각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은, 눈부시게 빛나는 ‘근본적인 맑은 빛 (The Clear Light of Reality)’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본성이자, 우주의 근원 그 자체입니다. 만약 살아있는 동안 수행을 통해 이 맑은 빛의 본질에 익숙해져 있다면, 죽는 자는 이 빛을 알아보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아이처럼 그 안으로 녹아들어, 윤회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解脫)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죽음이 주는 첫 번째이자 가장 위대한 기회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혼은, 이 눈부신 빛의 강렬함에 놀라거나, 평생 동안 ‘나’라는 에고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 근원적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기절하거나 도망치게 됩니다.


그렇게 첫 번째 기회를 놓친 의식은, 다음 단계인 ‘법성의 바르도 (Chönyi Bardo)’로 들어섭니다. 이 세계에서, 의식은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업(業, Karma)의 에너지가 투영된, 강렬하고 생생한 환영들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자비롭고 평화로운 신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분노하고 위협적인 악마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은 자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그대의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 모든 평화로운 신들과 분노한 악마들은, 모두 그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 자신의 모든 경험이 자기 마음의 투영임을 깨닫는다면, 영혼은 두 번째 해탈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 기회마저 놓치게 되면, 의식은 마지막 단계인 ‘윤회의 바르도 (Sidpa Bardo)’로 이끌립니다. 이곳에서 의식은 강력한 업의 바람에 휩쓸려, 다음 생의 부모가 될 남녀의 결합 장면을 보게 되고, 강렬한 욕망과 질투 속에서 그곳으로 이끌려, 다시 한번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는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티베트의 현자들에게, 삶이란 바로 이 죽음의 여정을 미리 준비하는 과정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이 평생에 걸쳐 행했던 명상과 수행은, 죽음의 순간에 마주할 ‘맑은 빛’을 미리 알아보고, 바르도에서 펼쳐질 수많은 환영들이 내 마음의 투영임을 꿰뚫어 보는 힘을 기르기 위한, 치열하고도 실질적인 훈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삶을 위축시키는 주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가장 위대한 졸업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여, 마침내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하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의 주문이었습니다. 당신의 삶이, 바로 그 가장 위대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거룩한 준비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병실 침대에 누워, 당신의 마지막 날들을 보냅니다. 당신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평화롭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의 모든 순간,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모두를, 당신의 것이었음을 온전히 껴안습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메멘토 모리’는 죽음의 주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삶의 주문이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삶을 사랑하라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라는, 가장 절박하고도 다정한 명령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병이, 당신의 죽음이, 당신의 삶에서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깨닫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스승이자, 가장 마지막 선물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진짜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42장: 자식의 실수를 막아줄 수 없을 때의 겸허함(Amor Fati)

당신은 당신의 아들이 실패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막연한 불안이나 비관적인 예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평생을 통해 얻은, 삶의 냉정한 이치에 대한 씁쓸한 확신이었습니다. 당신의 눈에는 보였습니다.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아들의 눈 속에서 이글거리는 저 위험한 불꽃이. 그것은 순수한 열정의 불꽃인 동시에,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맹목의 불꽃이었습니다. 당신의 귀에는 들렸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시작했다는 그의 새로운 사업 계획 속에 숨겨진, 수많은 논리의 허점과 장밋빛 환상들이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그가 상처 입지 않기를, 실패의 쓴맛을 보지 않기를, 세상의 거친 파도 앞에서 좌절하지 않기를, 당신의 온 존재를 다해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조용히 불러 앉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십 년에 가까운 사회 경험과, 당신이 겪었던 수많은 성공과 그보다 더 많았던 실패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그의 계획이 가진 위험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해주었습니다.


당신의 말에는 어떤 비난이나 질책도 없었습니다. 오직 아들의 꿈이 꺾이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절박하고도 노련한 사랑만이 담겨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아들은, 당신의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신의 조언을, 낡은 시대의 패배주의적인 잔소리로 치부했습니다. 그는 당신의 신중함을,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는 늙은 세대의 무기력함으로 해석했습니다. 그의 눈빛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그날 이후, 당신은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조언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이제는 당신의 항구를 떠나 스스로의 항해를 시작한 작은 배가, 거대한 폭풍우를 향해 용감하게, 그리고 무모하게 나아가는 것을, 뭍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늙은 등대지기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매일 밤, 그 작은 배가 무사하기를 기도했지만, 동시에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 배는 결국 암초에 부딪히게 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늦은 밤, 당신의 전화벨이 울렸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부서져 내린 채, 간신히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함께했던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당신이 평생 모아 아들의 사업 초기 자금으로 보태주었던 그 돈을 포함한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고.

당신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습니다. 당신의 첫 번째 본능적인 반응은, 안타까움과 함께 섞여 올라오는 희미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러게, 내가 그때 뭐라고 했니...’ 하지만 그 감정은 이내, 아들의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주고 싶은 아버지로서의 조급한 책임감에 휩쓸려 사라집니다. 당신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당신의 남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이, 이 실패의 잿더미 속에서 홀로 울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집 현관문을 나서려던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모든 행동을 멈춥니다.


당신의 내면에서, 당신도 이해할 수 없는, 더 깊고 고요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 목소리는 당신에게, 지금 당신이 하려는 모든 ‘해결’의 노력이, 사실은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당신 자신의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당신의 이기심일지도 모른다고 속삭였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아들의 실패가 아니라, 그 실패를 막아주지 못한 ‘무력한 아버지’로서의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그 목소리는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들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무력감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당신은 당신의 개인적인 고통을 넘어, 인간이 운명과 마주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식에 대한, 위대한 철학적 통찰과 조우하게 됩니다. 당신의 이 무력감이야말로,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우리에게 던져준 가장 위대하고도 위험한 개념, ‘아모르 파티 (Amor Fati)’로 들어가는 좁은 문입니다.


‘아모르 파티’는 라틴어로, 문자 그대로 ‘운명에 대한 사랑 (Love of Fate)’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지’라고 체념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결코 아닙니다.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는, 훨씬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심지어는 환희에 찬 긍정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 즉 당신이 경험한 모든 기쁨과 성공뿐만 아니라, 당신이 겪어야만 했던 모든 고통과 실패, 추악함과 실수까지도, 그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그랬어야만 했다”고, “다시 한번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온 존재를 다해 외치는, 가장 위대한 긍정의 공식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아모르 파티’의 경지를, 그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인 ‘영원 회귀 (Eternal Recurrence)’라는 사상 실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어느 날 밤, 악마가 당신에게 찾아와 이렇게 속삭인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 너의 모든 고통과 기쁨, 모든 사소한 일과 위대한 순간들을, 너는 앞으로 무한히, 똑같은 순서로, 영원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한다.” 니체는 묻습니다. 이 끔찍한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은 절망하며 땅바닥에 쓰러져 이를 갈 것인가, 아니면 그 악마에게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환희에 차서 외칠 것인가.


‘아모르 파티’는, 바로 이 영원 회귀라는 가장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심지어는 춤을 추게 만드는, ‘초인(Übermensch)’의 정신 상태입니다. 당신의 삶 전체가, 당신이 저지른 모든 실수와, 당신이 겪은 모든 고통을 포함하여, 다시 한번, 그리고 영원히 반복되기를 바랄 수 있을 만큼, 당신의 운명 전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당신 아들의 실패라는 이 고통스러운 사건을, 이 ‘아모르 파티’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당신의 첫 번째 반응은, 이 사건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저항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고통스러운 부분을 당신과 당신 아들의 삶이라는 그림에서 도려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모르 파티’는 당신에게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이 실패 또한, 당신 아들의 삶에서,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당신의 삶에서, 필연적이고도 필수적인 한 부분이었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경험이 없었다면, 당신의 아들은 결코 배우지 못했을 교훈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실패가 아니었다면, 당신과 당신의 아들은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더 깊은 관계의 가능성이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할 일은 이 운명을 바꾸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 운명 전체를, 그 빛과 그림자를 모두 포함하여,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니체의 통찰은, 놀랍게도 동양의 가장 오래된 지혜와도 깊이 공명합니다.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무위 (無爲)’의 정신은, 바로 이 ‘아모르 파티’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무위’는 나의 작은 의지(유위, 有爲)로 세상의 거대한 흐름, 즉 ‘도(道)’를 거스르려 하지 않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들의 실패를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던 것은 ‘유위’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그의 실패를 그의 운명의 일부로, 그리고 당신 운명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어떤 인위적인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위’의 실천입니다.


또한, 중세 기독교의 위대한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c. 1260–c. 1328)가 말했던 ‘내맡김 (Gelassenheit, 겔라센하이트)’의 정신 또한, 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내맡김’은 나의 뜻을 비우고, 모든 것을 신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가장 깊은 차원의 신뢰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향한 당신의 걱정과 조급함은, 사실 모든 것을 당신이 통제해야 한다는 교만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침묵은, 당신 아들의 삶이 당신의 소유가 아니라, 그 자신의 것이며, 더 나아가 우주의 거대한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허한 ‘내맡김’의 표현입니다.


당신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은 당신의 아들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는, 어떤 해결책이나, 어떤 위로나, 어떤 훈계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무거운 한 마디를 건넵니다.

“아들아, 괜찮다. 집으로 와라. 아빠가, 밥 차려 놓을게.”


그날 밤, 당신과 당신의 아들은 아무 말 없이, 늦은 저녁 식사를 함께 합니다. 식탁 위에는 어떤 특별한 음식도 없습니다. 그저 따뜻한 밥과, 된장찌개와, 몇 가지의 낡은 반찬들뿐입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당신들은 이전에는 결코 나누어보지 못했던, 가장 깊고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당신의 침묵은, 아들의 실패를 긍정하고, 그의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장 강력한 ‘아모르 파티’의 선언입니다. 당신은 아들의 실수를 막아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실패의 잿더미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아들의 곁을, 어떤 판단도 없이, 그저 함께 있어주는 법을 배웠습니다.

당신이 아들에게 보여준 이 침묵의 긍정이야말로, 20세기 인본주의 심리학의 위대한 아버지, 칼 로저스 (Carl Rogers, 1902-1987)가 인간이 성장하고 치유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조건이라고 말했던,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의 살아있는 실천입니다.


이것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말한 ‘가치의 조건 (Conditions of Worth)’이라는 개념을 살펴봐야 합니다. 로저스에 따르면, 우리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조건적인 사랑 속에서 자라납니다. 우리는 ‘착한 아이가 되면’, ‘좋은 성적을 받으면’, ‘성공하면’ 사랑받을 것이라는 직접적이고 암묵적인 메시지를 끊임없이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치의 조건’을 내면화합니다. 즉, 자신의 존재 가치가 어떤 외부적인 조건이나 성취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성공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와 같은 내면의 규칙들이, 우리의 진짜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고, 우리를 평생에 걸쳐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들의 성공을 그토록 바라고, 그의 실패를 어떻게든 막아주려 했던 마음의 이면에는, 당신 또한 ‘성공한 자식을 둔 부모’라는 가치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싶었던 욕망이 숨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 또한, ‘성공한 아들’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온전히 주어지는, 미묘하고도 강력한 조건부 사랑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은 이 모든 조건을 완전히 내려놓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행동이나 성취, 감정이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어떤 판단이나 평가도 없이, 온전히 수용하고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의 모든 행동에 동의하거나 그것을 좋아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실패와, 그의 어리석음과, 그의 상처 입은 모습까지도, 그를 이루는 하나의 소중한 부분으로서 기꺼이 끌어안는, 더 깊고 넓은 차원의 수용입니다. 로저스는 바로 이 무조건적인 수용의 경험 속에서만, 인간이 비로소 자신의 진짜 감정과 마주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되찾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당신이 아들에게 건넨 “밥 차려 놓을게”라는 그 단순한 말은, 바로 이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가장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표현이었습니다. 그 말속에는 ‘그러게 내 말이 맞았지’라는 비난도 없었고,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냐’는 불안한 질문도 없었습니다. 그 말은 오직 이것만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너는 실패했다. 너는 지금 아플 것이다. 하지만 너의 가치는 너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너는 나의 아들이고, 그것만으로도 너는 온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당신은 ‘성공한 아들’이라는 조건 하에서 그를 사랑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바로 지금 여기, ‘실패하고 상처 입은 아들’이라는 그의 존재 자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온전히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에게 해결책이 아니라,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안전함 속에서, 당신의 아들은 비로소 자신의 실패를 온전히 슬퍼하고,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작은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란, 자식의 길에서 모든 돌부리를 치워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란, 그가 스스로의 길을 가다 넘어져 피 흘릴 때, 그 상처마저도 그의 위대한 삶의 일부임을, 그리고 그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 여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묵묵히 알려주는 것임을. 당신은 오늘, 당신 자식의 실패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운명 앞에서, 그 운명 전체를 끌어안는 법을,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법을, 비로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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