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소유 (The Possession)

by DrLeeHC

제5부: 소유 (The Possession)



25장: 주가 폭락, 숫자에 묶여버린 감정

월요일 아침, 당신은 커피를 내리기도 전에, 잠이 덜 깬 눈으로 스마트폰의 주식 앱을 먼저 켭니다. 밤사이 당신이 잠들어 있던 지구 반대편의 세상은,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지도 모르는 무수한 사건들로 요동쳤습니다. 간밤의 미국 증시는 어땠는지,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기사는 없었는지, 당신이 투자한 회사의 최고 경영자는 또 무슨 말을 했는지. 당신은 이 모든 정보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화면에 떠오른 붉은색과 푸른색의 숫자들. 그것들은 더 이상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당신의 희망이자 불안이며, 당신의 지성을 증명하는 성적표이자, 당신의 미래를 약속하는 신탁(神託)입니다.

당신은 지난 몇 년간, 성실하게 일해서 모은 돈과, 미래를 담보로 빌린 대출금을 주식 시장에 쏟아부었습니다. 그것은 탐욕스러운 도박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당신은 믿었습니다. 월급만으로는 더 이상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든 이 시대에, 투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당신은 수십 권의 책을 읽고, 경제 뉴스를 분석하며, 나름의 투자 원칙을 세웠습니다. 당신은 이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시장을, 당신의 이성과 지식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돈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미래 또한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전 아홉 시, 시장이 열립니다. 당신이 보유한 종목의 주가가 약간 오르자, 당신의 심장에서는 쾌감이라는 이름의 작은 화학 반응이 일어납니다.

‘역시 내 판단이 맞았어.’


당신은 이 작은 성공을 통해, 당신이 이 혼란스러운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는 특별한 통찰력을 가졌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 쾌감은 짧고, 이내 더 큰 상승을 향한 갈증으로 변합니다.

오전 열한 시, 갑자기 당신의 스마트폰에 긴급 알림이 뜹니다. 예상치 못했던 국제 분쟁 소식. 그와 동시에, 당신이 보고 있던 주식 차트가 붉은색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3%, -5%, -7%… 숫자들이 추락하는 속도는, 당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속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당신의 손에 땀이 차고, 호흡이 가빠집니다. 당신은 사무실 책상 아래로 스마트폰을 숨긴 채, 일하는 척하며, 1분 간격으로 앱을 새로고침합니다. ‘괜찮아, 일시적인 조정일 거야. 곧 반등할 거야.’ 당신의 이성은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당신의 본능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감지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심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대니얼 카너먼 (Daniel Kahneman, 1934-2024)이 그의 동료 아모스 트버스키와 함께 연구하여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행동 경제학 (Behavioral Economics)’이 밝혀낸 인간의 비합리적인 모습입니다. 카너먼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합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판단과 결정은, 수많은 인지적 편향 (cognitive bias)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됩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은, 바로 ‘손실 회피 (Loss Aversion)’ 성향 때문입니다. 카너먼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같은 크기의 이익에서 얻는 기쁨보다, 손실에서 느끼는 고통을 심리적으로 두 배 이상 더 크게 느낍니다. 100만 원을 벌었을 때의 기쁨보다, 100만 원을 잃었을 때의 고통이 훨씬 더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당신의 계좌에 찍힌 파란색 숫자들이, 당신의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마비시키고, 당신을 원시적인 공포의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1분마다 앱을 새로고침하는 행위는, 당신이 시장을 통제할 수 있다는 ‘통제의 환상 (Illusion of Control)’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간절한 바람이나 주시 행위가, 저 거대한 시장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합리적인 투자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당신은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 원시 부족의 주술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시장의 공포는 극에 달합니다. 당신은 동료들과 밥을 먹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자산이 얼마가 더 증발했을지를 생각하며 밥알의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오후가 되자, 당신은 결국 당신의 원칙을 깨뜨립니다. ‘패닉에 빠져 팔지 않는다’는 당신의 다짐은, ‘지금이라도 팔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더 큰 공포 앞에서 무너져 내립니다. 당신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마침내 ‘매도’ 버튼을 누릅니다. 당신의 합리적인 판단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팔고 있다는 집단적인 공포, 즉 ‘무리 행동 (Herding Behavior)’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저녁, 당신은 텅 빈 집으로 돌아옵니다. 시장은 당신의 자산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채 마감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돈을 잃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당신이 믿어왔던 당신 자신의 이성과 통제력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시장의 패배자일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의 감정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생각합니다. ‘내가 실제로 잃은 것은 무엇인가?’ 아직 사지도 않은 미래의 집, 아직 떠나지도 않은 미래의 여행. 그것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당신의 상상이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실제로 잃은 것은, 당신의 스마트폰 화면에 찍혀 있던, 몇 개의 디지털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실체도 없는 숫자의 소멸이, 마치 당신의 팔다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이토록 생생한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게오르크 짐멜 (Georg Simmel, 1858-1918)의 위대한 저서 『돈의 철학, Philosophie des Geldes』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짐멜에 따르면, 돈은 단순히 교환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돈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돈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세상 모든 것의 고유한 가치를 하나의 숫자로 환원시켜 버리는 ‘추상화 (abstraction)’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손으로 직접 만든 의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의 땀과 기술과 이야기가 담긴 질적으로 고유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의자에 ‘10만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는 순간, 그 의자는 다른 10만 원짜리 물건, 예를 들어, 근사한 저녁 식사, 최신 스마트폰, 혹은 주식 1주와 교환 가능한 양적인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돈은 모든 것의 개성과 영혼을 지워버리고, 그것들을 차갑고 익명적인 숫자의 세계로 편입시킵니다.

당신이 주식 시장에서 했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간’과 ‘노동’이라는, 당신 삶의 구체적이고 질적인 가치를 ‘돈’이라는 1차 추상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돈을, 기업의 미래 가치라는 더 높은 수준의 추상물인 ‘주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 자체를, 끊임없이 깜박이는 숫자의 세계 속에 던져 넣은 것입니다. 짐멜은 이렇게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는 현대인의 내면 상태를, 모든 것에 무감각해지고 질적인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권태로운 태도 (blasé attitude)’라고 불렀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당신 삶의 진짜 가치들, 즉 가족과의 시간, 건강, 우정 등에는 권태로워진 채, 오직 숫자의 증감에만 격렬하게 반응하는 영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이제, 이 숫자의 감옥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합니다. 고대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 (Stoicism)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는, 그의 『명상록, Meditations』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주식 포트폴리오는, 당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당신의 평온 (ataraxia)을 의존하는 것은, 마치 변덕스러운 날씨에 당신의 행복을 거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한 당신의 ‘판단’과 ‘태도’뿐입니다. 당신은 이 사건을 ‘나의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판단할 수도 있고, ‘나의 집착과 무지를 깨닫게 해준 값비싼 수업이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의 지혜 또한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당신의 고통은 돈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돈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 (upādāna)했기 때문입니다. 주식의 숫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상(無常, anicca)’한 현상일 뿐입니다. 그 변화무쌍한 파도에 당신의 자아라는 배를 묶어두었기에, 파도가 칠 때마다 당신의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 파도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의 움직임에 더 이상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집착의 닻을 거두어들이는 ‘내려놓음 (non-attachment)’의 수행을 통해 찾아옵니다.


그날 저녁, 당신은 당신의 스마트폰을 봅니다. 밤사이 미국 시장이 어떻게 움직일지, 내일 아침 당신의 계좌가 어떻게 변해있을지를 확인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낍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주 잠시 망설인 뒤에, 스마트폰의 전원을 꺼버립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둡니다.


당신은 거실로 나가, 묵묵히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의 곁에 섭니다. 그리고는 함께 채소를 다듬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당근의 단단한 감촉과, 양파의 아린 냄새와, 물이 당신의 손등을 스치는 시원한 감각에 집중합니다. 그것들은 숫자가 아닌, 진짜 세계의 감각입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돈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당신의 통제 밖에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오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되찾을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당신은 숫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다시 실재의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주가 폭락이라는 이 고통스러운 사건은, 당신의 재산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당신을 묶고 있던 보이지 않는 감옥의 본질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은 오늘,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당신의 집착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26장: 새로 산 명품 가방이 주는 짧은 위로


회색빛 수요일 오후, 당신은 끝이 보이지 않는 회의에 갇혀 있습니다. 형광등 불빛은 차갑고, 공기는 건조하며, 상사의 지루한 목소리는 당신의 의식을 솜처럼 무겁게 짓누릅니다. 당신은 당신 앞에 놓인 보고서를 보고 있지만, 당신의 눈은 활자를 읽지 못하고 그 위를 표류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젯밤 늦게까지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았던, 작고 반짝이는 어떤 세상으로 달아나 있습니다.


그 세상은 부드러운 가죽과, 정교한 금속 장식과, 우아한 로고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당신이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며칠째 닳도록 바라 본 하나의 명품 가방.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가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이 모든 지루함과, 모멸감과, 권태로부터 당신을 구원해 줄 약속의 보물이자, 당신이 잃어버린 자존감과, 당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아름다움을 되찾아줄 마법의 부적과도 같습니다. 당신은 이 회의가 끝나면, 그 가방을 직접 보기 위해 곧장 백화점으로 달려가리라 마음속으로 맹세합니다. 그 생각만으로, 당신은 남은 오후를 견뎌낼 힘을 겨우 얻습니다.


주말 오후, 당신은 마침내 그 약속의 땅, 백화점 명품관에 들어섭니다. 바깥 세상의 소음은 완벽하게 차단되고, 부드러운 조명과 은은한 향수 냄새, 그리고 나지막한 클래식 음악이 당신을 맞이합니다. 이곳은 물건을 파는 시장이 아니라, 욕망을 파는 신전(神殿)입니다. 정중한 미소와 흠잡을 데 없는 태도의 직원들은, 이 신전의 사제들입니다. 당신은 잠시 주눅이 들지만, 이내 당신이 이 신전에서 경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신도임을, 즉 이것을 구매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습니다.

마침내 당신은,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그 가방 앞에 섭니다. 직원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마치 성물(聖物)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것을 유리 진열장에서 꺼내 당신에게 건넵니다. 당신은 가방을 받아듭니다. 화면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부드러운 가죽의 감촉, 차갑고 단단한 금속 장식의 무게, 그리고 오직 새것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독특한 향기. 당신의 모든 감각이 이 작은 사물을 향해 열리고, 당신의 심장은 기분 좋은 흥분으로 뛰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거울 앞에 서서 가방을 어깨에 메어 봅니다. 거울 속에는, 몇 시간 전까지 집에서 생활에 지쳐 있던 당신이 아니라, 세련되고, 성공했으며, 특별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낯선 여자가 서 있습니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의 카드를 내밉니다. 몇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숫자가 단말기에 찍히는 그 짧은 순간, 당신은 불안감 대신 해방감을 느낍니다. 이 가방을 소유하기 위해 당신이 감내해야 했던 모든 초과 근무와, 스트레스와, 포기해야 했던 다른 모든 것들이, 이 순간의 황홀경 속에서 모두 보상받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 독일의 철학자들인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Adorno, 1903-1969)와 막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 1895-1973)가 그들의 저서 『계몽의 변증법, Dialektik der Aufklärung』에서 통찰했던 ‘문화 산업 (The Culture Industry)’의 작동 방식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는 더 이상 개인의 독창적인 표현이 아니라, 대중을 지배하고 현혹하기 위해 표준화된 상품을 생산하는 거대한 ‘산업’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느낀 이 욕망은,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광고와,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문화 산업이 당신에게 끊임없이 주입한 ‘만들어진 욕망’입니다.


문화 산업은 당신에게, 이 가방을 소유하면 당신의 개성이 드러나고 당신의 삶이 특별해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 약속의 결과, 당신은 당신과 똑같은 욕망을 주입받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가방을 들고, 똑같은 만족감을 느끼는, 하나의 표준화된 소비자가 될 뿐입니다. 당신은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거대한 시스템이 설계한 각본 위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연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당신은, 당신의 방에서 조심스럽게 가방의 포장을 풉니다. 견고한 상자와, 부드러운 더스트 백과, 당신의 소유를 증명하는 개런티 카드. 이 모든 것은 구매라는 행위를 하나의 거룩한 의례(儀禮)으로 만드는 정교한 장치들입니다. 당신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가방을, 당신의 화장대 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둡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당신의 지친 영혼은, 이 작고 아름다운 사물이 뿜어내는 빛 속에서, 잠시나마 위로를 얻습니다.


당신이 얻은 이 위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상품의 가치를 네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첫째는 물건의 쓸모를 의미하는 ‘사용 가치’이고, 둘째는 그것의 가격을 의미하는 ‘교환 가치’입니다. 하지만 현대 소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해진 것은, 셋째와 넷째 가치, 즉 ‘상징 가치’와 ‘기호 가치’입니다. 당신이 산 이 명품 가방은, 물건을 담는 ‘사용 가치’ 때문에 그토록 비싼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구매한 것은 가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가방이 의미하는 ‘상징’과 ‘기호’입니다. 그것은 ‘나는 성공했다’, ‘나는 특별한 취향을 가졌다’, ‘나는 이 정도는 소비할 수 있는 계층에 속한다’는, 언어보다 훨씬 더 강력한 사회적 기호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만족감은, 바로 이 기호를 성공적으로 소유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입니다.


이러한 기호의 소비는, 미국의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 (Thorstein Veblen, 1857-1929)이 그의 저서 『유한계급론,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에서 명명했던 ‘과시적 소비 (Conspicuous Consumption)’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베블런에 따르면,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소비는 생존을 위한 필요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집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이 가방을 샀다고 믿지만, 당신의 무의식은 이 가방을 들고 다른 사람 앞에 섰을 때의 그들의 시선을 이미 계산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위로는, 타인과의 비교 우위 속에서만 잠시 유지되는, 위태롭고도 허약한 위로입니다.

다음 날 아침, 당신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화장대 위에 놓인 가방을 봅니다. 어젯밤, 당신의 방을 가득 채웠던 그 황홀한 후광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아름답고, 정교하며, 비싼 사물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의 영혼을 구원해 줄 마법의 부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가죽과 금속으로 만들어진, 말 못하는 하나의 ‘물건’일 뿐입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어젯밤의 그 짧은 위로는, 마치 진통제와도 같았다는 것을. 진통제는 잠시 고통을 잊게 해주지만, 병의 근원을 치료해주지는 못합니다. 이 가방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남편과의 소원한 관계, 나이 들어감에 대한 불안 등과 같은, 당신 삶의 근원적인 문제들 중 그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 가방의 존재는 당신의 진짜 문제들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킬 뿐입니다.

당신이 마주한 이 낯선 공허함의 정체를, 불교의 지혜는 세 가지 보편적인 진실을 통해 비추어 줍니다. 불교의 스승들은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세 가지 특징, 즉 ‘삼법인 (三法印, Tilakkhana)’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 (無常, Anicca)’, 그래서 모든 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고 (苦, Dukkha)’, 그리고 그 어떤 것에도 불변하는 ‘나’라는 실체는 없다는 ‘무아 (無我, Anatta)’입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경험은, 바로 첫 번째 진실인 ‘무상’의 법칙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상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그것이 물질적인 사물이든 당신의 감정이나 생각이든, 단 한 순간도 고정되어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멸한다는 우주의 근본 법칙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명품 가방은 언젠가 닳고 해지고 유행이 지나, 결국에는 낡은 고물이 될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 가방이 당신에게 안겨주었던 그 짜릿한 만족감과 우월감이라는 ‘감정’ 또한, 그것이 생겨난 순간부터 이미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강물과 같아서, 당신이 손에 쥐는 순간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상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원하지 않은 것들 속에서 영원한 만족을 찾으려 할 때, 필연적으로 두 번째 진실인 ‘고(苦, Dukkha)’, 즉 고통이 발생합니다. 당신의 고통은 가방이 더 이상 당신에게 기쁨을 주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고통은, 그 일시적인 기쁨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이 사라져갈 때 ‘사라지지 말라’고 저항하는 당신의 마음, 즉 ‘갈애 (渴愛, Tanha)’와 ‘집착 (Upādāna)’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당신은 가방을 소유함으로써 그 갈애를 해결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당신은 그 갈애에 더 강력한 연료를 부어준 것뿐입니다. 만족감이 사라진 텅 빈 자리에, 당신의 어리석은 마음은 ‘이 가방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속삭이며, 이제는 더 새로운 가방, 더 비싼 시계, 더 넓은 집이라는 또 다른 대상을 향한, 더 큰 갈애를 만들어냅니다. 당신은 그렇게, 쾌락과 권태 사이를 영원히 오가는 고통의 쳇바퀴 위에 스스로 올라탄 것입니다.

영지주의(Gnosticism)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아름다운 명품 가방은 당신의 영혼을 물질세계에 붙잡아 두기 위해, 이 세상의 지배자(Demiurge)가 만들어낸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셔틀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너의 가치는 이런 물질적인 것을 소유함으로써 증명된다’고 속삭이며, 당신 안에 있는 신성한 빛의 불꽃을, 당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빼앗아 갑니다.

당신은 조용히, 가방 옆에 놓인, 당신의 아이가 몇 년 전 유치원에서 만들어 와서 선물한, 삐뚤빼뚤한 모양의 조악한 연필꽂이를 봅니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으며, 어떤 사회적 기호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과 당신 아이 사이의 ‘진짜 사랑’이라는, 유일무이한 관계의 증표입니다. 당신은 지난 몇 년간, 그 연필꽂이에서는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한 채, 오직 백화점의 쇼윈도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소유하려 했는지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당신은 가방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위로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으며, 당신의 삶이 의미 있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은 가장 깊은 영적인 갈증을, 가장 피상적인 물질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 속의 당신을 봅니다. 새로 산 명품 가방은, 거울 속 당신의 모습 옆에서 여전히 우아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그 가방을 보지 않습니다. 당신은 거울 속의 당신, 그 지치고 불안한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봅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질문을, 처음으로, 당신 자신에게 던집니다.


“이 가방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내 마음속의 이 텅 빈 공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명품 가방이 안겨주었던 그 짧고 덧없는 위안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깨닫습니다. 그 거짓된 위안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시작의 순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신은 이제, 밖을 향한 헛된 탐색을 멈추고 당신의 진짜 내면을 향한 위대한 탐험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텅 빈 마음이야말로, 당신의 삶을 진정한 의미와 기쁨으로 채워나갈 새로운 씨앗이 심어질 수 있는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당신의 공허함을 진정한 충만함으로 바꾸어낼, 영적인 변성 (transformation)의 희망이, 바로 그 폐허 위에서 조용히 싹트고 있습니다.






27장: 평생 모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며 느끼는 허무


차가운 대리석 테이블 위로, 당신의 평생이 몇 장의 서류로 요약되어 놓여 있습니다. 부동산 등기 서류, 주식 양도 증서, 예금 계좌 이전 신청서. 이 종이 위에 적힌 숫자들은, 당신이 지난 사십 년간 잠을 줄이고, 자존심을 굽히고, 때로는 건강을 돌보지 않으며 쌓아 올린 시간과 땀의 결정체입니다. 당신은 이 숫자들을 위해, 당신 청춘의 가장 빛나는 날들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자식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법무사의 사무실은 도시의 소음이 닿지 않는 고요한 섬과 같습니다. 당신의 맞은편에는, 이제는 당신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마흔 줄의 아들과 딸이 앉아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감사함과 미안함,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 떠 있습니다. 당신은 괜찮다고, 다 너희들을 위해 한 일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넉넉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당신은 지금, ‘자애롭고 희생적인 부모’라는, 당신 인생의 마지막 역할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법무사가 내민 만년필을 받아 듭니다. 묵직한 펜의 감촉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당신은 서류 위, 당신의 이름 옆 빈칸에, 지난 수십 년간 수만 번은 더 써왔을 당신의 서명을 기계적으로 써 내려갑니다.

첫 번째 서명. 당신이 젊은 시절, 악착같이 돈을 모아 처음으로 마련했던 작은 아파트가 아들의 소유로 넘어갑니다.

두 번째 서명. 당신의 퇴직금이 담겨 있던 주식 계좌가 딸의 것이 됩니다.

세 번째, 네 번째 서명이 이어질수록, 당신의 통장은 텅 비어 가고, 당신의 소유 목록은 하나씩 지워져 갑니다.

당신은 이 순간이 오면, 마침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후련함과,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했다는 뿌듯함을 느낄 것이라고 상상해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그 어떤 예상과도 달랐습니다. 후련함 대신, 낯설고 거대한 허무가, 마치 밀물처럼 당신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고작 이 몇 장의 종이와, 몇 번의 서명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당신의 평생이, 이토록 간단하고 무미건조하게,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도 괜찮은 것이었단 말인가.

이 고통스러운 허무의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20세기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1980)의 지혜를 빌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의 위대한 저서 『존재와 무, L'Être et le Néant』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의 ‘소유 (having)’라는 행위에 담긴 깊은 실존적 의미를 탐구했습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이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욕망은, 단순히 그 사물을 이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자신의 ‘존재 (being)’를, 소유물을 통해 확고하게 만들려는 필사적인 시도입니다. 우리는 ‘나는 무엇이다’라는 본질이 정해져 있지 않은 채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무엇을 가졌다’는 소유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안정시키려 합니다. ‘나는 이 집을 가졌다’는 말은, 곧 ‘나는 이 집을 가진 존재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의 선언이 됩니다. ‘나는 이만큼의 재산을 가졌다’는 말은, ‘나는 이만큼의 가치를 가진 존재이다’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됩니다.


당신의 지난 사십 년의 삶은, 바로 이 ‘소유’를 통해 당신의 ‘존재’를 구축해나가는 거대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신은 ‘성실한 가장’, ‘유능한 직장인’, ‘성공한 사람’이라는 당신의 존재를, 당신이 축적한 재산의 크기를 통해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증명해왔습니다. 당신의 재산은 단순한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존감이었고, 당신의 정체성이었으며, 당신이 살아온 이유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당신은 그 평생의 프로젝트를, 당신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던 그 단단한 기둥을, 당신 스스로의 손으로 해체해 버렸습니다. 당신의 서명 몇 번으로, ‘소유를 통한 존재 증명’의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 재산을 가진 당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누구입니까. 바로 이 질문 앞에서, 당신은 사르트르가 말했던 ‘무 (nothingness)’의 심연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당신을 규정해주던 모든 것이 사라진 텅 빈 공간. 당신이 느끼는 이 끔찍한 허무는, 바로 그 근원적인 ‘무’와 대면한 당신 영혼의 현기증입니다.

당신은 서류 작업을 마친 자식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무실을 나섭니다. 자식들은 당신에게 고맙다고, 이제는 편히 쉬시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감사가 담겨 있지만, 당신의 귀에는 그것이 마치 당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은퇴 선언처럼 들립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용한’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이 허무감은,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평생 ‘내 것’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재산은, 사실 잠시 당신에게 머물렀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가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無常, anicca)’의 법칙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하고 다음 생까지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은, 우리가 살면서 지은 생각과 말과 행동의 총합, 즉 ‘업(業, Karma)’뿐입니다. 당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물질적인 재산은, 이제 당신의 손을 떠나 자식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당신의 영혼에는, 어떤 재산이 남아 있습니까. 당신은 돈을 버는 데 집중하는 동안, 당신의 내면에는 어떤 ‘업’의 재산을 쌓아왔습니까.

당신은 깨닫습니다. 당신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준 이 행위가, 과연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큰 공덕 중 하나인 ‘보시(布施, dāna)’의 실천이었는지를 말입니다.

진정한 보시는, 어떤 대가나 인정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소유에 대한 집착 없이, 오직 순수한 자비심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 재산을 통해 자식들의 남은 평생 동안 ‘존경받는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다는 교묘한 욕망이, 그리고 당신의 노후를 그들에게 의탁하고 싶다는 미세한 계산이 숨어 있지는 않았습니까. 당신의 베풂은 순수한 보시가 아니라, 어쩌면 당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거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성찰은, 기독교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서늘한 가르침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덧붙였습니다. (마태복음 6:19-21) 당신의 보물은 평생 땅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마음 또한, 평생 땅의 일, 즉 돈과 소유와 명예에 묶여 있었습니다. 이제 그 땅의 보물이 사라진 지금, 당신의 마음은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식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텅 빈 거실에 앉아, 당신은 당신의 쭈글쭈글한 두 손을 내려다봅니다. 평생 무언가를 쥐기 위해, 쌓아 올리기 위해, 단단하게 오므리고 살아왔던 손. 하지만 이제 그 손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완전한 ‘빈손’의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서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허무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오히려 기이한 자유감이 싹트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재산으로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성공한 아버지’라는 무거운 갑옷을, 마침내 내려놓았습니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당신은 이제 당신을 규정하던 과거의 ‘존재’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향해 당신 자신을 새롭게 던져야 하는, 완전한 자유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허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입니다. 그것은 ‘소유 (having)’가 아닌, ‘존재 (being)’의 프로젝트입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당신이 자식들에게 진정으로 물려주어야 했던 것은, 은행 계좌의 숫자가 아니라,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삶의 지혜와, 사랑과, 용서의 가치였다는 것을. 당신은 그동안 너무나 바쁘다는 핑계로, 그 영적인 유산을 쌓는 데에는 소홀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삶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평생 모은 물질적 재산을 모두 물려준 오늘, 당신은 역설적으로 당신의 진짜 삶을, 즉 당신의 내면에 영적인 보물을 쌓아나갈 두 번째 인생을 비로소 선물 받았습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가 쌓인 책장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듭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그 첫 장을 넘기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텅 빈 손 위로, 오후의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허무는, 소멸이 아니라, 가장 눈부신 시작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28장: 관계라는 이름의 소유욕


당신에게는 당신의 세상과도 같은, 작은 친구들의 무리가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여 낯선 도시에서 홀로 외로워하던 시절, 서로의 서툰 위로가 되어주었던 사람들. 밤새워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미한 꿈을 나누었던 사람들. 당신은 이 관계가 영원할 것이라고,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가장 든든한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 작은 무리는 당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일부였고, 당신은 그 안에서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견고해 보였던 당신들의 세계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무리에 합류하고, 누군가는 연애를 시작했으며, 각자의 길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예전과 같은 완벽한 일체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아주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신과 무리의 다른 한 친구 사이에 작은 오해가 생겼고, 당신은 당연히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당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그저 “서로 잘 이야기해서 풀어”라는, 지극히 공정하지만, 그래서 당신에게는 더없이 서운하게 들리는 말을 건넸을 뿐입니다.

그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돋아납니다. 그것은 ‘불안’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일부라고 믿었던 친구가, 당신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된 판단을 내리는 존재라는 사실. 당신과 그녀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더 이상 예전처럼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발밑을 꺼져 내리게 하는 듯한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당신의 무의식은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즉시 비상 체제에 돌입합니다. 당신은 ‘내 편’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당신은 이 관계의 영토를, 당신의 소유권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만 합니다.

그날 이후, 당신의 행동은 교묘하고 치밀해집니다. 당신은 무리의 다른 친구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여, 당신과 다투었던 그 친구의 단점을 은근슬쩍 흘립니다. 당신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더 많은 시간을 쏟으며, 과거의 추억을 상기시키고, 당신들만의 비밀을 공유하며,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치려 애씁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는 일부러 빠지면서, 당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약속을 잡습니다.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은, ‘누가 진짜 내 편인가’를 시험하고, 무리 안에 ‘우리’와 ‘그들’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을 긋기 위한, 조용하고도 치열한 전쟁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몇 명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치한 다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의 가장 원초적이고 깊은 심리적 메커니즘의 발현입니다. 폴란드 태생의 사회심리학자 앙리 타이펠 (Henri Tajfel, 1919-1982)은 ‘사회 정체성 이론 (Social Identity Theory)’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쉽게 ‘우리 집단 (in-group)’과 ‘그들 집단 (out-group)’을 나누고, 자신이 속한 집단에 강한 소속감과 우월감을 느끼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공통점만으로도 우리는 ‘우리’라는 의식을 형성하고, 우리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며,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편견과 적대감을 갖게 됩니다. 당신이 지금 ‘내 편’을 만들려는 노력은, 바로 이 원시적인 부족주의, 즉 당신의 사회적 생존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입니다.


하지만 이 본능적인 행위의 이면에는, 더 깊은 철학적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당신의 이러한 노력에 불편함을 느끼며 당신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을 때, 당신은 마침내 그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어느 날, 그녀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래? 그냥 예전처럼 다 같이 잘 지내면 안 되는 거야?”


그녀의 지치고 상처받은 얼굴을 보는 순간, 당신은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할 당신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당신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전혀 다른 감정과, 전혀 다른 관계의 지도를 가진, 하나의 독립되고 온전한 타인의 우주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가까운 이의 눈빛을 마주할 때 그 안에 담긴 깊이를 느끼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그 눈빛이 단순한 표정이 아니라, 나에게 무언의 호소를 하는 순간임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가 탐구한 '타자의 얼굴 (the face of the Other)' 개념은 바로 이러한 만남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타자는 단순히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타자는 나의 생각이나 욕망으로 결코 담아낼 수 없는, 끝없이 다른 존재입니다. 그 타자의 얼굴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입니다. 그 얼굴은 약하고 무기력하게 보이지만, 바로 그 약함 때문에 나에게 강한 윤리적 명령을 줍니다. 그 명령의 첫 소리는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이 '살인'은 몸을 해치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레비나스에게 그것은 타자의 독특한 다름을 무시하고, 타자를 나의 세계 안에 가두려는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타자를 나의 계획이나 욕구에 맞춰 바꾸려는 시도, 타자를 내 소유물처럼 다루려는 마음이 바로 그 살인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를 '내 편'으로 만들려 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 살인을 저지릅니다. 친구의 고유한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는 대신, 그를 '나의 친구'라는 틀 안에 넣고, 나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합니다. 친구의 얼굴에 새겨진 무한한 세계를 지워버리고, 대신 나의 이기적인 표식을 새기려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타자의 자유로운 존재를 훼손합니다. 당신이 느끼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달은 영혼의 반응입니다. 그것은 타자의 얼굴이 당신에게 던진 명령에 대한 늦은 응답입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이 깊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바로 이 윤리적 살인에 대한 당신 영혼의 뒤늦은 자각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소유욕은, 또 다른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1980)가 그의 희곡 『닫힌 방, Huis Clos』에서 썼던 그 유명한 대사,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 (L'enfer, c'est les autres)”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줍니다. 이 말은 타인이 본질적으로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지옥이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내가 하나의 ‘대상’이나 ‘사물’로 규정되고, 나의 자유가 박탈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신은 친구의 자유를 빼앗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당신 또한 친구의 시선 속에 ‘이기적이고 집착하는 친구’로 규정되어 버렸습니다. 당신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친구와의 대화 이후, 며칠 동안 깊은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 저변에 깔린 것이, 우정이 아니라 두려움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당신의 세상이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당신은 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사랑’과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소유하고 통제하려 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 모든 고통의 뿌리가 바로 ‘집착 (Upādāna)’에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에게, 그리고 당신들이 속한 그 관계의 특정한 형태에 집착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無常, anicca),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無我, anatta). 당신의 우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고정된 기념비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당신의 고통은, 그 흐르는 강물을 ‘내 것’이라며 손아귀에 쥐려 했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침내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것은 더 많은 친구를 당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쥐고 있던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기꺼이 ‘놓아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녀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곳에는 어떤 변명이나 설득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깨달음에 대한 정직한 고백만이 담겨 있습니다.

“네가 옳았어. 미안해. 너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자유가 있어.”

이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 당신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상실감과 함께, 역설적으로 당신의 영혼을 짓누르던 무거운 쇠사슬이 끊어지는 듯한, 눈부신 해방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당신은 마침내,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이 내리는 윤리적 명령에 응답한 것입니다. 당신은 그녀를 살해하기를 멈추고, 그녀의 무한한 자유를 존중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얼마 뒤, 당신은 친구들과의 모임에 다시 나갑니다. 그곳에는 당신과 다투었던 친구도,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도, 그리고 당신이 경계했던 그 새로운 인물도 함께 있습니다. 분위기는 여전히 조금 어색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그 관계의 지도를 당신의 뜻대로 그리려 애쓰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각각의 고유한 우주로서 존재하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봅니다. 예전 같았으면 질투심에 불타올랐을 그 풍경이, 이제는 당신의 마음에 작은 슬픔과 함께, 이상하고도 새로운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진정한 관계란, 누군가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나와 그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신성한 거리를, 기꺼이 존중하고 지켜주는 것임을. 진정한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상대방의 자유를 향한 가장 깊은 존경심이라는 것을. 당신은 오늘, ‘내 편’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텅 빈 자리에서, 비로소 모든 사람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진정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관계의 문을 열었습니다.








29장: 나의 지식과 경험이라는 가장 교묘한 재산


당신은 회의실의 상석에 앉아 있습니다. 당신의 등 뒤로는, 지난 삼십 년간의 직장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도시의 풍경이 보입니다. 당신은 이 조직의 베테랑입니다.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수많은 성공을 이끌었으며, 수많은 후배들을 키워냈습니다. 당신의 이름 앞에는 ‘전문가’라는 보이지 않는 훈장이 달려 있고, 사람들은 당신의 판단과 결정을 신뢰합니다. 당신의 가장 큰 재산은 부동산이나 주식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가장 큰 재산은, 바로 당신의 머릿속과 몸속에 축적된, 이 삼십 년의 ‘경험’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회의의 안건은, 회사의 미래가 걸린 신규 프로젝트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팀원들이 각자 준비해 온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발표를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지만, 당신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아이디어는 대부분, 당신이 과거에 이미 시도해 보았거나, 혹은 그 실패를 목격했던 것들의 변주에 불과했습니다. 젊음의 열정은 가상하지만, 현실의 냉혹함을 모르는 풋내기들의 탁상공론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사한 지 갓 이 년 된 젊은 팀원이 발표를 시작합니다. 그는 당신이 보기에는 너무나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위험천만한 아이디어를 제시합니다. 기존의 모든 방식을 뒤엎고, 회사의 근본적인 체질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 그의 눈은 열정과 확신으로 빛나고 있지만, 당신의 경험이라는 필터는 그의 제안 속에서 수십 가지의 실패 가능성과 잠재적 위험 요소들을 자동으로 걸러내고 있습니다.

발표가 끝나자, 다른 팀원들은 그의 대담함에 놀라면서도, 그 신선함에 흥미를 보이는 눈치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 논의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낍니다. 당신은 이 배의 선장이며, 젊은 선원의 무모한 항해로부터 배 전체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엽니다. “좋은 아이디어네요. 하지만….”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 즉 당신의 과거 경험을 꺼내 듭니다. “내가 10년 전에, 자네와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본 적이 있네. 그때 우리도 모두 자네처럼 열정에 불탔었지. 하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어. 우리가 간과했던 변수들이 너무나 많았거든.” 당신은 과거의 실패 사례들을 몇 가지 더 열거하며, 그의 아이디어가 왜 비현실적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입니다. 당신의 말에는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의 무게와, 의심할 수 없는 데이터의 힘이 실려 있습니다.


당신은 그 젊은 팀원이 당신의 연륜과 지혜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미숙함을 인정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신의 말에 정중하게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목소리로 반론을 제기합니다. “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과거의 데이터는 분명히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10년 전과 지금은 시장의 환경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소비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는 당신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데이터와, 다른 산업 분야의 성공 사례들을 제시하며, 과거의 경험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역설합니다.


그의 당돌하지만 논리적인 반박 앞에서, 당신은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당혹감의 이면에서, 아주 불쾌하고 낯선 감정이 고개를 듭니다. 그것은 당신의 권위가, 당신의 정체성이, 당신의 평생이 공격받고 있다는 느낌에서 비롯된, 깊고 차가운 ‘분노’였습니다.

당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경험’이라는 재산은, 언제부터인가 당신을 보호하는 성벽이 아니라, 당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신은 그 감옥 안에서, 과거의 성공 방정식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성벽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세상의 변화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 출신의 위대한 선승(禪僧) 스즈키 순류 (Shunryu Suzuki, 1904-1971)가 그의 저서 『선심초심, Zen Mind, Beginner's Mind』을 통해 서양 세계에 전하고자 했던 지혜의 핵심입니다. 스즈키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심자의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전문가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


‘초심(初心, shoshin)’, 즉 ‘비기너스 마인드 (Beginner's Mind)’는,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아무런 선입견이나 사전 지식 없이,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마주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경이로운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의 마음은 아직 ‘이것은 이렇다’는 고정관념으로 채워져 있지 않은, 텅 빈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텅 빈 공간 속에서만, 새로운 가능성과 창의성이 싹틀 수 있습니다.


반면, ‘전문가’의 마음은 과거의 성공적인 경험과, 방대한 지식과, 확고한 이론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지식과 경험은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매우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두꺼운 벽이 되기도 합니다. 전문가는 새로운 상황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자신의 낡은 지식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그 결과, 그는 과거를 반복할 뿐, 결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지 못합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회의실에서 바로 이 ‘전문가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있습니다. 당신의 젊은 팀원은, 경험이 부족하기에 오히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즉 ‘초심’으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풍부한 경험이라는 색안경 때문에, 그가 보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전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가장 큰 재산이라고 믿었던 당신의 경험은, 사실 당신의 눈을 가리는 가장 교묘한 장애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의 함정’은, 서양 철학의 역사 속에서도 중요한 통찰의 대상이었습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1776)은, 인간 이성의 가장 기본적인 작동 방식인 ‘귀납 추론 (Inductive reasoning)’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귀납 추론이란, 과거의 반복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백조는 하얀색이었다’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로 모든 백조는 하얀색이다’라는 일반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의 모든 과학적 지식과 일상적인 판단은, 바로 이 귀납적 추론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흄은, 이 과정에 어떤 논리적 필연성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과거에 천 번, 만 번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다음번에 반드시 그 일이 일어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단 한 마리의 검은 백조가 발견되는 순간, ‘모든 백조는 하얀색’이라는 우리의 확고한 지식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즉, 경험은 우리에게 ‘과거’에 대한 정보를 줄 수는 있지만, ‘미래’에 대한 절대적인 확실성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말하며 당신의 경험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내세웠던 것은, 바로 이 귀납 추론의 함정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과거의 성공과 실패라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새로운 프로젝트의 미래를 섣불리 예단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젊은 팀원은, 지금 세상이 바로 그 ‘검은 백조’가 출현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라는 것을, 당신의 낡은 경험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것을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회의는 어떤 명확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끝났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속에는,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질문의 파문이 일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당신의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지식과 경험의 성벽이, 그 젊은 팀원의 당돌한 질문 몇 마디에 뿌리부터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지식과 경험은, 과연 진정한 ‘당신의 것’일까요. 아니면 당신이 특정 시대, 특정 조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임시로 빌려 입었던 옷에 불과할까요.

고대의 영지주의 (Gnosticism) 사상가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을 ‘거짓된 앎’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축적된 지식이 아니라, 한순간의 직관적인 깨달음, 즉 ‘그노시스 (Gnosis)’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 ‘거짓된 앎’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진정한 ‘그노시스’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음 날 아침, 당신은 그 젊은 팀원을 당신의 사무실로 조용히 부릅니다. 그는 자신이 어제 너무 나섰다는 질책을 들을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당신 앞에 섭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도 겸손한 문장을, 그에게 건넵니다.

“어제 자네가 했던 이야기 말이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한번 설명해주겠나?”

그 말을 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어깨를 평생 짓눌러왔던 ‘전문가’라는 무거운 갑옷이,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그 끔찍한 강박이, 눈 녹듯 사라져 내리는 것을 느낍니다. 당신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믿었던 것을, 기꺼이 내려놓았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과거의 경험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가 아닙니다. 당신은 이제, 텅 빈 마음으로, ‘알 수 없음’이라는 광대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이제 막 탐험을 시작한, 겸손한 초심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공허해진 마음속으로, 젊은 팀원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지혜와 가능성이, 햇살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오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새로 배울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30장: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삶의 진실

지금, 잠시 당신의 두 손을 들여다보십시오. 일을 하던 중이라면 잠시 멈추고,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면 가만히 내려놓고, 그저 당신의 텅 빈 두 손을 바라보십시오. 그 손바닥에 새겨진 희미하고 복잡한 손금들, 크고 작은 흉터들, 그리고 당신이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묻어나는 피부의 결을 보십시오. 이 손은 당신의 삶 전체의 역사를 담고 있는, 가장 정직한 지도입니다. 이 손으로 당신은 처음 세상을 만졌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었으며, 당신의 자녀를 품에 안았고, 생계를 위해 땀 흘려 일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손으로, 평생에 걸쳐 무언가를 끊임없이 쥐고, 모으고, 쌓아 올리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 손이, 그리고 당신이라는 존재 전체가, 이 세상에 처음 왔던 그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완전히 빈손으로 이 세상에 도착했습니다. 당신에게는 이름도 없었고, 국적도 없었으며, 사회적 지위나 재산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심지어 ‘나’라는 생각조차 없는, 그저 순수한 하나의 생명, 하나의 가능성으로 당신은 이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당신의 첫 호흡과 함께 시작된 당신의 삶은, ‘무(無)소유’라는 가장 근본적인 진실 위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유’라는 거대한 게임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이름’이라는 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나’라고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족’과 ‘국가’라는 소속을 소유하고, 그것을 통해 안정감을 얻습니다. 우리는 학교에 들어가 ‘지식’을 소유하고, 사회에 나와 ‘경력’과 ‘평판’을 소유하며, 마침내 ‘돈’과 ‘재산’이라는, 가장 강력하고도 가시적인 형태의 소유물을 축적하기 위해 우리의 삶 대부분을 바칩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필사적으로 소유하려 하는 것일까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 (Ernest Becker, 1924-1974)는, 그의 위대한 저서 『죽음의 부정, The Denial of Death』에서 그 답을 인류 문명의 가장 깊은 근원, 즉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찾았습니다.


베커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이 필연적인 소멸에 대한 자각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참을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을 심어놓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모든 문화와 문명, 그리고 개인의 삶은, 이 죽음의 공포를 부정하고 극복하기 위한 거대하고도 정교한 방어기제, 즉 ‘불멸 프로젝트 (immortality projec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 영원한 내세를 약속받고, 예술 작품을 통해 우리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며, 자녀를 통해 우리의 유전자를 영속시키려 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나는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영원한 어떤 것에 속해 있다’고 믿고 싶은, 죽음에 맞서는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볼 때, 당신이 평생에 걸쳐 재산을 축적해 온 행위는, 가장 강력하고도 보편적인 형태의 ‘불멸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신이 모은 돈과 부동산, 그리고 주식은 단순히 당신의 노후를 보장하는 수단을 넘어섭니다. 그것들은 당신이 죽은 뒤에도 이 세상에 남아, 당신이 한때 이곳에 존재했음을, 그리고 당신이 꽤 ‘의미 있는’ 존재였음을 증명해 줄 상징적인 기념비입니다. 당신은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유한한 육체를 넘어 당신의 영향력과 가치를 영속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재산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무(無)’에 맞서 당신이 쌓아 올린, 필사적이고도 애처로운 방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소유의 여정 끝에,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또 다른 하나의 절대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빈손으로 가야만 한다는 진실입니다.


이 피할 수 없는 진실을 인류 역사상 가장 깊고 치열하게 탐구했던 지혜 중 하나는, 티베트의 불교 전통 속에 있습니다. 그들의 위대한 경전인 『티벳 사자의 서, Bardo Thödol』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 상태가 다음 의식 상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과정, 즉 ‘바르도(Bardo)’라고 가르칩니다. 이 책은 죽어가는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의 의식을 위한 안내서이자, 동시에 살아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삶의 지침서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 따르면,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우리의 육체를 구성하던 네 가지 원소(地水火風, 지수화풍)가 차례대로 해체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먼저 땅의 기운(地)이 물의 기운으로 녹아들면, 우리의 몸은 산처럼 무겁게 느껴지고, 시각이 흐려집니다. 그 다음 물의 기운(水)이 불의 기운으로 녹아들면, 입과 코가 마르고, 청각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불의 기운(火)이 바람의 기운으로 녹아들면, 몸의 온기가 식어가고, 후각이 기능을 멈춥니다. 마지막으로 바람의 기운(風)이 의식 속으로 녹아들면, 우리는 마지막 숨을 내쉬고, 외부 세계와의 모든 감각적 연결이 끊어집니다.


바로 이 과정 속에서, 당신이 평생에 걸쳐 ‘나의 것’이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무자비할 정도로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당신이 애지중지했던 자동차와, 당신의 자부심이었던 집과, 당신이 평생을 바쳐 모았던 통장 잔고는, 당신의 마지막 숨과 함께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당신이 목숨보다 사랑했던 가족들, 당신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들 또한, 당신의 의식이 머무는 이 침대 맡에 남겨질 뿐, 당신과 함께 다음 세계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평생 쌓아온 지식과 경험, 당신의 명예와 평판 또한, 뇌의 기능이 멈추는 순간 한낱 희미한 전기 신호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나’와 가장 강력하게 동일시했던 당신 자신의 육체마저도, 당신에게서 분리됩니다. 당신은 더 이상 이 몸의 주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낡고 멈추어버린 이 육체를 떠나야만 하는, 이름 없는 하나의 순수한 의식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빈손으로 간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겪게 될, 가장 구체적이고도 실존적인 과정입니다. 이 절대적인 상실의 순간, 오직 단 하나, 당신과 함께 다음 여정을 떠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평생 동안 쌓아온 ‘업(業, Karma)’, 즉 당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남긴 미세한 에너지의 흔적들뿐입니다.


이 서늘하고도 장엄한 진실 앞에서, 인류의 수많은 현자들은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구약성서의 『욥기, Book of Job』에서, 모든 것을 잃은 욥은 이렇게 절규하며 고백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욥기 1:21) 『전도서, Ecclesiastes』의 저자는 평생에 걸쳐 부와 지혜와 쾌락을 추구한 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선언하며, 이 세상의 모든 소유가 결국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허무한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전도서 1:2, 14)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 (Epicuros, BC 341–270)는, 바로 이 죽음의 필연성 앞에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성적인 통찰은, 우리가 죽음과 함께 모든 소유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해야 할 악이 아니라, 우주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을 구성했던 원소들이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관점은, 우리의 삶과 소유가 영원히 ‘나의 것’이 아니라, 잠시 우주로부터 빌려왔다가 때가 되면 되돌려주어야 할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이 ‘빈손의 진실’은 우리를 허무주의나 절망으로 이끄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 진실이야말로, 우리를 모든 집착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진정으로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으로 이끄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당신은 다시, 당신의 두 손을 봅니다. 당신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당신은 비로소 무언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당신의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 재산, 관계, 건강, 심지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영원한 당신의 것이 아니라, 잠시 당신에게 머물도록 허락된 귀한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당신의 삶은, 소유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감사의 순례가 됩니다. 당신은 더 이상 더 많은 것을 쥐기 위해 주먹을 꽉 쥐지 않습니다. 당신은 두 손을 활짝 펴고,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감사히 받고, 그것들이 떠나갈 때가 되었을 때, 미련 없이 흘려보내게 됩니다. 도교의 현자 노자 (老子)가 말했듯, “성인은 쌓아두지 않는다. 남에게 베풀수록 더욱 많아지고, 남에게 내어줄수록 더욱 풍요로워진다.”

당신은 오늘, 당신의 삶이라는 여정의 시작과 끝이 ‘빈손’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빈손 사이의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무언가를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많은 것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또 기꺼이 놓아줄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당신의 텅 빈 손은, 결핍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당신은 오늘, 당신의 가장 큰 재산은 당신의 소유 목록이 아니라, 바로 이 모든 것을 잃을 준비가 된, 자유롭고 텅 빈 당신의 두 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평화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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