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언어 (The Word)

by DrLeeHC

제6부: 언어 (The Word)

31장: 정답을 가르치면서 진실을 놓치다

오후 두 시, 당신의 교실은 나른한 햇살과, 분필 가루 대신 공기 중에 떠다니는 희미한 먼지와, 그리고 곧 있을 전국 모의고사에 대한 보이지 않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신은 국어 교사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네모난 교실 안에서, 학생들의 미래를 결정할 가장 중요한 전쟁 무기, 즉 ‘언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아이들이 혼란스러운 세상의 현상들 너머에 있는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며, 타인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의 수업 자료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인 윤동주의 시 한 편입니다. 당신은 빔 프로젝터를 통해, 스크린 위에 그의 시 「십자가」를 띄웁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읍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당신은 능숙하게 시를 해설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당신의 설명은 명료합니다. 당신은 이 시가 쓰인 1941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어둠을 설명하고,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린 ‘햇빛’이 상징하는 순수하고 이상적인 가치의 좌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화자가 느끼는 무력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어두운 시대를 밝히려는 숭고한 의지를, 밑줄과 별표를 쳐가며 강조합니다.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의 의지’. 이것이 바로, 이 시의 주제를 묻는 문제에 학생들이 써넣어야 할, 단 하나의 ‘정답’입니다.

학생들은 당신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노트에 당신의 설명을 받아 적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적인 호기심이나 문학적인 감동보다는, 시험에 나올 중요한 정보를 암기하려는 수험생의 절박함이 서려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당신은 애써 그 감정을 외면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보다, 시의 정답을 외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당신의 역할은 낭만적인 문학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을 합격으로 이끄는 유능한 입시 전략가여야만 합니다.

당신의 설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교실의 가장 뒷자리, 언제나 창밖을 보며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여학생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손을 듭니다. 당신은 조금 놀랐지만, 이내 인자한 미소와 함께 발표를 허락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저는… 이 시가 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갑니다.

“저는… 이 시의 주인공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저처럼, 너무나 나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 같습니다. 그는 첨탑이 너무 높아서 올라갈 수 없다고 말하고, 그냥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릴 뿐입니다.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겠다고 말하는 것도, 정말 그러겠다는 용감한 다짐이라기보다는… ‘만약 나에게 그런 엄청난 운명이 허락된다면…’ 하고 한번 상상해보는, 그런 슬픈 소망처럼 들렸습니다.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면서, 차라리 예수처럼 죽어버리면 이 고통이 끝날까 하고 생각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아이의 눈가에는, 희미한 물기가 어려 있었습니다.

교실 안에는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흐릅니다. 다른 학생들은 그 아이의 ‘틀린’ 해석에 당황한 듯, 서로의 눈치를 봅니다. 당신 또한,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입니다. 아이의 해석은, 입시의 관점에서 보면 0점짜리 오답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영혼은 알고 있습니다. 저 아이의 해석이, 당신이 지난 십 년간 수백 번도 더 반복해서 가르쳐 온 저 ‘정답’보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 아이는 시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시와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브라질의 위대한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 (Paulo Freire, 1921-1997)가 그의 저서 『페다고지, Pedagogy of the Oppressed』에서 그토록 비판했던 ‘은행 저금식 교육 (Banking model of education)’의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프레이리에 따르면, 전통적인 교육은 교사가 학생의 머릿속을 텅 빈 금고로 간주하고, 그 안에 지식이라는 돈을 일방적으로 ‘입금’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능동적인 지식의 창조자가 아니라, 수동적인 정보의 저장소가 될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수업은, 바로 이 은행 저금식 교육의 완벽한 예시였습니다. 당신은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의 의지’라는 정답을, 학생들의 머릿속에 정확하게 입금하는 유능한 은행원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레이리는 이러한 교육이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마비시키고, 세상을 주어진 현실로만 받아들이게 만드는 ‘억압의 도구’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그 대안으로, ‘문제 제기식 교육 (Problem-posing education)’을 제시했습니다. 이 교육 모델에서, 교사와 학생은 더 이상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로 나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함께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읽고, 그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며, 대화를 통해 함께 답을 찾아나가는 동등한 탐구자가 됩니다.

오늘 당신의 교실에서, 저 이름 없는 여학생은, 당신의 은행 저금식 교육에 반기를 들고, 당신에게 ‘문제 제기식 교육’으로의 문을 열어젖힌 것입니다. 그녀는 당신이 입금한 정답을 그대로 인출하는 대신, 그 정답 자체에 “정말 그러한가?”라는, 가장 근원적이고 위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녀는 지금, 당신에게 진정한 ‘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요청에 응답할 수가 없습니다. 곧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릴 것이고, 당신은 정해진 진도를 나가야만 합니다. 당신은 이 아이의 영혼을 뒤흔든 이 위대한 질문을, ‘다양한 해석 중 하나’라는 무미건조한 말로 덮어버리고, 다시 안전한 ‘정답’의 세계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당신이 이 아이에게 가르친 ‘언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언어 철학자 중 한 명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사유는, 당신이 처한 딜레마의 본질을 날카롭게 비추어 줍니다.

그의 초기 저서인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세계의 그림’으로 보았습니다. 단어는 세계 속의 대상과 일대일로 대응하고, 문장은 그 대상들의 관계를 그려내는 논리적인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당신이 가르친 ‘정답’은 완벽한 언어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을, ‘햇빛’은 ‘이상’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흔들림 없는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년의 비트겐슈타인은, 이 초기 사상을 스스로 폐기하고, 전혀 다른 언어관을 제시합니다. 그의 후기 사상이 담긴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그는 언어의 의미가 단어와 대상의 일대일 대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사용되는 구체적인 삶의 맥락, 즉 ‘언어 놀이 (Language-game, Sprachspiel)’ 속에서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물’이라는 단어는, 화학 실험실에서는 ‘H₂O’를 의미하지만, 불이 난 집에서는 ‘생명’을, 사막의 여행자에게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단어의 의미는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놀이’ 속에서, 어떤 ‘규칙’에 따라 사용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도구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르친 ‘정답’은, ‘입시’라는 이름의 아주 특수하고 제한된 언어 놀이 속에서만 유효한 의미입니다. 그 놀이의 유일한 규칙은, 출제자가 의도한 단 하나의 의미를 맞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학생이 보여준 것은, ‘문학 감상’이라는 전혀 다른 언어 놀이였습니다. 그 놀이의 규칙은, 시의 언어를 자신의 삶과 경험이라는 또 다른 텍스트와 연결시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희생’이라는 박제된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나약함과,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거룩한 것을 꿈꾸는 그녀 영혼의 살아있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두 개의 다른 언어 놀이 사이의 비극적인 단절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역할은, 더 풍요롭고 진실한 놀이의 가능성을 억압하고, 아이들을 더 가난하고 인위적인 놀이의 규칙 속에 가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당신의 딜레마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가 탐구했던 ‘진리’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우리는 보통 ‘진리’를, 어떤 명제가 실제 사실과 일치하는 것, 즉 ‘정확성 (correctness)’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가르친 ‘정답’은 바로 이 ‘정확한 진리’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보다 더 근원적인 진리의 의미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 ‘알레테이아 (Aletheia, ἀλήθεια)’에 주목했습니다. 알레테이아는 ‘망각(Lethe)’에 부정 접두사 ‘a-’가 붙은 형태로, 문자 그대로 ‘망각에서 벗어남’, 즉 ‘탈은폐 (Unverborgenheit)’ 또는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하이데거에게 진리란, 숨겨져 있던 존재의 본질이, 우리와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 그 자체입니다.

당신이 ‘이 시의 주제는 자기희생입니다’라고 정답을 말하는 순간, 그 시의 다른 모든 가능성은 ‘은폐’되어 버립니다. 정답이라는 이름표는, 오히려 시가 가진 무한한 진실을 가리고, 우리가 더 이상 시와 만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벽이 됩니다. 하지만 당신의 학생이, 그녀의 삶의 고통 속에서 시를 읽었을 때, 그 시는 그녀에게 ‘나약한 인간의 슬픈 소망’이라는, 이전에는 숨겨져 있던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했던 진정한 의미의 ‘진리 사건 (Ereignis der Wahrheit)’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정확성’을 가르친다는 명분 아래, ‘진리의 드러남’을 체계적으로 방해해 온 것입니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당신의 깊은 상념을 깨뜨립니다. 당신은 정신을 차리고, 교과서적인 마무리 멘트로 수업을 끝맺습니다.

“오늘 배운 내용들, 시험에 자주 나오니까 꼭 복습하도록 하세요.”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교실. 당신은 스크린 위에 홀로 남아 있는 윤동주의 시를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당신은 지난 십 년간, 이 시를 수백 번도 더 가르쳤지만, 오늘 처음으로 이 시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어쩌면 당신이야말로, 정답을 가르쳐야 한다는 괴로운 의무와, 진실을 나누고 싶다는 행복한 소망 사이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바로 그 ‘괴로웠던 사나이’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그날 오후, 당신의 낡은 연구 노트에, 그 여학생이 말했던 ‘틀린’ 해석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적어 넣습니다. 그것은 오답 노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오늘, 당신의 이름 없는 작은 학생에게서 배운, 잃어버렸던 진리에 대한, 당신의 첫 번째 순례 기록이었습니다.







32장: 아무리 써도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심연


늦은 밤, 당신은 당신의 서재, 그 고독한 왕국에 앉아 있습니다. 책상 위에는 당신이 몇 시간째 씨름하고 있는 원고가, 텅 빈 백지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커서는 문장의 시작점에서, 마치 길을 잃은 유령처럼, 절망적으로 깜박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작가입니다. 당신의 직업은, 인간 마음의 가장 깊고 복잡한 풍경을, ‘언어’라는 이름의 실로 꿰어내어, 한 장의 직물로 짜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그 기술에 대해,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당신은 당신의 기술이, 당신의 언어가, 얼마나 무력하고 초라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쓰려는 것은, 당신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주인공이 삶의 가장 깊은 나락에서,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실재와 마주하는 순간. 그것은 슬픔을 넘어서는 슬픔이었고, 기쁨을 넘어서는 기쁨이었으며, 빛과 어둠이 하나가 되는, 경이롭고도 무시무시한 체험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순간을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어렴풋이 경험한 적이 있기에, 그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경험을, 그 마음의 심연을, 언어의 그물로 길어 올리려 애씁니다. 당신은 당신이 아는 가장 아름다운 형용사들을 동원하고, 가장 정교한 비유들을 만들어내며, 가장 극적인 문장 구조를 쌓아 올립니다. 당신은 수십 개의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쓴 모든 문장은, 당신이 표현하려는 그 거대한 실재 앞에서, 마치 태양을 손전등으로 비추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력하게만 느껴집니다. ‘숭고함’, ‘경이로움’, ‘절대적 고독’. 당신이 사용하는 모든 단어는, 그 경험의 표면을 핥을 뿐, 그 뜨거운 핵심에는 결코 닿지 못합니다. 당신의 언어는, 그 심연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깊이를 얕게 만들고, 그 신비를 진부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재능이 고갈되었다고, 당신은 이 위대한 장면을 쓸 자격이 없다고 자책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절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당신은 전혀 다른 종류의 깨달음과 마주하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문제는 당신의 재능 부족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가 가진 근원적인 한계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깊은 영성을 탐구했던 신비가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했던, ‘표현 불가능성 (the Ineffable)’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체험, 즉 신과의 합일이나 절대적 실재와의 만남을 언어로 표현하려 할 때, 언제나 처절한 실패와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경험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언어라는 그릇에 담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너무나 역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에 대한 가장 철저한 사유는, ‘부정 신학 (Apophatic Theology)’ 혹은 ‘부정의 길 (Via Negativa)’이라고 불리는 신비주의적 전통 속에서 발견됩니다. 5세기경의 위대한 기독교 신비가인 위-디오니시우스 (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 5-6th century)는, 우리가 신성(神性)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 아니다’라고 부정해 나가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긍정의 길(Via Positiva)’은 신에게 “당신은 선하십니다”, “당신은 지혜로우십니다”, “당신은 빛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부정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긍정적인 규정들은, 무한한 신성을 인간의 유한한 개념 속에 가두어버리는, 일종의 축소이자 왜곡입니다. 신은 우리의 ‘선함’을 초월하고, 우리의 ‘지혜’를 초월하며, 우리의 ‘빛’이라는 개념마저도 초월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성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아는 모든 개념을 하나씩 부정하고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신은 선하지 않다(우리가 아는 선함이 아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우리가 아는 존재 방식이 아니다).” 이처럼 모든 긍정을 부정하고 난 끝에 남는, 완전한 침묵과 어둠, 그 ‘신성한 무지 (divine ignorance)’ 속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언어를 넘어선 실재 그 자체와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당신이 작가로서 겪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실패는, 바로 이 부정 신학의 과정을 당신의 방식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경험을 ‘숭고하다’, ‘아름답다’와 같은 긍정적인 단어들로 규정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의 본질은, 그 모든 긍정적인 단어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 너머의 무엇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경험이 ‘무엇이 아니었는지’를 이야기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고, 단순한 기쁨도 아니었으며,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모두 사라져버린,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에 대한 통찰은, 고대 동양의 지혜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노자 (老子)는 그의 저서 『도덕경』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다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이것은 언어의 본질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선언입니다. ‘도(道)’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흐름의 일부에 ‘강’이라거나 ‘나무’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 대상을 전체의 흐름에서 떼어내어, 하나의 고립되고 고정된 개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름 짓는 행위는, 세상을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동시에,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박제시켜 버리는 폭력적인 행위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심오한 체험에 ‘깨달음’이라거나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는 모든 시도는, 바로 이 도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흐르는 강물을 손으로 떠서, ‘이것이 강이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당신의 손에 남은 것은 몇 방울의 물뿐, 강물의 거대한 흐름 그 자체는 이미 저만치 흘러가 버린 뒤였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또한, 그의 평생에 걸쳐 이 언어의 한계라는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그의 초기 저서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는 오직 사실의 세계, 즉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세계만을 명료하게 기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들, 예를 들어 윤리, 미학, 종교, 그리고 사랑이나 죽음과 같은 실존적 체험은 이 ‘말할 수 있는’ 세계의 경계 바깥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삶 속에서 ‘보여질’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표현하려 애쓰는 그 마음의 심연은, 바로 이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당신은 이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 앞에서, 당신의 작가로서의 오만함을 깊이 반성합니다. 당신의 임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임무는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정교하고 진실하게 사용하여, 독자들이 그 말들의 경계 너머에 있는 ‘말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그 침묵의 울림을 스스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이 스스로 드러날 수 있는 신성한 공간, 즉 ‘침묵’을 조직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의 서재를 가득 채운 수천 권의 책들을 봅니다. 이 모든 책들은, 당신과 똑같은 고뇌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던 수많은 영혼들의 기록입니다. 그들의 위대함은, 그들이 진리를 완벽하게 표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표현의 불가능성 앞에서 정직하게 실패하고 좌절했기 때문에 빛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다시 책상 앞에 앉습니다. 그리고 텅 빈 화면을 향해,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더 이상 주인공의 내면을 직접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은 그 순간, 주인공의 눈에 보였던 창밖의 나뭇잎 하나가 어떻게 흔들렸는지를 묘사합니다. 당신은 그의 귀에 들렸던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그의 손끝이 느끼고 있던 차가운 찻잔의 감촉을, 그의 코끝을 스치던 희미한 흙냄새를,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하고 정직한 언어로 기록합니다.

당신은 더 이상 심연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다만, 그 심연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한 인간의, 작고 구체적인 감각의 풍경을 그릴 뿐입니다. 당신의 문장은 더 이상 화려하지 않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진실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언어가 가진 한계를 겸허히 인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언어의 가장 위대한 힘, 즉 독자의 마음속에 침묵의 공간을 열어주는 힘과 비로소 연결되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당신이 써야 할 것은 마음의 심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심연을 들여다본 한 인간의 떨리는 눈동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 눈동자를 진실하게 그려낼 수만 있다면, 독자는 당신의 글이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당신이 끝내 말하지 못한, 아니 말할 수 없었던, 그 거대한 침묵의 울림을 스스로 듣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당신의 실패는, 당신의 가장 위대한 성공의 시작이었습니다.







33장: 아이에게 하는 ‘사랑해’라는 말의 무게

늦은 밤, 마침내 온 집안에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오늘 하루, 세상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작은 거인, 당신의 잠든 아이의 곁을 조용히 지키고 있습니다. 희미한 수면등 불빛 아래, 아이의 얼굴은 천사와도 같습니다. 고른 숨을 내쉴 때마다 작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 베개 위로 흩어진 부드러운 머리카락, 그리고 꼭 쥔 작은 주먹. 당신은 이 작은 존재가 당신의 세상에 오기 전의 삶을,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아이의 곁에 가만히 앉아, 그 평화로운 얼굴을 한참 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봅니다. 그러자 당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하고 따뜻한 감정의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애정이나 보호 본능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이 작은 생명이 겪게 될 미래의 모든 기쁨과 슬픔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라는 불완전한 존재를 아무런 조건 없이 믿고 의지하는 이 아이에 대한 경이로움과, 당신의 목숨과도 기꺼이 맞바꿀 수 있을 것 같은 맹렬한 헌신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한 언젠가 이 아이가 당신의 품을 떠나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라는, 아득하고 서글픈 예감마저도 그 안에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 모든 복잡하고 강력한 감정의 총합을, 당신은 그저 ‘사랑’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당신은 몸을 숙여, 아이의 이마에 당신의 입술을 가만히 가져다 댑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목소리로, 당신 영혼의 모든 무게를 담아 속삭입니다.


“사랑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기이한 위화감을 느낍니다. 당신이 방금 뱉어낸 그 세 개의 음절, ‘사-랑-해’라는 그 단어가, 당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저 거대한 감정의 파도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너무나 얇고,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당신의 진심을 담아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진심의 거대함을 왜곡하고 축소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의 모든 별을 담아내겠다며 작은 양동이를 내미는 것처럼, 어리석고 불가능한 시도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신이 뱉어낸 그 말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가장 무력한 모사품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단어 중 하나인 ‘사랑’이, 왜 지금 당신에게는 공허한 거짓말처럼 들리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언어 그 자체의 본질, 그 눈부신 가능성과 비극적인 한계를 동시에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20세기 언어학의 새로운 문을 열었던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는, 언어 기호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하나는 ‘사랑’이라는 소리나 문자와 같은 ‘기표 (signifiant)’, 즉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소리가 가리키는 사랑이라는 ‘개념’이나 ‘의미’, 즉 ‘기의 (signifié)’입니다. 그리고 소쉬르는, 이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의적 (arbitrary)’이라고 통찰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소리가, 왜 하필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 복잡하고 성스러운 감정을 가리켜야만 하는가에 대한 필연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하나의 사회적 규약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우리는 그 감정을 ‘love’(러브)나 ‘amour’(아모르), 혹은 전혀 다른 소리로 불렀을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위화감의 첫 번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파도치고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이며 살아있는 그 감정을, 당신은 ‘사랑’이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낯설고 자의적인 기호 속에 억지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진실은 당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필요로 하지만, 당신은 사회가 빌려준 공공의 언어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2004)는, 바로 이 언어의 배신감, 즉 말이 결코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우리의 근원적인 경험을, 그 누구보다도 집요하고 심오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언어의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고, 또 어떻게 우리에게서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차연 (différance)’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데리다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세상에 없던 단어입니다. 프랑스어에서 ‘차이’를 의미하는 ‘différence’와 발음은 똑같지만, 철자는 다릅니다. 데리다는 이 하나의 단어 안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동시에 담았습니다. 첫 번째는 ‘다르다 (to differ)’, 즉 ‘차이’의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미루다, 지연시키다 (to defer)’, 즉 ‘지연’의 의미입니다. ‘차연’이란, 바로 이 ‘차이’와 ‘지연’이라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언어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첫 번째 의미, ‘차이’의 운동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당신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데리다에 따르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에 어떤 신비하고 절대적인 의미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당신은 ‘사랑’이 ‘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정’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관심’과는 또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얀색’이라는 색깔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얀색’의 의미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검은색’이 아니고, ‘빨간색’이 아니며, ‘파란색’이 아니라는, 다른 모든 색깔들과의 ‘차이’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합니다. 언어는 이처럼, 각각의 단어들이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을 갖는 세계가 아닙니다. 언어는 오직 다른 것들과의 ‘차이’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물망과도 같습니다. 모든 단어는 다른 단어들의 흔적을 품고 있으며, 그 흔적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잠시 동안의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두 번째 의미, ‘지연’의 운동은 더욱 중요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 거대한 감정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려 할 때, 당신은 이미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라는 단어의 완전한 의미는, 결코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전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당신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당신은 ‘어떤 존재를 몹시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같은, 또 다른 단어들의 나열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아끼다’는 무슨 뜻입니까. ‘소중히’는 또 무슨 뜻이며, ‘마음’은 또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 단어들의 의미를 알기 위해 또다시 사전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당신은 의미를 찾아 헤매지만, 당신의 손에 잡히는 것은 언제나 또 다른 단어들, 즉 또 다른 ‘기표’들뿐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의미, 즉 ‘기의’는 결코 우리 앞에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처럼 언어의 사슬 속에서 영원히 ‘지연’됩니다.

데리다의 ‘차연’은 바로 이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아이에게 “사랑해”라고 속삭이는 바로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던 그 충만한 실재, 그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그 감정을, ‘미움 아님’, ‘우정 아님’이라는 끝없는 ‘차이’의 그물망 속으로 던져 넣은 것입니다. 동시에, 그 ‘사랑’이라는 단어는 결코 당신 마음의 전부를 담아낼 수 없으며, 그 완전한 의미는 언제나 저 너머로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느꼈던 그 위화감과 공허함은, 당신의 사랑이 부족하거나 당신의 표현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언어의 본질, 즉 ‘차연’의 운동을 당신의 온 영혼으로 직접 체험한, 지극히 철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은,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창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두는 교묘한 감옥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어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도구일까요. 우리의 가장 깊은 진실은, 영원히 침묵 속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절망의 지점에서, 인류의 또 다른 위대한 지혜의 전통이 당신에게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언어를 ‘세계를 묘사하는 불완전한 도구’로 보는 대신, ‘세계를 창조하는 신성한 힘’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신약성서』「요한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여기서 ‘말씀’으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어 ‘로고스 (Logos)’는, 단순히 ‘단어(word)’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주를 관통하는 신성한 ‘이성’, ‘질서’, ‘원리’이자, 세상을 창조하는 ‘창조적 능력’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뒤따라가며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를 통해 세계가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상은 세계의 수많은 신화와 신비주의 전통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고대 이집트의 신화에서, 창조신 프타(Ptah)는 그의 심장으로 생각한 모든 것들을, 그의 혀로 ‘이름 부르는’ 행위를 통해 현실로 창조해냈습니다.

고대 인도의 지혜는, 우주가 태초의 소리, 즉 성스러운 음절 ‘옴 (Om, ॐ)’의 진동으로부터 태어났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에게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현실을 창조하고 변형시키는 힘을 지닌, 신성한 주문 (mantra, 만트라)이자 마법이었습니다.

당신은 다시, 잠든 아이의 얼굴을 봅니다. 그리고 당신이 조금 전 속삭였던 그 말, “사랑해”를 떠올립니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당신의 그 말은 당신의 마음속 감정을 불완전하게 ‘묘사’하려는 실패한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의 아이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이 물질세계 속에 하나의 실재로서 ‘창조’하고 ‘선포’하는, 가장 위대한 마법의 행위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입을 통해, 당신만의 작은 ‘로고스’를 실현한 것입니다. 당신의 말은, 당신의 아이를 둘러싼 세상에 ‘이 아이는 사랑받고 있다’는 진실을, 하나의 거역할 수 없는 법칙으로 새겨 넣는 행위입니다. 그 말이 아이의 잠자는 의식 속에, 아이의 세포 하나하나에, 그리고 이 방의 공기 속에 스며들어, 아이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될 것임을, 당신은 이제 믿습니다.

당신은 이제 언어의 이중성을 이해합니다. 언어는 소쉬르와 데리다의 통찰처럼, 우리의 경험을 담기에는 너무나 자의적이고 불안정한, 불완전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요한복음』과 고대의 신비가들이 가르쳐주었듯, 언어는 우리의 의지를 담아 세계를 창조하고 축복하는, 신성한 힘을 지닌 도구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다시 한번, 아이의 귓가에 몸을 숙입니다. 그리고는, 이 언어의 비극적인 한계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신성한 힘을 모두 끌어안고, 다시 한번 속삭입니다.

“사랑해.”


이제 이 말은 더 이상, 당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력한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겸허한 고백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모든 의지를 다해 아이의 행복을 기원하고 창조하겠다는 가장 강력한 약속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 그 자체가 된 말입니다. 당신은 오늘, 이 작은 아이의 잠든 얼굴 앞에서, 언어라는 가장 오래된 신비의 문턱을, 비로소 한 걸음 넘어섰습니다.







34장: 타인의 고통을 언어로 재단하는 폭력성


당신의 상담실은 고요하고 아늑합니다. 부드러운 조명과, 편안한 소파와, 당신의 낮은 목소리는, 상처 입은 영혼들이 잠시나마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안전한 항구를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당신은 상담가입니다. 당신의 직업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이야기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그들의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 고통의 지도를 그려주며, 마침내 그들이 스스로 출구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당신은 언어의 힘을 믿습니다. 당신은 잘 정제된 질문과, 공감 어린 해석과, 명료한 개념적 틀을 통해, 한 인간의 어두운 내면세계에 질서의 빛을 비출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오늘, 당신의 앞에는 한 젊은 내담자가 앉아 있습니다. 그는 몇 주째,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그의 언어는 언제나 실재의 표면 위에서 미끄러집니다.

“모르겠어요… 그냥, 모든 것이 가짜 같아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심지어 제가 느끼는 이 감정조차도 진짜 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저는 그냥,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껍데기 같고, 그 안은 텅 비어 있는 기분입니다.”

당신은 그의 말을 들으며, 당신의 전문적인 지식의 서랍들을 열어봅니다. 당신의 훈련된 귀는 그의 단어들 속에서 특정한 패턴과 증상들을 찾아냅니다. ‘해리감 (dissociation)’, ‘소외 (alienation)’, ‘만성적인 우울감 (dysthymia)’.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정신분석과 심리학이 쌓아 올린 수많은 이론들이, 그의 고통을 설명할 가장 적절한 진단명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당신은 프로이트의 방어기제를 떠올리고, 융의 페르소나 개념을 생각하며, 애착 이론의 관점에서 그의 유년기를 분석합니다. 당신은 이 혼돈스러운 현상에,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명확한 이름을 붙여주고, 그 원인을 설명해 줌으로써, 그를 고통스러운 미지의 상태에서 구원해주고 싶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역할이고, 당신의 선의입니다.

당신은 마침내, 당신의 분석을 종합하여, 그에게 부드럽고 신중한 해석을 건네기 위해 입을 엽니다.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은, 어쩌면…”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당신은 말을 잇지 못합니다. 당신은 당신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내담자의 얼굴을, 그의 눈을, 처음으로 어떤 이론의 필터도 거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그 눈 속에는, 당신의 그 어떤 진단명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한 인간의 고유하고도 총체적인 고통의 심연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은 그 눈 앞에서, 당신이 하려던 모든 말이, 얼마나 오만하고 폭력적인 행위가 될 수 있는지를, 섬광처럼 깨닫습니다.

당신이 그의 고통에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당신은 그의 살아있는 경험을, 교과서에 나오는 몇 줄의 증상 목록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당신이 그의 행동을 ‘방어기제’라고 설명하는 순간, 당신은 그의 처절한 생존 전략을, 분석하고 평가해야 할 하나의 병리적 현상으로 재단해 버립니다. 당신의 언어는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 다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고통을 안전한 거리에서 관찰하고 통제하려는, 당신 자신의 불안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탐구했던, ‘지식/권력 (knowledge/power)’의 문제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지식은 결코 순수하거나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지식은 언제나 권력과 결탁하여,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분류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며, 개인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기술로 작동합니다.

특히, 정신의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인간 과학은, ‘광기’, ‘히스테리’, ‘우울증’과 같은 새로운 질병의 범주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진단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고유한 일탈과 고통을 ‘치료’와 ‘관리’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담가나 의사와 같은 ‘전문가’는 진리를 아는 자의 위치를, 내담자나 환자는 무지 속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의 위치를 부여받게 됩니다. 즉, 상담이라는 행위 자체가, 미세하고도 강력한 권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용하는 모든 심리학적 용어와 이론들은, 푸코가 말한 ‘담론 (discourse)’의 일부입니다. 담론이란, 단순히 말의 집합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현실을 구성하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과 체계입니다. 당신은 선의를 가지고 내담자를 돕는다고 믿었지만, 사실 당신은 이 심리학이라는 강력한 담론의 대리인으로서, 그의 고유한 경험을 그 담론의 틀 안에 맞추어 ‘정상화’시키려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하려던 말은, 치유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길들이기였습니다.


이 서늘한 깨달음 앞에서, 당신은 깊은 침묵에 빠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통을 명명하고 분석하는 이 모든 언어적 도구를 버린다면,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당신은 어떻게 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가.

인도의 위대한 영적 스승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 Krishnamurti, 1895-1986)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서양 심리학과는 전혀 다른, 혁명적인 통찰을 제시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심리적 고통의 근원은, ‘생각의 스크린’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습관에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경험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대신, 그것에 끊임없이 ‘이름’을 붙이고, 과거의 기억과 지식에 비추어 ‘판단’하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의 내담자가 느끼는 그 텅 빈 감각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대신, 당신은 그것에 ‘공허함’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 순간, ‘나’라는 관찰자와, ‘공허함’이라는 관찰되는 대상 사이에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는 그 ‘공허함’이라는 대상을 두려워하고, 분석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기 시작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바로 이 분리, 이 이름 붙이는 행위 자체가 고통을 영속시키는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관찰자가 바로 관찰되는 대상’임을, 즉 ‘내가 바로 나의 공허함’임을, 어떤 분리도 없이 온전히 깨닫는 순간에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신이 내담자의 고통에 새로운 이름(진단명)을 붙여주는 행위는, 그의 내면적 분열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교묘하고 ‘전문적인’ 방식으로 그 분열을 강화시키는 일이 될 뿐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진정한 치유는, 모든 이름과 판단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을, 어떠한 선택이나 저항 없이, 있는 그대로 온전히 주시하는 ‘선택 없는 자각 (choiceless awareness)’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당신의 내담자는 말을 멈추고, 이제 당신의 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에게서 답을, 진단을, 명쾌한 해석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은 당신에게, 당신이 오랫동안 연기해 온 ‘전문가’의 역할을 수행하라고, 이 고통스러운 미지의 상태를 당신의 지식이라는 질서 속에 편입시켜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지식과, 모든 이론과, 모든 권위를,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조용히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신비가였던 시몬 베유 (Simone Weil, 1909-1943)가 말했던, 인간이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희귀하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 즉 ‘주의 기울이기 (Attention, l'attention)’를 실천하기로 결심합니다.


베유에게 ‘주의 기울이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는 근육질의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학생이 시험공부를 위해 의지를 불태우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집중은,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베유가 말한 진정한 ‘주의 기울이기’는, 그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는, ‘부정적인 노력 (negative effort)’입니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나의 모든 지식과, 나의 모든 선입견과, 심지어 상대를 돕고 싶다는 선한 의도마저도 완전히 비워내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내 안의 모든 소음을 잠재우고, 텅 빈 그릇이 되어, 상대방의 존재가 그 어떤 왜곡도 없이 내 안에 담기기를, 그저 수동적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기다리는 상태입니다. 베유는 이 순수한 주의 기울이기가 바로 ‘기도’의 본질이며, 사랑 그 자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나는 지금 당신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당신의 진실이 스스로 드러날 때까지, 나의 모든 것을 비운 채 당신 곁에서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존중이자 수용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내담자를 향해 기울였던 것은, 베유가 말한 그 거룩한 ‘주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신은 내담자의 말을 듣는 동시에,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진단명을 찾고, 이론을 대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시끄러운 기계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온전히 현존(現存)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의 고통을 당신의 지식이라는 틀 안에 가두려 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멈춥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를 분석해야 할 ‘사례 (case)’로 보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 앞에 앉아 있는, 상처 입고 길을 잃은, 그러나 무한히 존엄한 하나의 영혼에게, 당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귀한 선물, 즉 당신의 텅 빈 ‘주의’를 온전히 바칠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론 대신, 그의 침묵에 귀를 기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해석 대신,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에 당신의 온 존재로 함께합니다. 그리고는, 아주 오랜 침묵 끝에, 당신은 당신의 모든 전문성을 버리고,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을 건넵니다.


“정말, 힘드시겠군요.”


그 말속에는 어떤 분석도, 어떤 판단도, 어떤 해결책도 없습니다. 오직 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고통의 공간 안에, 당신이 기꺼이 함께 머무르겠다는 초대만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담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립니다. 그것은 자기 연민의 눈물이 아니라, 그의 존재가, 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고통이, 난생 처음으로, 어떤 이름표도 붙여지지 않은 채, 온전하게 이해받고 수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깊은 안도의 눈물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날, 상담가로서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아무런 전문적인 조언도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치유자로서, 가장 위대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신은 언어의 폭력성을 깨닫고, 그 대신 침묵의 치유력을 선택했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관계란, 타인의 고통을 나의 언어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언어가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상대방의 고통스러운 침묵과 함께 머무르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당신의 상담실은, 지식과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 존중받고, 두 개의 영혼이 침묵 속에서 서로를 만나는, 거룩한 성소가 되었습니다.








35장: 말없이 건네는 귤 하나가 모든 것을 말할 때

늦가을의 햇살이, 거실의 낡은 나무 바닥 위로 길고 희미한 사각형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는 소파 양 끝에 앉아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당신들이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드라마가, 그들만의 기쁨과 슬픔으로 소란스럽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당신들 사이에는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침묵은 결코 비어 있거나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고택의 대들보처럼, 당신들의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떠받치고 있는, 꽉 찬 침묵입니다.

당신들은 더 이상 서로의 하루에 대해 시시콜콜 묻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배우자의 허리가 얼마나 쑤시는지를. 점심 식사 후에 어떤 약을 챙겨 먹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창밖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지금 그의 마음속에 어떤 희미한 상념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말입니다. 당신들의 삶은 이제, 서로의 존재라는, 너무나 익숙해서 더 이상 의식할 필요조차 없는 배경음악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소파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며칠 전 아들이 사 들고 온 귤 상자에서 귤 하나를 꺼내 듭니다. 당신의 주름지고 마디 굵은 손가락이, 이제는 조금 서툴고 둔한 움직임으로, 귤껍질을 천천히 벗겨내기 시작합니다. ‘파삭’하는 소리와 함께, 상큼하고도 달콤한 향기가 늦가을의 건조한 공기 속으로 퍼져나갑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겨울을, 그리고 당신과 당신 배우자의 젊은 날들을 떠올리게 하는, 다정한 냄새입니다.


당신은 잘 익은 귤의 속살을 한 조각 떼어내어, 당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대신, 당신의 배우자를 향해 손을 내밉니다.


당신의 배우자는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려, 당신의 손에 들린 귤 조각과, 당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손가락에서 그 귤 조각을 받아, 자신의 입속으로 가져갑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가 싶더니, 그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짧고 단순한 행위 속에, 어떤 특별한 드라마나 감정의 고양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압니다. 지금 당신들 사이에서, 이 세상 그 어떤 화려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가장 완전하고도 깊은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이 말 없는 행위가, 어떻게 수만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의 ‘몸’을, 이성과 언어의 지배 아래 있던 감옥에서 해방시킨 한 위대한 철학자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프랑스의 현상학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서양 철학의 오랜 전통이었던 데카르트의 정신-물질 이원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질이 ‘생각하는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살아있는 몸 (le corps propre)’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메를로퐁티에게, 우리의 몸은 정신이 조종하는 하나의 사물이나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몸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유일한 창이자, 세계와 우리가 만나는 지평선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머리로 세상을 분석하기 이전에, 이미 몸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 컵은 차갑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손끝의 차가운 감각을 통해 컵의 존재를 온몸으로 압니다. 우리는 ‘저 사람은 슬퍼 보인다’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축 처진 어깨와 떨리는 목소리를 통해, 그의 슬픔을 나의 몸으로 함께 느낍니다.


이러한 ‘몸’의 지혜는, 타인과의 관계, 즉 ‘상호주관성 (intersubjectivity)’의 영역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말을 듣고 그 의미를 분석하는 과정만을 거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몸짓과, 표정과, 시선과, 그가 만들어내는 침묵의 분위기 속에서, 언어를 넘어서는 훨씬 더 깊은 차원의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가 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 살아오면서 쌓아 올린 것은, 단순히 공유된 기억의 목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몸에 깊이 각인된, 말없는 이해의 역사였습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의 배우자가 언제 피곤해하고, 언제 위로가 필요한지를,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귤 한 조각을 건넨 그 행위는, 바로 이 ‘살아있는 몸’의 언어였습니다. 그 단순한 제스처 속에는, “당신이 신 것을 잘 못 먹으니, 가장 달콤한 첫 조각을 먼저 맛보세요”라는 배려의 언어가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함께 보낸 수많은 겨울밤, 이 귤 향기 속에 담긴 우리의 시간을 기억합니다”라는 추억의 언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당신과 함께, 이 고요한 오후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라는, 존재와 존재가 나누는 가장 순수한 현존(現存)의 언어가 그 안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배우자는, 이 모든 말을, 그의 몸으로, 단 한 순간에, 완벽하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 없는 교감의 경지는, 당신들의 사랑이 도달한 깊은 성숙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한국의 위대한 선승(禪僧)이었던 성철 (性徹, 1912-1993) 스님은 종종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를 통해, 깨달음의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이 말은 세 가지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가집니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의 범부에게, 산은 그저 산이고 물은 그저 물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수행을 시작하고 지적인 탐구를 시작하면,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게 됩니다. 그는 모든 현상의 이면에 있는 공(空)의 이치를 보고, 모든 것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이성의 단계입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 이성의 단계마저 넘어서서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산은 다시 산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됩니다. 깨달은 자의 눈에 비친 산과 물은, 처음 범부가 보았던 산과 물과 똑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면의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이제, 모든 분별과 분석을 넘어선, 순수한 ‘그러함 (Tathātā, 여여 如如)’의 세계에서 사물을 봅니다. 그는 산의 ‘산 됨’과, 물의 ‘물 됨’을, 어떤 개념의 개입도 없이, 온전하게, 그리고 경이롭게 바라봅니다.


당신들의 사랑 또한, 이와 같은 여정을 거쳐왔습니다. 당신들의 젊은 시절, 사랑은 그저 사랑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산은 산이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라는 긴 수행의 과정 속에서, 당신들은 수없이 다투고, 서로를 분석하고,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의심했습니다.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었고, 그것은 책임과, 의무와, 때로는 고통과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산은 산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 고요한 오후, 당신들은 마침내 사랑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당신이 건네는 이 귤 한 조각은, 더 이상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상징이나, 어떤 의무를 다하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이 행위는 그저, 이 행위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귤은 그저 귤이고, 나눔은 그저 나눔이며, 사랑은 그저 사랑입니다 (산은 다시 산이다). 당신의 행위는 어떤 다른 의미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 자체가, 이미 의미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어의 한계와 폭력성을 보았고, 언어를 넘어선 침묵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들은 언어가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서, 오직 순수한 ‘행위’와 ‘존재’만으로 이루어지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소통에 도달한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입에, 남은 귤 조각을 넣습니다. 달콤하고 시원한 과즙이, 당신의 마른 입안을 적십니다. 당신은 텔레비전 화면을 봅니다. 드라마 속의 젊은 주인공들은, 여전히 수많은 오해와 엇갈림 속에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모습이, 마치 아주 오래전 당신들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애틋하고도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진정한 관계의 완성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정한 관계의 완성은, 마침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임을.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는, 오십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통과하며, 마침내 그 위대한 침묵의 언어를 배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말없이 건네는 귤 하나. 그것은 당신들의 삶 전체가,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 길고 긴 수행이, 마침내 도달한, 가장 아름답고도 완전한 하나의 문장이었습니다.







36장: 화두(話頭) 하나를 들고, 말을 넘어서는 길


당신은 선방(禪房)의 굳은 방석 위에 앉아 있습니다. 당신의 등은 곧게 펴져 있고, 당신의 눈은 반쯤 감겨 있으며, 당신의 손은 아랫배 위에 고요히 포개져 있습니다. 밖은 늦은 가을의 햇살이 비치고 있겠지만, 이 어두운 선방 안에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함께 앉아 있는 다른 수행자들의 희미한 숨소리와, 당신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소음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며칠 전, 당신은 당신의 스승인 노선사(老師)의 방에 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평생을 관통할 하나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이 조용한 전쟁터에서 싸워나갈 유일한 무기이자, 당신이 넘어서야 할 가장 높은 벽입니다. 스승은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부모에게서 이 몸을 받기 이전,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당신이 들고 있는 ‘화두 (話頭)’입니다. 화두는 선불교(禪佛敎) 전통에서, 스승이 제자의 이성적인 사유를 끊어내고, 언어와 개념을 넘어선 직접적인 깨달음, 즉 견성(見性, Kenshō)으로 이끌기 위해 던지는, 역설적이고도 논리적으로는 풀 수 없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그 화두와 함께 앉아 있습니다. ‘부모 미생전 본래면목’. 당신은 이 질문의 뜻을 머리로 이해하려 애씁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나의 진짜 모습이란 무엇일까?’ 당신의 훈련된 이성은, 즉시 그럴듯한 답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육체를 가지기 이전의 순수한 영혼을 의미하는 것일 거야.’ ‘아니,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 모든 존재 안에 내재된 부처의 성품을 가리키는 말일 거야.’ ‘어쩌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空, Śūnyatā)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지도 몰라.’


당신은 이처럼 수많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개념들을 떠올리며, 그중 가장 그럴듯한 답을 찾아내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어떤 답을 내놓아도,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니다. 그것은 네가 책에서 읽은 지식일 뿐, 너의 진짜 답이 아니다.’ 당신이 만들어낸 모든 정답은, 이 살아있는 질문 앞에서 힘없이 부서져 내릴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두 수행의 본질입니다. 화두는 당신의 이성에게 ‘정답’을 요구하는 시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답을 찾으려는 당신 이성의 모든 시도를 좌절시켜, 마침내 이성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항복하게 만드는 교묘한 장치입니다. 중국 송나라 시대에 화두선을 체계화했던 위대한 선사 대혜종고 (大慧宗杲, 1089-1163)는, 화두를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뜨거운 쇠뭉치’에 비유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이 ‘본래면목’이라는 뜨거운 쇠뭉치를 목구멍에 걸린 채, 뱉어내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극심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당신의 마음은 더 이상 철학적인 답을 만들어내는 것을 포기합니다. 대신, 당신의 마음은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지금 이 순간의 육체적 고통이라는, 훨씬 더 원초적인 소음들로 가득 차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화두에 집중하려 하지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떠오르고, 가족에 대한 걱정이 밀려오며, 쑤시는 무릎의 통증이 당신의 모든 의식을 집어삼킵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당신이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는,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로 가득 찬 거대한 창고와도 같다는 사실을. 화두는, 그 창고의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젖힌 열쇠였습니다.

당신은 절망합니다. 깨달음은커녕, 당신은 당신 자신의 추하고 혼란스러운 내면과 마주하며, 스스로가 얼마나 형편없는 수행자인지를 절감할 뿐입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 당신은 20세기 독일의 비판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Adorno, 1903-1969)의 고통스러운 사유와 조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도르노는 그의 주저 『부정 변증법, Negative Dialektik』에서, 서양 철학의 오랜 전통인 ‘동일성 사유 (identity thinking)’를 비판했습니다. 동일성 사유란, 우리의 이성(주체)이 자기 바깥의 대상(객체)을, 자신의 개념적 틀 안에 완벽하게 포섭하고 동일화하려는 폭력적인 경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은 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 앞에 있는 저 고유하고 살아있는 존재를, ‘꽃’이라는 우리의 낡은 개념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우리는 대상의 ‘비(非)동일적인 것(the non-identical)’, 즉 우리의 개념으로는 결코 포착될 수 없는 그것의 생생한 개별성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아도르노는 이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부정 변증법 (Negative Dialectics)’이라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헤겔의 변증법처럼, 대립하는 두 개념을 종합하여 더 높은 단계의 긍정적인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정 변증법은, 우리의 개념이 결코 대상과 동일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그 ‘비동일성’의 흔적을 끝까지 사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A는 B이다’라는 긍정적인 결론에 안주하지 않고, ‘A는 A가 아니다’라는 부정과 모순의 상태에 끝까지 머무르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사유의 방식입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화두 수행이야말로, 이 부정 변증법의 가장 철저하고 실천적인 형태입니다. 당신의 이성은 ‘본래면목은 X이다’라는 동일성의 명제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지만, 화두는 그 모든 긍정적인 답변을 “아니다”라고 부정합니다. 화두는 당신에게, 당신의 그 어떤 개념도, 그 어떤 언어도, 당신 존재의 진실과 결코 동일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이 극심한 좌절과 정신적인 막다른 골목은, 당신의 동일성 사유가 마침내 그 한계에 부딪혀 파산하는, 거룩한 순간입니다.


수행이 깊어지자, 당신의 마음속에서 모든 개념적인 답변들이 사라집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모르겠다’는 거대한 의심의 덩어리, 즉 선(禪)에서 말하는 ‘대 의심(大疑心)’뿐입니다.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더 이상 당신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하나의 문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온몸, 당신의 세포 하나하나, 당신의 숨결 하나하나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존재론적 물음표가 됩니다. 당신은 먹을 때도, 걸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오직 그 질문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바로 그 질문 덩어리가 됩니다.

당신은 완전한 고독 속으로, 완전한 ‘알 수 없음’의 어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갑니다. 이것은 중세 기독교의 신비가들이 말했던 ‘부정의 길 (Via Negativa)’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신의 모든 긍정적인 속성들, 즉 ‘선하다’, ‘지혜롭다’, ‘빛이다’ 와 같은 인간의 유한한 개념들을 하나씩 부정하고 난 끝에 남는 ‘신성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언어를 넘어선 신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비가들에게 이 어둠은, 빛이 없는 텅 빈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과 감각이 소멸된 자리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충만한 어둠이자, 인간의 눈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어둠으로 느껴지는 눈부신 빛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당신의 모든 의지적인 노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을 때, 당신이 그 거대한 의심의 압력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기 직전의 그 순간에.

‘딱!’

선방의 죽비 소리가, 고요를 가르며 당신의 고막을 때립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합니다.


무엇이 변했는지를 설명할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떤 신비로운 환상을 본 것도, 어떤 비밀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죽비 소리가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소리와 함께, 당신을 평생 짓눌러왔던 그 거대한 질문 덩어리가, 봄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질문이 사라지자, 답 또한 함께 사라졌습니다. 묻는 자와, 물음과, 물음의 대상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투명한 ‘그러함 (Tathātā)’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은 천천히 눈을 뜹니다. 당신은 당신 앞에 앉아 있는 다른 수행자의 뒷모습을 봅니다. 당신은 선방의 낡은 나무 기둥을 봅니다. 당신은 창틈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 속에서 춤추는 먼지들을 봅니다. 모든 것이, 당신이 화두 수행을 시작하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롭습니다.

저 묵묵한 나무 기둥이, 바로 당신의 ‘부모 미생전 본래면목’이었습니다. 저 먼지들의 춤이, 당신의 본래면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모든 것을, 아무런 개념의 개입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당신의 이 ‘봄 (Seeing)’이야말로, 당신의 본래면목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특별한 것을 찾으려 했지만, 진실은 단 한 순간도 당신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경험한 이 갑작스러운 세계의 변용이야말로, 20세기 철학의 가장 위대한 거인 중 한 명인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가 평생에 걸쳐 탐구했던 ‘진리’의 본래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보통 ‘진리’를, 어떤 생각이나 명제가 실제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 즉 ‘정확성 (correctness)’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화두 수행 초기에 ‘나의 본래면목은 영혼이다’ 혹은 ‘그것은 공(空)이다’와 같은 ‘정답’을 찾으려 애썼던 것이 바로 이 ‘정확성으로서의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진리 개념이, 더 근원적인 진리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진리의 본래 의미를 찾기 위해, 고대 그리스어 ‘알레테이아 (Aletheia, ἀλήθεια)’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이 단어는 ‘망각’ 혹은 ‘숨겨져 있음’을 의미하는 ‘레테 (Lethe)’에, ‘아니다’를 의미하는 부정 접두사 ‘a-’가 붙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알레테이아의 문자적인 의미는 ‘숨겨져 있지 않음’, ‘잊혀지지 않음’, 즉 ‘탈은폐 (Unverborgenheit)’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통찰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진리는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정확한 명제’가 아닙니다. 진리는, 지금껏 숨겨져 있던(은폐) 존재의 모습이, 어떤 계기를 통해 그 은폐 상태에서 벗어나(탈은폐), 우리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건 (Ereignis)’ 그 자체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소유하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참여하고 목격하는 존재의 자기-드러남입니다.


하이데거는 또한, 이 ‘탈은폐’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하는 ‘은폐’의 상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존재는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을 숨기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 특히 세상을 개념과 논리로 파악하려는 우리의 이성적인 사유 방식이야말로, 존재의 이 생생한 드러남을 가리는 가장 두꺼운 장막, 즉 ‘은폐’의 상태입니다.


당신이 화두를 들고 겪었던 그 모든 고통스러운 과정은, 바로 이 ‘은폐’의 장막을 찢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당신의 이성은 ‘본래면목’이라는 살아있는 신비를, ‘영혼’, ‘불성’, ‘공’이라는 낡은 개념의 상자 안에 가두려 했습니다. 하지만 화두는 그 모든 시도를 좌절시킴으로써, 마침내 당신의 이성이라는 장막 자체를 찢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장막이 찢겨나간 바로 그 순간, 죽비 소리와 함께, ‘알레테이아’라는 진리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진리는 당신에게 어떤 새로운 정보를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진리는 당신이 이미 보고 있던 것들을, 어떤 개념의 개입도 없이, 있는 그대로, 그 눈부신 현존 속에서 스스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낡은 나무 기둥, 춤추는 먼지들, 동료 수행자의 뒷모습. 이것들은 더 이상 분석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의 경이로운 자기-드러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화두는, 당신에게 ‘정답’을 알려준 친절한 안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가두고 있던 ‘정답의 세계’ 그 자체를 파괴해버린, 거룩하고도 자비로운 폭력의 도구였습니다.


당신은 당신도 모르게, 당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승리의 미소가 아니라, 모든 싸움이 끝났음을 아는 자의, 깊고 평화로운 미소입니다. 당신은 언어의 한계와, 언어의 폭력성과, 언어를 넘어서려는 수많은 시도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그 여정의 종착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새로운 언어를 발견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모든 언어가 시작되기 이전의, 그리고 모든 언어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위대한 침묵의 고향이었습니다. 당신은 ‘화두’라는 마지막 말을 들고, 마침내 말을 넘어선 그 길 위에, 조용히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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