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관계 (The Connection)

by DrLeeHC

제4부: 관계 (The Connection)



19장: 오랜 친구의 변한 모습, 세월이라는 이름의 타인


토요일 오후, 당신은 낡은 찻집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희미하게 긁힌 자국이 남은 나무 테이블과, 삐걱거리는 의자와, 공기 중에 맴도는 묵은 차 향기가 당신에게는 익숙하고 편안합니다. 당신은 40년 지기 친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교실 맨 뒷자리에서 함께 딴짓을 하고, 대학 시절에는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서툰 인생을 논했으며, 서로의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고 축가를 불러주었던, 당신 인생의 거의 모든 계절을 함께 통과해 온 친구. 몇 년 만의 만남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풋풋한 설렘과 따뜻한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잠시 후면, 당신들은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어색함 없이 서로의 삶을 나누고, 잊고 있던 과거의 한 조각을 함께 맞추며 웃음 짓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찻집 문이 열리고, 당신의 친구가 들어섭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지만, 순간 당신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집니다. 당신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신이 기억하는 그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세월의 흔적은 당연한 것입니다.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 깊어진 눈가의 주름, 예전보다 훨씬 두툼해진 뱃살. 당신 자신 또한 그렇게 변해왔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을 낯설게 한 것은 그런 외양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깃든 표정, 그가 걷는 방식, 그리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그의 얼굴에는 과거의 장난기나 따뜻함 대신, 세상에 대한 냉소와 불만, 그리고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완고함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당신의 친구가 아니라, ‘세월’이라는 이름의 낯선 타인처럼 보였습니다.

자리에 앉아 대화가 시작되자, 당신의 불안은 현실이 됩니다. 안부를 묻는 의례적인 대화가 몇 마디 오간 뒤,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당신이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고 편협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특정 정당과 이념을 맹렬히 비난했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어리석거나 사악한 존재로 매도했습니다. 당신이 조심스럽게 다른 관점을 제시하려 하자, 그는 당신의 말을 자르고,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설파했습니다.


화제는 돈과 자식들의 성공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최근에 투자한 부동산과, 대기업에 다니는 아들과, 명문대에 합격한 딸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자랑스럽게 늘어놓았습니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당신은 진정한 기쁨이나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세상의 기준에서 성공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타인과의 비교 우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불안하고 초조한 욕망만이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그와의 대화 속에서 점점 더 깊은 이질감과 슬픔에 빠져듭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세상의 불의에 함께 분노하고, 서툴렀지만 진실한 사랑을 꿈꾸던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오직 자신의 신념과 성공의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성벽 밖의 모든 것을 경계하고 멸시하는, 낯선 성주(城主)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은 과거의 추억을 꺼내어 이 어색한 간극을 메워보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아름다웠던 순간들조차, 이제는 그의 성공 서사를 꾸미기 위한 장식품으로, 혹은 그의 현재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거의 증거로 왜곡되어 소환될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혼란에 빠집니다.


‘우리가 정말 같은 시간을 살아온 친구가 맞는가?’, ‘내가 기억하는 그는 나의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지금의 그가 세월의 가면을 쓴 다른 사람일까?’

바로 이 순간, 당신은 당신의 개인적인 관계의 문제를 넘어, 인류가 수천 년간 고뇌해 온 ‘정체성 (Identity)’과 ‘변화 (Change)’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던졌던 ‘테세우스의 배 (Ship of Theseus)’라는 유명한 역설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 역설은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 (Plutarchos, c. 46–c. 119 AD)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타고 돌아온 배는, 시민들에게 매우 소중한 유물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배의 낡은 널빤지들이 썩기 시작하자, 아테네인들은 썩은 널빤지를 하나씩 떼어내고, 그 자리에 똑같은 모양의 새로운 널빤지를 박아 넣었습니다. 이 과정이 오랫동안 반복되어, 마침내 배를 이루고 있던 원래의 널빤지가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철학자들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는가?”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 1588–1679)는 이 역설에 한 가지 질문을 더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떼어낸 그 낡은 널빤지들을 모두 모아서, 원래의 배와 똑같은 배를 다시 조립했다면, 이제 두 척의 배 중에서 어느 쪽이 진짜 테세우스의 배인가?

당신과 당신의 친구는, 바로 두 척의 테세우스의 배와도 같습니다. 지난 사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당신과 그의 몸을 이루던 세포들은 수없이 교체되어, 육체적으로 당신들은 더 이상 사십 년 전의 그 청년들이 아닙니다. 더 중요하게는, 당신들의 생각과, 신념과, 가치관과, 욕망이라는 정신의 ‘널빤지’들 또한 완전히 새로운 것들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마주 앉아 있는 당신과 그는, 과연 사십 년 전의 우정을 나누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친구’라는 이름의 배와, 지금 당신 눈앞에 앉아 있는 ‘친구’라는 이름의 배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진짜 우정의 배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할수록, 당신은 더 깊은 미궁에 빠져듭니다. 어쩌면 ‘배’라는 고정된 실체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대 그리스의 또 다른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Herakleitos, c. 535–c. 475 BC)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강물은 매 순간 흘러가고, 당신 또한 매 순간 변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우정은 ‘배’라는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았습니다. 당신은 오늘, 사십 년 전의 그 강물에 다시 발을 담그고 싶다는 기대를 품고 이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당신 앞에는 전혀 다른 물이 흐르고 있고, 당신 자신 또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슬픔은,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당신의 헛된 기대, 즉 흐르는 강물을 손에 쥐려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0세기의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이러한 통찰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켜, 이 세계가 고정된 ‘사물 (substance)’이 아닌,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과정 (proces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는 ‘변하지 않는 자아’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의 경험과 선택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사건들의 연속체’입니다. 지금 당신 앞의 친구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과해 온 결과물이며, 당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은 각자의 강을 흘러왔고, 오늘 잠시 그 두 개의 강이 합류점에서 만났지만, 물의 색깔과 온도가 너무나 달라져 서로 섞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나’, 혹은 ‘그’라는 존재의 핵심은 과연 있는 것일까요. 이 지점에서 불교의 가장 근원적인 가르침이 당신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바로 ‘무아(無我, Anatta)’와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의 법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육체(色, 색), 감각(受, 수), 생각(想, 상), 의지(行, 행), 그리고 의식(識, 식)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 즉 오온(五蘊)이 특정한 조건(緣, 연)에 따라 잠시 모여 만들어진 일시적인 집합체에 불과합니다. 이 조건들이 변하면, ‘나’라고 불리는 집합체의 모습 또한 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은 서로에게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연기’의 법칙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과거의 그 친구는, 사실 처음부터 고정된 실체로 존재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젊음’과 ‘가난’, ‘순수함’이라는 조건들이 모여 잠시 그 모습을 드러냈던 하나의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 앞의 그는, ‘나이 듦’과 ‘성공’, ‘사회적 지위’라는 새로운 조건들이 모여 나타난 또 다른 현상일 뿐입니다. 당신의 고통은, 실체가 없는 그 과거의 현상에 ‘나의 영원한 친구’라는 이름을 붙이고 집착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압니다. 당신이 찾아야 할 것은, 변해버린 친구에게서 과거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헛된 노력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당신과 그 친구 모두에게는 변하지 않는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그 ‘무아’의 진실을 받아들일 때, 역설적으로 당신은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판단’을 내려놓고, ‘연민’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당신 앞의 그는 더 이상 당신을 실망시킨 ‘변절한 친구’가 아닙니다. 그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조건들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 온, 하나의 고통받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가 쌓아 올린 완고한 신념과 성공의 성벽은, 사실 그의 강인함의 증거가 아니라, 그가 세월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두려움에 시달려왔는지를 보여주는 흉터일지도 모릅니다.


찻잔이 비워지고, 만남은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계산서를 나눕니다. 찻집을 나와, 각자의 길로 헤어지기 전, 당신은 친구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립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기대나 판단 없이,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말을 건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친구의 눈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당신은 놓치지 않습니다. 그의 완고한 가면 위로,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당신이 기억하던 그 옛날 소년의 서글픈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당신들은 말없이 악수를 하고 헤어집니다. 아마 다시는 만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오늘 오랜 친구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실의 고통 속에서, 당신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변화, 그리고 관계의 본질에 대한 깊은 깨달음입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진정한 관계란, 변하지 않는 두 개의 섬이 영원히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정한 관계란, 각자의 강을 흘러가는 두 개의 물줄기가,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때로는 멀어지고 때로는 가까워지면서, 마침내 ‘무아’라는 이름의 거대한 바다에서 다시 만날 것임을 신뢰하는 것임을.

당신은 오늘, 세월이라는 이름의 타인을 통해, 당신 자신이라는 가장 낯선 타인과 비로소 화해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20장: 사랑이라는 감정, 그 너머의 무엇



토요일 오전, 당신은 당신의 ‘신혼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낯선 공간의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어젯밤,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과, 가장 잔인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싸웠습니다. 이제 집 안에는 냉랭하고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습니다. 당신의 배우자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고, 당신은 거실에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당신 마음의 파편들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지극히 사소했습니다. 주말 아침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작은 의견 차이. 하지만 그 작은 균열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지진이 되어, 당신들이 ‘사랑’이라고 믿어왔던 세계의 기반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대화는 곧 비난이 되었고, 비난은 과거에 대한 폭로전으로, 그리고 마침내 서로의 가장 약한 부분을 겨냥하는 인신공격으로 번졌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입에서 그토록 날카롭고 잔인한 말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고, 당신이 천사라고 믿었던 상대방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차가운 분노와 경멸에 절망했습니다.


연애 시절, 그리고 불과 몇 달 전의 신혼여행에서, 당신들은 완벽한 하나였습니다. 당신들은 같은 것을 보고 웃었고, 같은 음악에 감동했으며, 서로의 눈빛만 봐도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영혼의 반쪽을 찾았다고,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과 저 닫힌 방문 사이에 흐르는 이 깊고 차가운 강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은 어디로 사라지고, 당신 앞에 나타난 저 낯선 타인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을 이토록 추하고 이기적인 괴물로 만들어버린 당신 안의 이 낯선 존재는 또 누구입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고작 이것뿐이었나.’


당신은 지독한 환멸과 함께, 사랑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신성하고 영원하다고 믿었던 그 감정이, 이토록 쉽게 무너져 내리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바로 이 고통스러운 질문의 지점에서, 우리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탐구해 온 ‘사랑’의 다양한 얼굴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경험하고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려 사용하는 사랑을, 최소한 세 가지 이상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그 본질을 섬세하게 구분했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혼란의 지도를 밝혀주는 등불이 될지도 모릅니다.


첫 번째 사랑의 이름은 ‘에로스 (Eros)’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때 경험하는, 열정적이고 낭만적이며, 때로는 격렬한 소유욕을 동반하는 사랑입니다. 플라톤 (Plato, BC 427-347)은 그의 저서 『향연, Symposion』에서, 에로스를 아름다움을 향한 영혼의 갈망이자, 필멸의 존재가 불멸에 닿으려는 신성한 열정으로 묘사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가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강렬한 끌림,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싶고 소유하고 싶었던 그 불타는 듯한 감정이 바로 에로스였습니다. 에로스는 아름답고 강력하지만, 그 본질상 불안정하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결핍을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는 욕망이며, 상대방의 실제 모습보다는, 내가 그에게 투사한 완벽한 이상형을 사랑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환멸은,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이 만들어낸 그 완벽한 환상과 다른, 결점투성이의 독립된 인격체임을 깨닫는 순간 찾아온, 에로스의 필연적인 죽음입니다.

두 번째 사랑의 이름은 ‘필리아 (Philia)’입니다. 이것은 에로스와 같은 격정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깊은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우정으로서의 사랑’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322)는 필리아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관계 중 하나로 보았습니다. 필리아는 서로의 ‘유용성’이나 ‘쾌락’이 아닌, 상대방이 가진 ‘덕(德)’, 즉 그의 좋은 성품과 인격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함께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의 성장을 돕고,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의 편이 되어주겠다는 이성적인 선택과 의지적인 노력을 포함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는, 불타는 에로스의 시기를 지나, 이제 막 이 단단하고 고요한 필리아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턱에 서 있습니다. 어젯밤의 다툼은, 당신들이 더 이상 서로에게 완벽한 이상형이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서로의 다름과 불완전함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친구’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고통스러운 신호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위대하고도 어려운 사랑의 이름은 ‘아가페 (Agape)’입니다. 초기 기독교 사상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아가페는 상대방이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얼마나 훌륭한 인격을 가졌는지에 상관없이, 그저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고, 그의 행복을 위해 나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를 넘어선, 신적인 사랑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그의 책에서 ‘자비(Charity)’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 아가페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에고가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연결입니다.

당신이 어젯밤, ‘너는 왜 나를 실망시키는가’라며 서로를 비난했던 것은, 이 아가페의 정신과 가장 먼 곳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깨닫습니다. 당신들의 사랑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진짜 사랑의 첫 시험대에 올랐다는 것을. 당신들은 에로스라는 아름다운 배를 타고 출발했지만, 이제 그 배는 필리아와 아가페라는 더 깊고 넓은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낡은 돛을 내리고 새로운 엔진을 달아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러한 결혼이라는 관계의 변용은, 서양의 신비주의 전통 속에서 심오한 영적 상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18세기의 과학자이자 신비 사상가였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Emanuel Swedenborg, 1688-1772)는, 진정한 부부의 사랑을 ‘결합애 (Conjugial Love)’라고 부르며, 그것이야말로 천국의 본질적인 기쁨이라고 말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결합애는 단순히 육체적, 감정적 결합을 넘어선 영적인 합일입니다. 그것은 ‘사랑(love)’이라는 여성적 원리와 ‘지혜(wisdom)’라는 남성적 원리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보완하며, 마침내 하나의 온전한 천사적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가 겪는 지금의 갈등은, 실패의 징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의 원리가 하나의 더 높은 진실 속에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 겪는 필연적인 성장통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변용의 과정은, 고대의 연금술사들이 묘사했던 ‘화학적 결혼 (Chemical Wedding)’, 즉 ‘코니운크티오 (Coniunctio)’의 과정과도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연금술의 목표는 납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었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분열된 인간의 영혼을 통합하여 완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코니운크티오는 이 위대한 작업의 마지막 단계로, 남성 원리(왕, 태양)와 여성 원리(여왕, 달)라는 상반된 두 힘이, 격렬한 불(갈등과 고통) 속에서 자신들의 낡은 형태를 해체하고 (solutio), 마침내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결합하는 신성한 결혼을 상징합니다.


당신들의 결혼 생활은, 바로 이 연금술이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실험실, ‘아타노르 (Athanor)’였습니다. 아타노르 (Athanor)는 중세 연금술사들이 사용했던 특수한 용광로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한 번 불을 붙이면 스스로 연료를 공급하며 오랫동안 일정하고 부드러운 열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연금술사들은 이 꾸준한 열을 통해 비천한 금속이 점진적으로 정화되고 변성되어, 마침내 황금이나 ‘현자의 돌’로 변하는 위대한 작업(Magnum Opus)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아타노르는, 삶의 꾸준한 시련과 내면 성찰의 열기 속에서 인간의 영혼이 천천히 변화하고 성숙하는 과정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즉, 우리 자신 혹은 우리의 삶이 바로 영적인 변용이 일어나는 신성한 용광로라는 비유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는 서로 다른 원석이었고, 어젯밤의 다툼은 그 원석들을 녹여 새로운 합금으로 만들기 위한 뜨거운 불길이었습니다. 그 불길 속에서, 당신의 이기심과, 당신 배우자의 자존심이라는 불순물들이 고통스럽게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이 불의 시련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당신들의 사랑은 결코 에로스라는 값싼 납의 상태를 벗어나, 아가페라는 영원한 황금으로 변용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창밖은 어느새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로 가득합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닫힌 방문 앞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는 문을 두드리는 대신, 문틈으로 작은 쪽지 하나를 밀어 넣습니다. 그곳에는 길고 장황한 변명이나, 논리적인 분석이나, 감정적인 호소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오늘 당신이 얻은 이 쓰라리고도 귀한 깨달음의 첫걸음을, 아주 짧은 한 문장으로 적었을 뿐입니다.

‘미안해, 여보.’


잠시 후, 방문 안에서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이내, 문이 아주 조금, 조심스럽게 열립니다.


당신은 압니다. 동화 속의 ‘그 후로 공주와 왕자는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마무리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당신은 이제 깨닫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완성된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말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오해와 갈등의 불길을 함께 통과하고, 서로의 불완전함을 기꺼이 끌어안는 고통스러운 노력을 통해, 아주 조금씩, 평생에 걸쳐 빚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는, 에로스라는 감정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텅 빈 해변에서, 이제 막 필리아와 아가페라는 이름의, 작지만 단단한 조약돌들을 함께 줍기 시작했습니다.








21장: 나를 미워하는 직장 상사를 위해 기도하다


당신의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당신 어깨 위의 근육들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집니다. 그것은 조건반사입니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에 침을 흘렸듯, 당신은 그의 목소리라는 자극에 ‘불안’과 ‘분노’라는 이름의 독액을 분비합니다. 그는 당신의 팀장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난 일 년 동안, 그의 미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살아왔습니다.


그의 미움은 교묘하고 집요합니다. 그는 결코 소리를 지르거나 공개적으로 당신을 모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칭찬이라는 이름의 채찍을 휘두릅니다. 모두가 모인 회의 자리에서, 그는 당신의 보고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김 대리, 역시 꼼꼼해. 신입사원 시절의 그 초심을 잃지 않은 것 같아서 보기 좋군.” 그 말속에는 ‘너는 아직도 신입사원 수준이다’라는 날카로운 가시가 담겨있음을 당신과 다른 팀원들은 모두 알아듣습니다. 그는 당신의 사소한 실수는 결코 놓치지 않고 전체 메일로 공유하여 ‘모두가 배울 점’으로 만들고, 당신의 성공은 언제나 ‘운이 좋았다’거나 ‘주변의 도움이 컸다’는 말로 교묘하게 절하합니다. 그는 당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성장을 ‘걱정하고 있다’는 가면을 쓰고, 당신의 영혼을 서서히 질식시키켜 왔습니다.

당신은 그를 증오합니다. 퇴근 후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당신들은 그의 위선과 무능함에 대해 열을 올리며 욕을 합니다. 그 순간 당신은 잠시 해방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마약과도 같아서, 다음 날 아침이면 더 큰 무력감과 자기혐오로 되돌아올 뿐입니다. 당신은 주말 내내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되새김질하며, 다음 주 월요일에 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를 시뮬레이션합니다. 당신의 삶은, 이제 당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생각과 감정의 상당 부분은, 그라는 타인에게 저당 잡힌 채, 그의 손아귀 안에서 고통스럽게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의 감옥에 갇힌 죄수이자, 동시에 그를 향한 증오라는 또 다른 감옥을 스스로 만들어낸 간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또다시 그의 언행을 곱씹으며 잠 못 이루던 당신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서재에 꽂혀 있던 낡은 책 한 권을 무심코 꺼내 들었습니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영성(靈性)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책에서, 당신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이하고도 충격적인 문장 하나와 마주하게 됩니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당신은 실소를 터뜨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선적이고 나약한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떻게 나의 영혼을 매일같이 난도질하는 그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당하기까지 한 요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책의 다음 구절은, 당신의 냉소적인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 책의 저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감정적인 ‘좋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당신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이기적인 영적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그 책의 논리는 이러했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할 때, 당신은 그와 보이지 않는 감정의 사슬로 연결됩니다. 당신의 생각은 하루 종일 그를 맴돌고, 당신의 감정은 그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갑니다. 당신은 그를 당신의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지만, 역설적으로 당신의 증오는 그를 당신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주인처럼 모셔두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는 당신의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당신의 내면세계까지 완벽하게 지배하는 폭군이 됩니다.


이것은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그의 저서 『정신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에서 탐구했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Master-Slave Dialectic)’의 심리적 변주와도 같습니다. 헤겔에 따르면, 주인은 노예를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노예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노예 없이는 주인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신을 단련하며 주체성을 형성해 나갈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당신과 당신 팀장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당신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지만, 당신의 고통과 복종 없이는 그의 권력 또한 공허합니다. 당신이 그를 미워하는 한, 당신은 그의 존재를 떠받드는 가장 충실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증오의 사슬을 끊어낼 방법은 무엇일까요? 책은 그 방법이 바로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의 존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의지적인 행위를 통해, 당신을 옭아매는 증오의 감정으로부터 당신의 의지를 분리시키는 과정입니다. 결국 그 기도는 그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당신 자신의 자유를 얻기 위한 가장 치열한 내면의 독립 투쟁이 되는 셈입니다.

그날 밤,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도 기이한 시도를 해보기로 결심합니다. 당신은 방의 불을 끄고, 침대에 앉아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팀장을 위해 기도하려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첫 번째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납니다. “부디, 그가…”라고 입을 떼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에는 그의 비웃는 듯한 얼굴과, 당신을 무시하던 그의 말투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기도는커녕, 당신의 심장은 다시 분노로 들끓고, 당신의 입에서는 저주에 가까운 말들이 터져 나옵니다. ‘그가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그가 자신이 저지른 만큼의 고통을 되돌려 받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증오의 확인 사살일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당신의 의지는 아직 감정의 폭풍우 속에서 방향을 잃은 돛단배와도 같다는 것을. 이것은 현대 뇌과학이 설명하는, 우리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뇌 속에는, 빠르고 감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편도체 (Amygdala)’와, 느리고 이성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 피질 (Prefrontal Cortex)’이 있습니다. 당신의 팀장은 당신에게 있어, 당신의 편도체를 즉각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강력한 위협 신호입니다. 당신이 그를 위해 기도하려는 이성적인 의지(전두엽 피질)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자동적으로 촉발되는 강력한 분노와 공포의 감정(편도체)에 번번이 압도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당신은 실패 앞에서 좌절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질문과 마주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감정의 폭풍우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은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가 불가능하다면, 다른 종류의 기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바로 그 지점에서, 당신은 불교의 위대한 지혜와 만납니다. 불교의 수행법에는 ‘자비관 (慈悲觀)’이라는 명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를 향한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단계적으로 넓혀나가는 수행입니다. 이 수행의 핵심은,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점차 그 범위를 넓혀, 마침내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에게까지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민, 즉 ‘카루나 (Karunā)’는, 단순히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이 결코 나의 고통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통찰, 즉 지혜 (Prajñā, 반야)에서 비롯되는 사무치는 공감입니다. 카루나는 타인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당신은 깨닫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팀장이 당신에게 가하는 모든 고통이, 사실은 그의 강인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있는 깊은 고통과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신은 그의 끊임없는 통제 욕구가, 어쩌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날카로운 비아냥거림은, 타인의 인정을 간절히 갈구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 그의 공허한 영혼이 지르는 비명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그가 당신을 괴롭히는 가해자인 동시에, 그 자신 안에 있는 ‘고통’이라는 이름의 더 큰 폭군에게 시달리는 피해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다시 한번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당신의 기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의 ‘행복’이라는 막연한 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합니다.

“부디, 그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부디, 그가 타인을 깎아내려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그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부디, 그가 그 자신 안에서 작은 평화라도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는 여전히 당신에게 어려운 과제이지만, 더 이상 당신 자신을 속이는 거짓된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이 기도는 표면적으로는 그를 위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의 고통이 줄어들 때, 당신을 향한 그의 공격 또한 줄어들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증오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도 지혜로운 접근 방식이었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의 감정적 노예가 아니라, 그의 병든 영혼의 증상을 냉철하게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와 같은 마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며칠 동안, 밤마다 조용히 이 새로운 기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팀장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당신을 교묘하게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변했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여전히 당신에게 날아왔지만, 이전처럼 당신의 심장에 깊이 박히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방탄유리에 부딪힌 것처럼 힘없이 튕겨 나갔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그와 당신 사이에 어떤 투명하고 단단한 공간이 생겨난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이제 그의 공격에 분노로 즉각 반응하는 대신, 그의 말 뒤에 숨겨진 그의 고통을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그의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는 상대 배우가 아니라, 무대 아래에서 그의 서툰 연기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관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고대의 신비주의 전통이 이야기해 온 영적인 방어의 본질입니다. 중세의 기독교 신비가들은 악의 공격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거룩한 무관심 (holy indifference)’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고대 트라키아의 현자 잘목시스 (Zalmoxis)는 “두려움은 가장 큰 적”이라고 말하며, 외부의 위협에 대한 내면의 반응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당신의 기도는, 당신 안에 있던 ‘두려움’과 ‘분노’라는 내부의 적을 먼저 다스렸습니다. 그 결과 외부의 적인 팀장의 공격은 당신에 대한 힘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달쯤 지났을까, 당신의 팀장은 당신에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기며,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했습니다. “이거, 김 대리가 한번 맡아봐. 자네라면 잘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 말속에는 여전히 당신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섞여 있었지만, 이전과 같은 날카로운 가시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변했기 때문에, 당신이 그를 대하는 미세한 태도와 눈빛이 변했기 때문에, 그 또한 당신을 대하는 방식을 조금 바꾸었을 뿐일 겁니다. 헤르메스주의의 위대한 가르침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As above, so below)”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내면세계 (Microcosm)에서 일어난 변화가, 마침내 당신과 그를 둘러싼 외부 세계 (Macrocosm)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날 저녁, 당신은 더 이상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의 마음속에 찾아온 이 낯선 평화에 대해 조용히 감사했습니다. 당신은 원수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다만, 원수를 더 이상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원수로 만들지 않는 법을 배웠을 뿐입니다. 당신은 마침내, 당신을 가두었던 두 개의 감옥에서 모두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당신 자신의 영혼이라는, 고요하고 자유로운 땅 위에, 비로소 두 발로 단단히 섰습니다.








22장: 반려동물의 죽음, 말을 넘어선 이별의 슬픔


집 안의 침묵이, 당신의 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명(耳鳴)처럼,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십오 년 동안 당신의 삶의 일부였던, 당신의 늙은 개(犬)를 어제 동물병원에서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당신은 낯선 행성에서 깨어난 여행자처럼, 당신에게 익숙했던 모든 풍경이 미세하게, 그러나 근본적으로 뒤틀려버린 세상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소파도, 텔레비전도, 창밖의 풍경도. 하지만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습니다. 현관문 옆에는, 산책을 나갈 때마다 당신의 손에 익숙하게 감기던 낡은 목줄이 걸려 있습니다. 부엌 구석에는, 사료가 반쯤 남은 밥그릇과 물그릇이 놓여 있습니다. 거실 소파의 당신 자리 옆에는, 그 녀석이 평생을 파고들며 잠들었던 쿠션이, 이제는 주인을 잃은 채 움푹 꺼져 있습니다. 이 모든 사물들은 더 이상 그냥 사물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제, ‘부재(不在)’라는 이름의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슬픔의 성유물(聖遺物)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습관처럼, 아침 식사로 먹던 사과 한 조각을 작게 잘라 식탁 아래로 내밀다가, 허공을 더듬는 당신의 손을 보고 화들짝 놀랍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이처럼 삶의 모든 세포에 스며들어 있던 사소한 습관들이, 이제는 갈 곳을 잃고 당신의 마음을 예리하게 찔러대는 파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당신을 위로하려 애씁니다. “그래도 오래 살았잖아. 호상이야.” “정 힘들면, 새로 한 마리 더 데려오면 되지.” 그들의 말에는 어떤 악의도 없다는 것을 당신은 압니다. 하지만 그 위로의 말들은, 당신의 슬픔에 닿지 못하고, 오히려 당신과 세상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세울 뿐입니다. 그들의 세계에서, 동물의 죽음은 ‘슬프지만 극복할 수 있는’ 작은 사건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세계에서, 당신은 지금 가족을 잃었고, 가장 순수하고 정직했던 당신 삶의 한 부분을 도려냈으며, 지난 십오 년의 시간을 통째로 장사 지낸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 거대한 슬픔이, 혹시 비정상적이거나 유난스러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고작 개 한 마리 죽었을 뿐인데, 내가 왜 이러지?’ 당신의 내면에서, 당신이 평생 동안 학습해 온, 차갑고 이성적인 목소리가 당신을 질책합니다.

그 목소리의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근대 서양 철학의 문을 열었던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와 마주하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명제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는 정신 (res cogitans)’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신을 가지지 못한 다른 모든 존재, 즉 동물과 자연을, 영혼이 없는 정교한 기계, 즉 ‘연장(延長)하는 물체 (res extensa)’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정신-물질 이원론 (Mind-Body Dualism)에 따르면, 당신의 늙은 개는 고통을 느끼거나 슬픔을 표현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저 외부 자극에 따라 정해진 방식으로 반응하는 생물학적 자동기계 (automaton)일 뿐입니다. 당신이 그 녀석과 나누었다고 믿었던 모든 교감과 사랑은, 사실 당신 혼자만의 착각이자, 기계를 향한 일방적인 감정 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질책하던 내면의 목소리는, 바로 이 데카르트적 세계관의 희미한 메아리였습니다. 지난 수백 년간 서구 문명을 지배해 온 이 차가운 이성은, 인간을 자연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유일하게 영적인 존재로 격상시킨 대신, 우리를 둘러싼 다른 모든 생명들의 영혼을 박탈하고 그들을 단순한 ‘자원’이나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슬픔을 온전히 슬퍼하지 못하고, ‘고작 개 한 마리’라며 스스로를 검열하는 이유는,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거대하고 폭력적인 세계관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심장은, 당신의 온몸은, 데카르트의 철학이 틀렸다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기억합니다. 당신이 힘들 때, 말없이 당신의 무릎에 고개를 기대던 그 녀석의 따뜻한 체온을. 당신이 기쁠 때, 덩달아 꼬리를 치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던 그 순수한 생명력을. 당신이 슬픈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 때, 걱정스럽게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던 그 깊고 맑은 눈동자를. 그것이 어찌 영혼 없는 기계의 자동반사일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의 십오 년이라는 시간과 경험은, 데카르트의 명석한 이성보다 훨씬 더 깊은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데카르트의 세계관에 반기를 듭니다. 그리고 당신의 슬픔을, 당신의 사랑을 정당화해 줄, 다른 지혜의 목소리를 찾아 헤매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반란은, 현대 철학의 가장 흥미로운 흐름 중 하나인 ‘범심론 (Panpsychism)’과 맞닿아 있습니다. 범심론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정면으로 맞서, ‘의식’ 혹은 ‘마음’이 인간 두뇌의 특별한 산물이 아니라, 우주에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입니다.

이 사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 수많은 철학자들과 신비가들은 이미 세계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와 같은 사상가들은 이를 더욱 정교한 철학 체계로 발전시켰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우주가 고정된 ‘사물’이 아닌,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경험의 파동 (occasions of experience)’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바위 한 조각에도 아주 미미하고 원초적인 수준의 ‘경험’이 있으며,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 올라올수록 그 경험의 복잡성과 강도가 증대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늙은 개는 영혼 없는 기계가 아니라, 당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고 경험하는, 고유하고 복잡한 ‘경험의 주체’였습니다. 당신과 그 녀석의 관계는, 인간이라는 경험의 흐름과, 개라는 경험의 흐름이, 지난 십오 년간 서로를 깊이 존중하며 함께 흘러온 아름다운 강이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인류의 더 오래된 지혜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 피타고라스 (Pythagoras, c. 570–c. 495 BC)와 그의 학파는, 영혼이 불멸하며, 죽음 이후에 다른 육체로, 심지어는 동물의 몸으로도 다시 태어난다는 ‘영혼 윤회 (Metempsychosis)’를 가르쳤습니다. 이들에게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의 거대한 영적인 순환 시스템에 참여하는 동등한 여행자였습니다. 이 가르침은 물론,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 (Reincarnation)’ 사상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당신의 개는 그저 ‘한 마리의 개’로서의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까마득한 시간 속에서 이어져 온 어느 영혼의 여정 속에서, 당신과 깊은 ‘인연 (Karma)’으로 만나, ‘개’라는 모습으로 자신의 과업을 다하고, 이제 또 다른 여정을 떠난 것입니다. 당신의 슬픔은, 한 생명의 완전한 소멸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한 위대한 여행자와의 애틋한 작별 인사가 됩니다.

당신은 이제 당신의 슬픔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슬픔은, 당신이 이 세계의 진실을, 즉 모든 생명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룩한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맑고 투명한 렌즈가 되어줍니다. 당신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데카르트의 차가운 이성에 맞서, 모든 생명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한 위대한 성인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바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t. Francis of Assisi, 1181/1182–1226)입니다.

프란체스코는 새들에게 설교하고, 늑대를 ‘형제’라 불렀으며, 태양과 달, 그리고 물과 불까지도 자신의 형제자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 속에서 그것들을 만드신 창조주의 신성한 흔적, 즉 ‘이마고 데이 (Imago Dei)’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에게 동물은 이용해야 할 사물이 아니라, 함께 신을 찬미해야 할 동등한 동료 피조물이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늙은 개에게 베풀었던 사랑은, 바로 이 프란체스코적인 사랑의 작은 실천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녀석의 충직한 눈동자 속에서, 말을 넘어선 순수한 영혼의 빛을, 신성의 희미한 그림자를 보았던 것입니다.

오후가 되고, 당신은 텅 빈 집을 나와, 그 녀석과 함께 매일 산책하던 공원으로 향합니다. 모든 풍경이 그대로이지만, 모든 풍경이 다릅니다. 당신의 곁에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그 녀석의 부재가, 모든 풍경 위에 옅은 슬픔의 막을 씌운 것 같습니다.

당신은 벤치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반려동물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봅니다. 예전 같았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그 풍경이, 이제는 당신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당신은 그들 모두와, 그리고 그들의 동물들과, 보이지 않는 깊은 유대감을 느낍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한 마리의 개’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을 당신에게 가르쳐준, 당신 인생의 가장 위대한 스승 중 하나였다는 것을.


그 녀석은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습니까. 그는 당신에게, 어떤 계산도, 어떤 조건도 없는, 순수한 현재를 사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어제를 후회하거나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산책과, 당신의 손길과, 간식 하나에 온 존재를 다해 기뻐했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복잡한 언어 없이도, 존재와 존재가 얼마나 깊이 교감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당신이 사랑했던 것은 단순히 털과 뼈로 이루어진 그 녀석의 몸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이 사랑했던 것은, 그 몸 안에 깃들어 있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생명력 그 자체였습니다. 그 몸이라는 껍데기는 이제 사라졌지만, 당신과 교감했던 그 따뜻한 존재감, 그리고 당신이 그에게 받았던 조건 없는 사랑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이제 당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내려, 당신의 남은 삶을 비추는 영원한 등불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슬픔은 더 이상 당신을 주저앉히는 무거운 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남은 삶을 비추는, 부드럽고 따뜻한 달빛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집으로 향합니다. 당신의 곁은 비어 있지만, 당신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십오 년의 시간을 함께 걸어준, 충직하고 사랑스러운 친구가, 이제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당신의 영혼과 영원히 함께 걷고 있습니다.









23장: 헤어진 연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


늦은 밤, 당신은 텅 빈 자취방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당신은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들어, 의미 없는 소셜 미디어의 강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냅니다. 하루의 끝, 이 작은 사각형의 빛은 당신에게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점인 동시에, 당신의 고독을 더욱 깊게 만드는 거대한 심연입니다. 당신은 특별히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잠들기 전까지의 공허한 시간을, 타인의 삶이라는 반짝이는 이미지들로 채우며 견뎌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 당신의 손가락이, 돌처럼 굳어버립니다.


당신은 당신과 헤어진 지 반년쯤 지난 옛 연인의 소식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당신과 그 사람의 공통된 친구가 올린 한 장의 사진이었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모인 술자리 사진. 그 속에서, 당신의 옛 연인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을 때보다, 어쩌면 당신이 기억하는 그 어떤 순간보다도 더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다정하게 기대어, 그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당신이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 순간, 당신의 세상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집니다. 당신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만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몸은 차가워지고,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당신은 이성적으로,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관계가 끝났고, 그 사람 또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온몸을 꿰뚫는 이 감각은, 이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날것 그대로의 원시적인 고통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당신의 자리를 빼앗은 낯선 사람에 대한 지독한 질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은 모두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나만 홀로 불행 속에 남겨졌다는 처절한 패배감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느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깊은 자기혐오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 모든 감정들이 하나의 거대한 독(毒)이 되어 당신의 영혼 속으로 퍼져나갑니다. ‘어떻게 나 없이 행복할 수 있지?’라는 이기적이고 유치한 질문이, 당신의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고 당신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스마트폰을 던져버리지만, 그 이미지는 당신의 망막에, 당신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고통의 원인이, 단지 ‘한 장의 사진’이라는 외부의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대 로마의 노예 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 (Epictetus)는, 당신에게 다른 진실을 말해줄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스토아 철학 (Stoicism)의 핵심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데 있습니다. 당신의 옛 연인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행복을 느끼는 것은, 당신이 결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영역입니다. 당신의 고통은 그 ‘사건’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고통은 그 사건에 대해 당신이 내린 ‘판단’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당신은 ‘이것은 끔찍한 일이다’라고 판단합니다. 당신은 ‘이것은 나에 대한 배신이다’라고 판단합니다. 당신은 ‘이것은 나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판단합니다. 바로 이 무의식적인 판단들이, 지금 당신의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진정한 평온 (ataraxia)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에게, 이 냉철한 지혜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고 압도적이어서, 그 아픔을 단순히 ‘잘못된 판단’으로 치부할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 (René Girard, 1923-2015)는 인간의 욕망이 본질적으로 ‘모방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보고, 그 대상을 따라 욕망한다는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옛 연인, 그리고 그의 새로운 연인. 이 세 사람은 지금 지라르가 말한 ‘욕망의 삼각형 (mimetic triangle)’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신이 옛 연인을 다시 그토록 강렬하게 원하는 이유는, 단지 그를 잃어버렸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당신의 ‘경쟁자’인 새로운 연인이, 그를 욕망하고 그와의 행복을 전시함으로써, 당신에게 그가 얼마나 ‘욕망할 만한 대상’인지를 다시 한번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고통은 단순한 상실감이 아니라, 이 모방과 경쟁의 역학 속에서 증폭된, 형이상학적인 질투와 패배감입니다.


당신은 이 고통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당신은 그를 잊으려 애쓰고, 그의 소셜 미디어를 차단하고, 친구들에게 그의 험담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발버둥 칠수록, 당신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증오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의 집착일 뿐, 당신을 결코 그에게서 자유롭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바로 그 절망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당신은 전혀 다른 길의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상식에 어긋나는 불가능해 보이는 길입니다. 그것은 ‘그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지혜가 제시하는 가장 위대하고도 어려운 수행법의 시작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향해 조건 없는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사무량심, 四無量心)을 이야기합니다. 이 마음들은 본래 우리 안에 갖추어져 있으나, 이기심과 무지로 인해 가려져 있다고 합니다. 수행을 통해 그 마음들을 회복할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중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자애 (Mettā, 멧타)’와 ‘함께 기뻐함 (Muditā, 무디타)’의 수행입니다.

자애 (Mettā)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어떤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 꾸준한 연습을 통해 계발하는 의지적인 태도입니다. 불교의 스승들은 이 수행이 자기 자신을 향한 자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먼저 스스로에게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하고 기원합니다.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 보통의 사람,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미워하는 원수에 이르기까지, 그 자애의 마음을 점차적으로 넓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수행은 함께 기뻐함 (Muditā)입니다. 무디타는 타인의 행복과 성공을, 마치 나의 행복과 성공인 것처럼,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본능인 질투와 시기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기에, ‘신들의 마음’이라고도 불립니다. 당신이 지금, 당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옛 연인의 행복을 보고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에고와의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의미하는, 장엄한 영적 변혁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결심합니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수행을, 이 터무니없는 도전을 시작해보기로. 당신은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당신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한 의지를 담아, 마음속으로 되뇌기 시작합니다.

“네가 행복하기를. 네가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너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네가 자유로워지기를.”

처음에는 그 말들이 공허하게 맴돕니다. 당신의 혀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뻣뻣하고, 당신의 마음은 그 말들을 격렬하게 거부합니다. 당신의 상처받은 에고가 “어째서, 그를 위하지?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한 사람인데?”라며 비명을 지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멈추지 않습니다. 당신은 기계처럼, 주문처럼, 그 문장을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당신의 마음속에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의 ‘행복한 모습’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가 겪었을, 그리고 겪고 있을 ‘고통’을 떠올립니다. 당신과 함께 있을 때 그가 느꼈을 답답함, 그가 홀로 감내해야 했을 불안감, 그리고 그 또한 당신처럼 사랑받고 싶고 행복하고 싶어 하는, 연약한 하나의 존재임을 생각합니다.


당신의 기도는 이제 달라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의무적인 문장의 반복이 아니라, 그의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 즉 카루나 (Karunā)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마음이 그의 고통과 연결되는 바로 그 순간, 기적처럼, 그의 행복을 향한 진심 어린 바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그가 행복해질 때, 그의 내면을 잠식하던 고통과 불안이 사라질 때, 비로소 그가 과거에 당신에게 주었던 상처 또한 진정으로 아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행복은 더 이상 당신의 불행이 아니라, 당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 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당신은 봅니다.


당신은 눈을 뜹니다. 당신을 짓누르던 지독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고통의 색깔이 변해 있습니다. 이전의 그것이 뜨겁고 날카로운 증오와 질투의 고통이었다면, 지금의 그것은 모든 것을 조용히 끌어안는, 넓고 서글픈 연민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경험한 것은, 당신의 옛 연인과의 관계를 넘어선, 사랑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깊은 깨달음입니다. 당신이 그와 나누었던 사랑은, 서로의 결핍을 채우고 소유하려 했던 이기적인 에로스 (Eros)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지금 막 첫걸음을 뗀 이 새로운 마음은, 상대방의 행복을 나의 행복보다 우선하는, 조건 없는 사랑, 아가페 (Ape)의 희미한 서광입니다. 당신은 이별의 고통이라는 가장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며, 사랑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가장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영적인 연금술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며칠 뒤, 당신은 우연히 길에서, 그와 그의 새로운 연인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당신의 심장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전과 같은 격렬한 고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당신의 마음속에는 아주 작지만 분명한, 따뜻한 감정이 피어오릅니다. 당신은 그들이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아주 잠시, 진심으로 미소 짓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무디타’는 아닐지라도, 당신이 그 끔찍했던 질투의 감옥에서 마침내 걸어 나왔음을 알리는, 당신 영혼의 승전보였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피해 조용히 길을 건넙니다. 당신은 옛사랑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대신, 당신 자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이란, 누군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그를 놓아주는, 가장 위대한 자유의 실천임을 배웠습니다. 당신의 이별은 끝이 아니라, 더 넓고 깊은 사랑을 향한, 당신의 영혼이 마침내 성숙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거룩한 시작이었습니다.









24장: 자식들의 다툼 앞에서 침묵을 선택하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자식들이 모두 모이는 저녁 식사 자리입니다. 당신의 며느리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나르고, 아들은 거실에서 손주들과 장난을 치고 있으며, 딸 가족은 조금 늦는다며 방금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집 안은 곧 북적이게 될 사람들의 온기로 미리부터 훈훈합니다. 당신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이 모든 풍경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당신이 평생에 걸쳐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때로는 애태우며 길러낸 ‘가족’이라는 이름의 숲. 이제 당신은 그 숲의 가장 나이 든 나무가 되어, 가지를 뻗어 그늘을 만들어주는 대신, 그저 묵묵히 서서 숲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윽고 모든 가족이 모이고, 식탁 위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집니다.왁자지껄한 대화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잔 부딪는 소리가 어우러져, 겉보기에는 완벽하게 평화로운 저녁 식사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당신은 압니다. 이 평화의 수면 아래에는, 수십 년 동안 가라앉아 있던 보이지 않는 앙금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날카로운 갈등의 기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의 자식들은 이제 어느덧 중년의 어른들이지만, 당신 앞에만 서면, 그리고 서로의 앞에만 서면, 그들은 어김없이 과거의 상처 입은 아이들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식사가 중반을 넘어설 무렵, 문제의 불씨는 아주 사소한 곳에서 피어오릅니다. 당신의 건강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들은 당신이 얼마 전 다녀온 병원 검진 결과를 걱정하며, 좀 더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딸은, 당신의 뜻을 존중해서, 과도한 치료보다는 편안한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맞섭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위하는 듯 보였던 대화는, 금세 날이 서기 시작합니다. 아들은 딸에게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엄마 모시고 병원 한번 제대로 가본 적도 없으면서”라고 쏘아붙입니다. 딸은 아들에게 “오빠야말로 돈만 보내면 다인 줄 알지? 중요한 건 마음이야, 마음”이라고 받아칩니다. 대화는 순식간에 과거의 묵은 상처들을 들추어내는 싸움으로 번져나갑니다. 누가 더 부모를 생각했는가, 누가 더 많은 희생을 했는가.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식탁 위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습니다. 며느리와 사위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손주들은 겁을 먹은 채 눈만 끔뻑이고 있습니다.


당신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습니다. 당신의 몸속 모든 세포가, 당신의 뇌 속 모든 신경이, 당신에게 비상 신호를 보냅니다. ‘개입해야 한다. 이 싸움을 멈춰야 한다. 당신은 이 가족의 어른이지 않은가. 당신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하고, 잘못을 꾸짖고, 화해를 시켜야만 한다.’ 이것은 당신이 지난 오십 년간, 부모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반복해 온, 거의 본능에 가까운 역할이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그들의 심판관이었고, 해결사였으며,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당신은 마침내, 이 어색하고 고통스러운 침묵을 깨기 위해 입을 엽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미 몇 가지의 그럴듯한 중재안과, 양쪽 모두를 나무라는 공평한 훈계의 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당신은 당신의 입술을 다시 닫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침묵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당신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도,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당신의 내면에서는 여전히 ‘무책임하다’, ‘회피하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아우성치지만, 당신은 그 모든 소음들을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이 드라마의 배우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당신은 그저, 고통스러운 이 풍경을 묵묵히 지켜보는, 한 명의 관객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고대 중국의 현자 노자 (老子)가 그의 저서 『도덕경』을 통해 인류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장 깊은 지혜, ‘무위 (無爲)’의 실천입니다. ‘무위’는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의 인위적인 의지나 계획을 앞세워 세상의 흐름에 억지로 개입하려는 ‘유위 (有爲)’적인 행위를 멈추고, 세상 만물이 가진 본래의 자연스러운 길, 즉 ‘도 (道)’를 따르도록 내버려 두는, 가장 높은 차원의 행위입니다.


노자에 따르면,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존재하는 것조차 모르게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의 자식들을 사랑한다는 명분 아래, 그들의 삶에 너무나 많은 ‘유위’적인 개입을 해왔습니다. 당신의 조언과, 당신의 걱정과, 당신의 중재는, 때로는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할 기회를 빼앗는 걸림돌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침묵은, 이제 그들이 스스로의 길을 찾고, 그들 자신의 ‘도’를 따를 수 있도록,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노자는 또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지자불언, 언자불지)”고 가르쳤습니다. 당신은 이 싸움의 정답을 알지 못합니다.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그른지를 판단할 자격이 당신에게는 없습니다. 당신의 섣부른 말 한마디는, 이 복잡하게 얽힌 갈등의 실타래를 더욱 엉망으로 만들 뿐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침묵은 무지(無知)의 표현이 아니라, 당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는, 가장 깊은 지혜의 표현입니다.


당신의 침묵이 길어지자, 자식들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싸움을 멈추고, 당신의 눈치를 봅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당신이 나서서 이 끔찍한 긴장 상태를 해결해주기를, 누구의 편을 들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침묵은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그들을 더욱 불편하게 만듭니다.


당신은 그 불편함의 한가운데에, 그 어떤 해답도 없이, 그저 고요히 앉아 있습니다. 이것은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 (John Keats, 1795-1821)가 위대한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말했던 ‘소극적 수용 능력 (Negative Capability)’과도 같습니다. 키츠에 따르면, 이 능력은 “불확실함과, 신비와, 의심 속에서, 성급하게 사실이나 이성을 갈구하지 않고도 머무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당신의 자식들은 지금, 이 갈등의 상황을 명확한 ‘사실’(누가 잘못했는가)과 ‘이성’(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으로 서둘러 결론 내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압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수학 공식처럼 명확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안에는 수십 년간 쌓여온 복잡한 감정과,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서로 다른 진실들이 안개처럼 뒤섞여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침묵은, 바로 그 불확실하고 신비로운 안개를, 억지로 걷어내려 하지 않고, 그 안개 자체를 온전히 견뎌내고 끌어안으려는, 위대한 영혼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당신의 태도는, 현대 심리학의 ‘가족 체계 이론 (Family Systems Theory)’의 관점에서도 깊은 통찰을 줍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머리 보웬 (Murray Bowen, 1913-1990)은, 가족 내 두 사람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제3의 인물을 끌어들이는 ‘삼각관계 (triangulation)’가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신의 자식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갈등이라는 불안정한 관계를, 당신을 끌어들여 ‘어머니-아들-딸’이라는 삼각형을 만듦으로써 안정시켜 왔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그 삼각형의 꼭짓점에서, 그들의 불안을 흡수하고, 그들의 관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침묵은, 바로 이 낡고 병적인 삼각관계를 깨뜨리는, 용기 있는 선언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들의 불안을 대신 짊어지는 역할을 거부합니다. 당신은 그들이 당신을 방패 삼아 서로에게 상처 입히는 유치한 게임에 참여하기를 거부합니다. 당신의 침묵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너희 두 사람의 문제다. 이제는 어른인 너희들이, 나 없이, 직접 서로를 마주하고 해결해야만 한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그들의 성장을 믿는 가장 깊은 신뢰의 표현입니다.

결국, 식탁 위의 싸움은 어떤 극적인 화해 없이,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 속에서 끝이 납니다. 자식들은 서둘러 짐을 챙겨, 썰물처럼 당신의 집을 빠져나갑니다. 겉으로 보기에, 오늘의 가족 모임은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당신은 텅 빈 거실에 홀로 남아, 전쟁터처럼 어지러워진 식탁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실패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마음속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고요하고도 단단한 평화가 깃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자식들의 고통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더 이상 그 고통이 당신의 책임이라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명백한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당신이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은, 정답을 알려주는 지혜로운 조언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정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 고통스러운 성장을, 그저 믿고 지켜봐 주는 것임을.


당신의 침묵은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침묵은, 당신이 평생에 걸쳐 실천해 온 ‘유위’의 사랑을 내려놓고, 마침내 도달한 ‘무위’의 사랑, 가장 깊고 어려운 사랑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은 오늘,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장 소란스러운 풍경 속에서, 가장 위대한 침묵의 힘을, 그리고 그 침묵 속에 깃든 진정한 연결의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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