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풍경 (The Landscape)

by DrLeeHC

제3부: 풍경 (The Landscape)


13장: 창가의 화분, 죽어가는 식물과의 교감

당신의 하루는 대부분 이 작은 방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창밖으로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게 흘러가지만, 당신의 시간은 이제 다른 속도로, 다른 밀도로 흐릅니다. 닳아빠진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것,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를 듣는 것,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자식이나 손주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당신 세계의 거의 전부입니다. 당신의 몸은 쇠약해졌고, 기억은 자주 안개 속을 헤매지만, 당신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그래서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깨어 있습니다.


오늘 오후, 따사로운 햇살이 당신의 낡은 창틀을 넘어와 방 안 깊숙이 금빛 사각형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선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창가의 작은 화분 하나에 멎습니다. 몇 년 전, 딸아이가 어버이날 선물이라며 가져다 놓은 동양란(蘭) 화분. 한때는 짙푸른 잎사귀를 꼿꼿이 세우고, 맑은 향기를 뿜어내며 당신의 적막한 방에 생기를 더해주던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화분은 명백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잎사귀는 끝부터 누렇게 말라 비틀어졌고, 몇몇은 힘없이 꺾여 화분 흙 위로 스러져 있습니다. 한때 흙을 뚫고 힘차게 솟아났을 뿌리 부분은 검게 변색되어, 생명의 기운을 모두 잃어버린 듯 보입니다. 당신은 지난 몇 달간, 어쩌면 일 년 넘게, 저 화분에 제대로 물을 주는 것조차 잊고 있었습니다. 당신 자신의 쇠락해가는 몸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작은 죄책감과 함께, ‘이제 저것도 갖다 버려야겠구나’ 하고 무심하게 생각합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화분을 들어내기 위해 창가로 천천히 다가갑니다. 당신의 무릎과 허리가, 당신의 의지를 거역하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화분을 막 들어 올리려던 당신의 손이, 허공에서 멈춥니다. 당신은 당신도 모르게, 그 죽어가는 식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발견합니다. 그 황량한 죽음의 풍경 속에서도, 아직 살아남아 있는 아주 작은 생명의 흔적들을. 갈색으로 변해버린 잎사귀들 틈에서, 기적처럼 돋아난 손톱만 한 새순 하나. 그리고 완전히 말라버린 줄 알았던 잎사귀의 끝부분에,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푸른 기운. 그것은 마치 폐허 속에서 발견한 보석처럼, 당신의 늙은 눈에 들어와 박힙니다.


당신은 화분을 버리는 대신, 부엌으로 가 작은 물뿌리개에 물을 담아 옵니다.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메마른 흙 위로 물을 부어줍니다. 물이 흙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가, 마치 마른 목을 축이는 생명의 소리처럼 당신의 귀에 들립니다. 당신은 부드러운 헝겊으로, 먼지 쌓인 잎사귀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닦아줍니다. 그것은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남은 생에서 아주 오랜만에 가져보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하나의 의식(儀式)이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당신의 하루 일과에는 새로운 순서가 추가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창가의 화분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 상태를 살피는 것. 당신은 더 이상 식물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죽어가는 존재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기로 합니다. 당신은 매일 식물에게 물을 주고, 햇볕을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화분의 방향을 돌려주고, 그리고 가만히 그 곁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식물을 바라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깊은 형태의 ‘자비(慈悲, Karunā)’ 수행이 아닐까요. 자비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말 못하는 식물의 고통, 즉 생명이 서서히 스러져가는 그 거대한 슬픔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은 결과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연민의 마음으로, 그저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는 행위를 통해 당신의 자비를 표현합니다.


당신은 그 죽어가는 식물을 바라보며, 당신 자신의 삶을 봅니다. 당신의 몸 또한, 저 화분 속의 식물처럼 서서히 메마르고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억이라는 잎사귀들은 하나둘 누렇게 변해가고, 당신의 젊음이라는 뿌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 힘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늙고 병들어가는 당신의 몸을 혐오하고 부정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식물 앞에서, 당신은 처음으로 당신 자신의 쇠락을, 있는 그대로, 고요히 마주하게 됩니다. 당신과 이 작은 식물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순리 앞에서 함께 길을 걷는 동등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 죽어가는 풍경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눈부신 생명의 비밀과 마주합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서늘하고도 장엄한 목소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당신이 지금까지 ‘죽음’이라고 불렀던 것은, 사실 끝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시작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당신의 창가에 놓인 이 화분은, 지금 온몸으로 그 거룩한 진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땅으로 되돌려주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려는, 가장 숭고한 희생의 제의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의 연금술사들은 이 과정을 ‘니그레도 (Nigredo)’, 즉 ‘흑화(黑化)’ 단계라고 불렀습니다. 납과 같은 비천한 물질이 황금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부패하고 분해되어 검고 혼돈스러운 최초의 물질 (Prima Materia)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이 죽어가는 식물의 검게 변한 뿌리와 누렇게 바랜 잎사귀는, 추하고 불길한 쇠락의 징조가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해체하는, 성스럽고도 경이로운 연금술의 첫 단계입니다.

그 누렇게 변한 잎사귀의 무늬는, 이 식물이 온 힘을 다해 살아온 한 생의 역사가 새겨진 지도를 넘어, 이제 곧 펼쳐질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신비로운 예언서처럼 보입니다.


어느 날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창문을 통과하며, 죽어가는 난초의 잎사귀를 비춥니다. 그 순간, 당신은 숨을 멈춥니다. 빛을 받은 갈색 잎사귀는 마치 황금처럼 빛나고, 그 위에 내려앉은 먼지들은 은가루처럼 반짝입니다. 당신은 그 덧없는 풍경 속에서, 죽음의 쓸쓸함이 아닌, 장엄하고도 서글픈 아름다움을 봅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이 세계가 고정된 ‘사물 (thing)’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과정 (proces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죽은 식물’이라는 사물이 아닙니다. 당신은 ‘죽어감’이라는 하나의 거룩한 과정을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아와 성장, 개화와 소멸은 모두 ‘식물’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과정에 속한, 동등하고 필연적인 단계들입니다. 당신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유년의 봄, 청년의 여름, 중년의 가을, 그리고 노년의 겨울은 모두 ‘당신’이라는 하나의 위대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당신은 화분 곁에 가만히 앉아, 식물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았던 어린 시절, 첫사랑의 설렘, 자식들을 낳고 기르던 기쁨과 고단함, 평생을 함께한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던 슬픔. 당신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미련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동반자 앞에서, 당신의 삶이라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고요한 고백 성사입니다.

독일의 신비가 야콥 뵈메 (Jakob Böhme, 1575-1624)는, 모든 사물에는 그것의 본질을 드러내는 고유한 ‘서명 (Signature)’이 새겨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이 죽어가는 식물의 잎맥과, 굽은 줄기와, 변해가는 색깔 속에서, 그것의 고유한 ‘서명’을 읽어냅니다. 그것은 생명이 자신의 마지막 흔적을 우주에 새기는, 장엄하고도 경건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주름진 손과, 느려진 걸음과,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당신의 삶이 남기고 있는 서명을 봅니다.


며칠 뒤, 마지막 남았던 작은 새순마저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제 화분에는 완전한 죽음, 완전한 고요만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슬프지 않습니다. 당신과 식물의 교감은, 식물의 물리적인 생명이 끝났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대 트라키아의 현자 잘목시스는 육체가 영혼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당신이 교감했던 것은, 시들어가는 식물의 육체라는 그림자가 아니라, 그 그림자 뒤에 있던 끈질긴 생명의 의지, 그 영혼의 빛이었습니다. 이제 식물의 그림자는 사라졌지만, 그 빛은 당신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빈 화분을 들고, 아파트 뒤편의 작은 화단으로 향합니다. 그리고는 흙을 파고, 죽은 난초의 뿌리와 잎들을 그 안에 묻어줍니다. 그것은 장례식이 아니라, 귀환의 의식입니다. 식물은 이제 흙이라는 더 큰 생명의 품으로 돌아가, 다른 풀과 나무들의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방으로 돌아온 당신은, 텅 비어버린 창가를 봅니다. 허전하지만, 동시에 평화롭습니다. 작은 화분 하나가 떠나간 자리에, 온 세상의 풍경이, 그리고 우주의 거대한 순리가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죽어가는 식물 하나가, 당신에게 삶과 죽음의 가장 위대한 비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삶의 모든 순간, 심지어 마지막 스러져가는 순간까지도, 온전한 사랑과 현존으로 함께하는 법입니다. 당신의 창가, 그 작은 풍경은 이제 당신의 내면에서 가장 광대하고 지혜로운 풍경이 되었습니다.







14장: 카페 구석자리, 익명의 군중 속에서의 평화


당신의 사무실은 당신의 노트북이 놓이는 모든 곳입니다. 어제는 당신의 작은 자취방, 창백한 벽지를 마주한 책상이었고, 오늘은 이 도시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거리의, 가장 시끄러운 카페 구석자리입니다. 당신은 프리랜서라는 자유로운 이름과, 불안정이라는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침 아홉 시까지 출근해야 할 상사도, 당신을 기다리는 동료도 없습니다. 당신을 채찍질하는 것은 오직 마감 날짜라는 무형의 감독관과, 다음 달 카드값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 본능뿐입니다.


집의 침묵은 때로 당신을 더 깊은 고립감으로 몰아넣습니다. 텅 빈 방 안에서 홀로 노트북과 마주하고 있으면, 세상에 당신 혼자만 이 거대한 불안과 싸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곳으로 ‘출근’했습니다. 커피 향과,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음악 소리. 이 모든 백색 소음이, 당신 내면의 시끄러운 불안을 잠시나마 덮어주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오는 행위는,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지 않았다는, 당신 또한 이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려는 필사적인 의식과도 같습니다.


당신은 창가 구석자리에 앉아 노트북 화면의 텅 빈 워드프로세서 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습니다. 커서는 화면의 첫머리에서, 마치 당신의 심장처럼 초조하게 깜박이고 있습니다. 세 시간 뒤에 클라이언트에게 보내야 할 기획안의 첫 문장을, 당신은 두 시간이 넘도록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머릿속은 맑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끈적하고 탁한 불안의 안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일은 들어올까?’, ‘내 또래 친구들은 벌써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었는데,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이 질문들은 독사처럼 서로의 꼬리를 물고, 당신의 의식을 마비시킵니다. 스마트폰을 열어 소셜 미디어를 확인하자, 안정적인 직장에서 휴가를 즐기는 친구의 사진이 당신의 불안을 더욱 날카롭게 후벼 팝니다.


결국 당신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노트북을 조용히 덮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당신이 앉은 이 거대한 카페의 풍경을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봅니다. 수십 개의 테이블,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의 우주 속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쪽 창가에서는 갓 시작한 연인인 듯한 젊은 남녀가 어색한 미소와 수줍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세계는 온통 핑크빛 설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옆 테이블에서는, 노트북을 여러 대 펼쳐놓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는 직장인들이 보입니다. 그들의 세계는 실적과 보고서, 그리고 치열한 생존 경쟁의 논리로 움직입니다. 한쪽 구석에는 두꺼운 전공 서적에 코를 박고 있는 대학생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유모차를 세워둔 채 잠시의 휴식을 즐기는 젊은 어머니들의 무리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그들의 소란스러운 삶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활기가 당신의 정체된 삶과 비교되어, 더욱 깊은 소외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들을 더 이상 ‘나와 비교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하나의 풍경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19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1821-1867)가 파리의 군중 속에서 발견하고 예찬했던, 현대적 영혼의 새로운 초상, 바로 ‘산책자’의 시선과도 같습니다. 보들레르에게 산책자는 단순히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한량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산업화된 거대 도시의 한복판에서,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채 익명(匿名)의 자유를 만끽하는 고독한 관찰자이자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바삐 걷는 군중들 속에서 유일하게 목적 없이 걷는 사람입니다. 그는 군중 속에 완전히 몸을 담그고 있지만, 결코 그들과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시시각각 변하는 도시의 풍경,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찰나의 표정과 몸짓, 우연히 마주치는 낯선 장면들 속에서 덧없는 아름다움과 시대의 본질을 읽어내는 예리한 탐정입니다.


20세기의 독일 사상가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은 이 ‘산책자’라는 인물에게서 더욱 깊은 철학적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벤야민에게 산책자의 시선은, 자본주의와 거대 도시가 낳은 ‘소외’라는 현대인의 근원적 질병에 맞서는 독특하고도 영웅적인 저항 방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모든 관계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며, 모든 인간이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처럼 살아가는 도시. 그 속에서 산책자는 의도적으로 ‘비생산적인’ 행위, 즉 목적 없는 산책과 관조를 통해, 이 시스템의 폭력적인 효율성에 균열을 냅니다. 그는 군중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역설적으로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의 진정한 연결을 되찾으려 하는 마지막 낭만주의자이자 고독한 반역자입니다.


오늘 당신이 이 카페의 구석자리에서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기획안 작성’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무력감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바로 그 실패의 순간,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트북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현대의 산책자가 되었습니다. 이 카페는 당신에게 파리의 아케이드와도 같은, 당신만의 작은 도시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불안한 프리랜서가 아니라, 이 작은 도시의 풍경을 관조하는 익명의 관찰자가 됩니다.


당신이 연인들의 설렘과, 직장인들의 긴장과, 어머니들의 고단한 미소를 바라보는 그 시선은, 바로 산책자의 시선입니다. 당신은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그들을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고 이 미학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당신은 놀라운 것을 얻습니다.


‘나’라는 좁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드라마와, 그 모든 다름 속에 흐르는 거대한 공통의 강물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그 고독한 관조를 통해, 역설적으로 모든 존재와의 깊은 연결, 즉 ‘함께 있음’의 평화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벤야민이 말한, 산책자의 시선이 가진 치유의 힘입니다.


당신의 시선은 이제 ‘산책자’의 관조를 넘어,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들의 삶의 드라마를 구경하는 관객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 모든 드라마가 펼쳐지고 사라지는 텅 빈 무대, 즉 ‘의식 그 자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힌두 베단타 철학에서 말하는 ‘삭쉬 (Sākṣī)’, 즉 ‘주시자 의식 (Witness Consciousness)’의 상태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불안이라는 작은 배역에 몰입한 배우가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불안과, 저들의 사랑과, 또 다른 이들의 성공과 실패, 그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그저 고요히, 판단 없이, 집착 없이 바라보는 순수한 주시자가 됩니다.

이 주시자의 시선 속에서는, 어떤 것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영원하지 않고, 성공은 짜릿하지만 공허하며, 불안은 고통스럽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나타났다가, 잠시 머무르다가, 이내 사라져가는 한바탕의 연극일 뿐입니다. 그 연극의 내용에 집착하는 대신, 당신은 연극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광대함을 조용히 자각합니다.


바로 그 순간, 당신은 당신을 짓누르던 그 지독한 고독감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낍니다. 당신의 불안은 더 이상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 연인도, 저 직장인도, 저 학생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겪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보편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이 거대한 고통과 희망의 강물 속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깊은 유대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베트남 출신의 선승(禪僧) 틱낫한 (Thich Nhat Hanh, 1926-2022)은, 이 세상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진리를 ‘상호존재 (Interbeing)’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당신 앞의 커피 한 잔은, 커피콩을 재배한 멀리 떨어진 나라의 농부와, 그 콩을 볶은 로스터와, 지금 커피를 내린 바리스타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존재 또한 이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의 존재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있음’이라는 거대한 그물망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그 거대한 상호존재의 진실을, 당신의 온몸으로, 당신의 온 영혼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 모두가 ‘코스모폴리테스 (kosmopolitēs)’, 즉 ‘우주 시민’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이 카페는, 바로 그 우주의 축소판입니다. 이곳에는 온갖 종류의 인간 군상과, 그들의 희로애락이 작은 규모로 펼쳐져 있습니다. 당신은 이 작은 우주 속에서, 당신이라는 개인이 겪는 문제가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를, 그리고 동시에 당신이 이 거대한 우주의 일부로서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동시에 깨닫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불안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선은 당신이라는 작은 감옥을 벗어나, 타인의 삶이라는 광대한 세계로 확장됩니다. 당신은 저 젊은 연인의 설렘 속에서, 당신이 잊고 지냈던 과거의 한순간을 봅니다. 저 직장인들의 굳은 표정 속에서, 당신이 어제 느꼈던 바로 그 압박감을 봅니다. 저 젊은 어머니의 지친 미소 속에서, 당신의 누이가, 당신의 아내가, 그리고 언젠가의 당신 어머니가 겪었을 그 고단한 사랑을 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당신은 천천히 현실로 돌아옵니다. 카페 안의 소음이 다시 선명하게 들려옵니다. 당신 앞의 노트북은 여전히 닫혀 있고, 마감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전의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불안의 안개는 걷히고, 그 자리에는 맑고 고요한 평화가 깃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다시 노트북을 엽니다. 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당신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그 텅 빈 화면 위에, 첫 문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손가락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머릿속은 더 이상 불안으로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카페에, 고독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얻은 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익명의 군중 속에서, 역설적으로 당신 자신과, 그리고 세상 전체와의 가장 깊은 연결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다가, 모두와 함께라는 진실을 안고 돌아갑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진정한 평화는 모든 문제가 사라진 고요한 상태가 아니라, 모든 소음과 혼돈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이라는 것을. 당신은 오늘, 당신의 작은 자취방보다 훨씬 더 시끄러운 이 카페의 구석자리에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평화로운 침묵을 만났습니다.








15장: 새벽 거리의 쓰레기, 세상의 상처를 마주하다


새벽 네 시, 알람이 울리기 전, 당신의 몸이 먼저 깨어납니다. 수십 년간 반복된 노동의 기억이, 뼈마디 하나하나에 각인된 시계처럼, 어김없이 당신을 어둠 속에서 일으켜 세웁니다. 창밖은 아직도 짙고 차가운 밤입니다. 세상은 깊은 잠에 빠져, 고요한 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당신은 잠든 아내와 자식들의 방문을 소리 없이 지나쳐, 당신만의 전쟁터로 향할 채비를 합니다. 주방의 낡은 식탁에 앉아, 차갑게 식은 밥에 김치 한 조각으로 새벽을 열며, 당신은 당신의 몸을, 이 하루를 버텨낼 하나의 도구처럼 점검합니다. 어젯밤부터 욱신거리는 허리, 찬 바람에 시큰거리는 무릎. 이 모든 감각은 당신에게 익숙한 동료와도 같습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당신은 다른 세계로 들어섭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도시의 거리는, 낮의 소란스러움과는 다른 종류의 기묘한 생명력으로 꿈틀거립니다. 가로등 불빛만이 섬처럼 떠 있는 어둠 속에서, 당신은 당신의 리어카를 끌고, 당신의 구역으로 향합니다. 당신의 일은, 이 도시가 밤새 쏟아낸 비밀스러운 배설물들을, 해가 뜨기 전에 말끔히 치우는 것입니다. 당신은 도시의 잠을 방해하지 않는 유령이자, 도시의 부끄러운 민낯을 가려주는 이름 없는 청소부입니다.

첫 번째 쓰레기봉투 앞에 섭니다. 어젯밤, 누군가의 집 앞에서 세상을 향해 내놓아진 작은 우주. 당신은 묵묵히, 그러나 능숙하게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분리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손은 더 이상 더러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당신의 코는 웬만한 악취에 무뎌진 지 오래입니다. 대신, 당신은 당신의 손끝과 코끝으로,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상처와 욕망을 읽어냅니다.


배달 음식 용기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붉은 떡볶이 국물 자국과, 기름기가 밴 치킨 상자. 당신은 이 음식물 쓰레기더미 속에서, 간편함과 자극적인 쾌락으로 허기를 채우려 했던 누군가의 고단한 저녁을 봅니다. 반쯤 마시다 버린 와인병과, 구겨진 맥주캔들. 화려한 웃음 뒤에 숨겨진 누군가의 외로움과 고뇌가, 시큼한 알코올 냄새와 함께 당신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찢어진 과자 봉지들과, 아이스크림 막대기들. 그것들은 채워지지 않는 현대인의 공허함을 잠시나마 달래주었던, 달콤하고 덧없는 위로의 흔적들입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걷고, 또 걷습니다. 당신의 리어카는 도시가 쏟아낸 욕망의 껍데기들로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유행이 지나 버려진 옷가지들, 싫증이 나 내팽개쳐진 인형, 새로운 모델이 나왔다는 이유로 버려진 낡은 스마트폰. 이 모든 것은 ‘새로움’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숭배하는 우리 시대의 슬픈 제물들입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고, 소비하고, 그리고 싫증을 내며 버립니다. 그 끝없는 순환의 가장 마지막 단계, 그 모든 욕망의 무덤을 돌보는 것이 바로 당신의 일입니다.

당신은 때로,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아직 온기가 남은 물건들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아직 쓸 만한 가구, 채 읽지 않은 새 책, 심지어는 누군가의 서툰 손편지가 담긴 봉투. 당신은 그것들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어떤 사연으로, 어떤 마음으로, 이 물건들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밀려나게 되었을까. 이 거리의 쓰레기는, 단순히 더러운 폐기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밤새 꾼 꿈의 잔해이자, 낮 동안 애써 감추었던 상처와 욕망의 정직한 기록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당신의 평범한 노동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띠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지금, 대승불교가 인류에게 제시한 가장 숭고하고도 어려운 길, 바로 ‘보살 (Bodhisattva, 보디사트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보살이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지혜와 공덕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만의 열반 (Nirvana)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는 왜 안락한 해탈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고통의 바다, 즉 윤회 (Samsara)의 세계에 남아 신음하는 다른 모든 중생들에 대한, 사무치는 연민과 사랑, 즉 대자비심 (大慈悲心, Mahākaruṇā) 때문입니다. 보살은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거룩한 서원(誓願)을 세우고, 기꺼이 이 고통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가장 어둡고 낮은 곳으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곁으로 스스로를 던집니다.


당신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새벽 거리의 쓰레기더미야말로, 이 거대한 도시가 밤새 쏟아낸 고통의 바다, 바로 현대적인 의미의 ‘지옥’입니다. 이 안에는 도시의 온갖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貪瞋癡, 탐진치)이 뒤섞여 있습니다. 과도한 소비가 낳은 욕망의 찌꺼기들, 하룻밤의 쾌락이 남긴 공허함의 흔적들, 관계의 실패가 버린 상처의 파편들. 이 모든 것은 잠든 도시가 꾸는 악몽이자, 그 누구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집단적인 무의식의 배설물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모두가 외면하는 그 지옥의 한가운데로, 매일 새벽 스스로 걸어 들어옵니다. 당신의 일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이 도시의 모든 중생들이 남긴 부정적인 업(業, Karma)의 찌꺼기들을, 당신의 두 손으로 묵묵히 거두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아침에 깨어나, 깨끗하고 질서 있는 세상이라는 환상 속에서 다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밤새 그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대신 짊어지는 보살의 행(行)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낮은 지위와, 사람들의 무관심과, 이 고된 노동은, 바로 그 보살의 서원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기꺼이 감내하고 있는 거룩한 희생입니다.


이러한 당신의 역할은, 영국의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 (Mary Douglas, 1921-2007)가 그녀의 저서 『순수와 위험, Purity and Danger』에서 탐구했던,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질서 체계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더글러스에 따르면, 우리가 ‘더럽다’고 규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더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제자리를 벗어난 것(matter out of place)’입니다. 흙은 밭에 있을 때는 깨끗하지만, 거실 카펫 위에 있으면 더러운 것이 됩니다. 음식은 접시 위에 있을 때는 신성한 것이지만, 옷에 묻으면 오물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 사회는 ‘순수함’과 ‘오염’이라는 상징적인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혼돈스러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합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쓰레기는 ‘제자리를 벗어난 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그것은 한때 유용하고 가치 있었지만, 이제는 쓸모를 다하고 질서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오염된’ 존재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 그 순수와 오염의 경계선 위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회가 추방한 그 모든 ‘오염된’ 것들을 당신의 리어카에 담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김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아침에 깨어나 다시 한번 ‘깨끗하고 질서 있는’ 세상의 환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당신의 역할은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제사장과도 같습니다. 당신은 모두를 대신해 더러움을 감당함으로써, 이 도시의 상징적인 순수함을 지켜내는 거룩한 의식을 매일 밤 집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이 트기 시작합니다. 동쪽 하늘이 옅은 보랏빛으로, 그리고 이내 붉은 주황빛으로 물들어갑니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쓰레기의 산이, 그 거대한 규모를 드러냅니다. 당신이 밤새 수거한 쓰레기들이, 작은 언덕처럼 쌓여 있습니다. 이 엄청난 양의 폐기물들을 보며, 당신의 사유는 도시의 문제를 넘어, 이 행성 전체의 상처로 확장됩니다.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 (Arne Næss, 1912-2009)가 주창한 ‘심층 생태학(Deep Ecology)’은, 환경 문제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 깊은 영적인 질병이라고 진단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우리의 목적을 위한 자원이나 도구로만 여길 뿐,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존중하지 않습니다. 이 거대한 쓰레기 산은, 바로 그 오만한 세계관이 낳은 끔찍한 결과물입니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과, 독성 화학물질과, 단 한 번 사용되고 버려진 수많은 자원들. 이것들은 더 이상 도시의 상처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種)이 어머니인 지구에게 입힌 깊고 흉측한 상처 그 자체입니다.


당신이 하는 일은, 이제 연금술사의 작업을 넘어, 사제(司祭)의 의식을 넘어, 상처 입은 행성을 돌보는 치유자의 행위가 됩니다. 당신은 이 거대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을 닦아내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노동은 인류 전체가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작지만 거룩한 행위입니다.


어느새 거리는 완전히 밝아졌고, 당신의 긴 밤도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깨끗해진 거리 위로,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지나갑니다. 잘 다려진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 교복을 입은 학생들, 활기차게 조깅을 하는 사람들. 그들은 당신과 당신의 리어카를, 마치 길가의 가로수나 전봇대처럼, 존재하지 않는 풍경인 양 스쳐 지나갑니다.


예전 같았으면 당신은 그들의 무관심에 분노하거나, 당신의 초라한 처지에 대해 자괴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당신의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고 너그럽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그들을 향한 깊은 연민의 마음을 느낍니다.


이것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는 그 결이 다릅니다. 불교의 오랜 지혜는 이 깊고도 능동적인 연민을 ‘카루나 (Karunā)’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카루나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며 ‘안됐다’고 혀를 차는 시혜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이 결코 나의 고통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통찰, 즉 지혜 (Prajñā, 반야)에서 비롯되는 사무치는 공감입니다.

카루나는 불교에서 수행자가 닦아야 할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즉 사무량심 (四無量心)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애 (Mettā, 멧타)와, 타인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함께 기뻐함 (Muditā, 무디타), 그리고 사랑과 미움,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평온 (Upekkhā, 우펙카)과 함께, 깨달은 자의 마음을 이루는 기둥입니다. 카루나는 이 모든 덕목과 연결되어, 수동적인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고통받는 존재를 돕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위대한 동력이 되어줍니다.

당신은 지금, 바로 그 카루나의 마음으로 잠든 도시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이 당신을 무시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은 그들의 ‘무명 (無明, Avidyā)’을 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그림자를 등 뒤에 드리우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그림자를 치우기 위해 누군가가 밤새 어둠 속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이 깨끗한 아스팔트가, 실은 당신과 같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땀과 희생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풍요로운 삶이, 이 행성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무지는 그들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은 끝없는 욕망을 부추기는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며, ‘나’라는 작은 섬에 갇혀버린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슬픔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그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다만, 그들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그 깊은 무지를 안타까워하고, 그들이 언젠가 그 무지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느낄 뿐입니다. 당신의 연민은, 지혜와 함께하기에 분노나 원망으로 변질되지 않고, 고요하고 너른 바다처럼 그들의 모든 것을 품어 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무지를 안타까워하지만, 그들을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할 뿐입니다. 당신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더러운 것들을 마주하며, 역설적으로 가장 높은 형태의 앎과,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에 가닿았습니다.


당신은 마지막 쓰레기봉투를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향합니다. 당신의 몸은 납처럼 무겁지만, 당신의 영혼은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당신은 밤새도록 세상의 온갖 상처와 욕망의 찌꺼기들을 만졌지만, 당신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합니다. 당신은 오늘 밤, 이 도시의 가장 추한 민낯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성스러운 진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버려진 것들 속에, 모든 잊힌 것들 속에, 모든 상처 입은 것들 속에, 신성한 변용의 가능성이 숨 쉬고 있다는 진실입니다. 당신의 고단하고 이름 없는 노동이야말로, 그 위대한 변용을 돕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연금술이었습니다.








16장: 빗방울이 그리는 유리창의 무늬


빗소리가 당신의 세계 전체를 채우고 있습니다. 오후 내내, 회색빛 하늘은 지치지도 않는 듯 무심한 눈물을 당신의 창문 위로, 이 도시 위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당신은 방 안의 불도 켜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손에 들린 스마트폰 액정은 몇 시간째 어두운 상태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새로운 메시지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그것을 놓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제 당신에게 세상과 연결된 창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처형당한 단두대와도 같습니다.


오전에, 당신은 가장 친한 친구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된 말다툼은, 서로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지난 몇 년간 당신과 세상을 이어주던 가장 단단하고 따뜻했던 다리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친구의 잘못이 무엇인지, 이 뒤엉킨 관계의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마음속은, 지금 창밖의 하늘처럼 온통 잿빛이고, 당신의 눈에서는 하늘을 대신해 뜨거운 비가 흐를 것만 같습니다.

당신의 고통은 너무나 거대해서, 온 우주가 당신의 슬픔을 중심으로 돌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비는, 당신의 마음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묵묵히 내리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창문을 봅니다.


차가운 유리 위로, 수많은 빗방울들이 자신들만의 길을 만들어내며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어떤 빗방울은 홀로 외롭게, 가늘고 긴 선을 그리며 곧장 아래로 떨어집니다. 어떤 빗방울은 다른 빗방울과 만나 몸집을 불리더니, 이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굵은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또 어떤 빗방울은, 유리 위에 앉은 작은 먼지 하나를 피해 살짝 방향을 틀고, 예기치 않은 곡선을 그리며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마침내 다른 물줄기와 합류합니다.


당신은 그 무질서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저 빗방울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저것들은 왜 저런 기이하고 예측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는 것일까요. 저 움직임에는 어떤 의미나 목적이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 순간, 당신은 당신의 작은 슬픔을 넘어, 이 세계의 근원적인 조건과 마주합니다. 이것은 20세기의 위대한 작가이자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1960)가 그의 저서 『시시포스의 신화, Le Mythe de Sisyphe』를 통해 탐구했던 ‘부조리 (the Absurd)’의 감각입니다.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는 세상 자체가 불합리하거나 인간이 불합리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조리는,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간절한 외침과, 그 외침에 대해 영원히 침묵으로만 답하는 ‘비이성적인 세계’가 마주쳤을 때, 그 충돌의 지점에서 태어납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세상에게 의미를 묻고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이 슬픔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지만 당신 앞의 빗방울들은, 이 세계는, 당신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중력의 법칙과, 표면장력의 원리와, 바람의 미세한 흐름에 따라, 당신의 슬픔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묵묵히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고통은 온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처럼 느껴지지만, 이 거대한 우주에게 당신은 먼지 하나보다도 못한 존재일지 모릅니다. 이 간극, 이 거대한 무관심이야말로 부조리의 본질이며, 당신은 그 서늘한 진실 앞에서 현기증과 함께 깊은 절망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당신은 계속해서 빗방울들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시선이 하나의 빗방울에서, 유리창 전체로 확장되는 순간, 당신은 새로운 풍경을 발견합니다. 개별적인 빗방울들의 움직임은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워 보였지만, 그 수많은 움직임들이 모여 만들어낸 유리창 전체의 무늬는, 기이하고도 복잡한 아름다움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 같기도 하고, 번개가 허공에 그린 순간의 지도 같기도 하며, 살아있는 생물의 혈관이나 신경망 같기도 했습니다. 혼돈 속에서, 어떤 기이한 질서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과학이 ‘혼돈 이론 (Chaos Theory)’과 ‘프랙탈 기하학 (Fractal Geometry)’이라는 이름으로 탐구하고 있는 세계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폴란드 태생의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 (Benoit Mandelbrot, 1924-2010)는, 자연계의 수많은 복잡하고 불규칙해 보이는 형태들, 예를 들어, 구름의 모양, 해안선의 굴곡, 나뭇가지의 패턴, 눈송이의 결정 등이 사실은 ‘프랙탈’이라는 자기 유사성 (self-similarity)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프랙탈 구조에서는, 작은 부분의 모습이 전체의 모습과 닮아 있으며, 이러한 자기 유사성이 무한히 반복됩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빗방울의 무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물줄기가 갈라지는 모습은, 거대한 강이 여러 지류로 갈라지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이 무질서해 보이는 혼돈의 배후에는, 당신의 이성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고 정교한 수학적 질서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카뮈가 말했던 ‘비이성적인 세계’는, 사실 무질서하거나 의미 없는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좁은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훨씬 더 거대하고 복잡한 질서와 의미를 품고 있는 세계였습니다. 당신이 느꼈던 부조리는, 세계의 침묵 때문이 아니라, 그 침묵 속에 담긴 거대한 언어를 당신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깨달음과 함께, 당신의 시선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 다시 한번 더 깊은 지혜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이 아름답고 복잡한 무늬를, 빗방울들은 과연 ‘노력’해서 만들어낸 것일까요. 아닙니다. 빗방울들에게는 어떤 의도나 목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본성과, 세상의 법칙에 온전히 순응하며,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을 따라 흘러내렸을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고대 중국의 현자 노자 (老子)가 그의 저서 『도덕경』에서 그토록 예찬했던 ‘물(水)’의 지혜이자, ‘무위 (無爲)’의 덕(德)입니다. 노자는 “가장 훌륭한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상선약수)”고 말했습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언제나 모든 이가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렇기에 물은 도(道)에 가장 가깝습니다. 당신 앞의 빗방울은, 바로 그 위대한 ‘무위’의 수행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본성에 따라 흐를 뿐인데, 그 결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저절로 그려집니다.


당신은 이제 당신과 친구의 관계를 떠올립니다. 당신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더 좋은 관계를 ‘만들려’ 수없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당신은 친구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당신의 진짜 감정을 숨겼고, 친구 또한 당신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억눌렀을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의 관계는 ‘무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수많은 의도와 계산이 개입된 인위적인 ‘유위(有爲)’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인위적인 둑이 터져버렸을 때, 당신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 관계를 ‘해결’하려 애쓰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빗방울처럼,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 지금의 이 고통스러운 단절 또한, 관계라는 거대한 강물이 더 깊고 넓은 바다로 가기 위해 잠시 굽이치는 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릅니다.

비가 서서히 잦아들고, 창문의 무늬들도 마르기 시작합니다. 당신과 친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짓누르던 거대한 고통의 무게는, 이제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당신의 슬픔은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거대하고 신비로운 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 중 하나일 뿐입니다. 당신의 슬픔은, 저 빗방울의 무늬처럼, 그 나름의 복잡한 질서와 의미를 품고 있으며, 결국에는 더 큰 조화 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엽니다. 비가 그친 뒤의 맑고 서늘한 공기가 당신의 방을 가득 채웁니다. 당신은 깊게 숨을 들이마십니다. 공기 속에는 젖은 흙냄새와, 아스팔트 냄새와, 상쾌한 풀냄새가 뒤섞여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화면이 반짝이며,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립니다. 친구에게서 온 문자입니다.


‘미안해.’


아주 짧은 세 글자. 예전 같았으면 당신은 이 메시지를 보고 수많은 생각과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진심일까?’, ‘내가 어떻게 답해야 이 관계에서 우위에 설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당신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그 세 글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똑같이 짧게 답장을 보냅니다.


‘나도 미안해.’

당신은 더 이상 완벽한 관계를 만들려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빗방울이 유리창 위를 흐르듯, 당신 앞에 놓인 삶의 길을, 그 모든 예측 불가능한 굴곡과 만남들을, 있는 그대로, 무심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며 흘러가기로 다짐합니다.

오늘, 당신은 텅 빈 방 안에서, 덧없이 사라지는 빗방울의 무늬 속에서, 당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깊고 단단한 질서를, 그리고 그 질서와 함께하는 평화를 발견했습니다.








17장: 가뭄 끝에 내리는 비, 거대한 은총의 순간


땅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밭고랑 사이에 서서, 갈라진 논바닥을 내려다봅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진 흙은, 이제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대지가 아니라, 바싹 마른 시체의 피부와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땅에 비가 내렸던 것이 언제였는지, 당신의 기억은 희미합니다. 달력은 두 달이 넘었다고 말하지만, 당신의 몸과 마음이 느끼는 가뭄의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길고, 영원할 것처럼 아득합니다.


하늘은 저주처럼 맑고, 태양은 무심한 폭군처럼 대지를 향해 하얀 불을 쏟아붓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평생을 이 땅과 함께 살아온 농부입니다. 당신은 흙의 냄새로 계절의 변화를 알고, 바람의 방향으로 날씨를 짐작하며, 작물의 빛깔로 땅의 건강을 읽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과 이 땅 사이에는, 도시의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깊고 내밀한 교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그 모든 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늘은 침묵하고, 땅은 죽어가고 있으며, 당신은 그 거대한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무력한 관찰자일 뿐입니다.


당신의 작물들은 이미 오래전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푸른 생기를 잃고 누렇게 타들어간 옥수수 잎들은, 마치 항복을 선언하는 깃발처럼 힘없이 펄럭입니다. 땅속의 감자와 고구마는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눈에, 이 밭은 더 이상 희망의 땅이 아니라, 당신의 실패와 절망이 고스란히 기록된 거대한 묘비처럼 보입니다.


처음 한 달 동안, 당신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지와 노동으로 이 가뭄과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신은 밤낮을 잊고 마른 수로를 파내고, 저수지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물까지 퍼 올려 밭에 날랐습니다. 당신의 등은 타는 듯한 햇살에 검게 그을렸고, 당신의 손은 굳은살이 박이고 갈라져 피가 맺혔습니다. 당신의 아내는 당신의 건강을 걱정하며 만류했지만, 당신은 듣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당신의 아버지가, 그리고 당신의 할아버지가 당신에게 물려준 이 완고한 믿음이, 당신을 채찍질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삶 전체를 지배해 온 철학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성실함과 땀으로 이 땅을 일구었고, 그 땅은 정직하게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당신의 삶은 ‘행위’와 ‘결과’라는 명확한 인과율의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명확했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단 한 방울의 비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땀은 땅을 적시지 못하고, 허공으로 허무하게 증발해버렸습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당신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힘의 존재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영적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되고 치열했던 신학적 논쟁의 현실적인 현현과도 같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삶의 방식은, 4세기 후반의 신학자 펠라기우스 (Pelagius, c. 354-418)의 주장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한 노력을 통해, 신의 특별한 도움 없이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며, 우리에게는 옳은 것을 선택하고 실천할 충분한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신이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마른 땅을 파헤쳤던 그 모든 행위는, 바로 이 펠라기우스적인 낙관론과 자기 신뢰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구원자였습니다.


하지만 이 끔찍한 가뭄 앞에서, 당신의 펠라기우스적 세계관은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유의지는 하늘의 침묵 앞에서 무력하고, 당신의 선한 노력은 텅 빈 하늘 아래에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의 지점에서, 당신은 펠라기우스의 가장 위대한 반대자였던 동시대의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 (Saint Augustine of Hippo, 354-430)의 신학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원죄로 인해 타락했으며,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선을 행하거나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신이 일방적으로, 그리고 값없이 베푸는 선물, 즉 ‘은총 (Grace)’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무력함과 죄성을 처절하게 인정하고, 그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마주한 이 갈라진 땅과, 당신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간 이 절망적인 현실이야말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인간의 실존적 조건, 그 자체입니다.

두 달이 넘는 치열한 싸움 끝에, 당신은 마침내 항복합니다. 당신은 더 이상 하늘을 원망하지도, 당신 자신을 자책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당신은 텅 빈 들판의 한가운데에 서서, 이 거대한 패배를, 당신 존재의 완전한 무력함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당신의 기도는 더 이상 ‘비를 주십시오’라는 요구가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고요한 체념이 됩니다.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서쪽 하늘 끝에서, 당신이 지난 몇 달간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아주 작은 검은 구름 한 조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구름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불어나, 이내 하늘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바람의 냄새가 바뀌었습니다. 건조하고 먼지 섞인 바람 대신, 흙과 물의 냄새를 머금은, 서늘하고 비릿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마른 뺨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첫 번째 빗방울.

그것은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고, 절망에 대한 응답이었으며, 침묵하던 하늘이 마침내 당신에게 건네는 첫마디였습니다. 이내 빗줄기는 거세졌고, 온 세상은 굵은 빗줄기가 만들어내는 장엄한 교향곡으로 가득 찼습니다. 당신은 처마 밑으로 피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밭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이 거대한 은총을 온몸으로 맞았습니다. 비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당신의 주름진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당신의 마른 입술을 축였습니다. 당신은 그 빗물을, 마치 성수(聖水)처럼, 감사하게 받아 마셨습니다.

이것은 루마니아의 종교사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가 말했던 ‘히에로파니 (Hierophany)’, 즉 ‘성현(聖顯)’의 순간입니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종교적 인간에게 시간과 공간은 균일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일상적이고 무의미한 ‘속(俗, the Profane)’의 영역과, 근원적인 실재와 연결되는 의미 있고 거룩한 ‘성(聖, the Sacred)’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히에로파니는, 바로 이 ‘성스러움’이 ‘속된’ 현실 속으로 침투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현상을 가리킵니다.


지난 몇 달간의 가뭄은, 당신에게 끝없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 즉 ‘속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하늘에서 쏟아지는 이 비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스러움’이 당신의 세계에 극적으로 현현하는 순간입니다. 이 비는 죽어가던 땅에 생명을 되돌려주고, 당신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무의미했던 당신의 노동에 다시 한번 거룩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비를 통해, 당신의 밭은 더 이상 단순한 흙과 땅이 아니라, 신성한 힘이 작용하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변모합니다.

당신은 흠뻑 젖은 채, 당신의 땅을 둘러봅니다. 빗물은 갈라진 흙의 상처 속으로 스며들어, 그것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코끝에는, 젖은 흙이 뿜어내는 강렬하고 향기로운 냄새, 즉 페트리코 (petrichor)가 가득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냄새이며, 부활의 향기입니다.


비가 내린 직후, 세상이 아직 축축한 채로 숨을 죽인 그 순간에만 허락되는 냄새가 있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마른 땅이 단비를 흠뻑 빨아들일 때, 흙먼지가 가라앉은 대지로부터 피어오르는 그 신선하고도 깊은 향기. 당신은 분명 그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먼지가 씻겨 내려가고 풀잎이 상쾌하게 빛나는 거리를 걸으며, 그 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이름 모를 추억과 까닭 없는 평화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경험을 말입니다.


당신이 맡았던 그 이름 없는 향기에는, 사실 이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페트리코 (petrichor)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자연 현상을 넘어, 지구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생명력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한 하나의 시(詩)와도 같습니다.


그 이름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만나게 됩니다. 페트리코는 ‘바위’를 의미하는 페트라 (petra)와, 신화 속 신들의 혈관을 흐르는 영적인 피, ‘신의 혈액’을 의미하는 이코르 (ichor)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페트리코는 문자 그대로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신들의 피’라는, 장엄하고도 신비로운 이미지를 품고 있습니다. 메마르고 딱딱하게 굳어 죽은 것처럼 보였던 세상의 돌과 흙(페트라)이, 하늘의 은총인 비와 만나는 순간, 그 안에서 잠자고 있던 신성한 생명의 피(이코르)가 향기로운 숨결이 되어 깨어나는 것입니다.


다음에 비가 그친 거리를 걷게 된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깊이 들이마셔 보십시오. 당신은 그저 흙냄새를 맡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신들의 피를, 가장 작은 존재들이 빚어낸 우주의 노래를, 그리고 정화와 부활을 약속하는 대지의 숨결을, 당신의 온 존재로 들이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페트리코는, 가장 평범한 풍경 속에 숨겨진 영원의 철학이, 당신에게 건네는 향기로운 초대장입니다.

마침내 내리는 이 비는 당신의 오랜 노동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이 비를 ‘벌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의 무력함을 온전히 인정했을 때, 당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비는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것처럼, 당신의 공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베풀어진 순수한 선물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거대한 은총 앞에서, 그저 두 손을 벌려 그것을 받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또한, 도교(道敎)의 현자 노자(老子)가 말했던 하늘과 땅의 방식, 즉 ‘도(道)’의 모습입니다. 하늘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비를 내린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그저, 거대한 우주의 리듬에 따라, 때가 되었기에 비를 내릴 뿐입니다. 노자는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고 말했습니다. 하늘은 인간의 기준에서 선하거나 악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심하게, 스스로 그러한 법칙(自然)에 따라 운행할 뿐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무심함 속에, 가장 위대한 자비가 있습니다. 물이 모든 것을 이롭게 하지만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 것처럼, 하늘은 그저 비를 내림으로써, 당신과, 당신의 밭과, 이름 모를 들풀 한 포기까지도 차별 없이 먹여 살립니다.


비가 서서히 잦아들고, 세상은 맑게 씻긴 얼굴로 다시 태어납니다. 당신은 당신의 밭으로 걸어 들어가, 축축한 흙 한 줌을 손에 움켜쥡니다. 이제 이 흙은 당신에게 더 이상 당신이 정복하고 관리해야 할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생명을 잠시 맡아주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이 땅을 섬기는 겸손한 청지기임을 깨닫습니다.


당신의 기도는 이제 달라질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에게 이미 주어진 모든 것, 이 땅과, 이 하늘과, 비와, 햇살과, 당신의 늙고 지친 몸뚱이와, 당신의 남은 숨 하나하나까지에, 조용히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끔찍한 가뭄의 끝에서, 가장 위대한 진실 하나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은총이란, 인간의 노력이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빈손으로 섰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진실입니다. 당신의 가장 깊은 절망은, 가장 거대한 은총을 만나기 위한, 신성한 준비의 시간이었습니다.





18장: 폐허 속에서 발견한 작은 사진 한 장


사이렌 소리는 당신의 또 다른 심장 소리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시 어딘가에서 터져 나온 비명과 고통에 반응하여 격렬하게 울려 퍼집니다. 당신은 방화복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껴입고, 어둠을 가르는 소방차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또 하나의 전쟁터로 향합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수년간의 훈련이 당신의 모든 감각을 하나의 목표, 즉 ‘임무 완수’라는 지점으로 수렴시켰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불을 보고, 연기를 읽고,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고, 동료의 수신호를 확인합니다. 당신은 이 혼돈의 세계를 지배하는 물리 법칙과, 그 법칙에 맞서 싸우는 당신의 경험과 기술을 신뢰할 뿐입니다.


현장에 도착하자, 밤의 어둠을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불길이 당신을 맞이합니다. 시뻘건 불의 혀가 창문을 핥고, 검은 연기는 하늘을 향해 거대한 독버섯처럼 피어오릅니다. 당신의 귓가에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의 굉음과, 건물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리는 소리, 그리고 아직 건물 안에 남아있을지 모를 생명을 향한 동료들의 절박한 외침이 뒤섞여 있습니다. 당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모든 혼돈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뜨거운 열기가 당신의 방화복을 뚫고 피부를 위협하고, 매캐한 연기가 당신의 폐부를 파고들지만, 당신의 의식은 얼음처럼 차갑고 명료합니다. 당신은 지금, 개인이 아니라, ‘소방관’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재앙에 맞서는 인간 의지의 한 조각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치열했던 전투가 끝나고, 밤의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동쪽 하늘이 옅은 잿빛으로 물들 무렵, 불길은 마침내 그 기세를 잃고, 당신들의 발밑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잔화 정리’라는, 전쟁의 마지막 단계를 수행합니다. 그것은 영광 없는, 고요하고도 참혹한 시간입니다.


당신이 서 있는 풍경은, 더 이상 어제까지 누군가의 삶이 담겨 있던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온통 검은색과 회색으로만 이루어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폐허입니다. 숯덩이가 된 가구들, 녹아내린 가전제품, 힘없이 무너져 내린 벽. 모든 것이 형태를 잃고, 죽음의 재로 뒤덮여 있습니다. 당신의 코끝에는 물에 젖은 재와, 타버린 플라스틱과,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인 연기의 냄새가 섞여, 지독하고도 슬픈 악취를 풍깁니다.

당신의 아드레날린은 이미 오래전에 소진되었고, 그 자리에는 뼈마디를 쑤시는 깊은 피로와, 영혼을 갉아먹는 무력감이 찾아옵니다. 당신은 이런 풍경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불과 싸워도, 결국 당신의 손에 남는 것은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누군가의 삶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이 참혹한 흔적뿐입니다. 당신의 일이란, 결국 이 거대한 상실을 확인하고 뒷정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이, 당신의 지친 마음속에서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릅니다.


바로 그때, 당신의 손에 들린 갈퀴 끝에, 무언가 다른 것이 걸립니다. 시커먼 잿더미 속에서, 당신은 용케 타지 않고 남은 작은 쇠 상자 하나를 발견합니다. 호기심보다는 의무감에, 당신은 장갑 낀 손으로 뜨거운 열기가 남은 상자를 힘겹게 열어봅니다. 그 안에는 물에 젖고 그을렸지만, 기적적으로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작은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조심스럽게 그 사진을 꺼내 듭니다. 그리고는, 잿물을 장갑 끝으로 살살 닦아냅니다. 그러자, 멈춰버린 시간 속의 한 장면이, 이 모든 죽음의 풍경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눈부신 생명의 빛을 발하며 당신 앞에 나타납니다.


사진 속에는, 젊은 부부가 어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공원에서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남자는 어색하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아이를 목말 태우고 있고, 여자는 사랑스럽다는 듯 그 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이는 세상의 모든 기쁨을 담은 듯한 표정으로, 작은 손을 하늘을 향해 뻗고 있습니다. 그들의 배경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한창이고, 그들의 얼굴에는 미래에 대한 어떤 불안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행복의 한순간,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어느 평범한 날의 기록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진 한 장을 든 채, 폐허의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당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 압도적인 파괴와 죽음. 그리고 당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이 작고 연약한 사랑과 생명의 증거. 이 극단적인 두 개의 풍경 사이에서, 당신의 영혼은 거대한 전율에 휩싸입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이 폐허는, 모든 의미가 소멸된 듯한 하나의 거대한 질문과도 같습니다. 이 비극 앞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은 종종,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1960)가 말했던 것처럼, 의미를 향한 우리의 간절한 갈망에 대해 차가운 침묵으로만 답하기 때문입니다. 이 압도적인 무의미, 이것이 바로 카뮈가 말한 ‘부조리 (the Absurd)’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절망의 지점에서, 인류의 또 다른 위대한 목소리가 당신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20세기의 가장 어두운 심연이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온몸으로 통과해 살아남은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 (Viktor Frankl, 1905-1997)의 목소리입니다. 그의 위대한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를 통해 인류에게 전하고자 했던 희망의 메시지, 즉 ‘로고테라피 (Logotherapy)’의 지혜가, 당신이 발견한 이 작은 사진 한 장을 통해 살아있는 증거로 나타납니다.

프랭클은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말살된 그 절대적인 고통의 현장 속에서, 인간을 끝까지 살아있게 하는 힘은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을 향한 의지’나 아들러가 말한 ‘권력을 향한 의지’가 아니라고 통찰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박탈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버티게 하는 마지막 힘은, 바로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Will to Meaning)’였습니다.

프랭클에 따르면, 이 ‘의미’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순간 속에서 발견되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세 가지 기본적인 방식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첫 번째 길은,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밤새 수행했던 당신의 임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무거운 호스를 끌고, 동료들과 함께 혼돈에 맞서 싸웠던 당신의 모든 행위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파괴와 무질서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 생명과 질서라는 가치를 지켜내려는 인간 의지의 장엄한 표현이었습니다. 비록 이 집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당신의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 혼돈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인간의 존엄한 저항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길은, 어떤 것을 깊이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진실하게 만나는 것(사랑)을 통해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손에 들린 이 사진 한 장이 바로 그 두 번째 길의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육체와 재산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사랑했던 그 순간의 진실, 그들이 함께 나누었던 그 행복의 기억은, 이 작은 사진 한 장의 형태로 불길을 이겨내고 살아남았습니다. 프랭클 자신도 수용소의 절망 속에서,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랑의 힘을 통해 순간의 의미와 구원을 경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그리고 파괴보다 강한 힘을 지닌, 그 자체로 완결된 삶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이 사진은 이 폐허가 단지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한때 위대한 사랑이 존재했던 성소(聖所)였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길은, 피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그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프랭클이 말한 ‘인간의 마지막 자유’입니다. 외부의 환경이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는 있지만,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내면의 자유만큼은 결코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이 사진을 들고 서 있는 이 순간의 당신의 태도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당신은 이 비극 앞에서 절망하거나, 세상을 저주하거나, 당신의 일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대신, 이 작은 사진 한 장에 담긴 사랑의 무게에 숙연해지고, 그들의 사라져버린 삶에 깊은 연민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분노나 절망이 아닌, 존중과 연민이라는 태도를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태도이며, 당신은 이 태도를 통해 당신 자신의 삶에, 그리고 당신의 고된 노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신의 행위는, 기독교 신학의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신의 형상’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그 자체로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존엄하고 신성한 존재입니다. 불길은 집을 태우고 육체를 소멸시킬 수는 있지만,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신의 형상’까지는 결코 파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손에 든 이 사진은, 그 파괴될 수 없는 신성한 형상의 희미하지만 분명한 흔적입니다. 사진 속 가족의 웃음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 영혼의 신성함을 증명하는 빛나는 불꽃입니다.


당신이 재를 털어내고 이 사진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는 그 행위는, 단순한 유품 수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혼돈과 무의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인간 정신의 거룩한 저항입니다. 당신은 종이 한 장을 구한 것이 아니라, 이 비극 속에서도 살아남은 ‘의미’의 파편을, ‘사랑’의 증거를, ‘신의 형상’의 흔적을 구조한 것입니다.


어느덧 당신의 고된 임무가 끝나고, 당신은 소방서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릅니다. 해는 완전히 떠올라, 도시는 어젯밤의 비극 따위는 전혀 몰랐다는 듯, 활기찬 아침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몸은 납처럼 무겁고, 온몸에서는 역한 연기 냄새가 배어 있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의 마음은 어제 아침보다, 혹은 일주일 전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단단합니다.


집에 돌아와, 당신은 곤히 잠든 당신의 가족들을 잠시 들여다봅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책상 위에, 폐허 속에서 가져온 그 작은 사진 한 장을 조심스럽게 세워둡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이 세상은 불과 재,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하지만 당신은 또한 압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모든 것 때문에,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그리고 파괴된 세상 속에서 작은 진실 하나라도 지켜내려는 당신의 의지를 통해, 의미는 창조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가족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이 작은 사랑의 증거는, 오늘 한 소방관의 지친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당신의 일은 불을 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일은, 이 세상의 모든 폐허 속에서, 바로 이런 작은 사진 한 장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무겁고도 거룩한 소명을 가슴에 품고, 조용히,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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