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가면 (The Mask)

by DrLeeHC

제2부: 가면 (The Mask)


7장: 회식자리 부장님의 낡은 농담을 들으며


고기 굽는 냄새와, 술잔 부딪는 소리와, 사람들의 과장된 웃음소리가 자욱한 연기처럼 식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팀원들과 함께하는 회식 자리, 그 익숙하고도 불편한 풍경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습니다. 숯불 위에서는 돼지갈비가 지글거리며 타는 듯한 단내를 풍기고,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들이 무심한 묘비처럼 늘어서 갑니다. 이곳은 당신이 속한 조직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소화 기관이자, 위계질서를 재확인하고 느슨해진 유대감을 억지로 봉합하는, 매달 반복되는 엄숙한 제의(祭儀)의 현장입니다.


당신은 ‘팀장’이라는 당신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당신의 상사인 박 부장의 잔이 비지 않도록 부지런히 술을 채웁니다. 맞은편에 앉은 신입사원에게는 어색하지 않도록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면 당신이 가진 가장 안전한 농담 몇 개를 꺼내 놓기도 합니다. 당신은 이 제의의 능숙한 집전자(執電子)입니다. 누구에게 술을 따라야 할지, 누구의 말에 맞장구를 쳐야 할지, 그리고 언제쯤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의 귀가를 독려해야 할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난 십수 년의 직장생활이 당신에게 가르쳐 준 생존의 기술입니다.


바로 그 상사인 박 부장, 당신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많은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아져 있습니다. 그는 이제 막 입사한 어린 여직원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며, 의례적인 격려와 칭찬을 몇 마디 건넵니다. 그리고 이윽고, 모두가 예상했지만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그 순서가 찾아옵니다.


“내가 아주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젊은 직원들의 얼굴에 순간 스쳐 지나가는, 애써 감추려는 지루함과 체념의 표정을 당신은 놓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사회생활의 가면을 고쳐 쓰고,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박 부장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앞으로 펼쳐질 3분 동안의 시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회사에 입사한 이래로 수십 번은 들었던,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낡은 농담 레퍼토리.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중에서도 가장 아슬아슬한 수위를 자랑하는 ‘아재 개그’를 꺼내 듭니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당신은 상추에 고기를 싸는 척하며 그의 얼굴을 곁눈질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가 가장 심취해 있습니다. 이야기의 절정에서 잠시 뜸을 들이는 노련함, 그리고 결정적인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진 뒤 스스로 먼저 가장 큰 소리로 “으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과시적인 태도. 그 웃음소리를 신호탄으로,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박장대소합니다. 웃음소리는 크고 요란하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즐거움의 진동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력 없는 기계의 소음과도 같습니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이 어색한 순간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모두가 합창하는 거짓의 교향곡.


당신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그를 향한 연민과 함께 은밀한 우월감을 느낍니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당신은 그의 낡은 농담을 시대에 뒤떨어진 상사의 촌스러운 아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직원들과 소통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오히려 그들을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어째서 저 사람만 모르는 것일까. 당신은 스스로가 그보다는 세련되고, 더 눈치가 빠르며, 최소한 저렇게까지 자신을 내세우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리더십은 ‘수평적 소통’과 ‘합리적 의사결정’이라는 세련된 단어들로 포장되어 있으며, 최소한 당신의 팀원들은 당신을 저렇게 비웃지는 않을 것이라고, 당신은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 우월감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술이 몇 순배 더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박 부장은 술에 취한 채 당신의 어깨에 팔을 두릅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그의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와 고기 냄새가 당신의 얼굴에 훅 끼쳐옵니다.



“김 팀장, 우리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해.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어서… 우리 때랑은 달라. 안 그래?”



그의 말, 그의 눈빛, 그의 축축한 손길이 당신을 옭아매는 순간, 당신은 섬광 같은 깨달음과 함께 얼어붙습니다. 당신이 연민과 우월감이라는 안전한 거리에서 바라보던 저 사람의 모습이, 실은 당신 자신의 미래라는 끔찍한 예감. 그의 낡은 농담은, 어쩌면 몇 년 뒤 당신이 젊은 직원들 앞에서 하고 있을 어설픈 조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싶어 하지만 방법을 몰라 겉도는 그의 모습은, 아들의 닫힌 방문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던 당신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우리 때’를 그리워하며 현재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그의 불안은, 당신이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느끼는 불안과 정확히 같은 색깔을 띠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에게서 느꼈던 연민은, 사실 당신 자신을 향한 연민이었습니다. 당신이 느꼈던 우월감은, 그와 다르다고 믿고 싶은 필사적인 자기방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압니다. 당신과 그는, 같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조금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뿐인, 같은 종류의 부품이라는 것을. 올더스 헉슬리가 프랑수아 페넬롱 (François Fénelon, 1651-1715)로부터 인용한 말처럼, ‘당신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대신 남을 판단함으로써 자신의 불완전함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박 부장이라는 거울을 통해, 당신은 당신이 애써 외면해 온 당신 자신의 “추악한 맨얼굴”을 보고 만 것입니다 .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의 법칙이 아닐까요.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어 존재합니다. 박 부장의 존재가 없었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모습을 이토록 선명하게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고통은 당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고, 그의 무지는 당신의 무지를 비추는 등불이 되어주었습니다. 당신들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중간 관리자’라는 이름의 역할을 부여받은, 같은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스위스의 위대한 정신 탐험가 칼 융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쓰는 가면을 ‘페르소나 (Persona)’라고 불렀습니다. 페르소나는 ‘유능한 팀장’, ‘자상한 아버지’, ‘믿음직한 동료’처럼, 세상과 원만하게 관계 맺기 위해 우리가 쓰고 연기하는 사회적 역할이자 인격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가면을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필사적으로 쓴 나머지, 가면 뒤에 자신의 진짜 얼굴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때 발생합니다.


당신과 박 부장은 평생에 걸쳐 ‘팀장’과 ‘부장’이라는 이름의 정교한 페르소나를 만들어왔습니다. 더 유능하고, 더 인정받고, 더 성공하기 위해. 우리는 그 가면이 우리의 진짜 얼굴이라고, 가면의 성공이 곧 내 영혼의 성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융의 경고처럼, 페르소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가장 큰 위험입니다. 당신이 오늘 밤 목격한 박 부장은, 바로 그 위험이 현실이 된 모습입니다. 그는 ‘부장’이라는 페르소나와 완전히 합일되어, 이제 그 가면을 벗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 속에서, 낡은 농담이라는 썩은 동아줄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위태로운 모습 속에서 당신 자신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깨닫습니다. 당신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김 팀장’이라는 역할을 떼어내고 나면,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당신은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서 당신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낍니다.


어떤 현자들은 말했습니다. 인간의 영혼 안에는 세상의 그 어떤 역할이나 기대, 조직의 논리에도 침범당하지 않는 고유한 왕국이 있다고. 그 왕국의 주인이 되어, 외부의 평가나 기준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의 내면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주권적 자아 (Sovereign Self)’라고 말입니다.


박 부장은 바로 그 내면의 왕좌를, ‘회사’라는 거대한 제국에 스스로 헌납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직업을 가진 한 개인이 아니라, 직업이 되어버린 영혼입니다. 그의 왕국은 텅 비었고, 회사의 논리가 그의 유일한 법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의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회식이 끝나고, 당신은 비틀거리는 박 부장을 택시에 태워 보냅니다. 멀어지는 택시의 붉은 후미등을 보며, 당신은 밤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십니다. 술기운은 어느새 가시고, 정신은 얼음처럼 차갑고 명료합니다. 당신은 길 건너편 빌딩의 쇼윈도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곳에는 피곤에 지친 40대의 사내가 서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의 눈에는, 그의 모습 위로 조금 전 택시를 타고 떠난 박 부장의 얼굴이, 그리고 그 뒤로는 당신의 아버지의 무뚝뚝했던 얼굴이, 그리고 그 뒤로는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와 상사들의 얼굴이 겹쳐 보입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 (業, karma)’의 사슬, 즉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행동과 생각의 패턴이 만들어낸 거대한 굴레의 모습입니다.


당신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합니다. 박 부장처럼, 낡은 농담과 함께 서서히 잊혀 가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팀장’이라는 이름의 이 갑옷을 해체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갑옷 안의 진짜 ‘나’가 누구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물질과 역할이라는 감옥에 갇힌 채 자신의 신성한 본질을 잊어버린 ‘빛의 불꽃’을 다시 발견하는 여정일 것입니다. 고대 트라키아의 현자 잘목시스는 “생각의 씨앗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박 부장의 운명은, ‘부장’이라는 역할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자기 생각의 씨앗이 맺은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의 미래를 위해 어떤 생각의 씨앗을 심고 있습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당신은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맹세합니다. 이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 다짐입니다. 내일 아침, 팀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기 전에, 그들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자고. 아들의 방문을 두드리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려보자고. 아내에게 말을 걸기 전에, 먼저 내 안의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고.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했듯, 당신은 외부의 사건(회식)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사건에 대한 당신의 판단과 대응은 온전히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밤, 당신은 회식 자리에서 당신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미래는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당신이 바꿀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입니다. 박 부장의 낡은 농담은, 당신의 영혼을 잠에서 깨운 가장 날카로운 죽비 소리였습니다. 당신은 그 고통스러운 깨우침에, 마음속으로 조용히 감사합니다.







8장: SNS 속 완벽한 타인의 삶, 내 존재의 초라함


고요한 밤, 당신은 하루라는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지친 병사처럼 소파에 몸을 파묻습니다. 아이는 잠들었고, 남편은 텔레비전의 스포츠 채널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간간이 탄성을 내뱉습니다. 집 안의 공기는 평화롭지만, 그 평화는 어딘지 모르게 텅 비어 있습니다. 낮 동안 당신을 몰아세웠던 긴급한 업무들과, 수많은 관계의 소음들이 사라진 지금, 당신의 마음에는 허전함이라는 이름의 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그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당신의 손에 들린 작은 검은 거울, 스마트폰을 들어 올립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 당신은 인스타그램이라는 이름의 광장으로 들어섭니다. 그곳은 현실의 물리적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오직 가장 빛나는 순간들만이 박제되어 전시되는 마법의 공간입니다. 당신의 손가락이 화면을 위로 밀어 올릴 때마다, 완벽하게 연출된 타인의 행복이 파노라마처럼 당신의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첫 번째 사진. 몇 년 전 퇴사했던 직장 동료입니다. 그녀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발리의 한 고급 리조트, 인피니티 풀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샴페인 잔을 들고 있습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건강한 피부, 군살 하나 없는 몸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은 듯한 평화로운 미소. 사진 아래에는 짧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쉼, 그리고 재충전.’


당신은 지난여름, 아이와 남편을 데리고 인파로 북적이던 동해의 한 해수욕장에서 파라솔 값을 흥정하던 당신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당신의 휴가는 ‘쉼’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노동’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진. 대학 동창입니다. 그는 명문 사립초등학교의 교문 앞에서, 상장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들의 어깨를 자랑스럽게 감싸 안고 있습니다.


‘전국 수학 경시대회 금상. 아들아, 고맙고 사랑한다.’


당신은 어제 저녁,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당신의 아들과 ‘숙제는 다 했냐’는 문제로 실랑이를 벌였던 일을 생각합니다. 당신의 아이는 평범하고, 때로는 당신을 실망시킵니다. 당신은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 속에는 언제나 한숨 섞인 불안이 함께합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사진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후배가 꾸민, 잡지 화보 같은 ‘홈 카페’의 풍경. 친구가 선물 받았다며 자랑하는 명품 가방. 누군가의 완벽한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 그 모든 이미지들은 작고 예리한 유리 조각이 되어, 당신의 평범한 일상이라는 연약한 피부 위로 비 오듯 쏟아져 내립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이, 당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족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을, 혹은 최소한 진실의 아주 작은 단면만을 교묘하게 편집한 것임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 또한, 가끔은 가장 잘 나온 사진 한 장을 골라, 가장 근사해 보이는 문장과 함께 포스팅하지 않던가요. 당신은 이 게임의 규칙을 압니다. 하지만 이성과 감정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당신의 이성이 “저건 다 보여주기 위한 거야”라고 속삭이는 동안, 당신의 감정은 이미, “그런데 왜 내 삶은 저렇게 빛나는 순간조차 없는 거지?”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기 드보르 (Guy Debord, 1931-1994)가 그의 저서 『스펙터클의 사회, La Société du spectacle』에서 통찰했던 현대 사회의 본질입니다. 그는 우리가 더 이상 실재를 직접 경험하지 않고, 미디어를 통해 가공되고 포장된 이미지, 즉 ‘스펙터클 (Spectacle)’을 소비하며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있는 것은 당신 친구의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이미지’, 즉 스펙터클입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실재’를, 타인의 완벽하게 편집된 ‘이미지’와 비교하며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 게임은 처음부터 당신에게 불리하게 설계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당신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화면을 올립니다. 그것은 마치 고통스러운 상처를 계속해서 헤집는 도착적인 행위와도 같습니다. 당신은 왜 이 고통을 멈추지 못하는 걸까요. 프랑스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 (René Girard, 1923-2015)의 ‘모방 욕망 (Mimetic Desire)’ 이론이 그 답을 알려줄지도 모릅니다. 그는 인간의 욕망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고 중개함으로써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그 과정에서 타인은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모델’이자, 같은 대상을 욕망하는 ‘경쟁자’가 됩니다.


인스타그램은 바로 이 모방 욕망의 거대한 용광로입니다. 당신은 친구의 발리 여행을 보며,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발리 여행을 욕망하기 시작합니다. 동창의 영재 아들을 보며, 당신 아이의 평범함을 견디지 못하고 ‘영재성’을 욕망하기 시작합니다. SNS는 우리 모두를 서로의 모델이자 잠재적 경쟁자로 만들고, 우리를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쳇바퀴, 즉 ‘쾌락의 쳇바퀴 (Hedonic Treadmill)’ 위에 올려놓습니다. 당신의 초라함은 당신의 삶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욕망이 타인에게 오염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침내, 당신의 손가락이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멈춥니다. 당신이 내심 동경하고 질투해왔던, 한 살 어린 후배의 사진입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성공적인 커리어, 자상한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 그리고 여전히 빛나는 미모. 오늘 그녀는 자신이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진 속 그녀는 서점의 자기 책 코너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완벽한 성공의 정점.


그 순간, 당신의 마음을 지탱하던 마지막 둑이 무너져 내립니다. 당신의 초라함은 이제 거대한 절망감이 되어 당신의 존재 전체를 집어삼킵니다. 당신은 조용히 스마트폰의 전원 버튼을 누릅니다. 화면이 까맣게 변하자, 당신의 얼굴이 그 위로 유령처럼 떠 오릅니다. 지치고, 무표정하고, 길을 잃은 얼굴.


화면 속의 화려한 스펙터클이 사라지자, 당신 주위의 현실이 압도적인 무게로 당신을 짓누릅니다. 남편이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 소리, 냉장고의 낮은 소음, 벽시계의 초침 소리. 이 모든 평범하고 사소한 현실의 소리들이, 당신의 실패와 초라함을 증명하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가졌다고 믿었던 후배의 ‘완벽한 삶’이라는 우상을 숭배한 대가로, 당신 자신의 ‘진짜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헉슬리가 그의 책에서 경고했듯, 이것이야말로 가장 교묘하고 강력한 현대의 ‘우상숭배 (Idolatry)’입니다 . 우리는 더 이상 돌이나 나무로 만든 신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신, 타인의 삶이라는 이름의 빛나는 이미지를 숭배하고, 그 우상 앞에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칩니다.



당신은 소파에서 일어나, 아이가 잠든 방으로 향합니다. 문을 열자, 희미한 수면등 아래 아이의 평화로운 얼굴이 보입니다. 고른 숨소리, 살짝 벌어진 입, 베개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 이 모습은 인스타그램에 올리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누구의 ‘좋아요’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압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당신 삶의 진짜 ‘스펙터클’이라는 것을. 편집되지 않은, 과장되지 않은, 그러나 그 어떤 이미지보다도 거룩하고 완전한 현실이란 것을.


당신은 아이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춥니다. 아이의 따뜻한 체온이 당신의 입술을 통해, 당신의 얼어붙었던 심장으로 전해져 옵니다. 이것은 실재입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당신의 행복은 타인의 삶이라는 당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것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행복은, 지금 이 순간, 당신 눈앞의 이 현실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거실로 돌아온 당신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남편의 옆에 조용히 앉습니다. 남편은 잠시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고 당신을 봅니다. 당신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손 위로 당신의 손을 가만히 포갭니다.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통과해 온, 투박하고 따뜻한 손. 그 손의 감촉 속에는, 발리의 어떤 리조트도, 어떤 명품 가방도 줄 수 없는 깊은 역사와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남편은 당신의 손을 마주 잡아줍니다. 짧은 순간, 당신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칩니다. 그 눈빛 속에는 어떤 화려한 문장도 없지만, 서로의 고단함을 이해하고 함께 이 길을 걸어가겠다는 무언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당신의 삶이 초라했던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시선이 초라했다는 것을. 당신은 당신의 발밑에 놓인 보석들을 보지 못하고, 저 멀리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린 유리구슬만을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처럼, 당신은 당신 안에 이미 존재하는 신성한 빛의 불꽃을 알아보지 못하고, 밖에서 만들어진 거짓된 빛(이미지)에 현혹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거실 탁자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마법의 광장으로 통하는 문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잠식하는 검은 심연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집어 들어,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둡니다.


물론 내일 아침이면, 당신은 다시 그 스마트폰을 꺼내 들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강력한 중독과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밤, 당신은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당신은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당신 자신의 진짜 삶으로 귀환했습니다. 당신의 초라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초라함은 이제 당신의 삶을 이루는 소중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 초라함을 기꺼이 끌어안은 당신의 삶이야말로,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진실하고 상처가 있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댑니다. 텔레비전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집니다. 그 대신, 당신은 당신 자신의 숨소리와, 남편의 심장 소리와, 이 집을 감싸고 있는 밤의 깊은 침묵 소리를 듣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당신은 비로소 당신의 진짜 삶과 화해하기 시작합니다.







9장: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 페르소나의 무게


월요일 아침, 알람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당신은 눈을 뜹니다. 잠을 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얕은 수면의 표면 위를, 밤새도록 불안이라는 이름의 조각배가 위태롭게 떠다녔을 뿐입니다. 오늘은 당신의 입사 후 첫 번째 팀 프로젝트 발표가 있는 날. 지난 2주간, 당신은 주말도 반납한 채 이 발표 자료에 매달렸습니다. 당신의 미래가, 이 회사에서의 당신의 존재 가치가, 오늘 오후 3시에 시작될 그 30분의 시간에 달려있다고, 당신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옷장 앞에 섭니다. 며칠 전부터 미리 골라두었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옷차림. 너무 튀지도, 너무 무난하지도 않은, 신입사원의 열정과 신뢰감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조합. 당신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유능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신입사원’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한 겹 한 겹 챙겨 입습니다.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당신은 오늘 발표하게 될 자료의 핵심 내용을 머릿속으로 되뇌입니다. 넥타이를 매며, 예상 질문에 대한 가장 완벽한 답변들을 시뮬레이션합니다.

거울 앞에 선 당신의 모습은 낯섭니다. 그곳에는 어젯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뒤척이던 불안한 청년이 아니라,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띤 채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듯한 한 명의 프로페셔널이 서 있습니다. 당신은 그 얼굴을 향해 마지막으로 한번 더 힘주어 웃어 보입니다. 입꼬리는 올라가지만, 위장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융 (Carl Jung, 1875-1961)이 ‘페르소나 (Persona)’라고 불렀던 것의 실체입니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쓰고 연기하는 사회적 얼굴을 의미합니다. ‘신입사원’, ‘팀장’, ‘아버지’, ‘딸’.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세상과 원만하게 관계 맺기 위해 필수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가면들입니다. 페르소나 그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명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도구이자, 연약한 내면을 보호하는 갑옷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가면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할 때 발생합니다. 가면이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가면 뒤에 자신의 진짜 얼굴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가면의 성공이 곧 내 영혼의 성공이라고 믿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융이 경고했던, 현대인이 겪는 가장 큰 정신적 위험입니다. 당신은 지금, 그 위험한 여정의 첫걸음을, 아주 성실하고 치열하게 내딛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당신의 연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당신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상사에게,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합니다. 자리에 앉아서는, 가장 먼저 이메일을 확인하며 당신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업무에 열정적인지를 은연중에 과시합니다. 팀 회의 시간에는, 당신의 상사인 팀장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불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당신은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감시합니다. 당신의 표정, 당신의 말투, 당신의 자세, 심지어 당신이 커피를 마시는 손짓 하나까지도. 그 모든 것이 ‘나는 잘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변에 전달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캐나다 출신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 (Erving Goffman, 1922-1982)이 그의 저서 『자아 연출의 사회학, 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에서 묘사한 ‘인상 관리 (Impression Management)’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고프먼에 따르면, 우리의 사회적 삶은 하나의 거대한 연극 무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배우이며, 다른 사람들은 관객입니다. 우리는 이 무대 위에서, 타인에게 특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연기를 관리하고 연출합니다. 당신의 사무실은 지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무대이고, 당신의 상사와 동료들은 가장 까다로운 관객이며, 당신의 발표는 당신의 배우 인생이 걸린 독백 공연인 셈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이 극심한 불안은, 바로 무대 공포증입니다.



오후 세 시. 마침내 당신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회의실의 차가운 공기가 당신의 폐부를 찌릅니다. 당신은 노트북을 프로젝터에 연결하며, 애써 떨리는 손을 감춥니다. 당신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격렬하게 뛰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흐릅니다. 하지만 당신의 얼굴에는, 아침에 거울 앞에서 연습했던 그 완벽한 미소가 걸려 있습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OOO입니다. 지금부터 지난 2주간 저희 팀이 준비한 OOO 프로젝트에 대한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거의 떨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당신의 페르소나는 완벽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막힘없이, 준비한 슬라이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시장 분석과, 경쟁사 동향과, 프로젝트의 기대 효과에 대해 유창하게 설명합니다.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목소리가 너무 빠른가?’, ‘팀장님의 표정이 왜 저렇지?’, ‘다음 슬라이드 내용이 뭐였더라?’와 같은 수만 가지 불안한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당신의 모습은 그저 자신감 넘치고 유능한 인재일 뿐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정신의학자 R. D. 랭 (R. D. Laing, 1927-1989)은, 이러한 내면과 외면의 극심한 분열 상태를 ‘존재론적 불안 (ontological insecur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자기 존재의 기반이 불안정한 사람은, 타인에게 ‘가짜 나 (false self)’를 보여줌으로써 진짜 자신 (true self)이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가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가 소모되며, 결국 진짜 자아는 더욱 위축되고 고립되어, 개인은 극심한 공허감과 소외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 내어, 이 ‘유능한 신입사원’이라는 가짜 자아를 필사적으로 연기하고 있습니다.


발표가 끝나자, 짧은 정적이 흐른 뒤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부장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팀장님은 당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말해줍니다. 당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가장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당신의 연기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당신은, 쏟아지는 동료들의 칭찬을 들으며 애써 미소를 짓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쁘지가 않습니다. 안도감은 잠시뿐, 그 자리를 거대한 허무함과 탈진 상태가 채웁니다. 그들의 칭찬은 진짜 당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연기한 ‘유능한 신입사원’이라는 배역에 박수를 보낸 것일 뿐입니다. 가면 뒤에 숨어 식은땀을 흘리던, 진짜 당신의 공포와 불안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성공적으로 타인을 속였지만, 그 대가로 당신은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습니다.


저녁이 되고, 당신은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노트북 화면을 봅니다. 당신이 만든 발표 자료, 당신 성공의 증거가 화면 가득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당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고 차갑게만 느껴집니다.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불안과 강박이 만들어낸 정교한 기계 장치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화장실로 가,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봅니다. 거울 속에는, 화려한 조명이 꺼진 무대 뒤의 배우처럼, 모든 분장을 지워낸 당신의 맨얼굴이 있습니다. ‘유능한 신입사원’의 가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오직 피곤하고, 두렵고, 길을 잃은 스물 몇 살의 청년만이 서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가?’라고 묻는, 당신 영혼의 희미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가 고통받는 근본 원인이 실체 없는 ‘나 (Anatta)’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오늘 하루 종일 그토록 지키려 애썼던 ‘잘 보이는 나’라는 것은, 사실 실체가 없는 허상, 당신의 생각과 감정이 만들어낸 한낱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은 그 그림자를 위해, 당신의 진짜 삶과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 버린 것입니다.


당신은 차가운 물을 받아 얼굴에 끼얹습니다. 물방울들이 당신의 뜨거운 얼굴을 식혀줍니다. 당신은 아직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당신은 아마 또다시 그 갑옷 같은 정장을 입고, 그 자신감 넘치는 가면을 쓰고 이 전쟁터로 출근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밤, 당신의 마음속에는 아주 작지만 중요한 균열이 생겨났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쓰고 있는 가면의 존재를, 그리고 그 가면의 무게를, 처음으로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성공의 정상에서 맛본 이 낯선 공허함은, 당신에게 실패의 징조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영혼의 간절한 신호입니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 가면을 벗어던질 용기가 나에게 있는가? 가면 뒤의 내 진짜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세상이, 그 맨얼굴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 질문들은 당장 답을 찾을 수 없는, 두렵고 막막한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압니다.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면 속에서 질식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진실한 삶이라는 것을. 당신은 젖은 얼굴을 닦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거울 속의 낯선 당신을, 당신의 진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10장: ‘좋은 엄마’라는 역할에 길을 잃다


오후 세 시, 당신은 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의 담임 선생님 맞은편에 앉아 있습니다. 좁은 교무실 안에는 코끝을 톡 쏘는 보드마카 냄새와, 한쪽 구석에서 쉴 새 없이 과열된 숨을 내쉬는 낡은 복합기의 열기, 그리고 방금 출력된 시험지 뭉치에서 피어오르는 옅은 잉크 향기가 뒤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물리적인 냄새들 위로, 수많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미묘한 공기가 떠다닙니다.당신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장 지적이고 온화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익숙한 또 하나의 무대입니다. ‘자녀의 교육에 열성적이고 현명한 어머니’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무대.



“따님은 정말 성실하고 착한 학생입니다. 과제도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수업 태도도 흠잡을 데가 없어요.”


선생님의 칭찬에, 당신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집니다. 당신의 지난 십수 년간의 노력이 인정받는 듯한 기분. 하지만 선생님의 말은 이어집니다.


“그런데… 가끔은 너무 틀에 박혀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창의적인 글쓰기나 토론 시간에는 좀처럼 자기주장을 드러내지 않아요.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문제 앞에서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혹시 아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는 않나요?”


선생님은 곧바로 덧붙입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 다 그렇죠. 어머님께서 워낙 잘 챙겨주시니, 아이가 바르게 자라는 겁니다. 정말 좋은 어머니세요.”


‘좋은 어머니’. 그 말이, 당신의 가슴에 칭찬이 아닌 무거운 돌처럼 얹힙니다. 당신은 감사하다고 말하며 상담을 마무리했지만, 교무실을 나서는 당신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말은 당신을 향한 찬사였지만, 당신에게는 그것이 당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진단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단지로 걸어 돌아오는 길, 가을 햇살은 따사롭지만 당신의 마음은 서늘합니다. 당신은 ‘좋은 어머니’라는 역할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해왔는지를 떠올립니다. 당신은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당신 자신을 지우고 아이의 삶을 위한 완벽한 설계자가 되었습니다. 아이의 두뇌 발달에 좋다는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었고, 창의력을 키워준다는 값비싼 교구를 사들였으며, 유치원부터 시작해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아이의 학업 성취도를 높여줄 최고의 학원과 과외를 빈틈없이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당신은 아이의 영양을 위해 매일 다른 식단을 짰고, 아이의 교우 관계를 위해 다른 엄마들과의 껄끄러운 관계도 감내했으며, 아이의 시간을 1분 1초까지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유능한 매니저였습니다.


그 모든 노력의 결과, 당신의 딸은 선생님의 말처럼 ‘성실하고 착한’, ‘흠잡을 데 없는’ 아이로 자라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 당신의 헌신이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의성이 부족하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요. 당신은 문득, 등골이 오싹해지는 질문과 마주합니다. 당신이 아이를 위해 쌓아 올린 이 완벽한 성벽이, 혹시 아이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당신의 사랑이, ‘좋은 엄마’라는 이름의 이 강박적인 페르소나가, 아이의 진짜 얼굴 위에 두꺼운 가면을 씌워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융 (Carl Jung)이 경고했던, 페르소나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좋은 어머니’라는 페르소나는 사회적으로 가장 큰 찬사를 받는 가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가면이 너무나 강력하고 이상적일 때, 그것은 어머니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면을 마주하는 자녀의 영혼까지도 억압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완벽한 어머니’를 연기할 때, 자녀는 무의식적으로 ‘완벽한 자녀’를 연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습니다. 아이의 내면에서는 수많은 진짜 목소리들이 아우성칩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게으르고 싶은 마음이, 때로는 정해진 길에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가장 깊은 곳에는, 부모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간절하고도 서글픈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이는 그 모든 진실한 목소리를 억누르고, 대신 페르소나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착한 아이’라는 가면을 쓰는 법을 배웁니다. 당신과 당신의 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게 가장 완벽한 가면을 씌워주는 공범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집에 돌아오자, 딸아이가 책상 앞에 앉아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침에 정해준 오늘의 학습 분량. 아이는 당신을 보고 짧게 목례를 하더니, 다시 책 속으로 고개를 파묻습니다. 그 뒷모습은 성실하고 대견하지만, 동시에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찌릅니다. 당신은 저 아이의 진짜 꿈이 무엇인지, 저 아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 아이가 마지막으로 아무 이유 없이 소리 내어 웃었던 것이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아이의 ‘상태’는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존재’와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단절의 감각이야말로, 20세기의 위대한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1878-1965)가 그의 저서 『나와 너, Ich und Du』에서 탐구했던 인간 관계의 핵심입니다. 부버는 인간이 세상을 만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나-그것 (I-It)’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너 (I-Thou)’의 관계입니다.


‘나-그것’의 관계에서, 우리는 상대를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분석하고 평가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상대는 더 이상 고유한 인격체가 아니라, 나의 경험 세계에 속한 하나의 ‘그것(It)’이 됩니다. 당신이 딸아이의 성적을 관리하고, 스케줄을 짜고, ‘흠잡을 데 없는 학생’이라는 ‘상태’를 만들어내려 애썼던 모든 행위는, 바로 이 ‘나-그것’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관계 속에서 딸아이는 당신에게 사랑하는 딸인 동시에, 당신의 ‘좋은 엄마’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할 중요한 대상, 즉 ‘그것’이었습니다.


반면, ‘나-너’의 관계는 다릅니다. 이 관계 속에서는 어떤 목적이나 수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온 존재를 다해 상대방의 고유한 존재인 ‘너(Thou)’를 만납니다. 그것은 관리나 평가가 아닌, 순수한 만남 그 자체입니다. 당신이 아이의 성적표가 아닌 아이의 눈빛을, 아이의 계획표가 아닌 아이의 한숨을, 아이의 ‘상태’가 아닌 아이의 ‘존재’ 그 자체를 마주할 때, 비로소 ‘나-너’의 관계가 열립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당신은 당신의 사랑이 지닌 왜곡된 형태를 깨닫습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그의 책에서 탐구했던 것처럼, 진정한 사랑, 즉 ‘자비 (Charity)’는 어떠한 조건도 없이 상대방의 존재 그 자체를 긍정하는 ‘나-너’의 관계 속에서만 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그것’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교묘한 조건들을 내걸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실한 딸이 되어준다면’, ‘좋은 성적을 받아온다면’,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그것’이 되어준다면’ 그 때야 비로소 사랑하겠다는, 무언의 계약과도 같았습니다.


이것은 순수한 자비가 아니라, 당신 자아의 불안과 성취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기적인 사랑, 즉 에로스 (Eros)의 변형된 형태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름 아래, 사실은 아이를 통해 당신 자신의 완벽함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당신은 아이와의 진정한 만남을 놓쳐버렸고, 당신의 마음에는 지금과 같은 깊은 공허함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텅 빈 거실을 둘러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먼지 하나 없는 마룻바닥, 각 잡힌 쿠션, 종류별로 정리된 책들. 이 집은 당신의 성실함과 능력을 증명하는 당신의 왕국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오늘, 이 완벽한 왕국이 실은 아무도 살지 않는 모델하우스에 불과했음을 깨닫습니다. 당신은 이 공간의 여왕처럼 군림했지만, 사실은 ‘좋은 주부’, ‘좋은 엄마’라는 역할에 갇힌 충실한 노예였습니다.


고대의 영지주의(Gnosticism)는, 우리가 이 물질세계의 법칙을 따르며 살아가는 한, 우리는 결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당신은 사회가 규정한 ‘좋은 엄마’의 법칙을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따랐습니다. 그 결과 당신은 사회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당신과 당신 딸의 영혼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자녀의 성공이라는 세속적 구원이 아니라, 이 낡은 역할의 감옥으로부터 당신과 당신의 아이를 해방시키는 영적인 구원, 즉 ‘앎(Gnosis)’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도,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과 헌신은 분명 진실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도교의 현자 노자(老子)는 “가장 위대한 도(道)가 사라지니, 인의(仁義)가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좋은 엄마’라는 인위적인 규칙(仁義)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은, 어쩌면 당신과 당신 딸 사이에 흘러야 할 자연스러운 사랑의 흐름(道)을 잃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규칙을 내려놓고, 그 자연스러운 흐름이 다시 이어지도록 가만히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조용히, 냉장고 문에 자석으로 붙어 있던 딸아이의 빼곡한 학원 시간표를 떼어냅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빈틈없이 채워진 사각형의 칸들. 그것은 당신의 불안과 사랑이 빚어낸 정교한 작품이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접어,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둡니다. 이것은 반항이 아니라, 항복입니다. 당신의 작은 지혜로는 아이의 삶을 완벽하게 설계할 수 없다는 겸허한 인정이며, 아이의 삶을 아이 자신의 손에, 그리고 더 큰 어떤 힘의 손에 맡기겠다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저녁이 되고, 딸아이가 방에서 나옵니다. 아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당신은 평소처럼 “오늘 외울 단어는 다 외웠니?”라고 묻는 대신, 아이를 식탁에 앉히고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타 줍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용감하고 낯선 질문을 건넵니다.


“혹시… 요즘 재미있는 거, 있니?”


딸아이는 놀란 눈으로 당신을 봅니다. 그 눈 속에는 경계심과 당혹감, 그리고 아주 희미한 호기심이 뒤섞여 있습니다. 아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요즘… 웹툰 새로 나온 거 있는데… 그거….”


당신은 그 웹툰이 무엇인지, 얼마나 유치하고 시간 낭비일지 판단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의 딸이라는 낯선 세계가 당신에게 처음으로 열어 보여준 작은 틈을,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그래? 나중에 엄마도 한번 보여줄래?”


그날 밤, 당신은 당신이 잃어버렸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경력도, 자유로운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수하고, 실패하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와 타인을 허락하는 ‘용기’였습니다.


‘좋은 엄마’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당신의 맨얼굴은 초라하고 불안하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자유와 진실함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은 길을 잃었지만, 바로 그 길 잃은 자리에서, 당신과 당신의 아이를 위한 새로운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11장: 승진 후 밀려오는 공허함


금요일 저녁, 거대한 빌딩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지고, 도시는 퇴근하는 사람들의 붉은 강물과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하얀 불빛으로 물결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흐름 속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40층의 넓은 사무실, 그 고요한 정점(頂點)에 홀로 앉아 있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 당신의 이름 앞에는 ‘상무’라는 새로운 직함이 붙었습니다. 삼십 년에 가까운 직장생활, 그 치열했던 경주의 결승선에서, 당신은 마침내 승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당신의 새로운 사무실은 이전의 부장실과는 모든 것이 다릅니다. 더 넓고, 더 전망이 좋으며, 책상은 더 묵직하고, 의자는 당신의 지친 몸을 더 안락하게 받아줍니다. 문 앞에는 ‘상무 OOO’라고 새겨진 반짝이는 명패가 당신의 새로운 지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당신에게 허리를 굽히는 직원들의 각도는 더 깊어졌고, 그들의 목소리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미묘한 경외와 두려움이 섞여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이 지난 세월 동안 꿈꾸고, 때로는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수많은 것들을 희생했던 바로 그 ‘성공’의 풍경입니다.


당신은 축하의 난초들이 늘어선 창가에 서서, 발아래 펼쳐진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봅니다. 수백만 개의 불빛들이, 마치 당신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반짝이는 보석들처럼 보입니다. 이 풍경의 정점에 서 있다는 감각.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원했던 짜릿한 권력의 맛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의 마음은 환희로 차오르는 대신, 텅 빈 풍선처럼 서서히 바람이 빠져나갑니다. 신은 이 모든 것을 얻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 같은 기이한 공허함이 밀려올 뿐이었습니다.


이번 한 주 동안, 당신은 이 새로운 고요함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팀장 시절에는 팀원들의 웃음소리와 논쟁 소리가, 부장 시절에는 다른 부서와의 끊임없는 협상과 조율의 소음이 당신의 주변을 채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의 사무실은 너무나 조용합니다. 당신에게 보고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서둘러 물러나고, 당신과 마주치는 직원들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당신을 피해 갑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들의 동료가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하나의 권력이 되었습니다. 정상은 이토록 외로운 곳이었던가.


당신은 책상으로 돌아와, 주말 동안 검토해야 할 서류 하나를 펼칩니다. 구조조정 대상 부서의 명단. 그곳에는 당신이 신입사원 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의 이름이, 십수 년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지워진 채, 차가운 활자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펜 끝에서, 그들의 삶과 그들 가족의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얻은 권력의 실체입니다. 당신은 이 권력을 얻기 위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을 서서히 마모시켜야 했고, 때로는 비정한 결정을 내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당신은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운명에 대해 연민하지 않고, 오직 조직의 효율이라는 ‘이성’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쳐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권력의 정점에서, 당신은 그 ‘이성’이라는 이름의 갑옷이 얼마나 차갑고 비인간적인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1900-1980)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 인간의 소외를 설명하며 제시했던 ‘시장 지향성(marketing orientation)’ 인격의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프롬에 따르면, 시장 지향성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고유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느끼는 대신, 시장에서 팔려야 할 하나의 ‘상품’으로 경험합니다. 당신은 지난 삼십 년간, ‘나’라는 상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더 좋은 학력을 쌓고, 더 많은 실적을 내고, 더 유능한 인맥을 만들고, 더 신뢰감 있는 페르소나를 연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상무’라는 최고가에 당신 자신을 팔아넘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상품은 팔리고 나면 텅 비게 마련입니다. 상품에게는 내면세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이 공허함은, 당신의 영혼이 마침내 상품이 되어버렸음을, 그 생명력을 모두 소진해버렸음을 알리는 비상 신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과거를 돌아봅니다. 당신의 모든 행동은 ‘성공’이라는 미래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의 실존 단계를 ‘미학적-윤리적-종교적’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당신의 삶은, 조직의 규칙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윤리적’ 단계에 철저히 복무한 삶이었습니다. 당신은 단 한 번도 그 규칙 자체를 의심하거나, 그 너머의 의미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윤리적 단계의 끝에는 반드시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회적 규칙이나 성공도, 죽음과 고통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적 물음에 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공허함은, 바로 그 윤리적 단계의 파산 선고이자, 더 깊은 차원의 의미를 찾아 떠나야만 하는 ‘종교적’ 단계로의 고통스러운 부름입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창가로 갑니다. 발아래 펼쳐진 도시는, 마치 거대한 장기판처럼 보입니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백만 개의 고독한 영혼들이 각자의 욕망과 불안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들과 다르다고, 당신은 이 장기판의 말을 움직이는 자라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깨닫습니다. 당신 또한, 저들과 똑같은 고독한 영혼일 뿐이라는 것을. 오히려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가장 깊은 고독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 (T. S. Eliot, 1888-1965)은 그의 시 「속 빈 사람들(The Hollow Men)」에서, 현대인의 내면을 “우리는 속 빈 사람들… 머릿속은 짚으로 채워져 있네”라고 노래했습니다. 당신의 머릿속은 온갖 경영 전략과 시장 분석 데이터와 조직 관리 기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가슴은, 당신의 영혼은 텅 비어 있습니다. 당신은 성공이라는 이름의 완벽한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당신은 성실했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모든 노력은 ‘자기성 (selfness)’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향했습니다. 헉슬리가 경고했던 것처럼, 당신은 신을 향해 나아가는 대신, ‘나의 성공’이라는 우상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 결과, 당신의 영혼에서는 신성이 거할 자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신 사무실의 이 장엄한 침묵은, 신비가들이 말하는 비움과 고요를 통한 신과의 합일의 장소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의미가 빠져나가 버린, 진공의 죽은 침묵입니다.



당신은 책상으로 돌아와, 서랍 한구석에 넣어두었던 낡은 지갑을 꺼냅니다. 그 안에는 빛바랜 가족사진이 한 장 들어 있습니다. 십여 년 전,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어느 유원지에서 찍은 사진. 사진 속의 당신은 지금보다 훨씬 젊고, 직급도 낮았으며,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웃고 있습니다. 계산되지 않은, 조금은 어색하지만 진실한 미소. 당신은 사진 속의 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당신 자신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봅니다. 그곳에는 가난했지만 충만했던 어떤 순간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찾아야 할 것은 더 높은 직위나 더 큰 성공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바로 이 사진 속에 담긴,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마주보던 그 순간의 진실입니다. 도교의 현자 노자(老子)는 “가장 높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상선약수)”고 말하며, 다투지 않고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삶의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당신은 평생을 물의 흐름을 거슬러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려 애썼고, 마침내 도달한 이 메마른 정상에서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은 월요일 아침에 결재해야 할 구조조정 서류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 서류 위의 이름들은 더 이상 추상적인 기호가 아닙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삶의 계절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과 똑같은 고독한 영혼들입니다. 당신이 얻은 권력은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책임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이 공허함 속에서 어떤 길을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당신은 더 이상 이 ‘상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그 뒤에 무엇이 있든, 그것이 얼마나 초라하고 상처 입은 얼굴이든, 당신은 그 얼굴과 마주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조용히 사무실의 불을 끄고, 텅 빈 복도를 걸어 나옵니다. 당신이 이룬 성공의 왕국은 당신 등 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당신은 이제, 왕좌에서 내려와, 당신 자신의 내면이라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황무지를 향해, 두렵고도 외로운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속 빈 허수아비가, 다시 진짜 사람이 되기 위한 여정. 그 길고 긴 여행이, 바로 오늘, 이 낯선 공허함 속에서 막 시작되었습니다.






12장: ‘인싸’가 되기 위한 노력, 진짜 나는 누구인가


금요일 아침, 당신은 알람 소리가 아닌 스마트폰의 알림 진동에 잠을 깹니다. 밤새 당신이 속한 수십 개의 단체 대화방에서 주고받은 무수한 메시지들. 당신은 눈을 뜨자마자, 잠들기 직전까지 확인했던 그 흐름을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이불 속에서 가장 먼저 어젯밤의 기록들을 확인합니다. 당신이 속하지 못했던 술자리 사진들, 당신이 모르는 그들만의 농담들. 그 사진들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 ‘소외감’이라는 이름의 작은 바늘이 꽂힙니다. 그리고 당신은 다짐합니다.


‘오늘은, 반드시 모든 것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인싸(Insider)’가 되기 위한 당신의 하루가 시작되는 방식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기분이나 컨디션에 따라 하루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타인의 인정과 소속감이라는 외부의 자극에 의해, 마치 정교한 자동인형처럼 당신의 하루를 설계하기 시작합니다. 옷장 앞에서는 어떤 옷이 가장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인지, 그러면서도 너무 튀지 않아 모두에게 호감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강의실에서는, 당신이 정말로 궁금해서가 아니라, 교수님과 학우들에게 ‘학구적이고 똑똑한 학생’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가장 그럴듯한 질문을 머릿속으로 조립합니다.


점심시간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전투 시간입니다. 당신은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당신의 레이더를 최고 수준으로 가동합니다. 누가 누구와 앉아 있는지, 어떤 그룹이 가장 영향력 있고 ‘힙한’ 그룹인지를 순식간에 스캔합니다. 그리고는 가장 밝은 미소와 목소리로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연스럽게 가장 중심이 되는 테이블에 합석합니다. 당신은 그들의 대화 주제를 따라가기 위해, 어젯밤 당신이 보지도 않았던 드라마의 줄거리를 꿰고 있는 척하고, 당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음악에 대해 열광적인 표정을 짓습니다. 당신은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라는 흐름에 당신의 존재를 안전하게 편승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 (David Riesman, 1909-2002)이 그의 저서 『고독한 군중, The Lonely Crowd』에서 묘사한 ‘타인 지향적(other-directed)’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과거의 인간이 부모나 사회의 전통이라는 내면화된 나침반을 따라 살아가는 ‘전통 지향적’ 혹은 ‘내부 지향적’ 인간이었다면, 현대의 인간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 평가라는 외부의 레이더에 의존해 살아가는 ‘타인 지향적’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행동과 선택은,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진정한 욕망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끊임없는 불안의 속삭임에 의해 결정됩니다. 당신은 당신 삶의 주인이 아니라, 당신 주변 모든 사람들의 암묵적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용된 충실한 하인입니다.


오후 내내, 당신의 연기는 계속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관리합니다. 오늘 아침, 강의실 창가에서 찍은 가장 지적으로 보이는 사진 한 장을 고릅니다. 그리고는 그 사진에, 가장 위트 있고 감성적으로 보일 문장 하나를 덧붙이기 위해 수십 분을 고민합니다. ‘#개강 #일상 #공부스타그램’. 당신은 당신의 실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의 이미지’를 정성껏 조각하고 있습니다. ‘좋아요’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당신은 잠시 안도감을 느끼지만, 그 안도감은 이내 사라지고, 더 많은 ‘좋아요’를 향한 갈증만이 남습니다.


불교의 세계관 속에 등장하는 ‘아귀(餓鬼, Preta)’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귀는 집채만 한 배를 가졌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해서 아무리 먹고 마셔도 영원히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당신은 지금, ‘인정’과 ‘소속감’이라는 음식을 갈구하는 영적인 아귀가 되었습니다. 타인의 관심이라는 음식을 아무리 삼켜도, 당신의 내면은 결코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큰 허기와 갈증에 시달릴 뿐입니다.


마침내 저녁이 되고, 당신은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개강 파티 장소로 향합니다. 시끄러운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과, 술과 웃음소리로 가득 찬 공간. 당신은 입구에서부터 당신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당신의 페르소나를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립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웃으며 아는 척을 하고, 여러 무리를 오가며 당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가장 분위기가 좋은 테이블의 중심에 서서 재치 있는 농담을 던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성공합니다. 모두가 당신을 반기고, 당신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며, 당신의 잔에 술을 채워줍니다. 당신은 이 파티의 ‘인싸’, 완벽한 내부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성공의 정점에서, 당신의 마음속에 기이한 정적이 찾아옵니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집니다. 당신을 향해 웃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이, 마치 텔레비전 화면 속의 배우들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당신은 분명 이 소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지만, 동시에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지독한 고독감을 느낍니다. ‘고독한 군중’이라는 책의 제목이, 이제는 단순한 사회학 용어가 아니라, 당신의 실존 전체를 꿰뚫는 비수 같은 진실이 되어 가슴에 박힙니다.


당신은 잠시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그 혼란스러운 공간을 빠져나옵니다. 술집의 복도 끝, 창문 앞에 서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문틈으로 희미하게 들려옵니다. 당신은 창문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파티의 중심에서 웃고 있던 그 자신감 넘치는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술기운에 살짝 상기된 채, 텅 비고 지친 표정의 낯선 사람이 서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이 바로, 모든 연기가 끝난 뒤 가면이 벗겨진 당신의 맨얼굴임을 알아차립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당신이 ‘인싸’가 되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은, 사실 ‘진짜 나’를 지워나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타인의 기대를 당신의 욕망으로 착각했고, 타인의 유행을 당신의 취향이라고 믿었으며, 타인의 인정을 당신 존재의 가치라고 여겨왔습니다.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이 되려고 애쓴 나머지, 정작 당신 자신이 되는 법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이 세계의 근원을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영원히 무언가를 갈망하는 거대한 힘, 즉 ‘살려는 의지 (Wille zum Leben)’라고 보았습니다. 당신이 ‘인싸’가 되기 위해 벌이는 모든 필사적인 노력은, 바로 이 거대한 ‘의지’가 당신의 젊은 육체와 정신을 숙주 삼아 날뛰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소속되려는 의지’이고, ‘인정받으려는 의지’이며, ‘잊혀지지 않으려는 의지’입니다. 이 맹목적인 의지는 당신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라, 더 많은 파티에 가라, 더 많은 ‘좋아요’를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소멸할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대로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고쳐 쓰고 웃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고독한 ‘아싸(Outsider)’의 길을 선택해야 할까요.



당신은 창밖의 밤하늘을 봅니다. 수많은 별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빛으로 고요히 빛나고 있습니다. 어떤 별은 더 밝고, 어떤 별은 더 희미하지만, 그 어떤 별도 다른 별이 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본성 (nature)에 따라 빛을 발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다름이 모여, 밤하늘이라는 장엄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소속감’이란, 억지로 무리의 중심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저 별들처럼 자기 자신의 고유한 빛을 찾아, 전체의 조화 속에 제자리를 찾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아직 당신의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밤, 당신은 당신이 누구가 ‘아닌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연기해 온 저 밝고 명랑한 ‘인싸’가 아닙니다.


당신은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은 건물 밖으로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마십니다. 당신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합니다.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렵지만, 더 이상 거짓된 군중 속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진짜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당신의 스무 살 남짓한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정답 없는 진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당신은 이제껏 걸어왔던 길과는 전혀 다른, 낯설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예감합니다. 그 길의 끝에서, 당신은 마침내 가면을 벗고, 당신 자신의 진짜 얼굴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텅 빈 웃음이 아닌, 진실한 침묵 속에서.



...

keyword
이전 02화제1부: 균열 (The Cr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