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균열 (The Crack)

by DrLeeHC

제1부: 균열 (The Crack)


1장: 취업 면접 가는 지하철, 무표정한 얼굴들 속에서 길을 잃다


새벽 다섯 시 반, 알람 소리가 칠흑 같은 어둠을 찢고 당신의 고막을 파고듭니다. 당신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더듬어 찾아 소리를 끕니다. 잠시 동안, 세상은 다시 고요해집니다. 하지만 이내 당신의 심장이 그 고요를 깨뜨리기 시작합니다. 쿵, 쿵, 쿵.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낮고 빠른 북소리. 오늘은 결전의 날입니다. 수십 통의 이력서를 보낸 끝에, 꿈에 그리던 대기업의 최종 면접이 있는 날.


당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킵니다. 창밖은 아직도 짙은 밤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하루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 작은 자취방에서, 당신은 지난 몇 년간 수없이 반복해 온 의식을 치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나’라는 이름의 불안한 원석을, ‘인재’라는 이름의 반듯한 상품으로 깎아내는 과정입니다. 샤워를 하며, 당신은 어젯밤 늦게까지 외웠던 예상 질문과 모범 답안을 머릿속으로 되뇌입니다. ‘당신의 강점은 무엇입니까?’ ‘성실함과 책임감입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경험은?’ ‘팀 프로젝트에서 갈등을 중재하고 더 좋은 결과로 이끌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신의 진짜 강점은 무엇인지, 당신의 삶에서 정말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면접관들이 듣고 싶어 하는 정답을, 가장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연기해내는 것뿐입니다.


옷장 문을 엽니다. 그 안에는 당신의 것이되 당신의 것이 아닌 옷 한 벌이 걸려 있습니다. 며칠 전, 아르바이트 월급을 털어 장만한 남색 정장. 아직 몸에 익숙하지 않은 옷의 빳빳한 감촉이 당신을 더욱 긴장하게 만듭니다. 당신은 조심스럽게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맵니다. 어설픈 손놀림에 몇 번이나 매듭을 풀었다 다시 조입니다. 거울 앞에 선 당신의 모습은 낯섭니다. 그곳에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아니라, ‘대기업 입사를 희망하는 유능하고 성실한 청년’이라는 역할을 맡은 배우가 서 있습니다. 당신은 그 배우를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입꼬리는 올라가지만, 눈은 웃지 않습니다.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당신은 갑옷을 입고 전쟁터로 향하는 병사가 됩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피부에 닿자, 당신은 다시 한번 당신의 무기들을 점검합니다. 잘 다려진 셔츠, 반듯한 넥타이, 광을 낸 구두, 그리고 머릿속에 가득 채워 넣은 수많은 모범 답안들. 이만하면 되었다. 당신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하철역으로 향합니다.

플랫폼은 이미 당신과 같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로 가득합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색깔의 정장을 입고, 비슷한 표정으로, 비슷한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잠시 후, 굉음과 함께 열차가 도착하고, 당신은 거대한 인파의 물결에 휩쓸려 객차 안으로 밀려 들어갑니다. 숨 막히는 소음과 탁한 공기. 누군가의 가방이 당신의 옆구리를 찌르고, 누군가의 팔꿈치가 당신의 등을 떠밉니다. 당신은 구겨질세라 정장 옷깃을 여미고, 혹시라도 구두가 밟힐까 봐 안간힘을 씁니다. 이 좁고 혼잡한 공간 속에서, 당신은 ‘나’라는 개체를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텨야 합니다.


한참을 갔을까, 열차가 한강을 건너는 다리 위로 올라섭니다. 창밖으로 회색빛 도시의 거대한 마천루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당신이 오늘 향하는 곳도 바로 저 거대한 빌딩 숲의 일부입니다. 저곳에 들어가기 위해, 저곳의 일부가 되기 위해, 당신은 지난 몇 년간 잠을 줄이고, 친구를 멀리하며, 청춘의 많은 것들을 포기해왔습니다. 저곳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이 모든 고통과 불안이 끝날 것이라고, 당신은 굳게 믿어왔습니다.

그때, 당신은 무심코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어깨를 잔뜩 웅크린 중년의 남성, 화장을 고치고 있지만 눈은 피곤에 지쳐 있는 젊은 여성, 교복을 입은 채 졸고 있는 학생, 아무런 표정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노인.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희망도. 그저 깊은 피로와 무관심, 체념만이 엷게 깔려 있을 뿐입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마네킹들의 전시회 같습니다. 저들도 모두 당신처럼, 어딘가의 ‘정답’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저 무표정한 얼굴들 뒤에는, 어떤 간절한 욕망과 쓰라린 상처들이 숨겨져 있을까요.


당신은 문득, 당신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집니다. 고개를 돌려 어두운 지하철 유리창을 봅니다. 그곳에는 창밖의 풍경과, 객차 안의 수많은 얼굴들과, 그리고 당신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져 있습니다. 당신은 그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당신의 얼굴 또한, 당신이 방금 바라보았던 저 무표정한 군중의 얼굴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잘 깎은 턱선도, 신경 써서 매만진 머리도, ‘인재’의 미소를 연습했던 입꼬리도, 그 모든 것이 지워진 채, 그저 텅 비고 지친 표정의 낯선 청년 하나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순간, 당신과 그들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나’와 ‘타인’이라는 단단한 구분이 녹아내립니다. 당신이 지켜내려 애썼던 그 반듯한 정장과, 머릿속의 모범 답안과,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은밀한 자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당신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이 거대한 무표정의 강물을 이루는 이름 없는 물방울 하나일 뿐입니다. 당신은 길을 잃었습니다. 면접 장소로 가는 물리적인 길이 아니라, ‘나’라고 믿어왔던 존재의 좌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헉슬리가 그의 책 『영원의 철학』에서 그토록 경고했던 ‘개성(personality)’의 실체가 아닐까요. 당신이 공들여 만들어낸 그 ‘취업준비생’이라는 페르소나는, 사실 당신의 참된 본질을 가리고 있는 두꺼운 갑옷, ‘악취나는 자기성(selfness)의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 그리고 지금 당신은, 이 지하철이라는 거대한 익명의 공간 속에서, 당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갑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갑옷의 무게에 짓눌려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쇠 상자,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사라 (Samsara, 윤회)’의 수레바퀴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모두 ‘취업’, ‘승진’, ‘성공’이라는 다음 역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열차는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의 역을 지나면, 어김없이 다음 역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 수레바퀴를 굴리는 힘은 바로 ‘갈망’과 ‘집착’입니다. 직업에 대한 갈망, 인정에 대한 갈망, 안정에 대한 갈망.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낙오되어서는 안 된다는 처절한 집착. 이 갈망과 집착이 우리 모두를 무표정한 얼굴로 만들고,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게 하며, 이 숨 막히는 아침의 전쟁을 매일같이 치르게 합니다.


영지주의(Gnosticism)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지하철은 불완전한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신성한 기원 플레로마 (Pleroma, 충만)를 잊어버린 채, 물질과 사회 시스템이라는 어두운 감옥에 갇혀, 세상의 지배자 (Archons)가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영혼들입니다. 당신의 면접은, 그 지배자들에게 ‘나는 당신들의 시스템에 유용한 부품이 될 수 있다’고 증명하는 시험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아침 내내 준비했던 모든 것은, 당신의 참된 본질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철저히 숨기고 시스템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유리창에 비친 당신의 눈을 깊이 들여다봅니다. 그 텅 빈 눈동자 속에서, 당신은 아주 희미한 불꽃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것이 정말 전부인가?’라고 묻는, 당신 안의 가장 깊은 곳에 갇혀 있던 진짜 당신의 목소리입니다.


힌두교의 베단타 철학은, 그 불꽃의 이름을 ‘아트만 (Atman)’, 즉 참된 자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아트만은, 온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실재인 ‘브라흐만 (Brahman)’과 다르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당신은 이 무표정한 군중 속의 부속품이 아니라, 우주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


“이번 역은 삼성, 삼성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안내 방송이 당신을 현실로 끌어냅니다. 당신의 목적지입니다. 당신은 인파를 헤치고 열차에서 내립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자, 눈부신 아침 햇살과 함께 거대한 빌딩 숲이 당신을 압도합니다. 조금 전 지하의 어둠 속에서 마주했던 그 깊은 혼란은 마치 한순간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당신은 면접 장소인 빌딩을 향해 걷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바쁜 걸음으로 당신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들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이제 당신은 그 표정 뒤에 숨겨진 그들의 고단한 삶과, 당신과 다르지 않은 불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내려는 그들의 작고 치열한 의지를 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당신의 경쟁자나 익명의 타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이 거대한 수레바퀴 위를 구르고 있는 동지들입니다.


빌딩의 거대한 회전문 앞에 섭니다. 당신의 심장은 여전히 불안으로 떨리고, 손에는 땀이 찹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무언가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연극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배우처럼,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주 작은 고요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했듯, 당신은 면접의 결과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면접관의 마음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연극에 어떤 자세로 임할 것인가 하는 당신의 마음뿐입니다.


당신은 넥타이 매듭을 고쳐 잡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적을 속이기 위한 갑옷을 챙겨 입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거대한 삶의 무대 위에서 오늘 당신에게 주어진 ‘취업준비생’이라는 역할을, 존중과 연민의 마음으로 성실하게 연기하겠다는 조용한 다짐입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진짜 면접은, 저 높은 곳의 회의실이 아니라, 조금 전 지하철의 어둠 속에서 이미 끝났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당신에게 던졌던 질문은 ‘당신의 강점은 무엇입니까?’였지만,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 던진 질문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가면 뒤에 숨어 있는 당신은, 진정 누구인가?’

당신은 그 질문을 가슴에 품고, 천천히, 회전문 안으로 들어섭니다.





2장: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다


새벽 세 시,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잠들고 오직 어둠과 침묵만이 존재하는 시간. 당신은 방금 막,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아득한 잠의 늪으로 빠져들던 참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아기 침대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작살처럼 날아와 당신의 짧은 평화를 꿰뚫습니다. ‘으앙-’


당신의 몸은 생각보다 먼저 반응합니다. 수면 부족으로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옆에서 곤히 잠든 남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옵니다. 발소리를 죽여 아기 방으로 향하는 그 몇 걸음의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는 영겁의 터널처럼 느껴집니다. 뼈마디가 삐걱거리고, 머리는 몽롱하며, 당신의 의식 전체가 ‘피곤하다’는 단 하나의 감각으로 축소됩니다.


아기를 안아 올리자, 작고 뜨거운 몸체가 당신의 품에서 필사적으로 버둥거립니다. 기저귀를 확인하고, 이상이 없음을 안 뒤, 당신은 아기를 다독이며 주방으로 향합니다. 분유를 타는 당신의 손놀림은 이제 너무나 익숙해서, 어둠 속에서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입니다. 물의 온도, 분유의 양, 젖병을 흔드는 각도. 당신의 몸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의 정교한 육아 기계가 되어 이 모든 과정을 자동적으로 수행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지난 몇 달 동안, 당신의 삶은 이처럼 수없이 반복되는 생명의 제의 (祭儀)로 채워져 왔습니다.


따뜻한 젖병을 물자, 아기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듭니다. 당신은 거실 소파에 앉아, 아기를 품에 안고 가만히 등을 토닥입니다. 창밖은 여전히 깊은 밤. 도시의 불빛들도 대부분 잠들어, 세상에는 오직 당신과, 당신의 품에 안겨 젖병을 빠는 이 작은 생명체만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쪽, 쪽, 하고 규칙적으로 젖을 빠는 소리가 당신의 지친 신경을 조금씩 어루만집니다.


바로 그 고요의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 불쑥, 낯선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이 질문과 함께, 당신의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불과 일 년 전의 당신을 떠올립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직장에서는 유능한 대리였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치 있는 이야기꾼이었으며, 주말이면 혼자서 영화를 보거나 서점에 들러 시간을 보내는 자유로운 개인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었고, 가꾸고 싶은 취미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온전히 당신 자신만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요.


당신은 고개를 들어 거실 한쪽 벽에 걸린 당신의 결혼 전 사진을 봅니다. 어둠 속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저렇게 자유롭게 웃던 사람, 저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로 반짝이던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지금의 당신이 있습니다. 잠이 부족하고, 머리는 부스스하며, 온몸에서는 희미한 분유 냄새가 나는, ‘엄마’라는 이름의 존재.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이것은 행복한 희생이라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모두가 말했지만, 그 누구도 이 희생이 당신의 존재를 이토록 철저하게 지워버리는 과정이라고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아이를 사랑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지만 당신은 또한, 사라져버린 당신 자신을 그리워합니다. 이 모순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신은 길을 잃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나 자신을 잃어버린 슬픔. 이 두 개의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당신은 이기적인 엄마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야말로, 올더스 헉슬리가 그의 책에서 묘사한,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자기 죽음 (Mortification)’이 아닐까요 . 수많은 성자와 신비가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의식적으로, 고통스러운 수행을 통해 걸어갔던 그 ‘자아 소멸’의 길을, 당신은 지금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일 밤낮으로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을 위해 자신의 에고를 버렸지만, 당신은 이 작은 생명을 위해 당신의 에고를 매 순간 제물로 바치고 있습니다. 헉슬리가 인용한 윌리엄 로의 말처럼,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기 부정은 종종 더 교묘한 형태의 자기애와 교만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이 ‘자기 상실’은 그런 교만이 끼어들 틈조차 없는,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형태의 비움입니다.


젖병이 비워지고, 아기는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당신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당신의 품에 온전히 몸을 맡긴, 작고 따뜻한 무게. 새근거리는 숨결이 당신의 목덜미를 간질입니다. 세상의 모든 경계심을 내려놓은, 완전한 신뢰의 무게. 당신은 그 무게를 느끼며, 아이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립니다.

바로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당신을 짓누르던 서러움과 죄책감, 혼란의 감정들이 봄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녹아내린 텅 빈 자리에,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거대하고 충만한 감정이 솟아오릅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 즉 ‘자비 (Charity)’의 감각입니다. 이 사랑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라는 개인의 감정이라기보다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통로 삼아 흘러들어오는, 우주적인 어떤 힘처럼 느껴집니다.

이 사랑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가 나중에 효도하기를, 당신의 희생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이 작은 생명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는 사실, 그 존재 자체가 완전한 기쁨이 됩니다. 헉슬리가 인용한 성 베르나르의 말처럼,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며,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한다.” 당신은 지금, 그 순수한 사랑의 상태에 있습니다. 당신의 ‘나’가 완전히 지워진 바로 그 지점에서, 당신은 비로소 진짜 사랑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잠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작은 입술, 꼭 감은 두 눈, 보드라운 솜털. 이 작은 얼굴 속에, 당신은 생명의 가장 깊은 신비를 봅니다. 힌두교의 베단타 철학은, 이 세상의 모든 개별 생명체 (Atman, 아트만)가 사실은 우주적 근원 (Brahman, 브라흐만)의 다른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에게서 태어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주의 거대한 생명이 당신을 통해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야콥 뵈메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 작은 생명체는 신의 영원한 의지가 ‘어둠의 심연 (Ungrund’)을 뚫고 빛으로 창조된,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단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지친 여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우주의 창조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신성한 통로입니다. 당신의 두 팔은,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보호하는 거룩한 성소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나’는, 사실 이 위대한 역할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 껍데기뿐인 작은 자아였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했듯,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육체와 역할이라는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육체와 역할을 통해 당신 안에 있던 신성한 빛의 불꽃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다시 침대에 눕힙니다. 그리고는 잠시, 창가에 서서 동터오는 새벽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어둠과 빛이 뒤섞인, 경이로운 보랏빛 하늘. 세상이 다시 깨어나고, 곧 또다시 소란스러운 하루가 시작될 것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피곤하고, 당신의 삶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길을 잃지 않습니다.


사라져버린 ‘나’를 찾아 헤매던 당신은, 마침내 ‘나’를 잃어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당신 자신과 만났습니다. 새벽 세 시의 울음소리는 당신의 잠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깊은 잠에서 깨운 자명종이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압니다. 당신의 삶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라, ‘나’를 기꺼이 내어주는 여정임을. 그리고 그 ‘자기 비움’의 끝에,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사랑과 평화가 기다리고 있음을.


당신은 당신의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침대에 눕습니다. 옆에서 잠든 남편의 고른 숨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은 지친 몸을 뉘이지만, 당신의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깨어 있습니다. 오늘 밤, 당신은 한 명의 여자를 잃었고, 한 명의 어머니를 얻었으며, 그 너머에서 이름 없는 영원한 생명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3장: 세상이라는 더 큰 질문을 만나다


밤 열한 시, 세상은 당신의 작은 책상 위, 스탠드 불빛이 비추는 동그란 원 안으로 축소됩니다. 방 안의 다른 모든 것은 어둠 속에 잠겨 있습니다. 침대도, 옷장도, 벽에 붙은 아이돌의 포스터도. 오직 이 작은 빛의 원 안에만 당신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의 중심에는,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단 하나의 관문,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향한 길고 긴 경주가 있습니다. 당신은 수학 문제집,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롭다는 ‘킬러 문항’들로 이루어진 페이지 위에 당신의 모든 의식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문제 앞에서 당신의 시간이 멈춘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복잡한 함수와 기하학적 도형, 끝없이 이어지는 기호의 나열. 당신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지금까지 배운 모든 공식을 총동원합니다. 미분을 해보고, 적분을 해보고, 보조선을 긋고, 경우의 수를 나눕니다. 하지만 당신이 내딛는 모든 길은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고, 당신이 세우는 모든 가정은 모순이라는 벽에 부딪혀 무너져 내립니다.

처음에는 승부욕이 끓어올랐습니다. ‘반드시 풀어내고야 말겠다.’ 하지만 그 승부욕은 이내 초조함으로, 그리고 이제는 깊은 절망감으로 바뀌었습니다. 문제집의 오른쪽 상단에 적힌 ‘정답률 4%’라는 숫자가 당신을 비웃는 것 같습니다. 백 명 중 아흔여섯 명은 풀지 못하는 문제. 어쩌면 당신은 그 아흔여섯 명 중 하나일 뿐이라는 냉정한 사실이, 차가운 물처럼 당신의 심장을 적십니다.

당신은 지난 십 년간 ‘정답을 찾는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국어 지문 속에서 작가의 의도를, 역사 연표 속에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영어 단어 속에서 가장 적절한 유의어를 찾아내는 훈련. 세상은 거대한 문제집이었고, 당신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정답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느냐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성공적인 삶. 그 모든 것은 이 정답 찾기 게임의 최종 보상으로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이 작은 사각형의 문제 하나 앞에서 길을 잃고 주저앉아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당신의 미래 전체가 실패로 귀결될 것 같은 끔찍한 공포가 엄습합니다.

당신은 연필을 내려놓고, 지우개 가루로 더러워진 손등을 봅니다. 그리고는 지친 눈을 들어 창밖을 봅니다. 당신의 방은 아파트 15층. 창밖으로는 도시의 야경이 보석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이 아득하게 열려 있습니다. 저 멀리,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반짝이는 별 몇 개.


당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하늘을 쳐다본 적이 없었던가.

창밖의 세계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저 나무는 왜 저런 모양으로 자라야 하는지, 저 별은 왜 저토록 멀리서 빛나야 하는지, 바람은 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창문을 스쳐 지나가는지, 그 어떤 것에도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그곳에는 오직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이해할 수 없는 신비와, 거대하고 고요한 존재 그 자체만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다시 책상 위의 수학 문제로 시선을 돌립니다. 수많은 공식과 논리의 사슬로 묶인, 명확한 단 하나의 정답을 향해 달려가는 기호들의 세계. 조금 전까지 당신의 우주 전체였던 그 작은 사각형이, 이제는 너무나 비좁고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창밖의 저 거대한 신비에 비하면, 이 문제와 그 정답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이것이 정말, 당신의 십 대를 전부 바쳐 매달려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인가.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서 아주 근원적인 균열이 일어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문제’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정답 찾기’라는 게임의 규칙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된 것입니다. 헉슬리가 그의 책에서 인용한 인도의 현자 샹카라의 말처럼, 당신은 지금까지 수많은 행위 (acts)를 통해 진리를 얻으려 했지만, 진정한 앎은 행위가 아닌 ‘분별 (discrimination)’을 통해 온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당신은 ‘푸는 법’을 배우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왜 풀어야 하는지’를 묻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당신이 갇혀 있던 세계는, 영지주의 (Gnosticism)에서 말하는 불완전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세계와도 같습니다. 그 세계는 완벽한 논리와 질서를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더 높은 차원의 진정한 실재를 가리고 있는 인공적인 시스템일 뿐입니다. 학교와 입시 제도라는 데미우르고스는,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규칙을 만들어 당신의 영혼을 그 안에 가두고, 당신 안에 잠재된 신성한 빛의 불꽃을 잊게 만듭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이 답답함과 반항심은, 바로 그 거짓된 시스템에 갇힌 당신 영혼의 비명입니다.


선불교 (Zen)의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화두 (話頭)’라는, 이성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조주 선사에게는 왜 수염이 없는가?” “한 손으로 치는 박수 소리는 어떤 소리인가?” 이 질문의 목적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답을 찾으려는 이성의 발버둥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마침내 그 이성의 감옥을 부수고 더 높은 차원의 직관적 앎, 즉 깨달음으로 도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 앞의 이 수학 문제는, 당신에게 주어진 최초의 화두입니다. 이 문제는 당신의 수학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의 세계 전체를 뒤흔들기 위해 온 것입니다.


헉슬리가 또 다른 책에서 인용한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인식의 문이 정화된다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무한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입시’라는 이름의 더러워진 문을 통해 세상을 보아왔습니다. 그 문을 통해 본 세상은 오직 문제와 정답, 경쟁과 서열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풀리지 않는 이 문제 앞에서 당신은 처음으로 그 문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문밖에는 당신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광대하고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당신은 조용히 문제집을 덮습니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더 큰 질문을 향한 용기 있는 첫걸음입니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해도 괜찮다는, 정답을 찾지 못하는 삶도 존재할 수 있다는, 당신 스스로에게 건네는 최초의 허락입니다. 당신이 지난 십 년간 쌓아온 ‘모범생’이라는 단단한 자아에, 당신 스스로 작은 틈을 내는 순간입니다. 헉슬리가 인용한 신비가들의 가르침처럼, 참된 앎은 모든 개념과 형상을 내려놓은 ‘알 수 없음의 어둠’ 속에서만 찾아옵니다 . 당신은 지금, 그 거룩한 무지(無知)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엽니다. 차가운 밤공기가 훅 밀려 들어와, 스탠드 불빛 아래 고여 있던 탁한 공기를 밀어냅니다. 당신은 깊게 숨을 들이마십니다. 공기 속에는 젖은 흙냄새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와, 이름 모를 밤의 향기가 섞여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수학 공식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살아있는 세상의 언어입니다.

당신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당신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눕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당신은 다시 저 문제집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입시라는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전의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정답 없는 세상의 광대함이 작은 씨앗처럼 심어졌습니다.


이제 당신은 압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문제집 뒤에 정답이 나와 있는 질문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오히려 풀 수 없기에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마침내 그 질문 자체가 길이 되고 답이 되는 그런 질문들이라는 것을. 오늘 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하나는 당신에게 패배감을 안겨주는 대신, 당신의 영혼을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끄는 창문이 되어주었습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창밖의 희미한 별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조용히, 세상이라는 더 큰 질문을 향해 당신의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4장: 야근 사무실의 종이컵, ‘이게 전부일까?’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감에 당신은 잠시 펜을 놓습니다. 텅 빈 사무실, 차가운 형광등 불빛만이 당신의 책상 위를 섬처럼 외롭게 비추고 있습니다. 디지털시계의 붉은 숫자는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을 무심하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부하 직원마저 조심스러운 목례와 함께 퇴근한 지 한 시간이 넘었습니다. 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겼고,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불빛만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도시의 혈관을 유영하다 어둠 속으로 스며듭니다.

결재 서류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마무리해야 할 분기 보고서, 연말 실적을 압박하는 상무님의 이메일, 그리고 팀원들의 자잘한 문제들이 뒤엉켜 당신의 머릿속을 포화 상태로 만듭니다. 이십 년이 넘도록, 당신은 이런 밤들을 수없이 보냈습니다. 젊음과 열정을 바쳐 쌓아 올린 경력이라는 탑의 꼭대기 근처에 와 있지만,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은 기대했던 것과 사뭇 다릅니다. 더 넓은 세상을 보는 대신, 더 무거운 책임감과 더 아득한 불안만이 보일 뿐입니다. 한때는 당신의 전부였던 이 일이, 이제는 그저 관성에 몸을 맡긴 채 강물을 흘러가는 늙은 나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무는 흘러가지만 강은 언제나 그 자리인 것처럼, 당신은 매일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부장님’. 그 호칭은 당신에게 갑옷이자 감옥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사회적 지위와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주었지만, 동시에 당신을 그 역할 안에 철저히 가두었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냥 당신이 아니라, 언제나 ‘부장으로서의 당신’이어야 했습니다. 회의실에서는 냉철한 판단력을 보여야 했고, 회식 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맞추어야 했으며, 집에서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든든한 가장의 역할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당신은 그 역할을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성실하게 수행한 나머지, 이제는 그 역할이 아닌 진짜 당신이 누구였는지 기억조차 희미합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그의 책에서 말한 ‘개성(personality)’이라는 단어의 함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한 ‘개성’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하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의 참된 본질을 가리는 두꺼운 껍데기, ‘자기성(selfness)’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


삐걱이는 의자와 당신의 구두 소리가 텅 빈 공간을 더욱 공허하게 만듭니다. 탕비실로 향하는 당신의 걸음이 무겁습니다. 익숙하게 믹스커피 봉지를 뜯어 종이컵에 쏟아붓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습니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지친 신경을 잠시나마 위로하지만, 이 인공적인 위로가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당신은 너무도 잘 압니다. 이것은 진짜 위로가 아니라, 마모된 톱니바퀴에 치는 임시방편의 윤활유 같은 것입니다.

창가에 서서 당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십니다. 유리창에 비친 것은 낯선 중년의 사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깊어진 눈가의 주름, 무엇을 위해 이토록 애쓰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피곤한 표정. 당신은 저 사내를 압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만지며 ‘오늘도 버텨보자’고 다짐하는 사내. 회의실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부하 직원을 질책하고, 상사의 비위를 맞추며 하루를 보내는 사내. 늦은 밤 현관문을 열 때, 거실의 온기를 느끼며 안도하면서도 가족들의 고요한 잠을 방해할까 봐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내. 당신은 저 사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오늘따라 그는 지독히도 낯섭니다.

당신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가족에게로 향합니다. 얼마 전 등록금 이야기를 꺼냈던 아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당신은 아들의 미래를 위해 이 야근을 견디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아들의 실패인가, 아니면 아들의 실패를 통해 ‘무능한 아버지’로 낙인찍힐 당신 자신의 실패인가. 입시 준비로 날카로워진 딸아이의 방문은 오늘도 굳게 닫혀 있습니다. 당신은 아이의 행복을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 ‘행복’의 기준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당신이 걸어온 안정적인 길을 아이도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당신의 은밀한 이기심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내. 당신의 가장 가까운 타인. 당신들은 서로의 고단함을 짐작하기에 더 이상 깊은 대화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 배려라는 이름의 침묵이, 당신들의 영혼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생각의 뿌리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나, 남편으로서의 나, 부장으로서의 나. 이 모든 ‘나’를 지키기 위해, 당신은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당신의 손에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깊은 피로감, 그리고 존재론적인 공허함.

그때, 당신의 손가락 끝으로 종이컵의 온기가 스며듭니다. 축축하게 젖어 드는 얇은 종이의 감촉. 당신은 문득, 그저 뜨거운 물을 담는 용도일 뿐이었던 이 종이컵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싸구려 인쇄 로고가 박힌, 금방이라도 눅눅해질 듯한 하얀 종이컵. 그런데 그 순간, 당신의 의식에 작은 파문이 일어납니다. 당신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끝없는 걱정과 회한의 소음이 잠시 멎습니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당신은 처음으로 이 종이컵을 제대로 ‘봅니다’.


이 하얀 종이는 본래 어느 숲의 나무였을까. 그 나무는 어떤 햇살을 받고 어떤 바람에 흔들렸을까. 이 안에 담긴 달콤한 설탕은, 어느 더운 나라의 사탕수수밭에서 땀 흘린 농부의 손길을 거쳐왔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정수기의 뜨거운 물은, 저 멀리 이름 모를 강에서 시작되어 당신의 컵에 담기기까지 얼마나 긴 여정을 거쳐왔을까요. 수많은 손길과,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온 세상의 햇살과 바람과 물이 없었다면, 당신 손안의 이 작은 온기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헤르메스주의의 오래된 가르침처럼,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 작고 하찮은 종이컵 하나 안에 온 우주의 장엄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영적 스승들이 한목소리로 이야기해 온 진리의 첫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라 불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 ‘신성한 실재(Divine Ground)’로부터 나와 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장엄한 진리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지독한 고립감과 공허함은, 당신이 이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내어 ‘나’라는 작은 섬에 유배시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힌두교의 베단타 철학은 이 신성한 실재를 ‘브라흐만 (Brahman)’이라 불렀고, 도교에서는 만물이 따르는 거대한 길, ‘도(道)’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근원을 ‘신성 (Godhead)’이라 칭했습니다. 이름은 각기 다르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것은 모두 하나입니다. 바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당신이 이 컵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은 더 이상 이 컵을 분리된 사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컵은 숲과, 태양과, 강물과,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거대한 관계의 그물망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 한 점(點)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몸을 이루는 세포들은 당신의 부모님과, 그 부모님의 부모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 먹은 밥은, 흙과 농부의 땀과 햇살의 합작품입니다. 당신의 생각을 이루는 언어와 지식은, 당신 이전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지혜가 쌓인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당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일의 위대한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논리를 뛰어넘는 직관 속에서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내가 신을 보는 눈과, 신이 나를 보는 눈은 하나다.” 이 문장은 ‘나’와 ‘신’이라는 분리된 두 존재가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주체와 객체가 하나의 신성한 ‘봄(Seeing)’ 안에서 합일되는 경지를 놀랍도록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보는 행위 자체가 바로 신성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단지 피곤에 지친 50대 가장이 아닙니다. 당신은 한 그루 나무였고, 한 줄기 햇살이었으며,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우주의 근원 그 자체입니다. 당신이 ‘나’라고 굳게 믿어왔던 그 모든 역할과 책임감, 불안과 상처들은, 사실 당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당신의 참된 본질 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구름과도 같습니다. 당신의 본질은 그 모든 구름의 배경이 되는, 맑고 텅 빈 하늘 그 자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Anatta)’의 가르침은, 바로 이 ‘나’라는 구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고통의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종이컵에 남은 마지막 커피를 마십니다. 이제는 식어버린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갑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둡고, 책상 위의 서류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근원적인 것이 변했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다시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잠시, 꺼져 있는 컴퓨터 모니터의 검은 화면을 들여다봅니다. 그곳에 당신의 얼굴이 어렴풋이 비칩니다. 피곤에 지친 중년의 사내, ‘부장님’의 얼굴. 하지만 이제 당신은 그 얼굴 뒤에 있는, 그 얼굴 너머에 있는 더 큰 존재를 봅니다. 이 얼굴은 당신의 모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잠시 빌려 입은 옷이라는 것을, 이 역할은 당신의 본질이 아니라, 당신이 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잠시 맡은 배역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낍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사건들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즉 우리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당신의 역할과, 가족의 미래와, 회사의 실적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당신의 존재 전체를 저당 잡혀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당신 안의 더 깊은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작은 문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당신의 존재 전체를 흔들던 그 질문, ‘이게 전부일까?’라는 물음이 이제 새로운 질문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경이로움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당신의 영혼이 던지는 첫 번째 진정한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보고서의 첫 줄을 쓰기 위해 키보드 위에 손을 얹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손가락은 잠시 머뭇거립니다. 당신은 지금, 서류 위의 숫자들을 정리하는 동시에, 당신의 삶이라는 더 거대한 보고서의 첫 장을, 전혀 새로운 언어로 쓰기 시작했음을 예감합니다.





5장: 손주들의 웃음소리 너머로


툇마루는 당신의 오랜 친구입니다.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져, 세월에 닳아 반질반질해진 나무의 결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당신은 낡은 흔들의자에 몸을 기댄 채, 마당에서 뛰노는 어린 손주들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일곱 살짜리 손자와 다섯 살 손녀. 아이들의 세계는 온통 지금 이 순간의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잠자리를 쫓아 넘어지고, 민들레 홀씨를 불며 까르르 웃고,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 아옹다옹하는 그 모든 몸짓이 당신의 눈에는 하나의 완벽한 시(詩)처럼 보입니다.


“할아버지!”


손녀가 당신을 발견하고는, 작은 팔을 흔들며 달려옵니다. 당신의 무릎 위로 기어오르는 아이의 몸에서는 햇살과 흙먼지가 뒤섞인, 생명력 넘치는 냄새가 납니다. 당신은 주름진 손으로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습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마치 작은 종소리처럼 당신의 귓가에, 그리고 낡고 조용한 당신의 심장에 울려 퍼집니다.

바로 그 순간, 기이한 시간의 마법이 펼쳐집니다. 아이의 웃음소리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당신의 길고 긴 인생이라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잊고 있던 수많은 과거의 문들을 여는 열쇠가 되고, 당신은 속수무책으로 그 시간의 파도에 휩쓸려 들어갑니다.


가장 먼저 당신을 찾아온 것은, 당신 자신의 어린 시절, 당신의 ‘봄’입니다. 까까머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은 소년이, 바로 저 아이들처럼 흙먼지 속을 뒹굴고 있습니다. 귓가에는 매미 소리가 쟁쟁하고, 코끝에는 풋풋한 풀 비린내가 스며듭니다. 그때의 당신에게는 미래에 대한 불안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었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햇살과, 맨발로 느끼는 흙의 감촉과,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이유 없는 충만함만이 존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수많은 지혜 전통이 이야기하는 ‘낙원’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아직 ‘나’라는 이름의 성벽이 쌓이기 전, 세상과 내가 분리되지 않았던 순수한 합일의 상태.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면목 (本來面目)’, 즉 때 묻지 않은 당신의 진짜 얼굴이 바로 저 소년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당신도 한때는 저렇게 완전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아이의 웃음소리는 이제 조금 더 힘차고 거친 파도가 되어, 당신을 인생의 ‘여름’으로 데려갑니다. 갓 스무 살이 되어 세상을 향해 출사표를 던졌던 청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밤을 새워 공부하고,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시대를 논하고, 한 여자를 만나 온몸이 불타는 듯한 사랑에 빠졌던 시절. 그때의 당신은 ‘나’라는 이름의 태양이었습니다. 당신의 의지와 열정으로 세상을 비추고, 당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신은 치열하게 경쟁했고,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았으며, 수많은 밤을 성공에 대한 갈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뒤척였습니다.


그것은 ‘에고(ego)’가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계절이었습니다. 당신은 더 나은 직장, 더 넓은 집, 더 높은 지위라는 이름의 산봉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그 시절 당신의 기도는 언제나 “더 주십시오”였습니다. 헉슬리가 그의 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당신은 끊임없이 행동하고 성취함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 그 치열했던 여름날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평화로운 가정도, 이 아늑한 툇마루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압니다. 그 모든 성취의 이면에는, 당신이 무심코 밟고 지나온 수많은 작은 행복들과, 당신의 성공을 위해 희생된 타인의 시간과, 무엇보다 당신 자신의 영혼이 흘린 보이지 않는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손주들이 잠시 다투는 소리에, 당신의 시간 여행은 인생의 ‘가을’로 접어듭니다. 아이들이 장난감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것이라 우기는 모습 위로, 당신의 중년 시절 풍경이 겹쳐집니다. 자식들이 당신의 품을 떠나 자신들의 세계를 찾아 떠나갔을 때의 텅 빈 거실. 평생을 함께한 친구를 먼저 떠나보내고 돌아오던 쓸쓸한 밤길. 회사에서 당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젊은 후배들의 날카로운 눈빛. 가을은 풍요의 계절인 동시에, 상실의 계절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이룬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애썼고,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하며 아파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지혜를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변해가는 사람의 마음, 쇠락해가는 육체 등, 당신이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법. 그리고 당신이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 즉 그 모든 변화를 대하는 당신의 마음가짐을 다스리는 법. 당신은 더 이상 “더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견딜 힘을 주십시오”라고, 그리고 마침내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운명애(Amor Fati, 아모르 파티)’, 즉 당신의 삶에 일어난 모든 일을, 좋았던 일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일까지도 끌어안고 사랑하는 법을, 당신은 그 쓸쓸했던 가을의 길목에서 어렴풋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손녀의 맑은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새 당신의 마지막 계절, ‘겨울’로 돌아와 있습니다. 당신은 아이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짓습니다. 괜찮으냐는 질문은 이제 당신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의 몸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힘겹고, 기억은 자주 희미해지며, 밤에는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괜찮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인생 어느 때보다도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대의 현자들이 말했던 역설입니다. 육체라는 껍데기가 얇아지고 약해질수록, 그 안에 깃든 영혼의 빛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진실. 고대 트라키아의 현자 잘목시스는 “몸은 영혼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당신은 이제 당신이 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를 드리우는 빛의 존재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당신이 평생 ‘나’라고 믿어왔던 이 늙고 병든 육체와,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은, 사실 당신의 본질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영혼이 지구라는 별을 여행하며 잠시 입었던 우주복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은 손주들의 웃음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 너머에서, 당신의 삶을 관통해 온 모든 계절의 소리를 함께 듣습니다. 봄의 매미 소리, 여름의 열띤 논쟁 소리, 가을의 낙엽 밟는 소리,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심장을 채우는 겨울의 고요한 침묵 소리. 이 모든 것이 분리된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의식 속에서 하나로 합쳐져 장엄한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헉슬리가 말한 ‘영원(Eternity)’의 체험이 아닐까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직선이 아니라, 모든 순간이 ‘영원한 현재(Eternal Now)’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거대한 구(球)와도 같습니다 . 당신의 어린 시절도, 당신의 청춘도, 당신의 중년도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계절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이라는 존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대 경전 천부경(天符經)은 우주의 원리를 “一始無始一”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하나는 시작이 없다.’ 당신은 당신이라는 ‘하나’의 삶이 팔십여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봅니다. 당신의 시작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로부터 왔고,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왔으며, 그 시작은 까마득한 시간의 강 저편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아들과 딸을 통해, 이제 저 손주들을 통해, 미래라는 이름의 강으로 영원히 흘러갈 것입니다. 당신은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생명의 강물, 그 자체였습니다.

아이들이 다시 당신에게 달려와 재롱을 부립니다. 당신은 두 아이를 양팔에 가득 안습니다. 아이들의 따뜻한 체온과, 작고 빠른 심장 박동이 당신에게로 전해져 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저 아이들을 당신의 ‘내리사랑’을 받는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당신은 저 아이들 속에서 당신의 잊혀진 ‘봄’을 보고, 저 아이들은 당신 속에서 자신들이 맞이할 ‘겨울’의 지혜를 어렴풋이 느낍니다. 우리는 서로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입니다. 우리는 분리된 세대가 아니라, 하나의 영원한 생명이 다른 시간 속에서 피워낸 다른 모습의 꽃들입니다.


당신은 눈을 감습니다. 당신을 평생 괴롭혔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봄눈 녹듯 사라져가는 것을 느낍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저 계절의 변화일 뿐입니다. 당신이라는 나무에서 잎사귀들이 모두 떨어져 나간 뒤에도, 그 뿌리는 여전히 대지에 깊이 박혀, 다음 세대의 봄을 위한 자양분을 준비할 것입니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손녀의 목소리가 당신을 다시 현재로 불러옵니다. 당신은 눈을 뜨고, 아이의 맑은 눈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가장 진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합니다.


“나도 사랑한다, 아가야.”


그 순간, 당신의 툇마루 위,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더 이상 늙고 쇠약한 한 명의 노인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자신의 삶이라는 거대한 원을 마침내 완성하고, 그 안에서 모든 계절을 끌어안은 채, 영원과 함께 고요히 숨 쉬는 하나의 우주가 앉아 있었습니다.





6장: 꿈에 그리던 목표를 이룬 날


오후 네 시, 당신은 통유리창으로 된 회의실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습니다. 창밖으로는 당신이 속한 이 거대한 도시가, 마치 정교한 회로 기판처럼 발밑에 펼쳐져 있습니다. 당신의 심장은 조금 전까지 격렬하게 뛰고 있었지만, 이제는 고요한 흥분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울리고 있습니다. 방금 끝난 프레젠테이션. 지난 6개월간, 당신과 당신의 팀원들이 밤낮을 잊고 매달렸던 회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경쟁 입찰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회장님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는 당신에게 다가와, 두툼한 손으로 당신의 어깨를 힘껏 쥐며 말합니다. “수고했어, 김 상무. 자네가 해낼 줄 알았어.” ‘상무’. 아직은 낯선 그 직함이, 회장님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공표되는 순간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과 함께, 당신의 파격적인 승진이 결정되었다는 암묵적인 선언. 팀원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회의실을 가득 메웁니다. 당신은 마침내, 당신이 지난 20년간 그토록 치열하게 오르려 했던 성공이라는 산의 정상에 깃발을 꽂았습니다.

당신은 웃고 있습니다. 모두의 축하에 화답하며, 감사를 표하고, 겸손한 농담을 건넵니다. 당신은 이 순간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기대하는 ‘성공한 리더’의 모습을. 하지만 당신의 내면에서는, 이 모든 환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작고 차가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이게… 전부인가?’


저녁에는 당신의 승진을 축하하는 성대한 회식이 이어졌습니다. 값비싼 와인이 오갔고, 임원들의 덕담과 부하 직원들의 아부가 어지럽게 교차했습니다. 당신은 그 모든 소음의 중심에 앉아, 주인공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의식은 점점 더 당신의 몸과 분리되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당신은 천장 어딘가에서 술에 취해 웃고 떠드는 저 40대의 여자, 바로 ‘성공한 나’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행복해 보였지만, 당신은 그녀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회식이 끝나고, 늦은 밤 당신은 새로 장만한 고급 세단의 운전대를 잡습니다. 이 차 또한,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받게 될 보너스를 담보로 무리해서 구입한, 당신 성공의 또 다른 증표입니다. 부드러운 가죽 시트와, 은은한 조명과, 외부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는 완벽한 방음. 이 차는 당신이 세상과 맺어온 관계의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 불필요한 감정의 소음들을 차단하고, 오직 목표만을 향해 안락하고 효율적으로 질주하는 것.


당신은 강변북로를 따라, 당신의 새로운 집으로 향합니다. 얼마 전, 당신은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싼 동네 중 하나로 이사했습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그림 같은 풍경을 가진 주상복합 아파트. 그것은 당신의 성공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하고 빛나는 트로피였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를 떠올립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당신은 해외 출장 중이었습니다. 남편의 생일날, 당신은 밤샘 야근을 했습니다. 친구들의 경조사는 대부분 돈으로만 마음을 전했고, 당신 자신의 건강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 모든 희생의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괜찮아. 정상에 오르고 나면, 이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어.’

그리고 지금, 당신은 정상에 섰습니다.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당신은 당신만을 위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갑니다. 현관문을 열자, 당신을 반기는 것은 아무도 없는 적막과, 아직 페인트 냄새가 다 가시지 않은 새집의 낯선 공기뿐입니다. 남편과 아이는 당신이 늦을 것을 알고 먼저 잠자리에 들었을 겁니다. 당신은 구두를 벗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지친 발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섭니다.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백만 불짜리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수많은 불빛들이 강물 위로 부서지며,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당신이 꿈에 그리던 풍경. 당신 성공의 완벽한 증거. 당신은 이 풍경을 보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당신의 마음은 기쁨으로 차오르는 대신, 텅 빈 풍선처럼 서서히 바람이 빠져나갑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은 당신에게 아무런 위로도, 아무런 충만감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저 당신의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마치 아름다운 그림 엽서 한 장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이 서 있는 이 넓고 텅 빈 거실은, 당신 성공의 신전이 아니라, 당신의 외로움을 증명하는 거대한 무덤처럼 느껴집니다.


당신은 소파에 주저앉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명품 가방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집니다. 오늘 당신을 향해 쏟아졌던 그 모든 찬사와 축하의 말들이, 거짓말처럼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당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목표를 이룬 바로 그날, 당신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공허함이, 차가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자들이 ‘쾌락의 쳇바퀴 (Hedonic Treadmill)’이라고 부르는 현상입니다. 인간은 어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사건에도 금세 적응하여, 결국에는 원래의 행복 기준점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당신은 ‘상무 승진’과 ‘새 아파트’라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면 영원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당신의 마음은 이미 그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 버렸고, 다시 원래의 공허한 기준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당신은 멈추지 않는 러닝머신 위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행복’이라는 신기루를 쫓아 달려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현상은 단순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2,500년 전, 붓다는 이미 이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한 사성제(四聖諦)의 두 번째 진리, 즉 ‘고통의 원인은 집착과 갈애(Tanha)에 있다’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의 고통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고통은, ‘성공’이라는 특정한 결과에 대한 당신의 집요한 집착과 갈애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갈애의 대상을 손에 넣었을 때, 당신의 마음은 잠시 만족하지만, 갈애하는 ‘습관’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갈애는 또 다른 새로운 대상을 찾아 헤매기 시작합니다. 회장 자리? 더 큰 집? 하지만 당신은 이제 어렴풋이 압니다. 그 어떤 것을 얻는다 해도, 이 근원적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당신이 좇았던 것은, 어쩌면 영지주의 (Gnosticism)에서 말하는 ‘거짓된 선 (false good)’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물질세계의 지배자인 데미우르고스는, 우리 영혼의 신성한 빛을 잊게 하기 위해 ‘부와 명예’, ‘성공’이라는 이름의 현란한 장난감들을 만들어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것을 손에 쥐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텅 빈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절망합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이 공허함은, 당신의 영혼이 마침내 그 장난감이 거짓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보내는 비통한 신호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 진정한 충만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기독교의 신비가들은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당신이 찾아 헤매던 그 왕국은, 이 화려한 야경 속에나, 당신의 새로운 직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당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 당신이 성공을 위해 달려오느라 단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바로 그 마음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외부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내면의 왕국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창가로 다가갑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조금 엽니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도시의 희미한 소음이 당신의 텅 빈 아파트 안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 소음은 더 이상 당신의 성공을 장식하는 배경음악이 아니라, 당신처럼 저마다의 꿈과 공허함을 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아있는 숨결처럼 느껴집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가 가진 부, 건강, 명예 같은 것들을 ‘좋은 것 (good)’이 아니라, 그저 ‘선호되는 무관심한 것 (preferred indifferent)’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들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우리의 행복이나 미덕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좋은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자연의 이성과 조화를 이룬 당신의 마음 상태, 즉 ‘덕(virtue)’뿐입니다. 당신은 세상이 가장 가치 있다고 말하는 ‘선호되는 무관심한 것’들을 모두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좋은 것’인 당신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당신이 오른 산은, 애초에 정상이 없는 산이었음을. 아니, 어쩌면 삶이라는 등반의 목적은 정상을 밟는 것이 아니라, 오르는 과정 그 자체에 있었음을. 당신이 ‘희생’이라고 불렀던 그 모든 시간들, 아이의 입학식, 남편의 생일, 친구와의 약속 등이 사실은 당신이 놓쳐버린 수많은 ‘정상’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평생을 바쳐 도달한 그 위대한 목표는, 실은 텅 빈 메아리였습니다.목표 자체가 무가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당신이 그 메아리 속에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약속의 목소리, 다시 말해 ‘영원한 행복’을 들으려 애썼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모든 소리가 멎고 진정한 침묵이 찾아온 지금, 당신은 비로소 새로운 길을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길은 더 높은 산 정상을 향한 길이 아니라, 더 깊은 당신 영혼의 계곡을 향한 길입니다.


당신을 찾아온 이 낯선 공허함은, 당신의 실패를 알리고 애도하는 조종(弔鐘)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마침내 깨어날 시간임을 알리는, 가장 거룩하고 장엄한 기상 나팔 소리입니다. 그 공허함이야말로, 당신 안에 새로운 무언가가, 진짜 무언가가 자라날 수 있는, 신성하고 텅 빈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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