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3-8장: 연기 (緣起) - 모든 것은 그물이다

by DrLeeHC

제 3부: 연결의 철학 -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님



제3-8장: 연기 (緣起) - 모든 것은 그물이다



3-8.1. 인드라망: 서로를 비추는 보석들



대승불교의 가장 장엄한 가르침 중 하나인 『화엄경, 華嚴經, Avataṃsaka Sūtra, 아바탐사카 수트라』은, 우리가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존재의 참모습을 보는 하나의 거대한 비유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드라망 (Indra's Net)'입니다. 이 비유는 제석천 (Indra, 인드라)의 궁전에 걸린 거대한 그물입니다. 이 그물의 모든 매듭에는 '무한한 구슬 (보석)'이 달려있습니다.


이 그물의 놀라운 점은, 이 구슬들이 서로를 '비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구슬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우주의 다른 '모든' 구슬들의 모습이 빠짐없이 비칩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비는 그 다음입니다. 그 구슬 속에 '비친' 또 다른 구슬의 '반영' 속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역시 우주의 '모든' 구슬들이 다시 비칩니다. 이 '반영의 반영'은 무한히 계속됩니다.


'인드라망'의 세계관은, 우리가 '나'와 '너'를 분리하고 '부분'과 '전체'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거대한 환상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 세계에는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을 비추고, 다른 모든 것 속에 비춰지는 '관계' 그 자체로만 존재합니다.


'인드라망'은 『화엄경』의 핵심 사상인 '법계연기 (法界緣起)', 즉 '온 우주가 원인이 되어 서로를 일으킨다'는 세계관을 상징합니다. 이 세계관은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음이 곧 하나이다 (一卽一切 多卽一, 일즉일체 다즉일)"라는 구호로 압축됩니다.


"하나가 곧 일체다 (일즉일체)"라는 말은, 이 그물망 속의 단 하나의 보석(一)이, 우주 전체(一切)를 온전히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화엄경』의 시각에서, '하나'의 티끌 (微塵, 미진) 속에는 온 우주의 바다와 산맥이 실제로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전체'의 단순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머금고 있는 '온전한 전체'입니다.


"많음이 곧 하나다 (다즉일)"라는 말은, 이 우주를 이루는 무수한 '개별 존재들(多)'이, 그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一)'의 바탕을 떠나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무한히 많은 보석들(多)이 결국 '하나(一)'의 그물망을 이루고 있듯이, '다양성'과 '통일성'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와 '많음'은 서로가 서로의 근원이 됩니다.


이 놀라운 우주관은 '상즉상입 (相卽相入)'이라는 원리로 작동합니다. '상즉 (相卽)'은 "서로가 곧(卽) 서로(相)"라는 뜻으로, '하나'와 '일체'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며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입 (相入)'은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간다(入)"는 뜻입니다. A라는 보석이 B라는 보석 '안에' 들어가고, 동시에 B가 A '안에' 들어옵니다. 이때 그들은 서로를 방해하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융무애 (圓融無礙)', 즉 '모든 것이 원만하게 녹아들어 아무런 걸림이 없다'는 '화엄'의 경지입니다. '나'의 존재 속에는 이미 '너'의 존재가 들어와 있고, '너'의 존재 속에도 '나'의 존재가 들어와 있습니다.


이처럼 '부분 속에 전체가 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은, 수천 년간 시적인 비유나 신비적인 통찰로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20세기 현대 물리학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물질세계가 실제로 이러한 '비분리적'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자역학 (Quantum Mechanics)은 우리가 세상을 '분리된 대상'의 집합으로 보는 고전 물리학의 상식을 무너뜨립니다. 그중 가장 기이한 현상이 '양자 얽힘 (Quantum Entanglement)'입니다. '얽힘'은, 하나의 근원에서 태어난 두 개의 입자 (예를 들어, 광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연결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두 입자가 '얽힌' 상태로 만들어진 뒤, 하나는 지구에 두고 다른 하나는 수백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은하로 보냈다고 가정합시다. 이 입자들은 서로 아무런 신호를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지구에서 한 입자의 상태를 '측정'하는 순간, 안드로메다에 있는 다른 입자의 상태가 '즉시' 결정됩니다.


이 기이한 현상은,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1955)조차 평생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던 문제입니다. 그는 이 현상을 "유령 같은 원격 작용 (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불편해했던 이유는, 이 '즉각적인' 연결이 그 자신이 확립한 '특수 상대성 이론'의 근간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우주에서 그 어떤 정보나 신호도 '빛의 속도'보다 빠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얽힘' 상태의 두 입자는, 수백만 광년이 떨어져 있어도, 마치 빛의 속도를 초월하여 '즉시'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유령 같은 작용'은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믿음인 '국소성 (locality, 국소성)'을 정면으로 위배합니다. '국소성'이란, "A라는 존재가 B라는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반드시 A에서 B로 빛보다 빠르지 않은 어떤 신호 (힘이나 정보)가 '이동'해야 한다"는 우리의 상식적인 믿음입니다. A가 B를 건드려야 B가 넘어지고, A가 소리를 쳐야 B가 들을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는 이 '유령 같은 작용'이 진짜일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두 입자가 '얽혀' 보이는 이유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떤 '숨겨진 정보'가 두 입자가 헤어지는 순간 이미 그 안에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빨간 장갑과 파란 장갑을 보지 않고 두 상자에 나눠 담은 뒤, 하나는 서울에 두고 하나는 뉴욕으로 보낸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서울의 상자를 열어 '빨간 장갑'을 확인하는 순간, 뉴욕의 상자에는 '파란 장갑'이 들어있음을 '즉시' 알게 됩니다. 이것은 유령 같은 작용이 아니라, 정보가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60년대,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 (John Stewart Bell, 1928-1990)은 이 '숨겨진 정보' 이론이 맞는지, 아니면 '유령 같은 얽힘'이 실제로 일어나는지를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벨의 부등식 (Bell's inequality)'이라는 천재적인 이론을 고안했습니다.


그 후 수십 년간, 알랭 아스페 (Alain Aspect, 1947-)를 비롯한 수많은 물리학자가 이 '벨의 부등식'을 바탕으로 정밀한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번 충격적이었습니다. 실험 결과는 '숨겨진 정보' 이론이 틀렸으며,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부정했던 '유령 같은 원격 작용', 즉 '비국소적 얽힘'이 바로 이 세계의 '현실'임을 압도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실로 엄청납니다. 이것은 두 입자가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멀리 '분리'되어 있더라도,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는 여전히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시스템'으로 얽혀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분리된 두 개의 입자'라고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환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얽힘'의 세계관은, 우주가 분리된 '개별 입자'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것은 우주가 '인드라망'처럼 '하나의 비국소적 전체 (non-local whole)'임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화엄경』이 말한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 (一卽一切, 일즉일체)"는 가르침, 그리고 "하나의 보석이 다른 모든 보석을 비춘다 (相卽相入, 상즉상입)"는 통찰은, 더 이상 신비로운 비유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양자 얽힘'은, '인드라망'의 그물코 하나 (하나의 입자)를 건드리는 순간, 그물망 '전체 (우주)'가 '동시에' 울린다는 것을, 바로 이 물질세계의 언어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연결'의 원리는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생명'과 '마음'의 영역에서도 발견됩니다. 20세기 영국의 인류학자이자 사상가인 그레고리 베이트슨 (Gregory Bateson, 1904-1980)은, 우리가 '마음'을 잘못된 장소에서 찾고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르네 데카르트 이래로 서양 문명이 '마음'을 '뇌 (육체)' 안에 가두고, '마음'과 '세계 (자연)'를 분리시킨 것을 비판했습니다.


베이트슨은 '마음 (Mind)'이 '뇌'라는 사물 (thing)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마음'이란 '관계를 맺는 방식' 그 자체, 즉 "연결하는 패턴 (the pattern which connects)"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의 '마음의 생태학 (Ecology of Mind)'은, '나'라는 개인이 생각의 단위가 아니라고 봅니다.


'인드라망'의 비유는 '마음'에 대한 우리의 낡은 관점을 바로잡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나 (개인)'라는 고립된 존재 '안에' 갇혀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인드라망'의 비유에서 '나 (개인)'는 이 그물망에 달린 하나의 '보석'에 해당합니다. 베이트슨의 통찰처럼, '마음'은 이 '보석 (나)' 안에 갇힌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보석과 보석 사이를 오가며 서로를 비추는 '빛', 즉 '관계' 그 자체입니다. 이는 '나'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환경'과 맺고 있는 '관계' 그 자체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길을 걸을 때, '생각하는 시스템 (마음)'은 '뇌'가 아니라, '뇌 + 몸 + 지팡이 + 보도블록'으로 이어지는 '정보의 순환 회로' 전체입니다. 장님은 '지팡이의 끝'에서 보도블록의 틈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은 어디까지 확장된 것입니까? 지팡이의 끝입니까? '뇌'가 '지팡이'와 '보도블록' 없이는 '길'을 인식할 수 없듯이, '마음'은 '나'의 머릿속이 아니라 '나'와 '환경' 사이의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이처럼 '인드라망'이 보여주는 연결의 지혜는, '갇힌 세계' 속에서 고립된 현대인들에게 '분리'가 환상임을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나'라는 하나의 개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개인주의'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지혜들은 한목소리로 그 감옥의 벽이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화엄경』은 단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우주가 이미 들어와 있다고 '하나가 곧 일체 (一卽一切)'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현대 양자역학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입자라도 보이지 않는 '얽힘 (Entanglement)'으로 연결되어, 이 우주가 '하나의 비국소적 전체'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마음'조차도 뇌 속에 갇힌 '나'가 아니라, '나'와 환경이 맺고 있는 '연결의 패턴' 그 자체라고 밝혔습니다.


이 '연결'의 진실을 깨닫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다시 정의하고 우리에게 거룩한 '책임'을 일깨웁니다. '나'의 행위는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화엄경』의 가르침처럼, '나'의 말이 '너'의 마음속에 이미 들어가고 (相入, 상입), '너'의 존재가 '나'의 존재와 이미 다르지 않기 (相卽, 상즉) 때문입니다.


'나'라는 좁은 자아를 비워낸 자리는, 이처럼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하나됨'의 자각으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이 '하나됨'의 자각이야말로 '자비 (慈悲, Karuṇā, 카루나)'의 진정한 뿌리가 됩니다. '나'와 '너'의 구분이 환상임을 깨달은 자리에서,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 곧 '나의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3-8.2. 연기법 (緣起法):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우리가 '비움의 철학'에서 '나'라는 환상을 해체했다면, '연결의 철학'은 그 텅 빈 자리에 드러나는 세계의 참모습을 보여줍니다. 『화엄경』의 '인드라망 (Indra's Net)'이 모든 것이 서로를 비추는 '하나됨'의 장엄한 '결과'를 보여주었다면,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인 '연기법 (緣起法, pratītyasamutpāda, 쁘라띠뜨야사뭇빠다)'은 그 '하나됨'이 작동하는 '원인'과 '과정'을 명료하게 드러냅니다. '연기'는 '인연 (因緣)에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관계성'의 법칙입니다.


이 위대한 통찰은 싯다르타 고타마의 깨달음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이 '연기'의 법칙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 법칙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 이마스밍 사티 이당 호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이맛수빠다 이당 우빠자티)"라는 간결한 공식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이마스밍 아사티 이당 나 호티).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루자티)."


이것은 서양 철학이 '불변하는 실체 (substance)'를 찾으려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연기법'의 세계에서 '존재'는 '사물 (thing)'이 아니라 '과정 (process)'입니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잠시 '발생'했다가 '사라질'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나 (我)'나 '불변하는 실체'는 없습니다. '연기법'은 이처럼 '비움 (空)'과 '연결'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싯다르타는 이 '연기법'이라는 보편적인 법칙을, '인간의 고통 (苦, dukkha, 둑카)'이라는 가장 실존적인 문제에 적용했습니다. "우리는 왜 고통받는가?" 그리고 "이 고통은 어떻게 하면 사라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십이연기 (十二緣起, dvādaśa-nidāna, 드바다샤-니다나)'의 구조입니다.


'십이연기'는 우리의 근본적인 '고통'이 그저 우연히 발생하거나 어떤 절대자가 내린 형벌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열두 개의 고리(Nidāna, 니다나)'가 서로 의지하여 연쇄적으로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불교는 이 고통의 가장 구체적이고 피할 수 없는 모습을 '늙음과 죽음 (老死, jarā-maraṇa, 자라-마라나)'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늙음과 죽음'이라는 마지막 고리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닥치는지, 그 원인을 거꾸로 추적해 들어갑니다.


이 고통의 사슬은 첫 번째 고리인 '무명 (無明, avidyā, 아비드야)'에서 시작됩니다. '무명'은 '밝음이 없는 상태', 즉 '무지'를 의미합니다. 무엇에 대한 무지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연기법' 그 자체, 그리고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가 없다 (무아, 無我, anātman, 아나트만)'는 진리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근본적인 '착각'입니다. 우리는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 '무지'가 모든 고통의 뿌리입니다.


이 '무명 (무지)'에 덮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 번째 고리인 '행 (行, saṃskāra, 상스카라)'을 일으킵니다. '행'은 '의지를 지닌 행위'로, 우리가 '나'라는 환상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업 (業, Karma, 카르마)'과 '습관'입니다. '무지' 속에서 "나는 행복해져야 해"라고 움켜쥐거나 "나는 불행해지기 싫어"라고 밀어내는 모든 마음의 작용과 행동이 '행'입니다. 이 '행'은 다음 존재를 만들어내는 강력한 '씨앗'이 됩니다.


이 '행 (업)'의 에너지는 세 번째 고리인 '식 (識, vijñāna, 비즈냐나)'을 일으킵니다. '식'은 '알아차리는 마음'입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행'의 힘에 이끌려 새로운 '존재' 속으로 뛰어드는 '재탄생의 의식'입니다. 심리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마음의 '싹'입니다.


'식 (의식)'이 잉태되면, 네 번째 고리인 '명색 (名色, nāmarūpa, 나마루파)'이 생겨납니다. '명 (名)'은 '이름'으로, 형태가 없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색 (色)'은 '형태'로, '물질 (육체)'을 의미합니다. 즉, '의식'이 머무를 수 있는 '정신-물질'의 유기체, '나'라는 존재의 '몸과 마음'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명색 (정신과 육체)'이 자라나면, 다섯 번째 고리인 '육입 (六入, ṣaḍāyatana, 살라야타나)'이 열립니다. '육입'은 '여섯 개의 들어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나'와 '세계'가 만나는 '여섯 개의 감각 기관'입니다. 이것은 '눈, 귀, 코, 혀, 몸 (眼耳鼻舌身, 안이비설신)'이라는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과, '생각'을 받아들이는 '마음 (의, 意)'을 뜻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만날 '여섯 개의 문'이 완성된 것입니다.


여섯 개의 감각 기관 (육입)이 생겨나면, 여섯 번째 고리인 '촉 (觸, sparśa, 스파르샤)', 즉 '접촉'이 일어납니다. '촉'은 이 '여섯 개의 문'이 외부 세계와 만나는 모든 순간입니다. '눈'이 '형태'를 만나고 (眼觸, 안촉), '귀'가 '소리'를 만나며 (耳觸, 이촉), '마음'이 '생각'을 만나는 (意觸, 의촉), 즉 '주관'과 '객관'이 만나는 모든 사건이 '촉'입니다.


'촉 (접촉)'이 일어나면, 일곱 번째 고리인 '수 (受, vedanā, 베다나)', 즉 '느낌 (감수)'이 반드시 뒤따릅니다. 이것은 '접촉'의 결과로 일어나는, '판단 이전'의 순수한 '느낌'입니다. 우리는 '접촉'을 통해 '즐거운 느낌 (樂受, 낙수)', '괴로운 느낌 (苦受, 고수)', 혹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不苦不樂受, 불고불락수)' 중 하나를 '필연적으로' 경험합니다.


바로 이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사이가, '고통의 사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며, 우리가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틈새'입니다.


'느낌 (수)'이 일어났을 때, '무명 (무지)'에 휩싸인 우리는 그것에 '맹목적으로 반응'합니다. 이것이 여덟 번째 고리인 '애 (愛, taṇhā, 탄하)', 즉 '갈애 (渴愛)'입니다. '갈애'는 '불타는 목마름'입니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사라지지 마!"라고 '갈망'합니다 (貪欲, 탐욕). 반대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을 1초라도 견디지 못하고 "당장 사라져!"라고 '혐오 (저항)'합니다 (瞋恚, 진에). 우리는 이 '느낌'이 '무상 (無常)'하게 곧 사라질 현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무명), 이처럼 맹목적으로 반응합니다.


이 '갈애'가 더욱 강해지고 구체화되면, 아홉 번째 고리인 '취 (取, upādāna, 우파다나)'가 됩니다. '취'는 '움켜쥐는 것', 즉 '집착'입니다. '갈애'가 '느낌'에 대한 맹목적인 '반응'이라면, '취'는 그 대상을 "이것이야말로 '나'의 것"이라고 '소유'하고, "이것 없이는 '나'는 살 수 없다"고 '집착'하는 상태입니다. "나는 이 쾌락을 원한다 (갈애)"를 넘어, "나는 이 쾌락이 '나'의 행복 그 자체다 (집착)"라고 믿는 것입니다.


'취 (집착)'를 통해 '나'라는 관념을 강화하면, 열 번째 고리인 '유 (有, bhava, 바바)', 즉 '존재'가 생겨납니다. '유'는 '존재하려는 힘'으로, 다음 순간의 '나'를 만들어내는 강력한 '업의 에너지'입니다. '집착'은 우리 마음에 강력한 '습관 (行, 행)'을 만들고, 이 습관이 "다음에도 그렇게 행동할 나"의 '존재 (유)'를 예비합니다.


이 '존재 (유)'의 힘은 열한 번째 고리인 '생 (生, jāti, 자티)', 즉 '태어남'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는 다음 생의 '재탄생'을 의미합니다. 또한 심리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 낡은 습관에 사로잡힌 '새로운 자아'가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단 '태어남 (생)'이 있으면, 그 존재는 반드시 열두 번째 고리인 '노사 (老死, jarā-maraṇa, 자라-마라나)', 즉 '늙음과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늙고 죽어감'의 전 과정에서 겪는 모든 '근심, 슬픔, 고통, 절망 (憂悲苦惱, 우비고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십이연기'는, 우리의 근본적인 '고통'이 '무명'에서 시작되어 열두 개의 사슬을 거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과정임을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지도는 '절망'의 지도가 아니라 '해방'의 지도입니다. '연기법'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를 끊을 수 있다면, 이 모든 고통의 사슬은 무너져 내립니다.


그 가장 약한 고리가 바로, 일곱 번째 '느낌 (수)'과 여덟 번째 '갈애 (애)' 사이입니다. '느낌'은 이미 일어난 '결과'이므로 우리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갈애 (반응)'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만약 우리가 '느낌'이 일어났을 때, '무지'에서 비롯된 '갈애'로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지혜 (알아차림)'로써 그 느낌을 그저 '바라볼' 수 있다면, "아,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구나. 하지만 이것도 곧 변하겠지 (무상)"라고 깨어있을 수 있다면, '갈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갈애'가 없으면 '집착'이 없고, '집착'이 없으면 '존재'도 없으며, '존재'가 없으면 '태어남'도 없고,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과 죽음', 그리고 그 모든 '고통'도 없습니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 (滅, Nirodha, 니로다)'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연기법 (緣起法)'의 가르침은, 대승불교에 이르러 '공 (空, śūnyatā, 슈냐따)' 사상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인도의 위대한 사상가 용수 (龍樹, Nāgārjuna, 나가르주나)는, '연기'와 '공'이 둘이 아니라 '하나 (不二, advaya, 아드바야)'임을 논증했습니다.


용수는 '연기법'을 그 논리적 귀결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연기법'은 모든 것이 '인연에 의지하여 (緣起)'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용수는 이 말의 뜻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만약 이 세상 모든 것이 '인연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말은 곧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고정된 본질', 즉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체'를 철학 용어로 '자성 (自性, svabhāva, 스바바바)'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눈앞의 '장미꽃' 한 송이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이 장미꽃이 '장미꽃'이라는 고유한 '자성'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용수는 이 장미꽃을 '연기'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 장미꽃 안에는 이것을 피어나게 한 '햇빛'이 있습니다. '흙' 속의 양분과 '물'이 있습니다. '공기'와 '바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인연'들이 없었다면, '장미꽃'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장미꽃'은 '장미꽃'이라는 고정된 실체 (자성)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햇빛과 흙과 물이라는 '인연'들이 잠시 모여 이룬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장미꽃'은 '장미꽃이라는 자성'으로부터 '텅 비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 (空)'입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 (虛無)'가 아닙니다. '공'은 이처럼 '고정된 실체 (자성)가 텅 비어있다'는 뜻의 '무자성 (無自性, 무자성)'입니다. 용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은 연기 (緣起)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공 (空)하다"라고 선언합니다. '연기'는 '공'의 논리적인 이유입니다. '공'은 '연기'하는 존재의 본래 모습입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연기'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성'을 설명한다면, '공'은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무자성'을 설명합니다. 이 '공'과 '연기'가 '하나 (不二)'라는 통찰이 바로, 『반야심경, 般若心經』이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진리입니다.


첫째, '색즉시공 (色卽是空)'은 "물질 (色)이 곧 텅 비어있음 (空)이다"라는 뜻입니다. '색 (色)'은 우리가 보는 이 '연기'의 현상 세계, 즉 장미꽃, 책상, 그리고 '나'의 몸과 같은 모든 물질입니다. 이 모든 현상 (色)은 그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성'이 없는 '공 (空)'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있음 (色)'은 사실 '비어있음 (空)'입니다.


둘째, '공즉시색 (空卽是色)'은 "텅 비어있음 (空)이 곧 물질 (色)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비움'의 철학이 허무주의가 아님을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선언입니다. 만약 이 세계가 '공 (空)'하지 않고, 무언가 '고정된 실체 (자성)'로 꽉 막혀있다면, 어떤 '변화'나 '생성'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씨앗이 '공'하기에 (씨앗이라는 실체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인연을 만나 싹 (色)이 될 수 있습니다. '공 (空)'은 '색 (色)'을 부정하는 '무 (無)'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색 (色)'의 현상 세계가 생겨날 수 있게 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바탕'입니다. 그러므로 '공'과 '연기'는 '하나'입니다.


이 깊고도 어려운 '공'과 '연기'의 진리를,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이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명료한 언어로 풀어준 스승이 바로 베트남 출신의 선승 (禪僧) 틱낫한 (Thích Nhất Hạnh, 1926-2022)입니다. 그는 이 '연기법'을 "상호존재 (Interbeing, 상호존재)"라는 아름다운 영어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틱낫한은 말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To be),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 (Inter-be)'는 뜻입니다." '나'는 홀로 '존재 (be)'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오직 '너'와 '함께 존재 (inter-be)'할 뿐입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의 비유를 듭니다. 우리가 이 종이 한 장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나무'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나무가 종이의 전부는 아닙니다. 나무를 자라게 한 '햇살'이 이 종이 안에 있습니다. 나무를 키운 '구름'과 '비'가 이 종이 안에 있습니다. 나무를 베어낸 '벌목꾼'과, 그의 점심이었던 '빵'이 이 종이 안에 있습니다. 그 '빵'을 만든 '밀'과, 그 '밀'을 기른 '농부'도 이 종이 안에 있습니다.


"만약 햇살이 없다면, 구름이 없다면, 농부가 없다면, 이 종이 한 장은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종이는 '햇살'과 '구름'과 '농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종이는 '종이'라는 고유한 실체로부터 '텅 비어 (空)' 있지만, 동시에 온 우주 (一切)와 '함께 존재 (緣起)'하고 있습니다."


틱낫한의 '상호존재'는 '연기'와 '공'이 둘이 아니라는 (不二) '화엄'의 세계관을,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가장 따뜻한 '비움'의 언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놀랍게도, 불교가 수천 년 전에 깨달은 이 '연기'의 지혜는, 20세기 서양 과학의 가장 첨단 분야인 '시스템 이론 (Systems Theory)'과 그 맥을 같이합니다.


데카르트와 뉴턴 (Isaac Newton, 1643-1727) 이래로, 서양 과학은 '환원주의 (Reductionism)'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환원주의'는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가장 작은 '부품'으로 쪼개어 분석하는 방식입니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다"라는 것이 이들의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루트비히 폰 베르탈란피 (Ludwig von Bertalanffy, 1901-1972)와 같은 과학자들은, 이 '환원주의'가 '생명'이나 '마음' 같은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시스템 이론'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시스템 이론'은 '부품' 그 자체보다 '부품들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주목합니다.


이 '시스템 이론'의 핵심 개념이 바로 '창발 (創發, Emergence)'입니다. '창발'이란, '부분'에는 없던 완전히 새로운 '성질'이, '부분'들의 '상호작용 (관계)'을 통해 '전체'의 차원에서 '불쑥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가장 쉬운 예는 '물기 (wetness)'입니다. '물 (H2O)' 분자 하나하나를 아무리 분석해도, 그 어디에도 '젖어있다'는 성질은 없습니다. 하지만 수조 개의 물 분자가 모여 '상호작용'할 때 (연기), '젖어있다'는 새로운 성질이 '전체'의 차원에서 '창발 (emergence)'합니다.


'생명 (Life)'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탄소, 수소, 산소 같은 '원자 (부분)'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원자들이 '세포'라는 복잡한 '시스템' 안에서 '상호작용 (연기)'할 때, '생명'이라는 경이로운 현상이 '창발'합니다.


가장 심오한 '창발'은 바로 우리의 '의식 (Consciousness)'입니다. '뉴런 (neuron)'이라는 뇌세포 하나는 '생각'을 하거나 '자아'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1천억 개의 뉴런이 복잡한 '네트워크 (관계)'를 이루어 '상호작용 (연기)'할 때, "나는 존재한다"는 '나 (자아)'의 '의식'이 '창발'합니다.


'시스템 이론'과 '창발'은, '연기법'에 대한 현대 과학의 명료한 '주석'입니다. "이것 (부분)이 있으므로 저것 (전체)이 있다." '의식'이나 '생명'은 '고정된 실체 (자성)'가 아니라, 무수한 '관계 (연기)' 속에서 '창발'하는 '과정'입니다.


'연기법'의 이 가르침은, '분리'와 '고립'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내 피부 안쪽에 갇힌 '고립된 개인'이라고 착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이연기'의 첫 번째 고리인 '무명 (무지)'입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부터 용수, 틱낫한, 그리고 현대의 시스템 이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지혜는 그 '분리'가 '환상'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나'는 온 우주가 '상호존재 (Interbeing)'하는 '과정'이며, 수많은 '관계' 속에서 '창발'하는 '흐름'입니다.


이 '연결'의 진실을 깨닫는 것은, '나'라는 좁은 자아를 '비워내는 (공)'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움'은 '허무'가 아니라, '확장'입니다. '나'의 경계가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고통과 '연결'됩니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처럼, '나'의 '갈애'가 '너'의 '고통'을 낳고, '너'의 '고통'이 다시 '나'의 '고통'이 되는, 이 '연기'의 사슬을 직시하게 됩니다.


이 '연기'의 사슬을 직시하는 순간,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이 둘이 아님을 (不二) 깨닫게 됩니다. '나'를 괴롭히던 '무명'과 '갈애'가, '너'를 괴롭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꿰뚫어 볼 때, '나'와 '너'를 분리하던 환상의 벽이 무너집니다.


바로 이 '하나됨'의 자각, 이 '분리감의 소멸'이야말로 '자비 (慈悲, Karuṇā, 카루나)'의 진정한 뿌리입니다. '자비'는 더 이상 내가 '선택'하는 도덕이 아니라, '나'와 '너'가 본래 '하나'임을 깨달은 존재의 '필연적인' 반응입니다.

이처럼 '연기법'은 우리에게, '나'라는 무지를 비우고, '우리'라는 '연결'의 진실로 돌아와, '함께' 살아가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3-8.3. 공동-발생: 함께 일어남의 신비



우리는 오랫동안 세계를 '주체 (Subject)'와 '객체 (Object)'로 나누어 이해해 왔습니다. 여기에는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는 세계', '인식하는 정신'과 '인식되는 물질'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르네 데카르트 이래 서양 철학의 골격을 이루어 온 이 '이원론적 세계관'은, 명료하고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관은 동시에, 우리를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진실이란, 세계가 이미 나뉘어진 조각들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함께 일어나고 함께 생성되는' 역동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현대 철학과 인지과학은 이 오래된 분리의 벽을 허물고,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가 본질적으로 '서로를 창조하는', '동시적인 (simultaneous)' 과정임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이 '함께 일어남 (공동 발생)'의 신비는, 칠레의 신경과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 (Francisco Varela, 1946-2001)의 작업에서 그 과학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는 에반 톰슨 (Evan Thompson)과 엘리노어 로쉬 (Eleanor Rosch)와 함께, 1991년 기념비적인 저서 『체화된 마음, The Embodied Mind』을 출간하며 인지과학에 혁명적인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행위화 (enaction)'라는 개념은, '인식'에 대한 우리의 낡은 생각을 뒤집습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인식'은, '뇌'가 저 바깥의 '외부 세계'를 사진 찍듯이 '표상 (representation)'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행위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식'이란, 살아있는 '유기체 (organism)'가 '환경 (environment)' 속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할 때, 그 상호작용 속에서 '세계'와 '마음'이 함께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바렐라는 칠레 출신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 (Humberto Maturana, 1928-2021)와 함께, 이미 1970년대부터 '자기생성 (autopoiesis)'이라는 놀라운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auto) 만든다 (poiesis)'는 뜻으로, 생명체가 마치 공장에서 조립되는 기계와 달리, '스스로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존재임을 설명합니다. 살아있는 세포 하나가 그 완벽한 예입니다. 세포는 외부의 설계도 없이도, 스스로 자신의 경계 (세포막)를 만들고, 손상된 부분을 수리하며,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환경)'을 구분합니다. 이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닫힌 체계'가 생명체의 정체성입니다.


하지만 『체화된 마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생명체는 이처럼 '닫혀' 있으면서도 (자기생성), '환경'과 에너지를 교환하며 관계를 맺습니다. 바렐라는 이를 '구조적 결합 (structural coupling)'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인식하는 주체'가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어지는' 역사 (history)를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숲속의 오솔길을 상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풀이 무성한( 환경) 곳에 길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 (주체)이 그곳을 걸어가면서 (행동) 풀이 밟히고, 환경은 미세하게 변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그 흔적을 따라 걸으면서, 풀은 점차 사라지고 '길'이라는 새로운 구조 (환경)가 생겨납니다. 일단 '길'이 생기고 나면, 그 '길'은 다음 사람 (주체)의 '행동 (걸음)'을 그 길로 유도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길을 만들고, 길이 다시 사람을 이끄는' 이 상호작용의 역사가 바로 '구조적 결합'입니다. '나'와 '세계'는 서로를 조각하며 '함께 진화'하며, 이 '결합'을 통해 비로소 '길'이라는 '의미'가 탄생합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인식'이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운동 능력 (sensorimotor capacities)', 즉 '몸'을 통해 세계를 불러냅니다. '감각운동'이라는 말은, '감각 (sensing)'과 '운동 (motor)'이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컵을 본 (감각) 후에, 손을 뻗는다 (운동)"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컵을 보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여야' 하고, 컵을 알기 '위해' 손을 '뻗어야' 합니다. 즉, '행동이 곧 인식'입니다.


예를 들어 '색깔'은, 객관적으로 저 밖에 존재하는 고정된 '속성'이 아닙니다. '색깔'은 우리의 '시각 체계 (몸)'가 특정한 파장의 '빛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생성'하는 '경험'입니다. '빨강'이라는 색은 '사과'라는 사물에 잉크처럼 칠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눈'과 '나의 뇌', 그리고 '빛'이 '함께 만들어내는 사건'입니다. 만약 세상을 보는 '눈'이 없다면, '빨강'이라는 '경험'도 없습니다. 꿀벌의 예를 들면 더 명확해집니다. 꿀벌은 우리와 다른 시각 체계 (몸)를 가졌습니다. 꿀벌은 우리와 '같은' 꽃과 '같은' 빛 (환경)을 마주하지만, 그 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볼 수 없는 '자외선 무늬'라는 '다른 세계'를 '행위화 (enaction)'합니다. '세계'는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몸'과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빨강'의 의미는 우리가 속한 '문화적 맥락'과 '언어적 범주화'를 통해 형성됩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빨강'이 '열정'을 의미하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위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색의 경험'은 생물학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인 '공동-발생 (co-emergence)'의 산물입니다.


바렐라와 동료들은 이러한 통찰을 통해, '객관주의 (세계는 밖에 있다)'와 '주관주의 (세계는 내 안에 있다)'라는 낡은 이분법을 모두 넘어서는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세계는 우리와 독립적으로 미리 주어져 있는 '발견 대상'도 아니고, 우리 마음이 마음대로 구성한 '상상의 산물'도 아닙니다. 세계는 오직 우리의 '체화된 행위'를 통해, '우리와 함께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이 '행위화'의 관점은, 불교 철학, 특히 '중관학파 (Madhyamaka, 마드야마카)'의 '공성 (空性, śūnyatā, 슈냐따)' 사상과 깊은 울림을 공유합니다. 바렐라는 평생 불교 명상 수행자였으며, 달라이 라마 (Dalai Lama)와 함께 '마음과 생명 연구소 (Mind and Life Institute)'를 공동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행위화'의 관점이 서양 철학 전통 안에서 가장 깊이 공명하는 곳은, 모리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현상학입니다.


그의 후기 작업, 특히 그가 죽음으로 인해 완성하지 못한 유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Le Visible et l'Invisible』에서, 그는 '살 (Chair)'이라는 더욱 근원적인 개념을 제시합니다.


'살'은 단순히 생물학적 '살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만지는 것'과 '만져지는 것', 즉 '나'와 '세계'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원초적인 층위'를 가리킵니다. 메를로-퐁티는 유명한 예를 듭니다. 나의 '오른손'이 나의 '왼손'을 만질 때, '오른손'은 '만지는 주체'이지만, 동시에 '왼손'에 의해 '만져질 수 있는 객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왼손' 역시 '만져지는 객체'인 동시에, '오른손'을 느끼는 '주체'입니다. 이 '만지고 만져지는' 하나의 사건 속에서, '주체'와 '객체'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둘 사이에는 '교차 (chiasm)' 또는 '되접힘 (reversibility)'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살'의 구조입니다.


'살'은 나의 몸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원소'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세계의 살'을 말합니다. 나무도, 돌도, 하늘도 모두 '같은 살'로 짜여 있습니다. 이것은 유물론도 관념론도 아닌, 그가 '간접적 존재론 (indirect ontology)'이라 부른 새로운 사유 방식입니다. 우리는 세계와 분리되어 세계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의 살' 자체가 스스로를 느끼고 보는 '한 지점'입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아브람 (David Abram, 1957-)은 메를로-퐁티의 '살' 개념을,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을 그것의 자발적 활동의 상호의존적 측면들로서 낳고 일으키는 신비로운 조직"이라고 설명합니다. '살'은 '나'와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라, '나'와 '세계'가 서로에게 '얽혀들어가는 (Entrelacs)' 장소입니다.


내가 나무를 볼 때, 나무의 초록빛은 단지 나의 망막 위에 맺히는 '정보'가 아닙니다. 그 초록빛은 '햇빛'과 '나무의 잎'과 '나의 눈'이 '하나의 살' 안에서 만나 '함께 피어나는' 사건입니다. '메를로-퐁티'의 '살' 개념은 '바렐라'의 '행위화' 이론이 말하는 '구조적 결합'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두 사상가 모두 '몸'이 단순한 생물학적 기계가 아니라, 세계와 '의미'를 '공동으로 창조'하는 존재론적 터전임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지각은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 '참여'입니다. 세계는 우리의 '몸'을 통해, 우리의 '몸'과 '함께' 스스로를 펼쳐 보입니다.


'공동-발생'의 철학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정신분석가 펠릭스 가타리의 작업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들은 우리가 '공동-발생'의 진실, 즉 '수평적 연결'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서양의 사유 방식 자체가 '위계적'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전통적인 위계적 사유 방식을 '수목형 (樹木型, arborescent)', 즉 '나무'의 구조에 비유합니다. '나무'는 하나의 '뿌리 (근원)'에서 시작하여, '줄기 (본질)'를 세우고, '가지 (하위 범주)'로 위계질서에 따라 뻗어 나갑니다. 이것은 '위계적'이고 '이원론적'인 구조입니다. '하나'의 원리, '하나'의 진리로부터 모든 것이 연역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로부터 현상계가 파생되고, 데카르트의 '코기토'로부터 세계의 확실성이 연역되는 것이 바로 이 '나무'의 방식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나무'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서, '리좀 (rhizome)'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리좀'은 원래 식물학 용어로, 감자나 생강, 혹은 바랭이풀처럼 땅속에서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뿌리줄기'를 의미합니다. '나무'와 정반대로, '리좀'은 시작점도 끝점도 없습니다. 중심도 주변부도 없습니다. 모든 점이 다른 모든 점과 '수평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어디에서 들어가도 상관없습니다. 또한 '리좀'은 어디에서 끊어져도 '나무'처럼 죽는 것이 아니라 (탈기표적 단절), 그 자리에서 다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 '리좀적 사유'는 '공동-발생'의 철학과 깊이 연결됩니다. '리좀'은 고립된 실체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어떤 존재도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으며, 오직 '연결망' 속에서 '생성'됩니다. 들뢰즈는 "존재는 일의적이다 (being is univocal)"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존재가 같은 평면 위에 있으며, 위계나 본질의 차이 없이 동등하게 생성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도 다른 것의 원인이나 근거로서 우선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발생'입니다. '리좀'은 '수평적 연결망'이며, 이 연결망 속에서 새로운 '배치 (assemblage, agencement)'들이 끊임없이 형성되고 해체됩니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름'이고 '생성'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명한 구호는 "존재가 아니라 생성 (becoming, devenir)"입니다.


'공동-발생'이라는 개념은 브뤼노 라투르 (Bruno Latour, 1947-2022)에 이르러 사회학적, 기술학적 영역으로까지 넓어집니다. 그는 '행위자-연결망 이론 (Actor-Network Theory, ANT, 안트)'을 제시했습니다. 라투르는 프랑스의 과학기술학자이자 철학자로, 미셸 칼롱 (Michel Callon)과 존 로 (John Law) 등과 함께 1980년대에 이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이론의 가장 급진적인 주장은 '인간만이 행위자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사물'도, '기술'도, '미생물'도, '텍스트'도 모두 연결망 속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행위자 (actor 또는 actant)'입니다. 전통적인 사회학은 '인간 사회'를 오직 '인간들' 간의 관계로만 설명하려 했습니다. 반대로 과학은 '자연'을 오직 '물리적 인과관계'로만 설명하려 했습니다. 라투르는 이 '인간 사회'와 '자연'의 분리 자체가 '인위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 (non-human)'이 뒤섞여 '하이브리드 (hybrid) 연결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라투르의 유명한 연구 중 하나는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의 실험실을 추적한 것입니다. 파스퇴르가 탄저병 백신을 개발한 것은 그의 '천재성'만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생물', '실험 도구', '농부들', '수의사들', '정부 관료들', '실험실의 공간', '기록 문서'들이 모두 '하나의 연결망' 속에서 '함께 작동한' 결과입니다.


'미생물' 자체도 '행위자'입니다. 왜냐하면 '미생물'이 파스퇴르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즉 '멸균된 것은 그대로 있고 멸균되지 않은 것만 발효'되지 않았다면, 파스퇴르의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사실'이란, 실험실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안정적으로 결합되어 작동하는 '연결망'이 외부로 확장되어 굳어진 것입니다.


ANT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번역 (translation)'입니다. '번역'은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들을 자신의 '네트워크' 안으로 끌어들여, 특정한 방향으로 '정렬'시키는 과정을 뜻합니다. 파스퇴르는 '농부들'의 이해관계, '정부'의 공중보건 정책, '미생물'의 행동 방식을 모두 자신의 실험실 실천과 '연결'시켜 하나의 강력한 '연결망'을 구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 행위자는 '변형'됩니다. '농부'는 단순히 가축을 기르는 사람에서 '백신 접종의 수혜자'가 되고, '미생물'은 보이지 않는 위협에서 '통제 가능한 실험 대상'이 됩니다. 이처럼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망' 안에서 '함께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발생'입니다.


바렐라의 '행위화', 메를로-퐁티의 '살', 들뢰즈의 '리좀', 라투르의 '연결망'은 모두 '갇힌 세계'의 벽이 환상임을 보여줍니다. '나'는 세계와 분리된 '주체'가 아니라, '몸'으로, '인지'로, '정체성'으로, 그리고 '사물'과도 얽혀 '함께 일어나는' 거대한 '과정'입니다.


현대인은 이러한 '공동-발생'의 진실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독립적인 개인'이며, '세계'는 우리와 무관하게 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배워 왔습니다. 우리는 '주체'로서 세계를 '인식'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매 순간 세계와 '함께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라틴아메리카의 농부, 운송 시스템, 기후 변화, 자본의 흐름, 카페인 분자, 나의 미각 등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공동-발생'의 신비를 깨닫는 것은, 현대인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것은 '고립'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책임'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의 행위는 '나'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는 '나'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해류를 타고 태평양으로 흘러가 거대한 쓰레기 섬을 키웁니다. 이 쓰레기는 잘게 부서져 미세 플라스틱이 되고, 물고기의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그 물고기는 다시 나의 식탁으로 돌아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얽힌 '연결망' 속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의 '침묵'조차 또 다른 '행위'가 됩니다.


동시에 이 '공동-발생'의 깨달음은 우리에게 '겸손'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광대한 '연결망' 속의 '한 매듭'일 뿐입니다. 우리와 연결된 '비인간 행위자'들, 즉 사물이나 자연도 그들 나름의 힘 (능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의도'는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변형'됩니다.


기후 위기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연'을 '지배'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기, 해양, 빙하, 생태계'와 얽혀 '하나의 거대한 연결망'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연결망'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거대한 변화의 일부임을 고통스럽게 깨닫고 있습니다.


'공동-발생'의 철학은 결국 우리를 오래된 지혜로 데려갑니다. 불교의 '연기 (緣起)', 노자의 '도 (道)', 『천부경』의 '천지인 일체 (天地人 一體)' 가르침은 모두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렐라, 메를로-퐁티, 들뢰즈, 라투르 같은 현대 철학자들 역시, '분리는 환상이며, 연결이 실재'라는 것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 '연결'의 진실을 온전히 깨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나'가 '고립된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 머무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세계'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으며, '세계'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명확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비움'과 '연결'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비움'이란 이처럼, '나'는 홀로 존재한다는 그 '고립된 중심'이라는 착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결'이란, '나'와 '세계'가 서로를 만들며 '함께 일어나는' 하나의 운명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8.4. 나비효과와 카오스: 작은 날갯짓의 힘



우리는 종종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며, 거대한 세계의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갇힌 세계' 속에서 고립감과 무력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세계가 '일 더하기 일은 둘'이라는 단순한 '선형적 (linear)' 법칙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연결'의 법칙으로 움직인다면 어떨까요. '나'의 가장 사소한 몸짓 하나가, 행성의 반대편에서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는 '첫 번째 날갯짓'이 될 수 있다는 과학적 통찰은, '연결의 철학'이 도달하는 가장 경이롭고도 무서운 결론입니다.


이 놀라운 통찰은 1961년,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 (Edward Lorenz, 1917-2008)의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기상 예측을 위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의 계산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기계에 '0.506127'이라는 초기 조건 값을 다시 입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소수점 이하 네 번째 자리부터를 생략하고 '0.506'이라는, 얼핏 보기에 '거의 같은' 값을 입력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거의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컴퓨터가 계산해 낸 미래의 날씨 그래프는, 이전의 그래프와는 전혀 상관없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펼쳐졌습니다. 로렌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0.000127이라는, 인간이 감지조차 할 수 없는 이 '미세한 차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덩이처럼 불어나 예측 불가능한 '거대한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로렌츠는 이 현상을 1972년 한 강연에서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도 있는가? (Does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s in Brazil set off a tornado in Texas?)"라는 유명한 질문으로 요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비효과 (Butterfly Effect)'의 탄생입니다.


'나비효과'는 '혼돈 이론 (Chaos Theory)'의 핵심적인 특징입니다. '혼돈 이론'은, 뉴턴 이래로 서양 과학을 지배해 온 '결정론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고전 물리학은, 마치 당구대의 당구공처럼, '초기 조건 (각도, 힘)'을 정확히 알면 '미래 (결과)'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선형적 (linear)' 세계관에서, '작은 원인'은 '작은 결과'를 낳고, '큰 원인'은 '큰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로렌츠는, 날씨처럼 수많은 변수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복잡계 (Complex System)'에서는, 이 '예측'이 불가능함을 증명했습니다. '나비효과'는 '인과법칙'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과법칙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그 인과관계가 '비선형적 (non-linear)'이어서, '원인'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비의 날갯짓'이라는 '가장 작은 원인'이, '토네이도'라는 '가장 큰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세계, 이것이 '혼돈'의 세계입니다.


'혼돈 이론'이 '예측 불가능성'에 집중한다면, 이와 밀접하게 연결된 '복잡계 이론 (Complexity Theory)'은 이 '혼돈'처럼 보이는 현상 속에서 어떻게 '질서'가 스스로 생겨나는지를 탐구합니다. 이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자기조직화 (Self-organization)'라고 부릅니다.


'자기조직화'는 '중앙의 통제탑'이나 '지도자' 없이, '개별 요소'들이 그저 '단순하고 지역적인 규칙 (local rules)'을 따랐을 뿐인데도, '전체 시스템' 차원에서 놀라운 '질서'가 불쑥 나타나는 ‘창발 (Emergence)’ 현상을 말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수천 마리의 '새떼 (flock of birds)'가 하늘을 나는 모습입니다. 그들에게는 "전체 대형을 유지하라"고 명령하는 '리더 새'가 없습니다. 개별 새들은 그저 "너무 가까운 옆 새와는 부딪히지 마라", "주변 새들의 평균 방향으로 날아라", "주변 새들의 평균 위치로 이동하라"는 세 가지 '단순한 규칙'만을 따릅니다. 하지만 이 '지역적'인 상호작용이 모여, 수천 마리의 새떼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동시에 방향을 틀고 춤을 추는 장엄한 '전체적 질서'가 '창발'합니다.


'자기조직화'는 이처럼 '아래에서부터 위로 (bottom-up)'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인터넷, 개미집, 도시의 교통 체증,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역시, '중앙의 통제' 없이 '개별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가는' '자기조직화' 시스템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기조직화' 시스템에서 '변화'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변화는 결코 점진적이거나 비례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잡계'는 엄청난 양의 스트레스를 '임계점 (Critical Point)'에 도달할 때까지 묵묵히 축적합니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모래 더미 (sandpile)' 비유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래알을 하나씩 떨어뜨려 '모래 더미'를 만듭니다. 모래알은 계속 쌓여가며, 모래 더미의 '경사 (스트레스)'는 점점 가팔라집니다. 시스템은 아슬아슬한 '임계 상태 (critical state)'에 도달합니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모래알을 떨어뜨립니다. 바로 이 '단 하나의 마지막 모래알 (작은 원인)'이, 모래 더미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산사태 (거대한 결과)'를 촉발시킵니다.


이것이 '임계점'의 무서움입니다. '나비효과'가 '초기 조건의 민감성'을 말한다면, '임계점'은 '축적된 스트레스'가 '단 하나의 계기'를 통해 폭발하는 순간을 말합니다. 이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모래알'은 결코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방아쇠'입니다.


저널리스트인 말콤 글래드웰 (Malcolm Gladwell, 1963-)은 그의 세계적인 저서 『티핑 포인트, The Tipping Point』에서, 이 '복잡계'의 원리가 어떻게 '사회 현상' 속에서 작동하는지 명료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티핑 포인트'는 바로 '임계점'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티핑 포인트' 이론은, 왜 어떤 신발이 아무도 신지 않다가 갑자기 '유행'처럼 폭발하는지, 왜 어떤 도시는 수십 년간 지속되던 '범죄율'이 갑자기 급감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글래드웰은 이러한 '사회적 전염 (social epidemics)'이 '나비효과'나 '모래 더미'의 원리와 똑같이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티핑 포인트'가 세 가지 규칙을 통해 일어난다고 분석했습니다.


첫째는 '소수의 법칙 (Law of the Few)'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유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범한 '연결망'을 가진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 (커넥터, 메이븐, 세일즈맨)'이 '나비'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고착성 요소 (Stickiness Factor)'입니다. 메시지 자체가 사람들의 기억에 '달라붙는'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는 '상황의 힘 (Power of Context)'입니다. 그 '작은 날갯짓'이 일어나는 '상황'과 '맥락'이, 그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임계점'에 도달해 있어야 합니다.

글래드웰의 '티핑 포인트'는, '혼돈 이론'과 '복잡계 이론'이 단지 과학 실험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문화'를 움직이는 핵심 원리임을 보여줍니다.


'나비효과', '자기조직화', 그리고 '티핑 포인트'는 모두 '연결의 철학'이 도달하는 하나의 결론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분리된 개인'이라는 환상, 그리고 "나 하나쯤이야"라는 무력감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무지 (無知)'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잡계'라는 거대한 '연결망' 속의 일부입니다. 이 세계는 『화엄경』의 '인드라망 (Indra's Net)'처럼, '하나'의 행동이 '전체'에 울림을 주는 '비선형적'인 시스템입니다. '나'의 행위는 결코 '나'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빨대 하나 (작은 원인)는, 그 자체로는 사소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행동이 수억 명의 '자기조직화'된 습관과 만나,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해양 생태계를 파괴하고 (예측 불가능한 거대 결과), 그 플라스틱이 다시 '나'의 식탁으로 돌아오는 '나비효과'의 일부가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절망 속에서 던진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원인) 역시 사소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날갯짓'이, '임계점'에 도달한 한 사람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킬 (티핑 포인트) 수 있습니다. 그 행동은 선 (善)의 '자기조직화'에 기여하는 '첫 번째 모래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연결'의 진실은 우리에게 '고립'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윤리적 책임'을 회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연결망' 속의 '한 매듭'일 뿐, '세계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거대한 '책임'을 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행동이 '사소하다'는 핑계 뒤에 숨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거대한 '희망'을 줍니다. '나'라는 존재가 아무리 작고 무력하게 느껴질지라도, 이 '연결된' 세계 속에서는 '나'의 가장 '작은 날갯짓'이야말로, 이 '갇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



keyword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07화제2-7장: 비움의 실천 - 내면의 소음 잠재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