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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장: 비움의 실천 - 내면의 소음 잠재우기

by DrLeeHC

제2-7장: 비움의 실천 - 내면의 소음 잠재우기



2-7.1. 생각 바라보기: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



우리를 가두는 가장 견고한 감옥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생각의 소리에 시달리곤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이 시끄러운 소음과 우리 자신을 '하나'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나는 실패자다"라는 '생각'이 문득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의심 없는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실패자'라는 '존재'가 되어 좌절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할 거야"라는 '생각'이 스치면, 우리는 곧바로 그 '불안' 자체가 되어 고통받습니다. 이처럼 '나'와 '나의 생각'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로 묶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동일시 (identification)'라는 감옥입니다.


'비움의 실천'은 바로 이 '동일시'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첫걸음은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라는 진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을 하는 주체이지, '생각' 그 자체가 아닙니다. 이 '나'와 '생각' 사이에 '공간'을 만드는 것, 이것이 내면의 소음을 잠재우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위대한 통찰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2천 년 전 스토아 철학 (Stoicism)의 지혜에 깊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에픽테토스 (Epictetus, 55-135)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나 '판단'이다"라고 설파했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사건'이 아닌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이 가르침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한 헛된 '판단 (생각)'을 비워내라는 스토아의 핵심 수행이었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사건'이 아닌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이 가르침은, 현대 심리학에 이르러 '인지치료 (Cognitive Therapy)'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1960년대 미국의 정신과 의사 아론 벡 (Aaron Beck, 1921-2021)은, 우울증 환자들이 '자동적 사고 (automatic thoughts)'라는 부정적인 생각의 습관에 갇혀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험에 떨어진 학생은 "나는 역시 안 돼.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라는 자동적 사고에 빠집니다. 인지치료는 이처럼 왜곡된 '생각'을 찾아내어, 그것이 과연 '사실'인지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대체하도록 돕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현대 심리치료의 흐름, 예를 들어 '수용전념치료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ACT)'는 더 근본적인 '비움'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이 치료법을 개발한 스티븐 헤이즈 (Steven C. Hayes, 1948-)는, 부정적인 생각을 억지로 '바꾸려' 애쓰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 생각을 강화시키는 '싸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생각을 바꾸는 대신, 생각과 '나'의 '관계'를 바꾸라고 제안합니다.


‘수용전념치료’에서, '나'와 '나의 생각'이 끈끈하게 한 덩어리로 달라붙어 있는 상태를 '인지적 융합 (Cognitive Fusion)'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실패자다"라는 '생각'이, 그저 '생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그 자체로 느껴지는 것이 바로 '융합'입니다.


이 '융합'을 깨뜨리는 실천적인 '과정'이자 '기법'이 바로 '인지적 탈융합 (Cognitive Defusion)'입니다. 그리고 이 '탈융합'이라는 기법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자 '상태'는 '탈동일시 (de-identification)'입니다. 즉, '탈융합'은 '방법'이고, '탈동일시'는 '결과'이자 '비움의 상태'입니다.


'인지적 탈융합'은 '나'와 '생각' 사이에 의식적으로 '틈'을 만드는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합니다.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기법 중 하나가 '생각에 이름 붙이기 (thought labeling)'입니다. "나는 실패자다"라는 생각이 떠올라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그 생각에 휩쓸려 '융합'되는 대신, 한 걸음 물러나 그 생각을 '관찰'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 나는 지금 '나는 실패자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것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나는 실패자다"라는 말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는 실패자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라는 말 속에서, 그 '생각'은 '나' 자신이 아니라, 그저 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정신적 사건 (mental event)' 중 하나로 격하됩니다. '나'는 더 이상 태풍이 아니라, 멀리서 태풍을 바라보는 '관찰자 (하늘)'가 됩니다. 우리는 생각을 없애려 싸우는 대신,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봄'으로써,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습니다. '탈융합'은 이처럼 '나'와 '생각' 사이에 '비어있는 공간'을 만드는 실천입니다.


이 '생각 바라보기'의 실천, 즉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판단 없이 그저 알아차리는 이 행위는, 현대 심리학이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이 지혜의 가장 오래되고 깊은 뿌리 중 하나는 인도의 성자 파탄잘리 (Patañjali)가 쓴 경전 『요가 수트라, Yoga Sūtra』에서 발견됩니다. 그는 “Yogaḥ citta-vṛtti-nirodhaḥ, (요가- 치타-브리티-니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요가란 마음 (citta, 치타) 작용 (vṛtti, 브리티)의 멈춤 (nirodhaḥ, 니로다)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마음 작용 (브리티)'이 바로 우리가 잠재우려는 '내면의 소음', 즉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파탄잘리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고통은 '무지 (無明, avidyā, 아비드야)'에서 비롯됩니다.


이 '무지'란, 우리가 다음의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는 변하지 않는 순수한 '보는 자 (푸루샤, Purusha)', 즉 '참된 나'입니다. 두 번째는 끊임없이 변하는 '보이는 것 (프라크리티, Prakriti)'입니다. 파탄잘리의 가장 위대한 통찰은, 우리가 '나'라고 믿는 '마음 (citta, 치타)'과 그 마음의 작용인 '생각 (vṛtti, 브리티)'조차도, '보는 자'가 아니라 '보이는 것'에 속한다고 밝힌 점입니다.


따라서 '무지'란, '보는 자'인 '나 (푸루샤)'가, '보이는 것'에 불과한 '나의 생각 (브리티)'을 바라보며, "저것이 바로 나다"라고 착각하는 상태 (동일시)입니다. '요가'의 모든 실천은, 이 '생각 (브리티)'을 '멈추고' 그것과 '나 (푸루샤)'를 분리하는 '탈동일시'의 과정입니다.


고대의 이 위대한 지혜는, 오늘날 '마음챙김 (Mindfulness)'이라는 이름으로 현대 과학과 만났습니다. '마음챙김'은 미국의 의학자인 존 카밧진 (Jon Kabat-Zinn, 1944-) 박사가 1970년대에 '마음챙김에 기반한 스트레스 완화 (MBSR, 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서구 사회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마음챙김'의 핵심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경험을 '비판단적인 태도 (non-judgmental attitude)'로 그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그것을 '판단'합니다. "이건 좋은 생각이야" (집착), "이건 나쁜 생각이야" (회피). 하지만 '마음챙김' 수행은 이 모든 '판단'을 멈추라고 합니다. 그저 생각이 구름처럼 떠오르면 "생각이 떠올랐구나"라고 알아차리고, 감정이 일어나면 "감정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립니다. 그 생각과 감정을 바꾸려 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그저 손님처럼 왔다가 가게 내버려 둡니다.


지난 수십 년간, 신경과학은 이 '마음챙김'이 실제로 우리의 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냈습니다. 우리 뇌에는 '기본 모드 네트워크 (DMN, Default Mode Network)'라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 'DMN'은 우리가 아무런 일에도 집중하지 않고 '멍하니' 있을 때 활성화되는 영역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을 오가며 끝없이 '잡담'을 늘어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통받는 '내면의 소음'의 정체입니다. "나는 실패자야", "그때 왜 그랬을까", "내일은 어떡하지"라는 생각들이 바로 이 'DMN'의 활동입니다.


과학자들은 오랜 명상 수행자들의 뇌를 촬영한 결과, 이 'DMN'의 활동이 현저하게 감소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잡담' 속에 빠져 있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는 뇌의 영역이 더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이 단순한 철학적 구호가 아니라, 훈련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과학적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또한, '마음챙김' 훈련은 '신경가소성 (Neuroplasticity)'을 통해 뇌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공포와 불안을 담당하는 '편도체 (Amygdala)'의 활동은 감소하는 반면, '생각'을 '관찰'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전전두피질 (Prefrontal Cortex)'은 더 두껍고 강하게 발달합니다. '마음챙김'은 'DMN (쓸데 없는 생각)'의 힘을 약화시키고, '전전두피질 (관찰자)'의 힘을 강화시키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이 과학적 근거를 통해, '생각'에 휩쓸려가는 존재에서 '생각'을 바라보는 존재로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라는 이 통찰은, 놀랍게도 20세기 서양 실존주의 철학 속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나'라고 불리는 이 '자아'가 우리 의식의 '주인'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반성, reflection),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비판했습니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반성적인 '자아 (Ego)'입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 '반성적 코기토 (Reflective Cogito)' 이전에, 더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반성적 코기토 (Pre-reflective Cogito)', 즉 '반성 이전의 의식'입니다. 이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의식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를 향해 뻗어 나가는 순수한 '활동'으로서의 의식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버스를 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을 때, 우리는 "나는 지금 버스를 타기 위해 달리고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오직 '버스'와 '도로', 그리고 '달림'이라는 행위 그 자체에 쏠려 있습니다. 이 순간, '나'라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세계를 향한 순수한 의식'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나'라는 '자아'는,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고르며 "아, 내가 방금 열심히 달렸구나"라고 '반성'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이차적인 산물입니다.


사르트르에게 '의식'의 본질은 '존재 (Being)'가 아니라 '무 (Nothingness)'입니다. 의식은 책상이나 돌멩이처럼 꽉 찬 '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텅 비어있기에 (無), 무엇이든 비추고 무엇이든 향할 수 있는 순수한 '활동'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자아 (Ego)'는, 이 순수한 의식이 만들어낸 '대상'이자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사르트르의 이 통찰은 '생각 바라보기'에 강력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라는 말은, 나의 본래 '의식 (전반성적 코기토)'이, 내가 나라고 믿는 '자아 (반성적 자아)'보다 더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나'는 그 모든 생각을 비추고 알아차리는, 본래부터 '텅 비어있는' 순수한 '의식' 그 자체입니다.


인지치료가 '생각'과 '나'를 분리하는 '도구'를 제공하고, 마음챙김이 그 '훈련'을 제시하며, 사르트르가 그 '철학'을 뒷받침했다면, 인도의 영적 스승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 Krishnamurti, 1895-1986)는 이 '비움'의 길을 그 궁극적인 지점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는 '나 (관찰자)'와 '내 생각 (관찰 대상)'을 분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 '관찰자'마저도 '소멸'될 때 찾아온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나는 내 생각을 바라본다"고 말할 때, 우리는 여전히 '둘 (Duality)'로 나뉘어 있습니다. '바라보는 나 (관찰자, Observer)'와 '바라보이는 생각 (관찰 대상, Observed)'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우리의 모든 내면적 갈등이 바로 이 '이원성'에서 비롯된다고 통찰했습니다.


'관찰자'는 "나는 이 생각을 없애야 해", "나는 이 감정을 통제해야 해"라고 말하며 '관찰 대상'과 '싸움'을 벌입니다. 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묻습니다. "그 '관찰자'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그 '관찰자 (생각하는 자, Thinker)'는, 사실 그저 과거의 '생각'과 '기억',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진 '묶음 (bundle)'에 불과합니다. '관찰자'는 '관찰 대상'과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관찰자가 곧 관찰 대상이다 (The observer is the observed)."


이것이 크리슈나무르티의 가장 위대한 통찰입니다. '나'라고 부르는 '생각하는 자 (Thinker)'가 바로 '생각 (Thought)' 그 자체입니다. '나'라는 과거의 기억 뭉치가, 지금 일어나는 새로운 '생각'을 바라보며 "이것은 나다" 혹은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분별'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해방은 '관찰자'가 '관찰 대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분리' 자체가 '환상'임을 '있는 그대로, 선택 없이 자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실, 즉 '생각하는 자가 곧 생각'임을 억지로 노력해서가 아니라, 그저 '통찰 (insight)'하게 되는 순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이원성'이 무너집니다.


'나'라는 중심 (관찰자)이 사라질 때, '생각'은 더 이상 머물 곳을 잃고 저절로 소멸합니다. 이것이 '비움'의 최종적인 실천입니다. 그것은 '나'가 '생각'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 덩어리' 자체가 '비워지는' 것입니다.


'생각 바라보기'의 여정은 이처럼 현대인에게 구체적인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생각'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지치료의 '탈동일시' 기법을 통해,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라는 첫 번째 공간을 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챙김' 훈련을 통해, '생각'을 '관찰'하는 내면의 힘 (전전두피질)을 기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르트르의 철학을 통해, 우리의 본래 '의식'이 '텅 비어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을 통해, '나 (관찰자)'라는 마지막 중심마저 비워냄으로써, 내면의 소음이 완전히 잠재워진 '고요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2-7.2. 감정의 환대: 억압도 방임도 아닌 길



'비움'의 실천은 '감정 (emotion)' 조절이라는, 가장 어렵고 격렬한 관문과 마주합니다. 우리는 분노, 슬픔, 두려움, 질투와 같은 격렬한 감정의 불길이 밀려올 때 속수무책으로 무너집니다. 이 불길 앞에서, 우리는 보통 두 가지 극단적인 길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첫 번째 극단적 길은 '억압 (suppression)'입니다. 우리는 "착한 사람은 화를 내면 안 돼" 혹은 "강한 사람은 슬퍼하면 안 돼"라는 사회의 규율에 갇혀, 이 감정들을 '나쁜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이 '불편한 손님'을 없는 척하며 내면의 지하실에 가두어 버립니다. 하지만 억압된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하실에서 더 어둡고 뒤틀린 힘을 키우며, 우리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알 수 없는 신체적 고통으로 드러납니다.


두 번째 극단적 길은 '방임 (indulgence)' 또는 '동일시 (identification)'입니다. 우리는 감정의 폭풍에 완전히 휩쓸려버립니다. "나는 분노한다"가 아니라 "내가 곧 분노다"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이 감정을 통제 없이 밖으로 쏟아내며,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라고 합리화합니다. 이 방식은 감정을 '환대'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노예'가 되어 타인과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방임'에 불과합니다.


'비움의 철학'은 이 두 가지 길, 즉 '억압'도 '방임'도 아닌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감정의 환대 (welcoming)'입니다. 이 길은 감정을 '적'으로 보아 싸우거나 (억압), '주인'으로 모시지 (방임) 않습니다. 대신, 감정을 '나그네' 또는 '소식을 전하러 온 메신저'로 바라봅니다. 이 길은 감정을 판단 없이 '알아차리고', 그것이 머물 '공간'을 비워주며, 그것이 가져온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환대'의 기술은 동서양의 지혜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스위스의 위대한 심리학자 칼 융 (Carl Jung, 1875-1961)은, '억압 (suppression)'이라는 잘못된 '비움'의 방식을 사용할 때, 바로 그 '비워내려 했던' 것들에게 오히려 지배당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융은 인간의 마음이 의식적인 '자아 (Ego)'와, 그 자아가 인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무의식 (Unconsciou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아'는 이 의식 세계의 중심으로서, 밝은 대낮의 빛 속에서 '나'를 인식하고 판단하며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자아'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사회'라는 타인들의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융은 이 '자아'가 외부 세계와 소통하고 적응하기 위해 사용하는 '공적인 얼굴'을 '페르소나 (Persona)'라고 불렀습니다. '페르소나'는 본래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 쓰던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이 '사회적 가면'은 우리가 문명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페르소나'를 통해 사회의 규범과 기대에 맞추어, '친절한 동료', '책임감 있는 부모', '유능한 전문가'와 같은 특정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페르소나'는 우리가 사회 속에서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돕는 일종의 '외투'입니다. '자아'는 종종 이 '페르소나'와 자신을 강하게 동일시하여, "내가 바로 이 가면 (역할)이다"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밝은 '페르소나'가 강할수록, 즉 '자아'가 "나는 이렇게 선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다"라고 믿을수록, 그 등 뒤에는 반드시 어둡고 긴 '그림자 (Shadow)'가 생겨납니다. '그림자'는, '자아'가 자신의 '페르소나'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것은 내가 아니야"라고 부정한 모든 것들의 총합입니다. 우리가 '나쁘다'고 억압하여 '비워내려' 했던 모든 감정과 욕망이 이 '그림자' 속에 숨어 삽니다. 우리가 억압한 분노, 질투, 이기심, 두려움이 모두 이곳에 모여 거대한 덩어리를 이룹니다.


융에 따르면, 이 '그림자'는 결코 지하실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우리가 가장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삶에 개입합니다. 그것이 바로 '투사 (projection)'입니다. '투사'는 내 안의 '그림자'를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보는 현상입니다. 내가 나의 '분노'를 억압하고 있다면, 나는 유독 다른 사람의 '분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를 비난하게 됩니다. 내가 나의 '이기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타인의 사소한 '이기심'을 참지 못하고 경멸합니다. 즉, 내가 타인에게서 격렬하게 '싫어하는' 모습은, 사실 '내가 비워내려다 실패한 나의 그림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융은 이처럼 '페르소나 (Persona)'와 '그림자 (Shadow)'로 분열된 마음을 다시 '하나'로 합쳐,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의 궁극적인 심리적 목표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한 인간이 이처럼 '분열되지 않는 (in-dividual)'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성숙해 가는 이 일생의 여정을, '개성화 (Individuation)'라고 불렀습니다. '개성화'는 의식적인 '자아 (Ego)'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그림자'를 포함한 무의식의 모든 측면을 받아들여, 마침내 의식과 무의식 전체를 아우르는 더 큰 중심인 '온전한 자기 (Self)'를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이 '개성화'를 이루기 위한 첫 번째이자 가장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바로 우리가 억압했던 '그림자'를 다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그림자 통합 (integration)'입니다. 융에게 '개성화'의 여정은 '그림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는 데 달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자 통합'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감정의 환대'입니다. 그것은 "나에게는 분노가 없어"라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내 안에도 분노가 있다. 이것 또한 나의 일부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그림자 통합 작업'은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선하고' '합리적'이라는 '페르소나'를 비워내고, '악하고' '비합리적인' 나의 어두운 면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융의 가르침은, 우리가 '억압'했던 감정을 '환대'할 때, 그 '그림자'는 더 이상 우리를 파괴하는 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생명력'의 원천이 됨을 보여줍니다. '비움'은 '그림자'를 받아들일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융이 '그림자'라는 지도를 그렸다면, 현대 불교 명상가이자 심리학자인 타라 브랙 (Tara Brach, 1953-)은 그 '그림자'를 실제로 '환대'하는 가장 구체적인 실천법을 제시합니다. 그녀는 고대 불교의 '다르마 (Dharma, 법)'에서 길어 올린 지혜를, 'RAIN (비)'이라는 네 단계의 명상 기법으로 정리했습니다. 'RAIN'은 '억압'과 '방임' 사이에서 길을 잃은 우리에게, '감정의 환대'가 무엇인지 한 걸음씩 안내하는 지도입니다.


첫 번째, ‘R’은 '알아차리기 (Recognize)'입니다. 이것은 내면의 소란스러움을 멈추고, 지금 이 순간 어떤 감정이 일어났는지 그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 '분노'가 일어났구나" 또는 "지금 '슬픔'이 나를 찾아왔구나"라고 그 감정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탈동일시'의 첫걸음입니다. '내가 분노다 (방임)'가 아니라, "'나'는 '분노'를 알아차렸다"가 됩니다.


두 번째 ‘A’는 '허용하기 (Allow)'입니다. 이것이 '환대'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알아차린 그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거나 (억압), 바꾸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저 "이 감정이 지금 여기 있어도 괜찮다"라고 '허락'하고, 그 감정이 머물 수 있도록 내면의 '공간'을 비워줍니다. "슬픔아, 어서 오렴. 너는 불청객이 아니야." 이것은 감정에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저항'을 멈추는 것입니다. 감정 그 자체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나는 이 감정을 느껴서는 안 돼!"라는 '저항'이 고통을 만듭니다.


세 번째 ‘I’는 '탐구하기 (Investigate)'입니다. 감정을 '허용'하고 그와 함께 머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그 '메신저'가 가져온 '소식'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것은 차가운 '분석'이 아니라, '친절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이 분노가 내 몸의 어느 부분에서 느껴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또한 이 슬픔이 나에게 어떤 소식을 전하려 하는지, 그리고 어떤 특정한 '생각'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알아차립니다. 더 나아가, 이 감정이 나의 어떤 깊은 '믿음'을 건드리고 있는지도 차분히 탐구합니다.


네 번째 ‘N’은 '보살피기 (Nurture)'입니다. '탐구'를 통해 우리는 이 감정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분노 뒤에는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슬픔 뒤에는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보살피기'는, 이 상처받고 아파하는 '내면 아이'에게 스스로 '자비 (Compassion)'를 베푸는 것입니다. 즉, 타인에게서 그토록 갈구했던 그 '존중'과 '사랑'을 '내'가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RAIN'의 네 단계는 '감정의 환대'를 위한 완결된 여정입니다. 우리는 '알아차리고 (R)' '허용함 (A)'으로써, 감정에 대한 맹목적인 '저항'을 비워냅니다 (비움). 그리고 '탐구하고 (I)' '보살핌 (N)'으로써, 감정 뒤에 숨어있던 '나의 진정한 욕구'와 연결되고, '나의 상처받은 내면 (그림자)'을 자비로써 껴안아 '스스로 통합'하게 됩니다.


이 '감정'과 '욕구'의 관계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 1632-1677)의 '정념론 (Theory of Affects)'에서 그 철학적 뿌리를 찾습니다. 스피노자는 그의 주저 『에티카, Ethica』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 (욕망)"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근본적인 힘을 '코나투스 (Conatus)'라고 불렀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의 감정은 이 '코나투스'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을 나타내는 '신호'입니다. 만약 어떤 일이 나의 '코나투스 (힘)'를 증가시키면, 우리는 '기쁨 (laetitia)'을 느낍니다. 반대로 나의 '힘'을 감소시키면, '슬픔 (tristitia)'을 느낍니다. '사랑'은 기쁨을 주는 대상과의 연결이며, '미움'은 슬픔을 주는 대상과의 연결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감정 (affectus, 정념)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수동적 정념 (passio)'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원인'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채 휩쓸리는 감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겪는 '방임'의 상태입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할 때, 나는 그 '외부의 원인'에 의해 나의 '힘 (코나투스)'이 감소되는 것을 느끼고 (슬픔/분노), 그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두 번째는 '능동적 정념 (actio)'입니다. 이것은 그 감정이 일어난 '참된 원인'을 '이해 (참된 인식)'할 때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수동적'으로 화가 났을 때, 'RAIN'의 '탐구(I)' 과정을 통해 "아,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저 사람의 비난 때문이 아니라, '존중받고 싶은 나의 욕구 (코나투스)'가 좌절되었기 때문이구나"라고 그 '참된 원인'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바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해'된 감정은 더 이상 '수동적 정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능동적 정념'이 됩니다. 나는 더 이상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나는 '이성'의 힘으로 그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스피노자에게 '비움'이란, 이처럼 '참된 인식'을 방해하는 '무지'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감정의 환대'는 감정을 이해함으로써 '감정의 노예 (수동)'에서 '감정의 주인 (능동)'으로 거듭나는 이성적인 '변용 (transformation)'입니다.


'감정'이 '욕구'의 메신저라는 이 위대한 통찰은, 미국의 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 (Marshall Rosenberg, 1934-2015)에 의해 '비폭력대화 (Nonviolent Communication, NVC)'라는 구체적인 '소통의 언어'로 태어났습니다. '비폭력대화'는 스피노자의 정념론, 칼 융의 그림자 이론, 그리고 불교의 '알아차림'이 일상의 '연결' 속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감정의 환대'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로젠버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폭력적인 언어'가 세상의 모든 갈등의 뿌리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폭력'은 물리적인 폭력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난', '판단', '비교', '분석', '강요'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닫게 만들고 방어적으로 만드는 모든 종류의 '말'입니다. 로젠버그는 이처럼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언어를 '자칼 (Jackal)의 언어'라고 불렀습니다.


'자칼의 언어'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그림자 투사 (projection)'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당신은 정말 이기적이야!"라는 '비난'은, 사실 "나의 수고가 '인정'받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슬프다'"는 '나'의 '감정'과 '욕구'를 정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폭력'입니다. 로젠버그는 이 '자칼의 언어'가 충족되지 못한 '욕구 (Needs)'를 비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비폭력대화'는 이처럼 '판단'과 '비난'의 언어 (자칼의 언어)를 '비워내고', 그 대신 '감정'과 '욕구'라는 '생명의 언어'를 회복하는 실천입니다. 로젠버그는 이 생명의 언어를, 육상 동물 중 심장이 가장 커서 '공감'을 상징하는 '기린의 언어'라고 불렀습니다. 이 실천은 네 가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관찰 (Observation)'입니다. 이것은 '판단'과 '평가'를 비워내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당신은 나를 무시했어"라고 말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나의 '해석'이자 '판단'입니다. 이 '판단'의 말은 상대방의 귀에 '비난'으로 들리고, 상대는 즉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어 '연결'의 문은 닫힙니다. '관찰'은 이 '판단'을 멈추고, 마치 카메라 렌즈로 찍듯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무시했어 (판단)"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은 내가 말하는 동안 세 번 창밖을 보았습니다 (관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관찰'은 나와 상대방이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을 만들어줍니다.


둘째는 '감정 (Feeling)'입니다. '판단'을 비워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의 내면을 환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RAIN' 기법의 '알아차리기(R)'와 '허용하기(A)'에서 살펴본 것과 같습니다. 이 단계의 핵심은, 나의 '감정'을 '생각'과 구분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무시한다고 느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판단'과 '생각'을 감정인 척 포장한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나를 화나게 했어"라고 말하는 것은, 내 감정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자칼'의 방식입니다. '기린'의 언어는 '나'의 감정을 온전히 책임집니다. "나는 '좌절감'과 '외로움', 그리고 '슬픔'을 느낍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환대'하고 책임질 때, 우리는 비로소 '방어'가 아닌 '연결'을 위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욕구 (Needs)'입니다. 이것이 '비폭력대화'의 심장부이며, 우리가 '감정의 환대'를 하는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로젠버그는 우리의 '모든 감정'이 '욕구'가 알려주는 '신호'라고 보았습니다. '욕구'란 '연결', '공감', '인정', '안전', '자율성', '의미'처럼,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생명의 에너지'입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 (Conatus)'와도 같습니다. 이 '욕구'가 충족되면 우리는 '기쁨', '평화', '감사'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반대로 '욕구'가 좌절되면, 우리는 '분노', '슬픔',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감정'은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었는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메신저'입니다. 이 단계는 "나는 '좌절'과 '슬픔'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상대방과 '연결'되고 나의 이야기가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욕구'를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자칼'의 '비난'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성'의 차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넷째는 '부탁 (Request)'입니다. '관찰'을 통해 상황을 공유하고, '감정'을 환대하며, 그 뿌리인 '욕구'와 연결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방에게 구체적인 '부탁'을 합니다. 이 마지막 단계의 핵심은 '부탁'과 '강요 (Demand)'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강요'는 상대방이 "아니오"라고 말할 권리를 박탈하고, 만약 거절하면 비난하거나 처벌하겠다는 위협이 숨어있는 '폭력'입니다. 반면에 '부탁'은 상대방의 '자율성'을 온전히 존중하며, "아니오"라는 대답을 기꺼이 수용하는 '열린' 자세입니다. 또한 '부탁'은 "나를 존중해 줘"처럼 추상적이어서는 안 되며, "다시는 그러지 마"처럼 부정적이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혹시 지금 10분만이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나의 이야기에 집중해 줄 수 있습니까?"처럼,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비폭력대화'는 '나'의 감정을 환대하는 가장 깊은 내면의 실천 (비움)인 동시에, 타인과 '연결'되는 가장 구체적인 소통의 기술 (연결)입니다. 더 나아가, 이 네 단계는 '나'에게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적용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당신은 정말 이기적이야!"라고 '자칼'의 언어로 비난할 때, '기린'의 귀를 가진 사람은 그 '비난'을 듣지 않습니다. 대신, 그 '비난' 뒤에 숨겨진 상대방의 '감정'과 '욕구'를 듣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수고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좌절감'과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처럼 타인의 '감정'까지 '환대'하고 '공감'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분리'의 세계를 넘어 '하나됨'의 '연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감정의 환대'는 이처럼 억압도 방임도 아닌, 고요하고 용기 있는 '제3의 길'입니다. 우리는 스피노자를 통해 감정의 '이해'가 곧 '자유'임을 들었습니다. 융을 통해, 우리가 '억압'한 '그림자'가 바로 우리가 '통합'해야 할 '나'의 일부임을 알았습니다. 'RAIN' 기법을 통해, 그 감정을 '허용'하고 '탐구'하며 '보살피는' 구체적인 '비움'의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비폭력대화'를 통해, 이 '감정'과 '욕구'의 언어가 '나'를 치유하고 '너'와 연결되는 '하나됨'의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더 이상 잠재워야 할 '소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환대'해야 할 가장 소중한 '메신저'입니다.






2-7.3. 욕망 내려놓기: 집착의 뿌리 찾기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는, 생각과 감정을 끊임없이 휘젓고 일으켜 세우는 거대한 동력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욕망 (Desire)'입니다. '욕망'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엔진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집착 (Clinging)'이라는 감옥에 가두는 쇠사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원합니다'. 돈, 명예, 사랑, 혹은 특정한 이상 (理想)을 원합니다. 이 '원함'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지만,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고통'받습니다. 설령 그것이 채워진다고 해도, 그 만족은 잠시뿐, 우리는 곧바로 또 다른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는 이 끝없는 '욕망'의 쳇바퀴 위에서 소진되고 있습니다.


'비움의 철학'은 이 '욕망' 자체를 무조건 '악 (惡)'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이토록 고통받는 '집착의 뿌리'가 과연 무엇인지 깊이 탐구하라고 초대합니다. 동서양의 위대한 지혜들은, 이 '욕망'의 정체를 해부하고, 그것의 폭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비움'의 길을 각기 다른 언어로 제시해왔습니다.


동양의 지혜, 특히 초기 불교는 '집착의 뿌리'를 가장 명료하게 파헤쳤습니다. 싯다르타 고타마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苦, dukkha, 둑카)'의 근본 원인을 바로 '갈애 (渴愛, tanhā, 탄하)'라고 지목했습니다. 이것이 '사성제 (四聖諦 : 苦集滅道)' 중 두 번째인 '집제 (集諦)'의 핵심입니다.


'갈애 (tanhā)'는 문자 그대로 "목마름"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 (chanda, 찬다)'와는 구별됩니다. '갈애'는 맹목적이고, 충족될 수 없으며, 우리를 중독시키는 '불타는 갈증'입니다. 싯다르타는 이 '갈애'가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습니다.


첫째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kāma-tanhā, 카마-탄하)'입니다. 우리는 눈 (시각), 귀 (청각), 코 (후각), 혀 (미각), 몸 (촉각), 그리고 마음 (생각)이라는 여섯 개의 감각 기관 (六根, 육근)을 통해 즐거운 느낌 (樂受, 낙수)을 추구합니다. 더 맛있는 음식, 더 자극적인 쾌락, 더 달콤한 칭찬을 향한 맹목적인 '목마름'입니다.


둘째는 '존재에 대한 갈애 (bhava-tanhā, 바바-탄하)'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가 되고 싶은 (becoming)' 욕망입니다. "나는 더 부자가 되고 싶다", "나는 더 유명해지고 싶다", "나는 영원히 살고 싶다"와 같이, '나'라는 존재 (자아)를 더 강화하고 확장시키려는 집착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나는 존재한다 (有)'는 믿음에 강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셋째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 (vibhava-tanhā, 비바바-탄하)'입니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갈애'의 반대편에 있는, '무엇인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욕망입니다. "나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실패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사라져 버리고 싶다"와 같이,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부정'하고 '회피'하려는 집착입니다.


불교가 밝혀낸 '집착의 뿌리'는 바로 이 세 가지 '갈애'입니다. 그렇다면 이 '갈애'는 왜 생겨납니까. 그것은 우리가 '무상 (無常, anicca, 아니짜)', 즉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무지 (無明, avidyā, 아비드야)' 때문입니다. 우리는 변하는 것들 (돈, 명예, 쾌락, 심지어 '나' 자신)이 영원히 우리에게 만족을 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무상'한 것들은 결코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쾌락은 사라지고, '나'는 늙어갑니다. 우리의 '갈애'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비움의 실천'은 바로 이 '갈애'라는 집착의 뿌리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불교가 제시하는 '팔정도 (八正道)'의 수행은, 이 '갈애'의 불길을 끄고 (滅, 멸), '열반 (涅槃, Nirvāṇa, 니르바나)', 즉 '불 꺼진 상태'의 평화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것은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입니다.


서양의 정신분석학은 이 '욕망'의 문제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합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 (Jacques Lacan, 1901-1981)은, '욕망 (Désir)'이 불교에서처럼 '꺼뜨려야 할' 불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조건' 그 자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본 '욕망' 또한, '채워질 수 없음'을 운명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라캉의 욕망 이론은 '결핍 (lack, manque)'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아이는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하나 된 완전한 '실재계 (Real)' 속에 머뭅니다. 이 상태는 '나'와 '너'의 구분도, '안'과 '밖'의 구분도 없는, 완벽한 '하나됨'의 충만 그 자체입니다. 아이는 '필요 (Need, besoin)'가 생기면 울고, 어머니는 그 필요를 즉각 채워줍니다. 이 순환 속에서 아이는 자신이 세계의 전부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아이는 성장하여 '언어'를 배우고 "나는..."이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 이 원초적인 '하나됨'은 영원히 상실됩니다. 아이는 "밥 주세요"라고 '요구 (Demand, demande)'하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언어'의 세계, 즉 '상징계 (Symbolic Order)'로 진입하는 순간입니다. '상징계'는 법과 질서,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 (Nom-du-Père)'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구조입니다. 아이는 '언어'를 받아들임으로써 '나'라는 주체가 되지만, 그 대가로 어머니와 하나였던 '실재계'로부터 '분리 (거세, castration)'됩니다. 바로 이 '분리'의 순간, 인간 존재의 중심에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근본적인 결핍'이 생겨납니다.


이때부터 '욕망'이 시작됩니다. 라캉에게 '욕망'은 불교의 '갈애 (tanhā)'처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말하는 존재, parlêtre)에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인 결핍'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이 '근본적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무언가를 '욕망'합니다.


라캉은 '필요', '요구', '욕망'을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필요'는 음식이나 물처럼, 구체적인 대상으로 채워질 수 있는 생물학적인 것입니다. '요구'는 이 '필요'가 "밥 주세요!"처럼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밥 줘!"라고 '요구'할 때, 그것은 밥이라는 '필요'의 충족뿐만 아니라, 밥을 주는 어머니에게 "나를 사랑해줘", "나와 다시 하나가 되어줘"라는, 잃어버린 그 '절대적인 사랑 (실재계)'을 달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밥은 줄 수 있지만 (필요 충족), 잃어버린 그 '절대적인 하나됨'은 결코 되돌려줄 수 없습니다. '욕망'은 바로 이 '요구'에서 '필요'를 뺀 '나머지'입니다. 밥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그 '텅 빔', 그 '근본적인 결핍' 자체가 바로 '욕망'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은 그 어떤 '대상'으로도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결핍'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텅 빈 자리'를 대신 채워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대리물'을 찾아 헤맵니다. 값비싼 자동차, 명품 가방, 완벽한 연인, 혹은 사회적인 성공 같은 것들입니다. 라캉은 이처럼 우리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진짜 원인'이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그 '결핍의 대상'을 '대상 a (objet petit a)'라고 불렀습니다.


'대상 a'는 우리가 좇는 '욕망의 대상 (자동차, 명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실재계'의 조각이자, 그 '텅 빈 구멍'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그 '구멍'을 바라볼 수 없기에, 그 '구멍'을 가려줄 '대상 (자동차)'을 대신 욕망합니다. '대상 a'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입니다.


이것이 라캉이 밝혀낸 '집착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대상 a'라는 '텅 빈 구멍'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 (자동차, 명품)'을 욕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대상'을 손에 넣어도 (소유), 그 '구멍 (대상 a)'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상 a'는 '사물'이 아니라 '결핍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망은 하나의 대상을 정복하자마자, 곧바로 또 다른 대상으로 미끄러져 갑니다. 이것이 '욕망의 환유 (metonymy)'입니다.


라캉의 가르침은 비관적이지만 명료합니다. '비움'이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욕망이 채워질 수 있다는 환상'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이 '결핍'이 바로 '나'라는 존재의 조건임을 받아들이고 (환상의 횡단, traversing the fantasy), 더 이상 '대상 a'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는 '앎'을 추구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역시 이 '욕망'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이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격정 (pathos, 파토스)'이라고 보았으며, 이 격정으로부터의 '해방'을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스토아 철학 (Stoicism)'은 이 해방의 길을 '아파테이아 (Apatheia, 아파테이아)'라고 불렀습니다. '아파테이아'는 '격정(pathos)이 없음(a-)'을 의미하며, 흔히 '부동심 (不動心)'이라고 번역됩니다. 이것은 현대어의 '무관심 (apathy)'과는 전혀 다른, 치열한 '비움'의 훈련입니다.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들인 에픽테토스 (Epictetus, 55-135)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는, '집착의 뿌리'가 우리의 '잘못된 판단 (judgment)'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을 혼동합니다. '돈', '명예', '건강', '타인의 평가'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반면,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반응할 것인가'하는 우리의 '내면 (이성)'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을 잃었을 때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고 합시다. 스토아 철학은 이 고통이 '돈을 잃었다'는 '사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고통은 "돈을 잃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생깁니다. 즉,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돈'에 대해 '욕망'과 '집착'을 가졌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입니다.


'아파테이아 (Apatheia)'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비움'은 '이성'을 통해, 돈이나 명예 같은 것들이 그 자체로는 '좋음'도 '나쁨'도 아닌, 그저 우리의 행복과 '무관한 것 (adiaphora, 아디아포라)'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욕망 내려놓기'는, 나의 행복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내면의 이성'이라는 '자유' 속에서 평정을 찾는 '비움'의 실천입니다.


'아파테이아'와 자주 혼동되지만 미묘하게 다른 '비움'의 길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에피쿠로스 (Epicurus, BC 341-270)'가 가르친 '아타락시아 (Ataraxia)'입니다. '아타락시아'는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 즉 '마음의 평정'을 의미합니다. 스토아 철학이 '이성'을 통해 격정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했다면, 에피쿠로스는 '욕망' 자체의 성격을 분석하여 그것을 '관리'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목표는 '쾌락 (hēdonē, 헤도네)'입니다. 하지만 이 '쾌락'은 방탕한 '육체적 쾌락'이 아닙니다. 그들이 추구한 최고의 '쾌락'은 '정신적인 쾌락'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고통이 없는 상태 (aponia, 아포니아)'와 '마음의 평정 (아타락시아)'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타락시아'를 방해하는 '집착의 뿌리', 즉 '마음의 혼란'은 어디에서 옵니까. 에피쿠로스는 그것이 '두려움' (특히 죽음과 신들에 대한 두려움)과, 우리가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욕망'들을 그 성격에 따라 명확하게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로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배고플 때 먹고, 목마를 때 마시며, 추울 때 몸을 가리는 욕망처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고통을 '제거'해주는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채우기 '쉽기' 때문에, 반드시 '충족'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자연스럽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입니다. 여기에는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술, 성적인 쾌락과 같은 것들이 속합니다. 이 욕망들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쾌락의 '다양성'을 더할 뿐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이 욕망이 '필수적이지 않으므로', 굳이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절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집착의 뿌리'가 되는 '헛되고 텅 빈 욕망 (Vain and Empty Desires)'입니다. '부', '권력', '명예', '인기'처럼, '자연'에 근거하지 않고 '사회'가 만들어낸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 욕망입니다. 이 욕망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한계가 없다 (limitless)'는 것입니다. 이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으며, 영원한 '결핍'과 '불안'을 만들어냅니다.


에피쿠로스가 제시한 '욕망 내려놓기'는 바로 이 세 번째 '헛된 욕망'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아타락시아'는 '필수적인 욕망'만을 최소한으로 충족시키며, '헛된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평정심'의 상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와 '소셜 미디어'라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욕망 제조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시스템은 에피쿠로스가 경고했던 '헛되고 텅 빈 욕망'을 밤낮없이 우리에게 주입합니다.


인류의 위대한 지혜들은, 바로 이 '욕망'의 정체와 그 '집착의 뿌리'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불교는 이 모든 끝없는 추구가 '갈애 (渴愛, tanhā, 탄하)'라는 '목마름'이며, '무상 (無常, anicca, 아니짜)'한 것을 좇는 '무지 (無明, avidyā, 아비드야)'의 결과라고 경고합니다.


자크 라캉 (Jacques Lacan, 1901-1981)은 우리가 '대상 a (objet petit a)'라는 '근본적 결핍'을 메우기 위해, 상품이라는 '대리물'의 노예가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스토아 철학 (Stoicism)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인정 (좋아요)'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삶의 기쁨 (가족, 우정, 사색)을 잊고, '헛되고 텅 빈' 욕망 (명품, 인기)을 좇느라 '평정 (아타락시아)'을 잃었다고 지적합니다.


이처럼 '욕망을 내려놓는' '비움'의 실천은, 이 모든 '욕망'을 무균 상태로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집착의 뿌리'를 '찾는' 것입니다. 지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욕망이, 꺼뜨려야 할 '갈애'인지, 본질을 직시해야 할 '결핍'인지, 비워내야 할 '헛된 욕망'인지, 아니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잘못된 판단'인지를 명료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바라봄'이야말로, '욕망의 노예'에서 '욕망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비움'의 첫걸음입니다.





2-7.4. 몸으로 돌아가기: 감각의 지혜



우리는 오랫동안 '정신'과 '마음'이 '나'의 중심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이 믿음은 르네 데카르트 이래로 서구 근대성을 지배해 온 '심신이원론 (Mind-Body Dualism)'의 깊은 상처입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나 (res cogitans)'를 '참된 나'로 여기고, 우리의 '몸 (res extensa)'을 '내가 소유한 사물' 또는 '정신이 조종하는 기계'로 취급해왔습니다.


우리는 '몸'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갇혀 살게 되었습니다. 이 '뿌리뽑힘 (déracinement)'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소외입니다.


따라서 '비움의 실천'은 이 전도된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 (생각)'의 소음을 '비워내고', '몸 (감각)'의 지혜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몸'은 우리가 분석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된 '지혜의 통로' 그 자체입니다.


이 '몸으로의 귀환'에 가장 깊은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 사상가는 프랑스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입니다. 그는 데카르트가 세운 '생각하는 나'라는 '관념의 감옥을 정면으로 무너뜨립니다. 데카르트에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명제는, '몸'이 없는 순수한 '사유'만으로도 '나'의 존재가 증명됨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이 '생각' 자체가 이미 '몸'을 전제하고 있음을 폭로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몸'을 가지고 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몸'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는 차가운 '코기토 (Cogito)' 이전에, "나는 (몸으로) 할 수 있다"는 따뜻한 '신체적 코기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내가 저 컵을 잡기 위해 손을 뻗을 수 있고, 저 언덕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이 '신체적 능력'이야말로,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다 (have)'고 말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나의 몸입니다 (I am my body)". 그는 이 존재 방식을 '신체-주체 (corps-sujet, Body-Subject)'라고 불렀습니다. '몸'은 내가 바라보는 '객체 (object)'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주체 (subject)' 그 자체입니다.


나아가 메를로-퐁티는 '나의 몸 (신체)'과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둘이 서로 뒤엉켜 짜여 있는 상태를 '살 (Chair, la Chair)'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나의 살 (몸)'과 '세계의 살 (만물)'은 본래 하나의 직물 (織物)이며, '나'는 세계 '바깥에서'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살'의 일부로서 세계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 (Phenomenology of the Body)'은 '비움'의 실천에 거대한 전환을 가져옵니다. '머리 (생각)'를 비우는 길은, '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각'이 앗아갔던 주도권을 '몸'에게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 '분석'하는 대신, '몸'의 '감각'을 신뢰하고 '몸'으로 '세계'를 다시 만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몸으로 돌아가는' 가장 즉각적이고도 강력한 실천은 '호흡 명상 (Breath Meditation)'입니다. '호흡'은 '생각'과 '몸'을 잇는 가장 신비로운 다리입니다. 호흡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율신경계)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수의신경계) 조절할 수도 있는 유일한 생명 활동입니다.


우리의 '생각 (마음)'은 늘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 속을 떠돕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과 '호흡'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호흡 명상'은, 이처럼 '과거'와 '미래'로 흩어진 '생각'을 '지금 여기'의 '호흡'이라는 '닻'에 묶어두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단순히 '생각'을 '비우는' 것을 넘어, 우리의 '몸'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현대 신경과학은 이 ‘호흡 명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미주신경 (Vagus Nerve)'의 활성화를 통해 설명합니다. 우리의 '자율신경계 (Autonomic Nervous System)'는 '교감신경 (Sympathetic Nervous System)'과 '부교감신경 (Parasympathetic Nervous System)'으로 나뉩니다.


'교감신경'은 '투쟁-도피 (fight-or-flight)' 반응입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위협을 느끼면 (생각),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얕아지며, 몸은 '전쟁 상태'에 돌입합니다. 현대인은 만성적인 스트레스 속에서 이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늘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에 있습니다.


'부교감신경'은 '휴식-소화 (rest-and-digest)' 반응입니다. 이때 우리 몸은 이완되고, 회복되며, 평온을 찾습니다. 이 '부교감신경'의 80% 이상을 관장하는 핵심 통로가 바로 '미주신경'입니다. '미주신경'은 뇌에서 시작하여 심장, 폐, 소화기관까지 연결된, 우리 몸의 '안전 스위치'입니다.


놀라운 점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깊고 '느린 호흡', 특히 '날숨'을 길게 내쉴 때, 이 '미주신경'이 직접적으로 '활성화'된다는 사실입니다. '호흡 명상'은 단순히 '생각'을 비우는 심리적 훈련이 아닙니다. 그것은 '호흡'이라는 '몸'의 감각을 통해, '미주신경'을 활성화시켜, "나는 지금 안전하다"는 신호를 뇌(생각)로 역전송하는 '신체적 실천'입니다. '몸'의 '감각'을 통해 '머리'의 '소음'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호흡'이 우리를 '지금 여기'의 '몸'으로 데려오는 '문'이라면,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유진 젠들린 (Eugene Gendlin, 1926-2017)은 그 문 안으로 들어가 '몸'의 지혜를 듣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 실천법을 '포커싱 (Focusing)'이라고 불렀습니다.


젠들린은 심리치료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변화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성공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로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어떤 모호한 느낌'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 '말로 표현되지 않은, 몸으로 느껴지는 의미의 총체'를 '체감 (Felt Sense)'이라고 불렀습니다. '체감'은 '감정 (Emotion)'과 다릅니다. '분노'나 '슬픔'은 우리가 이미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명확한' 감정입니다. 하지만 '체감'은 "가슴이 답답한 느낌", "목에 무언가 걸린 듯한 느낌", "뱃속이 휑한 느낌"처럼, '모호하고', '불분명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신체 감각'입니다.


우리의 '머리 (생각)'는 이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건 그냥 스트레스 때문이야"라고 서둘러 '분석'하고 '판단'하려 합니다. 하지만 젠들린의 '포커싱'은, 바로 이 '생각'의 분석을 '비워내고', 그 '모호한 체감' 자체에 '친절한 호기심'을 가지고 '머무르는' 실천입니다.


'포커싱'은 '체감'에게 "너는 무엇이니?"라고 묻고, '머리'가 대답하는 대신 '몸'이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의 '대기, attente'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 '체감'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존재를 '환대'할 때, '체감'은 점차 그 의미를 드러내며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꽉 막혔던 가슴이 풀리면서, "아, 이것은 인정받고 싶었던 나의 욕구였구나"와 같은 '앎'이 '몸'에서부터 올라옵니다. 젠들린은 이 '몸'에서 오는 '통찰'의 순간을 '체감의 변화 (Felt Shift)'라고 불렀습니다.


'포커싱'은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를 넘어, "나는 내 감정(Emotion)도 아니다"를 실천합니다. 그것은 '감정'보다 더 깊은 '몸'의 '체감 (Felt Sense)'이야말로, '머리 (생각)'가 알지 못하는 '진짜 문제'의 '답'을 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몸으로 돌아가는' 이 '감각의 지혜'는, 동양의 고대 수행법인 '요가 (Yoga)'와 '기공 (氣功)' 속에서 이미 수천 년간 실천되어 왔습니다. 이 두 수행법은 모두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서양 근대 의학이 '몸'을 뼈와 근육, 신경으로 이루어진 '기계 (눈앞의 존재)'로 '분석'했다면, '요가'와 '기공'은 '몸'을 '생명 에너지'가 흐르는 '통로 (손안의 존재)'로 '경험'했습니다. '요가'는 이 에너지를 '프라나 (Prāṇa, 쁘라나)'라고 불렀고, '기공'은 '기 (氣)'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고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겪은 '스트레스'나 억압된 '감정', 혹은 '정신적 충격'이 단지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의 특정 부위에 '저장'되어 이 '에너지의 흐름'을 '가로막는' 상태입니다. 목과 어깨의 만성적인 '긴장', 소화가 안 되는 '체증', 원인 모를 '통증'이 모두 이 '에너지 흐름의 회복'이 필요한 신호입니다.


'요가'의 '아사나 (āsana, 자세)'는 단순한 '스트레칭'이 아닙니다. 그것은 '움직이는 명상'입니다. 수행자는 몸을 비틀고, 늘리고, 버티는 자세를 통해, 자신의 '몸'에 '저장된' 이 '막힌 지점 (긴장)'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통증'을 피하거나 (억압) 싸우는 대신, '호흡'을 그곳으로 불어넣으며 그 감각과 '함께 머뭅니다 (환대)'.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몸'에 갇혀있던 낡은 '감정'과 '기억'을 '비워내고', 막혔던 '프라나'의 흐름을 '회복'시킵니다.


'기공'이나 '태극권 (太極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느리고 부드러운 '움직임'과 '호흡'을 통해, '몸'의 '경락 (meridians)'을 열어주고, '기(氣)'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회복하는 데 집중합니다.


이 고대의 지혜들은 '몸'을 더 강하게 '만드는' 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몸'의 '소리'를 듣고 (포커싱), '몸'의 '막힌 곳'을 비워내어 (요가/기공), '몸'이 본래 가지고 있던 '생명력의 지혜 (미주신경)'를 회복하는 '실천'입니다.


'몸으로 돌아가라'는 이 가르침은, '머리' 속에 갇혀 '생각'의 노예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비움'의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나'의 '몸'을 '분석'하고 '통제'하려는 오만한 '생각'을 '비워내야' 합니다. '몸'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스승'입니다.


'감각의 지혜'는 우리가 잃어버린 '지금 이 순간'을 되찾아줍니다. 메를로-퐁티가 가르쳐주었듯이, 우리의 '몸'은 이 세계와 '연결'된 유일한 '주체'입니다. '호흡'을 통해 '미주신경'을 깨우고, '포커싱'을 통해 '체감'을 환대하며, '요가'와 '기공'을 통해 '흐름'을 회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 '몸'이라는 이 신성한 '삶'의 터전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비움'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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