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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서양 신비주의의 비움

by DrLeeHC

제2-6장: 서양 신비주의의 비움



2-6.1.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이 태어나는 영혼



'비움의 철학'은 서양 중세의 가장 깊은 심연, 즉 신비주의의 전통 속에서 가장 빛나는 봉우리를 만납니다. 13세기 말 독일의 도미니크회 수사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c. 1260-1328)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넘어,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비워냄으로써 신과 하나가 되는 길을 설파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당대에 이단으로 고발당하기도 했지만, 그가 남긴 '비움'의 가르침은 오늘날 '채움'에 중독된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울림을 줍니다. 에크하르트가 가리킨 길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신을 '만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신이 태어나게' 하는 길이며, '나'와 '신'이 본래 '하나'였음을 깨닫는 '비움'의 여정이었습니다.


이 여정의 첫걸음이자 가장 핵심적인 덕목을, 에크하르트는 '초연함' (Abgeschiedenheit)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단어는 '분리됨', '떠나 있음', '관계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 겸손, 자비와 같은 덕목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이 모든 덕목보다 '초연함'이 가장 위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사랑은 여전히 타인을 '대상'으로 삼아 그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하는 마음 (의지)을 필요로 합니다. 겸손 역시 '나'를 낮추겠다는 '나'의 의식이 남아있습니다. 이 모든 덕목은 여전히 '나'라는 자아가 활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초연함'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피조물, 즉 돈, 명예, 권력 같은 물질적인 것에서 '떠나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비움'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신'에 대한 생각, '신'을 향한 갈망, 심지어 '선 (善)을 행하려는 의지'로부터도 '초연'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나는 신을 사랑해야 한다"거나 "나는 신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의지'하는 그 마음마저도, '나'의 자아가 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소유하려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신이 들어오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따라서 '초연함'이란, '나'의 모든 의지와 생각, 심지어 '나'라는 존재감 자체를 텅 비워내어, 신이 활동할 수 있는 '빈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이 '초연함'의 경지를 '가난한 사람'이라는 비유를 통해 가장 깊이 있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성경 구절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재물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세 가지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가난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에 대한 집착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신의 위로, 천국의 보상, 심지어 '신 자신'마저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을 '얻으려는' 욕망마저 비워낸 상태가 첫 번째 가난입니다.


두 번째 가난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나'의 지식과 관념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은 선하다', '신은 전능하다'와 같은 수많은 '앎'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앎'은 '나'의 이성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 신 그 자체가 아닙니다. '나'는 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신에 대한 '나'의 모든 지적인 활동을 멈추고, '앎'의 욕망마저 비워낸 상태가 두 번째 가난입니다.


세 번째 가난은 가장 깊은 '비움'이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마저 비워낸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갖습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이 '의지'마저도 '나'라는 존재가 신 '밖에서' 무언가를 '행하려는' 마지막 자아의 발버둥이라고 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나'의 의지를 가질 '장소'마저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즉, '나'라는 존재 자체를 신에게 완전히 내어주어, '나'는 텅 비고, 오직 '신'이 '나'를 통해 스스로 활동하게 하는 상태입니다. 이 세 번째 가난에 이른 사람이야말로, '초연함'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나'를 완전히 비워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신과 연결된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이 지점을 '영혼의 불꽃' (Seelenfünklein) 또는 '영혼의 성(城)'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영혼의 불꽃'은 우리의 마음 (감정)이나 이성 (생각)과는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창조된'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며, 그 어떤 피조물과도 섞이지 않는 순수한 빛입니다. 이 '불꽃'은 바로 신의 본성이 깃든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의 불꽃'이 향하는 곳, 혹은 그것과 본래 하나인 자리가 바로 '신의 심연' (Grund, 그룬트)입니다. '그룬트'는 '바닥' 또는 '근원'을 의미합니다.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신 (Gott)'이라고 부르는 존재와, 그 '신'의 근원인 '신성 (Gottheit)', 즉 '심연 (Grund)'을 구분했습니다. 우리가 '선하다', '자비롭다', '전능하다'라고 부르는 '신'은, 여전히 우리가 이름 붙이고 생각할 수 있는, '드러난' 신입니다. 하지만 '신의 심연 (Grund)'은, 이 모든 이름과 속성이 생겨나기 이전의, 텅 비어 있고, 침묵하며, 규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 (無)'입니다.


에크하르트의 가장 위대한 통찰은, '영혼의 불꽃', 즉 '내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 (Grund)'과 '신의 심연 (Grund)'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나'의 근원과 '신'의 근원은 둘이 아니며, '하나의 심연'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자아 (ego)의 활동에 가려져 이 진실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초연함 (Abgeschiedenheit)'과 '가난'을 통해 '나'라는 자아의 활동을 완전히 멈출 때, 즉 영혼이 텅 비게 될 때, 이 '영혼의 불꽃'은 비로소 그 빛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텅 빈 '심연' 속에서 경이로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신이 태어나는 영혼 (Gottesgeburt, 고테스게부르트)'입니다.


에크하르트는, 텅 비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가난한 영혼'은, 마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에 신의 아들을 잉태할 수 있었던 '성모 마리아 (Virgin Mary)'의 텅 빈 자궁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텅 빈 영혼의 '심연 (Grund)' 속으로, '성부'이신 신의 심연은 영원한 '말씀 (Logos)', 즉 '성자'를 낳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텅 빈 영혼 속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있는 실재입니다. '나'를 비울 때, '나'는 사라지고, '나'는 신의 아들이 되어 신과 하나로 태어납니다.


이 '하나됨'의 체험을 에크하르트는 '돌파 (Durchbruch)'라고 불렀습니다. '돌파'는 '뚫고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창조된 껍질을 '뚫고', 심지어 '신 (Gott)'이라는 개념마저 '뚫고' 나아가, 마침내 '나'의 근원이자 '신'의 근원인 '신의 심연 (Grund)'이라는 '텅 빈 사막' 속으로 합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와 '신'이라는 두 존재가 만나는 '합일 (union)'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와 '신'이라는 구별 자체가 본래부터 없었음을 깨닫는 '동일성 (identity)'의 회복입니다. 이 '돌파'의 순간, 영혼은 신에게 "나는 당신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함께 '하나의 존재'가 됩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이 가르침은 '성과 사회 (Achievement Society)'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나'를 찾기 위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더 많은 지식을 쌓고, 더 많은 경험을 하며, 더 나은 '나'를 만들려고 애씁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자기계발'입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진정한 '나'는 그렇게 '더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진정한 '나', 즉 '신의 심연'과 하나인 우리의 본성은, 오직 '비워냄'을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그 자아는, 우리가 쌓아 올린 지식과 경험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비워낸 '텅 빈 자리'에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Doing)'를 묻기 이전에,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Being)'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방식은, '나'의 욕망과 의지를 '비워내는 (초연함)' 것입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이 되라는 이 초대는, 우리에게 소유와 성취라는 '중력'에서 벗어나, '비움' 속에서만 발견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6.2. 십자가의 요한: 어두운 밤



'비움의 철학'은 단지 '지성'으로만 이해하는 길이 아닙니다. 16세기 스페인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Juan de la Cruz, 1542-1591)은, '나'를 비워내는 길이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나'를 비우는 과정이 머리로 깨닫는 '지적인 통찰'이 아니라, '사랑'이기에 겪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정화 (purification)'의 과정임을 온몸으로 증언했습니다. 이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이해'의 길과는 또 다른, 가장 열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사랑'의 길입니다.


그는 아빌라의 테레사 (Teresa de Ávila, 1515-1582)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려다, 동료 수사들에게 오해를 받아 9개월간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육체적 고통과 영적 버려짐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가장 어두운 '밤 (Noche)' 속에서 그는 신과의 합일이라는 가장 눈부신 빛을 만났습니다. 그의 모든 철학은 이 '어두운 밤 (Noche Oscura)'의 경험에서 태어났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가 신에게 나아가는 길이 '채움'이 아니라 '비움'의 길임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는 『갈멜산의 오르막, Subida del Monte Carmelo』과 『어두운 밤, Noche Oscura』이라는 저작을 통해, 영혼이 신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종류의 '어두운 밤'을 통과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밤'은 처벌이나 시련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우리를 더 깊은 사랑으로 이끌기 위해 베푸는 '은총'입니다.


첫 번째 밤은 '감각의 어두운 밤 (Noche oscura del sentido)'입니다. 많은 사람이 영적인 삶을 시작할 때, 기도나 명상 속에서 큰 기쁨과 위로, 달콤한 감정들을 경험합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황홀감을 느끼고, 이 '영적인 감각'에 깊이 매료됩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요한은 이 상태가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영혼이 '젖먹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영혼이 '신'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주는 '달콤한 위로 (선물)'를 사랑하는 '영적 탐식 (spiritual gluttony)'에 빠진 상태입니다.


이때 신은 이 영혼을 더 성숙한 단계로 이끌기 위해, 그 '젖'을 끊어버립니다. 이것이 '감각의 밤'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신은 그동안 주었던 모든 감각적인 위로와 기쁨을 거두어 가십니다. 바로 이 순간, 수행자는 '영적 메마름 (sequedad)'이라는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기도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고,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명상을 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고, 신이 나를 버렸다는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바로 이 '영적 메마름'이야말로, 신이 우리를 '어른'의 신앙으로 초대하는 첫 번째 '은총'이라고 단언합니다. 이 메마름의 고통을 통해,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집착을 비워내기 시작합니다 (감각의 정화). 우리는 더 이상 '느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런 느낌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오직 '신 자신'만을 찾기 위해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것은 '감각'에 의존하던 삶에서 '신앙 (faith)'에 의존하는 삶으로 넘어가는 첫 번째 '비움'의 단계입니다.


'감각의 밤'이라는 정화를 성공적으로 통과한 영혼은, 한동안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하지만 신은 이 영혼을 완전한 합일로 이끌기 위해, 훨씬 더 무섭고 근본적인 두 번째 '밤'을 준비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어두운 밤 (Noche oscura del espíritu)'입니다. '감각의 밤'이 우리의 '겉'사람을 정화하는 과정이었다면, '영혼의 밤'은 우리의 '속'사람, 즉 '영혼' 그 자체를 정화하는 과정입니다.


이 두 번째 밤이 겨누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 즉 '자아 (ego)'입니다. 이 단계의 수행자는 비록 감각적인 집착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영적인 집착'에 묶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남들보다 더 기도를 오래 한다"는 '영적 교만', "나는 신의 뜻을 안다"는 '지적인 오만', 혹은 "나는 이만큼 선한 일을 했다"는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과 영혼의 합일을 가로막는 가장 미세하고도 견고한 마지막 '벽'입니다.


신은 이 마지막 '자아'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영혼의 밤'이라는 가장 강력한 '비움'을 허락합니다. 이 밤에 영혼이 겪는 고통은 '감각의 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은 자신이 죄와 허물로 가득 찬, 가장 비참하고 더러운 존재라고 느끼게 됩니다. 신은 빛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가장 깊은 어둠과 죄를 남김없이 비추는 '압도적인 빛'으로 다가옵니다. 이 거룩한 빛 앞에서, 영혼은 자신이 신으로부터 완전히 버려졌으며, 지옥의 고통 한가운데에 있다고 느낍니다. 이는 마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신의 심연 (Grund)'이, '나'라는 마지막 존재감마저 태워버리는 불길로 경험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밤은 '나'라는 자아가 완전히 죽어가는 '영적인 십자가'입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두 번의 '밤'을 통과하는 수행의 길을, 십자가의 요한은 '나다 (nada)'라는 한 단어로 요약합니다. '나다'는 스페인어로 '아무것도 아님 (nothing)'을 뜻합니다. 그는 『갈멜산의 오르막』에서, 영혼이 '모든 것 (Todo)', 즉 '신'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님 (Nada)'의 길을 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갈멜산의 정상 (합일)으로 오르는 지도를 그리며, 그 길 양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모든 것을 맛보려거든, 어떤 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소유하려거든, 어떤 것도 소유하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려거든, 어떤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려거든, 어떤 것도 알려 하지 말라."


그리고 그 길의 한가운데, 즉 '어두운 밤'의 길 위에는 "나다, 나다, 나다, 나다 (Nada, nada, nada, nada)"라고 적었습니다. '감각의 밤'이 우리에게 '감각적인 것 (즐거움, 위로)'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라고 가르친다면, '영혼의 밤'은 '영적인 것 (교만, 지식, 자아)'마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라고 가르칩니다.


이 '나다 (nada)'의 길은, '어두운 밤'이라는 수동적인 고통 (신이 행하시는 비움)인 동시에,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능동적인 비움'의 실천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스스로 '비워내는' 결단입니다. '나'의 의지, '나'의 이해, '나'의 소유, '나'라는 존재감 그 자체를 '아무것도 아님'의 어둠 속으로 기꺼이 던져 넣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각'과 '영혼'이 두 번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고, '나다'의 길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비워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십자가의 요한은, 이 텅 비고 깨끗해진 영혼의 중심에서, 마침내 '신성과의 합일 (Unión divina)'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나'라는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진 그 '무 (Nada)'의 자리에서, 영혼은 '모든 것 (Todo)'이신 신과 하나가 됩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 합일의 가장 황홀한 단계를, 그의 시 『영혼의 노래, Cántico Espiritual』와 『사랑의 살아있는 불꽃, Llama de amor viva』에서 '신비적 결혼 (Matrimonio espiritual)'이라는 비유로 노래합니다. 이것은 신과 영혼이 '연인'으로 만나는 '영적 약혼'의 단계를 넘어, 둘이 마침내 '부부'가 되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궁극의 상태입니다.


이 '신비적 결혼' 속에서, 영혼은 신에게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은 신의 '사랑' 그 자체로 변화됩니다. 쇠가 불 속에 들어가 쇠의 성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불처럼 뜨거워지고 불처럼 빛을 내듯이, 영혼은 '나'로 남아있으면서 동시에 '신처럼' 됩니다. 영혼은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신의 심장으로 사랑하며, 신의 의지로 행동합니다. '나'의 비움 (Nada)이 '신'의 충만 (Todo)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요한의 이 가르침은, 오늘날 '긍정의 힘'과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우리 시대에 가장 불편하고도 절실한 진리를 던집니다.


첫째, 우리는 '영적 메마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성과 사회 (Achievement Society)'이자 '피로 사회 (Burnout Society)'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영역에서조차 '좋은 느낌'과 '빠른 치유'라는 '성과'를 기대합니다. 기도나 명상이 즉각적인 '위로'나 '평화'를 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규정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요한은, 그 '메마름'이야말로 우리가 '감각'의 굴레에서 벗어나 성숙한 '존재'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임을 가르쳐줍니다.


둘째, 진정한 '비움'은 고통스러운 '밤'을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비우는 것을, 마치 방을 청소하듯 가볍고 상쾌한 일로 여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어두운 밤'은 '나'라는 존재의 뿌리가 뽑히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입니다. 내가 가장 아끼던 '나의 옳음', '나의 선함', '나의 자아'가 무너지는 이 '나다 (nada)'의 고통을 기꺼이 겪어내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됨 (Unión)'이라는 '모든 것 (todo)'에 이를 수 없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삶의 가장 어두운 밤을 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겪는 상실의 고통, 존재의 무의미함, 신의 침묵처럼 느껴지는 그 '영적 메마름'이야말로, 신이 우리를 '비워내어' 당신 자신으로 '채우기' 위해 일하고 계시는 '사랑의 산 불꽃'일 수 있습니다. '비움'은 '하나됨'을 위한 유일한 통로이며, 그 통로는 '어두운 밤'의 한복판을 십자가처럼 꿰뚫고 지나갑니다.






2-6.3. 영지주의의 비움과 채움



'비움의 철학'을 탐구하는 우리의 여정은, 서구 정신사의 가장 신비롭고도 이단적인 흐름 중 하나인 '영지주의 (Gnosticism)'에 이릅니다. 기독교의 '케노시스 (Kenosis)'나 카발라 (Kabbalah)의 '침춤 (Tzimtzum, 침춤)'이, 신성(神性)이 '사랑'이나 '창조'를 위해 스스로를 '비워내는' 능동적이고 숭고한 행위를 보여주었다면, 영지주의의 신화는 정반대의 풍경을 펼쳐 보입니다. 영지주의가 말하는 '비움'은 '의지적인 선택'이 아니라 '비극적인 추락'이며, '실수'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물질세계'는, 바로 그 신성한 '채움'에서 떨어져 나온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


영지주의는 기원후 1-2세기경,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그리스 철학이 뒤섞이며 나타난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운동을 아우르는 이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예수의 숨겨진 '비밀의 지식'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1945년 이집트의 '나그 함마디 (Nag Hammadi)'에서 『도마복음, Gospel of Thomas』을 비롯한 수많은 영지주의 문헌이 발견되면서, 그들의 충격적인 세계관이 비로소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우리가 '비움'과 '채움'을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듭니다.


영지주의의 세계관은 철저한 '이원론 (Dualism)'에 바탕을 둡니다. 그들은 두 개의 세계, 두 명의 신을 상정합니다. 첫 번째 세계는 '플레로마 (Pleroma)'입니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충만', 즉 '가득 참'을 의미합니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본래의 '채움'의 고향입니다. '플레로마'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지고하고 선 (善)한 '참된 신 (True God)'의 영역입니다. 이 참된 신 곁에는, '아이온 (Aeon)'이라 불리는 수많은 신적인 존재 (혹은 속성)들이 빛처럼 흘러나와 완벽한 조화와 '충만'을 이루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완벽한 '채움'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두 번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두 번째 세계, 즉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물질세계'를 '케노마 (Kenoma)'라고 불렀습니다. '케노마'는 '공허', 즉 '텅 빔'을 의미합니다. 이 '케노마'는 참된 신이 창조한 축복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플레로마'의 완벽한 '채움'에서 떨어져 나온, '결핍'과 '무지', 그리고 '악 (惡)'으로 가득 찬 '텅 빈' 감옥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극적인 '비움 (케노마)'의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영지주의 신화는 이 창조를 '소피아 (Sophia)의 추락'이라는 이야기로 설명합니다. '소피아'는 '지혜'를 뜻하는 그리스어로, '플레로마'에 거주하는 '아이온' 중 가장 마지막 (혹은 가장 낮은)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근원인 '참된 신 (아버지)'을 온전히 인식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한계를 벗어나는, 불가능한 욕망이었습니다.

'플레로마'의 질서를 어긴 이 불완전한 열망은 '소피아'를 '플레로마' 바깥의 '어둠 (케노마)' 속으로 '추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충만'에서 '비워진' 것입니다. 그녀는 '플레로마'에서 분리된 채, 공포와 무지, 슬픔 속에서 고통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이 어둠 속에서 겪은 고통스러운 '정념 (passions)'들이 뭉쳐져, 하나의 존재가 태어났습니다.


이 존재가 바로 '데미우르고스 (Demiurge)'입니다. '데미우르고스'는 '장인 (匠人)' 또는 '조물주'라는 뜻으로, 영지주의자들이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창조주 '야훼 (Yahweh)'와 동일시했던 존재입니다. 이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어머니인 '소피아'의 신성은 물려받았지만, 그녀의 '무지'와 '오만함' 또한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저 너머의 '플레로마'를 알지 못했기에, 자신이 이 세상의 유일하고도 전능한 신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어머니 '소피아'의 고통스러운 정념이 빚어낸 재료들, 즉 '어둠'과 '물질'을 가지고 이 '케노마'의 세계, 즉 우리가 아는 '우주'와 '지구'를 창조했습니다.


영지주의에게 이 '물질세계'는 신의 걸작이 아니라, '무지한 신 (데미우르고스)'이 '실수'로 만들어낸 '감옥'입니다. 그리고 이 창조 과정에서 또 하나의 비극이 일어납니다. '데미우르고스'가 흙으로 인간 (아담)을 빚을 때, 그의 어머니 '소피아'는 자신의 아들이 만든 이 감옥 속에, 자신이 '플레로마'에서 지니고 왔던 '신성의 불꽃'을 몰래 불어넣었습니다. '소피아'는 자신의 후손들이 언젠가 이 '불꽃'의 힘으로 '데미우르고스'의 감옥에서 탈출하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프네우마 (Pneuma)의 유배'입니다. '프네우마'는 '영(靈)' 또는 '신적인 불꽃'을 의미합니다. 영지주의가 본 인간의 모습은 끔찍한 역설입니다. 인간의 '육체 (soma)'와 '정신 (psyche)'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이 '케노마'에 속한 저급한 감옥입니다. 하지만 그 감옥 가장 깊은 곳에는, '플레로마'의 '충만'에서 떨어져 나온 '프네우마'라는 '신성의 조각'이 '유배'되어 갇혀있습니다.


이 '프네우마'는 이 물질세계 (케노마)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데미우르고스'가 쳐놓은 운명의 굴레 (행성들의 지배)와 육체의 욕망 속에서, 이 '프네우마'는 자신의 고귀한 기원을 잊어버린 채 깊은 '잠'에 빠져있거나, '술에 취해' 있습니다. 즉, 신적인 '충만'이, '무지'와 '망각'이라는 상태로 '비워져' 버린 것입니다. 영지주의가 말하는 '비움'은, 이처럼 '채워져야 할 것 (프네우마)'이 '비워진 (망각)' 상태를 의미하는, 고통스러운 결핍입니다.


그렇다면 이 감옥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습니까. 영혼의 구원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율법 (선행)이나 제사, 혹은 '믿음'을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그노시스 (Gnosis)'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노시스'는 '지식' 또는 '앎'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입니다.


하지만 이 '그노시스'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적인 앎'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시 (revelation)'를 통해 주어지는, '영적인 인식'입니다. '플레로마 (Pleroma)'에서 온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데미우르고스'의 눈을 피해 이 감옥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는 '지식'을 가르쳐, 잠들어 있는 '프네우마'들을 깨웁니다.


이 '그노시스'는 크게 두 가지 성격을 지닙니다.


첫 번째는, 『피스티스 소피아, Pistis Sophia』와 같은 문헌에서 드러나는 '우주론적 지식'입니다. 이 중요한 영지주의 문헌은 부활한 예수가 오랜 기간 (11년 혹은 12년) 동안 제자들, 특히 막달라 마리아 (Mary Magdalene)에게 이 세계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습니다. 이 지식은 '소피아 (Sophia)'가 어떻게 추락하고 회개하며 마침내 구원받는지에 대한 장대한 서사입니다. 또한 이 물질 감옥을 다스리는 수많은 '집권자들 (Archon)'의 정체와, 영혼이 죽은 뒤 그들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플레로마'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비밀의 주문'과 '암호'를 가르쳐줍니다.


두 번째 핵심은, '자기 인식 (self-knowledge)'을 통한 구원입니다. 이 '그노시스'는 "너희는 어디에서 왔는가?", "너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너희는 어째서 이 어둠 속에 갇히게 되었는가?", 그리고 "너희는 어떻게 너희의 본래 고향인 '플레로마'로 돌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신성의 불꽃 (프네우마)'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나'를 아는 것이 곧 '참된 신'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의 가르침은,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에 가장 강력하게 울려 퍼집니다. 『도마복음』은 이야기 형식이 아니라,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비밀스러운 가르침 (114개의 말씀)'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경전은, 구원이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깨달음'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만일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어놓는다면, 그가 가진 그것이 그를 구원할 것이다. 만일 그가 자기 안에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것이 그를 죽일 것이다." (도마복음 70장). 여기서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바로 '프네우마', 즉 '너희 안의 빛'입니다. 이 '내면의 빛'을 '깨달아 (그노시스)'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또한 예수는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너희의 안에 있으며, 또한 너희의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게 될 때, 너희는 비로소 알려지게 될 것이다." (도마복음 3장). 이처럼 『도마복음』은, 우리가 밖에서 찾던 '신'과 '천국'이, 사실은 우리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으라고 촉구합니다.


영지주의의 이 '비움'과 '채움'의 신화는, 오늘날 '갇힌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명료하게 비추어줍니다.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이 말한 '케노마 (Kenoma)'와 놀랍도록 닮은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 (자본주의)와 모든 것을 '쓸모'로 재단하는 차가운 사회 질서 속에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리고 ‘깊은 소외와 공허함 (케노마)’을 느낍니다.


우리는 '데미우르고스 (Demiurge)'가 만든 것과도 같은 이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어, 나의 본래 기원을 잊은 채 '잠들어'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이 '공허함 (케노마)'을 또 다른 '물질 (소유)'로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 '비움'은 밖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신성의 불꽃 (프네우마)'을 '깨달을 (그노시스)' 때 비로소 회복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밖에서' 찾으려는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혹은 타인의 인정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도마복음』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희 안의 빛"을 깨우라고 말입니다.


영지주의의 '비움'은 '추락'의 비극이었지만, 그 극복의 길은 '내면의 채움 (플레로마로 회귀)'에 있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 무의미한 '케노마'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플레로마'의 '충만'에서 비롯된 '빛'임을 깨닫는 '자기 인식'이야말로, 우리를 모든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비움'의 지혜입니다.





2-6.4. 신플라톤주의: 일자로의 귀환



우리의 '비움'의 여정은, 서구 정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비 철학인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에 이릅니다. 이 사상의 위대한 완성자는 3세기 로마에서 활동했던 이집트 출신의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노스 (Plotinus, 204/5–270)입니다.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 (Porphyry)가 스승의 강의를 집대성하여 엮은 『엔네아데스, Ἐννεάδες』는, '비움'과 '채움', 그리고 '하나됨'의 관계를 탐구한 가장 심오한 저작 중 하나입니다. 플로티노스는 우리가 '갇힌 세계', 즉 이 물질세계에 떨어진 이유와, 다시 우리의 근원인 '하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장엄한 우주론 속에 그려냈습니다. 그가 제시한 길은, '나'라는 개별적인 자아를 '비워내고' 마침내 근원과 하나가 되는 '황홀경'의 여정입니다.


이 장대한 여정의 출발점은 모든 존재의 근원인 '일자 (一者, to Hen, 토 헨)', 즉 '하나'입니다. '일자'는 플로티노스 철학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그것은 플라톤 (Plato)이 말한 '선(善)의 이데아'와도 통하며, 모든 존재가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왔지만, 그 자신은 모든 존재와 규정을 초월해 있는 절대적인 '통일성'입니다. '일자'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한다'고 말하는 순간, '존재하지 않음'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일자'는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생각'은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되는 대상'이라는 '둘'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일자'는 그 어떤 '둘'로도 나뉠 수 없는, 완벽하고 순수한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이 완벽하고 텅 빈 '하나'가 어떻게 이 복잡다단한 '여럿'의 세계를 창조했습니까. 플로티노스는 이 과정을 기독교의 '창조 (Creation)'가 아닌, '유출론 (流出論, Emanation, proodos, 프로오도스)'으로 설명합니다. '일자'는 너무나 완벽하고 '충만'하기에, 마치 가득 찬 샘물이 저절로 넘쳐흐르듯이, 혹은 태양이 자신의 빛을 잃지 않으면서 사방으로 빛을 방출하듯이, 자신의 '충만함'을 '흘러넘치게' 합니다. 이것은 의지나 계획을 가진 행위가 아닌, '일자'의 본성 그 자체입니다. 이 '유출'은 '일자'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빛이 약해지는, 단계적인 '비움'의 과정입니다.


'일자'의 완벽한 '충만'에서 가장 먼저 흘러나온 것은 '지성 (知性, Nous, 누스)'입니다. '누스'는 '일자'를 바라보며 그것을 '사유'하려는 첫 번째 시도입니다. 하지만 '일자'는 사유될 수 없기에, '누스'는 '일자' 그 자체가 아니라, '일자'를 모방한 '생각'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이곳이 바로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Idea)'의 세계, 즉 모든 존재의 완벽한 '원형'들이 거주하는 순수한 지성의 영역입니다. '누스'는 '일자' 다음으로 가장 완벽한 '하나됨'을 이루고 있지만, 이미 '생각하는 자'와 '생각되는 것 (이데아)'이라는 '둘'로 나뉘어 있기에 '일자'보다 한 단계 낮은 차원입니다.


'지성 (누스)'의 '충만함'이 다시 흘러넘쳐, 세 번째 단계인 '영혼 (靈魂, Psychē, 프시케)'이 생겨납니다. '영혼'은 '누스'보다 더 '여럿'으로 나뉜 존재입니다. 이러한 '중간자적'인 위치 때문에, '영혼'은 본성적으로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향합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근원인 '누스'를 바라보며 '위 (이데아의 세계)'를 사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누스'에서 본 '이데아'를 이 물질세계 속에 구현하려는 욕망을 가집니다. 이 '영혼'은 우주 전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세계 영혼 (World Soul)'과, 우리 개개인의 '개별 영혼'으로 나뉩니다.


'영혼'에서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것이 바로 '물질 (物質, Hylē, 휠레)'입니다. '물질'은 '일자'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나온 빛의 종착지입니다. 그것은 '일자'의 빛이 거의 다 소멸된 '어둠'의 영역이며, '형상'이 없는 순수한 '결핍'입니다. '영혼'이 이 '물질'과 결합하여, 비로소 우리가 보는 이 '감각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플로티노스에게 이 '물질세계'는 그 자체로 '악 (惡)'은 아니지만, '일자'의 빛이 가장 희미한 곳, 즉 '공허 (Kenoma, 케노마)'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우리 (개별 영혼)'의 비극은, 우리가 본래 '영혼'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 '물질'의 세계에 매혹되어, 자신의 고귀한 근원을 잊어버린 채 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버렸다는 사실 (영혼의 추락)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갇힌 세계'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유출 (proodos)'의 길이 있다면, 반드시 '귀환'의 길이 있습니다. '일자'에서 흘러나온 모든 존재는,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자신의 근원인 '일자'로 되돌아가려는 근본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플로티노스는 이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복귀 (復歸, Epistrophē, 에피스트로페)'라고 불렀습니다. 이 '복귀'야말로 플로티노스가 제시하는 '비움의 철학'의 실천입니다.


'복귀'의 여정은 '나'라는 자아를 '비워내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덕 (virtue)'의 실천을 통한 '정화 (淨化, katharsis, 카타르시스)'입니다. 플로티노스는 영혼이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육체'의 감옥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영혼은 철학적 수련과 금욕을 통해,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감각적인 쾌락과 덧없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을 합니다. 이것은 영혼에 묻은 '물질'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정화'의 과정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관조 (contemplation)'입니다. 육체의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난 영혼은, 이제 자신의 근원인 '영혼 (프시케)'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혼'의 근원인 '지성 (누스)', 즉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합니다. 이 단계에서 영혼은 모든 것이 '하나의 지성'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플로티노스는 이 '지성'의 관조마저도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성 (누스)'조차도 '일자 (하나)'가 아닌 '둘 (주체와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복귀'의 마지막 단계는 이 '지성'마저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최종적인 비움'을 그는 '황홀경 (恍惚境, Ekstasis, 엑스타시스)'이라고 불렀습니다.


'엑스타시스'는 '밖 (Ek)에 서다 (stasis)'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의 '밖으로 나가는' 경험입니다. 영혼은 이 '황홀경' 속에서 '관조'하는 행위를 멈춥니다. 더 이상 '나'는 '신 (일자)'을 '바라보는' 주체가 아닙니다. '나'라는 주체와 '일자'라는 객체의 구별, 즉 '이원성'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나'라는 개별적인 자아의식은, 마치 한 방울의 물이 거대한 바다에 떨어져 그 흔적을 잃어버리듯이, '일자'라는 절대적인 '하나'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자아를 벗어나는 경험'입니다. '황홀경'은 '나'를 비우고, '나'를 잊고, '나'를 잃어버리는 '궁극의 비움'입니다. 이 '비움' 속에서 영혼은 '일자'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일자'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 (Oneness)'의 순간에, 영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함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일자'는 '텅 비어 (Beyond Being)' 있었지만, 그 '비움'과의 합일은 '충만'의 경험입니다. 플로티노스 자신도 일생에 네 번, 이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전해집니다.


플로티노스의 이 가르침은, '자아실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이 '물질세계 (케노마)' 속에서 찾으려 합니다. 우리는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성취, 더 확고한 '나'의 정체성을 구축함으로써 '채워지려' 합니다. 하지만 플로티노스는 우리가 '채우려' 하는 그 '자아'야말로 '일자'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림자'이며, 우리 '고독'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철학은, 진정한 '나'는 이 물질세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통해 '일자에 복귀'함으로써 '발견'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됨'을 갈망한다면, 우리는 '채우는' 삶이 아니라 '비우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비우는 것이며, '나'와 '너'를 가르는 '분별'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라고 하는 이 '개별적인 자아의식'마저 기꺼이 '비워내는' 것입니다. '비움'은 '하나됨'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이며,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일자)'과 하나가 된 '참된 나'를 되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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