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길을 탐구하는 여정은, 동양의 지혜 속에서 가장 빛나고도 역설적인 봉우리를 만납니다. 그 봉우리의 이름은 '반야 (般若, Prajñā, 프라즈냐)', 즉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정수 (精髓)가 불과 260여 자의 짧은 글 속에 응축되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반야심경, 般若心經, Prajñāpāramitā Hṛdaya Sūtra, 프라즈냐파라미타 흐리다야 수트라』입니다. 이 경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혁명'을 선포합니다. 그 혁명의 구호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입니다. "물질 (色)이 곧 텅 비어있음 (空)이며, 텅 비어있음이 곧 물질이다"라는 이 선언은, 존재의 근본을 꿰뚫는 가장 심오한 통찰입니다.
이 통찰의 핵심에는 '공 (空)'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공'이라고 하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 (虛無)'나 '무 (無)'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반야의 지혜가 말하는 '공'은 그런 단순한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교 사상에서 '공'의 본래 의미는 '공성 (空性, śūnyatā, 슈냐따)'입니다. '공성'이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하는 '고정된 본질'이나 '불변하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밥 한 그릇을 보며, 그것이 그저 '밥'이라는 하나의 사물, 즉, '밥'이라는 고유한 실체를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반야의 지혜는 우리에게 그 밥 한 그릇을 깊이 들여다보라고 (照見, 조견) 초대합니다. 그 밥알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 안에는 이 쌀알을 익게 한 따뜻한 '햇살'이 있습니다. 저 하늘에서 내린 '비'와 그 비를 머금었던 '구름'이 있습니다. 벼의 잎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이 있습니다. 벼를 키워낸 '대지'의 기름진 흙이 있습니다. 이른 봄부터 땀 흘린 '농부'의 수고와 시간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농부가 사용한 쟁기, 밥을 짓는 데 사용된 '물'과 '불', 그리고 이 밥을 담고 있는 그릇까지,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이 밥 한 그릇을 위해 지금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밥'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무수한 '인연 (因緣)'들, 즉 햇살과 물과 바람과 농부의 땀방울 중 단 하나라도 없었다면, 지금 우리 앞의 '밥'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밥'은 '밥'이라는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은 온 우주가 잠시 모여 '밥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밥'은 '밥이라는 고정된 실체'로부터 '비어있습니다 (空)'.
이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수한 원인과 조건들이 서로 의지하여 (緣起, 연기)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거대한 '과정'일 뿐입니다.
이 '공' 사상을 철학적으로 완성한 인물이 바로 인도의 위대한 사상가 용수 (龍樹, Nāgārjuna, 나가르주나, c. 150-250)입니다. 그는 『중론 (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 물라마드야마카 카리카)』과 같은 저작을 통해, 반야경전의 '공' 사상을 '중관철학 (中觀哲學, Madhyamaka, 마드야마카)'으로 체계화했습니다. '중관'이란 '가운데 (中)의 관점 (觀)', 즉 '중도 (中道, Middle Way)'를 의미합니다.
용수가 말하는 '중도'란, 세상의 존재 방식을 이해하려는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첫 번째 극단은 '상견 (常見, Eternalism)',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견해입니다. '나'는 변하지 않으며, '밥'은 영원히 ‘밥’이라는 실체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집착입니다. 두 번째 극단은 '단견 (斷見, Nihilism)', 즉 '세상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다'고 믿는 견해입니다. 이는 모든 것을 허무하다고 부정하는 허무주의입니다.
용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모두 거부합니다. 그는 '공성'의 지혜를 통해, 모든 존재는 '있다 (有)'는 집착 (상견)과 '없다 (無)'는 집착 (단견)을 넘어선다고 보았습니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견 비판).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무'도 아닙니다 (단견 비판). 존재는 다만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임시로 존재하는 것 (假有, 가유)'일 뿐입니다. 이처럼 '공'이면서 동시에 '임시로 존재'하는, '있음'과 '없음'의 양극단을 떠난 관점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역설적인 세계, 즉 모든 것이 텅 비어있으면서 (空) 동시에 존재하는 (有)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용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제설 (二諦說, Dvasatya, 드바사트야)', 즉 '두 가지 진리'의 체계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 진리는 '속제 (俗諦, saṃvṛti-satya, 삼브리티 사트야)'입니다. 이것은 '세속의 진리' 또는 '관습적인 진리'입니다. 이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세상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나'는 존재하고, '밥'도 존재하며, '선'과 '악'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속제의 세계 속에서 윤리를 지키고, 공부하며,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이 관습적인 진리가 없다면, 우리는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진리는 '진제 (眞諦, paramārtha-satya, 파라마르타 사트야)'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인 진리' 또는 '깨달음의 진리'입니다. 이 차원은 반야의 지혜, 즉 '공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나'라고 믿었던 것, '밥'이라고 믿었던 것, 그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 없이 텅 비어있음 (空)을 깨닫게 됩니다.
용수의 위대한 통찰은, 이 '두 가지 진리'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진제'는 '속제'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으며, '속제'는 '진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이 선언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물질 (色)이 곧 텅 비어있음 (空)이다"라는 말은, '속제'의 세계 (色)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진제'의 세계 (空)와 다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텅 비어있음이 곧 물질이다"라는 말은, 그 '진제'의 텅 비어있음 (空)이 있기에, '속제'의 세상 만물 (色)이 인연을 따라 생겨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세상이 '공'이 아니라 무언가로 꽉 차 있다면, 어떤 변화나 생성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공'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반야의 지혜가 궁극적으로 겨누는 '공'의 대상은 무엇입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실재한다'고 굳게 믿는 '나'라는 존재입니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시고 (照見五蘊皆空, 조견오온개공),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셨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오온 (五蘊, Pañca-skandha, 판차 스칸다)'이란, '다섯 가지 무더기'라는 뜻으로, 불교가 '나'라고 불리는 존재를 분석한 다섯 가지 구성 요소입니다.
첫째는 '색 (色, rūpa, 루파)'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물질적인 육체와 감각 기관(눈, 귀, 코, 혀, 몸)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수 (受, vedanā, 베다나)'입니다. 이것은 감각 기관이 외부 세계와 만날 때 일어나는 '느낌'이나 '감수'입니다. 즐거운 느낌 (樂受), 괴로운 느낌 (苦受),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不苦不樂受) 등이 있습니다. 셋째는 '상 (想, saṃjñā, 삼즈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느낀 것을 '인식'하고 '개념화'하는 작용입니다. 붉고 둥근 것을 보고 '사과'라고 이름을 붙이거나, 어떤 소리를 듣고 '비난'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행 (行, saṃskāra, 삼스카라)'입니다. 이것은 '상'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의지적인 작용이나 습관적인 반응을 의미합니다. '비난'이라고 인식하자 '분노'라는 의지가 일어나고, '칭찬'이라고 인식하자 '기쁨'이라는 의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업 (業, Karma)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섯째는 '식 (識, vijñāna, 비즈냐나)'입니다. 이것은 '앎' 또는 '의식' 그 자체로, 이 모든 정신 활동의 바탕이 되는 '알아차림'의 기능입니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 무더기, 즉 '몸,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의 총합을 '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반야의 지혜는 이 다섯 가지 무더기 (五蘊)를 하나하나 낱낱이 "비추어 봅니다 (照見)".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고정된 나'라는 실체를 찾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나의 몸 (色)입니까? 몸은 늙고 병들며 변합니다. '나'는 나의 느낌 (受)입니까? 느낌은 순간마다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나'는 나의 생각 (想)입니까? 생각 또한 구름처럼 떠돌 뿐입니다. '나'라고 부를 만한 영원불변의 '자아 (Ātman, 아뜨만)'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이 다섯 가지 무더기가 인연을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온개공 (五蘊皆空)'이며, '나'라는 실체가 공하다는 '무아 (無我, anātman, 아나트만)'의 진리입니다.
이 '공'의 진리를 깨닫는 앎이 바로 '반야의 지혜 (般若의 智慧)'입니다. 이 지혜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분별 (分別, vikalpa, 비칼파)'하는 앎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 (제육식)은 세상을 '분별'함으로써 작동합니다. 이것은 '나'이고 저것은 '너'라고 나눕니다. 이것은 '좋음'이고 저것은 '싫음'이라고 나눕니다. 이것은 '물질 (色)'이고 저것은 '공 (空)'이라고 나눕니다. 이 '분별'이야말로 '나'라는 집착 (我執, 아집)을 만들고, 좋음은 붙잡고 싫음은 밀어내려는 갈망 (집착)을 일으켜 고통을 만들어내는 근원입니다.
하지만 '반야의 지혜'는 이러한 '분별을 넘어선 앎'입니다. 그것은 '나'와 '너'가 둘이 아니며 (不二, 불이), '물질 (色)'과 '공 (空)'이 둘이 아님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지혜입니다. 그것은 '속제'와 '진제'를 동시에 보는 눈입니다. 이 지혜는 모든 것을 '공'이라고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이 '공'하기에,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가장 깊은 긍정의 지혜입니다.
이 '반야심경의 혁명'이 오늘날 '나'라는 감옥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명료합니다. 우리는 '나'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스스로를 가두고 고통받습니다. '나는 성공해야 한다', '나는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고정된 생각 (想)에 집착합니다. 타인의 비난 (受)에 괴로워하고, 늙어가는 나의 몸 (色)을 보며 절망합니다. 이 모든 고통은 우리가 이 '오온'을 '공'하지 않고 '실재'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색즉시공'의 가르침은,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나의 몸, 나의 명예, 나의 소유물이 모두 '공'한 것임을 깨달으라고 말합니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않으며, 인연 따라 잠시 머무는 것임을 알 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집착 (執着)'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나아가 '공즉시색 (空卽是色)'의 가르침은, 이 '공 (空)'의 진리가 우리 삶을 차갑게 부정하는 허무가 아님을 일깨워줍니다. '공'을 깨달았다고 해서 이 생생한 '색 (色)'의 세계, 즉 우리의 삶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모든 것이 '공 (空)'하다는 것, 즉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바로 이 '색 (色)'의 세계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됩니다.
만약 쌀알이 '쌀알'이라는 고정된 실체로 꽉 차 있다면, 그것은 결코 싹을 틔우거나 밥이 될 수 없습니다. 쌀알이 '공'하기에, 즉 정해진 본성이 없기에, 물과 불과 시간을 만나 '밥'이라는 새로운 모습 (色)이 될 수 있습니다. '공'은 이처럼 모든 '색'의 세계가 변화하고 생성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의 바탕'입니다.
이 깨달음은 '나'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이어집니다. '나'가 '공'하다는 것 (오온개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밥 한 그릇이 그러했듯이, 온 우주의 인연 (연기)이 잠시 모여 이룬 하나의 '과정'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와 '너'를 가르던 견고한 벽이 무너집니다. '나'라는 존재가 본래부터 우주 만물과 연결된 연기적 과정이라면, 저 '타인' 역시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은 그 뿌리에서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라는 이기심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타인의 고통이 '남의 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나'가 '공'함을 깨달아 그 감옥에서 풀려날 때,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공'을 꿰뚫어 보는 지혜 (반야, 般若)는, '나'라는 이기심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그리고 그 해방된 자리에서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여기는 '자비 (慈悲, Karuṇā, 카루나)'는 필연적으로 피어납니다. 지혜 (반야)와 실천 (자비)은 둘이 아닌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혁명'은 우리에게, '나'라는 차가운 환상을 비우고, 온 우주와 연결된 이 '공성 (空性)'의 진실로 돌아오라고 초대합니다.
2-4.2. 무아 (無我): '나'라는 환상 해체하기
우리의 모든 고통은 '나'라는 존재를 너무나도 굳건하게 믿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나는 존재한다"고 강력하게 느끼며, 이 '나'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나'는 나의 몸이고, '나'는 나의 감정이며, '나'는 나의 생각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만약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고 믿는 그 '나'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비움의 철학'의 정점에 있는 불교의 가르침은, 바로 이 '나'라는 환상을 해체하는 '무아 (無我, anātman, 아나트만)'의 지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믿음을 내려놓으라는, 가장 급진적인 초대입니다.
이 위대한 여정은 2600여 년 전, 싯다르타 고타마 (Siddhārtha Gautama)가 깨달은 세 가지 진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세 가지 특징, 즉 '삼법인 (三法印, tilakkhaṇa, 틸라카나)'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무상 (無常, anicca, 아니짜)'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갑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들도 잠시 머물다 사라집니다. 구름이 흘러가듯, 우리의 생각 또한 순간순간 생겨났다가 사라집니다.
두 번째 특징은 '고 (苦, dukkha, 둑카)'입니다. 우리는 이 '무상'한 세계 속에서 '고통'을 겪습니다. 왜 우리는 고통받습니까.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젊기를 바라고, 기쁨이라는 감정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갈망합니다. 이처럼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의 헛된 '집착 (taṇhā, 탄하, 갈애)'이 바로 고통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진리, 즉 '무상'과 '고'는 필연적으로 세 번째 진리인 '무아 (無我, anattā, 아낫따)'로 이어집니다. 만약 이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무상), 그 어떤 것도 영원히 만족을 줄 수 없다면 (고),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고정된 나'라는 실체가 과연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무아'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렇다, 변하지 않는 '나'라는 실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불교가 선언한 '나'라는 환상의 해체입니다. '나'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사'이며 '과정'입니다.
이 '무아'의 가르침이 왜 그토록 혁명적이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인도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싯다르타 고타마가 활동하던 시대의 인도 사상은, '아뜨만 (Ātman, 아트만)'이라는 개념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아뜨만'은 '우파니샤드 (Upaniṣad)' 철학의 핵심으로,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영원불변하는 진정한 자아' 또는 '참된 영혼'을 의미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나 마음은 변할지라도, 그 안에 깃든 '아뜨만'만큼은 신성 (Brahman, 브라흐만)의 일부로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싯다르타 고타마는 바로 이 '아뜨만'이라는 관념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그렇다면 그 영원하다는 '아뜨만'을 한번 찾아보라"고 요구했습니다. 나의 몸 (色)이 '아뜨만'입니까? 몸은 변하고 썩어 문드러지니 '나'가 아닙니다. 나의 느낌 (受)이 '아뜨만'입니까? 느낌은 시시각각 변하니 '나'가 아닙니다. 나의 생각 (想)이나 의지 (行), 혹은 의식 (識)이 '아뜨만'입니까? 그것들 또한 잠시도 머무르지 않으니 '나'가 아닙니다 (오온개공, 五蘊皆空). 아무리 깊이 파고들어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변화하는 과정뿐, '영원한 나'라는 핵심 (아뜨만)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뜨만'에 대한 붓다의 근본적인 '비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나 (아뜨만)'가 없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존재합니까. 왜 나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동일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입니까. 불교는 이 질문에 대해 '연기 (緣起, pratītyasamutpāda, 쁘라띠뜨야사뭇빠다)'라는 가장 심오한 가르침으로 답합니다. '연기'란 '인연 (因緣)에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잠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이것이 '연기'의 법칙입니다. 촛불은 초와 심지, 그리고 공기가 있어야만 타오를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부모님이 계셨기에 태어났고, 밥과 물과 공기가 있기에 에너지를 얻고, 숨을 쉬며,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의식을 형성합니다. '나'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이 모든 우주적 인연들이 잠시 모여 만들어낸 하나의 '현상'이자 '흐름'입니다. '나'는 '공성 (śūnyatā, 슈냐따)'이며, 이 '공'한 바탕 위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잠시 나타난 것입니다.
초기불교가 "영원한 '나'는 없다. 모든 것은 '연기'의 과정이다"라고 선언했다면, 후대의 불교 사상가들은 더 깊은 질문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연기'의 과정을 '영원한 나'라고 이토록 강력하게 착각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심층적인 심리학적 해답을 제시한 학파가 바로 '유식사상 (唯識思想, Vijñānavāda, 비즈냐나바다)'입니다. 그들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아뢰야식 (阿賴耶識, ālaya-vijñāna, 알라야 비즈냐나)'이라는 거대한 '저장식 (藏識, 장식)'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뢰야식'은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아니 헤아릴 수 없는 과거의 생애로부터 지어온 모든 행위 (업, 業)의 흔적을 '씨앗 (종자, 種子, bīja, 비자)'의 형태로 빠짐없이 저장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누군가를 향해 일으킨 생각 하나, 그리고 우리가 행한 모든 행동은, 그 즉시 새로운 '씨앗'이 되어 이 거대한 '아뢰야식'이라는 밭에 심어집니다. 이 씨앗들은 사라지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적절한 조건과 인연을 만나면 다시 '싹'을 틔웁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 경험이 됩니다. 과거에 누군가를 미워했던 '씨앗'이 지금 내 앞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하고, 또다시 미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미움의 감정은 다시 새로운 '씨앗'이 되어 '아뢰야식'에 저장됩니다.
'아뢰야식'은 이처럼 수억 개의 '업의 씨앗'들이 태어나고 저장되며 싹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대한 흐름입니다. 이것은 '무상'하고 '무아'적인 과정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거대한 '흐름의 연속성'을, '고정된 자아의 영속성'으로 착각합니다. 우리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하다고 느끼는데, 이는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의 씨앗'들이 어제와 오늘에 걸쳐 유사한 경험과 습관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즉, '나'라는 환상은 '업의 씨앗'들이 만들어내는 습관적인 에너지 (習氣, 습기)가 만들어낸 끈질긴 '착시 현상'입니다. '나'는 실체가 아니라, 가장 오래된 나의 '습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토록 견고하고 오래된 '나'라는 환상, 이 '업의 씨앗'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불교는 이 환상을 '생각'만으로 해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나'가 환상이라는 것을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도, 여전히 '나'를 중심으로 화내고 슬퍼합니다. 이 환상은 오직 '직접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즉 '마음을 관찰하는' 실천을 통해서만 해체될 수 있습니다.
이러어한 마음 관찰의 수행법은 '티베트 불교 (Tibetan Buddhism)'를 비롯한 많은 명상 전통에서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전승되었습니다. 그 방식은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우리는 그저 조용히 앉아, 지금 이 순간 나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봅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을 억누르거나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저 "생각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고, 그 생각이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봅니다. 어떤 감정, 예를 들어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그 분노에 휩쓸려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저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고, 그 감정이 내 몸과 마음에서 어떤 느낌을 주는지, 그리고 어떻게 점차 사그라드는지를 관찰합니다.
우리는 이 '마음 관찰하기'의 수행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첫째, 우리는 '무상 (無常)'을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직접 목격합니다. 모든 생각과 감정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났다가, 내가 붙잡으려 해도 저절로 사라집니다.
둘째, 우리는 '나'라는 환상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내면을 깊이 들여다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생각하는 나'라는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생각의 흐름'만 있습니다. '느끼는 나'라는 중심은 없고, 그저 '느낌의 파도'만 있습니다.
이것이 '무아 (無我)'의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나'는 이 모든 생각과 감정, 감각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저 이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텅 빈 공간' 또는 '무대'와 같았습니다. 이 '마음 관찰하기'를 통해, 우리는 '나'라고 믿었던 것들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나는 '분노'가 아니라, '분노를 지켜보는 자'가 됩니다. 나는 '슬픈 생각'이 아니라, '슬픈 생각을 알아차리는 자'가 됩니다.
이 '무아'의 가르침이 오늘날 '나'를 찾으라고 외치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역설적인 해방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너 자신을 찾아라", "너 자신을 표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나'라는 정체성을 성공, 외모, 직업, 소유물로 쌓아 올리려 애씁니다. 그리고 이 연약한 '나'가 비난받거나 실패하면, 우리는 존재 전체가 무너지는 듯한 '고통 (苦)'을 겪습니다.
'무아'의 지혜는 바로 이 '나'라는 환상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감정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실패가 아닙니다." 당신이 그토록 '나'라고 집착했던 모든 것은, 그저 '무상'하게 스쳐 지나가는 구름과 같은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는 환상을 비워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타인의 비난이 나를 스쳐 지나가도, 그것이 '나'를 규정하는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실패라는 경험이 닥쳐와도, 그것이 '나'라는 존재의 끝이 아님을 알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나아가, '나'라는 이기적인 경계선이 허물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고통과 진정으로 '연결 (緣起)'될 수 있습니다. '무아'는 차가운 공허가 아니라, '자비 (慈悲, Karuṇā, 카루나)'가 흘러넘치는 따뜻한 '비움'입니다.
2-4.3. 직지 (直指)의 가르침: 언어를 버리다
우리의 '비움'의 여정은 이제 가장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봉우리, '선 (禪)'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우리가 앞서 '공성 (空性, śūnyatā, 슈냐따)'을 탐구했을 때, 우리는 '나'와 '세계'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선'은 그 '이해'마저도 집어던지라고, '생각' 그 자체를 비워내라고 요구합니다. '선'이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물'이라는 글자를 읽고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가? 당신은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며 깨달을 수 있는가?"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이 세상이 '실재'라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언어'와 '논리'라는 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배웁니다. 하지만 언어는 본질적으로 '분별 (分別, vikalpa, 비칼파)'의 도구입니다. 언어는 본래 하나인 세계를 '나'와 '너', '옳음'과 '그름', '깨달음'과 '미망'으로 쪼갭니다. 우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언어)을 보면서, 정작 달 (진리)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20세기 서양 철학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역시 이와 놀랍도록 유사한 통찰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철학의 수많은 난제들이 '세계의 비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어의 논리'를 오해한 탓에 발생하는 '언어적 혼란'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들을 '파리 잡는 병 (fly-bottle)' 속에 갇힌 파리에 비유했습니다. 파리는 어떻게 병에 들어갔는지 알지만,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모른 채 유리벽에 계속 부딪힙니다. 우리의 언어가 바로 이 '병'과 같습니다. 그에게 철학의 임무는 새로운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파리에게 병목으로 나가는 길을 '보여주어' 그를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언어의 감옥을 부수고 그 한계를 '보여주려' 하는 시도에서, 우리는 선 (禪)의 가르침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서로 다른 길에서 만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바로 이 언어와 논리라는 감옥을 정면으로 부수고 들어가, '생각 이전'의 본래 마음을 직접 가리키는 것이 '선'의 방식입니다. 이 혁명적인 가르침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승려, 보리달마 (菩提達摩, Bodhidharma, d. c. 532)에 의해 그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그는 숭산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벽을 마주하고 앉아, 언어와 문자가 아닌 다른 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네 구절의 게송 (偈頌)으로 압축되어, '선'의 심장부를 드러냅니다.
첫째는 '교외별전 (教外別傳)'입니다. "가르침 (經典, 경전) 밖에서 특별하게 전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부처님의 어록을 모아 만든 경전의 '문자' 속에 갇혀 있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그 '마음'은 경전 밖에서, 스승의 마음에서 제자의 마음으로 직접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불립문자 (不立文字)'입니다.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문자를 완전히 폐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를 '절대적인 진리'의 자리에 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필요하지만, 그것을 달 자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문자로 표현되는 순간, 이미 그 생명력을 잃고 박제된 개념으로 전락합니다.
셋째는 '직지인심 (直指人心)'입니다.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문자를 통하지 않고 무엇을 전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경전이나 철학 이론 같은 외부의 권위를 통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느끼는 '나'의 마음을 곧장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견성성불 (見性成佛)'입니다. "자신의 본성을 보면 부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직지인심'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마음의 본래 성품 (本性, 본성)이 본래부터 깨끗하고 완전하며 '텅 비어있음 (空)'을 깨닫게 됩니다 (見性, 견성). 그리고 그 본성을 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부처 (佛)'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갖추어져 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선언은 '비움'의 길에서 가장 강력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의지했던 모든 '개념'과 '언어'의 둥지를 불태워버립니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더 이상 읽지 말라. 그저, 곧바로, 너의 마음을 보라!"
그렇다면 이처럼 언어와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곧장 보는 실천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이 '불립문자'의 길은 역사 속에서 크게 두 가지의 강력한 수행법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나는 '논리' 그 자체를 무기로 삼아 '논리'를 부수는, 역동적이고 공격적인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논리'의 소음 자체가 가라앉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길입니다.
첫 번째, '논리를 초월하는 깨달음'의 길을 '간화선 (看話禪)'이라고 부릅니다. 이 수행법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위대한 선승인 대혜종고 (大慧宗杲, Dahui Zonggao, 1089-1163)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간화 (看話)'란 "말 (話)을 본다 (看)"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이란, 과거의 깨달은 스승 (祖師, 조사)들이 제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던졌던, 상식과 논리를 깨부수는 질문이나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화두 (話頭)' 또는 '공안 (公案)'이라고 부릅니다.
'공안'은 오늘날의 '공적인 문서'라는 뜻처럼, 깨달음의 진위를 가리는 '공적인 기준'이 되는 사건입니다. 이 '공안'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중국에서 '관청의 공적인 문서'나 '법정의 판례'를 의미했습니다. 법정의 판례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공적인 기준'이 되듯이, '공안'은 깨달은 스승 (祖師, 조사)들이 남긴 말이나 행동, 즉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후대의 수행자들이 자신의 깨달음이 진짜인지를 가늠해 보는 '공적인 기준' 또는 '시금석'이 됩니다. '공안'은 머리로 풀어서 '이해'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스승의 경지와 나의 경지가 하나가 되어, 그 논리를 '뛰어넘어야' 하는 관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장 유명한 '무 (無)'자 화두를 살펴보겠습니다. 한 승려가 위대한 선승인 조주 (趙州, Zhaozhou, 778-897)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 (佛性)이 있습니까?"
이 질문은 당시 불교도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경전 (가르침), 예를 들어 『열반경, 涅槃經, Nirvāṇa Sūtra, 니르바나 수트라』에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 (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부처의 본성이 있다"고 명확하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승려의 이 질문은 사실상 "예"라는 교리적인 대답을 확인받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승려는 '지식'의 차원에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조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없다 (無)!"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승려가 의지했던 모든 '지식'과 '논리'의 세계가 무너져 내립니다. 만약 조주가 "예"라고 답했다면, 그것은 경전의 지식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니오'도 아닌, '없다 (無)'라는 절대적인 부정을 던졌습니다. 이 '무'라는 대답은 '있다'의 반대말로서의 '없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있음 (有)'과 '없음 (無)'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 (分別心, 분별심)이 일어나는 바로 그 '바탕'을 통째로 부수어 버리는, 선 (禪)의 스승이 내리친 칼날입니다. 조주는 그 승려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관념의 놀음 (戲論, 희론)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생각' 자체를 '무(無)!'라는 한마디로 잘라버린 것입니다. 이 화두는 수행자에게 "교리를 믿을 것인가, 깨달은 스승의 말을 믿을 것인가"라는 극한의 모순 속으로 밀어 넣어, '생각'이 아닌 '몸'으로 답을 찾도록 만듭니다.
또 다른 유명한 화두는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너의 본래면목 (本來面目)은 무엇인가?"입니다.
이 질문 역시 우리의 논리적인 생각이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정면으로 겨눕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은 무엇입습니까. 그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육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이름', 그리고 살면서 쌓아온 '기억'과 '경험'의 총합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나 (자아)'라고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이 화두는 이 모든 것이 생겨나기 '이전'의 '나'를 묻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기 전, 즉 '나'의 육체와 '나'의 생각이 존재하기 이전에, '나'는 무엇이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모든 논리와 기억은 작동을 멈춥니다. 그곳은 '생각'이 미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 화두는 우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 모든 관념 (자아)을 텅 비워내고, 그 모든 것이 생겨나기 이전의 '텅 빈 바탕', 즉 '본래의 성품 (본성)'을 곧바로 보라고 (直指, 직지) 요구합니다. '선'의 스승들은 바로 이처럼, 제자가 의지하고 있는 마지막 '생각'의 발판마저 빼앗아 버리는 방식으로 그를 깨달음으로 이끌었습니다.
'간화선'은 바로 이처럼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화두 (話頭)' 하나를 수행자에게 던져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참구 (參究)'하라고 합니다. 이 '참구'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참구'는 '화두를 연구하고 분석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진정한 '참구'는 이 모든 해석과 분석을 멈추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화두'에 대한 '의심' 그 자체를 온몸으로 붙들고 늘어지는 실천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온 의식을 "도대체 왜 '무'라고 했는가?" 또는 "이 '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이 하나의 질문에만 집중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 또는 '의심 그 자체'를 잊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 작용 (第六識, 제육식)과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분별하고, 판단하며, 답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화두'는 이 마음이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도록 설계된, 논리가 거세된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참구'를 시작합니다. "이 '무'란 무엇인가?" 하지만 금세 다른 생각이 끼어듭니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어제 들었던 말이 기분 나쁘다." 이것이 우리의 '분별심'입니다. 그때 수행자는 이런 딴생각을 억누르는 대신, 즉시 화두로 되돌아옵니다. "이 '무'란 무엇인가?" 딴생각이 또 일어나면, 또다시 "이 '무'란 무엇인가?"라고 되돌아옵니다.
이것을 수천, 수만 번 반복하다 보면, '화두'는 점차 다른 생각들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마음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의심'이 점점 더 강력해지고 순수해지면, '나'의 다른 모든 생각과 감각이 이 하나의 의심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의단 (疑團)', 즉 거대한 '의심의 덩어리'가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의단'이 깊어진 상태는, 더 이상 '나'와 '화두'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내가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 자체가 '나'의 전부가 되어버립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맛을 모르고, 잠을 잘 때도 오직 이 '의심'만이 뚜렷합니다. 이때 수행자는 '뜨거운 쇠구슬이 목에 걸린 것처럼 (銀山鐵壁, 은산철벽)' 느껴집니다. '나'를 지탱해 주던 모든 '생각 (분별심)'이 이 하나의 '의심'에 막혀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이 극한의 상태야말로, '나'라는 환상이 해체되기 직전의 가장 치열한 순간입니다.
수행자는 먹을 때도, 걸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오직 이 '화두' 하나만을 붙듭니다. 이 의심의 불길이 온몸을 태울 때, '나'라고 여겼던 모든 분별적인 생각 (제육식)이 그 불길 속에 타들어가고, 마침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순간에 이릅니다. 그 순간, '나'라는 주체와 '화두'라는 객체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이 '의단'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 납니다. 이때 수행자는 논리를 넘어선 '깨달음 (Satori, 사토리)'을 체험합니다. 그는 화두에 대한 '답'을 머리로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답'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간화선'은 이처럼 '논리'라는 가시를 빼내기 위해 '화두'라는 더 큰 가시를 사용하는, 가장 치열한 '비움'의 방식입니다.
두 번째, 이와는 정반대의 길처럼 보이는 '묵조선 (默照禪)'이 있습니다. '묵 (默)'은 '침묵'을, '조 (照)'는 '비추어 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침묵 속의 비추어 봄'이라는 뜻입니다. 이 수행법은 중국의 굉지정각 (宏智正覺, Hongzhi Zhengjue, 1091-1157) 선사에 의해 강조되었고, 특히 일본으로 건너가 '소토슈 (Sōtō-shū)'를 창시한 도겐 (道元希玄, Dōgen Kigen, 1200-1253)에 의해 그 꽃을 피웠습니다.
도겐은 젊은 시절, "모든 존재가 본래 부처 (本來成佛, 본래성불)라면,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힘들게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고, 마침내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도겐이 제시한 수행법은 '지관타좌 (只管打坐, shikantaza)'입니다. 이는 '오직 (只管) 그저 앉아있을 (打坐) 뿐'이라는 뜻입니다. '간화선'이 '화두'라는 특정한 도구를 사용하여 의식적으로 '의심'을 일으키는 것과는 달리, '묵조선'은 그 어떤 도구나 목표도 설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앉아있음'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억지로 누르거나 좇아가지 않습니다. 그저 '생각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고 (照, 조), 그 생각이 머물다 사라지는 것을 묵묵히 (默, 묵) 지켜볼 뿐입니다. '화두'라는 인위적인 방편마저 비워버리고, 지금 이 순간의 '앉아있음'이라는 행위 자체에 온전히 현존하는 것입니다. 도겐은 이처럼 '목표 없는 수행'이야말로 '본래 부처'인 우리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수행 (修)'과 '깨달음 (證)'이 둘이 아니며 (수증불이, 修證不二), 우리가 '그저 앉아있는' 그 순간이 이미 '깨달음의 실현' 그 자체라고 가르쳤습니다. '묵조선'은 이처럼 '깨달음'이라는 마지막 '목표'마저 비워내는, 가장 순수하고 고요한 '비움'의 방식입니다.
이 '선'의 가르침은 일본의 위대한 선승 하쿠인 에카쿠 (白隠慧鶴, Hakuin Ekaku, 1686-1769)에 이르러 다시 한번 뜨거운 불길로 타오릅니다. '간화선'의 전통을 계승한 하쿠인은, 지적인 유희로 전락한 당대의 '선'을 되살리기 위해 강력한 '공안'을 사용했습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던진 가장 유명한 화두가 바로 '척수음성 (隻手音声)', 즉 '한쪽 손의 소리'입니다.
하쿠인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두 손바닥이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누구나 안다. 그렇다면, 한쪽 손바닥의 소리는 무엇인가?" 이것은 '간화선'의 화두 중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우리의 논리적인 마음 (분별심)은 이 질문 앞에서 즉시 벽에 부딪힙니다. 소리 (音)는 두 대상 (色)의 충돌로 일어납니다. '한쪽 손'은 '하나 (一)'입니다. '하나'가 어떻게 '소리'를 낼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온갖 답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침묵'입니다." "바람이 손을 스치는 소리입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입니다." 하쿠인은 이 모든 '답'을 틀렸다고 일축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여전히 '분별'의 세계, 즉 '언어'와 '논리'로 만들어낸 '죽은' 답이기 때문입니다. 하쿠인이 요구한 것은 '소리'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자 자신이 '한쪽 손의 소리' 그 '자체'가 되어 돌아오기를 요구했습니다.
이 화두는 '둘'로 나뉜 세계 (이원성, Duality), 즉 '나'와 '세계', '주체'와 '객체', '소리'와 '침묵'이라는 분별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 모든 것이 나뉘기 '이전'의 '하나의 마음 (一心, 일심)' 자리로 돌아오라고 촉구합니다. '한쪽 손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나'라는 생각 (자아)이 완전히 비워진 '공 (空)'의 자리, 즉 '불립문자'의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존재의 근원적인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 '척수음성'은 우리가 붙들고 있는 '논리'라는 마지막 밧줄을 끊어버리는 '선'의 칼날입니다.
'선'의 이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그 어떤 시대보다 절실합니다. 우리는 정보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는 '소음' 속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해 인터넷 검색으로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나'의 고통을 '심리학'이나 '철학'이라는 '언어'로 분석하고 '이해'하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선'의 가르침은 바로 이 '이해'의 감옥을 부수라고 말합니다. '불립문자'의 가르침은, 우리가 겪는 삶의 근본적인 고통은 더 많은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경고합니다. 때로는 책을 덮고, 스마트폰을 끄고, '생각' 그 자체를 멈추어야 합니다.
'간화선'의 '화두'는 우리에게 '진짜 질문'을 던지라고 가르칩니다. 인터넷이 답해줄 수 없는 질문,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이 절박한 '의심' 하나를 품고, 값싼 위로나 얕은 정보에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파고들라고 합니다. 이 '의단'은 우리를 둘러싼 무의미한 소음들을 태워버리고, 우리 존재의 핵심에 이르게 하는 불길이 될 수 있습니다.
'묵조선'의 '지관타좌'는 '성과주의'에 중독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쉼'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해 (소유양식), 심지어 '명상'마저도 '스트레스 해소'나 '집중력 향상'이라는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그저 앉기'는 이 모든 '목표 지향적인' 마음을 비워내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고, 그저 '존재하라'고 합니다 (존재양식). 우리가 '생각'을 멈추려 애쓰는 대신, '생각'을 그저 구름처럼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라는 환상에서 벗어난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결국 '선'의 가르침은 '비움'의 최종적인 실천입니다. 그것은 '나'라는 환상뿐만 아니라, 그 환상을 만들어내는 '언어'와 '논리'의 틀 자체를 비워내는 작업입니다. 하쿠인의 '한쪽 손의 소리'는, 이 시끄러운 분별의 세계 너머에 있는 우리의 본래 마음, 그 고요하고 텅 빈 '공 (空)'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2-4.4. 노자의 도 (道): 텅 빈 그릇의 쓸모
'비움'의 지혜를 탐구하는 우리의 여정은, 중국 고대의 사상가 노자 (老子, Laozi)에 이르러 그 가장 깊고도 역설적인 울림을 전해줍니다. 그의 가르침이 담긴 『도덕경, 道德經』은 불과 오천여 자의 짧은 글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삶을 꿰뚫는 가장 근본적인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노자의 철학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굳게 믿는 모든 가치를 단숨에 뒤집습니다. 우리는 '채움'을 미덕으로 여기고, '강함'을 추구하며, '높은 곳'에 오르기를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노자는 이 모든 것의 정반대편, 즉 '비움'과 '약함', 그리고 '낮음' 속에 진정한 쓸모와 힘이 숨어있다고 거듭 말합니다.
이 위대한 역설은 『도덕경』 제11장에서 제시된 '텅 빈 그릇의 쓸모'라는 비유를 통해 가장 명료하게 빛을 발합니다. 노자는 우리가 서른 개의 바퀴살을 모아 하나의 바퀴통에 연결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수레가 굴러갈 수 있는 까닭은, 그 바퀴살 (있음, 有) 때문이 아니라, 바퀴살이 모이는 중심의 '텅 빈 구멍 (없음, 無)' 때문입니다. 우리는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듭니다. 하지만 그 그릇의 진정한 쓸모는 찰흙 (있음, 有)이 아니라, 그 '텅 비어있는 공간 (없음, 無)'에 있습니다. 우리는 문과 창을 내어 방을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방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까닭은 벽과 지붕 (있음, 有) 때문이 아니라, 그 '텅 비어있는 공간 (없음, 無)'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노자는 '있음 (有)'이 이로움을 주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인 '쓸모 (用, 용)'는 '없음 (無)'에서 나온다고 선언합니다.
노자가 말하는 이 '텅 빈 공간'은 단순한 공백이나 부재 (不在)가 아닙니다. 그것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우주의 근원, '도 (道)' 그 자체입니다. '도'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고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무 (無)'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 '무'는 모든 '있음 (有, 유)'의 어머니입니다. 『도덕경』 제40장에서 노자는 "천하 만물은 '있음 (有)'에서 생겨나고, '있음 (有)'은 '없음 (無)'에서 생겨난다"고 밝혔습니다. '비어있음'은 '채워짐'의 근원적인 바탕입니다.
노자는 『도덕경』 제6장에서 이 창조적인 '비움'을 '곡신 (谷神)', 즉 '계곡의 신'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계곡의 신은 죽지 않으니 (谷神不死, 곡신불사), 이를 일러 그윽한 암컷 (玄牝, 현빈)이라 한다." 산봉우리는 하늘을 찌를 듯 자신을 내세우며 '채움'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계곡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비움'으로써 모든 물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강물은 바로 그 텅 비고 낮은 계곡에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 '곡신'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낳는 '그윽한 암컷'처럼, 자신을 비워냄으로써 지칠 줄 모르고 만물을 생성해내는, 죽지 않는 생명의 자궁입니다. 이 '텅 빈 계곡'이야말로 만물을 창조하는 '도'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이처럼 '도'의 본질이 '비어있음'과 '낮아짐'에 있다면, '도'를 따르는 성인(聖人)의 삶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노자는 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무위자연 (無爲自然)'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위 (無爲)'는 글자 그대로 '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이나 '방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위'의 진정한 의미는, '억지로 함이 없다', 즉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의 이기적인 욕망이나 얕은 지식 (자아)을 앞세워, 세상의 흐름을 억지로 바꾸려 하거나 통제하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위 (有爲)', 즉 '인위적인 함'입니다. 하지만 '도'는 억지로 봄을 오게 하거나 억지로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무위'란, 이처럼 '도'가 세상을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순응하며, '나'의 의지를 비우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태도입니다. '자연 (自然)'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도'는 그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만물을 낳습니다. '무위자연'이란, '도'의 '무위'를 본받아,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게' 두는 삶의 방식입니다. 성인은 '무위'를 실천하지만,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게 (자연) 제자리를 찾아가므로, 결국 "하지 않음으로써 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無爲而無不爲, 무위이무불위)."
노자는 이 '무위자연'의 삶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하는 존재로 '물'을 제시합니다. 그는 『도덕경』 제8장에서 "가장 으뜸가는 선은 물과 같다 (上善若水, 상선약수)"고 선언합니다. 물의 위대한 덕 (德)은 무엇입니까.
첫째,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습니다 (利萬物而不爭, 이만물이부쟁)." 물은 자신의 공을 내세우거나 (자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존재와 싸우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모든 생명을 낳고 기릅니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모습입니다.
둘째, 물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뭅니다 (處衆人之所惡, 처중인지소오)." 사람들은 모두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 하지만, 물은 스스로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물은 그릇의 모양에 따라 자신의 형태를 바꾸며, 가장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화를 찾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물의 본성이야말로 '텅 빈 계곡 (곡신)'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노자는 "물은 '도'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상선약수'의 가르침은 '비움'과 '낮아짐'이 결코 '무능력'이나 '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진리로 이어집니다. 오히려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柔弱勝剛, 유약승강)'고 거듭 강조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강함'이 '약함'을 이깁니다. 하지만 노자가 보기에, '굳세고 강한 것 (剛強, 강강)'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무리'입니다. 뻣뻣하게 굳은 나뭇가지는 작은 바람에도 부러지기 쉽습니다. 굳어버린 시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부드럽고 약한 것 (柔弱, 유약)'이야말로 '삶의 무리'입니다. 살아있는 나뭇가지는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부드럽게 휘어지며 그 힘을 흘려보냅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몸은 한없이 유연합니다. 우리가 늙고 죽어갈수록 우리의 몸은 굳어집니다. 입안의 '단단한 이'는 먼저 빠지지만, '부드러운 혀'는 끝까지 남습니다. 물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강합니다. 물은 가장 단단한 바위를 뚫고, 거대한 골짜기를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부드러움'은 '굳셈'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노자의 이 지혜는 '강함'과 '채움'을 숭배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더 강한 나'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의 일정표는 빈틈없이 채워져 있고, 우리의 머리는 정보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의 자아는 '나'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한없이 굳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채우고' '굳어짐'으로써 스스로 강해졌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노자는 바로 그 '굳어짐'이야말로 '부러짐'의 시작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텅 빈 그릇의 쓸모를 회복하라고 말합니다. 빽빽한 일정 속에서 잠시 '비어있는' 시간을 내어줄 때, 우리는 비로소 '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정보 속에서 머리를 '비워낼'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 그러한 (자연)' 지혜와 만날 수 있습니다. '나'의 주장을 '비우고' '부드러워질' 때, 우리는 '물'처럼 타인을 받아들이고 굳은 편견을 녹여낼 수 있습니다.
'유약승강 (柔弱勝剛)'의 가르침은, 진정한 강함이란 상대를 힘으로 억누르는 '굳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힘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상황에도 적응하며, 결국에는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부드러움'과 '비어있음'에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