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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케노시스 - 신의 자기 비움

by DrLeeHC

제 2부: 비움의 철학- 내려놓음에서 시작되는 자유



제2-3장: 케노시스 - 신의 자기 비움



2-3.1. 필립보서의 찬가: 종의 형상을 취한 신



존재의 가장 깊은 신비는 아마도 '채움'이 아닌 '비움'의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강함이란 무엇인가를 획득하고, 자신을 주장하며, 굳건히 버티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구 정신사의 가장 깊은 샘물 중 하나인 기독교 사상은, 정반대의 길, 즉 스스로를 낮추고, 비워내며,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 속에서 가장 완전한 힘과 신성이 드러난다고 가르칩니다. 이 거대한 역설의 드라마가 '비움의 철학'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에 바로 '필립보서의 찬가 (Philippians Hymn)'가 있습니다.


이 찬가는 신약성경의 『필립보서, Philippians』 2장 6절에서 11절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의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 (Paul)은 이 노래를 인용하여, 분열의 위기에 처한 필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보여준 마음의 자세를 배울 것을 권면합니다. 이 찬가의 핵심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종의 형상을 취한 신'의 모습입니다. 찬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는 근본 하느님의 본체시나, 하느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바로 이 "자기를 비워"라고 번역된 부분의 그리스어 원어가 '에케노센 (ἐκένωσεν, ekenōsen)'입니다. 이 단어는 '비우다', '텅 비게 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케노오 (kenóō)'에서 왔으며, 여기에서 이 모든 비움의 신학을 상징하는 명사 '케노시스 (Kenosis)'가 파생되었습니다.


'케노시스'는 문자 그대로 '자기 비움 (self-emptying)'을 의미합니다. 이 찬가가 말하는 것은, 신과 동등한 본질을 지니신 존재가, 자신의 그 모든 영광과 권능, 즉 '신성 (divinity)'을 움켜쥐어야 할 '전리품'이나 '권력'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비워내어', 가장 낮고 비천한 존재인 '종 (servant)'의 모습, 즉 '인간'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나 겸양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방식을 스스로 포기하고, 완전한 타자 (他者)가 되는 길을 선택한, 가장 능동적이고 급진적인 자기 부정의 행위입니다.


이 '케노시스'의 신학적 맥락은, '어떻게 예수가 완전한 신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일 수 있는가'라는 기독교의 핵심 질문인 '기독론 (Christology)'과 깊이 연결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많은 논쟁을 거쳤습니다. 만약 예수가 완전한 신이라면, 어떻게 인간처럼 배고픔과 피로를 느끼고, 슬픔에 눈물 흘리며,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할 수 있었습니까. 반대로 그가 완전한 인간이었다면, 어떻게 신의 권능을 행하고 죽음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고대의 '칼케돈 공의회 (Council of Chalcedon, 451년)'는 "두 본성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거나, 변하거나, 분리되거나, 나뉘지 않고 한 인격 안에 존재한다"는 신비로운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독일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 '필립보서의 찬가'에 근거한 '케노시스 기독론'이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전지전능함 (omniscience, omnipotence)과 같은 신적인 속성들 중 일부를 '자발적으로 제한'하거나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했다고 보았습니다. 신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야말로 우리와 똑같은 유한한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살아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케노시스'는 신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열쇠가 되었습니다.


이 '케노시스'의 첫 번째 단계이자 가장 근본적인 사건이 바로 '성육신 (Incarnation)'입니다. '성육신'은 라틴어 '인카르나티오 (incarnatio)'에서 유래했으며, '육신 (caro) 안으로 (in) 들어오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Gospel of John』 1장 14절의 "말씀 (Logos, 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선언으로 대표됩니다. '말씀'이란 우주를 창조한 신의 이성이자, 영원하고, 무한하며, 시간을 초월한 신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말씀'이, 시간 속에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유한한 존재, 즉 '육신 (sarx, 사르크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서구 사상사에서 가장 거대한 역설입니다. '무한 (Infinite)'이 어떻게 '유한 (finite)' 속에 담길 수 있습니까. 모든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어떻게 유대의 한 아기의 몸 안에 깃들 수 있습니까. 영원한 존재가 어떻게 시간의 흐름 속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습니까. 이것은 마치 태평양 전체를 작은 찻잔에 담으려는 시도보다 더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 이래로, '신적인 것'은 완벽하고 불변하며 고통받지 않는 순수한 '정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반면 '육체적인 것'은 불완전하고, 썩어 없어지며, 고통에 시달리는 저급한 '물질'로 간주되었습니다. '성육신'은 이 모든 이분법을 파괴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신이 저 높은 하늘의 옥좌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를 비워 (케노시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고통스러운 '물질'의 세계, 이 '육신'의 한복판으로 직접 들어왔음을 선언합니다.


이 역설은 신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신은 저 멀리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밧줄을 던져 우리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신은 우리가 갇힌 이 유한함과 고통의 감옥 '안으로' 직접 들어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겪는 모든 비극과 한계를 남김없이 '함께 겪기' 위해, 스스로 '육신'이라는 한계 속에 갇히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무한이 유한을 품는 이 '성육신'의 역설은, '케노시스'가 단순히 신적 속성을 비우는 소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타자와 완전히 하나 되기 위해 자신의 경계를 허무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신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비워내고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 '자기 비움'의 여정은 '성육신'으로 시작하여, 지상에서의 삶을 거쳐, 마침내 '십자가 (Cross)' 위에서 그 절정이자 가장 깊은 심연에 도달합니다. '필립보서의 찬가'는 이어서 노래합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신이 인간이 된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그 '케노시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의 형태, 즉 로마 제국의 반역자들이 처형당하는 '십자가형'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 중 한 명인 스위스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는, 이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성금요일 (Good Friday)'과 부활한 '부활절 아침 (Easter Morning)' 사이의 그 텅 빈 시간, 즉 '성토요일 (Holy Saturday)'의 침묵에 주목했습니다. 이 날은 신이 무덤 속에 '죽어있는' 날입니다. 발타자르에게 이것은 '케노시스'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 즉 '지옥으로의 하강 (Descent into Hell)'을 의미합니다.


이 '지옥'은 불타는 유황불이 끓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과 '절대적인 무의미'를 상징하는 실존적인 상태입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했습니다. 발타자르는 이 절규를 단순한 인간적인 고통의 외침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성자 (聖子) 예수'가 '성부 (聖父) 하느님'으로부터 실제로 '버려짐'을 경험한, 신적인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는 고전적인 신학의 관점을 뒤흔드는 매우 급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고전 신학은, 신이 '불가변적 (immutable)'이며 '고통 불가능한 (impassible)' 존재라고 가르쳤습니다. 완벽한 존재인 신은 변할 수도 없고, 상처받거나 고통을 느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이러한 '고통받지 않는 신'의 이미지가, 십자가에서 아들을 내어주는 기독교의 신과 모순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Trinity)'라는 신의 본질 안에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신은 고독한 단일 개체가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인격 (위격)이 서로를 향한 '영원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어주고 (케노시스)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관계'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 삼위일체 내부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사랑의 드라마입니다. '성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하는 고통 (비움)을 겪습니다. '성자'는 자신의 신적인 권능을 비우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버려짐'의 고통을 끝까지 감수합니다.


즉, '하느님의 고통'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신은 저 멀리서 인간의 고통을 그저 지켜보는 방관자가 아닙니다. 신은 성자 예수를 통해, 인간이 겪는 가장 깊은 절망, 즉 '죽음'과 '신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그 지옥의 한복판까지 '함께' 내려갔습니다. 신의 '케노시스'는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으로 끝까지 동참하여 그 고통을 '안에서부터' 껴안고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발타자르에게 '성토요일'의 침묵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라는 최후의 적진까지 쳐들어간 신의 '사랑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신은 이 절대적인 '비움'을 통과함으로써, 죽음 자체를 이기고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냈습니다.


이 거대한 신학적 드라마는, 2천 년 전의 낡은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갇힌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삶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케노시스적 사랑 (Kenotic Love)'입니다. 이 사랑은 '자기 포기를 통한 합일'을 지향합니다.


우리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소유양식 (Having mode)'에 중독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조차 '소유'하려 합니다. 우리는 상대를 내 뜻대로 통제하려 하고, 나의 기준에 맞추려 하며, 나의 결핍을 채우는 대상으로 삼으려 합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나'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강력하게 주장하고 채우려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나'라는 감옥에 갇혀, 타인과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고 고립됩니다.


'필립보서의 찬가'는 이와 정반대의 길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내 안에 '공간'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나의 판단, 나의 선입견, 나의 욕망을 잠시 멈추고, 상대방의 목소리를 진심으로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보다, 상대방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 나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이 '자기 포기'는 나약함이나 패배가 아닙니다. '케노시스'는 신이 자신의 신성을 포기했기에 오히려 '주 (Lord)'가 되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노래합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나'를 비울 때, 우리는 비로소 더 큰 존재와 '합일'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잔을 비울 때, 비로소 타인의 마음이 그 안에 담길 수 있습니다. 내가 '나'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올 때, 비로소 타인과 진정으로 만나는 '연결'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주장과 자기 PR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채우기 위해 소리칩니다. 하지만 '필립보서의 찬가'는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만남을 위해, 진정한 사랑을 위해, 무엇을 '비워낼' 준비가 되었습니까. 신조차도 자신의 전부를 비워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것이 '비움의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근원적인 가르침입니다. 가장 충만한 삶은, 가장 역설적으로, '종의 형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기 비움'의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2-3.2. 위르겐 몰트만: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



우리는 고통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질병, 전쟁, 기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 인류는 끊임없이 한 가지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전능하며 선하다면, 왜 이토록 끔찍한 고통을 침묵 속에 내버려 두는가?" 이것은 '신정론 (Theodicy)', 즉 신의 정의를 묻는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입니다. 특히 20세기에 인류가 겪은 아우슈비츠 (Auschwitz)의 참상, 즉 수백만 명이 체계적으로 학살당한 홀로코스트 (Holocaust) 이후, 이 질문은 더 이상 철학적 유희가 아니라 절박한 실존의 절규가 되었습니다.


이 절규의 한복판에서, 전통적인 신 관념을 근본적으로 뒤집고 새로운 희망의 길을 제시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 (Jürgen Moltmann, 1926-2024)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10대 후반의 나이로 참전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동료들의 죽음과 절망을 목격하고,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훗날, 자신이 아우슈비츠의 가해자 국가인 독일에 속해있다는 죄책감과, 수용소에서 겪은 절망 속에서 "신은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신학 전체는 이 질문에 대한 평생의 대답입니다.


몰트만의 첫 번째 혁명적인 작업은, 우리가 안락하게 믿어왔던 '전능한 신 (omnipotent God)'의 관념을 해체하는 일이었습니다. 서구 기독교가 오랫동안 숭배해 온 신은, 사실 성서의 하느님이라기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만들어낸 '철학자의 신'에 가까웠습니다. 플라톤 (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가 상상한 '최고 존재'는 완벽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부동의 원동자 (Unmoved Mover)'였습니다. 이 신은 스스로는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움직이는 궁극의 원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은 초기 기독교 신학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신은 '불가변적 (immutable)', 즉 변할 수 없으며, '고통 불가능한 (impassible)' 존재로 규정되었습니다. 신이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신이 불완전하거나 외부의 무언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므로, 완벽한 존재일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이처럼 저 높은 하늘의 옥좌에 앉아, 인간의 역사와 고통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초월적인 통치자, 즉 '군주 (monarch)'로서의 신의 이미지가 수천 년간 서구 정신을 지배해왔습니다.


하지만 몰트만은 이처럼 고통받지 않는, 차갑고 전능하기만 한 신의 이미지가 '우상 (idol)'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읽었던 성경 속의 신, 특히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신은, 결코 그런 '무감각한 (apathetic)' 신일 수 없었습니다. 몰트만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고통 불가능한 신은 사랑할 수 없는 신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고통받는' 행위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이 우리의 고통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 신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몰트만은 '전능함'의 개념 자체를 다시 정의했습니다. 신의 능력은 세상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며, 가장 깊은 고통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이 '고통받는 신 (suffering God)'이라는 새로운 관념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난제인 '신정론'에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엽니다. 아우슈비츠 이후, "신은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신은 더 큰 선을 위해 그 악을 잠시 허용하셨다"거나 "인간의 죄에 대한 벌이었다"는 식의 전통적인 대답은, 오히려 신을 모독하는 폭력적인 변명이 되어버렸습니다.


유대인 생존 작가 엘리 비젤 (Elie Wiesel, 1928-2016)은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에서, 교수대에 매달려 천천히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한 포로가 절규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그러자 그의 내면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느님은 저기, 저 교수대에 매달려 계신다."


몰트만은 바로 이 통찰을 자신의 신학적 중심으로 가져옵니다. 그는 "신은 아우슈비츠에서 고통받는 유대인들과 '함께' 고통당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 Der gekreuzigte Gott』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몰트만에게 십자가는 단지 2천 년 전 예수라는 한 인간이 겪은 비극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신 자신 안에서 일어난 사건 (an event within God himself)'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단지 예수의 '인성 (humanity)'뿐만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신 자신'이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신이 왜 우리의 고통을 내버려 두는가'라는 오랜 질문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늘 저 멀리에 있는 신을 향해 "왜 나를 돕지 않습니까?"라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은 고통받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똑같이 아파하며 '함께'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고통의 '방관자'가 아니라, 고통의 '동참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외친 절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바로 신이 버림받은 모든 인간의 절망을 자신의 절망으로 끌어안은 순간입니다. 신은 인간이 겪는 가장 깊은 지옥, 즉 신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이라는 '버려짐'의 고통 속으로 스스로 투신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자들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신은 그들의 고통 속에, 그들의 절규 속에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이 죽는다'는 말이 가능합니까. 몰트만은 이 깊은 신비를 '삼위일체적 케노시스 (Trinitarian Kenosis)'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즉, 십자가의 사건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Trinity)'의 세 인격 모두가 참여한 '자기 비움 (Kenosis, 케노시스)'의 드라마라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몰트만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와 같은 신학자들의 통찰을 이어받아, 더욱 역동적인 신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첫째, '성자 (Son)' 예수는 자신의 신적인 권능을 비우고 인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육신),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려짐'을 당하는 궁극의 '케노시스'를 경험합니다. 그는 모든 인간의 죄와 죽음, 심지어 신 없음 (godlessness)이라는 지옥의 심연까지 내려갑니다.


둘째, '성부 (Father)' 하느님 역시 이 사건을 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성부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그 끔찍한 죽음을 겪도록 '내어주는 (giving up)' 고통, 즉 '아들을 상실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곧 아버지의 죽음과도 같은 고통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전능함을 스스로 '비워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가장 고통스러운 '분리'와 '단절'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셋째, '성령 (Holy Spirit)'은 바로 이 가장 극단적인 '단절'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와 성자를 '연결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성령은 죽음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성자의 기도를 아버지에게 전달하고, 아들을 내어준 아버지의 슬픔을 아들에게 전달합니다. 더 나아가, 성령은 이 절대적인 죽음과 버려짐 속에서,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내는 힘, 즉 '부활 (Resurrection)'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이 '삼위일체적 케노시스'의 관점은, 신이 고독하게 존재하는 단일한 '군주'라는 낡은 관념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몰트만에게 신의 본질은 '관계 (relationship)' 그 자체입니다. 신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향해 자신을 비우고 (케노시스), 서로를 받아들이며, 서로 안에 거하는 '사랑의 역동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이 신적인 사랑이 얼마나 급진적인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신은 자신의 '안 (in)'에서 일어난 이 고통스러운 분리와 재결합을 통해, 자신 '밖 (out)'에 있는 이 소외된 세계 전체를 자신의 사랑 안으로 끌어안았습니다.


이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은 필연적으로 '희망의 신학 (Theology of Hope)'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몰트만이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 이전에 출간했던 그의 첫 번째 주요 저작, 『희망의 신학, Theologie der Hoffnung』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어떻게 가장 절망적인 '십자가'가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몰트만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신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후의 절망, 즉 '죽음'과 '신으로부터의 버려짐'이라는 그 지옥의 심연까지 직접 내려갔기 때문에, 이제 그 어떤 절망도, 그 어떤 죽음도 신의 사랑이 닿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십자가라는 '절대적인 무 (無)'의 한복판에서, '부활'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창조'를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이미 가진 것, 즉 우리의 '과거'나 '현재'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미래 (future)'에 근거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면 다가올 미래가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미래', 즉 모든 눈물과 고통, 불의와 죽음이 마침내 극복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과거의 황금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오는 구원 (salvation from the future)'입니다.


이 몰트만의 희망은 결코 수동적인 '낙관주의 (optimism)'가 아닙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잘 되겠지"라며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몰트만에게 희망은 '저항 (protest)'입니다. 신이 궁극적인 정의와 생명을 '약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약속에 어긋나는 '현재'의 모든 불의와 고통, 억압과 죽음에 맞서 "아니오!"라고 외치며 싸워야 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안주시키는 아편이 아니라, 우리를 거리로 뛰쳐나가게 만드는 '혁명적인 힘'입니다. 이 때문에 몰트만의 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 (Liberation Theology)'을 비롯한 '정치 신학 (Political Theology)'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몰트만의 신학이 오늘날 고통받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첫째, 당신이 지금 어떤 절망적인 고통 속에 있더라도,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신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이 당신과 함께 그 버려짐을 겪고 있습니다. 당신의 절규는 곧 하느님의 절규입니다. 신은 당신의 고통 '밖에' 있는 재판관이 아니라, 당신의 고통 '안에' 있는 동반자입니다.


둘째, 당신의 고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으며, 신은 이 고통의 한복판에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이 '끝'이라고 선언하는 모든 세력에 맞서야 합니다. 절망은 사실을 과장하는 죄입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그것을 '변화시키라'고 명령합니다.


몰트만의 신학은 '비움'이 어떻게 가장 큰 '채움 (희망)'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전능함을 비웠기에 고통 속에 함께할 수 있었고, 생명마저 비웠기에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저 하늘의 차가운 통치자가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함께 울고 함께 싸우는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을 선물했습니다.





2-3.3. 시몬 베유의 탈창조 (Decreation)



20세기는 거대한 이념들이 충돌하고, 인간의 오만이 하늘을 찔렀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시대의 한복판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투명한 영혼을 지닌 한 철학자가 묵묵히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신비가, 그리고 노동자였던 시몬 베유 (Simone Weil, 1909-1943)는, 당대의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에 몰두하던 시대적 흐름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는 삶을 선택했으며, '나'라는 자아를 지우고 소멸시키는, 영적인 길을 온몸으로 실천했습니다. 그녀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였지만, 자발적으로 공장의 노동자가 되어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단 34년의 짧은 생애 동안, 우리를 옭아매는 가장 근본적인 감옥, 즉 '나 (I)'라는 자아를 해체하는 길을 치열하게 탐구했습니다. 그녀가 제시한 '비움'의 길은 '탈창조 (Décréation)'라는 개념으로 응축됩니다.


시몬 베유가 본 이 세계는 두 가지 거대하고 상반된 힘이 지배하는 전쟁터입니다. 그녀는 이 두 힘을 '중력 (la pesanteur)'과 '은총 (la grâce)'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개념은 그녀의 사후에 출판된 『중력과 은총, La Pesanteur et la Grâce』이라는 잠언집의 핵심입니다. '중력'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자연 법칙을 의미합니다. 물체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힘의 법칙을 따릅니다.


하지만 시몬 베유가 말하는 '중력'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는 법칙이기도 합니다. '나'라고 불리는 우리의 '자아 (ego)'야말로 가장 강력한 중력의 중심입니다. 자아는 우주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으며, 세상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고, 물질을 소유하려 하며,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합니다. 이 모든 이기적인 욕망, 즉 '나'를 채우고 확장하려는 모든 시도가 바로 '영적인 중력'입니다. 사회의 권력 관계,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폭력,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경쟁의 논리 또한 이 중력의 법칙이 그대로 반영된 모습입니다. 이 중력의 세계는 텅 빈 공간, 즉 '진공 (le vide)'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우리의 자아는 잠시라도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 틈을 소음과 오락, 혹은 타인에 대한 지배욕으로 끊임없이 채우려 합니다.


이처럼 무겁고 필연적인 '중력'의 법칙과 정반대되는 지점에서 작동하는 힘이 바로 '은총'입니다. 은총은 이 세상의 법칙에 속하지 않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힘입니다. 중력이 아래로 끌어당긴다면, 은총은 위로 끌어올립니다. 중력이 '나'를 중심으로 뭉치게 한다면, 은총은 '나'를 버리고 타인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은총은 조건 없는 사랑, 순수한 아름다움, 절대적인 진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은총의 빛은 너무나 섬세해서, '나'라는 자아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곳을 뚫고 들어오지 못합니다. 은총은 오직 '텅 빈 공간', 즉 중력이 그토록 싫어하는 '진공' 속으로만 스며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력과 은총의 변증법'입니다. 우리는 모두 중력의 지배 아래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사명은 이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우리 안에 은총이 머무를 수 있는 '빈 공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빈 공간을 만드는 행위, 이 고통스럽고도 자발적인 '자기 비움'의 실천을, 시몬 베유는 '탈창조 (Décréation)'라고 불렀습니다.


'탈창조'는 그녀의 영성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이 단어는 '파괴 (destruction)'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파괴는 여전히 '나'의 힘을 앞세우는, '중력'에 속한 행위입니다. '나'는 무언가를 부수면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쾌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탈창조'는 힘의 행사가 아니라, '힘의 포기'입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한 걸음 뒤로 물리는, 섬세하고 자발적인 '해체'의 과정입니다.


시몬 베유는 이 '탈창조'가 신의 '창조' 행위에 대한 인간의 유일하고 올바른 응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녀는 신이 이 세계를 '창조 (Creation)'한 행위 자체가, 신의 첫 번째 '케노시스 (Kenosis)', 즉 '자기 비움'이었다고 통찰했습니다. 절대적인 충만함 그 자체인 신이 '신이 아닌 것', 즉 유한하고 불완전한 이 세계가 존재할 수 있도록,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제한'하고 '뒤로 물러나는' 공간을 내어준 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나'라는 존재, 즉 "나는 존재한다 (I am)"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율성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선물을 오해했습니다. 인간은 이 '나'라는 존재를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하고, 스스로가 신이 되려 했습니다. 이것이 '중력'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에게 되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신이 우리에게 베푼 그 사랑의 방식을 되돌려주는 것뿐입니다. 신이 자신을 비워 우리에게 '나'를 주었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그 '나'를 다시 신에게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창조된 '나'의 주장을, 스스로의 의지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바꾸는 것, 즉 '나'라는 존재의 중심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것이 바로 '탈창조'입니다. 그것은 '자아를 지우는 영적 수련'입니다. "신이 내가 '나'가 아니기를 바라는 만큼, 나도 '나'이기를 그만두는 것"이 이 수련의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고통스러운 '자아 지우기'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시몬 베유는 '힘'이나 '의지'를 사용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나는 지금부터 나를 비우겠다!"라고 굳게 결심한다고 해도, 바로 그 "나는...하겠다"라고 외치는 '나'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비우려는 노력마저도 '나'를 강화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중력 (la pesanteur)'의 방식입니다.


그녀가 제시하는 유일한 방법은 '은총 (la grâce)'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힘을 쓰는 행위가 아니라, 힘을 빼는 행위입니다. 그녀는 이것을 '주의 집중 (atten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에게 '주의 집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지적인 집중력'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것은 '노력'하거나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긴장된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모든 긴장을 풀고, 나의 의지와 욕망을 텅 비운 채, 대상을 향해 순수하게 열려 있는 '대기 (attente)'의 상태입니다.


학교의 비유가 어렵다면, 우리가 고통 속에 있는 친구를 위로하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중력'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친구가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을 때, '나'는 그 침묵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그 텅 빈 공간을 채우려 합니다. "힘내, 다 잘될 거야"라는 값싼 위로를 던지거나, "내가 예전에 겪어봤는데..."라며 '나'의 경험을 늘어놓거나, "너는 이렇게 했어야지"라며 섣부른 조언을 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친구를 위한다는 명분을 가졌지만, 사실은 그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기 싫은 '나'의 불안함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중력'의 작용입니다.


하지만 '은총'의 방식, 즉 '주의 집중'은 다릅니다. 그것은 내 친구를 '고쳐야 할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그저 그의 고통 곁에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나는 섣부른 조언이나 위로의 말을 하려는 '나'의 욕망을 의식적으로 비워냅니다. 나는 내면의 모든 소리를 끄고, '나'를 텅 빈 상태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텅 빈 공간으로, 친구의 말뿐만 아니라 그의 침묵, 그의 절망, 그의 존재 자체를 아무런 판단 없이 그저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집중'입니다.


이처럼 나의 생각과 판단을 비우고 (탈창조) 상대방을 향해 온전히 열려 있는 상태가 바로 '대기'입니다. 시몬 베유에게 진정한 기도란 무언가를 구하는 행위 (중력)가 아니라, 바로 이 '주의 집중'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신이여, 나에게 오소서"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텅 비우고 신이 오실 수 있도록 '대기'하는 것입니다. 이 순수한 '주의 집중'이야말로 '탈창조'를 이루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그것이 고통받는 타인이든, 예술 작품이든, 혹은 하찮아 보이는 일이든, 나의 사심과 편견을 비우고 그 존재 자체에 온 마음을 기울일 때, 우리는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며, 그 텅 빈 공간으로 '은총'의 빛이 스며들게 됩니다.


시몬 베유는 이 '탈창조 (Décréation)'와 '주의 집중 (attention)'을 실천할 가장 혹독하고도 진실한 장소로 '노동 (labor)'의 현장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뿌리내림, L'Enracinement』이라는 자신의 마지막 저작에서, '뿌리내림'이야말로 인간 영혼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 (need)'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필요는 음식이나 공기처럼, 그것이 결핍되었을 때 우리 영혼이 서서히 죽어가는, 가장 절박한 필요입니다.


'뿌리내림'이란 한 그루의 나무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나무는 흙으로부터 물과 양분을 빨아올려야만 비로소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몬 베유는 인간의 영혼도 이와 똑같다고 보았습니다. 우리의 영혼 역시 살아 숨 쉬는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삶의 의미라는 토양에 깊이 발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이야기와 미래의 희망, 그리고 이웃의 삶에 구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영적인 양분을 공급받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실질적인 관계를 맺고, 삶의 의미를 공유하는 상태가 바로 '뿌리내림'입니다.


반대로,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뿌리뽑힘 (déracinement)' 입니다. '뿌리뽑힘'은 바로 이 생명줄이 끊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현대 문명은 거대한 기계처럼, 인간을 그가 속한 땅과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떼어놓았습니다. 과거의 전통은 낡은 미신으로 치부되어 버려졌습니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거대한 도시의 익명 속으로 흩어졌고, 이웃은 더 이상 함께 삶을 나누는 동료가 아닌, 경쟁에서 이겨야 할 타인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공장의 노동자들은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의미 없는 동작을 반복하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뿌리뽑혔습니다'. 노동은 더 이상 자신의 혼을 담아 무언가를 창조하는 거룩한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생계를 위해 영혼 없이 반복하는 동작, 즉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기계의 속도에 종속된 고통이 되었습니다. 또한,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은 식민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 그리고 역사를 송두리째 강탈당하고 '뿌리뽑혔습니다'. 이처럼 과거와 미래, 공동체와 대지, 그리고 의미 있는 노동으로부터 '뿌리뽑힌' 상태야말로, 인간을 극도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영적 질병입니다.


'뿌리뽑힌' 인간은 더 이상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지 못하고 공중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몬 베유는 이 '뿌리뽑힘'의 현장에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1934년, 파리의 안락한 철학 교사직을 버리고, 르노 (Renault) 자동차 공장을 비롯한 여러 공장에서 1년 넘게 프레스 공으로 일했습니다. 그녀는 지식인으로서 노동을 '관찰'하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노동' 그 자체가 주는 '고통'을 온몸으로 '체험'하러 갔습니다.


그녀가 공장에서 경험한 것은 단순한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짓밟고 '나'라는 감각마저 파괴하는 절대적인 '불행 (malheur)'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불행' 속에서, 기계의 속도에 종속되어 생각할 힘마저 빼앗긴 채, 자신이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변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중력 (la pesanteur)'이 인간을 짓누르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시몬 베유는 바로 이 '나'가 완전히 뭉개지는 '불행'의 순간이야말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만나는 지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라는 자아가 강제로 파괴되는 이 '뿌리뽑힘'의 고통 속에서, 역설적으로 '탈창조'가 일어나는 '빈 공간'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 기계적이고 영혼 없는 노동 속에서, 그 동작 하나하나에 '주의 집중'을 실천하려 애썼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말하는 '노동의 영성'입니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나'를 비우고 신과 만나는 가장 구체적인 십자가였습니다.


시몬 베유의 사상은 오늘날 '나'를 찾으라고 외치는 시대에 가장 불편하고도 절실한 가르침을 줍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아를 실현하라', '너 자신을 채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인정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하지만 시몬 베유는 그 모든 '채움'의 노력이 우리를 '중력'의 감옥에 더욱 깊이 가둘 뿐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녀의 가르침은, 진정한 자유와 만남은 '나'를 주장할 때가 아니라 '나'를 비워낼 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싶다면, "내가 너라면..."이라고 상상하는 대신, 나의 모든 생각을 비우고 그 사람의 목소리에 순수하게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앎을 얻고 싶다면, 지식을 '소유'하려 애쓰는 대신, 진리 앞에서 겸손히 '대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화려한 성공을 쫓는 대신, 지금 여기의 사소하고 고된 노동 속에서 '나'를 지우는 거룩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시몬 베유의 '탈창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은총'이 머물 수 있도록, 당신의 그 빽빽한 '나'를 조금이라도 비워낼 용기가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2-3.4. 침춤 (Tzimtzum): 카발라의 우주론적 비움



'비움의 철학'은 기독교 신학의 울타리를 넘어, 서구 정신사의 더 깊고 오래된 수원(水源)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케노시스 (Kenosis)'가 역사 속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랑'의 행위를 묘사한다면, 이보다 앞서 '창조'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한 태초의 '비움'을 상상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무한(無限)한 신이 유한(有限)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과 씨름했습니다. 만약 신이 모든 시간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절대적 충만'이라면, 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 즉 이 '세계'가 존재할 '틈'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 심오한 신학적 난제에 대해, 가장 역동적이고도 혁명적인 '비움'의 대답을 제시한 이들은 바로 유대교 신비주의, 즉 '카발라 (Kabbalah)'의 사상가들이었습니다. 특히 16세기, 현재 이스라엘의 갈릴리 지역에 있는 '체파트 (Safed)'라는 도시에서 활동했던 신비주의자들은, 이 창조의 비밀을 탐구하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 사상의 중심에 위대한 신비가 이삭 루리아 (Isaac Luria, 1534-1572)가 있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자'라는 뜻의 '아리 (Ari)'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가르침은 '루리아 카발라 (Lurianic Kabbalah)'라는 이름으로 서구 비의 (秘儀, esoterism)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삭 루리아가 제시한 창조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행위와 정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카발라 전통에서 신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은 '아인 소프 (Ein Sof)'라고 불립니다. 이는 '끝없는 이', '무한자'라는 뜻으로, 그 어떤 말이나 생각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절대적 무한 그 자체입니다. 루리아 이전의 카발라 사상가들은 이 '아인 소프'가 마치 샘물이 넘쳐흐르듯, 자신의 충만함을 바깥으로 '방출 (emanation)'하여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루리아는 이 생각을 뒤집었습니다. 그는 '아인 소프'가 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무언가를 '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거두어들였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최초의 신적인 행위를 그는 '침춤 (Tzimtzum)'이라고 불렀습니다. '침춤'은 '수축' 또는 '축소'를 의미합니다. 창조 이전에, 모든 것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무한한 '아인 소프'의 빛은, 이 세계가 존재할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일부를 '뒤로' 물렸습니다. 신은 자신의 전능함과 무한함을 스스로 '제한'하고 '수축'시킴으로써, 신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을 태초에 만들어냈습니다.


루리아 카발라는 이 최초의 빈 공간을 '할랄 하파누이 (Chalal ha'Panui)', 즉 '태초의 공허' 또는 '비어있는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침춤'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비움'의 행위입니다. 이 신적인 '자기 수축'이 없었다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무한한 빛만이 가득한 곳에서는 유한한 존재가 숨 쉴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침춤'은, 모든 존재의 시작이 '채움'이 아닌 '비움'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우주론적 서사입니다. 신의 '비움'이 곧 창조의 첫 번째 조건이었습니다.


'침춤'을 통해 '비어있는 공간'이 마련된 후, '아인 소프'는 이 공허 속으로 한 줄기 빛 (Kav, 카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을 담아내기 위한 '열 개의 그릇'을 만듭니다. 이 그릇들이 바로 카발라 사상의 핵심인 '세피로트 (Sephirot)'입니다. '세피로트'는 '지혜', '이해', '자비', '심판', '아름다움' 등, 무한한 신의 성품이 유한한 세계 속에서 드러나는 열 가지 방식 또는 속성을 의미합니다. 이 그릇들은 신의 빛을 차례대로 받아 담으며 우주의 질서를 형성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거대한 '우주적 재앙'이 발생합니다. '엔 소프'의 빛은 너무나 강렬하고 순수했던 반면, 그 빛을 받아야 할 그릇들(특히 아래쪽의 일곱 그릇)은 너무나 연약했습니다. 이 그릇들은 신의 압도적인 빛의 강도를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루리아 카발라는 이 사건을 '셰비라 (Shevirah)', 즉 '그릇들의 깨어짐 (Breaking of the Vessels)'이라고 부릅니다.


이 '셰비라'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그릇들이 깨어지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신성의 빛 (Nitzotzot, 니초초트)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잃고, 깨어진 그릇의 '파편 (껍데기)'들과 뒤엉켜 저 아래 어둡고 혼돈스러운 물질세계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세계'가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루리아 카발라에 따르면, 이 세상은 본래의 완벽한 질서를 잃어버린 '깨어진' 상태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 악, 혼돈은 바로 이 '깨어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신성의 불꽃을 그 안에 품고 있지만, 동시에 '클리포트 (Klippot)', 즉 깨어진 '껍데기'에 갇혀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신에게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신의 불꽃이 유배되어 갇힌 '감옥'이 되었습니다.


이 장엄한 신화는 우리에게 절망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루리아 카발라는 이 '깨어짐'의 상태가 영원하지 않으며, 이 세계를 다시 '복원'해야 할 거룩한 사명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선언합니다. 이 위대한 복원의 과업을 '티쿤 올람 (Tikkun Olam)', 즉 '세계의 복원 (Restoration of the World)'이라고 부릅니다.


'티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입니다. 인간의 사명은 이 깨어진 물질세계 곳곳에 흩어져 갇혀 있는 '신성의 불꽃'들을 다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 속에 갇힌 신성의 불꽃을 해방시킨다는 거룩한 '의도 (Kavvanah, 카바나)'를 가질 때, 그 행위는 '티쿤'이 됩니다. 우리가 타인을 도울 때, 정의를 실천할 때, 기도하고 명상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껍데기'를 깨고 그 안의 '빛'을 끌어올리는 우주적인 복원 작업에 동참하게 됩니다.


루리아 카발라에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신의 창조를 '완성'시키는, 신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입니다. '침춤'으로 시작된 신의 '비움'은, '셰비라'라는 '깨어짐'을 통해, 마침내 '티쿤'이라는 '인간의 참여'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신은 스스로를 비워 인간이 존재할 자리를 만들었고, 이제 인간이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흩어진 신성을 다시 모아 신의 세계를 복원할 차례입니다.


이 '침춤'이라는 우주론적 비움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기독교의 '케노시스 (Kenosis)'와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이 두 '비움'은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릅니까.

'케노시스'와 '침춤'의 대화는 '사랑'과 '필연'의 대화이기도 합니다. '케노시스'는 이미 존재하는 유한한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받는 인류를 향한 신의 '사랑'에서 비롯된, 역사 속의 윤리적 결단입니다. 신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인간이 되어 그 고통에 동참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반면에 '침춤'은 그보다 한 걸음 앞선, 창조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필연'입니다. '침춤'이 없었다면, 즉 신이 스스로를 비우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 세계도, 인류도, 그리고 신이 사랑할 '대상'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침춤'은 사랑의 '대상'을 만들기 위한 선결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필연적인 '비움'의 동기 역시, 궁극적으로는 '존재'를 향한, 그리고 '관계'를 향한 신의 가장 깊은 '사랑' 또는 '욕망'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두 위대한 '비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의 권능이 '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신의 가장 위대한 힘은 무언가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채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존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제한'하고 '비워내는' 사랑에 있습니다.


이 고대의 신비주의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듭니다.


첫째, 진정한 '창조'는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지식을 쌓고, 더 많은 영향력을 가져야만 성공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루리아의 '침춤'은, 때로는 내가 한 걸음 '물러나' 주고, 나의 주장을 '비워'내고, 상대방이 숨 쉴 '빈 공간'을 만들어주는 행위야말로, 가장 위대한 창조의 시작임을 가르칩니다.


둘째,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는 '침춤'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이기심과 편견, '나'의 판단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상대방은 나의 세계에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내 마음속에 '할랄 하파누이', 즉 '기꺼이 비어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주장을 '수축'시키고, 상대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셋째, 이 세계는 '깨어져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고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에 절망합니다. 하지만 '셰비라'의 신화는, 그 '깨어짐'과 '파편' 속에 여전히 '신성의 불꽃'이 숨겨져 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의 사명은 이 세상을 버리고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깨어진 세상의 가장 어두운 조각들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 갇힌 빛을 찾아내는 '티쿤 올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카발라'가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위로이자 소명입니다. 우리의 삶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깨어진 세계의 현실이지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한 행위, 모든 따뜻한 말 한마디, 모든 정의로운 실천은, 이 깨어진 우주를 복원하는 거룩한 '티쿤'의 일부입니다. '비움'은 '깨어짐'을 낳았지만, 그 '깨어짐'은 우리에게 신의 동반자가 되어 이 세계를 '복원'하라는 가장 위대한 초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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