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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천부경과 장자의 길

by DrLeeHC

제2-5장: 천부경과 장자의 길



2-5.1. 천부경: 한민족의 우주론



동양의 '비움'의 지혜가 인도에서 '공 (空, śūnyatā, 슈냐따)'이라는 철학으로 꽃피고, 중국에서 '무 (無)'라는 '도 (道)'의 사상으로 흘렀다면, 그 거대한 물결은 한반도에 이르러 독창적이고도 심오한 우주론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한민족의 고유한 경전으로 전해지는 『천부경, 天符經』은, 단 81자의 지극히 함축적인 문자 속에 존재의 시작과 끝,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인 사명을 압축하여 담아낸 놀라운 지혜의 결정체입니다. 이 경전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대로부터 이어졌다는 전승과, 근대에 이르러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학술적 견해가 공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원을 둘러싼 논쟁을 넘어, 이 짧은 글이 담고 있는 '비움'과 '하나됨'의 철학적 깊이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천부경』은 우리가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우주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깨닫는 길을 제시하는, 한민족 고유의 나침반입니다.


이 81자에 담긴 존재의 비밀은, "일시무시일 (一始無始一)"이라는 첫 번째 선언에서부터 그 장엄한 문을 엽니다. 이 다섯 글자는 창조의 신비 전체를 압축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시일 (無始一)"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 (一)'가 비롯되었으나 (始), 그 '하나'의 시작은 '시작 없음 (無始)'에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시작 없음 (無始)'이 바로 '무 (無)'입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가 비롯된 근원이지만, 그 자신은 어딘가에서 비롯된 적이 없는, '시작 없는 시작'입니다. 이 '무(無)'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 (Void)'나 '부재 (Absence)'가 아닙니다. 그것은 노자 (老子)가 말한 '도 (道)'와 같으며, 이삭 루리아 (Isaac Luria, 1534-1572)가 말한 '아인 소프 (Ein Sof)'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있음 (有)'과 '없음 (無)'이라는 우리의 분별이 생겨나기 이전의, 모든 '있음'을 낳을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의 장 (場)'입니다.


그리고 이 '무 (無)'라는 무한한 잠재력에서 "하나 (一)가 시작 (始)"됩니다. 이 '하나 (一)'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주 만물'이 '여럿'으로 나뉘기 이전의, '전체 (the All)'로서의 '하나'입니다. '무 (無)'가 0이라면, 이 '하나 (一)'는 숫자 1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아직 분화되지 않은 채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상태, 즉 '우주 만물 전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하나 (一)', 즉 우주 만물의 통일체는, 텅 빈 '무 (無)'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이 선언의 핵심입니다. '채움 (有)'은 '비움 (無)'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움'은 '채움'의 어머니이자, 모든 존재의 고향입니다.


이 경전은 곧바로 이 사상을 "석삼극무진본 (析三極無盡本)"이라는 구절로 이어갑니다. '무 (無)'라는 근원에서 '하나 (一)'라는 우주적 통일체가 비롯되었고, 『천부경』은 이 '하나 (一)'가 비로소 나뉘어져 (析三極, 석삼극) 우리가 아는 현상 세계, 즉 '하늘, 땅, 사람'이라는 구체적인 '우주 만물'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하늘과 땅과 사람으로 만물이 화려하게 펼쳐지더라도, 그들의 궁극적인 '근본 (本)'은 '다함이 없는 무 (無盡, 무진)'라는 것입니다. 즉, 현상 세계가 아무리 복잡하게 전개되더라도, 그 모든 것의 뿌리는 '다함이 없는 비움', 즉 '무 (無)'에 있습니다. '무 (無)'야말로 결코 마르지 않는 만물의 근원입니다.


『천부경』은 이 '무 (無)'라는 근원에서 '하나 (一)'가 나뉘어 '하늘, 땅, 사람 (天地人, 천지인)'이 되는 과정을 독창적인 수 (數)의 철학으로 풀어냅니다. 경전은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이라고 노래합니다. 이 구절은 '첫 번째 하나', '두 번째 하나'처럼 단순한 순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근원인 하나 (一)'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에게서 어떻게 서로 다른 성질로 자신을 드러내는지를 설명합니다.


"천일일 (天一一)"은, '근원인 하나 (一)'가 하늘 (天)에서는 '하나 (一)'의 성질로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이 하늘의 '하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순수한 '양 (陽)'의 원리이며, 보이지 않는 '의식'과 '정신'의 세계입니다.


"지일이 (地一二)"는, 그 '근원인 하나 (一)'가 땅 (地)에서는 '둘 (二)'의 성질로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이 땅의 '둘'은 하늘과 땅, 정신과 물질, 음 (陰)과 양 (陽)처럼 서로 마주하며 대립하는 '이원성 (二元性)'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땅은 이 '둘'의 긴장과 조화 속에서 비로소 '물질'과 '에너지'를 갖춘 현실 세계를 펼쳐냅니다.


"인일삼 (人一三)"은, '근원인 하나 (一)'가 사람 (人)에게서는 '셋 (三)'의 성질로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이 '셋'이라는 수는 하늘의 '하나 (의식)'와 땅의 '둘 (물질/에너지)'을 모두 품어 조화시키는 완전수입니다. 인간은 하늘의 순수한 의식 (1)과 땅의 이원적인 에너지 (2)를 동시에 물려받은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바탕으로 새로운 '행동 (3)'을 창조하며, 하늘과 땅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우주적 존재로 격상시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피조물 중 하나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늘의 '정신 (性)'과 땅의 '생명 (命)'을 온전히 물려받아, 이 둘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이 사상은 경전의 후반부에 이르러 "인중천지일 (人中天地一)"이라는 가장 빛나는 통찰로 그 정점에 도달합니다.


"인중천지일 (人中天地一)", 이 다섯 글자는 『천부경』 철학의 모든 것이며, '하나됨'의 철학이 이룬 가장 장엄한 선언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 (人) 가운데 (中) 하늘과 땅과 (天地) 그 근원인 하나 (一)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밖에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아래로' 땅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저 광활한 하늘 (天)과 이 드넓은 땅 (地), 그리고 그 둘을 포함한 우주 만물의 '근원인 하나 (一)'가, 지금 바로 '나 (人)'의 '안 (中)'에 온전히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인 전환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 거대한 우주 속의 한 점 먼지처럼, 작고 유한하며 고립된 존재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르네 데카르트 이래로 서구 근대성이 겪어온 '주체의 고립'입니다. 하지만 『천부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나'는 우주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 전체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나'는 우주의 축소판 (Microcosm)인 동시에, 우주 그 자체 (Macrocosm)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 해답은 우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다시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근원은 '다함이 없는 무 (無盡本)'입니다. 그리고 이 '무 (無)'에서 '하나 (一)'가 나와 '하늘, 땅,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과 사람은 그 뿌리가 '하나'이며, 그 본질이 '무 (無)'라는 점에서 완전히 같습니다. '나'의 마음 (心)의 가장 깊은 본성은 하늘의 본성 (天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몸을 이루는 물질은 저 대지 (地)를 이룬 물질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천부경』은 이어서 "일종무종일 (一終無終一)"이라고 말하며 이 우주적 순환을 마무리합니다. "하나 (一)가 끝나지만 (終), 끝남이 없는 하나 (無終一)로 돌아간다." '하나 (一)'로 시작되었던 이 현상 세계는 언젠가 그 끝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삶도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 '끝 (終)'은 완전한 '소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시작 없는 시작 (無始一)'이었던 우리의 본래 근원, 즉 '끝없는 (無終)' '하나 (一)', '무 (無)'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존재는 '무 (無)'에서 '유 (有)'로 왔다가, 다시 '무 (無)'로 돌아가는 거대한 순환입니다.


이 『천부경』의 가르침이 오늘날 '갇힌 세계' 속에서 고립되고 '뿌리뽑힌' 현대인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우리의 존재를 뒤흔들 만큼 강력합니다.


첫째, 우리는 '비움 (無)'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소유양식 (Having mode)'에 지배당하며, 끊임없이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일정으로 채우고, 우리의 마음을 지식으로 채우며, 우리의 집을 물건으로 채워야만 안심합니다. '비어있음'은 우리에게 '실패'나 '공허함'을 의미하며,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천부경』은 그 '비움 (無)'이야말로 우리의 '다함 없는 근원 (無盡本)'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뿌리는 '채워진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는 자아의 주장을 '비워낼' 때, 우리는 불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르지 않는 창조의 근원과 다시 '연결'됩니다.


둘째,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작고 고립된 존재로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는 이기심의 감옥에 갇혀, 타인과 세상을 '나'와 분리된 대상으로만 봅니다. 이 분리감이 우리의 모든 고통과 경쟁의 뿌리입니다. 하지만 "인중천지일 (人中天地一)"의 가르침은, 그 '나'라는 감옥의 벽이 본래부터 환상이었음을 일깨워줍니다. '나'의 안에는 이미 하늘과 땅, 즉 우주 전체가 '하나'로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비움'을 실천하여 '나'라는 생각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됨'을 체험합니다. 내 안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저 밖의 자연과 타인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합니다.


이 '하나됨'의 자각은, 모든 위대한 지혜가 만나는 궁극의 자리입니다. 예를 들어, '색즉시공 (色卽是空)'의 '공 (空)'을 온전히 깨닫게 되면, '나'와 '너'를 가르던 단단한 경계가 본래부터 환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자비 (慈悲)'는 억지로 노력해야 하는 덕목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유일한 진실이 됩니다.


또한, 신의 '케노시스 (Kenosis)', 즉 '자기 비움'의 사랑을 깊이 받아들인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영혼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장 39절)는 예수님의 최고 가르침을 비로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나'와 '너'가 본래 '하나'라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천부경』이 가르쳐준 '인중천지일 (人中天地一)'의 원리를 깨달은 존재에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弘益人間)'의 이념은 더 이상 억지로 수행해야 하는 '윤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와 '너'가 본래 '하나'임을 아는 존재가 살아가는 유일하고도 '자연 (自然)'스러운 삶의 방식이 됩니다. 『천부경』은 우리에게, '나'를 비우고,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우주'를 깨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5.2. 천지인 삼재사상: 조화와 균형



우리가 앞서 『천부경, 天符經』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하늘과 땅, 즉 우주 전체를 그 안에 품고 있음 (人中天地一, 인중천지일)을 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그 깨달음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됨'의 진리를 아는 것과, 그 '하나됨'을 살아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한민족의 사상적 뿌리에는 이 '하나됨'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위대한 대답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지인 삼재사상 (天地人 三才思想)'입니다. 이 사상은 '하늘 (天)'과 '땅 (地)', 그리고 '사람 (人)'을 우주를 구성하는 '세 가지 근본 (三才, 삼재)'으로 보며, 이 셋의 '조화와 균형'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천지인'은 단순히 하늘, 땅, 사람이라는 세 가지 사물을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가 작동하는 세 가지 역동적인 원리입니다.


'천 (天)', 즉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치 (理)'와 '원리'를 상징합니다. 하늘은 만물이 따라야 할 '법칙'이자, 생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입니다. 그것은 '비움 (無)'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낳는 창조의 근원입니다.


'지 (地)', 즉 땅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기운 (氣)'을 상징합니다. 땅은 하늘의 보이지 않는 이치를 받아 안아, 구체적인 생명체와 만물을 길러내는 '현실'의 무대입니다.


그렇다면 '인 (人)', 즉 사람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하늘의 '이치 (理)'를 자신의 '본성 (性)'으로 물려받고, 땅의 '기운 (氣)'을 자신의 '육체 (形)'로 물려받은 유일한 존재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철학의 가장 위대하고도 치열한 질문이 시작됩니다. 즉, '사람' 안에서 하늘의 순수한 '이 (理)'와 땅의 역동적인 '기 (氣)'는 과연 어떻게 관계 맺고 작동하는가. 조선 시대의 두 거목인 퇴계 이황 (退溪 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 (栗谷 李珥, 1536-1584)가 평생을 바쳐 씨름한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퇴계 이황은 '이 (理)', 즉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순수한 '도덕적 본성'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주리론, 主理論). 그는 '이 (理)'가 '기 (氣)'보다 더 근본적이고 존귀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理)'가 드러나는 순수한 마음 (四端, 사단)과, '기 (氣)'에 섞여 나오는 감정 (七情, 칠정)을 구분하려 했습니다. 이는 어떻게든 이 혼탁한 '기 (氣)'의 세계 속에서, '이 (理)'라는 하늘의 순수성을 지켜내려는 치열한 노력이었습니다.


반면에 율곡 이이는 '이 (理)'와 '기 (氣)'는 단 한 순간도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主氣論, 주기론). 그는 '이 (理)'가 스스로 움직이는 힘이 없으며, 오직 '기(氣)'라는 현실의 에너지를 통해서만 그 원리가 드러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理)'는 '타는 것 (원리)'이고 '기 (氣)'는 '타고 가는 것 (에너지)'과 같아서, '기 (氣)'가 움직이지 않으면 '이 (理)'도 드러날 방법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이들의 논쟁은 지극히 복잡하지만, 그 바탕에 깔린 대전제는 놀랍도록 동일합니다. 두 사상가 모두 '사람 (人)'이 하늘 (天)의 이치와 땅 (地)의 기운을 이어받은 '우주적 존재'라는 '천지인' 사상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고민은 '어떻게' 그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가장 잘 실현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늘의 이치를 품고 땅의 기운을 조화시키는 존재라면, 그에게는 거룩한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서, 이 둘을 '연결'하고 '조화'시키는 중재자입니다. 하늘은 뜻 (理)을 품지만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땅은 만물 (氣)을 낳지만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하늘의 뜻을 깨달아, 이 땅 위에서 그 뜻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지인'이 이루는 '삼위일체 (三位一體)', 즉 '하나됨'의 역동적인 모습입니다.


인간이 이처럼 하늘과 땅을 잇는 거룩한 존재라면, 그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가르침은 그 목적을 '홍익인간 (弘益人間)'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착한 일을 하라는 윤리적인 권고가 아닙니다. 이 가르침은 '나'와 '너'가 본래 '하나'라는 '천지인'의 진리에 뿌리를 둡니다. 나의 근원이 하늘과 땅에 있듯이, 내 앞의 타인의 근원 또한 하늘과 땅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기운을 나누어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우리'가 속한 이 세계 전체의 조화를 회복하는 길이 됩니다. '비움'을 통해 '나'라는 에고의 감옥을 벗어난 존재에게, '홍익인간'은 의무가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하나됨'의 실천입니다.


그렇다면, 이 '홍익인간'이라는 거룩한 이념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야 합니까.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대답이 바로 '재세이화 (在世理化)'입니다. 이 네 글자에는 우리가 어떻게 '비움'과 '하나됨'을 일상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재세'와 '이화'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재세 (在世)'입니다. 글자 그대로 "세상 (世)에 있는다 (在)"는 뜻입니다. 이것은 '비움'과 '깨달음'의 목적지에 대한 아주 중요한 선언입니다. 많은 종교나 철학은, 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현실 세계'를 벗어나, 저 멀리 산속이나 수도원, 혹은 '저세상'에서 홀로 완벽한 안식을 얻는 것 (出世間, 출세간)을 궁극의 목표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재세'의 가르침은 정반대의 길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삶의 현장'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야말로 우리가 '하나됨'을 실현해야 할 유일한 무대입니다. 진리는 책상 위나 산꼭대기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 있습니다. '재세'는 이처럼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그 한복판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서야 한다는 '현실 참여'의 원칙입니다.


두 번째는 '이화 (理化)'입니다. 이것은 세상 속에 머물면서 (재세)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치 (理)로써 교화 (化)한다"는 뜻입니다. 이 또한 '이치'와 '교화'로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치 (理)'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의 원리, 즉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천지인 (天地人)이 본래 하나'라는 우주의 근본 진리입니다. '나'와 '너',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하나됨'의 깨달음입니다.


'교화 (化)'는 이 '이치'를 세상에 펴는 '방식'입니다. 이 '교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힘이나 권력으로 상대를 억누르거나, 법과 제도로 통제하거나, 논쟁으로 이겨서 굴복시키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러한 강제적인 방식은 또 다른 '분리'와 '갈등'을 낳을 뿐입니다.


'이화'의 '화 (化)'는 '스스로 그러하게 (自然, 자연)'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내가 먼저' 그 '이치'를 온몸으로 '살아냄'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내가 먼저 '나'를 비우고, 내 앞의 타인을 '하나'로 대하며 '홍익'을 실천합니다. 그러면 나의 그 '조화로운' 삶의 방식이, 마치 등불이 어둠을 스스로 물리치듯이, 혹은 따뜻한 봄기운이 얼어붙은 강을 저절로 녹이듯이, 주변으로 퍼져나갑니다. 나의 '삶' 자체가 '이치'의 증거가 되어, 사람들이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감화되어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재세이화'는, 세상을 떠나지 않고 (재세), 세상 속에서 '하나됨'의 진리 (이치)를 내가 먼저 살아냄으로써 (이화), 그 조화의 힘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연결'의 방법론입니다.


이 '천지인 삼재사상'의 또 다른 위대함은, 그것이 수천 년 전에 완성된 고대의 지혜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가장 절박한 위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는 데 있습니다. 서구 근대 문명은 르네 데카르트 이래로 '주체 (인간)'와 '객체 (자연)'를 분리했습니다. 이 '분리의 철학'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선언과 만나,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해야 할 '자원'으로만 여기게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땅 (地)'과의 연결이 끊어진 '뿌리뽑힌 (déraciné)' 존재가 되었고, 오늘날의 심각한 '생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생태학이 발견한 가장 혁명적인 이론이 '천지인'의 지혜와 깊은 '공명 (共鳴)'을 일으킵니다. 1970년대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 (James Lovelock, 1919-2022)은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 (Lynn Margulis, 1938-2011)와 함께 '가이아 이론 (Gaia hypothesis)'을 제시했습니다. 이 이론은 지구가 단순히 생명체가 '살고 있는'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지구의 대기, 바다, 지각, 그리고 생물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스스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조건을 조절하고 유지하는 '살아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가이아 (Gai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가이아 이론'은 우리의 '천지인' 사상이 수천 년 전에 깨달았던 '땅 (地)의 신성 (神性)'을 서구 과학이 뒤늦게 재발견한 사건입니다. '땅'은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거대한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겪는 생태 위기는, 바로 '사람 (人)'이 이 '땅 (地)'과의 조화를 잊고, '하늘 (天)'의 이치를 거슬러 폭주한 결과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천지인 삼재사상'이 주는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조화와 균형'을 회복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사람 (人)'의 능력만을 극단적으로 팽창시킨 채, '하늘 (天)'의 이치 (의미와 목적)를 잊었고, '땅 (地)'의 생명 (자연과 공동체)을 파괴했습니다.


'비움'이란 바로 이처럼 비대해진 '사람'의 오만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결'이란, '하늘'의 이치를 다시 경청하고, '땅'의 고통에 다시 접속하는 것입니다. '홍익인간'은 더 이상 '인간'만을 이롭게 하는 이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가이아'라는 거대한 생명체 전체, 즉 '천지인' 모두를 이롭게 하는 '우주적 조화'의 실현이 되어야 합니다.






2-5.3. 장자의 소요유 (逍遙遊): 완전한 자유



우리가 '비움'의 지혜를 따라 걷는 길은, 중국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 장자 (莊子, Zhuangzi, 약 BC 369-286)에 이르러 가장 기이하고도 자유로운 풍경을 마주합니다. 우리가 앞서 만난 노자 (老子)가 '무 (無)'와 '도 (道)'의 쓸모 (텅 빈 그릇의 쓸모)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를 가르쳤다면, 장자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쓸모' 그 자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장자는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기준과 관념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꿈꾸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이 '갇힌 세계'의 벽 자체를 무너뜨리고, 그 너머에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노니는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의 이름이 바로, 그의 책 『장자, 莊子』의 첫 번째 장을 여는 '소요유 (逍遙遊)'입니다.


장자는 이 '소요유'의 이야기를 '크기'의 비교라는 충격적인 비유로 시작합니다. 그는 북쪽 바다 (北冥, 북명)에 '곤 (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산다고 말합니다. 그 크기가 몇천 리에 이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곤이 변하여 '붕 (鵬)'이라는 거대한 새가 되는데, 그 등 넓이 또한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대붕 (大鵬)'이 한번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을 가득 덮은 구름과 같습니다. 대붕은 남쪽 바다 (南冥, 남명)로 날아가기 위해, 바다의 기운이 움직여 생기는 거대한 바람을 타고 구만 리 상공으로 솟아오릅니다.


이 장엄한 비상의 풍경 아래에서, 작은 새 (메추라기)와 쓰르라미가 그를 비웃습니다. "우리는 힘껏 날아봐야 느릅나무 가지에 겨우 오르는데, 어째서 저자는 구만 리 상공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간단 말인가." 이것은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 (大小之辨, 대소지변)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며, 좁은 시야에 갇힌 메추라기처럼 살지 말고, 대붕처럼 원대한 뜻을 품어야 한다고 쉽게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장자 (莊子)의 뜻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장자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 '대붕'조차도 아직 '완전한 자유'에 이르지 못했음을 꿰뚫어 봅니다.


왜 대붕은 자유롭지 못합니까. 그는 날기 위해서 '의지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홉 길이나 되는 두꺼운 '바람 (風)'과, 하늘의 '푸른빛 (蒼蒼, 창창)'과, 거대한 '바다의 움직임 (海運, 해운)'에 '의존 (待, 대)'해야만 비로소 날 수 있습니다. 메추라기는 작은 것에 의존하고, 대붕은 큰 것에 의존할 뿐,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상대적인 자유' 속에 갇혀있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완전한 자유'는 이와 다릅니다. "천지의 올바름 (자연의 법칙)을 타고, 여섯 기운 (六氣, 육기)의 변화를 부리며, '무한 (無限)'에 노니는 자"는,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인 '소요유 (逍遙遊)'는, 대붕처럼 '무엇인가에 의지하는 자유 (有待, 유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인 '도 (道)' 그 자체와 하나가 되어,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자유 (無待, 무대)'입니다.


그렇다면 대붕은 왜 이 '의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그가 거대한 바람에 의지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나는 크다'는 '생각' 자체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크다'는 대붕의 자의식은, '너는 작다'는 메추라기를 '분별 (分別)'할 때만 성립합니다. 이처럼 '크다'고 여기는 마음은, '작다'고 여기는 마음과 동전의 양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분별'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큰 것'과 '작은 것', '유용한 것'과 '쓸모없는 것', '옳은 것 (是, 시)'과 '그른 것 (非, 비)'을 나눕니다. 그리고 우리는 '큰 것', '유용한 것', '옳은 것'을 좇아 평생을 달려갑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대붕처럼, 자신이 '옳다'거나 '유용하다'고 믿는 그 '무엇'에 기대고 의지해야만 하는 '상대적인' 자유 속에 갇혀있습니다.


장자의 철학적 핵심은 바로 그의 책 『장자, 莊子』의 「제물론, 齊物論」 편에 담겨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바로 이 '분별'의 감옥, 즉 '의지'의 쇠사슬을 부수는 망치입니다. '제물론'이란 글자 그대로 "만물 (物)을 가지런하게 (齊) 본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크다'와 '작다', '옳다'와 '그르다'는 모든 이분법적 가치 판단을 멈추고, 만물을 '하나'로 바라보라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장자는 우리가 '나 (我)'라는 '작은 마음 (成心, 성심)', 즉 '에고'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모든 '분별'이 생겨난다고 보았습니다. '나'의 관점에서는 '옳음'과 '그름'이 하늘과 땅처럼 명확하게 나뉩니다. 하지만 우주의 근원인 '도 (道)'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모든 구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도 (道)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에는 귀하고 천함이 없다." 아름다운 여인 모장 (毛嬙)과 여희 (麗姬)는 사람이 보기에 미인이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속 깊이 숨어버리고, 새는 하늘 높이 날아 도망가 버립니다. 과연 무엇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입니까. '옳음'과 '그름'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고 싸우지만, 그것은 단지 각자의 '에고'가 만들어낸 '관점'의 차이일 뿐, '도'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바람 소리처럼 그저 '하나'일 뿐입니다. '제물론'은 이 모든 '분별'을 멈추고, '나'라는 에고의 시선을 비워내어, 만물을 '하나'로 바라보는 '도의 눈'을 회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분별 (分別)'하는 지혜를 숭배합니다. 하지만 장자 (莊子)는 이 '인위적인 지혜 (有爲, 유위)'가 오히려 생명을 죽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이 섬뜩한 진실을 그의 책 『장자, 莊子』의 「응제왕, 應帝王」 편에 나오는 '혼돈의 죽음'이라는 우화 (寓話)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 우화에는 세 명의 제왕이 등장합니다. 남쪽 바다의 제왕은 '숙 (倏)'이었고, 북쪽 바다의 제왕은 '홀 (忽)'이었으며, 중앙의 제왕은 '혼돈 (渾沌)'이었습니다. '숙'과 '홀'은 '빠르다', '갑작스럽다'는 뜻으로, 재빠르게 세상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분별하는 지혜'와 '인위적인 행위'를 상징합니다. 반면 '혼돈'은 모든 것이 나뉘지 않고 뒤섞여 있는 '원초적인 전체성', 즉 '무위 (無爲)'와 '도 (道)'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혼돈'은 아주 친절하게도, '숙'과 '홀'이 자신의 땅에 찾아올 때마다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숙'과 '홀'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곱 개의 구멍 (눈, 코, 귀, 입)이 있어서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이 구멍이 없다. 우리가 그를 위해 구멍을 뚫어주자." 그래서 그들은 하루에 하나씩, 꼬박 칠 일에 걸쳐 '혼돈'에게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습니다. 하지만 칠 일이 지나고 일곱 번째 구멍이 뚫리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 우화는 '비움'의 철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경고입니다. '숙'과 '홀'은 '좋은 의도'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별하는 지혜'를 기준으로, 구멍이 없는 '혼돈'을 '불완전한 존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더 낫게' 만들어주기 위해, '인위적인 행위 (有爲, 유위)'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그 '분별'과 '인위'가, 본래 그 자체로 완전했던 '혼돈 (道, 도)'의 생명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분별'은 이처럼 '하나'로 살아 숨 쉬던 존재를 '여럿'으로 쪼개어 '죽이는' 칼날입니다.


이처럼 '분별하는 마음'과 '인위적인 나'를 '비워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장자는 '심재 (心齋)'와 '좌망 (坐忘)'을 제시합니다.


'심재'는 "마음의 재계" 또는 "마음을 굶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장자』의 「인간세, 人間世」 편에서, 공자 (孔子)가 그의 제자 안회 (顏回)에게 가르쳐주는 형식으로 등장합니다. 안회가 포악한 위나라 군주를 '인의 (仁義)'로써 바로잡겠다고 하자, 공자는 그 '인위적인' 방식이야말로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라고 말립니다. 그는 대신 '심재'를 하라고 가르칩니다.


공자는 말합니다. "너의 뜻을 하나로 모아라. 귀 (耳)로 듣지 말고, 마음 (心)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 (氣)로 들어라!" 이것이 '심재'의 단계입니다. '귀'로 듣는 것은 외부의 소리 (분별)를 듣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듣는 것은 그 소리를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 (氣)'로 듣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기'는 '텅 비어 (虛, 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순수한 '비움'의 상태입니다. '심재'란, '나'의 모든 지식, 편견, 판단, 그리고 '무언가를 하겠다'는 목적의식마저 텅 비우고, 그저 '비움' 그 자체가 되어 상대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나'를 완전히 비울 때, '도'가 비로소 그 빈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심재'가 '마음'을 비우는 수련이라면, '좌망 (坐忘)'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잊는, 훨씬 더 급진적인 '비움'의 경지입니다. 『장자』의 「대종사, 大宗師」 편에서, 안회는 다시 공자에게 자신이 '진보'했다고 말합니다. 공자가 무엇이 진보했느냐고 묻자, 안회는 "저는 '인의 (仁義)'를 잊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공자는 "좋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안회가 다시 "저는 '예악 (禮樂)'을 잊었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마침내 안회가 다시 찾아와 말합니다. "저는 '좌망'하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놀라 "좌망이 무엇이냐?"고 묻자, 안회는 이렇게 답합니다. "팔다리와 몸뚱이를 내려놓고 (墮肢體, 타지체), 총명한 지각을 물리치며 (黜聰明, 출총명), 형체를 떠나고 (離形, 이형) 지식을 버려서 (去知, 거지), 저 '위대한 통함 (大道, 대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同於大通, 동어대통)." '좌망'은 '앉아서 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나'의 몸, '나'의 감각, '나'의 지식, 즉 '나'라고 규정했던 모든 '분별'을 잊어버리고, '나'라는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잊을 때, '나'와 '세계'의 구별 (제물론)이 사라지고, 비로소 '도'와 '하나'가 되어 '소요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장자의 이 가르침은, 오늘날 '갇힌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그가 경고했던 모든 감옥에 갇힌 모습임을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대붕 (大鵬)'이 되기 위해, 즉 '성공'이라는 '큰 것'을 좇아 평생을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소요유의 부재). 우리는 「제물론, 齊物論」의 지혜를 잃고, 소셜 미디어와 이념의 전쟁터에서 '옳음'과 '그름'을 나누며 (분별) 서로를 적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혼돈 (渾沌)'의 죽음을 매일같이 목격합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호기심'을 '성적'이라는 '분별의 구멍'으로 질식시키고, 자연의 '온전함'을 '개발'이라는 '인위의 구멍'으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첫 번째 가르침은, '쓸모 있음 (有用, 유용)'의 감옥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대붕'이 되기를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장자는 오히려 '쓸모없음의 쓸모 (無用之用, 무용지용)'를 말합니다. 아무 쓸모가 없기에 베어지지 않고 수천 년을 살아남은 거대한 '쓸모없는 나무'처럼, 세상의 '쓸모 (분별)'라는 기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나'의 온전한 생명을 누리는 '완전한 자유 (소요유)'가 시작됩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분별'을 멈추고 '비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릿속은 너무나 많은 '정보'와 '판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심재 (心齋)'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생각'으로 듣지 말고, '텅 빈 마음 (氣)'으로 들으라고 말합니다. 타인의 말을 판단하기 전에, 그 존재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깊은 경청'을 회복하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좌망 (坐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나'를 잊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나'라는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오히려 그 '나'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잊고 '앉아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고, 그저 '도'의 흐름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나'라는 가장 무거운 짐을 비워내고, '완전한 자유' 속에서 비로소 '소요'할 수 있게 됩니다.





2-5.4. 무용지용 (無用之用): 쓸모없음의 쓸모



우리는 '효율성'과 '쓸모'를 신처럼 숭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갇힌 세계'의 법칙은 명확합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이 가진 '유용성 (有用性)'으로 그 가치가 매겨집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적 자원'이라 부르고, 우리의 시간은 '성과'로 환산되어야만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소유양식 (Having mode)'에 갇혀, 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이 거대한 '쓸모'의 감옥 속에서, '쓸모없음 (無用, 무용)'은 곧 '실패'이자 '낙오'를 의미하는 가장 끔찍한 저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움의 철학'은 이 가치관을 가장 근본적인 지점에서 뒤집어엎습니다. 중국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 장자 (莊子)는, 우리가 그토록 경멸하는 '쓸모없음' 속에 오히려 가장 위대한 '쓸모', 즉 '무용지용 (無用之用)'이 숨어있다고 선언합니다. 장자의 지혜는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닦달하는 이 세계의 폭력적인 논리로부터 벗어나,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회복하는 해방의 길을 열어줍니다.


이 위대한 통찰은, 그의 책 『장자』의 여러 우화 (寓話)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중 「인간세, 人間世」 편에 등장하는 '쓸모없는 나무 (산목, 散木)' 이야기는 이 사상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목수 장석 (匠石)이 그의 제자와 길을 가다가, 마을의 사당에 서 있는 거대하고 신성한 상수리나무를 보게 됩니다. 그 나무는 너무나 거대해서, 그 그림자만으로도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정도였습니다. 제자는 그 엄청난 크기에 감탄하지만, 스승인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칩니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묻자, 장석은 경멸하며 대답합니다. "저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산목 (散木)'이다. 저 나무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을 것이고, 관을 만들면 금방 썩을 것이며, 그릇을 만들면 깨질 것이고, 문을 만들면 진액이 흘러나올 것이다. 저것은 아무 데에도 쓸모가 없기에, 저토록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뿐이다."


그날 밤, 장석이 잠자리에 들자 그 '쓸모없는 나무'가 꿈에 나타나 그를 호되게 꾸짖습니다. 나무는 말합니다. "너는 나를 저 '쓸모 있는' 나무들과 비교하는가? 배나무, 유자나무, 귤나무 같은 과일나무들은, 그 열매가 '쓸모가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가지가 꺾이며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계수나무나 옻나무는 '쓸모 있는' 목재이기에 인간들의 도끼에 베어진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자신의 '쓸모'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고 있다." 그리고 나무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집니다. "나는 오랫동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는 것'을 추구해왔다. 나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만, 이제야 그것을 이루었다. 내가 만약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처럼 거대하게 자라날 수 있었겠는가. 너와 같은 '쓸모 있는' 인간이, '쓸모없는' 나무의 '위대한 쓸모 (大用, 대용)'를 어찌 알겠는가."


장자는 「소요유, 逍遙遊」 편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음 (有用, 유용)'의 쓸모는 알지만, 정작 '쓸모없음 (無用, 무용)'의 쓸모 (無用之用)를 알지 못한다"고 탄식합니다. 또한 「인간세」 편에 등장하는 '지리소 (支離疏)'라는 인물은, 몸이 뒤틀리고 곱사병이 든 '병든 사람'입니다. 그는 턱이 배꼽에 파묻혀 있고, 어깨는 머리보다 높이 솟아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쓸모'라는 기준에서 보면 가장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쓸모없음' 때문에, 그는 국가의 부름 (징병)을 받아 전쟁터에 끌려가 죽을 일이 없습니다. 큰 공사를 하는 부역에도 동원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나라에서 주는 장애인 구휼미를 받으며, 자신의 '천수 (天壽)'를 온전히 누리다 평화롭게 죽습니다. 반면에 '쓸모 있는' 건장한 장정들은 전쟁터와 공사판에서 비참하게 죽어갑니다.


장자가 보여주는 이 '쓸모없음의 지혜'는, 단순히 게으름을 피우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규정한 '효용성 너머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라는 근본적인 요청입니다. 사회가 정한 '쓸모'의 기준은 너무나 좁고 폭력적입니다.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본성 (性)을 베어내고, 자신의 온전한 생명 (命)을 깎아냅니다. 장자는 이 '쓸모'라는 굴레야말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가장 무서운 감옥이라고 보았습니다. '무용지용'은 이 감옥에서 벗어나, '쓸모'에 봉사하는 삶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살아내는 삶을 회복하라는 외침입니다.


이처럼 '쓸모'라는 폭력적인 잣대로 존재를 재단하는 현대 문명의 병리 (病理)는,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이르러 더욱 깊이 있게 분석됩니다. 하이데거는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에서,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두 가지 방식을 구분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방식을 '세계-내-존재 (In-der-Welt-sein, 세계-안에-있음)'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인간이,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처럼 세계 '바깥에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세계 안에' 깊이 '거주하며' 목적을 가지고 관계 맺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우리가 '세계 안에 거주할' 때, 사물을 만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방식, 그리고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 방식은 사물이 '손안의 존재 (Zuhandenheit)'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손안의 존재'란 '사용할 준비가 되어 손안에 있음', 즉 '쓸모'를 지닌 '도구 (Zeug)'로서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가 망치를 사용하여 못을 박을 때, 우리는 망치를 "나무 자루와 쇠 머리로 이루어진 물체"라고 '분석'하지 않습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것'이라는 '쓸모' 그 자체입니다. 망치는 자신의 '사물성'을 거두어들이고, 우리 손의 일부처럼 사라지며 '못 박기'라는 우리의 행위 속에 완벽하게 녹아듭니다. 이처럼 '손안의 존재'는, 우리가 '세계-내-존재'로서 세상에 몰입하여 살아갈 때, 사물들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본래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방식은 사물이 '눈앞의 존재 (Vorhandenheit)'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도구'와의 일상적인 관계가 '깨졌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파생적인 존재 방식입니다. 만약 망치가 부러지면 어떻게 됩니까. 망치는 더 이상 '못 박기'라는 '쓸모 (손안의 존재)'를 상실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손의 일부였던 망치는 우리의 몰입에서 떨어져 나와, 저 '눈앞에' 놓인 낯선 '사물'이 됩니다. 우리는 비로소 그 부러진 망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나무 자루가 부러졌군"이라고 그 속성을 '분석'하고 '판단'합니다.


하이데거가 두려워한 것은, 서구 근대 과학과 기술 문명이 이 세상 모든 존재를 오직 '눈앞의 존재'로만 전락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 세계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방식 (Vorhandenheit)이, '거주'하고 '사용'하는 우리의 본래적인 관계 방식 (Zuhandenheit)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숲 '안에서'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 (세계-내-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숲 '바깥에서' 나무를 '목재'라는 '사물 (눈앞의 존재)'로만 '분석'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장자 (莊子)의 우화에 등장하는 '목수 장석'이 바로 이 '눈앞의 존재'로 세상을 보는 자입니다. 그는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자신과 함께 '세계 안에 거주하는' 신성한 생명체로 만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나무를 '목재'라는 '사물'로 분석하고, "쓸모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하이데거는 훗날, 이 '쓸모'의 논리가 현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방식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이 거대한 시스템의 본질을 '게슈텔 (Ge-stell)'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틀어세움' 또는 '닦달'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게슈텔'은 세상을 바라보는 특정한 '안경'과 같습니다. 우리가 '현대 기술'이라는 이 안경을 쓰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쓸모 있는 자원'으로만 보이게 됩니다. 이 시스템은 세상 만물을 '쓸모'라는 정해진 틀 (Ge-) 안에 가두어 세우고 (stell-), 그것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뽑아내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닦달'합니다.


이 '게슈텔'의 안경을 통해 본 세상은 어떤 모습입니까. 강 (江)은 더 이상 아름답게 흐르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수력 발전을 위한 에너지 자원'일 뿐입니다. 숲은 더 이상 나무와 새들이 살아가는 집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재 펄프를 생산하는 자원'에 불과합니다. 이 시스템은 심지어 사람마저도 '인적 자원 (human resource)'이라는 '쓸모'로 바라봅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쓸모'로 환원된 모든 존재를 '부품 (Bestand, 베슈탄트)'이라고 불렀습니다. '베슈탄트'는 본래 창고에 쌓여있는 '재고품' 또는 '비축된 자원'을 의미합니다. 이 '게슈텔'의 세계에서, 강과 숲과 인간은 모두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부품'이나 '자원'이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자 (莊子)의 '쓸모없는 나무'가 위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다시 빛을 발합니다.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목수 장석'은 바로 이 '게슈텔'의 안경을 쓴 사람입니다. 그는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보았지만, '쓸모'라는 틀로만 그것을 '닦달'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그 나무가 '목재'라는 '부품 (베슈탄트)'이 될 수 없었기에, '쓸모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산목 (散木)'은 바로 그 '쓸모없음'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그 나무는 스스로 '부품'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나무는 목수의 '쓸모'라는 틀 안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온전히 지켜냈습니다. 장자가 말한 '무용지용 (無用之用)'은, 이처럼 모든 것을 '자원'으로만 바라보는 기술 문명의 폭력성으로부터, '효용성 너머의 존재 가치'를 구출해내는 위대한 생태학적 지혜입니다.


이 '쓸모'의 횡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에 이르러 더욱 급진적인 '비움'의 철학으로 나아갑니다. 아감벤은 서양 문명 전체가 '목적 (telos)'과 '수단 (means)'이라는 이분법에 갇혀있다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모든 행위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공부는 '성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고, 노동은 '돈'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삶은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이 '목적'의 논리야말로, 모든 것을 '쓸모'로 환원하는 '게슈텔'의 엔진입니다.


아감벤은 이 '목적'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활성화 (inoperativity, 또는 無爲, 무위)'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비활성화 (inoperosità)'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작동하던 기계를 의식적으로 '멈추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쓸모'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실천입니다.


이 '비활성화'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목적 없는 수단 (means without an end)'이라는 놀라운 자유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악수'를 할 때, 그 행위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악수는 그 자체로 완전한 '행위 (gesture)'입니다. 우리가 '놀이 (play)'를 할 때, 그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놀이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놀이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아감벤에게 '비활성화'란, 이처럼 '쓸모'와 '목적'의 사슬에 묶여 있던 우리의 삶을 '해방'시켜, '놀이'와 '향유'의 대상으로 되돌려주는 '속화 (profanation)'의 과정입니다. 여기서 '속화'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 용어는 '신성화 (sacralization)'의 반대 행위를 뜻합니다. 본래 '신성한 것'이란, '인간의 일상적인 사용'으로부터 엄격하게 '분리'되어 신이나 권력에 바쳐진 것을 의미합니다. 아감벤은 현대 자본주의와 기술 문명 (하이데거의 '게슈텔')이 우리의 삶 자체를 '신성화'한다고 비판합니다. 즉, '노동', '언어', '예술', 심지어 '삶'마저도 '이윤'이나 '효율성', '성과'라는 초월적인 '목적'에 바쳐진 대상으로 만들어, 우리가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하거나 '가지고 놀지' 못하게 분리시켰다는 것입니다.


'속화 (profanation)'란, 바로 이처럼 '목적'의 논리에 사로잡혀 '분리'된 것들을, 그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쓸모'에 봉사하던 것들을 다시 '인간의 자유로운 사용'과 '놀이'의 영역으로 되돌려놓는 실천입니다. '비활성화'가 '속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라면, '속화'는 '쓸모'의 감옥에서 벗어나 '목적 없는 수단'을 되찾는 해방의 행위 그 자체입니다.


'목적 없는 수단'이란, 더 이상 '쓸모'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존재 그 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순수하게 누리는 상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장자가 '무용지용'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완전한 자유 (逍遙遊, 소요유)'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닙니까. 장자의 '쓸모없는 나무'는 목재라는 '목적'에서 '비활성화'되었습니다. 그 나무는 '쓸모 있는 수단'이기를 멈추고, 비로소 '목적 없는 존재' 그 자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립니다. 『장자』의 「인간세, 人間世」 편에 등장하는 지리소 (支離疏)는 '병사'나 '노동자'라는 '목적'에서 '비활성화'되었기에,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무용지용'의 가르침은, '쓸모'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닦달하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비움'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과 사회 (Achievement Society)'의 압박 속에서, '쓸모 있는 나'를 증명하기 위해 소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낭비'라고 여기며 불안해합니다.


장자의 지혜는 우리에게 '쓸모없어질 용기'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쓸모'라는 사회적 기준을 비워내고, '효용성 너머의 존재 가치'를 회복하라는 초대입니다. 아감벤의 말처럼,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삶을 '비활성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한 모든 '목적'을 비워내고, 그저 '목적 없이' 존재하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해야 합니다.


'쓸모없음의 쓸모'는, '쓸모'의 감옥에서 벗어난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쓸모', 즉 자신의 온전한 생명을 자유롭게 누리는 '소요유'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비움의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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