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갇힌 세계' 속에서 느끼는 가장 근본적인 고통은 '고립'입니다. '나'는 이 세계와 분리되어 있으며, '타인'은 '나'와 다른 존재라는 감각입니다. 우리는 이 '분리'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2천여 년 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은 이 '고립감'이야말로 인간이 겪는 가장 큰 '무지 (無知)'이자 '환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스토아 학파 (Stoicism)'가 제시한 '연결의 철학'은, 이 우주 전체가 분리된 개별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라는 경이로운 통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장엄한 세계관의 바탕에는 '로고스 (Logo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로고스'는 '말', '이성', '법칙' 등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입니다. 스토아 학파에게 '로고스'는 이 우주를 관통하며 운행하는 '신적인 이성 (Divine Reason)'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우주가 결코 맹목적인 우연이나 혼돈으로 움직인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우주는 '로고스'라는 완벽하고 합리적인 '신의 섭리 (Providence)'에 의해, 가장 질서정연하게 작동하는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이 '로고스'는 저 하늘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닙니다. '로고스'는 '신 (God)', '자연 (Nature)', '운명 (Fate)'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이 세계 '안에' 내재하는 법칙 그 자체입니다.
스토아 철학의 위대한 점은, 이 '로고스 (Logos)'를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이나 '법칙'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고스'가 '물질적' 실체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프네우마 (Pneuma)'입니다. '프네우마'는 '숨결' 또는 '따뜻한 공기'를 의미합니다. 스토아 학파는 이 '프네우마'가 '신적인 불 (fiery breath)'로서, 우주 만물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모든 것을 '연결'하고 '살아있게' 만드는 매개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고스'가 우주의 '운영체제 (소프트웨어)'라면, '프네우마'는 그 소프트웨어가 흐르는 '물리적인 네트워크 (하드웨어)'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토아의 '프네우마'는 영지주의 (Gnosticism)의 '프네우마'와 근본적으로 구별됩니다. 영지주의의 '프네우마'는 선한 '플레로마 (Pleroma)'에서 추락하여, 악한 조물주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이 '물질 감옥 (Kenoma)'에 '유배되거나 갇혀버린' 신성의 '불꽃'입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프네우마'는 이 세계 (물질 감옥)를 '부정'하고 그곳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신성한 불꽃'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스토아의 '프네우마'는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갇힌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를 '구성하고 운행하는' 신성한 물질 그 자체입니다. 영지주의가 '물질'을 '악 (惡)'으로 본 것과 달리, 스토아 철학은 '물질 (프네우마)'을 '선한 신 (로고스)'의 몸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토아의 '프네우마'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연결'의 증거입니다.
이 '프네우마'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는 '신 (로고스)' 그 자체이며, 덜 순수한 형태로는 우리의 '영혼'이 되고, 가장 거친 형태로는 '물질'이 됩니다. 즉, '신'과 '인간'과 '돌멩이'는 모두 '같은 재료 (프네우마)'로 만들어져 있으며, 단지 그 '긴장의 정도'만 다를 뿐입니다. 이처럼 '정신'과 '물질'이 하나의 '프네우마'로 연결되어 있다는 '물활론적 일원론 (Vitalistic Monism)'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했던 데카르트의 이원론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이 두 가지 전제, 즉 '로고스 (Logos)'가 우주의 '정신'이고 '프네우마 (Pneuma)'가 만물을 잇는 '신경계'라는 생각은, 하나의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 결론은, 이 우주 전체가 분리된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 (organism)'라는 것입니다. '신'과 '인간'과 '돌멩이'는 모두 이 '한 몸'을 이루는 '각각의 지체 (limb)'와 같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처럼 우주 만물이 '하나의 유기체'로서 서로 '함께 느끼고 영향을 주고받는' 상태를 '심파테이아 (Sympatheia)', 즉 '우주적 교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함께 (Sym) 고통받거나 느낀다 (pathos)"는 뜻으로, '공감'을 의미합니다.
이 '우주적 교감'의 원리는, '나'의 행위가 결코 '나'에게서 끝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크리시포스 (Chrysippus, BC 279-206)는 거미줄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거미줄의 한쪽 끝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 '진동'은 거미줄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개인이 '로고스 (운명)'에 순응하며 행하는 '하나'의 덕스러운 행위는, '우주 전체'의 조화에 기여합니다.
이 '심파테이아 (Sympatheia)'의 사상을, 자신의 삶 속에서 가장 치열하게 실천했던 인물이 바로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그의 일기인 『명상록, Meditations』에는 '권력자'의 오만이 아니라,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의 '겸손'이 가득합니다. 그는 끊임없이 '심파테이아'를 묵상했습니다.
그는 "너 자신을 항상 '전체 (the Whole)'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라"고 썼습니다. 그에게 '전체'란 바로 '로고스 (Logos,)'가 다스리는 '우주'라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입니다. 그는 이 '하나의 몸' 안에서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명확히 인식했습니다.
그의 묵상은 구체적인 삶의 문제,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서 빛을 발합니다. 그는 황제로서 매일같이 자신을 비방하고, 속이며, 배신하고, 어리석게 구는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는 『명상록』에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오늘 나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 배은망덕한 자, 오만한 자, 기만적인 자, 질투하는 자, 비협조적인 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이것은 비관적인 체념이 아니라, '심파테이아'를 실천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묵상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악 (惡)'을 행하는 이유는, '참된 선 (善)과 악 (惡)'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 (ignorance)'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우주적 이성 (로고스)'을 깨닫지 못했기에, '하나의 유기체'로서 행동하는 법을 잊어버린 '병든 지체'일 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연결'의 진실을 끌어옵니다. "하지만 나는 '선'과 '악'의 본질 (로고스)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들과 '같은 신 (로고스)'의 일부를 나누어 가진 '친족'으로서,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해 (害)를 입을 수 없다." 왜냐하면 타인의 '무지'는 나의 '내면 (이성)'을 더럽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나는 나의 '친족'에게 화를 낼 수 없으며,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 우리는 '협력'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두 발, 두 손, 두 눈꺼풀처럼."
이에 따르면, '나'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거나 미워하는 행위는, '오른손'이 '왼손'을 자르는 것처럼 어리석고 '부자연스러운 (unnatural)' 행위입니다. '로고스'는 우리를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심파테이이아'의 묵상입니다. 그것은 '나'의 경계를 넘어 '우주 전체'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며, '타인'의 '악'조차도 '하나의 몸'이 겪는 '무지'로 껴안는 것입니다.
그가 남긴 "벌에게 이롭지 않은 것은 벌집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유명한 말은, 바로 이 치열한 '협력'의 윤리를 요약한 것입니다. '나 (벌)'의 행복과 '공동체 (벌집)'의 행복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연결'의 사상은 노예 출신의 철학자 에픽테토스 (Epictetus, 55-135)에게서, '우주적 시민'이라는 '코스모폴리타니즘 (Cosmopolitanism)'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그는 "만약 내가 아테네나 코린토스의 시민이었다면 나의 조국을 사랑했겠지만, 나는 '신 (로고스)'의 '시민'이므로 '우주'를 나의 조국으로 삼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에픽테토스는, '통제 가능한 것 (나의 내면)'과 '통제 불가능한 것 (외부 상황)'을 구분하여, '욕망'을 비워내는 ‘아파테이아 (Apatheia)’ 실천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비움'은 '고립'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연결'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나'라는 좁은 육체와 재산에 대한 '잘못된 판단 (집착)'을 '비워낼' 때, 비로소 '나는 우주의 시민이다'라는 더 '커다란 정체성'과 '연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나'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로고스'라는 신의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입니다. '아버지', '아들', '황제', '노예'라는 '역할'은 '운명 (로고스)'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우리의 '비움'은 그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이 '우주 전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그 '역할'을 '전체'의 조화 속에서 '가장 훌륭하게' 연기해내는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의 이 '심파테이아'의 가르침은, '분리'와 '고립'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근본적인 처방을 제시합니다.
첫째, 이 가르침은 '극단적 개인주의'의 환상을 깨뜨립니다. 우리는 '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이 별개라고 믿는 '갇힌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파테이아'는 '나'와 '너'가 '하나의 유기체'에 속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나'의 성공을 위해 '타인'을 짓밟는 행위는, 결국 '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 (벌집)'를 무너뜨려 '나'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둘째, '심파테이아'는 오늘날 우리가 겪는 '생태 위기'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윤리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르네 데카르트 이래로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 (객체)'으로만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자연 (땅, 강, 공기)'은 '나'와 분리된 '자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와 '같은 프네우마'를 공유하는, '나와 한 몸'인 '유기체'의 일부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나의 몸'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셋째, '심파테이아'는 '혐오'와 '분열'을 넘어설 수 있는 '연결'의 길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정치적 이념, 인종,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묵상은, 그들조차 '나와 한 몸의 지체'임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우주적 교감'은 '나'의 좁은 경계를 넘어, '인류 전체', 나아가 '우주 전체'를 '나의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우주적 시민의식'을 요구합니다. '비움'이 '나'의 잘못된 판단을 버리는 것이라면, '연결'은 그 '비워진' 자리에 '우주 전체'를 끌어안는 '사랑 (Agape, 아가페)'을 채우는 것입니다.
3-9.2. 스피노자: 신즉자연의 철학
'연결의 철학'은, 서구 정신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이단아이자 가장 급진적인 일원론자 (一元論者)인 바뤼흐 스피노자에 이르러 그 정점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갇힌 세계' 속에서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에는 '분리'가 있습니다. 르네 데카르트가 확립한 '정신 (생각하는 나)'과 '물질 (연장된 몸)'의 이원론 (二元論)은, '나'를 '세계'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또한, 유신론적 기독교 전통은 '창조주 (신)'를 '피조물 (자연)'로부터 분리시켜, 신을 저 하늘 너머의 초월적인 심판자로 만들었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이 모든 '분리'의 벽을 단숨에, 그리고 남김없이 무너뜨립니다. 그는 '신'과 '자연', '정신'과 '물질'이 둘이 아니며, 오직 '하나'의 실체임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이 위대한 통찰은 그의 주저 『에티카, Ethica』의 첫머리를 여는 "신즉자연 (神卽自然, Deus sive Natura)"이라는 라틴어 구호로 압축됩니다. "신, 혹은 자연"이라는 이 선언은, '신'과 '자연'이 동일한 존재임을 밝히는,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선언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하나'의 존재를 '실체 (Substance)'라고 불렀습니다. 이 '실체'는 우리가 아는 '나무'나 '돌' 같은 개별적인 사물이 아닙니다. '실체'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며,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이 이해되는" 유일하고 무한한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 '실체'는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원인 (causa sui)’이며, '신 (Deus)'이자 '자연 (Natura)'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실체 (신즉자연)'가 어떻게 우리가 보는 이 '다양한' 세계 (나무, 돌, 인간, 생각)가 될 수 있습니까. 스피노자는 '실체'가 '속성 (Attribute)'과 '양태 (Mode)'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실체'가 지닌 근본적인 '본질' 혹은 '성격'을 그는 '속성 (Attribute)'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체 (신)'는 무한한 존재이기에, 그 본질 (속성) 역시 무한합니다. 하지만 우리 유한한 인간은 그 무한한 본질 중에서 오직 '두 가지'의 얼굴, 즉 두 개의 '속성'으로만 '신'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속성은 '연장 (Extension,)', 즉 '물질'입니다. 이것은 '신 (자연)'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리적인 측면입니다. 우리가 '신'을 '눈에 보이는 세계', 즉 산과 바다, 나무와 돌멩이로 인식할 때, 우리는 '연장'이라는 속성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속성은 '사유 (Thought)', 즉 '정신'입니다. 이것은 '신 (자연)'이 '스스로를 생각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비물리적인 측면입니다. 우리가 '신'을 '보이지 않는 법칙', '우주적 이성', 혹은 '의식'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사유'라는 속성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가장 위대한 혁명은 바로 여기서 일어납니다. 데카르트에게 '정신 (생각하는 나)'과 '물질 (나의 몸)'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실체였지만, 스피노자에게 이 둘은 '하나의 실체 (신)'를 표현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 혹은 '두 가지 다른 언어'일 뿐입니다. '신'은 '사유하는 존재'인 동시에, '연장된 존재 (물질)'입니다.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이 '개별적인 존재들'은 무엇입니까. '나'라는 사람, '이 책상', '저 나무'는 어떻게 존재합니까. 스피노자는 이 구체적인 개별자들을 '양태 (Mode)'라고 불렀습니다. '양태'는 '실체 (신)'가 잠시 취하고 있는 '구체적인 모습'이자 '변형'입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신 (실체)'을 '무한한 바다'라고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바다 (실체)'는 그 자체로 '물리적인 모습 (연장)'과 '움직이는 힘 (사유)'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바다'에는 수많은 '개별적인 파도'들이 있습니다. 이 '파도' 하나하나가 바로 '양태'입니다. '나'라는 사람, '이 책상', '저 나무'는 모두 '신 (바다)'이라는 거대한 실체가 잠시 취하고 있는 '구체적인 모습 (양태)'입니다. '파도 (양태)'가 '바다 (실체)'를 떠나 존재할 수 없듯이, '나 (양태)'는 '신 (실체)'을 떠나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하나의 파도 (양태)' 역시, '두 개의 속성 (언어)'으로 동시에 설명됩니다. '파도의 구체적인 모양과 높이, 물거품'은 '나의 몸 (연장의 양태)'입니다. 그리고 그 '파도의 움직이는 힘과 방향, 속도'는 '나의 마음 (사유의 양태)'입니다.
결국 '나의 마음 (파도의 힘)'과 '나의 몸 (파도의 모양)'은 두 개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나 (파도)'를 설명하는 '두 개의 다른 측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과 '나의 몸',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모두 '하나의 실체 (신즉자연)'가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 '다양한 모습 (양태)'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의 '부분'이며, '신' 안에서 살고 숨 쉬며 존재합니다.
'신'과 '자연'이 '하나'라는 이 '일원론적 세계관'은, 데카르트가 풀지 못했던 가장 큰 난제, 즉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단번에 해결합니다. 데카르트는 '정신 (나)'과 '육체 (기계)'라는 두 개의 다른 실체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설명하기 위해, 뇌의 '송과선 (pineal gland)'이라는 어색한 연결 장치를 가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그런 '연결 장치'가 필요 없습니다. '정신'과 '신체'는 애초부터 '분리'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의 '평행론 (Parallelism)'입니다. '정신'과 '신체 (연장)'는 '하나의 실체'를 표현하는 '두 개의 다른 속성'이므로, 그 둘은 '평행'하게 '동시'에 작용합니다. 스피노자는 "관념의 질서와 연결은 사물의 질서와 연결과 동일하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엄청납니다. '나'의 '마음 (정신)'이 '나'의 '몸 (신체)'을 움직이게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몸'이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 (사유의 양태)'과,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 (연장의 양태)'은, '하나의 사건'이 '두 개의 다른 언어 (속성)'로 동시에 서술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건과, 나의 '팔이 올라가는' 사건은, '신 (실체)' 안에서 일어나는 '동일한 하나의 사건'입니다. '나의 마음'은 '나의 몸'에 대한 '관념'이며, '나의 몸'은 '나의 마음'이 '물질'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정신'과 '신체'가 '하나'라는 통찰은, 스피노자의 '정념론'의 근거가 됩니다. '슬픔'이나 '기쁨' 같은 '정념 (affectus)'은 단순히 '정신'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신체'가 '활력 (코나투스, Conatus)'을 얻거나 (기쁨) 잃는 (슬픔) '물리적' 사건과 '동시'에 일어나는 '정신적' 사건입니다. '몸'을 돌보지 않고 '마음'을 치유할 수 없으며, '마음'을 비우지 않고 '몸'이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이 둘이 '하나의 운명'임을 가르쳐줍니다.
스피노자는 이 '신즉자연'이라는 '하나의 실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을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능산적 자연 (能産的 自然, Natura naturans)'이고, 다른 하나는 '소산적 자연 (所産的 自然, Natura naturata)'입니다.
'능산적 자연'은 '자연하는 자연', 즉 '낳는 자연'입니다. 이것은 '신 (실체)'과 그의 '속성 (사유, 연장)'들을 의미합니다. '능산적 자연'은 모든 것을 낳는 '원인'이자 '창조하는 힘' 그 자체이며,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이것은 '행위 (Doing)'로서의 자연입니다.
'소산적 자연'은 '자연화된 자연', 즉 '낳아진 자연'입니다. 이것은 '능산적 자연'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나타난, 모든 '유한한 양태'들의 총합입니다. 즉, 우리가 보는 '구체적인 사물'들 (나무, 인간, 별)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행위의 결과 (Done)'로서의 자연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두 개의 자연'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능산적 자연 (신)'은 '소산적 자연 (세계)'을 '바깥에서' 창조한 '초월적 존재'가 아닙니다. '능산적 자연 (원인)'은 '소산적 자연 (결과)'의 '안에' 존재하며, '소산적 자연'은 '능산적 자연'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신'은 '세계'이며, '세계'는 '신'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체계 안에 존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재성 (Immanence)'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그가 바로 '내재성 (Immanence)'의 철학을 완성한 위대한 사상가라고 극찬했습니다. '내재성'이란, '원인 (신, 자연)'이 '결과 (세계, 만물)'의 '안에' 존재하며 둘이 하나라는 사유입니다.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스피노자가 서양 철학을 지배해 온 '초월성 (Transcendence)'이라는 거대한 환상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들뢰즈가 비판한 '초월성의 철학'이란, '내재성'과 정반대되는 모든 사유 방식입니다. 즉, '원인 (Cause)'을 '결과 (Effect)'의 '바깥'에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 (원인)'이 '세계 (결과)'를 창조한 뒤, 저 하늘 '바깥에서' 세계를 다스린다고 보는 것이 '초월'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원인)'가 '현실 세계 (결과)' 저 너머에 '초월'해 있다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나 '법'이 이처럼 '삶'의 '바깥'에 '초월'해 있을 때, 그 '초월적 존재'는 '삶'을 심판하는 '재판관'이 됩니다. '삶'은 그 '초월적 가치 (신의 명령, 도덕 법칙)'에 끊임없이 복종해야 하는, '부채'를 짊어진 상태가 됩니다. 들뢰즈는 이 '초월성'의 사유가, 우리에게 '죄의식', '양심의 가책', '두려움'과 같은 '슬픈 정념 (sad passions)'을 안겨주는 '노예의 철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신즉자연"은 바로 이 '초월'의 환상을 파괴합니다. '신'은 '세계'의 '바깥'에 있지 않고 '안에 (내재)' 있습니다. '신'은 우리를 '심판'하는 '인격'이 아니라, '필연적인 법칙 (자연)'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신' 앞에서의 '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 (善)'과 '악 (惡)'은 '신'이 정해놓은 '초월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스피노자에게 '선 (좋음)'이란, '나'의 '코나투스 (존재하려는 힘)'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악 (나쁨)'이란, '나'의 '코나투스'을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이 아니라 '윤리학'이며, '심판'이 아니라 '물리학'입니다. 스피노자는 '초월적 가치 (당위, Ought)'를 비워내고, '내재적 가치 (존재, Is)'를 회복시켰습니다.
들뢰즈는 이 스피노자의 '내재성의 평면 (plane of immanence)' 위에서는, 더 이상 '정신'이 '육체'보다 우월하지 않으며,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실체 (자연)' 위에서, 각자의 '코나투스'에 따라 '힘'을 겨루고 '관계를 맺는' '양태'들일 뿐입니다.
이는 들뢰즈의 '리좀 (Rhizome)'이나 '행위자-연결망 이론 (ANT)'과 같은 '수평적 연결망' 사상의 철학적 뿌리가 됩니다.
스피노자의 '신즉자연'은 '갇힌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첫째, 우리는 '분리'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은 '신'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신'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곧 '나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은 오늘날 '생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연결'의 철학입니다.
둘째, '정신'과 '육체'를 차별하는 '오만'을 비워내야 합니다. '우울증'은 '의지'가 약해서 생기는 '정신'의 나약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과 '동시에' 일어나는 '육체'의 '힘 (코나투스)'이 약화된 '사건'입니다. '몸'을 돌보지 않는 '마음'의 평화는 존재할 수 없으며, '마음'을 비우지 않는 '몸'의 건강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평행론'은 우리에게 '몸-마음'의 '온전한 하나됨'을 회복하라고 말합니다.
셋째, '초월적인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비워내야 합니다. '신'은 저 '바깥에서' 우리를 벌주는 '인격'이 아닙니다. '신'은 '지금 여기'에서 작동하는 '자연의 필연성'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필연성 (연결)'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이해'를 통해, '수동적 정념 (외부 원인에 휩쓸림)'의 노예에서 '능동적 정념 (내부 원인을 이해함)'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가 제시한 '자유'입니다. '비움'은 '두려움'을 비우는 것이며, '연결'은 '자연 (신)'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아모르 파티 (Amor fati)’라고도 부릅니다.
3-9.3.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우리는 '존재 (Being)'의 철학에 갇혀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세계가 '이미 완성된 사물 (things)'들의 집합이라고 믿습니다. '책상', '나무', '나'라는 존재는 마치 무대 위에 놓인 소품처럼, 변하지 않는 '실체 (substance)'를 가지고 '거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철학은 르네 데카르트 이래로, 이 '고정된 실체'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인가'라는 '존재'의 물음에 집착해왔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세계가 '사물'이 아니라 '사건 (events)'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떨까요. 만약 '존재 (Being)'가 아니라 '생성 (Becoming)' 이야말로 이 우주의 유일한 진실이라면 어떨까요.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바로 이 '생성'의 관점에서 우주 전체를 다시 설명하는 '과정철학 (Process Philosophy)'이라는 장엄한 사유 체계를 제시합니다. 그의 철학은, '분리'와 '고정'이라는 '갇힌 세계'의 관념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흐른다'는 '연결의 철학'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화이트헤드는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진행한 기포드 강연 (Gifford Lectures)을 바탕으로 1929년에 출간한 『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를 통해 이 혁명적인 사상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이 사상은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밝혀낸, '고정된 물질'이 아닌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세계의 실상을 철학적으로 정교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화이트헤드가 바라본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물질'이나 '원자' 같은 '사물'이 아닙니다. 그가 본 우주의 최소 단위는 '현실적 존재자 (actual entity)' 또는 '현실적 계기 (actual occasion)'입니다. 이 개념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크게 다릅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의 사물이라고 여기는 것들, 예컨대 한 그루의 나무나 한 사람의 인간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는 무수히 많은 '현실적 계기'들의 복합체 (nexus, 넥서스)에 불과합니다. 각각의 '현실적 계기'는 '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험의 한 방울 (a drop of experience)'입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지금 '나'의 뇌세포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경험', 저 먼 우주에서 폭발하는 초신성의 '사건', 이 글자를 읽는 당신의 '지각' 하나하나가 모두 '현실적 계기'입니다.
이 '현실적 계기'의 본질은 '생성 (becoming)'입니다. 각각의 '현실적 계기'는 '다수 (many)'가 '하나 (one)'가 되는 '합생 (concrescence)'이라는 창조적 과정을 거칩니다. 즉, 무수히 많은 과거의 영향들이 현재의 단일한 '경험'으로 결정화되는 창조적 종합입니다. 이 과정의 완성을 그는 '만족 (satisfaction)'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현실적 계기'가 자신의 생성 과정을 완료하고 완전히 결정된 존재가 되는 순간입니다. '만족'에 도달한 존재자는 주체로서는 '소멸 (perish)'하지만, 그 즉시 '객체'가 되어 미래의 모든 존재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를 화이트헤드는 '객체적 불멸성 (objective immortality)'이라고 불렀습니다. 화이트헤드의 세계에서 '실재'란, '고정된 돌멩이'가 아니라, 이 '현실적 계기'들이 무한히 릴레이를 펼치며 '생성'되고 '소멸'하는 거대한 '과정 (process)'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과정'은 어떻게 '연결'됩니까. '과거'의 사건은 어떻게 '현재'의 사건 속으로 이어집니까. 화이트헤드는 이 '연결'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그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독창적인 개념인 '파악 (Prehension)'을 제시합니다. '파악'은 '움켜쥐다 (grasp)'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파악'은, 새롭게 '생성'되는 '하나의 현실적 계기 (현재)'가, 자신에 앞서 존재했던 '과거의 모든 현실적 계기들'을 '자신 안으로' 붙잡아들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뉴턴의 '인과관계 (causality)'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뉴턴의 세계에서, '과거'의 당구공 (원인)은 '현재'의 당구공 (결과)을 '밖에서' 밀어낼 뿐입니다. '과거'는 '현재'가 되는 순간 죽어버립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의 세계에서, '과 (去)'의 '현실적 계기'는 '현재'의 '현실적 계기' '안으로' 들어와 '살아있습니다'. '현재'는 '과거'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전체'를 자신의 '내면'으로 '껴안습니다'.
이 '파악'은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계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화이트헤드는 '파악'의 본질이 '느낌 (Feeling)'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그의 '범경험론 (panexperientialism)'입니다. '경험'이나 '느낌'은 인간이나 동물의 뇌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적 계기'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입니다. 물론 '전자 (electron)'의 '느낌'은 인간의 '의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하고 단순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자' 역시, 자신을 둘러싼 '전자기장 (과거의 사건들)'을 '느끼고 (파악하고)', 그 '느낌'에 '반응'하여 자신의 '현재'를 결정합니다. '파악'은 '물리적 파악 (physical prehension)', 즉 다른 '현실적 계기 (과거)'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개념적 파악 (conceptual prehension)', 즉 '순수한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뉩니다. 모든 '현실적 계기'는 '과거의 우주 전체'를 '파악 (느낌)'하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포함 (긍정적 파악)'하거나 '배제 (부정적 파악)'함으로써 '지금 여기'의 '고유한 나'를 만들어냅니다. '나'는 고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온 우주의 '과거'를 '느끼고' 껴안는 '연결'의 '사건'입니다.
이러한 과정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범주는 '창조성 (creativity)'입니다. '창조성'은 신보다도, 존재보다도 더 궁극적인 원리입니다. 그것은 '다수'가 '하나'가 되고 (합생), 그 '하나'가 다시 '다수'를 증가시키는 (객체적 불멸성) 우주의 근본 리듬입니다. '창조성'은 어떤 '실체'가 아니라 순수한 '활동'이며, 모든 '현실적 계기'가 그것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이 '창조성'의 과정을 "새로움을 향한 창조적 전진 (creative advance into novelty)"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과거'를 반복하는 기계적인 순환이 아닙니다. 우주는 '새로운 것 (Novelty)'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이 '새로움'은 어디에서 옵니까. '현실적 계기'는 '과거 (데이터)'만을 '파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을 '파악'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이 '순수한 가능성'의 영역을 '영원한 객체 (Eternal Objects)'라고 불렀습니다. '영원한 객체'는 플라톤 (Plato)의 '이데아 (Idea)'와 비슷하지만, 저 멀리 '초월'해 있는 '완벽한 원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과정' 속에서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잠재력'입니다. '붉음'이라는 '영원한 객체 (가능성)'는, '장미'라는 '현실적 계기'와 만나 비로소 '현실의 붉은 장미'가 됩니다. '창조적 전진'이란, '현실적 계기'가 '과거의 현실(데이터)'을 '파악'하고,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 (영원한 객체)'을 '파악'하여, 이 둘을 '결합'시킴으로써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하나'를 '창조'해내는 '결단 (Decision)'의 과정입니다. '나'의 '현재'는 '과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재료'일 뿐, '현재'는 '과거'라는 '재료'와 '가능성'이라는 '유혹 (lure)' 사이에서, '가장 풍부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결단하는 '창조'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근원입니다.
이 '창조적 전진'의 과정에서 '신 (God)'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화이트헤드의 '신'은, 서구 전통 철학이 말하는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하며, '모든 것을 창조한' '부동의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 자신도 이 '창조성'의 '과정' 속에 '참여'하는 '현실적 존재'입니다. '신'은 '과정'의 '예외'가 아니라, '과정'을 '완성'시키는 '동반자'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신'이 '양극적 (dipolar)' 본성, 즉 '두 개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신의 원초적 본성 (Primordial Nature of God)'입니다. 이것은 '신'의 '정신적' 측면입니다. '원초적 본성'은 모든 '가능성 (영원한 객체)'들의 총체입니다. '신'은 이 '원초적 본성'을 통해, 우주의 모든 '현실적 계기'들에게 "너는 이런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신'은 '명령'하는 '폭군'이 아닙니다. '신'은 '과정'이 더 풍부하고 더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도록, 가장 이상적인 '가능성'을 '유혹 (lure for feeling)'하는 '시인'입니다.
화이트헤드가 '유혹 (lure)'이라고 부른 이 개념은, '명령 (command)'이나 '강제 (force)'와는 정반대되는, 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입니다. '신의 원초적 본성'은 우주의 모든 '가능성 (영원한 객체)'을 품고 있습니다.
'현실적 계기' (예를 들어, '지금 이 순간의 나' 또는 '하나의 전자')가 자신의 과거 (데이터)를 껴안고 '새로운 무엇'이 되려고 할 때 (합생, concrescence), 신은 이 '원초적 본성'을 통해 그 '현실적 계기'가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가능성', 즉 '가장 풍부한 가치'와 '가장 깊은 조화'를 제시합니다.
이 '제시'가 바로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느낌 (feeling)'을 향한 것입니다. '신'은 "너는 A가 되어야 한다!"라고 강제하지 않습니다. 대신, "A가 됨으로써 이러한 '아름다움'과 '강렬함'을 '느끼는 (feeling)' 것이야말로, 너의 '창조적 전진'에 가장 좋은 길이다"라고 부드럽게 설득합니다.
이 '유혹'은 '현실적 계기'의 '자유 (결단)'를 전제합니다. '현실적 계기'는 이 신성한 '유혹'을 받아들여 자신을 더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고, 혹은 그보다 못한 가능성을 선택하거나 심지어 그 유혹을 거부하여 '악 (discord)'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신은 '명령'하는 '폭군'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스스로 '아름다움'을 선택하도록 이끄는 '영원한 설득자'입니다.
두 번째는 '신의 귀결적 본성 (Consequent Nature of God)'입니다. 이것은 '신'의 '육체적' 측면입니다. '원초적 본성'이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면, '귀결적 본성'은 '과거'의 '현실'을 껴안습니다. '신'은 이 '귀결적 본성'을 통해, '과정'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한 '모든 현실적 계기'들, 즉 이 세계의 '모든 경험'을 '파악'합니다.
이것은 '신'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은 '악 (惡)'을 '미리' 막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 계기 (인간)'는 '자유'를 가지고 '가능성'을 '결단'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명령'할 수 없고, '유혹'할 뿐입니다. 하지만 '신'은, 인간이 '자유' 속에서 겪은 '모든 고통', '모든 슬픔', '모든 비극'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의 '귀결적 본성' 안으로 '파악'합니다. '신'은 '고통'을 '초월'한 '방관자'가 아니라, "고통받는 세계와 함께 고통받는 자 (the fellow sufferer who understands)"입니다. '신'은 이 모든 '소멸'하는 순간들을 자신의 '무한한 기억' 속에 '영원히' 보존하고 (객관적 불멸성), 그것들을 '조화'롭게 '재편'하여, 다시 '원초적 본성'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의 재료로 세상에 되돌려줍니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세계가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도 참입니다." '신'은 '세상을 필요'로 하고, '세상'은 '신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신'과 '세계'가 '함께' 우주를 '창조'해나가는 '만유내재신론 (panentheism)'의 모습입니다.
'과정철학'이 '생태신학 (ecological theology)'의 기초를 제공하는 이유는, 바로 이 철학이 '모든 존재'에 '내재적 가치 (intrinsic value)'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서양 철학은 '물질'을 '의식 없는 죽은 것'으로 보았고, 이는 '자연'을 인간이 마음대로 착취해도 되는 '자원'으로 여기는 태도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의 '범경험론 (panexperientialism)'은, '전자 (electron)' 하나에도, '바위'에도, '나무'에도 '희미한 느낌 (파악)'이 깃들어 있음을 가르칩니다. 물론 경험의 복잡성과 풍요로움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전자 (electron)가 겪는 경험은 매우 단순하고 인간의 의식이 겪는 경험은 극도로 복잡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모든 존재가 '경험'한다면,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닙니다. 가치는 '인간'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내재합니다.
화이트헤드의 제자인 찰스 하츠혼 (Charles Hartshorne, 1897-2000)과 신학자 존 캅 주니어 (John B. Cobb Jr., 1925-2024)는 이를 '과정신학 (process theology)'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존 캅은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이,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인간의 도구'로 전락시킨 '인간중심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과정신학'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신의 사랑 안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한 종의 멸종은 '신' 자신의 '경험'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환경 보호'는 단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실용적 조치가 아니라, 우주의 '창조적 전진'에 참여하는 '영적 의무'가 됩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분리'와 '무의미' 속에 갇힌 현대인들에게 '연결'의 가장 깊은 토대를 제공합니다.
첫째,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일깨웁니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 (데이터)'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과정'의 본질은 '창조적 전진'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가능성 (신의 유혹)'을 '파악'하여,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나'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입니다.
둘째, '과정철학'은 우리에게 '연결'의 '궁극적인 위로'를 줍니다. 우리의 삶은 '한 번'의 '사건'으로 '소멸'하여 '무 (無)'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나'의 '모든 경험', 즉 '나'의 '기쁨'과 '슬픔'은 '신의 귀결적 본성'에 의해 '영원히' '파악'되고 '기억'됩니다. '나'는 이 '우주적 과정'에 '영원한 기여'를 하는 존재입니다.
'비움'은 '나'라는 고립된 '실체'의 환상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결'은 '나'의 모든 '순간 (현실적 계기)'이 '우주 전체' 및 '신'과 '함께' '생성'되는 '영원한 과정'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3-9.4.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 앞에서
'연결의 철학'은, 서구 정신사가 낳은 가장 급진적이고도 심오한 윤리적 전환점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는, '나'라는 존재에서 출발해왔던 서양 철학 2천 년의 역사를 통째로 뒤집어엎습니다. 그는 '나'보다 '너', 즉 '타자 (他者, l'Autre)'가 먼저 존재한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분리'의 세계관에 갇혀 '나'라는 감옥에 고립된 우리에게, '연결'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책임'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 사상은 『전체성과 무한, Totalité et Infini』이라는 저서에서 꽃핍니다. 전체성은 나의 세계를 체계로 만드는 힘이지만, 무한은 그 체계를 넘어서는 타자의 현현입니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존재론 (Ontology)', 즉 '존재 (Being)'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이 탐구는 언제나 '나'라는 '자아 (Ego)'에서 시작했습니다.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 '생각하는 나'를 모든 확실성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나'는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 (Subject)'가 되었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나무, 돌, 그리고 '타인'—은 '나'의 인식 대상인 '객체 (Object)'가 되었습니다.
레비나스는 바로 이 '자아 중심주의'가 서양 문명이 겪은 모든 비극의 뿌리라고 진단했습니다. 그가 '존재론'이라고 비판한 이 전통은, '나'라는 '동일자 (le Même)'가 '타자 (l'Autre)'를 만날 때, 그 '다름'을 견디지 못하고 '타자'를 '나'의 '이해' 속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만나면 그를 '이해'하려 듭니다. 우리는 그에게 "당신은 아시아인이군요", "당신은 학생이군요", "당신은 보수적이군요"와 같은 '꼬리표'를 붙입니다. 이렇게 '타자'를 '나'의 '범주' 안에 넣어 '파악'하고 '소유'하려는 이 모든 시도가, 레비나스가 볼 때는 '폭력 (violence)'입니다. '나'의 세계 (체계) 안으로 '타자'를 강제로 끌어들여 '동일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나'의 세계, 즉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로 묶어버리려는 시도를 '전체성 (Totality)'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전체성'의 논리는, '나'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전쟁'으로 귀결됩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이 '전체성'의 폭력에 맞서, "윤리학이 제1철학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존재 (나)'에 대해 묻기 이전에,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가 먼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자의 선행성 (Primacy of the Other)'입니다.
그렇다면 이 '타자'는 어떻게 '나'의 '전체성'을 뚫고 들어옵니까. 레비나스는 그 만남이 '얼굴 (Visage)'과의 마주침을 통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얼굴'은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눈, 코, 입'과 같은 물리적인 '형상'이나 '대상'이 아닙니다. 대상으로서의 얼굴은 '나'의 '전체성'에 의해 "그는 코가 높다" 혹은 "그녀는 아름답다"처럼 쉽게 '파악'되고 '정의'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그러한 '현상'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나'에게 말을 걸어오며 '타자' 그 자체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레비나스는 이 '드러남'을 '현현 (epiphany)'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사건 (event)'이라기보다는, '타자'가 '나'의 닫힌 세계를 뚫고 들어와 자신을 '계시'하는 '현상'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사건 (event)'은, 보통 '나'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고 '나'에 의해 파악되는 일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버스가 지나가거나 비가 오는 것은 '나'의 세계 안에서 '발생'하고 '나'에 의해 '관찰'되는 일입니다. 이 관계에서 '나'는 그 '사건'의 주인이거나 최소한 안전한 관찰자입니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의 '현현 (epiphany)'은 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현현'은 '타자 (너)', 즉 '나'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다 파악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무한 (Infinite)'한 존재가, '나'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닫힌 세계 (전체성)를 '타자'가 뚫고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 '나'는 더 이상 '타자'를 관찰하는 주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타자'의 '드러남'에 압도당하고, 그 부름에 응답해야 하는 입장으로 뒤바뀝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이것을 '계시 (revelation)'에 비유합니다. '계시'란 '나'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 '나'에게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자'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현현'은, '나'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중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세계 자체를 뒤흔들며 "너는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타자라는 무한'이 '현상' 그 자체로 '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얼굴'은 '나'에게 아무것도 강제할 수 없는, 지극히 '연약하고 (vulnerable)' '벌거벗은 (naked)' 모습으로 현현합니다. '얼굴'은 늙고 병든 노인의 주름, 낯선 이방인의 불안한 눈빛, 과부와 고아의 궁핍함 그 자체입니다. '얼굴'은 이처럼 자신의 '죽을 수 있음 (mortality)', 즉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그 '무방비 상태'를 '나'에게 그대로 노출합니다.
바로 이 '절대적인 연약함' 속에서, '얼굴'은 '나'에게 '윤리적 호소'이자 '명령'을 전달합니다. 그 '얼굴'은 '나'의 '자유'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나'의 자유는 '타자'를 '대상'으로 삼아 파괴할 수 있는 힘, 즉 '타자'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는 '폭력적인 자유'입니다.
'얼굴'은 이 폭력적인 자유 앞에서, 자신의 아무런 방어 수단 없는 '무방비함' 그 자체를 통해, '나'의 그 살해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요약하자면, '나'의 자유는 '타자'의 연약한 얼굴 앞에서 '윤리적으로' 제한됩니다. '나'는 "나는 자유롭다"고 선언하기 이전에, 이미 "타자를 해치지 말라"는 '책임'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얼굴'의 호소는 '나'의 '자유'보다 먼저 '나'에게 도달합니다. 내가 "나는 존재한다"라고 인식하기도 전에, '타자'는 이미 "나를 죽이지 말라"고 '나'를 불러 세웁니다. '나'는 '타자'의 이 '호소'에 '응답'하도록 '불려 나온' 존재입니다. 즉, '나'라는 '자아 (주체성)'는 '타자'의 부름에 의해 비로소 '탄생'합니다. 이것이 "타자가 나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선행성'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나'는 '타자'에게 '빚진' 존재입니다.
'타자'의 '얼굴'은 이처럼 '나'의 '전체성'을 깨뜨리고 들어옵니다. '나'는 '타자'를 결코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없습니다. '타자'는 나의 '범주' 안으로 '환원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레비나스는 이처럼 '나'의 '전체성'에 결코 붙잡히지 않는 '타자'의 근원적인 '다름'을 '무한 (Infinity, 무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전체성'이 '나'의 세계라면, '무한'은 '타자'의 세계입니다. '얼굴'은 이 '무한'의 세계에서 '나'의 '전체성' 속으로 들어온 '흔적 (trace)'입니다. 이 '무한'과의 만남은 '나'를 '앎'의 주체에서 '윤리'의 주체로 뒤바꿉니다. '나'는 '타자 (무한)'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타자 (무한)'에게 '응답'해야 합니다.
이 '응답'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한 책임 (Infinite Responsibility)'입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너는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책임'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얼굴'과의 마주침을 통해 '나'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나'는 '타자'의 '인질 (hostage)'입니다.
이 '책임'은 '상호적'이거나 '대칭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너에게 잘해주는 만큼, 너도 나에게 잘해줘야 한다"는 '계약'의 논리 속에 삽니다. 하지만 레비나스에게 '윤리'는 '계산'이 아닙니다. '나'의 '책임'은 '타자'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든 상관없이, '일방적'이고 '무한'합니다. '나'는 '타자'가 '나'에 대해 갖는 책임보다 '더' 많은 책임을 집니다. '나'는 '타자'의 '고통'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이 '무한 책임'의 논리는 그 궁극에서 '대속 (代贖, Substitution)'이라는 가장 급진적인 개념에 도달합니다. '대속'은 '대신하여 속죄한다'는 뜻으로, '타자'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타자'를 '돕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타자'의 '책임'마저도 '나'의 '책임'으로 떠맡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이 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타자'의 '죄'까지도 대신 짊어지는 존재입니다. '나'는 '타자'의 '죽음'까지도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내 입의 빵을 꺼내어 타자에게 주는 것", 이것이 '대속'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윤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레비나스에게 '나 (자아)'란, 이 '대속'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for-itself)'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for-the-Other)' 존재합니다. '나'라는 존재의 '고유성'은, '타자'의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다는 이 '대체 불가능성'에서 나옵니다. '비움 (Kenosis)'은 바로 이 '나'의 자리를 '타자'에게 내어주는, 이타적인 '비움'입니다.
레비나스의 이 가르침은 '갇힌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근본적인 '연결'의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 우리는 '나' 중심의 '전체성'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의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의 문화는, '나'라는 '동일자'를 강화하는 '전체성'의 논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 몰두합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나'의 세계가 '타자'의 '얼굴' 앞에서 '깨어지는' 경험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성'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우리는 '타자'를 '환원'시키고 이해하려는 '폭력'을 멈추어야 합니다. 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폭력입니다. 우리는 '타자'를 '이해'했다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난민', '소수자', '경쟁자'라는 '꼬리표' 뒤에 있는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얼굴'을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순간, 모든 폭력은 정당화됩니다. '연결'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그 '무한'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무한 책임'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나'의 '권리'는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부과한 '책임'보다 '후행'합니다. '나'의 '존재 이유'는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 응답은 끝없는 여정입니다. '연결'은 '즐거움'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무거운 '윤리'에서 시작됩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비움'과 '연결', '하나됨'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씁니다. '비움'은 '나'의 '자아'와 '전체성'을 '타자'를 위해 '비워내는' 것입니다. '연결'은 '타자'의 '얼굴'이 '나'를 '인질'로 삼는 '피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됨'은 '나'와 '너'가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나'가 '너'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대속)' '윤리적 하나됨'입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우리를 고독한 자아에서 해방시킵니다. 삶은 타자를 위한 봉사가 됩니다. 그 봉사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만납니다. 타자의 얼굴이 우리를 부를 때, 존재는 사랑으로 숨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