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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0장: 관계의 존재론

by DrLeeHC

제3-10장: 관계의 존재론



3-10.1.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그 '나'가 저 '바깥'에 있는 '세계'를 마주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나'는 과연 고정불변의 실체일까요. 만약 '나'라는 존재가, '나'와 관계 맺는 '대상'에 따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20세기 유대인 철학자이자 '대화의 철학'을 연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1878-1965)는, 이 '나'라는 존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비로소 '발생'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1923년 출간한 그의 주저 『나와 너, Ich und Du』에서,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두 가지 길은, 우리가 '비움'과 '연결'의 철학을 통해 도달하려는 '하나됨'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장 실존적인 울림으로 보여줍니다.


부버는 인간이 말하는 '근원어 (Grundwort)'가 두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 이 '근원어'는 단순히 '단어'가 아니라, '관계'를 맺는 '태도'이자 '존재 방식' 그 자체입니다. 첫 번째 근원어는 '나-너 (I-Thou)'이고, 두 번째 근원어는 '나-그것 (I-It)'입니다.


이 두 세계를 가르는 것은, '나'가 만나는 '대상 (너 혹은 그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무를 '너'로도 만날 수 있고, '그것'으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심지어 '사람'조차도 '그것'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나'의 '태도'이며, 이 '태도'에 따라 '나' 자신도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먼저, '나-그것 (I-It)'의 세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 (Erfahrung)'이라고 부르는 세계이며, '분리'의 세계입니다. '나-그것'의 관계 속에서, '나'는 '주체 (Subject)'가 되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객체 (Object)', 즉 '그것 (It)'이 됩니다.


'나'는 '그것'을 '경험'합니다. 이 말은, '나'는 '그것'을 '분석'하고, '범주화'하며, '측정'하고, '이용'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저 나무를 '그것'으로 대할 때, '저 나무는 소나무이며, 수령은 50년쯤 되었고, 목재로 쓰기에 좋겠다'라고 '판단'합니다. '나'는 이처럼 '그것'을 나의 '지식' 속으로 끌어들여 '소유'합니다. 이 관계에서 '나'와 '그것'은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외부'에 있으며,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나-그것'의 세계는 '필연적'이며, '악 (惡)'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의 세계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음식 (그것)을 '먹어야 ' 하고, 컴퓨터 (그것)를 '사용해야' 하며, 과학은 세계 (그것)를 '분석'해야 합니다. 이 세계는 '인과법칙 (causality)'이 지배하는,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세계입니다.


하지만 이 '나-그것'의 세계가 '삶의 전부'가 될 때, 비극이 시작됩니다. '나'는 '주체'로서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것'들의 세계에 '갇힌'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나' 역시 다른 '주체'들에게 '그것'으로 취급당합니다. '나'는 '인적 자원', '소비자 데이터', '쓸모 있는 부품'으로 전락합니다. 이처럼 '나-그것'의 세계만이 유일한 현실이 된 상태, 이것이 바로 '소외 (alienation)'입니다.


부버는 이 '소외'의 감옥을 깨뜨리는 유일한 길이, '나-너 (I-Thou)'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너'의 세계는 '경험 (experience)'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 (Beziehung)'의 세계입니다. '나'는 '너'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너'를 '경험'하려는 순간, '너'는 나의 '분석'과 '판단'의 '대상'이 되어, 이미 '그것'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분석'하거나 '이용'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너'와 '만납니다'. 이 '만남 (encounter)' 속에서, '너'는 '부분'의 합 (키, 나이, 직업...)으로 존재하는 '그것'이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전체 (whole)'로서의 '현존 (presence)' 그 자체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이 '만남'의 순간에 일어나는 기적이 부버 철학의 핵심입니다.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나 (주체)'가 '그것 (객체)'보다 먼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나-너'의 관계에서는, '나'와 '너'가 '동시에' 태어납니다. 부버는 "근원어 '나-너'는 '나'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너'라는 '관계' 그 자체가 말해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나'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참된 나 (인격, Person)'가 됩니다. '나'는 '너'를 만남으로써 '나'가 됩니다.


이 '나-너'의 관계가 어떻게 '그것'의 세계를 '만남'의 세계로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나' 자신이 어떻게 새롭게 태어나는지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적 증언 속에서 가장 완벽하게 드러납니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그것 (I-It)'의 세계입니다. '그'는 아직 '너'가 아닙니다. '그'는 '나'에 의해 이름 불리지 않은, '나'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하나의 몸짓', 즉 '그것 (It)'입니다. '나'는 그를 '경험'하고 '분석'할 수는 있지만, 그와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이 '나-너 (I-Thou)'의 기적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나'의 전 존재를 열어 '너'를 향해 '돌아서는 (Umwendung)' 행위입니다. 이 '관계 (Beziehung)'의 순간, '그것'이었던 '몸짓'은 비로소 '나'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 의미를 갖는 '꽃', 즉 '너 (Thou)'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고백에 이릅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부버 철학의 정점입니다.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나'가 먼저 존재했지만, '나-너'의 관계에서는 '나'와 '너'가 '동시에' 태어납니다. '나'는 '너'를 '꽃'으로 만듦으로써, 비로소 '나' 자신도 '꽃'이 될 수 있는 '참된 나 (인격)'가 됩니다.


'나-너'의 관계는 '나'의 '의지'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순간'에 일어나며, '선물'처럼 주어지는 '은총 (grace)'입니다. '나'는 이 '만남'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오직 '나'의 '전 존재'를 열어, 이 '만남'에 '응답'할 뿐입니다.


부버는 이 '나-너'의 관계가 '인간'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나-너'의 '만남'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계 전체를 통해, '세 가지 영역'에서 우리를 찾아옵니다.


첫째는 '자연과의 삶'입니다. 이 영역은 우리가 자연의 존재들과 맺는 관계입니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자연을 '나-그것'의 관계로만 대합니다. 우리는 저 나무를 '분석'합니다. '저것은 어떤 종이며, 수령은 몇 년이고, 목재로서의 가치는 얼마인가'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고양이를 '관찰'합니다. '저것은 나의 애완동물이며, 나에게 정서적 만족을 주는 대상이다'라고 규정합니다. 이때 나무와 고양이는 '나'의 경험과 지식에 종속된 '그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너'의 관계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로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은총'처럼 다가옵니다. '나'는 숲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와 마주 섭니다. '나'는 더 이상 그 나무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나무의 '고유한 현존 (presence)'이 '나'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나는 그 나무의 '유일무이함', 그 수피의 거친 질감,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의 형언할 수 없는 몸짓 속에서, '나'와 동등한 '너'를 만납니다. 그 나무는 더 이상 '수단'이나 '대상'이 아니라, '나'와 관계 맺는 '전체'로서의 '너'가 됩니다. 부버 자신이 말했듯이, '나'는 고양이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그 '눈빛'의 심연 속에서, '나'와 마주 선 '너'를 만납니다. 이 관계는 '상호적 (reciprocal)'입니다.


둘째는 '인간과의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이며, '나-너'의 관계가 가장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이 영역 또한 대부분 '나-그것'의 관계가 지배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그의 '존재 전체'로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를 '수단'과 '기능'으로 만납니다. '나'는 타인을 '그것'으로 대합니다. 그는 '나의 상사', '나의 부하직원', '나의 고객', '내게 이익을 주는 사람', 혹은 '나의 정치적 입장과 같은/다른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은 타인을 그의 '역할', '기능', '특징'의 '부분적인 합'으로 환원시키는 '나-그것'의 태도입니다.


'나-너'의 만남은, 이 모든 '껍질'과 '기능'을 넘어설 때 일어납니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역할 (가면, 페르소나)' 뒤에 숨지 않고, 상대방도 그의 '역할' 뒤에 숨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전 존재'를 열어 그와 마주 서며, 그의 '전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이 '만남' 속에서, 그는 더 이상 '분석'되거나 '이용'될 수 있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의 모든 '범주화'를 벗어나는, '유일하고 살아있는 너'입니다. 이 '만남'은 일방적인 '관찰'이 아니라, '상호성' 그 자체입니다. '너'가 '나'를 '너'라고 불러줄 때,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 (인격)'가 됩니다.


셋째는 '정신적 실재와의 삶'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들과 맺는 관계입니다. '나'는 하나의 '예술 작품 (교향곡, 그림)'이나 '위대한 사상 (철학)'을 '그것'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나'는 교향곡을 '분석'하고 (화성학, 대위법), 그림을 '해부'하며 (구도, 시대적 배경), 사상을 '비판 (논리적 오류)'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그것'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지적 활동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작품이나 사상과 '나-너'의 관계로 들어섭니다. '나'는 더 이상 베토벤의 교향곡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 '음악'이 '나'의 전 존재를 사로잡고, '나'는 그 '음악'이 말하는 '형언할 수 없는 현존' 앞에 압도됩니다. '나'는 칸트의 철학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의 위대함에 '봉사'하게 됩니다. 이 '정신적 실재'들은 더 이상 '대상 (그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나'의 '삶'을 요구하는 '너'로서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그것은 '나'의 '내면 (주관)'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느낌'이 아닙니다. 또한 '너'라는 '객관적' 존재를 '발견'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버는 이 '만남'이 일어나는 '진짜 장소'는, '나'와 '너'의 '사이 (Das Zwischen)'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부버의 '사이의 철학'입니다. '관계'는 '나'에게 속한 것도, '너'에게 속한 것도 아닙니다. '관계'는 '나와 너 사이'라는 '독립적인 실재'입니다. 우리가 '연결'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사이'의 영역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사이'의 영역이 지닌 '신성함'은, 루마니아의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가 말한 '성 (聖, The Sacred)'과 '속 (俗, The Profane)'의 구분을 통해 더욱 깊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엘리아데에게 '속'의 세계는 '균질적인' 공간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세계를 '이용'하고 '분석'하며 '측정'하는, 부버의 '나-그것 (I-It)'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나무는 '목재 (그것)'이고, 산은 '광물 (그것)'이며, 타인은 '수단 (그것)'입니다. 이 세계는 '필연적'이지만, 여기에는 '만남'이 없으며 '소외'만이 존재합니다.


반면 '성'의 세계는 '비균질적인' 공간, 즉 '중심'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성'이 드러나는 순간 (성현, 聖顯, Hierophany)은, 바로 '나'와 '세계'가 '나-너'의 관계로 '만나는' 순간입니다. '나'는 더 이상 저 나무를 '그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너'로서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그 나무가 선 '자리'는 더 이상 '속'의 공간이 아니라, '성'스러운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부버에게 '성 (聖)'이란, '나'와 '너'가 만나는 '사이'의 영역 그 자체입니다.


이 '사이'의 영역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행위'가 바로 '대화 (Dialogue)'입니다. 부버에게 '대화의 철학'은 '나-너' 관계의 실천입니다. 그는 '진정한 대화'를 두 가지 가짜 대화와 구별합니다.


첫 번째 가짜 대화는 '기술적인 대화'입니다. 이것은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나-그것'의 대화입니다. 두 번째, 그리고 더 위험한 가짜 대화는 '독백으로 위장된 대화'입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나-너'의 만남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타인'이라는 '청중'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독백 (monologue)'입니다. 그들은 '타인'의 '현존'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진정한 대화'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나'의 '전 존재'가 '너'의 '전 존재'를 향해 '돌아서는 (Umwendung)' 것입니다. '진정한 대화'는 '너'가 '나'와 다름 (他者性,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것입니다. '너'를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 (그것)'으로 보지 않고, '너'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화'는 '말'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현존'과 '현존'이 '사이'의 공간에서 '만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나-너'의 '만남'에는 비극적인 운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간'에만 머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너'는, '나'와의 만남이 끝나는 순간, 반드시 '그것'이 되어버립니다. '나'는 방금 '너'로 만났던 '연인'을, 다음 순간 '나의 일상' 속에서 '분석'하고 '판단'하는 '그것'으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유한한 너 (Finite Thou)'의 필연적인 '소멸'은, 우리에게 '나-그것'의 세계가 '삶의 전부'라는 절망을 안겨줍니다.


부버는 바로 이 '절망'의 지점에서, 이 모든 '유한한 너'의 '배후'에, 결코 '그것(It)'이 되지 않는 '영원한 너 (Eternal Thou)'가 계심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너'는 '신 (God)'입니다. '신'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유한한 너'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궁극적인 너'입니다.


우리가 '자연인 너', '인간인 너', '정신적 실재인 너'와 진정한 만남을 가질 때, 그 '만남' 속에서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그 '신성한 빛', 그 '순간'의 '영원성'이 바로 '영원한 너'의 '흔적 (trace)'입니다. '신'은 저 멀리 '초월'해 계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만남' 속에 '내재 (immanent)'해 계십니다.


'영원한 너'로서의 '신'은, 다른 모든 '너'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유한한 너 (자연, 인간, 정신적 실재)'는 '나-그것'이라는 '인과율의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만남'의 순간이 지나면, 그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그것'의 세계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유한한 너'의 '비극'입니다. 하지만 '신'은 이 '인과율의 세계 (나-그것)'에 속하지 않습니다. '신'은 우리의 '유한성'으로 인해 '그것'이 되어버리는 '유한한 너'와 달리, 그 '본질'상 결코 '그것 (It)'이 될 수 없는 유일한 '너', 즉 '절대적인 너'입니다. '영원한 너'는 모든 '너'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보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을 '그것'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근본적으로 실패하며,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신'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그 본질을 '분석'하려는 '객관적인 신학'은, '영원한 너'를 '그것'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입니다. 또한,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수단'으로 '신'을 '이용'하려는 모든 '기복신앙' 역시, '신'을 '나-그것'의 관계로 끌어내리는 저속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신'은 우리가 '경험 (experience)'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그것'이 아닙니다. '신'은 오직 우리가 '관계 (relate)'할 수 있는 '영원한 너 (Eternal Thou)'입니다. 우리는 '신'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신'과 '대화'하며, '신'의 '현존' 앞에 '나'의 '전 존재'를 열어 '응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부버의 철학이 '갇힌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명료합니다.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나-그것'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 (그것)'으로 만들고, 소셜 미디어는 '타인'을 '이미지 (그것)'로 소비하게 하며, 기술관료주의는 '인간'을 '데이터 (그것)'로 관리합니다. 우리는 이 '그것'의 세계 속에서 '소외'되어, '참된 나'를 잃어버렸습니다.


부버는 우리에게, '나-그것'의 세계를 '폐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나-그것'의 세계가 '나-너'의 '만남'을 통해 '성스러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비움'이란, '타인'과 '세계'를 '이용'하고 '소유'하려는 '나-그것'의 태도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연결'이란, '나'와 '너'의 '사이'에 존재하는 '신성한 공간'을 회복하고, '진정한 대화'를 시도하는 '용기'입니다. '하나됨'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유한한 너'의 '얼굴' 속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영원한 너 (신)'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참된 나'는 '나'의 '내면'을 파고드는 '고립'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너'와의 '진정한 만남' 속에서 '함께' 태어납니다.






3-10.2. 하이데거의 공동존재 (Mitsein)



'연결의 철학'은, 서구 근대 철학이 세운, ‘인간은 고립된 주체'라는 환상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이 세계의 중심이며, '타인'은 '나'와 분리된 '대상'이라고 믿는 '갇힌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러한 '분리'의 관념이야말로 존재의 참모습을 가리는 가장 근본적인 '무지 (無知)'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은, '인간'이 이 세계와, 그리고 '타인'과 어떻게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공동존재 (Mitsein)'라는 개념을 통해 남김없이 파헤칩니다.


하이데거 철학의 출발점은 '인간'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데카르트처럼 '인간'을 '생각하는 실체'나 '이성적 동물'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을 '현존재 (Dasein)'라고 부릅니다. 'Dasein'은 "거기 (Da) 있음 (sein)"을 뜻하며, '존재 (Being)'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 '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방식은 '세계-내-존재 (In-der-Welt-sein)', 즉 '세계-안에-있음'입니다.


이 '세계-안에-있음'이라는 말은, '물'이 '유리잔 안에' 담겨 있듯이, '나'라는 주체가 '세계'라는 공간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이데거에게 '세계'는 '사물'들의 총합이 아닙니다. '세계'는 '나'와 분리되어 저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환경 (environment)'이 아닙니다. '세계'는 '현존재 (나)'가 이미 그 안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 그 자체입니다. '현존재'는 '세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나'는 '세계'와 이미 '하나'로 얽혀 있습니다.


이 '세계-내-존재'의 '세계'가 과연 무엇인지를 깊이 들여다볼 때, '공동존재'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현존재'가 만나는 '세계'는, 일차적으로 '돌멩이'나 '나무' 같은 '자연'이 아닙니다. '현존재'가 만나는 세계는 '도구 (Zeug)'들의 세계입니다. '망치'는 '망치'라는 '사물 (눈앞의 존재, Vorhandenheit)'이 아니라, '못을 박기 위한' '쓸모 (손안의 존재, Zuhandenheit)'의 '연관망'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갖습니다.


하이데거의 놀라운 통찰은, 이 '도구'들이 언제나 '타인'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망치'는 '망치를 만든 대장장이'를 가리킵니다. '강의실 책상'은 '이 자리에 앉을 다른 학생들'을 가리킵니다. '길'은 '이 길을 먼저 지나간 타인들'을 가리킵니다. 즉, 내가 이 '세계'의 '도구'들과 관계를 맺는 순간, '나'는 이미 '타인'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내-존재'는 그 본질상 '공동존재 (Mitsein)', 즉 '타자와-함께-있음'입니다. '타자'는 '나'의 '고독' 이후에 '나타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타자'는 '현존재 (나)'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바로 그 순간에 '함께' 발견됩니다. '나'는 결코 '홀로'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태초부터 '타자'와 '함께-존재'합니다. '고독 (Solitude)'이란, '타자'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타자'와 '함께-있음'을 '회피'하거나 '놓치는' 방식일 뿐입니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함께-존재'하는 '현존재 (나)'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마음 쓰며' 살아가는 이 근본적인 실존적 구조를 '배려 (Sorge)'라고 불렀습니다. '배려'는 '걱정'이나 '근심'과 같은 일시적인 심리 상태가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이 '배려'의 구조가 '시간성 (Temporality)'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존재 (현존재)는 이 세계에 '내던져진 (Geworfenheit)' 존재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과거'에 해당합니다. 이 '내던져짐'은, '나'의 존재가 나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나'의 부모, '나'의 성별, '나'의 국가, 그리고 '21세기'라는 이 시대를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왜 하필 여기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모른 채, 이 '세계'와 '상황' 속에 '이미' 던져져 있습니다. 이것이 '나'가 짊어져야 하는 '사실성 (Faktizität)', 즉 우리가 결코 무 (無)로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의 무거운 짐입니다.


하지만 이 '내던져졌다'는 사실이 '나'의 존재가 '결정'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돌멩이'는 그저 '돌멩이'일 뿐 다른 가능성이 없지만, '나 (현존재)'는 '이미 정해진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기투, 企投, Entwurf)' 존재입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현재의 나'를 '넘어서 (앞서)' '미래의 나'를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는 "나는 지금 학생이지만, '교사'가 될 수 있다"거나, "나는 지금 소심하지만, '용기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선택'해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실존 (Existenz)'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수많은 '가능성 (교사, 용기)'을 향해 자신을 던지지만, 이 모든 '가능성'은 '실패'할 수도 있고 (교사가 못 될 수도 있음), '타인'이 빼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확실'하고, '가장 고유'하며,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궁극의 가능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 (Tod)'입니다. '죽음'은 '나'의 모든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 우리의 '실존'에 절대적인 '끝'을 설정합니다.


'죽음'이 이처럼 피할 수 없는 '궁극의 미래'로서 '나'의 존재를 규정하기에, '나 (현존재)'는 '내던져진 (과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현재)'에서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긴장' 속에 놓이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내던져짐 (과거)'과 '죽음 (미래)' 사이에서 '가능성 (현재)'을 '선택'해야 하는 이 '긴장'이야말로, '나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존재 방식 자체를 '배려 (Sorge)'라고 불렀습니다. '배려'는 "나는 어차피 죽을 텐데, 이 내던져진 세상에서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나'의 '존재 자체'를 '염려'하는 실존적 구조를 의미합니다. '나'는 '내던져진 (과거)' 존재로서, '죽음 (궁극의 미래)'이라는 확실한 끝을 향해 달려가면서, '지금 여기'에서 '가능성'을 '선택'해야 하는, 그 '긴장'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배려 (Sorge)'라는 '나'의 근본 구조가, '공동존재' 속에서 '타인'을 향할 때, 그것은 '염려 (Fürsorge)'라는 구체적인 '연결'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염려'는 우리가 '타자'와 '함께-존재'하는 '실천적' 방식입니다. '배려 (Sorge)'가 '나'의 '존재 (Sein)'에 대한 '마음 씀'이라면, '염려 (Fürsorge)'는 '타자 (Dasein)'의 '존재'에 대한 '마음 씀'입니다.


하이데거는 이 '염려'가 두 가지 극단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본래적 (authentic)'인 '연결'과 '비본래적 (inauthentic)'인 '연결'의 갈림길입니다.


첫 번째는 '비본래적인 염려'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타인의 자리에 '대신 뛰어드는' 염려 (einspringende Fürsorge)"라고 불렀습니다. 이 '염려'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타인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행위입니다. '대신 뛰어드는 염려'는, '타인'이 짊어져야 할 '고민 (배려)'을 '나'의 '고민'으로 가져와, '대신' 해결해주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숙제 때문에 고통받을 때, 그 친구의 '고민 (배려)'을 '빼앗아' 와서 '나'의 일처럼 숙제를 '대신' 해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모든 삶의 '고민 (배려)'을 '대신' 결정하고 '대신' 살아주는 것입니다.


이 '염려'는 겉보기에는 '헌신적'이지만, 사실은 '폭력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을 '스스로 배려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염려'를 통해 '타인'을 '나'에게 '종속'시키고 '지배'합니다. '타인'은 이 '염려'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나'의 '그것 (It)'으로 전락합니다. 이것은 '연결'이 아니라 '지배'입니다.


두 번째는 '본래적인 염려'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타인에 '앞서 내다보며' 해방시키는 염려 (vorausspringende Fürsorge)"라고 불렀습니다. 이 '염려'는 '타인'의 '고민 (배려)'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이 자신의 '고민 (배려)'을 '스스로' 짊어질 수 있도록 '되돌려주는' 방식입니다.


'앞서 내다보는 염려'는, 친구가 숙제 때문에 고통받을 때, 숙제를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숙제를 해낼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주거나, 그가 '자신의 가능성'을 신뢰하도록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이 '염려'는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다시금 그의 '본래적인 존재 (배려)'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타인'을 '나'의 '소유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자유' 속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도록 '앞서가며 (voraus-)' 길을 비추어주는 '동반자'가 됩니다.


하지만 이 '본래적인 염려'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이데거에게 '현존재 (나)'의 가장 '본래적인' 순간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 '죽음 (Sein-zum-Tode)'이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가능성'을 '홀로' 마주할 때입니다 (결단성, Entschlossenheit). '본래적인 염려'는 '타인' 역시 '나'처럼, 그 '자신의 고유한 죽음'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공동존재 (Mitsein)'라는 개념을 통해 '타자와의 연결'을 밝혀낸 위대한 공적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이데거의 연결 방식이 '진정한 만남'에 도달하지 못하고, 여전히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합니다.


이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세계에서 '나'와 '너'가 어떻게 만나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이데거의 '공동존재'는 '나'와 '너'가 '직접' 만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이데거의 세계에서 '나 (현존재)'는 '세계'와 먼저 관계를 맺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망치'를 봅니다. '나'는 이 '망치'가 '못을 박기 위한 도구'라는 '쓸모'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쓸모'는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 (타자)'과 공유하는 '세계'의 일부임을 깨닫습니다. 즉, '나'는 '망치 (세계)'를 통해서 '타자'가 존재함을 '간접적으로' 추론하거나 확인합니다. '너'는 '나'의 눈앞에 '직접'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배후'에 있는 추상적인 존재입니다.


메를로-퐁티가 지적하는 더 큰 문제는 하이데거의 '목표'입니다. 하이데거에게 '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본래성 (authenticity)'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본래성'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만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나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 찾아옵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만의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나'는 '타인'과 함께 있다가도 (공동존재), 궁극적으로는 '홀로' 자신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개별적'이고 '고독한' 존재입니다.


하이데거의 '본래적인 염려 (vorausspringende Fürsorge)'조차도, '타인'과의 '상호적인 관계'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이 '나'에게 종속되지 않도록 '해방'시켜 주어, 그 '타인' 역시 '나'처럼 '자신의 고유한 죽음'을 홀로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 행위입니다.


메를로-퐁티가 보기에, 이것은 '나'와 '너'가 서로 얽혀 '하나'가 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독한 개인'과 '고독한 개인'이 서로의 '어깨를 치며' 각자의 '본래적 고독' 속으로 되돌아가는, 여전히 '분리된' 관계에 불과합니다. '나'와 '너'는 '함께-있음 (Mitsein)'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자의 죽음'을 향해 가는 '평행선' 위의 존재로 남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이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 하이데거가 놓친 '몸 (Body)'과 '지각 (Perception)'에서 그의 탐구를 시작합니다. '나'는 '너'를 '세계 (도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너'의 '몸'을 '직접' 지각합니다. '나의 몸 (살)'이 '너의 몸 (살)'을 만날 때, 우리는 이미 '하나의 세계 (세계의 살)' 속에서 '뒤얽혀 (Entrelacs)' 있습니다. '나'에게 '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와 '같은 살'로 숨 쉬는 '직접적인 현존'입니다. 따라서 '타자와의 연결'은, '나'의 존재를 위한 '배경'이나 '간접적인' 단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나'와 '너'는 '같은 살'로 얽혀있기에, '너'의 현존은 '나'의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이데거의 '공동존재'라는 개념이 '갇힌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명료합니다.


첫째, 그것은 '고립'이 '환상'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나'는 '홀로' 존재한다고 믿는 '무지'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존재'의 개념은, '나'가 '존재'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타인'과의 '연결망' 속에 '함께-존재'하고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나'는 결코 '타인'과 '분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둘째, 그것은 우리의 '연결'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폭로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가능성'을 '대신' 살아주며, 그를 '나'의 '소유물 (그것)'로 전락시키는 '비본래적인 염려'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라는 말은, "나는 너를 지배하겠다"는 말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셋째, 그것은 '진정한 연결'이 무엇인지를 제시합니다. '본래적인 염려'는 '타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결'은 '타인'이 '나'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비움'이란, '타인'을 '지배'하려는 '나'의 '염려'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연결'이란, 타인을 '나'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상대방이 '그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 즉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되찾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짐을 '대신' 짊어짐으로써 그를 '무능력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닙니다. 대신, 그가 '스스로' 그 짐을 짊어지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그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 '자유'를 되찾아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결'은 이처럼 상대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3-10.3. 정신분석과 관계



우리는 흔히 '마음'이 내 머릿속, 두개골 안에 안전하게 밀봉되어 있는 독립된 영토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내면으로 파고들어 스스로를 분석하거나, 홀로 명상을 하거나, 혹은 의지를 다지며 '나'를 수선하려 듭니다. 하지만 현대 정신분석학이 도달한 가장 혁명적인 결론은, 이 '고립된 마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거대한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결코 홀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진공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라는 토양 위에서만 비로소 싹트고 자라나는 '상호적인 현상'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맺어온 수만 가지 관계들의 총합이자, 그 관계들이 남긴 흔적들의 퇴적층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치유와 '연결'은 내 안으로의 침잠이 아니라,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방식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관계의 심리학'을 여는 첫 번째 열쇠는 '대상관계이론 (Object Relations Theory)'입니다. 여기서 '대상 (Object)'이라는 용어는 다소 차갑게 들릴 수 있지만, 이는 정신분석학에서 '나의 욕구가 향하는 타인', 즉 '중요한 사람'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입니다. 대상관계이론의 핵심은, 우리가 맺는 현재의 모든 관계가 사실은 과거, 특히 생애 초기에 부모와 맺었던 관계의 '재상영'이라는 통찰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와 상호작용하며 그 경험을 마음속에 '내면화 (Internalization)'합니다. 아이는 단순히 '엄마'라는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안아주는 엄마와 사랑받는 나' 혹은 '거절하는 엄마와 무가치한 나'라는 '관계의 패턴'을 마음속에 각인합니다.


성인이 된 우리는 이 '내면화된 관계의 지도'를 들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연인, 친구, 직장 상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대신 내 마음속에 저장된 '과거의 대상 (부모의 상)'을 그들에게 덧씌웁니다. 이를 '투사 (Projection)'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조금만 비판해도 견딜 수 없이 화가 난다면, 그것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비판적인 부모상'이 건드려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린다면, 그것은 내 안의 '결핍된 아이'가 그를 통해 구원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대상관계이론은 우리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드라마'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음을 폭로합니다. '비움'이란 바로 이 낡은 내면의 지도를 비워내고, 지금 내 앞에 있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 내면의 지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가장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토대 위에서 규명한 인물은 영국의 정신분석가 존 보울비 (John Bowlby, 1907-1990)입니다. 그는 '애착 이론 (Attachment Theory)'을 통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가 '성욕'이나 '식욕'이 아니라, '연결'과 '안전'임을 증명했습니다. 보울비는 2차 대전 직후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의식주가 해결됨에도 불구하고 시들어가고 죽어가는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영양분이 아니라, 공포와 불안 속에서 달려가 안길 수 있는 '안전 기지 (Secure Base)'로서의 양육자임을 깨달았습니다.


애착은 생존을 위한 본능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혼자서 생존할 수 없기에, 양육자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립니다. 이때 양육자가 아이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일관되게 돌봐주면, 아이는 '안정 애착'을 형성합니다. 아이는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고, 세상은 믿을 만한 곳이다"라는 믿음, 즉 '내적 작동 모델'을 갖게 됩니다. 이 믿음은 평생 동안 그가 맺을 모든 관계의 든든한 뿌리가 됩니다. 반면, 양육자가 무관심하거나 일관성이 없다면, 아이는 '불안정 애착'을 형성합니다. 버림받을까 봐 끊임없이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불안형'이 되거나,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예 관계를 차단하고 고립을 선택하는 '회피형'이 됩니다.


보울비의 통찰 중 현대인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것은 '독립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흔히 '의존'을 나약한 것으로, '독립'을 성숙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보울비는 "건강한 독립은 오직 충분한 의존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했습니다. 든든한 '안전 기지'가 있는 사람만이, 그 믿음을 바탕으로 두려움 없이 세상 밖으로 모험을 떠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내가 안심하고 의존할 수 있는 '단 한 사람'과의 깊은 연결이 필요합니다. '연결'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를 위한 발사대입니다.


이 '연결'의 공간이 어떻게 '창조'와 '문화'의 공간으로 확장되는지를 가장 시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풀어낸 분석가는 도널드 위니캇 (Donald Winnicott, 1896–1971)입니다. 소아과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수만 명의 아이들과 엄마들을 관찰하며 "아기라는 것은 없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a baby)"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기는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아기와 엄마'라는 '관계'로서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위니캇의 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개념은 '과도 대상 (Transitional Object)'과 '잠재 공간 (Potential Space)'입니다. 아기는 태어날 때 엄마와 자신이 하나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점차 자라면서 엄마가 나와 다른 존재임을, 즉 내가 엄마를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분리'의 순간은 아기에게 끔찍한 공포입니다. 이때 아기는 담요나 곰 인형 같은 특정한 사물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과도 대상'입니다.


이 낡은 담요는 단순한 사물이 아닙니다. 아기에게 그것은 '엄마 (나를 지켜주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엄마가 아닌 것 (내가 조작할 수 있는 사물)'입니다. 그것은 '나'와 '너' 사이의 중간 지대,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마법의 물건입니다. 위니캇은 부모가 이 과도 대상을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낡은 인형이야말로, 아이가 '분리'의 공포를 견디며 '독립된 자아'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위니캇은 이 과도 대상이 머무는 영역을 '잠재 공간 (Potential Space)'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은 '나 (주관)'의 세계도 아니고, 완전히 객관적인 '현실'의 세계도 아닌, 그 둘이 겹쳐지는 '제3의 공간'입니다. 아이는 이 공간에서 '놀이 (Play)'를 합니다. 놀이는 현실의 사물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입히는 행위입니다. 빗자루는 말이 되고, 상자는 성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잠재 공간'이 어린 시절에만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른이 되면 이 공간은 '문화'와 '예술', '종교'와 '창조적 삶'의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우리가 음악을 듣고 감동하거나, 소설을 읽으며 다른 세계에 빠져들 때, 우리는 바로 이 '잠재 공간'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 공간은 팍팍한 객관적 현실 (먹고사는 문제)과 고립된 주관적 공상 (망상) 사이에서,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여백'이자 '놀이터'입니다. 현대인이 겪는 무기력과 권태는, 바로 이 '잠재 공간'이 닫혀버렸기 때문입니다. 너무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버려 '놀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위니캇에게 '연결'이란 단순히 타인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나 사이에 이 풍요로운 '놀이의 공간', '창조의 공간'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현대 정신분석학은 이제 '일인 심리학 (One-Person Psychology)'을 넘어 '이인 심리학 (Two-Person Psychology)', 즉 '간주관성 (Intersubjectivity)'의 시대로 나아갑니다. 간주관성 이론은, 상담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환자 혼자만의 심리 과정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환자의 마음과 분석가의 마음이 만나서 함께 만들어내는 '상호적인 춤'입니다.


과거의 분석가는 환자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거울'이나 '빈 스크린'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간주관성 이론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분석가 역시 자신의 성격, 과거, 감정을 가진 사람이며, 환자의 말과 행동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습니다. 환자의 '분노'는 환자 내부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분석가의 미묘한 표정이나 말투에 대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분석가의 '지루함'은 환자의 회피적인 태도에 대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마음'은 두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장 (Interactional Field)'에서 '공동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나의 감정은 온전히 나의 것도 아니고, 너의 감정도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의 무의식에 끊임없이 파동을 일으키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치유는 환자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맺고 있는 이 '관계의 패턴'을 함께 인식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의 경험'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공동-발생'이나 '연기법'의 지혜와 정확히 맞닿아 있는, 현대 심리학의 최전선입니다.


첫째, 우리는 '완벽한 부모', '완벽한 타인'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도널드 위니캇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그만하면 좋은 엄마 (Good-enough mother)'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완벽한 양육은 오히려 아이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엄마가 적절히 실패해 줄 때, 아이는 자신의 전능감에서 벗어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도 '완벽함'을 기대합니다.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고, 내 마음을 완벽하게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만하면 좋은' 타인이면 충분합니다. 서로의 결핍과 실수를 용인하는 '여백(잠재 공간)'이 있을 때, 비로소 관계는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자신의 '의존성'을 인정하고 '취약해질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홀로 서기'를 강요하지만, 존 보울비 (John Bowlby, 1907-1990)가 밝혀냈듯이 인간은 본래부터 누군가에게 '의존'하도록 설계된 존재입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고, 외로울 때 손을 내미는 것은 미성숙함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증거입니다.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때, 비로소 우리는 깊은 수준에서 타인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가면을 쓰고 강한 척하는 '거짓 자기 (False Self)'로는 결코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진정한 연결은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공유할 때 일어납니다.


셋째, 우리는 잃어버린 '놀이'의 공간을 반드시 되찾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강박에 갇혀 있습니다. 모든 관계를 '이익'과 '손해'로만 계산하는 태도가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니캇이 말한 '잠재 공간 (Potential Space)', 즉 현실의 의무에서 벗어난 마음의 여유 공간을 다시 열어야 합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대화하고, 함께 웃고, 예술을 즐기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그 '비어있는 틈'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서만 삶의 창조성이 싹트고, 진정한 기쁨이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팍팍한 '업무'가 아니라, 즐거운 '놀이'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간주관성 (Intersubjectivity)의 지혜는, 내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곧 타인의 반응을 결정하고, 그것이 다시 나를 만든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내가 상대를 '적'으로 대하면 그는 나에게 '적'이 되고, 내가 상대를 '너'로 대하면 그는 나에게 '너'가 됩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매 순간 서로를 구원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움'은 나를 꽉 채우고 있는 '과거의 유령(내면화된 낡은 대상)'들을 비워내는 것이며, '연결'은 지금 내 앞의 타인과 함께 새로운 '놀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의 공간에서, 우리는 비로소 고립된 개인이 아닌, 서로에게 얽혀 살아 숨 쉬는 온전한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3-10.4. 페미니즘과 돌봄의 윤리



우리는 오랫동안 '정의 (Justice)'의 언어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공정한 법칙, 침해할 수 없는 권리, 그리고 이성적인 판단이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견고한 '정의의 왕국'에서 인간은 홀로 서 있는 독립적인 자아이며,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유로운 존재로 규정됩니다. 하지만 이 차가운 법정의 논리가 놓치고 있는 거대한 침묵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픈 아이의 곁을 밤새 지키는 어머니의 떨리는 손길이며, 늙고 병든 부모를 부축하는 자식의 고단한 어깨이며, 친구의 슬픔을 듣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누군가의 경청입니다. 이들은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과 돌봄의 윤리'는 바로 이 침묵의 영역을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려, 인간이 맺는 관계의 본질이 '권리의 계약'이 아니라 '책임의 보살핌'임을 선언하는 혁명적인 전환입니다.


이 새로운 목소리는 1982년, 심리학자 캐럴 길리건 (Carol Gilligan, 1936-)이 출간한 『다른 목소리로, In a Different Voice』를 통해 세상에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심리학계는 로렌스 콜버그 (Lawrence Kohlberg, 1927-1987)의 도덕 발달 이론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콜버그는 도덕성이 '처벌 회피'에서 시작하여 '사회적 규약 준수'를 거쳐, 마침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의의 원칙'을 확립하는 단계로 발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인간관계의 맥락을 중시하는 여성들은 종종 남성보다 도덕적 발달이 덜 된 존재로 평가받았습니다.


길리건은 이 편향된 잣대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녀는 유명한 '하인츠 딜레마 (Heinz Dilemma)'—돈이 없어 죽어가는 아내를 위해 약을 훔쳐야 하는가—에 대한 소년과 소녀의 대답을 비교 분석했습니다. 소년들은 "생명은 재산보다 소중하다"는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공식을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반면 소녀들은 "약을 훔치면 감옥에 갈 것이고, 그러면 아픈 아내는 누가 돌보는가?"라며 관계의 단절을 걱정하고, 약사와 대화로 해결할 방법을 찾으려 했습니다. 기존의 시각에서 소녀들의 대답은 '우유부단함'이었지만, 길리건은 이것이 열등함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가지 도덕적 언어임을 밝혀냈습니다. 남성의 언어가 분리와 규칙에 기반한 '정의의 윤리 (Ethics of Justice)'라면, 여성의 언어는 연결과 책임에 기반한 '돌봄의 윤리 (Ethics of Care)'였던 것입니다. 길리건은 우리가 '관계의 그물망 (web of relationships)' 속에 살고 있으며, 도덕적 성숙이란 이 그물망을 끊지 않고 유지하는 능력임을 일깨웠습니다.


길리건이 발견한 이 '다른 목소리'를 독자적인 도덕 철학으로 심화시킨 인물은 넬 노딩스 (Nel Noddings, 1929-2022)입니다. 그녀는 윤리학의 오랜 전통이었던 '보편적 원칙'과 '의무'의 자리에, 구체적이고 생생한 '만남'을 놓았습니다. 노딩스에게 돌봄은 "너는 반드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차가운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배려하는 자 (one-caring)'와 '배려받는 자 (cared-for)' 사이에서 일어나는 살아있는 상호작용입니다.


노딩스는 진정한 돌봄의 상태를 '몰입 (Engrossment)'과 '동기 전치 (Motivational Displacement)'로 설명합니다. '몰입'은 나의 판단과 자아를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세계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상대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나의 전 존재로 받아들이는 수용성입니다. 그리고 '동기 전치'는 나의 에너지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해 흐르는 것입니다. 내 빵을 먹고 싶다는 동기보다, 굶주린 너에게 빵을 주고 싶다는 동기가 더 우선시되는 상태입니다.


노딩스는 이를 '자연적 배려 (natural caring)'와 '윤리적 배려 (ethical caring)'로 구분합니다. 우리가 자식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를 볼 때 저절로 우러나오는 마음이 '자연적 배려'라면, '윤리적 배려'는 그 자연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때조차, "나는 돌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의지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입니다. 중요한 것은 윤리적 배려가 결국은 자연적 배려의 회복을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돕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된 본래의 기쁨을 되찾기 위해 돌봄을 수행합니다. 노딩스의 철학에서 '나'는 타인에 대한 지배자도, 시혜자도 아닙니다. 나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입니다. 아기가 미소로 응답할 때 엄마의 돌봄이 완성되듯, 돌봄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상호적인 생명력의 순환입니다.


이러한 '돌봄'의 재발견은 필연적으로 인간 존재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의존성 (Dependency)'에 대한 성찰로 이어집니다. 근대 사회는 '독립'을 성숙의 척도로, '의존'을 수치스러운 미성숙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강한 개인,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슈퍼히어로가 되기를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 생애의 극히 짧은 전성기만을 기준으로 삼은 거대한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전적으로 의존적인 아기로 태어나,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노년과 질병의 시기를 겪습니다. 의존은 예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인간 조건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페미니즘 윤리가 말하는 '돌봄'은 단순히 여성에게 부과된 가사 노동이나 육아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 우리 모두가 근원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vulnerable)'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용기입니다. 내가 오늘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누군가가 도로를 청소하며, 누군가가 나의 안전을 위해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노동과 돌봄에 기생하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돌봄 윤리는 이 숨겨진 의존의 사슬을 가시화하고, 그것을 부끄러움이 아닌 '연대'의 근거로 삼습니다.


이 '취약성 (Vulnerability)'의 문제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가장 널리 확장시킨 사상가가 바로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1956-)입니다. 버틀러는 우리가 흔히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치부하는 슬픔과 상실, 그리고 상처받을 가능성을 공적인 윤리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녀는 "우리는 서로에 의해 허물어집니다 (We are undone by each other)"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단순히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붕괴를 경험합니다. 이 붕괴는 역설적으로 내가 타인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증명합니다. 나의 몸, 나의 자아는 나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고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버틀러는 이 상처받기 쉬움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어떤 이들의 삶은 안전하게 보호받지만, 어떤 이들의 삶은 전쟁, 빈곤, 차별 속에서 끊임없이 위태로움(precarity)에 노출됩니다. 어떤 죽음은 전 세계가 애도하지만, 어떤 죽음은 신문 한 줄에도 실리지 않습니다. 버틀러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감응할 수 있는 능력, 즉 '애도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공동체를 묶는 가장 강력한 끈이라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있어 '우리는 모두 상처받기 쉽다'는 깨달음은 무력감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에 대한 저항의 근거입니다. 내가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은, 나 또한 타인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나의 몸이 타인의 손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타인의 생명 또한 나의 손길에 달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비폭력은 도덕적 계율이 아니라, 우리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필연적인 긍정입니다. 버틀러의 사유 속에서 돌봄은 사적인 친절을 넘어, 누구의 삶도 '애도 불가능한 것'으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치열한 정치적 연대가 됩니다.


이 페미니즘과 돌봄의 윤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성과'와 '경쟁'에 중독된 피로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기대지 않기 위해 갑옷을 두르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며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질주합니다. 그러나 길리건, 노딩스, 그리고 버틀러는 우리에게 멈춰 서서 그 갑옷을 벗으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독립은 환상이며, 당신의 강함은 위태로운 가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여성이기에, 혹은 착한 사람이기에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의 살 (flesh)을 맞대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수행해야 하는 가장 인간적인 의무입니다. 돌봄은 '약함'이 아니라, 세상을 유지하는 가장 '강한 힘'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누군가의 아픔에 몰입하며, 나의 시간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그 순간, 우리는 차가운 정의의 법정을 넘어 따뜻한 생명의 그물망을 짜게 됩니다.


결국 돌봄의 윤리는 우리에게 '사람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습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홀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또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받기 쉽기에 서로가 필요하고, 서로가 필요하기에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취약함의 연대야말로, 무한 경쟁의 시대를 건너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유일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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