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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1장: 자연과의 연결

by DrLeeHC

제3-11장: 자연과의 연결



3-11.1. 생태학적 자아: 나는 자연이다



우리는 흔히 내 피부가 나라는 존재의 경계선이라고 믿습니다. 피부 안쪽은 '나'이고, 피부 바깥쪽은 '내가 아닌 것', 즉 환경이나 타자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가 거대한 나무 둥치에 손을 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셔 보십시오. 당신이 들이마시는 산소는 조금 전까지 저 나무의 잎사귀 속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뱉는 이산화탄소는 잠시 후 저 나무의 몸이 될 것입니다. 공기는 내 몸과 나무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생명을 섞습니다. 이 호흡의 과정에서 도대체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나무입니까?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나'라는 경계는 사실 생물학적으로나 물리학적으로나 허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단절된 개체가 아니라, 거대한 생명의 흐름 그 자체입니다. '생태학적 자아 (Ecological Self)'는 바로 이 흐릿한 경계선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자아입니다. 그것은 좁은 에고 (Ego)의 감옥을 부수고 나와, 숲과 강, 미생물과 행성 전체로 '나'의 정체성을 확장하는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철학적 토대로 정립한 인물은 노르웨이의 철학자이자 산악가였던 아르네 네스 (Arne Næss, 1912-2009)입니다. 그는 1973년, 현대 환경 운동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심층생태학 (Deep Ecology)'이라는 개념을 주창했습니다. 네스는 당시의 환경 운동을 '표층생태학 (Shallow Ecology)'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표층생태학은 환경 오염을 걱정하고 자원 고갈을 염려하지만, 그 중심에는 여전히 '인간'이 있습니다. "공기가 더러우면 인간이 병에 걸리니까", "자원이 없으면 경제가 망하니까"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나 '자원'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에 갇혀 있습니다.


반면 네스가 제창한 '심층생태학'은 질문의 깊이가 다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자연을 효율적으로 관리할까?"를 묻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네스는 모든 생명체가 인간의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 (Intrinsic Value)'를 지닌다고 선언했습니다. 강물은 식수원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라, 강물로서 흐를 권리가 있기에 소중합니다. 곰은 가죽이나 구경거리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기에 소중합니다.


심층생태학의 핵심 실천은 '자아실현 (Self-realization)'입니다. 여기서 대문자 'S'로 쓰인 '자아 (Self)'는 우리가 흔히 아는 소문자 's'의 '자아 (self, 에고)'와 다릅니다. 작은 자아 (self)는 사회적 지위나 소비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는 좁은 나입니다. 반면 큰 자아 (Self)는 너와 나의 구분을 넘어 모든 생명과 연결된 '확장된 자아'입니다. 네스는 우리가 이 '큰 자아'를 깨달을 때, 환경 보호가 더 이상 '의무'나 '희생'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니까 손가락을 자르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며 참지 않습니다. 당신은 손가락이 곧 '나'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끼고 보호합니다. 네스의 통찰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나의 확장된 몸'으로 인식하게 되면 (생태학적 자아),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라고 강요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치 내 몸을 돌보듯이 숲과 강을 돌보게 됩니다. 이것은 칸트적인 '의무의 윤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경향성의 윤리'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네스는 이를 "아름다운 행위 (Beautiful Action)"라고 불렀습니다. 의무감에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 '확장된 자아'의 감각은 나의 신체를 넘어 행성 전체로 뻗어 나갑니다. 이러한 인식의 지평을 우주적 차원으로 넓혀준 인물이 바로 영국의 대기화학자이자 독립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 (James Lovelock, 1919-2022)입니다. 그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지구를 죽어있는 암석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혁명적인 시각을 선사했습니다.


러브록의 통찰은 1960년대, 그가 NASA의 화성 생명체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탐사선을 보내 토양을 채취하는 방식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러브록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 행성의 대기에는 어떤 흔적이 남을까?" 그는 화성과 지구의 대기 성분을 비교 분석했고, 그 결과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화성의 대기는 이산화탄소가 95% 이상을 차지하며 화학적으로 완벽한 '평형 상태', 즉 더 이상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죽어있는 상태'였습니다. 반면, 지구의 대기는 산소 (21%)와 메탄, 질소 등이 혼재된 상태였습니다. 화학적으로 산소와 메탄은 서로 반응하여 사라지기 쉬운 기체들이기에, 이들이 공존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누군가가 이 기체들을 공급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지구의 대기는 극도로 불안정하지만, 놀랍도록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러브록은 이 대기의 구성 자체가 단순한 물리적, 화학적 현상이 아니라,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집단적으로 만들어내고 조절하는 거대한 작품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통찰을 바탕으로 정립한 이론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윌리엄 골딩의 제안을 따라, '가이아 이론 (Gaia Theory)'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으로, 만물의 어머니를 상징합니다. 러브록에게 지구는 단순히 생명체가 살아가는 무대가 아닙니다. 지구는 생물권 (미생물, 식물, 동물 등 모든 생명체)과 무생물권 (대기, 해양, 토양, 암석)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온도와 화학적 조성을 생명이 살기에 적합한 상태로 조절하는 거대한 '자기 조절 시스템(Self-regulating System)'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몸의 생리적 작용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인간의 몸은 외부 온도가 변해도 땀을 흘려 열을 식히거나 몸을 떨며 열을 내어 체온을 36.5도로 일정하게 유지합니다. 체내의 염분 농도나 산성도 (pH) 역시 정밀하게 조절됩니다. 이를 생물학 용어로 '항상성 (Homeostasis)'이라고 합니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거대한 항상성을 지닌 하나의 생명 시스템처럼 작동한다고 주장합니다. 태양의 열기가 지구가 탄생했을 때보다 25% 이상 뜨거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생명체가 생존 가능한 범주의 온도를 기적처럼 유지해왔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가이아 시스템의 치열한 자기 조절 결과입니다.


가이아 이론은 우리가 흔히 '환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명체와 분리된 수동적인 배경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숲은 단순히 땅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숲은 거대한 '에어컨'이자 '가습기'입니다. 나무들은 증산 작용을 통해 수분을 대기로 뿜어내어 구름을 만들고, 이 구름은 태양 빛을 반사하여 지구의 온도를 낮추며, 다시 비가 되어 내리게 합니다. 아마존 열대우림이 사라지면 단순히 나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냉각 시스템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바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바다 표면에 사는 미세한 조류인 플랑크톤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몸을 만들고, 죽어서는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습니다. 이들은 대기 중의 탄소를 조절하는 지구의 '폐'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한, 특정 플랑크톤은 구름의 핵이 되는 황 성분을 배출하여 바다 위에 구름을 형성하게 돕습니다. 이처럼 미생물 하나, 나무 한 그루가 모두 가이아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유지하는 정교한 부품이자 행위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가이아라는 거대한 생명체의 신경계나 세포의 일부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구 위에서 (on the Earth)' 발을 딛고 사는 독립된 객체가 아니라, '지구의 일부로서 (as part of the Earth)'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뼈는 지구의 암석 성분인 칼슘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 몸의 물은 지구의 순환하는 물과 다르지 않으며, 우리가 마시는 공기는 식물들이 뿜어낸 숨결입니다.


러브록의 경고는 시적이지만 서늘한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가이아의 목적은 특정한 생물종 (인간)의 생존이 아니라, '생명 현상 그 자체'의 지속입니다. 우리가 화석 연료를 태우고 숲을 파괴하여 가이아의 자기 조절 능력을 임계점 이상으로 훼손한다면, 가이아는 자신의 건강 (항상성)을 회복하기 위해 시스템을 재설정할 것입니다. 열이 나면 우리 몸이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체온을 높이듯이, 가이아는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원인인 인간 종을 '병원균'처럼 인식하여 제거하거나, 인간이 살기 어려운 척박하지만 새로운 평형 상태로 이동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가이아의 분노나 복수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를 살리기 위한 냉정하고도 필연적인 '생존 본능'입니다.


따라서 가이아 이론은 우리에게 겸손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지구를 마음대로 조작하고 관리할 수 있는 '지구의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우리는 거대한 생명 시스템의 일부로서, 그 시스템의 건강이 곧 나의 생존과 직결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자선 행위가 아니라, 가이아의 일부인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가장 절박한 생존 전략입니다. 러브록의 통찰은 우리에게 좁은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 행성적 차원의 '확장된 자아'로서 지구와 공생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제임스 러브록이 거시적인 시각에서 지구 전체를 하나의 생명 시스템인 '가이아'로 바라보았다면,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 (Lynn Margulis, 1938-2011)는 현미경을 통해 미시적인 세포의 세계로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근대적 세계관을 지탱해 온 '경쟁'과 '독립'의 신화가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허구임을 증명해 냈습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래, 우리는 자연을 '피 튀기는 전쟁터'로 이해해 왔습니다. "적자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과 "약육강식"은 생명 진화의 유일한 법칙처럼 여겨졌고, 이는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나'라는 개체는 타자와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고립된 전사였습니다. 하지만 마굴리스는 이러한 다윈주의적 통념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약은 '경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몸을 섞고 합치는 '공생 (Symbiosis)'과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녀가 주창한 '공생발생설 (Symbiogenesis)'은 생명의 진화가 점진적인 돌연변이의 축적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생명체들의 '급진적인 합병'을 통해 일어난다는 혁명적인 이론입니다.


마굴리스의 시간 여행은 약 20억 년 전, 원시 지구의 바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지구는 산소가 희박했고, 단세포 생물인 박테리아 (세균)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다 대기 중에 산소 농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산소 혁명'이 일어났고, 산소를 독으로 여기던 많은 원시 미생물들은 멸종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생명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떤 거대하고 둔한 단세포 생물 (고세균의 일종으로 추정)이, 작고 재빠르며 산소를 이용하여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박테리아를 삼켜버린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큰 세포가 작은 세포를 소화해 버리거나, 작은 세포가 큰 세포를 감염시켜 죽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화되지 않고 살아남은 이 작은 박테리아는 숙주 세포의 뱃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적대적 공생'을 시작했습니다.


작은 박테리아는 숙주가 두려워하는 산소를 소비하여 엄청난 효율의 에너지를 만들어 숙주에게 제공했습니다. 반대로 숙주는 이 작은 손님에게 안전한 거처와 영양분을 제공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한 동거였을 이 관계는 세대를 거듭하며 서로 없어서는 안 될 필연적인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박테리아가 바로 오늘날 우리 몸속의 세포마다 들어앉아 숨을 쉬게 하고 에너지를 만드는 '미토콘드리아 (Mitochondria)'의 조상입니다. 식물의 경우, 빛을 이용해 에너지를 만드는 박테리아 (시아노박테리아)를 삼켜 '엽록체 (Chloroplast)'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부 공생 (Endosymbiosis)' 이론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동물, 식물, 곰팡이를 포함한 복잡한 생명체 (진핵생물)는, 먼 옛날 서로 다른 박테리아들이 만나 몸을 합친 '합작품'입니다. 마굴리스는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세포핵의 DNA와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DNA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이 본래 독립적인 생명체였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마굴리스의 발견이 우리에게 던지는 철학적 충격은 실로 거대합니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걸어 다니는 박테리아의 군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라는 존재가 단일하고 통일된 개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볼 때, 순수한 '인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약 30조 개의 인간 세포와, 그보다 더 많은 수 (약 39조 개)의 미생물들이 협력하며 살아가는 거대한 '공생 네트워크'이자 '초유기체 (Superorganism)'입니다.


내 피부에는 수많은 박테리아가 숲을 이루어 살고 있고, 내 장 속에는 거대한 미생물 생태계가 우주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기생충이 아닙니다. 장내 미생물이 없다면 우리는 음식을 소화할 수 없고, 비타민을 합성할 수 없으며, 면역 체계를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 미생물들은 우리의 기분과 성격 (뇌의 작용)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 세포 하나하나의 엔진 (미토콘드리아) 속에 이미 '타자 (박테리아)'가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아니, 그 타자가 바로 나를 살게 하는 본질입니다. 내가 숨을 쉴 때마다, 내 안의 20억 년 전 박테리아가 함께 숨을 쉽니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 근대 철학이 세운 '동일성 (Identity)'의 신화를 무너뜨립니다. '나'는 '타자 (Not-I)'를 배제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타자'를 품고 있으며, 그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만 유지됩니다. '순수함'이나 '순혈'은 생물학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생명은 언제나 뒤섞임과 잡종성, 그리고 오염을 통해 진화해 왔습니다.


따라서 '생태학적 자아'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답을 내놓습니다. "나는 치열한 경쟁 끝에 살아남은 고독한 승리자"가 아닙니다. "나는 수십억 년 동안 이어진 낯선 존재들의 만남과 포용, 그리고 공생의 결과물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수조 개의 뭇 생명들과 함께 춤추고 있는 파트너"입니다.


마굴리스는 진화의 원동력이 '피 튀기는 전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 새로운 하나를 만들어내는 '공생적 합병 (Symbiotic Merger)'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통찰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타자, 이방인, 이질적인 문화를 배척하고 경계를 세우는 데 골몰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역사는 '다름'을 받아들이고 내 안으로 통합했을 때 비로소 비약적인 발전과 진화가 일어났음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감상적인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뼈저린 생물학적 사실입니다. 우리는 흙 속의 미생물과 조상을 공유하며, 숲의 나무와 가스를 교환하고, 다른 종의 생명력을 빌려 살아갑니다. 이 '공생'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 내 안의 타자를 인정하고 환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라는 좁은 감옥을 벗어나 거대한 생명의 흐름으로 복귀하는 '생태학적 자아'의 실현입니다.


아르네 네스, 제임스 러브록, 린 마굴리스가 보여준 이 거대한 생태학적 통찰들은, 오늘날 '생태적 우울감 (Ecological Grief)'을 앓고 있는 우리에게 깊은 치유와 행동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기후 위기, 멸종, 걷잡을 수 없는 산불 소식을 접할 때마다 깊은 무력감과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은 우리를 단순한 절망 속에 내버려 두지 않고, 고립된 개인이라는 환상을 넘어 새로운 희망의 차원으로 건져 올립니다.


첫째, '고립감'에서 벗어나십시오. 당신은 도시의 아파트에 갇힌 외로운 개인이 아닙니다. 당신의 숨결은 아마존의 숲과 연결되어 있고, 당신의 세포는 태초의 박테리아와 연결되어 있으며, 당신의 몸은 지구라는 행성의 대순환 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입니다.


둘째, '보호'의 개념을 바꾸십시오. 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남을 돕는 자선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방어 (Self-defense)입니다. 숲을 지키는 것은 나의 확장된 폐를 지키는 것이고, 강을 살리는 것은 나의 확장된 혈관을 청소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는 숲이다", "나는 나 자신을 방어하는 강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의 행동은 강력한 힘을 얻습니다.


셋째, '공생'의 지혜를 배우십시오. 마굴리스가 보여주었듯, 생명은 '나'를 고집하지 않고 타자와 섞일 때 진화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들도 배타적인 경쟁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나와 다른 존재, 심지어 인간이 아닌 존재들 (비인간 행위자)과 어떻게 공생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우리는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결국 '생태학적 자아'를 회복하는 것은, 우리가 잊고 있던 가장 오래된 기억을 되찾는 일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왔고, 별의 먼지로 빚어졌으며, 다른 생명들의 죽음과 삶을 먹고 살아갑니다. 이 연결의 감각을 회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좁은 '에고'의 두려움을 넘어, '가이아'의 넉넉한 품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3-11.2. 우주와 인간: 새로운 우주론



우리가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느끼는 감정은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저 광활한 어둠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무한한 공간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덧없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며 압도적인 고독감에 휩싸이곤 합니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우주의 크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초라하게 만들고, 우리는 지구라는 이 작은 행성 구석에 우연히 던져진 먼지 같은 존재라고 스스로를 비하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외감은 우리가 우주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근본적인 착각입니다. 우리는 우주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이방인이 아니며, 차가운 기계 장치 속에 던져진 부속품도 아닙니다. 20세기 후반, 천체물리학과 생태학, 그리고 심오한 영성이 만나 탄생한 '새로운 우주론'은 우리가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정의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주 '안에 (in)'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우주 '그 자체 (as)'라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을 가장 대중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설파한 인물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입니다. 그는 1980년 TV 시리즈 『코스모스』를 통해 전 세계인에게 "우리는 별의 자녀들 (We are star stuff)"이라는 충격적이고도 아름다운 사실을 각인시켰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나 문학적인 수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가장 엄밀한 천체물리학적 사실입니다. 우주 태초의 대폭발, 즉 빅뱅 (Big Bang) 직후에는 오직 수소와 헬륨 같은 가벼운 원소들만이 존재했습니다. 생명을 구성하는 탄소, 우리 핏속의 철, 뼈를 이루는 칼슘, 호흡에 필요한 산소와 같은 무거운 원소들은 그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원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들은 모두 거대한 별들의 뜨거운 내부, 그 핵융합의 용광로 속에서 수억 년에 걸쳐 구워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별들이 수명을 다해 장렬하게 폭발하는 초신성 (Supernova) 단계를 거치며 우주 공간으로 흩뿌려졌고, 그 먼지들이 다시 뭉쳐 태양계가 되고, 지구가 되고, 마침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몸은 138억 년이라는 우주의 역사가 빚어낸 가장 정교한 결과물입니다. 당신의 오른손을 이루는 원자와 왼손을 이루는 원자가 서로 다른 별에서 왔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별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별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눈입니다. 세이건의 통찰은 서구 문명이 오랫동안 고수해 온 '천상'과 '지상'의 이분법을 무너뜨립니다. 신성한 하늘과 비천한 땅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물질로 빚어진 존재이며, 우주는 우리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경이로워합니다. 이 '별먼지'의 자각은 현대인에게 깊은 겸손과 동시에 거대한 자존감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진화가 도달한 찬란한 정점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학적 사실을 인문학적이고 영적인 '이야기'로 승화시킨 사상가는 문명비평가이자 생태신학자인 토마스 베리 (Thomas Berry, 1914-2009)입니다. 그는 현대 사회가 겪는 총체적인 위기, 즉 생태 파괴와 인간 소외, 사회적 분열의 근본 원인이 '기능적인 우주론'의 부재에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과거의 인류에게는 세상을 설명해 주는 신화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대 과학이 발달하면서 우주는, 오직 물리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영혼 없는 기계 장치'로 전락했고, 종교적 이야기들은 과학적 사실과 괴리되어 힘을 잃었습니다. 베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 (The New Story)', 즉 과학적 발견을 수용하면서도 우주를 신성한 의미의 장으로 읽어내는 새로운 우주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베리의 우주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명제는 "우주는 '이용해야 할 물건 (객체)들의 창고'가 아니라, '서로 대화하는 존재 (주체)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객체 (Object)들의 집합'으로 본다는 것은, 세상을 거대한 '자재 창고'로 본다는 뜻입니다. 이 관점에서 산은 '캐내야 할 광물'이고, 숲은 '베어낼 목재'이며, 강은 '공업 용수'일 뿐입니다. 객체는 생명도, 목소리도 없기에 우리는 죄책감 없이 그것을 부수고, 쓰고,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리는 우주가 '주체 (Subject)들의 친교'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우주의 모든 존재—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 작은 벌레 한 마리까지—가 저마다의 고유한 내면과 신성한 권리를 가진 '주인공'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우주라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동반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지배'하거나 '착취'해서는 안 되며, 마치 가족이나 친구를 대하듯 존중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리가 말한 '친교 (Communion)', 즉 '깊은 사귐'입니다.


베리는 우주의 진화 과정을 지탱하는 세 가지 기본 원리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분화 (Differentiation)'입니다. 우주는 끊임없이 다양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빅뱅의 한 점에 뭉쳐 있던 우주는 팽창하면서 수천억 개의 은하, 수만 가지의 원소, 그리고 지구상의 헤아릴 수 없는 생물 종으로 분화했습니다. 이 다양성은 우주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따라서 획일화를 강요하거나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는 행위는 우주의 제1원리를 거스르는 죄악입니다.


둘째는 '내면성 (Interiority)' 혹은 '주체성 (Subjectivity)'입니다. 모든 존재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고유한 내면의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조차도 자기 조직화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생명과 의식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품고 있습니다.


셋째는 '친교 (Communion)'입니다. 분화된 모든 존재는 서로 고립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전체를 이룹니다. 중력은 물리적인 힘인 동시에,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하나가 되려는 우주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베리에게 인간의 역할은 이 장엄한 우주 이야기의 '의식적 차원'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낸 목소리입니다.


토마스 베리의 제자이자 수학적 우주론자인 브라이언 스윔 (Brian Swimme, 1950-)은 이러한 사상을 더욱 역동적인 '진화'의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그는 우주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합니다. 우주는 완성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되어가는 (becoming)' 과정입니다. 스윔은 빅뱅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사건으로 봅니다. 우주가 시작될 때 터져 나온 그 창조적인 에너지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밖에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회를 변혁하려 할 때 사용하는 그 에너지는 138억 년 전 우주를 탄생시킨 바로 그 에너지입니다.


스윔은 '우주의 힘 (Powers of the Universe)'이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우주를 팽창시키는 힘은 우리 삶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열망으로 나타나고, 별을 뭉치게 하는 중력은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사랑'과 '통합'의 욕구로 나타납니다. 그는 인간을 '우주적 존재 (Cosmic Being)'로 재규정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섭니다. 우리의 눈은 태양 빛을 보기 위해 수억 년에 걸쳐 진화했고, 우리의 귀는 공기의 진동을 듣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즉, 인간의 신체 구조 자체가 우주와의 깊은 상호작용의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나"를 탐구하는 것은 곧 우주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며, 우주를 아는 것은 곧 나의 근원을 아는 것입니다. 스윔은 현대인들이 겪는 만성적인 무력감이 자신이 우주적 과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우주의 거대한 흐름, 그 창조적 전진에 동참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우주론은 단순히 별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 낭만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회, 정치, 윤리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통합 생태론 (Integral Ecology)'의 토대가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 Laudato Si'』에서도 강조된 이 통합 생태론은, 자연의 외침과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천명합니다. 우주가 '주체들의 친교'라면,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는 자연을 파괴하는 구조와 동일한 뿌리를 가집니다. 둘 다 타자를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나의 이익을 위한 '대상'이나 '자원'으로만 취급하는 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베리의 우주론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성장 제일주의'가 우주의 본질을 어떻게 거스르고 있는지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자본주의는 우주의 제1원리인 '분화 (다양성)'를 거대한 시장의 '획일화'로, 제3원리인 '친교'를 타자를 짓밟는 무한한 '경쟁'으로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베리는 이러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인간의 경제와 정치가 우주의 거대한 운행 원리와 다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요구는 구체적인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 '지구 법학 (Earth Jurisprudence)'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지구 법학은 인간만이 법적 권리의 주체라는 낡은 통념을 거부합니다. 대신 강과 숲, 동물과 같은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 역시 존재하고, 서식처를 가지며, 생태적 역할을 수행할 '천부적 권리'를 지닌다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우주 공동체를 구성해 온 동등한 기원이자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환경 보호는 더 이상 인간이 자연에게 베푸는 시혜적인 자선 활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 박탈당한 자연의 권리를 되돌려주고, 파괴된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는 '우주적 정의 (Cosmic Justice)'를 실현하는 가장 시급하고 엄중한 정치적 행위가 됩니다.


또한 영성의 차원에서도 거대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과거의 영성이 세속을 떠나 초월적인 신을 찾는 수직적인 여정이었다면, 새로운 우주론의 영성은 흙과 생명, 그리고 이웃 속에서 신성함을 발견하는 수평적이고 내재적인 여정입니다. 칼 세이건이 보여준 별먼지의 과학은 신비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 자체가 품고 있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태양 에너지를 섭취하고, 숨을 쉬며 대기와 교감합니다. 이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들이 사실은 우주적인 성사 (Sacrament)임을 깨닫는 것, 이것이 통합 생태론적 영성입니다.


이 장엄한 우주 이야기가 오늘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존재의 존엄성'과 '소속감'의 회복입니다.


첫째, 당신은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138억 년 동안 별들이 폭발하고, 은하가 회전하고, 생명이 진화하는 기적 같은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우주는 당신 하나를 피워내기 위해 그 긴 시간을 기다려왔습니다. 당신의 몸값은 별의 값이며, 당신의 생명은 우주 전체의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성공 여부로 자신을 평가하는 얕은 자존감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로서 빛나는 근원적인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현대 사회의 고질병인 고독과 소외는 우리가 '분리된 자아'라는 환상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하지만 새로운 우주론은 우리가 원자 단위에서부터 거대한 은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숲속의 나무와 길가에 핀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 안전하게 안겨 있습니다. 바람이 스칠 때 그것을 지구의 손길로 느끼고, 햇살을 받을 때 그것을 별의 입맞춤으로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텅 빈 방에 홀로 있어도 결코 고독하지 않습니다.


셋째, 우리는 '책임 있는 참여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주 진화의 구경꾼이 아닙니다. 토마스 베리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우주"입니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자신의 행동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성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특권이자 무거운 책임입니다. 우리의 선택, 우리의 소비, 우리의 투표, 우리의 말 한마디가 지구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파괴자가 될 수도 있고, 치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우주론은 우리에게 좁은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지구적인 자아', '우주적인 자아'로 성장할 것을 요청합니다.


결국 우주와 인간에 대한 이 새로운 이야기는, 우리가 잃어버린 '집'을 찾아가는 지도와 같습니다. 우리는 낯선 우주에 내던져진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주가 꿈꾸어온 아이들이며, 우주의 마음이고, 우주의 손과 발입니다. 이 광활한 연결의 진실에 눈뜰 때, 우리는 비로소 갇힌 세계의 문을 열고 나와, 별들과 함께 춤추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별먼지인 우리가 우주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응답입니다.







3-11.3. 생명의 그물: 모든 것은 먹이사슬



우리는 학교 생물 시간에 칠판 위에 그려진 단순한 화살표들을 기억합니다. 풀은 메뚜기에게 먹히고, 메뚜기는 개구리에게 먹히며, 개구리는 뱀에게, 뱀은 매에게 먹힌다는 그 직선의 도식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먹이사슬 (Food Chain)'이라고 배웠습니다. 이 도식 속에서 생명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가집니다. 최상위 포식자는 아래에 있는 존재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승리자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은연중에 그 사슬의 가장 꼭대기, 혹은 그 사슬을 관리하는 초월적인 위치에 자신을 놓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생명의 거대한 진실을 아주 좁은 틈으로 훔쳐본 오해에 불과합니다. 자연에는 사슬 (Chain)이 없습니다. 자연에는 오직 그물 (Web)만이 존재합니다. 먹고 먹히는 관계는 일방적인 착취가 아니라, 에너지가 순환하고 생명이 서로를 부양하는 거대한 '나눔'의 과정입니다. '생명의 그물'이라는 이 새로운 메타포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직선적이고 위계적인 시각에서, 순환적이고 수평적인 시각으로 혁명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현대 과학과 시스템 이론을 통해 가장 정교하게 집대성한 인물이 바로 물리학자이자 시스템 이론가인 프리초프 카프라 (Fritjof Capra, 1939-)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 『생명의 그물, The Web of Life』에서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쪼개어 분석하는 환원주의적 사고를 버리고, 전체적인 '패턴'을 보는 시스템적 사고로 넘어가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카프라에게 생명은 '물질'이 아니라 '패턴'입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속의 분자들은 끊임없이 교체됩니다. 몇 년이 지나면 우리 몸의 물질은 거의 다 바뀝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나'로 존재하는 이유는 물질이 남아서가 아니라, 그 물질들을 조직하는 '관계의 패턴'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카프라는 이 패턴의 본질을 '네트워크 (Network)'라고 정의합니다. 세포 하나에서부터 거대한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 시스템은 네트워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선형적이지 않습니다. A가 B를 만들고 B가 C를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A가 B를 돕고 B가 C를 도우며 C가 다시 A에게 영향을 미치는 '피드백 루프 (Feedback Loop)'의 세계입니다.


이 그물망 안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흙 속의 박테리아가 식물의 뿌리에 질소를 공급하고, 그 식물은 태양 에너지를 당분으로 바꿉니다. 그 식물을 먹은 초식동물은 배설물을 통해 다시 흙으로 영양분을 돌려주고, 죽은 동물의 사체는 곤충과 미생물의 먹이가 되어 다시 흙이 됩니다. 이 순환 속에서 '쓰레기'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배설물은 누군가의 밥이 되고,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 됩니다. 카프라는 이 경이로운 순환 구조야말로 생명이 수십억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지속 가능성의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 직선형 (생산-소비-폐기)이어서 필연적으로 고갈과 오염을 낳는 반면, 자연의 시스템은 원형 (생산-소비-분해-재생산)이기에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단순히 철학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태계 서비스 (Ecosystem Services)'라는 아주 구체적이고 경제적인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물, 공기, 식량, 기후 조절과 같은 생존의 필수 조건들을 마치 공짜로 얻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지구가 거저 주는 선물이 아니라, 생명의 그물망이 치열하게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서비스'입니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연결된 수많은 생명의 숨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커피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열대우림의 기후를 조절하는 구름과 비가 필요하고, 그 구름은 바다의 플랑크톤과 숲의 나무들이 뿜어내는 수증기로 만들어집니다. 또한 커피 꽃을 수정시키는 야생 벌들이 있어야 하며, 흙 속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지렁이와 균류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숲을 밀어버리고 농약을 쳐서 벌과 지렁이를 죽인다면, 그것은 단순히 벌레를 죽인 것이 아니라 커피 생산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생태계 서비스는 인간의 경제 활동과 생존을 밑받침하는 가장 근본적인 자본입니다.


1997년 생태경제학자 로버트 코스탄자 (Robert Costanza, 1950-) 연구팀은 지구가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했을 때, 전 세계 GDP의 두 배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은행에서 원금을 갉아먹으며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 거대한 그물망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힘은 바로 '생물다양성 (Biodiversity)'입니다. 왜 세상에는 수백만 종의 곤충과 이름 모를 잡초들이 존재해야 할까요? 단순히 보기에 아름답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양성은 곧 생명 그물의 '회복탄력성 (Resilience)'이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자 폴 에를리히 (Paul Ehrlich, 1932-)는 이를 '비행기의 리벳 (Rivet)' 가설로 설명합니다. 비행기 날개에는 수천 개의 리벳이 박혀 있습니다. 리벳 하나가 빠진다고 해서 비행기가 당장 추락하지는 않습니다. "이깟 나사 하나쯤이야"하며 하나둘씩 빼다 보면, 어느 순간 임계점에 도달하여 날개 전체가 떨어져 나가고 비행기는 추락합니다. 생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 하나가 멸종한다고 해서 당장 숲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꿀벌이 사라지면 식물의 수분이 멈추고, 식물이 사라지면 초식동물이 굶어 죽고, 흙이 메말라 홍수와 가뭄을 막지 못하게 됩니다. 생물다양성은 생명의 그물을 촘촘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매듭들입니다.


단일 경작 (Monoculture)의 현장은 생태계가 다양성을 잃었을 때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은 효율성을 앞세워 숲을 밀어내고 그곳에 옥수수나 콩, 단 한 가지 작물만을 심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위적으로 단순화된 시스템은 극도로 취약하여, 단 한 번의 병충해만 닥쳐도 전멸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반면, 다양한 식물과 곤충이 어우러진 숲은 어떤 위기가 닥쳐도 서로를 보완하며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이처럼 다양성은 생명이 불확실한 미래와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련한 가장 지혜로운 보험입니다. 그러므로 생물다양성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미래의 안전장치를 우리 손으로 해체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생명의 그물을 무참히 찢어발기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현재 '제6차 대멸종 (The Sixth Extinction)'의 한복판에 있다고 경고합니다. 지구 역사상 다섯 번의 대멸종은 소행성 충돌이나 화산 폭발 같은 자연재해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섯 번째 멸종은 오직 단 하나의 종,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야생 동물 개체군의 69%를 사라지게 했습니다. 숲은 불타고, 산호초는 하얗게 죽어가며, 북극의 얼음은 녹아내립니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생명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수십억 년의 진화가 기록된 유전 정보들, 각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며 터득한 생존의 지혜들이 영원히 소실되고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그물의 붕괴가 우리 인간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는 사실입니다.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은 우리가 야생 동물의 서식지를 침범하고 생태계의 완충 지대를 파괴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그물망이 찢어지면 그 위에 서 있는 우리도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6차 대멸종은 우리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습니다. 우리는 가해자인 동시에, 이 파국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적인 해결책 이전에, 존재론적인 회심입니다. "나는 자연의 주인이다"라는 오만을 버리고, "나는 생명의 그물 속 한 가닥 실이다"라는 겸손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인들에게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첫째, '연결된 소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마트에서 집어 든 물건 하나가 지구 반대편의 숲을 파괴하고 있는지, 누군가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는지, 어떤 화학 물질을 강으로 흘려보냈는지를 상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갑은 투표용지입니다. 생명의 순환을 존중하는 유기농 농산물, 공정 무역 제품, 그리고 플라스틱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착한 소비가 아니라, 찢어진 생명의 그물을 기워내는 행위입니다.


둘째, '불편함의 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태계의 순환을 따르는 삶은, 편리함과 속도를 숭배하는 현대 사회의 기준에서는 불편하고 느립니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가까운 거리는 걷고, 에어컨 온도를 낮추지 않는 일은 귀찮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바로 내가 다른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깨우는 신호입니다. 나의 편리함이 누군가의 (혹은 자연의) 고통을 담보로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셋째, '다양성의 환대'를 사회적으로 확장해야 합니다. 건강한 생태계에는 인간이 규정한 '잡초'나 '해충' 같은 무가치한 존재는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생태적 지위', 즉 '틈새 (Niche)'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틈새'는 단순히 비좁은 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체가 전체 시스템 안에서 담당하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역할과 기능을 의미합니다. 지렁이는 흙을 일구는 틈새에서, 꿀벌은 꽃가루를 옮기는 틈새에서 각자의 몫을 다하며 생명의 그물을 지탱합니다.


인간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 낯선 문화, 다른 신체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배제되어야 할 '불필요한 존재'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생태계를 풍요롭고 튼튼하게 만드는 고유한 '틈새'의 주인들입니다. 획일화된 숲이 작은 병충해에도 쉽게 무너지듯, 다양성이 사라진 사회는 작은 위기에도 쉽게 붕괴합니다. 장애인, 이주민, 소수자가 억압받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야말로, 어떤 시련도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하고 건강한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생태학적 지혜는 숲을 지키는 일을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일로 확장됩니다.


우리는 거대한 전환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의 암세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치유하는 면역 세포가 될 것인가? 프리초프 카프라는 "우리가 생명의 그물에 대해 무엇을 하든, 그것은 곧 우리 자신에게 하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무를 베는 것은 나의 살을 베는 것이고, 강을 더럽히는 것은 나의 피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자연의 정점에 있다는 오만한 '위계의 사다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연결되어 있다는 '공존의 둥근 식탁'에 앉아야 합니다.


생명의 그물은 우리가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자원'이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생명 유지 시스템'이자, 우리가 끝내 돌아가야 할 '근원'입니다. 이 연결의 진실 앞에서, 우리는 자연과 싸우는 '고독한 경쟁자'가 아니라, 지구라는 시스템을 함께 유지하고 순환시키는 '겸손한 동반자'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멸종의 위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생존을 위한 가장 엄중하고도 아름다운 진실입니다.






3-11.4. 동물과의 관계: 타자로서의 동물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만이 이 지구의 유일한 주인공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주체이며 역사를 쓰는 저자이지만, 동물은 그저 배경이거나 자원이거나 혹은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장난감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동물을 '봅니다'. 동물원 유리벽 너머에서, 식탁 위 접시 위에서, 혹은 거실의 소파 위에서 우리는 그들을 관찰하고, 먹고, 쓰다듬습니다. 시선은 언제나 인간에게서 동물로 향하는 일방통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선의 권력이 전복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캄캄한 숲길에서 마주친 야생동물의 번득이는 눈빛 앞에서, 혹은 집에서 키우는 개가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깊은 침묵 속에서, 우리는 문득 서늘한 진실을 마주합니다. "저들도 나를 보고 있다." "내가 그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이 낯선 감각은,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우리의 오랜 오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타자로서의 동물'을 사유한다는 것은, 동물을 인간의 아래에 두는 수직적 위계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우리와 마주 선 또 하나의 '영혼'으로, 감히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신비'로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현대 윤리학의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끌어올린 인물은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 (Peter Singer, 1946-)입니다. 그는 1975년 출간된 기념비적인 저서 『동물 해방, Animal Liberation』을 통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 똑같은 논리적 구조를 가진 '종차별주의 (Speciesism)'라는 개념을 고발했습니다. 종차별주의란 단순히 인간 종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을 우대하고,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동물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싱어의 논리는 공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도덕적 고려의 기준이 '이성'이나 '언어 능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벤담의 질문처럼,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가? 아니면 말할 수 있는가? 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Can they suffer?)"여야 합니다. 고통은 생물학적 사실입니다. 인간이 칼에 베이면 아프듯이, 돼지도 칼에 베이면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즉 '쾌고감수능력 (Sentience)'을 가진 모든 존재는 그 고통을 피할 권리가 있으며, 그들의 이익은 인간의 사소한 이익 (미각의 즐거움이나 패션)보다 동등하거나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싱어는 현대의 공장식 축산과 불필요한 동물 실험이 나치 수용소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고 강변합니다. 우리가 지능이 낮은 인간이나 유아를 실험 도구로 쓰지 않으면서, 지능 높은 침팬지를 실험하는 것은 오직 '종이 다르다'는 편견 때문입니다. 싱어에게 동물 윤리는 감상적인 동물 애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의 총량을 줄이고 행복의 총량을 늘려야 한다는 냉철한 이성적 계산이자 정의의 문제입니다.


피터 싱어가 '고통'과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동물의 지위를 격상시켰다면, 미국의 철학자 톰 레건 (Tom Regan, 1938-201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권리'의 차원에서 동물을 옹호합니다. 그는 싱어의 공리주의가 위험할 수 있다고 비판합니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만약 한 마리의 동물을 희생시켜 백 명의 인간이 큰 행복을 얻는다면 그 희생은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건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게는 결코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내재적 가치 (Intrinsic Value)'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레건은 이를 '삶의 주체 (Subject-of-a-life)'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어떤 존재가 믿음, 욕구, 지각, 기억, 미래에 대한 감각, 쾌락과 고통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주체적인 능력이 있다면, 그 존재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톰 레건은 이 주장을 '노예제도'에 비유하여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만약 어떤 노예 주인이 노예를 때리지 않고 배불리 먹이며, 깨끗한 잠자리를 제공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 노예제도는 정당한 것일까요? 레건은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노예를 아무리 '인도적'으로 대우한다 해도, 인간을 주인의 이익을 위한 '도구'나 '자원'으로 취급한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건에게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소나 돼지를 아무리 넓은 축사에서 고통 없이 키운다 해도 (동물 복지), 결국 그들을 인간의 식탁에 오를 고기 (자원)로 보는 한, 그것은 동물의 '내재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동물은 인간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기쁨과 고통을 느끼며 자신만의 삶을 이어가는 '삶의 주체'입니다. 따라서 레건의 동물 권리론은 단순히 축산 환경을 조금 더 좋게 개선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노예제도 자체가 폐지되어야 했듯이, 그는 동물을 자원으로 이용하는 모든 시스템 (식용, 실험, 동물원 등)의 '완전한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이처럼, 싱어와 레건이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려 했다면,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2004)는 동물과의 만남이 주는 존재론적 충격에 주목합니다. 그의 후기 강연을 묶은 『동물, 그러니까 나는,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은 어느 날 아침, 욕실에서 벌거벗은 채로 자신의 고양이와 마주친 데리다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됩니다.


데리다는 옷을 벗은 채 고양이의 시선을 받으며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 부끄러움은 단순히 알몸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인 자신이 동물의 시선 앞에 '보이는 존재 (대상)'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서양 철학사에서 인간은 언제나 '보는 주체'였고, 동물은 '보이는 객체'였습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영혼 없는 기계라고 했고, 칸트는 이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동물을 철학적 개념으로만 다루었지, 실제로 살아있는 고양이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데리다의 고양이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체 불가능한 단독자로서, 데리다를 빤히 쳐다보며 질문을 던집니다. 그 시선은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듯합니다. 데리다는 이 '절대적 타자'인 동물의 시선 앞에서 인간의 오만한 주체성이 해체됨을 느낍니다. 그는 우리가 '동물 (Animal)'이라는 단 하나 명사로, 개미부터 고래까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뭉뚱그려 부르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지적합니다. 이는 그들의 무한한 차이와 개별성을 지워버리는 행위입니다. 데리다는 동물이 우리에게 응답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듣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역설합니다. 동물 윤리는 그들을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타자성(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들의 시선 앞에서 나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윤리적 감수성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철학적 논의를 넘어, 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들어와 동물과의 관계를 재정의한 사상가는 도나 해러웨이 (Donna Haraway, 1944-)입니다. 그녀는 『반려종 선언, The Companion Species Manifesto』을 통해, 동물을 단순히 '보호해야 할 약자'나 '권리의 주체'로만 보는 시각을 넘어설 것을 제안합니다. 해러웨이에게 인간과 동물은 서로 분리된 채 평행선을 달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얽히고설키며 진화해 온 '반려종 (Companion Species)'입니다.


'반려 (Companion)'라는 말은 라틴어 'cum (함께)'과 'panis (빵)'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빵을 나누어 먹는 사이'라는 뜻입니다. 해러웨이는 특히 '개'와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인간이 개를 길들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개도 인간을 길들였습니다. 개와 함께 살면서 인간의 뇌 구조와 생활 방식이 변했고, 개 역시 인간에 맞춰 진화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해러웨이는 '자연문화 (Natureculture)'라고 부릅니다. 자연과 문화는 칼로 무 자르듯 나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뒤엉켜 있습니다.


해러웨이는 "동물을 사랑한다"는 감상적인 말이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개를 털 달린 아기처럼 대하며 인간의 욕망을 투사하는 것은 동물의 타자성을 지우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반려종의 윤리는 '존중'과 '훈련'에서 나옵니다. 그녀는 동물 스포츠 훈련 (Agility Training)을 통해 개와 호흡을 맞추는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서로 다른 두 종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몸짓과 눈빛으로 소통하며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릴 때, 그곳에는 지배도 복종도 아닌 '함께-되기 (Becoming-with)'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게 배울 수 있고,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해러웨이에게 윤리는 추상적인 권리 선언이 아니라, 이 진흙탕 같은 현실 속에서 밥을 나누고 똥을 치우며 맺어가는 구체적인 관계의 책임입니다.


이 네 명의 사상가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라는 좁은 감옥에서 걸어 나오라는 것입니다.


첫째, 피터 싱어의 호소처럼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 식탁 위의 고기가, 내 화장품이, 내 옷이 어떤 고통의 과정을 거쳐 왔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가려진 동물의 비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윤리적 삶의 시작입니다.


둘째, 톰 레건의 원칙에 따라 생명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동물을 단순히 자원이나 재산으로 취급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들이 고유한 삶의 주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공장식 축산과 같은 시스템적 착취에 대한 거부로 이어져야 합니다.


셋째, 자크 데리다의 통찰을 빌려 타자의 시선을 견디는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곁에는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를 판단하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수많은 눈동자가 있습니다. 그 낯선 시선 앞에서 우리의 오만함을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 비로소 진정한 만남이 가능합니다.


넷째, 도나 해러웨이가 역설했듯 구체적인 공생의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동물은 우리의 보호 대상이기 이전에,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이자 파트너입니다. 나의 반려동물, 길가의 고양이, 숲속의 야생동물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 그들의 다름을 존중하면서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지, 매일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결국 동물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인간성의 회복입니다. 동물을 타자화하고 학대하는 폭력적인 문명은 인간 스스로를 황폐하게 만듭니다. 반면, 동물을 생명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눈을 맞추는 문명은 훨씬 더 풍요롭고 자비롭습니다. 동물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야성을 일깨워주고, 침묵의 언어를 가르쳐주며, 조건 없는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동물의 얼굴에서 '너'를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고립된 섬을 벗어나 생명의 거대한 대륙으로 연결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동물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동물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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