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해진 시간 채우기

주어진 시간을 길이가 아니라 두께로

by 김태경

회사를 다닐 적에는 내 시간이 사실 내 시간이 아니었다. 하루에 8시간을 회사에 몸을 두고, 회사에 대해 생각하고, 회사를 위해 내 지식과 기술을 사용했다. 회사는 나의 시간과 능력과 생각을 가져가는 대가로 내게 월급을 주었다. 가장 야심차면서도 가장 버퍼링 늦은 월요일을 시작으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지만 할 일은 줄지 않고, 하고 있는 일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종일 회의에 참여해서 일거리만 확인하고 퇴근시간이 되어서야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집에 돌아오면 회사의 시간에 에너지를 다 쓴 덕에 축 쳐져 있거나 짜증이 잎만 열면 발포되도록 준비되어 있고 집안일이고 남편이고 아이들이고 뭐고 상관없이 '빨리빨리'를 외치며 잠자리에 들기에 바빴다. 이렇게 20년 가깝게 세월이 흘러 40대가 되었다.


휴직 중인 지금도 시간은 빠르게 간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이거 저거 다 하고 싶은데 뭐만 조금 하면 벌써 정오가 된다. 게다가 벌써 5월이다. 지금은 누구에게 능력을 인정받지도 않고, 내 시간을 어디에 바친 대가로 월급을 받지도 않는다. 물론 가족들 간식과 식사 챙기고 집안일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고는 있으나 강제력이 없는 까닭에 내 시간은 온전히 내가 주인인 셈이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이 있을까. 뭘 해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일단 시간을 보내는 데 썩 좋지 않은 무익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몇 가지를 정했고 의식적으로 하지 않기 위해서 엄청 노력 중이다.


첫 번째가 SNS와 유튜브 안 보기이다. 나는 SNS와 유튜브를 안 한다. 하지만 아침 시간에 홈트를 하겠다 큰 마음을 먹고 유투브를 켰는데, 운동 영상으로 가기도 전에 여러 가지 영상에 발목에 잡힌다. 오늘 아침에는 가수 이승환과 성시경의 라이브 노래 영상이 나를 걸었고, 최근 시청 중인 드라마 속 오이영과 구도원의 꽁냥꽁냥 영상 짤이 나를 붙잡는다. 운동하겠다고 마음먹고 선 것 큰 일이었는데, 모든 장애물을 제치고 운동 영상을 틀기까지도 험남하기만하다. 그래서 그 영상들에 걸려 20분 정도를 보낸 것 같다.

두 번째가 TV 덜 보기이다. 사실 TV에서 재미있는 것도 안 한다. 안 봐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그런데 1번부터 무수히 많은 채널들을 한번 쫙 돌리고, 뭘 볼까 생각한다. 볼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뭐든 틀어 놓고 멍을 때린다.


유튜브나 SNS, TV시청이 나쁜 것은 아니다. 머리를 식히기에 좋고 복잡한 생각을 잠시 잊는대도 이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나를 향하는 중력에 순종하며 머리부터 발까지 눕혀 놓고 친구 삼기에 이보다 더 환상적인 파트너도 없다. 그런데 너무 많이 보고 나면 항상 후회를 했었다. 벌써 밤이고, 일어나기 싫고, 다시 해야 하는 일을 위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더 큰 마음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이 오늘 하루 다 갔네.." 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고, 흘러가지만 그렇다고 다 같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예전에 목사님 설교 말씀에 시간은 길이가 아니라 두께로 여겨야 한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 말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두텁게 채워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도 새벽같이 나가는 남편을 한번 안아주는 추억을 시간에 채웠고, 둘째 아이에게 학교 갈 시간이라 일어나라 하며 뽀뽀하고 장난치며 소중한 시간을 또 채웠다. 모두 집을 나간 후 나 자신과 싸우며 동네 근처 공원에 가서 30분을 걸었고, 집에 돌아와 유튜브를 틀어 홈트 영상을 보며 또 30분가량을 나의 근력 만들기 시간으로 채웠다. 물론 20분 정도를 이승환과 성시경, 오이영과 구도원에게 흘려보냈지만 말이다.

그리고는 TV를 확 끄고 씻은 후에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먹었다. 먹는 동안 TV를 안 보기로 마음먹고 이번에는 노트북으로 EBS 위대한 수업의 역사 편 중 삼국지에 대한 영상을 잠깐 보았다. 삼국지 역사 연구가의 말을 들으면 분명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삼국지는 '진구'라는 사람이 쓴 역사책으로 총 65권이라는 상식을 얻었다(삼국지의 인문들에 대한 세계 석학의 말을 쭉 들어볼 심산이다).

보기로 마음먹었던 영상까지만 딱 보고 다른 인터넷 사이트는 들어가지 않고 다시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쓴다. 내가 요 며칠 생각했던 것들,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글들,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을 떠 올린다.


내가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게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는 너무나 간절했던 오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좀 더 나를 들여다 보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시간을 두텁게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질문은 사실 오늘 하루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오늘 무슨 일을 할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냐는 생각, 성찰 혹은 기록 그리고 사람들과 하늘, 나무 같은 것들을 관찰하는 일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가 있다.

아이들에게 매일 만들어주는 간식이지만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며 먹는 시간. 학원가는 아이를 안아주며 예쁘다 예쁘다 해 주고 같이 걸어가는 시간, 학원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에게 두 팔 벌려 웃으며 달려가 만나는 시간,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 아주 일상적인 사소한 일들 같지만 사실 회사 다닐 때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빨리빨리 하자, 나 힘들어, 나 쉬고 싶어, 다들 알아서 해.. 하던 그 시간들에서 지금은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웃고, 좀 더 오래 앉아서 밥을 먹고, 한번 더 만져 보고 말을 걸 수 있는 것 같다.


시간을 길이가 아니라 두께로 생각하며 살아보려고 한다.

꼭 나처럼 전업주부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회사에 나가면 이전보다는 좀 더 잘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면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말고 채워 나가 보는 거다. 시간을 채우려면 뭘로 채울지 생각이라는 걸 해야 하고 그 생각이라는 걸 하려면 생각할 시간을 마련해야 하니까 결국 시간을 채우려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난 지금 전업주부로 살고 있지만,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없다. 물론 이승환과 성시경, 오이영과 구도원이 나를 계속 끌어당기겠지만 1교시에서 2교시로 넘어가는 쉬는 시간 정도로만 그들에게 내 시간을 내줄 것이다. 이런 도전적인 인생의 과정들을 거쳐 내게 허락된 시간을 주체적으로 채워 나가며 살아 나가고 싶다.


세상에.. 그렇게 바쁘게 살았는데 이런 포부까지 끊김 없이 생각할 줄 아는 시간이 내게 주어지다니..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날들인지 모른다.


keyword
이전 05화집 밥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