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아닌 '나에게 보여주기'를 목적으로
집안일은 힘들다.
반찬, 찌게 30분 넘게 만들면 남편과 아이들 10분 만에 뚝딱 먹어 치우고 설거지 거리가 나온다. 1인당 밥그릇, 국그릇 하나씩에 4명이니까 벌써 그릇만 16개가 나온다. 급식판을 사용할까 생각 중이다.
회사 다닐 때는 주말엔 남편과 번갈아가며 설거지하고, 주중에는 아이 돌봐 주시는 친정엄마 계셔서 설거지도 몇 번 안 했었는데 지금은 주 7회 설거지한다. 설거지는 남편 시켜도 되지만, 일하고 들어온 남편한테 설거지하라고 하기가 좀 그렇다. 내가 회사 다닐 적에도 집 와서 설거지하는 게 힘들었어서 그런 가 보다.
청소도 쉽지 않다. 청소기 돌리려면 방바닥에 있는 물건들 다 정리해야 하고, 구석구석 먼지라도 치울라치면 청소기 입을 갈아 끼워야 한다. 물걸레질의 효과를 아예 몰랐으면 몰랐지 물걸레질을 안 할 수 없어 가끔 해 줘야 한다. 물론 청소기로 물걸레질을 하지만 가끔 물티슈를 두고 직접 방바닥을 닦아내는 게 속이 시원할 때도 있다. 손목이 아픈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넓은 집으로는 이사 가지 않을 거다. 가사도우미를 쓰면 몰라도 지금 살고 있는 거실, 방 3개, 부엌 청소하는 것도 충분히 힘들다. 놀랍게도 방바닥은 매일 닦아도 매일 더럽다. 역시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빨래도 마찬가지이다.
옷감색을 구분해서 세탁기를 돌려야 하고, 양말과 속옷도 구분해야 한다. 매일 집 밖으로 나가는 사람 3명이 신는 양말 6개가 3일 쌓이면 18개가 된다. 속옷도 매일 갈아입으니 아무리 양말장, 속옷장에 충분히 있다고 해도 최소 일주일에 2번은 세탁해 주어야 회전율이 만들어진다. 수건도 매일 3개 이상 빨래통으로 들어가고, 주말에는 꼭 교복 세탁을 해야 하고, 날이 좋을 때는 이불도 빨아야 한다. 아직 건조기가 없는 탓에 빨래를 시작할 때는 돌린 빨래를 널어둘 곳을 사전에 확보해야 한다. 치밀하지 못하면 온 집안에 축축한 빨래들이 널려 이상한 냄새가 나곤 하니까.. 물론 날씨는 제 1 변수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참 손이 많이 간다.
밥도 해 먹어야 되고, 입었던 의복도 빨아야 하고, 얼굴과 몸도 닦아야 하고, 생산한 쓰레기도 처리해야 하고 배설물도 처리해야 한다. 예전에 함께 일하던 상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돈 있으면 다 돼. 돈 있으면 빨래거리는 세탁소에 갖다 맡기고, 가사도우미 부르고, 청소 업체 오라고 하면 돼. 돈 있으면 다 돼. 그러니까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해야 하는 거야"
그땐 지금 남편과 사랑에 빠져 있을 때라 그냥 저분은 물질만능주의시구나 하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의미인지는 알 거 같다. 또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런데 오랜 회사 생활을 멈추고 집에 들어앉아 살림을 하려니 집안일이 모조리 힘든 것만은 아니다. 냉장고 털어서 반찬과 국 혹은 찌개를 만들어서 식탁에 차려 두면 우리 남편 배고프다고 집에 들어와서 잘 먹어준다. 그리곤 역시 집밥이 좋다고 한다. 아이들이 내가 만들어 둔 간식, 저녁 찬거리 잘 먹는 모습 보면 그래 쑥쑥 크거라. 내일은 더 맛있는 거 해 주마 하며 흐뭇해진다.
모든 식구들 다 출타하고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면 발에 밟히는 게 없어서 좋다. 물걸레질이라도 하는 날이면 내 눈에만 보이는 방바닥의 빤닥빤닥함이지만 스스로 큰 일 한 것 같아 뿌듯하다. 아주 간혹 어느 날은 물티슈를 들고 서랍장, 책장, 싱크대 등 먼지를 닦아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 뻔한 하얀 싱크대에 묻은 먼지와 얼룩 닦아내면 그것도 기분이 괜찮다.
사실 빨래만큼 기분 좋아지는 건 없다. 볕이 좋은 날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아침 기상하자마자 세탁기를 돌리고 피죤이나 샤프란 넣고 끝낸 예쁜 향기 폴폴 나는 빨래를 주섬주섬 안고 옷걸이에 하나씩 건다. 그리고는 따뜻한 햇볕님 오시옵소서 하는 마음으로 햇볕이 곧 들이닥칠 베란다 한쪽에 걸어 둔다. 그러면 고양이가 따뜻한 햇빛 쬐고 앉아 있는 것처럼, 마치 내가 햇빛을 쬐는 것처럼 빨래가 바짝바짝 말라 모든 세균을 털어내길 바란다. 해가 지고 햇볕이 다녀간 빨래들 속 남아 있는 햇볕 냄새 맡으면 오늘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엄청 보람차다. 빨래가 이불일 경우에는 햇볕 덮고 잘 것 같은 생각에 푸근한 마음이 든다.
그러니 집안일이라는 게 마냥 좋고 즐겁진 않지만 또 그렇다고 마냥 힘들기만 한 고된 노동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켜켜이 채워가는 동안 오늘 할 집안일의 종류와 수준에 대해서 나 자신과 적절히 타협하는 것이 주부의 지혜 아닐까. 하루는 집안일 하나도 안 한 날 일 수도 있고 또 어느 날은 화장실 대청소로 손목과 허리가 뻐근한 날일 수도 있다. 어차피 집안일이란 한 사람만 알지 다른 사람은 잘 모르는 그런 거니까, 그러니 집안일이란 매우 고도의 지혜와 기술이 필요한 '내심신훈련장'이자 '자기 컨트롤기제 생산 공장'이자 '내 맘대로 주식회사'랑 비슷한 것 같다.
할 수 있다면, 자꾸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면 되는 '내게 보여주기 위한' 정도로 일상을 살아가면 어떨까. 남이 알더라도 내가 그 실체가 그게 아닌 걸 알면 그것만큼 창피하고 숨고 싶은 건 없으니까 말이다. 아무도 모르더라도 내가 알고, 또 이 세상을 운영하는 신이 알고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는 삶. 그게 나를 위해 좋은 것 같다.
이제 저녁 준비하러 가야 한다. 빨래는 낮에 해서 널어두었고 청소기도 진즉에 돌렸다. 물걸레질은 오늘 생략. 얼른 저녁 준비하고 차려서 먹고 설거지하고 애들 학교 숙제 봐주고.. 놀아야지.
오늘은 책을 볼까나 영화를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