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이후에도 흐르고 있는 조용한 삶의 움직임
김첨지의 하루가 끝난 자리에서 또 한 사람의 시간이 이어집니다. 『바움가트너』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한 남자가 멈춘 시계와 함께 다시 살아내는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십 년이 지났지만, 그의 마음속 시계는 여전히 그날의 아침에서 멈춰 있습니다. 상실은 시간을 묘하게 비틀어 놓습니다.
세상은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데, 마음속 시간은 어느 순간에서 멈춘 채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바움가트너의 하루 역시 그런 멈춤 속에서 이어지는 조용한 일상의 파편들입니다. 죽음이 삶을 닫아버린 듯 보이지만, 남겨진 자에게는 그 죽음이 오히려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미묘한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그 아주 작은 흔들림을 조심스레 보여줍니다.
바움가트너는 10년 전 해변에서 아내 안나를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 이후 그의 삶은 안나가 남긴 원고를 정리하는 일과 함께 흐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는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그 관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도 만들어 가니까요.
그래서 상실은 ‘그 사람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였던 나’ 또한 흔들리는 경험이 됩니다. 바움가트너가 원고를 붙잡고 있었던 이유도 단순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흔들리는 자신을 붙들어 줄 마지막 온기를 찾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상실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그 무게가 스며드는 방식은 언제나 개인적입니다. 작품은 그 고요한 무게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바움가트너가 안나의 원고를 다시 펼치는 장면에서 오랫동안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누군가의 흔적을 다시 들여다본다는 것은 단순한 회상만이 아니라, 멈춰 있던 시간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에게 쉽게 열어보지 못한 기억이 하나쯤은 있습니다. 소중해서 닫아 둔 기억도 있고, 아파서 한동안 외면해 온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순간, 과거는 붙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걸음을 내딛게 만드는 조용한 힘이 되기도 합니다. 상실 이후 다시 살아가는 일은 거창한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래된 기억을 다른 마음으로 바라보려는 아주 작은 용기에서 출발합니다. 바움가트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도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습니다.
바움가트너에게 죽음은 시간을 멈추게 한 사건이었지만, 그 멈춤 속에서 그는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상실은 우리를 한순간 멈추게 하지만, 멈춘 자리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볼 때 사람은 아주 천천히 다시 앞으로 걸어갑니다.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오래된 기억이 조금 다른 결로 다가오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삶은 큰 결심보다 그런 미세한 전환에 의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바움가트너에게도 큰 변화는 없었지만, 그 작은 움직임이야말로 인간이 상실을 넘어 살아가는 가장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죽음은 삶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이 다시 자기 시간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등을 떠미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바움가트너』는 남겨진 이의 시선에서 죽음과 시간을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먼저 떠나는 이는 어떤 시간 속에 있을까요? 남은 자에게는 시간이 멈추지만, 떠나는 자에게는 또 다른 방식의 시간이 흐르고 있겠지요. 다음 글에서는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직접 마주한 한 인간의 마음과 그 앞에서 드러나는 삶의 본질을 함께 사색해보려 합니다.
by 사색하는 덕주부
책을 읽고, 삶을 사유하며,
언젠가 아들에게 전할 기록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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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AI 생성 도구를 통해 직접 제작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