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 보내는, 서울 20억 자가, 병원장 사모님 미쎄쓰 킴!
오늘 김 여사는 조슈아를 등교 시키자마자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서울 친구 하나가 제주 여행 중 김 여사의 집에 들리겠다고 한 것이다. 오늘 만남은 어젯밤 9시쯤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지잉 지잉
조슈아에게 잘 자라는 말을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김 여사가 이제 막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전자책을 읽으려 했던 그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야? 이 밤에? 남편인가?‘
김 여사는 침대 헤드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끌어내려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서울 친구 세희였다. 저번에 김 여사가 청담 브런치 모임에서 만났던, 바로 그 친구였다. 김 여사는 자신에게 서울에서 공부하는 애들 파이까지 넘보진 말라던 세희의 말이 떠올랐다.
<연주! 나 지금 제주야. 가족 여행 왔어.>
<오! 얼마나 있다가 가?>
<우리 3박 4일 일정이야. 내일 모레 가. 그래서 말인데 내일 너희 집에 놀러가도 돼? 남편은 안 가고 나랑 예지만! 남편은 내일 지인들이랑 골프 치기로 해서. 어때? 좋지?>
‘갑자기? 그것도 이렇게 전 날 밤에 통보한다고?‘
김 여사가 세희와 알고 지낸 지도 벌써 30여 년 정도 됐다. 세희는 그녀가 초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김 여사와 세희가 함께 있는 단톡방은 그녀들이 주축이 돼 김 여사의 고등학교 친구, 세희의 고등학교 친구 등이 합쳐져 만들어진 방이었다. 당연히 원래는 둘의 관계가 가장 깊고 오래됐던 게 맞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 다른 회사에 다니며 다른 지역에 살고, 급기야 김 여사가 제주로 내려오게 되면서 예전만은 못 한 관계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김 여사에게 세희는 오래된 친구였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되어도 친구 간에 선이 있다고 생각하는 김 여사와 그와 정반대 성격의 세희 사이에는 좀 안 맞는 부분이 존재했다. 김 여사는 가끔 선을 넘으려는 세희가 불편했고, 세희는 김 여사가 말하는 ‘그 선’이 이렇게 오래된 자신들의 관계에서도 존재한다는 걸 매우 서운해했다.
제주에 내려와 떨어져 살면서 잊고 있던 그녀에 대한 그런 조금의 껄끄러움이 어젯밤 다시 드러난 것이었다.
‘아니, 내일 그냥 만나자는 것도 아니고, 우리 집에 온다면서 그걸 갑자기 몇 시간 전에 이렇게 통보한다고? 하…내일 청소 싹 해야겠네.‘
김 여사의 머릿속은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녀의 손가락은 제멋대로 휴대폰 자판을 누르고 있었다.
<어머! 너무 좋다! 알겠어. 내일 와!>
‘으이그, 등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으이그 등신!!!’
이렇게 갑작스럽게 어젯밤, 세희와 그녀의 딸 예지의 방문이 결정된 것이다. 김 여사는 청소기를 돌리며 한숨을 푹푹, 화장실 물때를 벅벅 닦으며 한숨을 푹푹, 쌓여있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서울에서 오는 손님들을 위해 토마토 스파게티와 치킨 샐러드도 뚝딱뚝딱 만들어 놓았다.
‘하…혼자 있으면 그냥 막 비벼 먹는데…귀찮…’
그녀가 점심을 준비해놓고 설거지까지 마친 그때, 그녀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세희다!’
만나기 직전까지는 세상 귀찮아 약속이 파투나길 바라고 또 바랐던 그녀지만, 막상 또 만나면 친구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김 여사였다. 내향형 I의 고질병이랄까.
김 여사는 마음 속으로 의지했던 아론 엄마의 서울행, 조슈아의 학교 일로 그간 마음 썼던 것때문에 힘들었던 걸 훌훌 털어내려는 듯, 오랜만에 찾아온 세희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같이 온 세희의 딸 예지는 아직 육지에서 초등학교 1학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찌나 얌전하고 똑똑한지 어느새 조슈아 방 서재에 있는 책들을 꺼내 스스로 읽고 있었다.
“야, 저거 실화야? 엄마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책을 꺼내서 혼자 얌전히 읽는다고?휴대폰 안 해? 유튜브 틀어달라고 안 해?”
김 여사는 감탄을 금치 못 하며 세희의 딸 예지를 바라보았다. 예지는 꼿꼿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세희는 흐뭇하게 그녀의 딸 예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튜브 보지! 그런데 난 주로 동화나 책 읽어주는 유튜브 이런 거만 보여줘. 그것도 하루에 딱 한 시간만.”
“에??????진짜? 그럼 더 보겠다고 안 졸라?”
“응. 예지는 그게 어렸을 때부터 습관돼서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책 보는 걸 더 좋아해. 예지야! 책 너무 가까이 보진 마. 눈 나빠져!”
김 여사는 세희의 딸 예지를 천연기념물 보듯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예지가 똑바로 앉아 독서 삼매경인 모습을 보니, 책 좀 읽으라고 하면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 가야 된다, 출출하다, 목 마르다 갖은 핑계를 대며 앉아 있지를 못 하던 자신의 아들 조슈아의 모습과 오버랩 되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자, 남자 차이인가? 아니면 예지가 유난히 똑똑한 건가?’
그 때 예지가 김 여사에게 다가왔다.
“이모! 혹시 좀 더 재미있는 책은 없어요?“
“응? 무슨 책 종류를 보고 싶은데?“
“아니….여기 있는 책들은 다 너무 시시해요. 너무 쉬워요. 이거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용 아니에요? 글씨도 너무 크고…이런 거는 다 저 유치원 다닐 때 독서 토론 학원에서 끝냈거든요. 저는 엄마가 유준이 오빠는 4학년이라고 해서 4학년 5학년 책들 있을 줄 알고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아….“
책을 좋아한다던 예지에게 조슈아의 한글 책들은 너무 쉬운 모양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논술 학원과 독서 학원까지 다니며 착실히 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 예지에게 김 여사 집에 있는 책들은 유아용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영어유치원을 나와 초등학교 1학년 나이부터 국제학교만 쭉 다녔던 조슈아에게는 저 정도 난이도 한글 책이 적당했던지라 더 어려운 책들을 사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 했었던 김 여사는 순간 부끄러움과 막막함이 밀려왔다.
‘하긴…그러니까 조슈아 국어가 그 모양이지…’
김 여사는 집에서 조슈아를 가르치며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나 있던 아들의 국어 실력을 확인했던지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예지야. 오빠는 영어 학교 다니니까, 오빠 영어 책을 좀 읽어 봐.“
김 여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난감해하자, 세희가 딸에게 영어 책을 읽으라고 권했다. 예지는 입을 삐쭉 하더니 김 여사에게 물었다.
“영어책….흠…영어 책 그럼 한 번 보죠 뭐. 어디에 있어요?“
“어,어. 이모가 찾아줄게!“
김 여사는 예지를 데리고 조슈아 방에 있는 영어책 섹션으로 갔다. 그나마 조슈아는 학교 숙제 때문에라도 영어책은 좀 읽는 터였다. 김 여사는 조슈아의 침대 머리맡에 여러 권 쌓여 있던 책을 비롯해 똑똑한 예지에게 걸맞을 법한 책 몇 권을 찾아 예지에게 건네 주었다.
“이런 거 오빠가 되게 재밌게 보더라. 예지는 똑똑하니까 이런 것도 잘 읽을 수 있을거야. 이거는 만화책이니까 재밌을 것 같고…또, 음…이것도 오빠가 재미있어 했던 거 같아. 자, 예지야.“
예지는 김 여사가 건넨 책들을 휘리릭 펼치며 슥 훑어 보더니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모! 난 좀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것들은 한국인인 저희가 보기에 너무 영어 글씨도 작고, 무엇보다 한국인은 한국 책을 읽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응?“
예지는 얼굴까지 새빨개지며 김 여사에게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디 살고 있어요? 한반도에 살고 있죠? 그러면 우린 무슨 말을 써요? 한국말을 쓰죠? 그럼 우리는 뭐를 읽어야 해요? 한국어를 읽어야 되죠! 이 영어책들은 제가 읽을 수는 있지만 너무 글씨가 작아서 엄마 말처럼 눈이 나빠질 것 같고, 무엇보다도 전 오늘 한글책을 읽고 싶다고요. 한글책 더 없어요? 전 한글책이 필요해요. 이모, 이모는 제주도에 있는 한라산이 휴화산이라는 거 알아요? 제가 제주도 여행 오기 전에 제주도 책 많이 읽고 왔거든요. 들어볼래요?“
갑자기 시작된 예지의 제주도 강의에 김 여사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며 어쩔 줄 몰랐다. 한참을 열변을 토하던 예지는 세희에게 쪼르르 달려가 말했다.
“엄마, 한국어 책 많은 도서관이나 가자! 영어책 말고! 이모 집은 영어책만 많아서 영 재미가 없어!“
끝까지 똑부러지고 조리있게 말하는 예지를 보며 세희와 김 여사 모두 난감해졌다. 세희는 예지의 계속되는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 여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더니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가버렸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 여사는 세희와 예지를 위해 준비했던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뭐….뭐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손님용으로 만들어놨던 스파게티를 대접에 퍼서 해치우고 있던 김 여사의 휴대폰이 울렸다. 세희였다.
“연주야, 아까는 미안. 당황했지?”
“아니야 뭐…그런데 예지 왜 그래? 갑자기 뭐 기분 안 좋았대? 내가 뭐 실수했나?”
“아…그게…예지가 내 딸이지만 자존심이 좀 세서…학원에서도 매일 칭찬 받으려고 기를 쓰고 발표하고 좀 그런 스타일이거든. 아까도 사실은 자기가 어려운 책 잘 읽을 수 있다는 거 이모한테 자랑하고 칭찬받고 싶었나봐. 너희 집 가면서도 차 안에서 계속 제주도 책 산 거 달달 외우면서 갔거든. 너 앞에서 발표한다고. 그런데 자기가 발표할 기회는 없지, 너희 집에 있던 한국어 책은 이런 거도 읽을 수 있다고 자기가 자랑하기엔 좀 쉽고, 유준이가 보는 영어책은 또 자기가 읽기에 너무 어렵고…그러다 보니까 순간 당황하고 자존심이 팍 상해버렸나봐. 칭찬받아야 되는데 못 받으니깐…예지가 영어는 학원을 그렇게 다녀도 잘 못 해… 그래서 자존심 상해서 아까 그렇게 막 급발진하고 그랬던 것 같아. 미안미안. 아까 우리 주려고 이것저것 많이 준비한 거 같았는데…진짜 미안해.”
자식 일이 어찌 맘대로 되겠는가.
세희는 오랜만에 만난 김 여사에게 자기 딸의 영특하고 똑부러지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게 안 돼 속상하면서도 미안한 눈치였다. 김 여사는 예지가 귀까지 새빨개지며 열변을 토하던 모습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야 괜찮아. 괜찮아. 애들이 다 그렇지. 예지 옆에 있어? 바꿔봐 잠깐만. 이모네 집에 와서 이렇게 우울한 기억만 있다가 가면 안 되지.”
“어? 잠깐만. 예지야!! 예지야!! 연주 이모가 예지 바꿔달라네?”
잠시 후 쪼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예지가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김 여사에게 말했다.
“여보세요. 네 이모. 전화 바꿨습니다.”
“어머, 예지야. 예지는 초등학교 1학년인데 어쩜 말을 이렇게 똑부러지게 잘 해. 아까 그리고 제주도 얘기 이모한테 해줘서 이모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몰라. 예지가 이모도 몰랐던 걸 다 말해준 거 있지! 예지 정말 똑똑하네!”
“후후후. 이모! 그것도 몰랐어요? 내가 그럼 더 말해줄까요?”
“응! 더 말 해줘봐! 진짜 예지는 너무 똑똑하다! 나중에 서울대 가겠어!”
그렇게 김 여사는 예지의 장단에 맞춰 제주도 강의를 두 번, 세 번 더 듣고 나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정말, 육지 애들이랑 여기 제주 애들이랑 노선이 다르긴 하네. 세희가 괜히 거기 파이까지 넘보지 말라던 게 아니었구만. 육지 애들은 독서랑 토론까지 학원 다니니까 말하는 거부터 책 읽는 수준까지 아주 똑부러지잖아. 그렇게 되기까지 예지도 어린 게 참 스트레스 많이 받았겠네…..그나저나 국어로는 조슈아가 여덟살 예지한테도 한참 밀리겠는데…? 진짜 큰일이다 큰일이야…‘
그날, 하교 후 돌아온 조슈아에게 김 여사가 물었다.
“조슈아, 너 제주도 한라산이 무슨 산인지 알아?”
“뭐?”
“한라산이 무슨 산이야? 활화산이야. 휴화산이야?”
“난 그런 거 못 알아.”
김 여사는 너무도 당당한 조슈아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 소리를 빽 질렀다.
“야이씨, 못 알아가 뭐야. 말 좀 똑바로 해!! 차라리 몰라라고 하든지!! 여덟살이 너보다 말 잘 하더라!! 너 한라산 설마 쓸 줄은 알지? 한라산 할 때 하 밑에 무슨 받침이야?”
“한라산[할라산]이니까 메이비 ㄹ? 메이비 그러니까 메이비! 틀릴 수도 있고!”
“으이그…야!! 한라산 발음만 할라산이지, 쓸 때는 ㄴ 받침이잖아!!!! 너만 이렇게 모르는거야 아님 다른 애들도 너만큼 모르는 거야? 어!!!”
“모르지! 내가 좀 더 못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아 그래도 난 영어 잘 하잖아!!”
“어휴…조슈아 너 안 되겠다! 방학 때 엄마랑 도서관 가서 한글 책 좀 많이 읽고 진짜 한국어 공부도 좀 더 열심히 하자.”
“왓!!!! 오 노!!!!!한국어 책 진짜 어려운데!!!!”
머리를 쥐어뜯으며 화장실로 쏙 들어가버리는 조슈아를 보며 김 여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갈 길이 멀다…조슈아…여기서 영어만 붙잡고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니…대체 뭐가 맞는 거니….이러고 넋 놓고 있어도 되는 거냐고 진짜…아이고 두야…‘
※ 이 시리즈는 병원 운영, 초등학생 육아, 국제학교 생 활,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라이프스타일까지-
다양한 삶의 단면을 담은 하이퍼 리얼리즘 픽션입니다.
남의 집 얘기 같지만, 어쩌면 우리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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