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 보내는, 서울 20억 자가, 병원장 사모님 미쎄쓰 킴!
*이번 화는 이전 화 <악마 하나, 천사 둘>을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면 글의 이해가 훨씬 쉽습니다.
“아유, 진짜 속상해 볼 때마다.“
“그래도 애들이라 금방 나을거야.“
김 여사는 병원 점심 시간 동안, 남편과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아니, 그 여자애네 엄마는 애 손톱 좀 안 잘라주나? 얼마나 깊게 긁었으면 상처가 패여서 듀오덤에 하얗게 진물이 잔뜩 올라올 정도냐고.”
“너무 걱정 마. 여보는 점심 먹었어?”
“응. 근데 진짜 낫겠지?”
“아유, 진짜 낫지 그럼 가짜로 나아? 어린 애들은 상처도 금방 아물어. 걱정 안 해도 돼. 남자애가 얼굴에 상처도 있고 그러면서 크는 거지.”
“난 볼 때마다 속상해 죽겠다고. 오빠는 진짜 태평해서 좋겠다.”
김 여사는 조슈아를 마치 남의 아이 대하듯 말하는 남편에게 짜증이 솟구쳤다.
‘저런 교과서적인 말, 누가 못 하냐고. 아주 오은영 박사님 납셨네!!’
김 여사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의 소리를 꾹꾹 눌렀다. 남편에게 화 내고 확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럼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속의 짜증과 화는 말하면서 풀어버려야 하는 성격의 김 여사로서는 공감 제로 남편이지만 없으면 아쉬웠다.
“그런데, 우리 조슈아 너무 물러터지지 않았어?“
“유준이? 그 정도면 그냥 딱 어린이 다운데?“
“아니, 생각해봐. 자기 얼굴을 저렇게 패이고도 여자애한테 아무 말 안 하고 사과까지 하고. 친구끼리 그러면서 그로우업 하는거야 이러질 않나. 애가 진짜 물러도 너무 물러터진 것 같아. 이러다 다른 애들한테 막 당하기만 하는 거 아니야? 걱정돼 죽겠네.“
“에이, 또또! 나도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이랑 갈등 생기고 하면 일 크게 키우기 싫어서 넘어가고 그랬어. 그런데 내가 지금 막 바보처럼 당하기만 하고,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고 그러지 않잖아? 유준이도 내 성격 닮았나 보지. 자기도 깨지고 당해보면서 그게 큰 경험으로 작용할 거야. 차차 좋아질거니까 걱정 마.“
“여보는 지금 그래도 닥터니까 무시 안 당하나 보지.”
“아니, 의사랑 당하고 사는 거랑 무슨 관계야? 넘겨짚지 말라니까? 유준이도 친구들한테 무시 안 당해. 주말마다 친구들이랑 축구하러 가고 그러는 거 보면 몰라?”
“흠…”
“여튼, 여보. 너무 걱정 말고 자꾸 잡생각 들면 나가서 운동이라도 해. 나 이제 환자 봐야되니까 끊는다.”
“알았어.”
전화를 끊은 김 여사는 남편의 말에도 영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한 번 말로 뱉고 보니 조슈아가 정말 나도 모르는 새 사실은 친구들에게 무시당하고 왕따라도 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이 샘솟았기 때문이다.
김 여사는 소파에 앉아 네이버 어플을 켰다.
‘너무 착한 아이‘
‘맞고도 그냥 넘어가는 아이‘
‘속에 쌓여있는 아이’
‘집에서만 화내는 아이’
‘학교에서는 맞고, 집에서는 화내는 아이’
‘소아우울증 증상‘
김 여사의 검색어는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는 김 여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김 여사의 낯빛은 몇 달 전, 썩어버린 산세베리아 화분에 담겨있던 흙빛이 되고 말았다.
‘소아우울증이 확실한데!!! 조슈아 어떻게 해!!!‘
김 여사의 머릿속에 삐뽀삐뽀 비상벨이 울렸다.
‘학교에서 친구들한테 너무 시달리고 이게 마음의 응어리로 쌓이다 보니까 그 화를 집에 와서 화내고, 스트레스 쌓이니까 유튜브로 현실 도피하려고 하고!! 이거 딱 조슈아 얘기잖아!!!’
김 여사는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당장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느낌이었다. TV에서 보니 소아우울증은 어른이 될 때까지 한 사람의 인생을 좀먹는다던데 이러다 조슈아의 인생이 망가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 여사는 벌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네이버에 ‘제주 소아정신과‘를 검색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비행기 타고 육지로 달려가 오은영 클리닉에 방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깐, 그런데 혹시 병원 가다가 아는 사람 마주치면 큰 일이잖아?‘
김 여사는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병원 위주로 검색했다. 누가 김 여사와 조슈아가 정신과에 들락거리는 걸 보기라도 할까봐 두려웠다. 김 여사는 집에서 30km쯤 떨어진 병원 중 평이 좋아보이는 한 소아정신과에 전화를 걸었다.
“네, AA 소아청소년클리닉입니다.”
“저, 아이가 심한 우울증이 의심돼서요.”
“저희 병원에 와보신 적 있으실까요?”
“아뇨. 정신과는 처음이에요”
“아, 그러세요? 저희 원장님께서1시간에 환자분 1명씩만 보셔서요. 초진 예약은 약 2주 후에나 가능한데 괜찮으실까요?”
“헉, 2주 후에나 돼요? 저희 애가 상태가 좀 심각한 거 같은데…”
“네, 죄송해요. 모든 초진 예약은 2주 후부터 가능합니다.”
“흠…”
김 여사는 고민했다. 전화를 끊고 다른 데에 걸어볼까.
하지만 맘카페와 리뷰를 읽어봤을 때 이 병원이 조슈아에게 딱일 것 같다는 강력한 느낌이 들었다.
‘원장님이 정말 진심으로 길게 상담해 주세요‘
‘원장님의 말씀이 아이에게 큰 힘이 됐어요’
‘여기 다니고 아이가 부쩍 달라졌어요‘
김 여사는 병원에 대해 올라왔던 수많은 평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게다가 원장님이 한 시간에 딱 한 명씩만 본다는 점도 김 여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만큼 진심으로 환자를 대한다는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 병원에 마음이 끌렸다. 김 여사는 자신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럼, 그 때로 잡아주세요. 그 전에 자리가 나면 꼭 연락 주세요.”
“네, 시간은 다섯시 반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네, 아이 이름이 어떻게 될까요?”
“조슈…아니 이유준이요.”
“네, 이유준 어린이, 2주 후 다섯시 반으로 예약 도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2주 후 뵙겠습니다.”
김 여사는 휴대폰 캘린더 어플에 정신과 예약을 적어 놓았다. 아무도 김 여사의 캘린더를 볼 일은 없겠지만, 혹시 누가 볼까 싶은 마음에 차마 ‘정신과‘라고는 적지 못 하고 ’소청정‘이라고 적었다. ‘소아청소년정신과’의 줄임말이었다.
김 여사는 그 날 이후로 매일 ‘소청정‘에서 전화가 오지는 않을까 기다렸다. 혹시나 예약을 앞당길 수 있다는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김 여사의 눈에는 유튜브를 보며 깔깔대는 조슈아의 모습, 주말 제주에 내려온 아빠의 외식 제안에 집에서 쉬고 싶다는 조슈아의 모습 모두가 학교에서 받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현실 도피하고 싶어하는 우울증의 증상으로 보였다.
‘왜…왜…그동안 몰랐지…’
김 여사는 겉으로 말도 못 하고, 조슈아를 보며 속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그렇게 김 여사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소청정‘ 예약날이 다가왔다. 중간에 두 번이나 병원에 전화해 예약을 앞당길 수 있는지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김 여사는 혹시 누가 알아보기라도 할까 조슈아와 둘이서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비장한 마음으로 병원에 방문했다.
작지만 화이트 톤으로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인테리어된 병원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김 여사는 신뢰도가 급상승했다. 프론트에 이름을 대자 예쁜 얼굴의 간호사 선생님이 A4용지 두 장을 조슈아에게 나눠 주었다.
“이거 어린이가 직접 항목 체크하시고 저 주시면 돼요. 저기 앉아서 작성 부탁드립니다.”
‘헉, 소아청소년 우울증 척도!!‘
간호사 선생님이 준 종이에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제목과 함께 약 20개의 질문이 적혀 있었다. 각 질문들 밑에는 ‘매우 그렇다’부터 ‘전혀 그렇지 않다’까지 다섯 가지 척도가 있었다. 질문을 읽고 자신의 상태에 해당하는 곳에 체크하는 모양이었다.
“이거 어린이가 혼자 하는 건가요?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한국 단어를 잘 이해 못 할 수도 있어서…도와줘도 괜찮을까요?”
김 여사는 조슈아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직접 조슈아가 질문에 어떤 답변을 체크하는지 보고 싶었다. 마음 상태가 어떤지 꼭 알고 싶었다.
“되도록이면 혼자 하게 해주시는 게 좋아요. 어린이용이라 어려운 단어는 거의 없으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엄마, 나 혼자 할 수 있어.”
“…알았어.”
김 여사는 아쉬운 듯 대기실 소파에 앉았다. 조슈아는 김 여사와 살짝 떨어진 곳에 있는 책상에서 열심히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아주 거침없이 빠르게 체크하는 조슈아를 보며 김 여사는 불안해졌다.
“다 했어요.”
“벌써?”
“응. 쉬운데?”
“이건 시험이 아니야. 네 마음에 대해 쓰는 거니까 고민하고 진지하게 해야해.”
“응! 고민하고 했어. 쉬웠어 그런데.”
조슈아가 간호사 선생님에게 종이를 제출할 때 김 여사는 슬쩍 질문과 조슈아의 답변을 엿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너무 빨라 질문 한 개 정도밖에 보지 못 했다.
‘난 죽고 싶었던 적이 있다???? 저기 어떻게 체크한 거지? 설마…설마…매우 그렇다?’
김 여사는 다시 불안해졌다.
곧, 원장님이 조슈아를 부르고 진료실 문이 꽝 닫혔다.
10분…
20분…
30분…
생각보다 길어지는 상담에 김 여사의 가슴은 요동쳤다.
‘무…무슨 일 있는 게 아니길…제발…비나이다 비나이다…‘
그 때였다. 조슈아가 밝은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와 김 여사에게 다가왔다.
“선생님이 엄마 들어오시래.”
“…나? 날 왜?”
“몰라. 들어오라고 하시던데?”
‘날 왜 부르시는 거지…진짜 심각한 우울증인가…어떻게 해 …우리 아들 진짜 엄마가 미안해…그동안 몰라줘서 미안해…’
김 여사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한짝 한짝 진료실로 옮겼다. 진료실까지 가는 짧은 거리가 마치 천리길 같았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여기 앉으세요.”
인상 좋은 여자 원장님이 김 여사를 반겼다. 김 여사는 너무 긴장돼 웃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김 여사는 원장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이어질까 무서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유준 어린이 어머님 되시죠?“
“…네.“
‘그냥 말해주세요…저 다 받아들이려고 다짐하고 왔어요. 그러니까 그냥 말해주셔도 돼요…’
김 여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원장님은 활짝 웃으며 김 여사에게 말했다.
“어머니, 아이가 너무 순하고 착해요. 정말 잘 키우셨어요.“
“…네?“
생각지도 못한 원장님의 말에 김 여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유준 어린이는 모든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고 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머릿속이 가득해요. 이건 흔히 말하는 ‘구김살 없는 아이’있죠? 딱 그런 모습이라고 보심 돼요. 정말, 어머님 애쓰셨네요. 정말, 정말로 우리 유준이 잘 키우셨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유준이 키우시면 돼요. 유준이는 정말 착하고 아무 문제 없는 아이예요.“
원장님의 입에서 쏟아지는 의외의 따뜻한 말에 김 여사는 가슴 어딘가가 툭 건드려졌다.
툭
툭
갑자기 김 여사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쏟아지더니 단숨에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슈아에게 유튜브만 본다고 쥐잡듯 잡던 모습, 수학학원 레벨테스트에서 중간 반 됐다고 면박주던 모습, 리포트카드에 점수 낮게 나온 과목이 세 개나 있다고 화내던 모습, 편식한다고 뭐라 하던 모습….
자신의 못난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눈 앞에 지나갔다.
김 여사는 원장님에게 거듭 감사인사를 전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조슈아는 대기실 소파에서 휴대폰 삼매경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전혀 나지 않았다.
“어머님, 다음 예약 도와드릴까요?“
“아뇨, 원장님께서 유준이 좋은 아이래요. 안 와도 될 거 같아요.“
“어머 정말요? 정말 잘 됐네요.“
김 여사는 40평 남짓한 작은 병원에서 샘솟는 인류애를 만끽하며 병원 밖으로 나왔다. 차로 가는 동안 김 여사가 물었다.
“조슈아, 피자헛 갈래?“
피자헛은 조슈아가 가장 좋아하는 피잣집이었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흔하지 않은 데다가 집에서 몇 십 키로나 떨어져 있어서 평소 조슈아가 먹고 싶다고 졸라도 귀찮아서 잘 가지 않던 곳이다.
“정말? 안 멀어?”
“멀지. 근데 오늘은 엄마가 꼭 사주고 싶어.”
“진짜? 엄마 진짜 최고!!!!”
김 여사는 차에 타 내비에 가장 가까운 피자헛을 검색했다.
28km
김 여사는 망설임 없이 출발했다.
“간다! 오늘 배터질 준비해! 레츠고!”
“레츠고!!”
김 여사는 운전하며 생각했다.
‘그래, 넌 피자 먹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지금처럼 순수하게 자라렴. 세상의 풍파는 엄마가 다 막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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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리즈는 병원 운영, 초등학생 육아, 국제학교 생 활,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라이프스타일까지-
다양한 삶의 단면을 담은 하이퍼 리얼리즘 픽션입니다.
남의 집 얘기 같지만, 어쩌면 우리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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