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자리는 저절로 바로서지 않는다.

성비를 넘어 역할의 균형을 묻다.

by 박계장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 매년 진행되는 신규 보건직 공무원 교육이 이번에 이곳에서 열렸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130여 명의 교육생 중 남성은 고작 두세 명에 불과했다. 구청별로 앉은 둥근 테이블을 훑어보아도 압도적인 성비 격차는 변함이 없었다. 통계 자료보다 더 강렬한 현실이었다. 공직사회의 성비 불균형은 이제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장면이었다.


나는 문득 공직생활을 시작하던 1990년대 초반을 떠올렸다. 당시 사무실의 공기는 지금과 정반대였다. 위생과는 단속 업무가 주를 이루어 스무 명 남짓 직원 중 남성이 대부분이었고, 여성 직원은 서무와 허가증을 타자기로 작성하던 내근 지원 업무를 하는 두 명뿐이었다. 불법 유흥업소 단속을 나갈 때 피부에 닿던 싸늘한 밤공기, 도박게임을 하는 전자오락장을 급습할 때 흐르던 팽팽한 침묵, 지하 퇴폐 이발소의 곰팡이와 저렴한 방향제가 뒤섞인 특유의 냄새. 그 시절에는 남자직원들이 이런 일을 했다. 당연한 것이었다. 여직원들은 너무 적었다.


‘여성이 너무 적다’는 것이 문제이던 시절이었는데,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여성이 너무 많다’는 문제가 새롭게 등장했다. 문제는 언제나 균형이 깨질 때 생겨난다. 방향만 180도 바뀌었을 뿐, 기울어짐의 본질은 같았다.

오늘날 구청과 보건소에서 주민을 가장 먼저 마주하는 창구는 대부분 여성 공무원의 몫이다. 악성 민원인의 고성, 쏟아지는 언어폭력, 고강도의 감정노동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자리에 켜켜이 쌓인다. 반면 야간 비상근무, 취객을 상대해야 하는 현장 단속, 힘과 위협을 감당해야 하는 업무는 극소수의 남성 공무원에게 반복적으로,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주어진다. 이렇게 쏠린 구조는 사람을 지치게 하고 조직을 비틀어 놓는다.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도 오래 버티기 어려운, 모두가 패자가 되는 구조다.


십여 년 전, 구청 식품위생계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 아직도 선명하다. 당시 계의 성비는 남성 둘, 여성 둘로 거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단속은 늘 남녀 혼성으로 조를 짰고, 나는 후임인 여직원과 함께 움직였다. 어느 늦은 저녁, 다방에서 주류를 판매한다는 민원을 확인하기 위해 지하 계단을 내려가던 때였다. 눅눅한 지하 공간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을 열고 단속 공무원임을 밝히자 중년 남성 둘이 테이블을 꽝 치며 일어섰다. 그중 하나가 나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야, 계집애 하나 데리고 와서 뭐 되는 줄 아나?"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그는 숨 막힐 듯한 술 냄새를 내뿜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동료인 젊은 여직원을 찾았으나, 그녀는 등이 벽에 달라붙은 채 입술만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쥔 확인서 클립보드를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으려 힘겹게 붙잡고 있을 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확인서조차 받지 못한 채 쫓기듯 업소를 빠져나오자,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함께 현장에 나온 파트너로서 제 몫을 하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과 공무원이 된 지 2년이 조금 넘은 그녀가 생전 처음 겪는 노골적인 위협 앞에서 몸이 얼어붙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무능으로 탓하고 있었다.


그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다음 해 중앙부처로 전출을 갔다. 아마도 그 지하 공간의 매캐한 냄새, 귓가를 때리던 욕설, 떨리던 손끝의 감각이 오래도록 마음을 할퀴었을 것이다.


이런 딜레마는 경찰 조직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범인 제압 과정에서 대응이 미흡했다는 논란이 일 때마다 비난의 화살은 여성 경찰관 개인에게 쏟아진다. 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다. 흉기를 든 범인 앞에는 ‘남성’이나 ‘여성’이 필요한 게 아니라, 상대를 제압할 ‘물리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조직이 현장의 위험도는 무시한 채 단순히 기계적인 순번이나 성별 구색 맞추기로 인력을 배치한다면, 그것은 그 직원을 방패막이 없이 사지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보지 않고 단순히 자리만 채우는 식이라면, 조직은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보건소 역시 그 비틀림이 심하다. 오후가 되면 육아시간으로 조퇴하는 직원이 많아 사무실의 절반이 텅 비어 보인다. 남은 직원들은 묵묵히 두 몫, 세 몫의 업무를 감당해야 한다. 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은 비단 남성 직원들 뿐만이 아니다. 아직 가정을 꾸리지 않은 미혼의 여성 후배들, 그리고 육아를 마친 연차 높은 여성 선배들 역시 그 빈자리를 함께 메우고 있다. 조직은 특정 성별의 권리를 보장하는 비용을, 다른 특정 집단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종종 자신들이 조직을 굴러가게 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댐’처럼 쓰인다고 자조한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필연적인 공백을 조직이 책임지는 대신, 동료의 일방적이고 부과된 책임으로만 지탱시키는 구조는 또 다른 형태의 불평등이다. 조직은 한쪽으로 기대어 간신히 버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위태롭게 기울어진 탑과 같다.


성비 불균형을 바라보며 나는 결국 하나의 사실에 도달한다. 여성의 비율이 높아서 문제가 되는 것도, 남성이 적어서 위험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쏠릴 때’ 발생한다. 균형이 깨진 조직은 서 있는 것 같으나 흔들리고, 버티는 것 같으나 안으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사람의 마음과 업무의 하중이 한 방향으로만 쏠릴 때, 조직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져 내린다.


성비의 균형은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역할의 균형, 책임의 균형, 그리고 감정노동의 균형이다. 위험한 업무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필연적인 공백을 누가 메울 것인가,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공직사회는 지금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강단에 서서 객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둥근 테이블 마다 무리 지어 앉은 앳된 얼굴들 사이에서 나는 ‘하중’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우리가 맞춰야 하는 것은 50대 50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책임과 역할의 하중 분배다.

누구의 어깨에도 지나친 짐이 쏠리지 않는 조직, 위험과 감정노동이 특정인에게만 전가되지 않는 일터.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조직의 피로 누적은 지속되고 불평등은 계속해서 가면을 바꿔 쓰고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기울어진 자리는 저절로 바로서지 않는다. 시스템 설계자가 조직의 위계와 공백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하중을 균등하게 분산시켜야 한다. 우리가 지금 바로잡아야 할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함께 버텨야 할 자리의 무게와 그 배분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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