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아픔에 공명(共鳴)한다는 것
직장 생활이라는 무대에서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동고동락한 사람이 있다. 내가 서른다섯 살 무렵, 시청의 같은 팀에서 선임과 후임으로 처음 만난 그 선배는 단순한 직장 상사 그 이상이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땀에 젖은 등산복을 입고 산을 오르내렸고, 주중에도 수시로 술잔을 부딪치며 공적인 업무는 물론 사적인 삶의 고민까지 나누는 막역한 사이였다. 내 인생의 가장 뜨겁고 치열했던 시절을 함께 통과한 그는 든든한 형님이자, 절대적인 우군이었다.
그랬던 그가 다른 곳을 거쳐 마침내 내가 일하는 부서의 과장으로 부임해 왔을 때,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다. 내 삶의 시계가 온전히 그분에게 맞춰져 돌아가던 시절, 나는 그분이 나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간 내가 바친 충성과 헌신에 대한 마땅한 보상으로, 어떤 외풍이 불어도 그가 나를 지켜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견고했던 믿음은 냉혹한 조직의 논리 앞에서 무너졌다. 나의 일처리가 당시 국장의 눈밖에 나는 일이 발생했고, 거대한 파도 앞에서 나의 헌신은 너무나 위태로운 조각배에 불과했다. 과장으로 돌아온 그 선배조차 국장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다른 부서로의 이동을 권유했다.
당시 나는 그 부서의 최고 선임 직원이었다. 공직 사회의 불문율 속에서, 부서의 맏형 격인 최고참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타 부서로 내몰리는 일은 전례를 찾기 힘들었다. 그 인사 조치는 단순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아니었다. 내 존재의 가치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듯한, 견디기 힘든 모멸감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가장 믿었던 사람조차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는 배신감이 나를 짓눌렀다. 결국 퇴로가 막힌 나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미안함이 가득 담긴 위로주 한 잔을 사주는 것뿐이었다.
그날 밤, 몇몇 지인들과 함께한 술자리의 공기는 무거웠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취기가 오르자,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의 둑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술기운을 빌려 가슴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쏟아냈다.
"형님만 믿고, 제 모든 것을 바쳐 일했는데...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목소리는 떨렸고, 원망과 슬픔이 뒤섞여 마침내 통제할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공적인 관계 속에서, 그것도 동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그저 상처 입은 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한 직원이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무런 말 없이 주르륵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 어깨를 토닥이거나 상투적인 위로 한마디 없이, 그저 같이 울고 있었다. "괜찮아"라는 공허한 말보다, 그의 붉어진 눈시울이 내 가슴을 더 세게 쳤다. 그것은 나의 억울함과 슬픔을 자신의 것처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순간의 공감은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나의 억울함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과장님의 입장이 있었겠지"라며 상황을 합리화하지도 않았다. 평소의 그답게 나의 아픔 그 자체에 공명(共鳴)해 주었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초라했던 밤,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었던 그에게라면 내가 가진 어떤 것이든 양보할 수 있다. 살면서 그토록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술자리에서 그와 함께 쏟아낸 눈물은 내 마음속에 맺혀 있던 원망의 독기도 함께 씻겨 보내주었다.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나니, 나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선배의 곤궁한 처지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부서 이동의 아픔은 잠시였고, 20년간 이어져 온 우리 관계의 깊이는 사소한 조직 내의 사건으로 끊어질 만큼 얕지 않았다. 나는 그를 다시 형님으로 대했고, 그는 여전히 내 삶의 든든한 동반자로 남았다.
하지만 그는... 퇴직 후 3년이 채 되지 않은 올해 8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0여 년간 내 삶의 곁을 지켰던 동반자의 영원한 부재 앞에서,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에 대한 그리움은 불쑥불쑥 찾아와 가슴에 먹먹한 회한(悔恨)을 남긴다. 그때의 모멸감과 서운함은 이제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다. 남은 것은 우리가 함께 땀 흘리며 나누었던 산등성이의 시원한 바람, 그리고 서로의 짐을 기꺼이 나누어 졌던 따뜻한 우정의 기억뿐이다.
인생은 유한하고 감정은 덧없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주었던 '공감의 순간'과 다시 손을 맞잡았던 '화해의 온기'는 영원히 남아 나를 지탱한다. 나는 오늘도 그 기억을 마음에 품고, 또 다른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줄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