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 공부

by 박계장

경주 단풍 구경은 취소되었다. 지난주에 부모님께 일정을 알려드렸는데, 시의회 행정사무감사 준비 회의가 그날 아침으로 잡혔다. 회의가 빨리 끝난다 해도 그때 조퇴를 하고 김해를 들러 부모님을 모시고 경주까지 다녀오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리였다. 전화를 드렸더니 아버지께서 "그럼 이번엔 산소나 다녀오자" 하셨다. 추석 전에 조부모님과 백부 산소에 다녀오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여행 대신 묘소를 찾아뵙기로 했다. 가을의 하루를 부모님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회의탁자 위에는 링 제본한 뚜꺼운 책자가 서너 권 쌓여 있었다. 건강정책과 것만 650페이지. 그 책자들은 아마도 우리 국 소속 부서들의 행감예답일 것이다. 팀장들이 돌아가며 형광펜으로 밑줄 친 부분을 설명했다.


"이 부분은 의원님이 예전에도 문제 삼았던 내용입니다. 이렇게 답변하시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시민단체에서 제기한 의제인데, 우리 시의 그간 추진 현황과 향후 계획을 함께 설명하셔야 합니다."


국장은 묵묵히 자료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기도 하고 질문을 하기도 했다.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이 과정을 '행감 대비 국장 공부'라 부른다. 팀장들은 과목별 과외 선생처럼 국장에게 각자의 업무를 하나씩 설명하며 행감에 대비한다. 의회 상임위원회에서 답변은 원칙적으로 국장이 맡기 때문이다. 국장은 120명에 이르는 직원의 업무를 두루 파악하고 있어야 의원들의 질의에 즉시 대응할 수 있다.


국장실을 나서며 팀장들은 1차 준비는 마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감 당일은 아무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는 국장의 임기응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나도 구청 과장 시절, 그 자리의 무게를 경험한 적이 있다. 직원들이 만든 예상질문과 모범답변을 여러 번 읽었지만, 회의장에 들어서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의원이 자신만 아는 자료를 거론하며 "과장님, 이 자료는 알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순간, 알고 있던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의 공기, 그때의 목마름이 아직도 생생하다.


올해 3급으로 승진해 처음 행정사무감사를 받는 국장도 지금쯤 긴장 속에 있을 것이다. 시청의 국장이란 자리는 9급에서 출발한 그에게 공직생활의 정점을 찍은 영광스러운 자리다. 그러나 해당 분야에서는 사실상 시장을 대신해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시의 공식 입장이 된다. 답변 한 문장이 언론의 제목으로 오를 수도 있다. 국장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곧 시의 정책 방향이자, 수많은 직원의 노력을 대변하는 문장이 된다.


그날 조퇴를 하고 부모님과 큰 여동생과 함께 조부모님과 백부께서 계신 솥발산 묘원으로 향했다. 통도사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5분 남짓 달려 산길로 접어들었다. 가을 하늘은 높았고 푸르렀다.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렸고, 바람은 선선했다. 단풍놀이 가기엔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조부모님 산소에 도착해 묘원 입구 상점 한곳에서 구입한 말린 꽃 두 다발을 제단 양옆 화병에 꽂고 제물을 차렸다. 조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단감을 깎아 먹었다. 부모님은 오래 전 가족들이 함께 성묘를 와서 제물로 차렸던 나물을 넣고 만든 비빔밥을 나눠 먹었던 이야기를 하셨다.


백부의 묘소를 다녀온 뒤, 지난주 들렀던 쌈밥집으로 향했다. "이 집 강된장이 제맛이다. 짜지 않아서 좋네." 어머니의 목소리가 약간 들떠 있었다. 여동생은 "다음엔 집에서 이렇게 만들어 보자"며 웃었다. 나는 숭늉을 어머니께 떠다 드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국장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9급에서 출발해 공직의 대부분을 시청에서 보내며 행정 실무를 쌓아온 그의 경력은 국장의 자리에 이르러 하나의 결실을 맺은 셈이다. 그러나 그 무게는 영광이자 책임이고 부담감이다.


행정사무감사는 다음 주 목요일이다. 국장은 매 순간 말을 고르고 표정을 다듬어야 한다. 의원의 질의가 예상 밖으로 흘러가더라도, 당황한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 긴장과 목마름이 어떤 것인지, 나도 잘 안다. 행감이 열리기 전날 밤, 그의 방 불은 늦게까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날 저녁, 부모님을 모셔다드리고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집으로 걸어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유난히 컸다. 오랜만에 보는 ‘슈퍼문’이었다. 가을의 맑은 공기 속에서 달빛은 길 위의 모든 그림자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사무실로 출근할 것이다. 국장도, 팀장들도, 나도.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무게를 나눠 지며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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