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줄 세우는 계절

제 계절을 알고 물드는 은행나무를 보며

by 박계장

10월 어느 저녁, 동료 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식사 한번 하자고 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조금 낮고, 조금 무거웠다.


약속 장소는 길 건너 작은 선술집이었다. 그는 이미 와 있었다. 소주병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고, 안주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그와는 다른 부서였지만 실무자 시절 같은 팀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2년 후 정년이고, 1년은 공로연수를 떠나니 현직 근무는 1년이 남은 셈이었다.


"평정 어떻게 나왔어요?


그가 물었다. 나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다. 5급 평정 결과는 평정자나 확인자에게 직접 물어야만 알 수 있다. 몇 년 전까지는 전산으로 조회가 가능했지만, 낮은 평가를 받은 어느 직원이 국장실에 찾아가 자살을 암시하며 거칠게 항의한 사건 이후 시스템이 바뀌었다. 6급 이하는 이틀간 전산시스템을 통해 결과를 볼 수 있지만, 5급은 평정자나 확인자에게 직접 물어야 알 수 있다.


그가 소주잔을 채웠다. 한 잔을 단숨에 비우고 다시 채웠다.


"나보다 입직도 늦고 나이도 어린 후배가 5급 승진에서 몇 달 앞서고 시청 전입이 빠르다는 이유로 이번 평정도 나보다 순위가 빠르네요."


그의 손이 잔을 꽉 쥐었다. 37년 공직 생활의 무게가 그 손등의 핏줄에 새겨져 있었다.


"지금부터 챙기세요. 승진일 차이가 크지 않으면 미리미리 신경 써야 합니다."


나는 술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연거푸 두 잔을 더 비웠다. 이번 평정이 그에게는 4급 승진 심사의 마지막 자료가 되는 것이었다. 퇴직 1년 전까지 순위를 걱정해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언젠가 내 모습도 저럴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공직사회에서 평정은 해마다 4월과 10월, 두 번 돌아온다. 6개월간의 업무를 스스로 정리해 제출하면 부서장과 국장이 평가한다. 근평서류를 챙길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의문을 품는다. 이걸 정말 읽기는 하는 걸까. 기초지자체 보건소에서 과장으로 일할 때 나도 평정을 해본 적이 있다. 7급 이하나 6급 근속 승진만 가능한 곳이라 긴장감이 덜했고, 업무의 변별력도 크지 않아 결국 승진일이나 입직 순서대로 점수가 매겨졌다. 근평서류의 실적은 보지도 않았다. 기술직은 구청보다 시청의 업무 강도가 높아 시청 근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6급 이상의 심사승진은 시청에서 이뤄진다. 더 일하고 승진하라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시청은 보건소와는 다르다. 승진 순위가 입직 일자나 전 직급 승진일과 다를 수 있으니 예민할 수밖에 없다.


민간기업에는 영업실적이나 매출, 고객 만족도 같은 명확한 지표가 있다. 숫자가 성과를 말해준다. 하지만 공무원의 일은 그렇게 설명되지 않는다. 정책은 하루아침에 결과를 내지 못하고, 행정의 성과는 여러 부서를 거쳐 완성된다. 내가 시작한 일이 다른 이의 이름으로 마무리되기도 하고, 특별히 한 것 없는데 내가 맡은 시기에 숙원사업이 끝나면 그 공이 내 것이 되기도 한다.


평정은 겉으로 객관적이다. 실적, 직무수행 자세, 성실성, 책임감 같은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것은 평정자의 시선이다. 과장이나 국장과의 관계, 평소의 신뢰가 평가에 작용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평정이 끝나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또 다른 평가의 시작이 되기에 대부분 침묵한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그물 속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암묵적으로 승진 순서나 근속연수에 맞춰 순위를 정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직장의 평화는 그렇게 유지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근무연수가 짧은 이들에게는 차가운 물을 끼얹는다.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싹튼다. 어차피 순서가 정해져 있다면 왜 심장을 불태우는가. "언젠간 네 차례가 온다"는 위로는 이상하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시간을 기다리라는 말은, 현재의 열정을 접으라는 말처럼 들린다.


술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금부터 챙기라는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내 평정 순위가 순리대로 되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순리란 후배에게 밀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 순위가 궁금해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평정 업무를 담당하는 주무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평정 결과 어떻게 됐어요?"


"순위는 제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국장님의 함구령이 있었습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사이인데도 거절했다. 목소리가 단호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손이 차가워져 있었다. 혹시 내가 예상 밖으로 밀린 걸까.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일어나 물을 마시고 다시 누웠다. 평정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내가, 막상 결과를 알 수 없게 되자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스템에 더 깊이 길들어져 있었다.


며칠 뒤, 국장실을 찾아갔다. 평정 순위를 물었다. 국장은 승진일을 기준으로 했고, 승진일이 같으면 시청 전입일을, 그다음은 나이를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내가 짐작하던 순위였다. 안도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고 청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햇살이 따스했다. 광장의 은행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노랗게 물든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평가하지 않아도 저 나무는 제 계절을 알고 물든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순위 같은 것 없이도 자기 리듬을 유지한다.


퇴직한 선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국장이던 부구청장이던 퇴직 후에는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직급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관계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뿐이다.


공로연수를 제외하면 내게 4년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 숫자로 줄 세우는 평정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내 안에 무언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위가 아닌, 살아온 날들의 온기로 기억될 수 있도록.


창가로 바람이 들어온다. 평정의 계절은 내년에도 돌아올 것이다. 그때 내 마음이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오늘은 은행나무를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저 나무처럼, 제 계절을 알고 물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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