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말의 배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부산자살예방센터의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 출입문 위에는 붉은 글씨로 ‘무슨 숫자로 보이시나요?’라는 문장이 있었고, 바로 옆에는 초록색과 갈색 점으로 이루어진 숫자 ‘109’가 붙어 있었다. 오른쪽 출입문에는 ‘고민하지 말고 연락주세요. 자살예방상담전화 109’이라는 문구가 이어졌다.
객실 안에는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며 내는 낮은 소음과 희고 일정한 밝은 형광등 불빛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거나 눈을 감고 있었고, 간혹 문 위 광고판에 잠시 시선을 두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한동안 그 숫자를 바라보았다. 낯익은 숫자였지만, 시선을 쉽게 떼기 어려웠다.
시에서 민간의 대학병원에 맡겨 운영하는 자살예방센터가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숫자 하나로 말을 건다는 발상, 짧은 문장 하나로 “당신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을 전한다는 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혹시 색각이상이 있는 시민이 이 광고를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고 효과가 높은 출입문 위, 누구의 눈에도 잘 띄는 자리였지만 색을 구분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그 숫자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무슨 숫자로 보이시나요?’라는 문장이 그들에게는 ‘나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하는 말이 되지는 않을까. 같은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무심한 벽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자살예방센터는 분명 좋은 뜻으로 이 캠페인을 기획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의가 언제나 배려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색각이상자에게 이 한 장의 광고는 소외로 다가올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핍을 확인시키는 장면이 될 수도 있다. 생명을 이야기하는 메시지라면, 그만큼 더 섬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시청에서 정신건강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 부산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0.3명으로 전국 평균보다 높았고, 이들 자살자의 세 명 중 한 명은 노인이었다. 노인 인구가 타 지역에 비해 많은 부산의 고심이 깊다. 노인은 젊은 사람에 비해 자살률이 세배나 높기 때문이다. 관심 받지 못하는 노인들의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과 경제적인 어려움, 질병이 그들의 삶을 짓누런다. 숫자는 언제나 냉정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사람의 체온을 느낀다.
부산시는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조금씩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에는 관련 조례를 고쳐 자살예방이 특정 부서의 일이 아니라 시 전체와 민간이 함께하는 공동의 과제가 되도록 할 예정이다. 자살예방센터의 인력도 보강해 노인 자살예방사업에 더 집중하고, 자살률이 일반인에 비해 이십배나 높은 자살 유족에게는 심리지원과 법률서비스, 특수청소 등 생활을 함께 돕는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또 지역에서 서로가 이웃을 돌보는 생명존중안심마을을 늘려 시민 스스로 생명을 지킬 힘을 키워가려 한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늘 마음이 조심스러워진다. 숫자를 줄이는 것이 곧 생명을 지키는 일일까. 정책이 닿지 못하는 그 한 사람의 마음은 누가 안아줄 수 있을까. 행정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결국 필요한 건 사람의 손길이라는 것을, 나는 이 일을 하며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그 광고가 떠올랐다. 숫자를 묻는 짧은 문장 속에는, 마음의 색을 잃은 이들이 잠시 눈길을 멈추길 바라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 뜻을 생각하니 더 애틋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원안의 숫자가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한 작은 배려가 덧붙여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보기를 바라는 문장이라면, 한 단어라도 더 따뜻하게 다듬는 정성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명을 다루는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한 줄의 광고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남겼다. 누군가의 생명을 붙잡으려는 노력 속에서도 때로는 누군가의 마음을 놓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마음을 다시 붙잡는 일은 제도나 예산의 크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향해 내미는 손끝의 온도에 달려 있음을.
생명을 지킨다는 건 숫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보는 일이라는 걸, 그날 아침 나는 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