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나는 고개를 숙였다.
교실에서 몽둥이는 일상이었다. 선생님은 설명도 없이 매질을 했다. 들고 있던 막대기로 손바닥이나 허벅지를 내리치는 것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손으로 뺨을 치는 것도 훈육이라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유를 따지거나 항의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중학교 때 체육 선생님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50센티 정도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몽둥이를 들고 다녔고, 그 몽둥이는 선생님이 걸어가는 복도마다 둔탁한 메아리를 남겼다.
중학교로 진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았던 어느 점심시간, 나는 공사장에서 주운 작은 타일 조각 몇 개를 책상 위에 세워두고 도미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시끄럽지도 않았고,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복도를 순찰하듯 걷던 체육 선생님이 교실로 성큼 들어와 아무 말 없이 나를 불러 세웠다. 손바닥을 내놓으라고 하더니, 그 몽둥이로 기운차게 숫자를 세면서 사정없이 내리쳤다. 열대인지 스무 대인지 하여간 많이 맞았다. 벌겋게 부어오른 내 손바닥을 보면서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물었다. "왜 맞았노?"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내가 왜 매를 맞았는지 몰랐으니까.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집은 강서구 대저였고, 학교는 해운대였다. 통학에 소요되는 시간을 아끼고, 그 시간만큼 공부에 집중하겠다는 마음으로 기숙사 입소를 자처했다. 그러나 곧 그곳이 단순한 숙소가 아니라 규율과 위계가 지배하는 또 하나의 군대임을 깨달았다.
기숙사는 전교생 2,700명 중 약 1,500명이 생활하던 곳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동 모두 여섯 개의 중대로 편성되었고, 중대를 묶어 대대를, 대대를 묶어 연대를 편성했다. 3학년은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등의 계급을 맡아 지휘했으며, 일과가 끝난 저녁 복도 점호 시간이 되면 "중대 차렷!", "인원 보고!" 같은 군대식 구호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교복 왼편에는 각자 소속된 중대 마크를 손바느질로 꿰매 달아야 했다.
사감은 자신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채명신 장군의 부관이었다는 이야기를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머리는 짧은 스포츠형이었고, 체형은 군 시절의 박정희를 연상케 했다. 그의 통제 아래 기숙사는 군대처럼 움직였다. 점호는 매일 저녁 빠짐없이 있었고,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주어진 외박에서 중대원이 복귀하지 않거나 늦어지면,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중대 전체가 연대책임을 지고 엎드려뻗쳐 자세에서 밀대 걸레 자루로 몇 대씩 매를 맞아야 했다.
그때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매를 맞을 때마다 "감사합니다"를 외치던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어쩌면 진심으로 자신이 잘되라고 때리는 것이니 감사하다고 말하는 게 옳다고 믿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배웠을 수도 있다. 어떤 날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줄빠다'라며 중대장들이 위층부터 내려오며 돌아가며 아이들을 매질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유를 묻지 않는 폭력, 저항을 허락하지 않는 체벌이 우리가 살던 세계였다.
그 시절 학교는 폭력과 위계의 질서로 운영되었다. 몇몇 아이들은 무리를 지었고, 무리에서 벗어난 아이들은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무리 중 하나와 다툼이 생기면, 다수가 함께 보복에 나섰다. 그 폭력은 조직적이었고 대항하기 어려웠다.
2학년 때, 우리는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다. 불국사 근처에는 한 방에 서른 명 정도 들어가는 여관방이 많았다. 아이들은 반별로 뭉텅뭉텅 방을 배정받았고, 우리는 방 두 개에 한 반이 나눠 들어갔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아이들은 쉽게 조용해지지 않았다. 카드놀이를 하거나 장난을 치며 웃어대는 무리가 있었고, 말뚝박기를 하거나 '인디어밥' 같은 놀이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기숙사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날 밤, 불 꺼진 방 안에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0000, 어딨어?" 세 살은 더 많다고 소문이 돌던 옆 반의 한 아이가 앞장섰고, 그의 뒤로 서너 명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낮에 있었던 사소한 말다툼을 빌미 삼아 우리 방에 들이닥친 것이다. 덩치 큰 그 아이가 "이 자식 맞지?" 하고 손가락질하자, 다른 아이가 뺨을 후려쳤다. 욕설이 이어졌고, 방 안은 정적에 잠겼다. 누워 있던 아이들 중 몇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무리 중 하나가 외쳤다. "대가리 들지 마라. 다 엎드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숨소리조차 억눌린 방 안에서 우리는 모두 깨어 있었지만, 아무도 눈을 뜨지 않았다. 한참 뒤 그들이 물러가고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는 척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그 방 안의 모든 아이가 침묵에 기대어 공범이 되었음을 말이다. 우리의 죄명은 방관이었다.
그들은 고작 서너 명이었다. 우리가 맞서기만 했더라면, 충분히 쫓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익숙한 공포, 침묵, 체념이 우리를 폭력에 무력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훈련되었다. 뺨을 맞은 친구는 그 일 이후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냈고, 우리 역시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해는 1987년이었다.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최루탄을 맞으며 민주화를 외쳤다. 한 청년이 머리에 직격탄을 맞고 숨졌고,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수많은 이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결국 군부는 굴복했고, 그렇게 대통령 직선제는 쟁취되었다. 거리로 나선 이들이 사회를 진일보시켰고,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나는 오래도록 의문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어쩌면 우리와 비슷하거나 더 혹독한 권위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이 어떻게 그토록 다를 수 있었을까. 그들도 우리처럼 매질당하고, 순종하라고 배우고, 침묵하라고 훈련받았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우리에게 없던 무언가가 있었을 지 모른다. 부당함에 맞서는 것이 옳다고 가르쳐준 어른이 있었거나 폭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친구들이 곁에 있었을지도. 아니면 단순히 개인의 기질 차이였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태생적으로 불의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니까.
최근, 고등학생 세명이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다. 온라인 신문기사에 달린 댓글 중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맞으면서 컸는데, 요즘 애들은 너무 곱게 자라서 정신력이 약하다." 그 댓글을 쓴 사람도 아마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이였을 것이다. 폭력이 당연했던 교실, 모두가 고개를 숙이던 시절. 그러나 그런 시절을 겪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의 아이들을 나약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하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폭력을 미화하거나 필요악으로 여기는 시선은, 과거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화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시절이 단단해서 버틴 시대가 아니라, 숨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는 것을. 폭력은 결코 교육이 될 수 없고, 억압은 질서가 될 수 없다. 그런 시대는 우리가 향수를 품을 과거가 아니라, 넘어서야 할 시간이다.
그 시절의 나는 너무 어렸기에 침묵했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현실을 안다는 것은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도 그 밤을 떠올린다. 그날, 우리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우리가 함께 맞섰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는 폭력에 맞서 이기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경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딛고 목소리를 내는 힘이 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조금 더 일찍 서로를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