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혜가 아닌 권리, 설명이 아닌 실현
회의는 오후 두 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보다 약 15분 일찍 도착했다. 면담은 시청 건너편 국민연금공단 건물 안에 위치한, 장애인 디지털 교육기관의 회의실에서 진행되었다. 건강정책과장, 가족건강팀장, 그리고 나는 정신건강팀장으로서 함께 자리했다. 우리를 맞이한 장애인복지과 직원들이 지정된 좌석으로 안내하고, 진행 순서를 간단히 설명했다.
나는 올해로 공직생활 33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회의와 면담을 경험해 왔지만, 시장 면담을 앞두고 장애인단체와 먼저 마주 앉아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장애인 단체와의 면담은 늘 조심스럽다. 이 사안은 집행부 전체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시청이 약자인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곧 행정의 진정성을 평가받는 기준이 되곤 한다. 준비가 부족하거나 단체 측이 서운함을 느끼는 일이 생기면, 언론의 질타로 이어질 수 있고, 때로는 윗선의 질책까지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설명을 하려던 자리가 어느새 해명을 요구받는 자리가 되는 일도 흔하다.
당초 참석 예정이었던 장애인 대표는 여덟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다섯 명만이 참석했다. 회의는 전직 시의원이자 현재 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를 운영하는 한 분이 주도했다. 옆자리에는 전국 규모 인권단체의 부산 대표가 앉아 있었고, 뇌병변 장애인을 대표하는 한 분, 그리고 기타 신체장애인을 대표하는 두 분이 함께했다.
정신장애인을 위한 요구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됐다. 당사자들이 운영하는 자립 공간에 대한 예산 지원, 병원이나 재활시설이 아닌 지역사회 내 주거 공간 확대,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조례 제정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요구’가 아니라 ‘기초’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겐 정책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생존이었다.
회의를 이끌던 분이 갑자기 물었다. “작년 9월에 복지부에서 주거지원 관련 공청회를 열었는데, 시에서 참석하셨나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마치 의회에서 집행부를 당황시키기 위해 준비한 돌발 질문처럼 느껴졌다. 겉보기엔 단순한 사실 확인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이 사안을 시가 얼마나 중요하게 보고 있느냐’는 질문이 숨어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춘 뒤 솔직하게 말했다. “올해 1월에 이 부서로 발령받았기 때문에, 당시 상황은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어서 법령 개정이 진행 중이라는 점, 서울보다 늦은 점은 아쉽지만 개선을 위해 지켜보고 있다는 점, 현재도 청년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공공임대주택과 행복주택이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차근히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 시가 병원 퇴원 예정인 환자가 지역사회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돕는 '희망노크' 프로그램을 15년째 운영 중이라는 사실도 소개했다. 최근에는 지역 내 비영리단체가 복지부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오는 7월부터 정신장애인을 위한 쉼터를 운영할 예정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한 분이 “6년 전에도 같은 요구를 들고 이 자리에 왔어요. 그때 계장은 ‘그건 센터에서 하고 있어 내용을 잘 모릅니다’, ‘검토해 보겠습니다’만 반복했죠. 우리가 뭘 이야기해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솔직히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네요. 설명도 구체적이고, 책임지고 해보려는 자세가 보여서… 기대가 됩니다.”
이어 가족건강팀장이 장애인 단체의 질의에 답변을 했다. 그는 장애인단체 측의 질문에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답변을 이어갔다. 가장 큰 관심사는 장애인을 위한 치과병원 설립 문제였다. 현재 부산에도 몇 곳의 구강진료센터가 운영되고 있지만, 중증장애인을 위한 마취 진료나 긴급 대응이 가능한 시설은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한계가 제기되었다. 그 외에도 건강주치의 제도의 확대, 방문 건강관리 서비스, 병원 내 편의시설 부족, 건강검진기관 확대 등 다양한 건강권 이슈가 논의되었다. 팀장은 각 항목마다 현재 추진 상황과 향후 계획을 설명했고, 단체 측도 그 태도에 공감하는 눈치였다.
장애인단체는 특히 서울에 두 곳이나 운영 중인 전문 치과병원 사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장 후보의 공약으로 이 사안이 채택될 수 있도록 후보 캠프에 요구할 계획이라며, 관련 자료를 시에서 정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시간 반 가까이 이어진 면담은 생각보다 차분하게 마무리되었다. 거친 말도, 감정의 충돌도 없었다. 마지막에는 서로 수고했다는 말을 나누고, 앞으로 더 자주 소통하자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을, 누구에게나 닿도록 하는 것. 그것이 권리이고, 행정이 해야 할 일이다. 시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기본을 되찾는 일일지도 모른다.
정책은 계획과 수치로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진짜 도움이 되는지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병원에 가기 쉬운지,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 불편한 몸으로도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런 일상의 장면에서 행정의 실효는 드러난다.
그날의 진짜 깨달음은 따로 있었다. 오늘 나는, 사람을 만났다. 수치와 계획서 너머에 있는 실제의 삶, 정책 뒤에 숨어 있던 얼굴들을 보았다. 그들의 간절함이 내게 닿던 순간, 나는 행정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제도는 천천히 움직이지만, 사람들의 필요는 늘 지금이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