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18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 그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삶을 다시 앞으로 밀어내는
조용하지만 강한 결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생각으로는 잘 안다.
움직여야 하고, 걸어야 한다는 걸.
하지만 그걸 실천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어느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린다.
몸이 아파서라기보단 마음이 무너져서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걷는다는 건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결의이고,
그 자리에 머물러 부정적인 생각에 갇히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우리의 뇌는 효율을 추구하기에 변화를 꺼리지만,
바로 그 변화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진료실에 들어선 어머님은 이미 수차례 시술을 받고,
수술까지 했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속이 뭉개지는 것 같아요. 이젠 인생에 낙이 없어요. 제발… 안 아프게만 해주세요.”
그 말에 담긴 고통의 농도는 내가 어떤 설명을 붙이기엔 조심스러웠다.
“어머님, 안 그래도 힘든 일이 많으셨을 텐데 여러 치료를 해도 낫지 않으니 얼마나 지치고 절망스러우셨을까요…”
어머님은 물었다.
“저는 왜 이런 걸까요?”
그 물음 앞에서 나는 진료실이라는 공간이 삶의 한복판과 얼마나 가까이 닿아 있는지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기회는 아직 있습니다. 회복의 문도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다만, 그 문은 어머님이 직접 열어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게 잘 안 될 땐, 저를 기꺼이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걷고 뛰는 일이 회복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의심하거나, 혹은 막연히 알지만 실천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이미 수없이 일어나보려 애썼고,
그때마다 또 주저앉았던 기억이 몸보다 먼저 마음을 붙잡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게 된다.
하지만— 그 마음마저도 사실은 ‘포기’라기보다는 지치고 다친 ‘의지’일지도 모른다.
“어머님, 혹시 평소 어디에서 주무시나요?”
“바닥에 요를 깔고 자요.”
“그건 허리 회복에 좋지 않습니다. 허리는 자연스러운 곡선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TV는 어디에서 보세요?”
“그냥 바닥에 앉아서 봅니다.”
“그 자세가 디스크에 부담을 주고 신경통을 악화시킬 수 있어요. 혹시 신발 신는 자세,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어머님은 천천히 허리를 바닥 쪽으로 접었다.
순간, 어떤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좋을지 잠시 망설여졌다.
일상 속에서 통증을 악화시키는 습관들이 생각보다 많지만,
그 사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환자에게 과하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닿을 수 있을지.
“이제부터는 허리를 숙이지 않도록 해주세요. 허리를 세우고, 매일 조금씩 걸어보세요. 회복은 거기서 시작됩니다.”
이쯤 되면 대부분의 환자는 일종의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
누구는 절망감, 또 누구는 체념 같은 감정이 밀려온다.
대부분은 이런 반응을 보인다.
“아… 모르겠어요. 시술부터 해보고, 안 되면 재수술이라도 받아야겠어요.
저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이 말이 곧 진심은 아닐 수도 있다.
이미 수차례 일어나보려 애썼고,
도전도 해봤지만, 남들만큼 잘되지 않았던 실패의 연속 속에서
자신의 노력은 어느새 ‘게으름’처럼 오해받았고,
그 과정에서 쌓인 좌절은 이제 다시 일어서는 걸 더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이 깊은 절망감 속에서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사실, 위와 같이 행동문제마다 하나씩 교정하는 것으로만 끝이 나면
치료가 아니라 훈계가 되고,
도움이 아니라 잔소리처럼 들려 환자에게는 더 큰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기 쉽다.
하지만 넘어서야 하는 벽을 함께 인지하고,
그 다음 한 걸음을 의사와 환자가 함께 내딛는 것—
그곳에서 진짜 회복이 시작된다.
걸음은 허리디스크나 체중 조절 같은 신체적 이점만 주는 것이 아니다.
그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다는 내면의 다짐이고,
마음에 고인 물을 다시 흐르게 하는 시작이다.
우리가 걷는 방향은 항상 ‘앞’으로만 나 있다.
신체의 구조도, 인생의 길도 그렇다.
때로는 돌아볼 수 있겠지만, 걸어야 할 방향은 결국 앞이다.
그 앞을 향해 지금, 한 걸음이라도 내디디는 것.
그것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조차 우리에게 남는 힘이 된다.
젊은 날엔 학벌이나 직업, 외모로 누군가를 말하지만,
늙어가며 점점 ‘일어날 수 있는가’ ‘걸어갈 수 있는가’로 사람은 설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혹시 지금, 주저앉아 있다면— 다른 이의 걸음이 아닌 내 앞에 놓인 길을 먼저 바라보자.
그리고 마음이 흔들릴 땐,
세상이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단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충분하다.
회복은 스스로를 믿는 작은 용기에서 시작된다.
회복은 단순히 걷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매일 같은 시간에,
내 몸과 마음을 다시 일으켜 걸음을 내딛는 그 꾸준함 속에 있다.
일어나, 함께 걷기를 소망한다.
“If you’re going through hell, keep going.”
“당신이 지옥을 지나고 있다면, 계속 걸어가라.”
— Winston Churchill (윈스턴 처칠)